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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기, 하늘에서 본...
바람, 돌, 여자가 많은 곳 하면 으레 제주도를 떠올리지만 소백산 아래 풍요로운 터, 豊基에도 바람, 돌, 여자가 많아 한때는 '뭍의 三多島'로 불려졌었다. 나고 자란 터라 바람은 곧 일상이었다. 그래서일까, 한겨울 소백산 등줄기를 훑는 칼바람은 매섭다기보다 오히려 톡쏘는 맛으로 익숙하다. 풍기읍을 끼고 흐르는 남원천 바닥엔 지금도 온통 돌무더기이지만 신작로를 걸어 통학하던 시절, 트럭엔진소리만 들려도 화들짝 놀라 미류나무 뒤로 몸을 피해야만 했다. 달리는 바퀴에서 튕겨져 나오는 돌을 피하기 위해서다. 이처럼 문밖을 나서면 옷깃을 스치는 건 바람이요, 발길에 채이는 건 돌멩이였다. 나머지 하나, 여자가 많다는 대목에서 대개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된다. 그렇다면 무슨 연유로 소백산 아래 소읍, 풍기에 직물공장이 이처럼 번성할 수 있었을까? 풍기는 거란이나 몽고의 침입 때도, 임진왜란 때도, 심지어 6.25 때도 큰 피해가 없었다. 그 중에서도 명주(明紬)의 본고장이었던 평안도 사람들이 주를 이루었다. 한복 안감으로 쓰이는 인견직을 짰다. 이것이 '풍기인견직'의 시초다.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을 맞으면서 '풍기인견'은 전국 대도시로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풍기의 인견직은 다시 한 번 날개를 달았다. 급증한 인견직의 수요를 감당하느라 공장마다 24시간 3교대로 풀가동해 직기음은 주야장천 멈출 줄 몰랐다. 교대시간이 되면 조그만 읍내는 여직공들로 넘쳐났다. 내 기억 속에도 직물공장에 관한 편린이 남아 있다. 1969년쯤으로 기억된다. 철문을 열고 들어서면 자지러질듯 요란한 직기음이 와락 달려 들었다.
1959년 풍기 직조공장
요즘들어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유는 그것만은 아니었던 것도 같다. 까까머리 중학생 눈에는 이들 모습이 백옥같은 천사로 비춰졌을 게다.
그래서였을까, 행여 눈이라도 마주치면 귓볼이 달아올랐던 기억 또한 지금껏 또렷한걸 보니 '사하라특공대'는 빌미였고 관심은 엉뚱한데 있었던게 아니었나 싶다. 각설하고, 이처럼 풍기 인견은 오랜 역사적 배경과 애환을 간직하고 있다. 땀 흡수가 빠르고 정전기가 없어 여름철 옷감으로 각광 받아왔다. 그러나 70년이 넘는 역사에도 불구하고 내수시장과 계절상품에만 맴돌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2007년부터 새로운 원단 제직 기술을 개발하고, 제품 디자인 및 패턴을 개발하여 글로벌화 하려는 노력도 곳곳에서 감지된다. 지난해 12월에는 프랑스 의류산업연맹「Jean-Pierre Mocho」 회장이 경북 풍기를 찾아 인견의 우수성을 직접 확인,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현재의 풍기 인견공장
저탄소 녹색성장이 세계적인 화두로 떠오르면서 섬유산업에서도 친환경 소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비전과 로드맵을 마련한 것과 맥을 같이하여 천연소재 '풍기인견'이 대내외적으로 크게 주목받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풍기인견'의 화려한 부활을 소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