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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원자력발전소 기공
경남 양산군 장안면 고리에 건설된 우리나
라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 국내 최초의 원자
력발전소 고리원전(原電) 1호기가 1971년
3월 19일 경남 동래군 장안면(당시 주소)
고리현장에서 기공됐다. 공사 7년 만인 19
78년 4월 29일 처음 상업운전을 시작해 7
월 20일부터 설비용량 58만7000kw로 본
격 가동을 시작했다.
1호기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21
번째, 아시아에서는 일본, 인도, 파키스탄
에 이어 4번째로 ‘제3의 불’을 점화한 나라
로 기록됐다. 1호기에 이어 2호기(1983.
7.25) 3호기(1985.9.30) 4호기(1986.
4.29) 등 고리에서만 4기가 준공돼 현재
가동중이고, 전국적으로는 전남 영광에 6
기, 경북 울진에 4기, 경북 월성에 4기 등
모두 18기의 원전이 가동중이다.
울진에서는 2004년과 2005년 준공을 목
표로 2기가 건설중이다. 인류가 원자력을
이용할 수 있는 단초가 마련된 것은 1942
년 12월2일 페르미가 미국 시카고대에서
핵분열 연쇄반응실험에 성공하면서였다.
▶2010년현암사 조근태 회장 별세
▶2009년대법원, 명의자만 예금주 판결
▶1999년서울시, 버스 토큰 판매 금지
▶1997년네덜란드 태생의 미국 화가 데 쿠닝 사망
▶1996년태아 성감별 의사 자격정지
▶1995년미국 우주왕복선 엔데버호가 16일
15시간의 최장 체류 기록 세우고 귀환
▶1994년박영수 북한측단장, 8차 남북한실무접촉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서울이 불바다가 될 것`이라고 극언
▶1993년비전향장기수 이인모,
판문점 통해 북한으로 송환
1993년 3월 19일 전향을 거부하며 장기수로 복역해 온
이인모 노인이 남한 정부의 인도적인 배려에 의해
북으로 송환되고 있다. 판문점 중립국 감독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부인 등 북측의 가족들과 42년만에
상봉했다.
비전향장기수인 이인모씨(76)가 19일 판문점을 통해 북한으로 송환됐다.
이씨는 이날 오전 11시 판문점 중립국 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북측에 인계돼 평양에 거주하고 있는 부인 김순임씨(66)와 딸 현옥씨(44) 등과 재회, 42년 7개월만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송환을 하루 앞둔 이씨는 18일 입원중인 부산대병원 내과 병동 932호실에서 치료와 휴식을 취하며 남한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이날 병원측의 요구에 따라 일반인의 면회를 사절한 이씨는 지리산 빨치산 출신 정순덕씨 등 10여명의 장기수 출신들만을 만난 뒤 밤 9시 10분쯤부터 잠자리에 들었다. 이씨의 마지막밤에는 그동안 간병을 해온 김상원씨(51)의 자녀 2명과 장선화씨(25.여), 부경총련 소속 대학생 2명이 함께 했다.
면회를 마친 장기수들과 20여명의 학생-재야인사들은 19일 새벽 이씨의 전송을 위해 병실 부근 세미나실과 복도에서 밤을 샜다. 이에 앞서 김씨 등 간병인들은 이날 오전부터 통일원-안기부 등 관계자의 입회하에 가방에 재야단체 회원 등으로부터 받은 선물들을 챙겨 넣었다.
민가협 부경총련 등 재야단채 회원과 대학생 1백50여명은 이날 밤 10시쯤부터 부산대병원 안 의과대 학생휴게실에서 철야 통일기원 집회를 갖고 이씨의 출발에 맞춰 환송대회를 열 준비 를 했다.
이씨는 19일 오전 6시 30분쯤 그동안 치료를 받아오던 부산대병원을 출발, 헬기를 타고 이동해 10시 20분쯤 판문점 남측지역 평화의 집에 도착했다.
▶1992년영국 앤드루왕자와 퍼커슨왕자비 이혼 공식발표
▶1992년이승만 전대통령 미망인 프란체스카 여사 사망
이승만전 대통령 미망인 프란체스카(Francesca Donner Rhee) 여사 서울 종로구 이화동 이화장에서 사망 향년 92세(1900년 6월 15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빈에서 출생~)두 번째 아내로, 한번 결혼했으나 이혼했고, 1931년 빈 회의에 참석차 오스트리아를 방문한 이승만과 만났다가 그와 재혼하였다.
▶1991년이해방 박사,
인슐린 피부투여법 세계최초 개발
▶1989년알프레도 크리스티아니,
엘살바도르 대통령 당선
▶1989년이열우 WBC 라이트플라이급 세계챔피언 획득
▶1987년일본 AIDS 예방 치료약 VFC-A개발
▶ 1984년 오늘,
미국 핵발전소 폭발
1979년 3월28일 새벽4시,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스리마일 섬. 원자력발전소에서 경보가 울렸다. 가동 4개월째인 2호기의 냉각수 급수 펌프 파손 때문이다. 냉각수가 식혀주지 못한 원자로 온도가 2,200℃까지 치솟으며 노심 내 연료봉이 녹아버렸다.
대규모 인명 피해를 우려한 주당국은 주민들을 대피시켰다. 다행스럽게도 인명 피해는 없었다. 발전소 근무자 200여명이 병원 진단을 받은 정도다. 방사능 물질이 격납건물 안에 갇혀 환경 피해가 전무하다는 공식 발표가 나왔지만 미국은 충격에 빠졌다. 설계 결함이 원인이라는 보도가 나오고 비슷한 원자로도 많았기 때문이다.
피해도 컸다. 원전 건설 비용만 20억달러. 해체에도 10억달러가 들어갔다. 사고 진위 공방전도 일어났다. 환경단체들은 발표와 달리 가축 피해가 발생했고 암 발생률도 높아졌다며 반발했다. 논란은 요즘도 계속되고 있다. 분명한 점은 이 사고로 미국의 신규 원전 건설이 25년간 중단됐다는 사실이다.
석유 가격도 뛰었다. 마침 이란 혁명으로 중동산 석유공급이 줄어들던 시점에서 원전의 추가 건설마저 물건너가자 세계는 2차 석유위기에 빠졌다. 한국도 마이너스 성장이라는 아픔을 겪었지만 뜻하지 않은 소득을 챙겼다. 일감을 잃은 미국 원전회사들이 한국을 잡기 위해 ‘무한정 기술제공’이라는 당근을 제시한 것. 한국이 원전 설계에서 시공ㆍ감리까지 기술을 습득한 것도 스리마일 섬 사고의 반사이익 덕분이다.
스리마일 섬 사고 28주년. 역사는 다시 바뀌고 있다. 고유가와 자원고갈에 대한 해법으로 미국이 원전 건설을 재개하고 중국은 대규모 원전계획을 추진 중이다. 거대한 시장에서 한국의 몫은 얼마나 될까.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들린다.
▶1982년서울올림픽 범시민추진위 구성
▶1981년한국청소년연맹 발족
▶ 1980년 3월19일 전국 우량아 선발 대회
1980년 3월19일자 경향신문 1면 광고란에 실린 ‘문화방송·◇◇분유 주최 전국 우량아선발대회’ 홍보 문구는 이렇습니다. “모두가 부러워 할 어머니가 되실 기회예요. 맘껏 자랑해 보세요. ◇◇유업에서는 이 나라의 주인공이 될 2세들이 바르고 슬기롭게 잘 자라고 있는지 발육상태를 점검하고 육아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자 매년 전국 우량아 선발대회를 개최하고 있읍니다. 올해도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건강하고 영리한 아기들의 더욱 많은 참가를 바랍니다”
참가자격은 ‘만10개월 이상~24개월 미만의 아기’. 서울·경기를 비롯한 10개 지역 문화방송에서 접수를 받는다는 대목을 통해 전국적인 대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왼편에는 전년도 수상자들의 사진이 실려 있습니다. 문화방송과 경향신문, ◇◇분유회사가 함께 주최한 ‘전국 우량아선발대회’는 1971년 시작돼 1983년까지 이어졌습니다. 13년간 참가한 연인원은 2만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1961년 경향신문에 실린 광고 | 경향신문 자료사진
사실 우량아선발대회는 1970~80년대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일제시대에 기독교 선교사들이 가장 먼저 시작했다고 합니다. 관련 연구에 따르면 1910년~1930년대에 아동의 발달 상태를 측정하고 순위를 매기는, ‘우량아선발대회’와 유사한 행사들이 미국 전역에서 유행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 한국에 들어와 있던 선교사들이 비슷한 종류의 대회를 열었던 겁니다. (‘1910년에서 19130년까지 미국과 한국에서의 베이비 쇼에 관한 소고’ 이현주 이화여대 박사후과정 연구원)
미국에서 우량아 콘테스트(베이비 쇼)가 유행한 이유에 대해 이현주 연구원은 “1910년 중반까지 아동의 건강이 국가의 미래를 좌우한다는 믿음이 널리 퍼짐과 동시에, 높은 유아사망률에 대한 정치적·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이 연구원에 따르면 1915년 미국아동국은 전국 규모의 대대적인 ‘우량아’(Better Baby) 캠페인을 시작했다고 하네요. 하지만 이런 캠페인과 행사는 미국 내에서 다양한 비판을 받게 됩니다. 우생학적 접근이라는 비판이 가장 거셌습니다.
한국에선 우량아선발대회가 1920년대에 본격적으로 열리기 시작했는데요, ‘일제강점기 우량아 양육과 우유·연유·분유의 상륙’(이은희 가천대 연구교수)에 따르면 대회 주최세력은 크게 두 부류였습니다. 초반에는 주로 기독교 선교사들이 대회를 열었지만 나중엔 조선총독부 같은 식민권력도 주최자나 후원자로 나섰습니다. 이를테면 1928년 9월 ‘쇼와 천황 즉위 기념 유유아(乳幼兒) 심사회’가 열리는 식이었습니다.
이은희 교수에 따르면 애초 일제는 우량아선발대회를 주로 한국에 들어와 있던 일본들을 대상으로 개최했습니다. 하지만 1930년대에 중일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전쟁에 동원할 인구가 부족해지자 일제는 ‘조선인 영유아’를 “관리해야 하는 2세 국민”으로 여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시기 열린 우량아 선발대회는 이전보다 규모가 훨씬 컸다고 하네요. 일본인 관리들은 “(일본인·한국인) 다 같이 참가”를 독려하기도 했습니다.
광복과 한국전쟁을 거친 후 우량아 대회의 바통을 이어받은 건 유제품 제조 업체들이었습니다. 가난의 아픔 속에서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만은 포동포동하게 자라길 바랐습니다. 분유업체들이 이런 열망을 자극하면서 대회를 열었던 겁니다. 그리고 이런 대회를 통해 모유가 아닌 분유·우유가 영유아의 발달에 더 좋다는 인식을 심어주고자 했습니다.
아이를 미래의 국가 자원 혹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존재로 바라봤던 박정희 정권의 분위기도 우량아 대회 열풍을 키웠습니다. 육영수 여사가 우량아 선발대회에 참석해 참가자들을 격려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1980년대 초반 경제가 발전하면서 우량아 대회는 점차 자취를 감췄습니다. 오늘 소개한 문화방송과 한 분유회사의 ‘전국우량아선발대회’ 역시 1983년의 대회를 마지막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우량아 선발대회, 그저 추억 거리로만 삼기엔 복잡하고 미묘한 역사적 함의가 있는 과거입니다.송윤경 기자 kyung@kyunghyang.com
▶1975년북한 제2땅굴 발견
철원 제2의 땅굴
▶1975년국회, 외국인 상대의
반국가언동을 규제한 형법개정안 통관
▶1973년박정희 대통령,
헌법위원회 구성하고 위원장에 김현철씨 임명
▶1970년동ㆍ서독 첫 정상회담 개최
동독의 에어푸르트 역에 도착한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오른쪽)를 빌리 슈토프 동독 총리가 영접하고 있다.
▲1970년 3월 19일 동·서독 정상 회담을 위해 동독 에어푸르트역에 도착한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왼쪽)를 빌리 슈토프 동독 총리가 영접하고 있다.
제2차대전 후 미소 양국에 분할 점령되면서 적대시해 온 동서독이 1970년 3월 19일 동독국경의 소도시 에르푸르트에서 정상회담을 가졌다.
1949년 동서독 국가탄생 이래 첫 정상회담으로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동독을 방문했다. 이번 방문은 1966년 빌리 브란트가 대연립 부수상 겸 외상이 된 이래 전개해 온 동유럽 제국과의 관계개선을 목적으로 한 ‘동방정책’의 일환이었다.
1969년 10월 브란트 총리는 취임연설에서 “독일에 2개의 국가가 존재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서로 외국이 아니다. 두 국가는 단지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며 소위 ‘2국가론’을 제기했다. 이는 기존의 외교원칙인 '할슈타인원칙(동독과 외교관계를 맺은 나라와는 외교단절도 불사한다)'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야당은 반통일노선, 분단 고착화, 매국행위라며 비난하고 나섰다.
한편 서독과의 접촉을 체제 위협 요소로 생각한 동독의 울브리히트 정부는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지만, 당시 미국과 중국의 접근에 위협을 느낀 소련은 유럽의 긴장완화 및 2차 대전 후 설정된 새로운 국경선에 대한 국제적 인정 확보 등을 위해 서독의 협조가 필요했던 것이다.
소련의 의도를 간파한 브란트 총리는 1969년 7월 측근인 에곤 바(Egon Bahr) 총리실차관을 모스크바에 파견, 모스크바 조약 체결을 위한 비밀교섭을 진행함으로써 동서독 정상회담에 대한 소련의 지원을 얻을 수 있었다.
마침내 1970년 3월 19일 제2차 대전 후 상호 적대시해 온 동서독이 동독국경의 소도시 에르푸르트에서 정상회담을 가졌다. 1949년 동서독 국가탄생 이래 첫 정상회담으로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동독을 방문했다.
브란트 총리는 동서독 정상회담, 소련과 무력행사 포기 협정 체결,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을 대 동독 정책의 주요 목표로 설정하고 조약으로 규율되는 협력 관계로 나아가기 위한 정부차원의 협상을 동독에 제의했다. 이어 브란트 총리는 빌리 슈토프 동독 총리에게 분단으로 인한 주민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한 회담을 제의했고, 동독은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날 오전 7시 45분 브란트 일행을 태우고 서독의 본을 출발한 열차는 11시간 45분 만에 국경에 위치한 게어스퉁겐역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동독 기관차로 교체한 뒤 에르푸르트를 향했다. 브란트는 그의 이름을 연호하는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회담장소가 에르푸르트와 카셀로 결정된 것은 서독국민의 86%가 베를린 이외 장소에서의 회담개최를 반대했으나 동독의 거부로 불가능하게 되자, 양국 국경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인 에르푸르트와 카셀이 선정되었다.
동서독 간의 정상회담에서 절차문제 등 사소한 부수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가 입장을 고집하지 않고 주최 측의 방식에 따르도록 함으로써 절차문제로 회담이 난항을 겪는 일은 없었다. 예를 들어 동독에서 개최된 정상회담에서는 협상 테이블에 양국 국기를 비치했으나 서독 개최 시에는 국기를 배치하지 않았다.
또 제1차 회담 시 에르푸르트 역 청사에는 "서독연방군을 때려 부수자"라는 현수막이 걸려있었고, 제2차 카셀회담 시에는 회담장 밖에서 서독 극우단체와 극좌단체 간에 충돌이 발생, 극우단체 요원들이 동독 국기를 훼손하고 동독대표들에게 돌을 던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서로가 이를 문제시하지 않아 정상회담은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었다. 그러나 1·2차 정상회담은 여건이 성숙하지 않은 가운데 소련의 종용에 따라 개최됨으로써 서로 간의 견해 차이를 재확인하는 데 그쳤을 뿐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회담은 부드러운 분위기속에서 약 6시간에 걸쳐 진행됐으나 양측의 견해차이는 좁힐 수 없었다. 결국 구체적인 합의점에 도달하지 못한 채 2차 회담을 5월 21일 서독에서 갖는 것으로 결론짓고 회담을 마무리 지었다.
자칫 깨질 뻔했던 동.서독 회담은 이렇게 해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89년까지 모두 네 차례 계속됐다.
서독으로 돌아간 브란트는 기자회견에서 "회담에 앞서 아무런 목표도 세우지 않았다. 2차회담으로 이어가는 게 유일한 목표였다" 고 고백했다. 결국 그는 목표를 달성한 셈이다.
두 차례의 정상 간 만남 이후 10여 년 간 정상회담은 열리지 못했으나 이후 70여 차례 의 실무접촉이 계속 이어져 1972년에는 `동서독 기본조약'이 체결하였고 1973년 9월 유엔 동시가입과 1974년 3월 상주대표부 개설로 서로의 거리를 좁혀나가 양독 관계의 안정적인 평화공존을 실현할 수 있었다.
자칫 깨질 뻔했던 동서독 회담은 이렇게 해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89년까지 모두 네 차례 계속됐다. 정상회담을 위해 서독, 미국, 영국, 프랑스 4개국 협의체와 긴밀한 의견교환을 하는 한편, 국회에 이 문제를 보고해 야당을 포함한 국민적 합의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이후 서독은 동독과의 지루한 협상 과정에서 여행자유화와 상호방문 기회를 확대하고 동서독 간 인적, 물적 교류의 확대를 한결같이 추진했다. 비록 초기의 정상회담 과정에서 획기적인 정치적 타협이 이뤄지지 않았으나 장기적으로 추진한 상호 교류의 증대는 동독사회의 질적인 변화를 초래했으며 이것이 통일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제5차 정상회담은 1981년 12월 11일∼15일까지 독일에 미국 퍼싱Ⅱ와 소련의 SS2O 중거리 핵미사일 배치라는 동서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슈미트 서독총리가 동독의 베르벨린제로 가서 동독 국가평의회의장 호네커를 방문하면서 이루어졌다.
이 정상회담에서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독일에서 두 번 다시 전쟁이 발발해서는 안 된다는 데에 합의하였고, 대내외적으로 독일민족의 민족자결의지를 천명했다. 또한 서독은 동독이 원하는 내독거래와 관련하여 장기저리차관을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이렇게 제5차 정상회담을 통하여 미·소에 의하여 조성된 독일에서의 전쟁분위기는 깨끗이 일소되었다. 물론 1980년대는 통일전 동독주민들의 개혁요구가 여행 및 언론의 자유에서 자유선거 등으로 고조되어 가는데 반해, 동독지도부는 시의적절한 개혁을 거부함으로써 정권의 붕괴를 가속화시킨 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89년 동독인의 서방 탈출 러시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그해 12월 콜 총리와 한스 모드로프 동독 총리 간의 정상회담이 열려 통일 문제에 급진전을 보았다. 이후 1990년 10월 3일 동서독이 통일될 때까지 4차례 정상회담이 더 열려 통일을 완성하는데 정상 간의 만남이 크게 기여했다.
동서독은 1970년 첫 번째 정상회담이 열린 지 20년 만에 통일을 이룩했다.
▶1965년미국 흑인 민권행진
▶1964년베트남-캄보디아 국경서 무력 충돌
▶1962년한국원자력 연구소 `제3의 불` 점화 성공
ㆍ이제 ‘발등의 불’이 된 원전 안전
연쇄적 핵분열은 보통의 화학반응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의 에너지를 방출한다. 이러한 연쇄 핵분열의 반응 속도를 줄이지 않고 일시에 열을 방출하면 원자폭탄이 되고, 반응 속도를 줄여 지속적으로 방출시킨 열로 터빈을 돌리면 전기를 생산하는 원자력발전소(원전)가 된다. 원자력 기술의 핵심은 바로 ‘불 조절’이다.
1962년 3월19일 오전 10시55분, 국내 첫 연쇄 핵분열 실험이 시작됐다. 경기 양주군 원자력연구소(지금의 한국원자력연구원)에 설치된 연구용 원자로 속 핵연료봉 56개에 순차적으로 점화가 이뤄지고 6시간이 흐른 오후 4시45분 원자로 내부의 핵분열 반응은 임계치에 도달했다. 우리나라가 ‘제3의 불’로 일컬어지는 원자력을 조절할 수 있게 된 역사적인 순간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1959년 3월 원자력연구소를 세운 지 3년 만이다. 이날의 성공을 위해 윌리엄 휘트모어 박사 등 미국 연구진과 국내 원자력계 기술자들이 총동원되었고 차관 38만2000달러와 한화 2억8000만원이 투입됐다. 당시 경향신문은 “앞으로 이 원자로에서 생산될 방사성 동위원소는 국내 농학·의학·보건·물리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할 것”이라고 국내 원자력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그리고 만 9년 뒤인 1971년 3월19일에는 경남 고리에 첫 원전이 착공됐고 1977년부터 원자력을 이용해 전력을 생산하면서 한국은 세계 20번째 핵발전국이 됐다. 현재 우리나라엔 21개의 원전이 가동 중이며 국내 사용전력의 25%를 공급하고 있다.
1954년 구 소련에서 세계 첫 원전이 가동된 이후 원전은 문명의 일부가 됐다.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 등 끊임없는 안전성 논란에도 불구하고 원자력 발전은 매장량이 제한된 화석연료(석탄·석유)의 대안으로 반세기 넘게 각광을 받아 왔다. 그 어떤 나라도 원자력이 지닌 싼값에 친환경적으로 전기를 얻을 수 있다는 매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이번 일본 대지진·쓰나미에 의해 부서진 후쿠시마 원전처럼 원자력에 대한 신뢰도 함께 무너져 내리고 있다.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됐을 때만 해도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은 불가능해 보였다. 당시 원자력은 에너지가 아닌 대량살상무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원자력의 위험성은 원전이 또 다른 ‘원자폭탄’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인류에게 희망이었던 ‘제3의 불’이 이제는 ‘발등의 불’이 됐다.
▶1959년반공예술인단 결성
▶1958년유럽경제공동체(유럽연합의 전신)의
유럽의회 출범
▶1957년필리핀 가르시아 부통령, 대통령직 계승
▶1955년북한 아오지탄광 광부 의거
▶1953년서독의회, 유럽군조약 가결
▶1951년훈련시설 부족으로 국민방위군 20만
▶ 1931년 오늘,
미국 네바다에서 도박 합법화
2020년 3월19일
美 확진자 7천명 넘어…라스베가스 카지노도 '스톱'
[앵커]
미국은 하루새 확진자가 천명 넘게 늘자 라스베가스의 카지노 문도 닫았습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트럼프 대통령은 캐나다 국경도 폐쇄했습니다.
유혜림 기자입니다.
[리포트]
라스베거스 관문인 매캐런 국제공항이 텅 비었습니다. 호텔도 영업을 중단했습니다. 네바다주가 사상 처음으로 카지노 영업을 중단했습니다.
스티브 시솔락 / 미국 네바다주지사
"모두에게 참여를 독려합니다. 네바다를 위해 집에 머무세요. 감사합니다."
미국은 확진자가 하루새 1300여명 늘어 7000명을 넘었습니다. 사망자도 117명으로 증가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캐나다 국경을 폐쇄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 미국 대통령
"우리는 사람들이 접촉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확진자가 2000명을 넘은 뉴욕주는 한국처럼 선별진료소를 설치했습니다. 환자 급증에 대비해 미국 서부와 동부엔 대형 군 병원 선박도 한 척씩 배치합니다.
백악관은 한국과 중국은 발병곡선의 끝에 있다며 이를 참고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데보라 벅스 / 미 백악관 코로나19 TF 조정관
"우리는 (유행이)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중국과 한국을 보며 예측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소비를 살리려고 5000억 달러, 우리돈 620조원의 특별 예산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모든 미국인에게 4월과 5월에 각각 천 달러씩을 지급할 계획입니다.
TV조선 유혜림입니다.
▶ 1919년 오늘,
태극기를 앞세운 진주시 기생들이 촉석루를 향해 시위행진을
벌이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일본 경찰은 6명의 기생을 구금했지만 김 향 화 를 비롯한 수원시 기생조합 기생들이 또다시 독립시위를 벌였다. 4월에는 해주시 기생들이 피로 그린 태극기를 들고 시위를 벌였다.
이에 자극을 받은 군중 3000여 명이 시위투쟁을 전개
▶ 1882년 가우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건설 시작
▶ 1813년 탐험가 리빙스턴 출생
리빙스턴 [Livingstone, David, 1813.3.19~1873.5.1]
스코틀랜드의 블랜타이어 출생. 가난하여 글래스고 인근의 방적공장에서 직공으로 일하면서 고학으로 글래스고대학에서 그리스어(語) ·신학 ·의학을 배웠다. 1840년 런던 전도협회의 의료선교사로서 남아프리카에 파견되어, 1841년부터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오지에까지 들어가 전도사업에 진력하였는데, 뒤에는 교역 루트 탐색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1852∼1856년에는 케이프타운을 출발하여 육로로 서안(西岸)의 루안다를 거쳐 대륙을 횡단하여 동안(東岸)의 켈리마네까지 이르러 아프리카 횡단여행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때 빅토리아폭포와 잠베지강(江)을 발견하였다.
1856년 귀국하여 《남아프리카 전도여행기:Missionary Travels and Researches in South Africa》(2권, 1857)를 출간하고, 1858년 켈리마네 주재 영국 영사로 부임하여 니아사호(湖:말라위) 등을 탐험, 인근의 ‘노예사냥’ 실태를 폭로함으로써, 노예무역 금지에 이바지하였다. 1864년 다시 귀국하여 《잠베지강과 그 지류:Zambesi and its Tributaries》(2권, 1865)를 발간하고, 1866년에 다시 아프리카로 건너가 나일강의 수원조사에 착수하였다.
1871년 온갖 어려움을 겪으며 콩고강 지류에 이르렀으나 열병에 걸려 사경에 빠졌는데, 탕가니카 호반의 우지지에서 H.스탠리의 수색탐험대를 만나 극적으로 구출되었다. 그 후 스탠리 일행과 함께 조사를 계속하다가, 1873년 방궤울루호 부근 마을에서 이질(痢疾)로 사망하였다. 이때의 탐험기록은 《중앙아프리카에서의 리빙스턴의 최후 일지:The Last Journals of David Livingstone in Central Africa》(2권, 1874)에 있다.
▶ 1716년 강희자전 완성(청 강희55년)
▶ 1644년 중국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 자살, 명나라 멸망
▶ 1324년 개경, 대화재 발생
▶ ▶ 721년 바빌로니아의 천문학자들, 최초로 개기월식을 사서에 기록
https://youtu.be/TA0jTqz0m-8
출처 네이버지식백과,반가운의hi스토리,솦트리종려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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