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에 나온 것을 바탕으로 한 백제 왕위 계승
5. 초고왕 - 6. 구수왕 - 7. 사반왕 - 11. 비류왕(?) - 13. 근초고왕(?)
8. 고이왕 - 9. 책계왕 - 10. 분서왕 - 12. 계 왕
개루왕 이후에 백제 왕통은 초고왕계통과 고이왕계통이 서로 양립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초고왕계통은 단절되고 고이왕계통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다시 고이왕계통은 비류왕에게 밀려나 결국에는 근초고왕에게 완전히 밀려나게 됩니다.
근초고왕이 초고왕의 후손으로써도 볼 수 있지만 오히려 초고왕계나 고이왕계하고는 전혀 다른 제3의 인물로써 분서왕의 아들이자 고이왕으로써는 증손에 해당하는 계왕을 몰아내면서 자신의 정통성을 믿받침하기 위해 초고왕의 왕호를 빌리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백제 왕통은 고구려나 신라처럼 왕통이 만세일계가 아닌 힘있는 세력에 의해 계속 변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온조왕~사반왕 그리고 고이왕~계왕 마지막으로 근초고왕부터 그 후손들까지 말입니다. 삼국사기에 근초고왕을 비류왕에 둘째 아들로 기록한 것을 보면 혁명을 주도한 근초고왕이나 그 후손들이 자신들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근초고왕을 비류왕의 둘째 아들이라고 기록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정 1 (초고왕과 고이왕은 같은 온조왕의 후손. 하지만 근초고왕은 이들과는 관련없는 제3의 인물)
5. 초고왕 - 6. 구수왕 - 7. 사반왕 - 11. 비류왕(?)
8. 고이왕 - 9. 책계왕 - 10. 분서왕 - 12. 계 왕
(계왕 무렵에서 온조왕 계통은 대가 끊기고 근초고왕에 이르러 왕실 교체가 일어남)
가정 2. (온조왕~사반왕, 고이왕~계왕, 근초고왕~이후는 서로 다른 세력)
1. 온조왕 - 2. 다루왕 - 3. 이루왕(라디오님이 이루왕이라고 하셨더군요) - 4. 개루왕 - 5. 초고왕 - 6. 구수왕 - 7. 사반왕 (온조왕 계통 여기서 단절)
1. 고이왕 - 2. 책계왕 - 3. 분서왕 - 4. 비류왕(? : 비류왕을 고이왕과 같은 계열로 봐야할런지 이건 헤깔리더군요) - 5. 계왕 (고이왕 계통도 여기서 단절)
1. 근초고왕 - 이후 (근초고왕이 등극하면서 왕실이 교체되고 새로운 왕통이 이어나감)
가정 3. (일본서기의 초고왕=삼국사기의 근초고왕)
- 초고왕 즉위년도 166년, 근초고왕 즉위년도 346년입니다. 180년의 차이(60간지를 한 개의 주기로 볼 때 정확하게 3개의 주기이후에 근초고왕이 즉위합니다)로 즉위하고 또 둘다 병오년(丙午年)에 즉위합니다. 그리고 일본서기 신공황후조에 나오는 근초고왕 기록들을 2주갑(120년)정도 내려보고 그 기록에 등장하는 초고왕을 근초고왕으로 봄. 또한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30년조에 박사 고흥에 의해 '서기'라는 역사서를 집필했다는 것으로 보아서 근초고왕 이전의 역사는 좀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 이것은 아래 '소요자'님이 말씀하신 것을 따로 추가하고 내용은 제가 따로 덧붙여 보았습니다.
첫댓글 삼국사기를 보면 초창기 백제왕의 왕호는 사후 특별히 지은것이 아니라 생전의 이름을 그대로 왕호로 쓴 걸 볼 수 있습니다. 이름과 다른 왕호를 지었다는 확실한 왕은 동성왕부터인 것 같습니다. 동성왕도 이름을 빌려 모대왕, 말다왕등으로 표현하는 걸 보면 여기서부터가 경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그 이전의 왕호는 아마 생전의 이름을 그대로 왕호로 쓴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근초고왕도 이름이 "초고"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실제 일본서기에는 근초고왕이 그냥 초고왕으로 나오지 않습니까. 근초고, 근구수등의 "근"은 삼국사기의 편자들이 앞선 초고왕, 구수왕과 구별을 위해 붙인 건 아닐까 생각이 드는군요.
아니면 그 이전의 구삼국사의 편찬자가 그렇게 구분했을수도 있구요.
진서 간문제 함안 2년 6월에 보면 진나라가 백제에 사신을 보내 백제왕 여구(餘句)에게 '진동장군 영낙랑태수' 작위를 주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근초고왕의 이름도 '초고'라기 보다는 '여구'이고 부여가 성씨라고 보고 뒤의 '구(句)'가 초고의 고에 해당된다면 어느정도 타당성이 있다고 봅니다. 또 개로왕의 이름이 '여경사(餘慶司)' 인 것이나 문주왕의 이름이 모도(牟都)나 여도(餘都)로 기재된 것을 보면 '개로나 문주'가 시호일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武寧王님 태클은 아니지만 개로왕의 이름은 경사이며 경은 중국식 이름입니다..^^
성군인종대왕님 지적 감사합니다.
아! 삼국사기의 개로왕 이름이 경사라는 부분을 깜빡 못보고 넘어갔군요. ^^ 그러고보니 뭔가 짐작이 가는게 있습니다. 개로왕이 바로 한성백제의 마지막 임금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한성백제시절에는 시호가 없이 그냥 이름만으로 왕호를 삼다가 웅진시대부터 시호를 정한건 아닐까요. 물론 웅진시대의 첫임금 문주왕은 아버지 개로왕에게 시호를 올렸다고 볼 수 있겠구요. 중국사서에서는 우리쪽의 고유명사를 쓸때 글자를 변형하거나 한글자씩 빼먹는 경향이 있으니 초고왕부분은 아직 가능성을 열어두겠습니다.
문주왕은 개로왕과 형제 관계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주는 개로왕이 왕위에 즉위하자 국정을 보좌했으며 벼슬이 상좌평에 이르렀다는 것으로 보아서는 개로왕과 문주왕은 부자 관계라기 보다는 형제 관계라고 봐야한다고 봅니다.
일단 원문에는 蓋鹵王之子也 로 되어있군요. 원문상에 개로왕의 아들로 나와있으니 아들이 아니라 형제라는 님의 말씀은 좀 더 생각해 보기로 하지요. 실제 이 부분의 왕력에 문제가 있다는 말은 저도 들었습니다. 무령왕까지 좀 앞뒤가 안맞는 부분이 있다고 하는데 그 부분은 좀 더 생각해 보고 토론해보죠.
일본서기 응신 25년조에는 구이신왕이 어려 목만치가 국정을 쥐었다라고 나와있고 삼국사기에는 비유왕을 전지왕의 서자라고도 말했습니다.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자면 구이신왕 최소 15세 이하에 왕위에 오른 것으로 보이고 구이신왕의 형제로 보이는 비유왕 역시 구이신왕과는 그닥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생각됩니다. 비유왕의 즉위 당시 나이를 최소 15세로 잡고 그의 재위년간인 29년을 더하더라도 44세입니다. 개로왕이 이 무렵에 태어나서 여도(문주)를 낳는다 하더라도 개로왕이 등극한 이후로 국정을 돌보기에는 그 나이가 너무 어리다고 생각됩니다.
설사 비유왕의 나이가 20대라 하더라도 개로왕-문주왕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로 보기에는 역시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로왕이 문주왕의 아버지가 될 수 없는 이유는 문주왕의 아들 삼근왕이 즉위할 때 13세라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죠..한 세대를 20으로 잡아도 앞으로 갈수록 이상해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개로왕부분을 보니 [혹은 근개루라고도 한다]라는 부분이 있군요. 역시 이것도 근초고, 근구수와 같은 경우로 보여집니다. 4대왕인 개루왕과 구별을 위해 "근'을 붙인 경우가 아닐까요? 물론 이것이 당시 백제시대 사람들이 "근"을 붙인 것인지 아니면 후세사람들이 사서를 적으며 앞선 왕들과 구별을 위해 "근"을 붙인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근개루는 학자들이 해석하길 개루왕에서 초고왕계와 고이왕계로 나눠졌고 개로왕에서 문주왕계와 곤지계로 나눠졌고 더 나아가 한성백제와 웅진백제로 나눠졌기에 그런 구분이 가능하다고 언급을 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