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7일 [사순 제2주간 화요일]
마태오 23,1-12
내가 교만해졌음을 알아보는 가장 빠른 법
매리언 존스(Marion Jones): 미국의 유명한 육상 선수인 존스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5개의 메달을 획득한 것으로 유명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나중에 경기력 향상 약물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인정했고, 이로 인해 올림픽 메달이 박탈되고 명성이 손상되었습니다.
랜스 암스트롱(Lance Armstrong): 암스트롱은 특히 1999년부터 2005년까지 투르 드 프랑스에서 7회 연속 우승을 차지하며 유명한 사이클 선수가 되었습니다.
그의 경력은 그가 장기 도핑에 관여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급락했고, 이로 인해 그는 모든 경력을 박탈당했습니다.
투르 드 프랑스 타이틀을 획득했으며 평생 프로 사이클 출전이 금지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꼬집습니다.
그들은 말은 하고 실천은 하지 않는 이들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열심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악한 생각과 행위가 가득했습니다. 위 인물들만이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가 그들처럼 되지 말라고 하시며 스승이나 아버지란 소리를 듣지 말라고 하십니다.
저는 저도 모르게 사제가 되었을 때 어른들이 높여주는 것에 취해 교만을 떨었던 적이 있습니다.
물론 지금도 아주 겸손한 것은 아니지만.
한 번은 제가 보좌신부 때 체육대회를 하고 있었는데 시장님이 와서 신자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저도 체육복을 입었기에 시장님과 공손히 인사하였습니다.
당시 선거가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시장님은 겸손해지려 노력하였지만, 저와 같이 젊은 청년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뻣뻣하게 서서 손만 내밀었습니다.
한참을 인사하며 가시다가 신자들에게 여기 신부님이 어디 계시느냐고 물었습니다.
주임 신부님은 오지 않으셨고 보좌 신부님만 오셨다며 신자들이 저를 지목하였습니다.
저에게 다가오더니 거의 90도로 허리를 굽히며 손을 내밀었습니다.
저는 뻣뻣하게 서서 인사를 받아주었습니다.
어떤 자리에 올라 그만한 대접을 많이 받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자신도 모르게 교만해집니다.
그런 대접을 받지 않는 게 제일 좋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신부님이란 소리를 들어도 겸손해지려면 자신이 교만해졌는지 아닌지 알아보는 방법이 필요합니다.
바로 솔직함입니다.
그런데 저도 어떤 사진에서 위 시장처럼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저보다 나이가 많은 신자에게 한 손으로 뻣뻣하게 악수하는 사진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교만 뒤에는 항상 감추는 죄가 존재합니다.
교만함의 시작은 위선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어떤 군인이 장군이 되어 사무실에 새로 들어왔습니다.
자신의 자리가 너무 좋아서 뽐내고 싶어졌습니다. 마침 어떤 사병이 들어오니까 전화기를 집어 들고
“예, 대통령 각하. 열심히 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라며 전화를 받았습니다.
전화기를 내려놓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 사병에게 어쩐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사병은 대답했습니다.
“전화선 연결하러 왔습니다….”
왜 위선과 거짓말이 교만일까요? 바로 내가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두렁이로 옷을 만들어 입으며
하느님까지도 속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유명인들이 왜 한 번에 나락으로 떨어질까요? 바로 교만 때문입니다.
이강인 선수도 워낙 인기를 많이 얻다 보니 어린 나이에 그 인기를 주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분명 주장에게 대들기 전에 위선적인 면이 있었을 것입니다.
누군가를 속이려는 마음이 있을 때 바로 ‘아, 내가 교만해져 있구나!’라고 생각해야 롱런할 수 있습니다.
마약 중독을 공개적으로 인정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그렇고, 과거의 빈곤과 학대, 그리고 임신과 같은 개인적인 문제를 고백한 오프라 윈프리가 그렇고, 성매매로 체포되었지만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 휴 그랜트도 그렇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끝까지 감추려 하지 않고 겸손함을 지향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지위를 내려놓을 각오를 하고 솔직해짐을 택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용기에 더 크게 감탄합니다.
누구나 다 죄를 짓고 속이며 살기 때문입니다.
어쩔 수 없이 인기를 얻고 성공하면 교만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교만은 패망의 원인입니다.
그러니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교만해졌음을 아는 게 중요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도 주교가 되고 수도회의 창립자가 되어 교만해져 있었습니다.
방에서 기도하던 제자를 불렀지만, 그는 황홀경에 빠져 있어서 듣지 못했습니다.
짐짓 자기를 무시하는 줄 알고 문을 열고는 바로 뉘우쳤습니다.
그리고 자기 머리를 발로 밟으며 “교만한 아우구스티노야!”라고 세 번 반복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자기의 위선을 그냥 넘어가지 않았기에 위대한 인물입니다.
이웃을 판단할 때 뉘우치면 많이 늦습니다. 그것보다 먼저 자기 자신을 두렁이로 가리려고 하는 것이 먼저였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2월27일 [사순 제2주간 화요일]
복음: 마태 23,1-12
보여주고 싶어 하는 위선적인 마음, 겸손을 가장한 교만을 배척합시다!
높은 자리에 앉아 지도자 행세를 하지만, 구체적인 삶이나 인성이 조금도 뒷받침되지 않았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책이 꽤 엄중합니다.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 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예수님의 강한 경고 말씀에 저 역시 섬뜩한 느낌이 들면서도, 요즘 저는 조금 나이가 들면서, 이런 측면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졌구나,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합니다.
저는 요즘 시골에 살다 보니 주로 입고 다니는 옷은 명품 메이커와는 거리가 먼 태안 재래 시장표 만원짜리 작업복이나 추리닝입니다.
시골이다보니 어깨 힘줄 일도 없고 폼 잡을 일도 없습니다.
요즘 와서 결심한 것이 제일 힘든 일, 제일 궂은 일, 제일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은 내 일이다, 생각하고 기쁘게 하고 있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시키지 않고 제 스스로 뭐든 하니 세상 편하고 자유롭습니다.
자리에 앉을 때도, 피정 오시는 손님들을 가장 뷰가 좋은 자리로 안내하고, 저는 제일 구석 자리로 가서 앉습니다.
가급적 앉아 있지 않고 하루종일 서서 돌아다닙니다.
식탁 세팅하고 주방에서 조리하고, 가장 낮은 자리에 앉으니 정말 편하고 부담이 없습니다.
그러나 더 노력해야 할 부분이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오늘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바처럼 내가 이렇게 산다며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는
위선적인 마음, 겸손을 가장한 교만이 스며들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롤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요한 23세 교황님께서 주교품에 막 오르셨을 때,
당신의 가족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교황님께서 저를 교황청의 고위 성직에 임명하셨습니다.
그것은 저에게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매우 영예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것 때문에 교만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앞으로 저는 사제 때와는 달리 저는 빨간 모자를 쓰고 빨간 수단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의복 색깔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교회에 인도된 영혼들의 아름다움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순 제2주간 화요일 강론>
(2024. 2. 27. 화)(마태 23,1-12)
<혹시 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마태 23,2-4).”
회당의 집회 때에 신자들은 정면에 있는 성경 보관소를 향해서 앉고, 율법학자들은 그 성경 보관소를 등지고 신자들을 향해 단상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설교를 하거나 율법을 가르칩니다.
그 의자를 ‘모세의 자리’ 라고 부릅니다.
회당에서 율법을 읽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것은 율법학자들의 임무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서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라는 말씀은, 모세의 가르침을 이어받아서 율법을 가르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 이라는 말씀은, 율법학자들이 하는 말 전체가 아니라, 그들이 전하는 하느님 말씀들과 계명들만을 가리킵니다.
<그들 자신들의 개인적인 의견이나 해석, 또 바리사이파의 규칙 같은 것은 해당되지 않습니다.>
“다 실행하고 지켜라.” 라는 말씀은, “누가 전하든지 간에 하느님의 말씀들과 계명들은
실행하고 지켜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율법학자들 같은 위선자들의 삶은 본받지 마라.
그들 같은 위선자가 되지 마라.” 라는 뜻인데, 여기서 ‘행실’은 행동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 전체를 가리키고, 그들이 말하는 개인 의견이나 주장도 포함됩니다.
<위선자들이 자신들의 위선을 감추거나 변명하는 말들을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그 말에 현혹되면, ‘진실한 삶’과 ‘위선의 삶’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 ‘듣는 사람들’까지 위선자가 되어버립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라는 말씀은, 위선자들의 ‘말’과 ‘삶’이 다른 것을 비판하시는 말씀입니다.
누구에게나 말을 잘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말한 대로 사는 것이 중요할 뿐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위선자가 안 되려면 아예 말을 안 하는 것이 낫겠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가르치는 직무’를 수행해야 하고, 또 신앙인들은 기본적으로 복음 선포 사명을 받았기 때문에 아예 말을 안 하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말을 아예 안 하겠다고 하면,
가르치는 직무를 수행할 사람도 없을 것이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할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어떻든 신앙인은 자신의 신앙을 ‘말’과 ‘삶’으로 증언하는 사람인데, ‘말로’ 하는 증언과 ‘삶으로’ 하는 증언이 다르면, 그 증언은 거짓 증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말로 하든지 삶으로 하든지 증언은 항상 똑같아야 합니다.
또 어제의 증언과 오늘의 증언도 똑같아야 합니다.
말과 삶이 다른 것도 위선이고, 상황에 따라 자기 마음대로 말을 바꾸는 것도 위선입니다.>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라는 말씀은, 종교 지도자들이 온갖 규정들로 사람들을 압박하고 억압하는 것을 꾸짖으신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은 인간을 해방하고 구원하기 위한 은총입니다.
그런데 종교 지도자들은 ‘계명을 더 잘 실천하기 위해서’ 라는 명분으로 규칙들을 많이 만들어서 사람들을 힘들게 만듭니다.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라는 말씀은, 종교 지도자들이 온갖 규칙들과 규정들과 지침들을 실천하라고 사람들에게 강요하면서도 자기들은 실천하지 않는 것을 비판하신 말씀입니다.
<그들은 왜 남들에게 시키기만 하고 자기들은 안 할까?
아마도 “그런 것은 무지몽매한 백성들이나 지키는 것이고, 나는 특별한 일을 수행하고 있는 특별한 사람이니까 지키지 않아도 된다.” 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특권의식, 우월감, 교만 등도 죄를 짓는 일입니다.
신앙생활에 특권 같은 것은 없습니다.
지도자들은 더욱더 모범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실천하기 어려운 규칙이나 규정이나
지침 같은 것은 아예 만들지 않으면 더 좋고.>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5.11-12).”
사람들의 칭찬과 존경은 마약과 같고, 그것에 취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위선자가 되고, 하느님에게서 멀어집니다.
하느님보다 사람들의 시선을 더 의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칭찬하고 존경하는 사람들 쪽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위선자인데도 위선자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눈치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위선자들이 교묘하게 자신을 잘 꾸미기 때문입니다.
<사실 위선자들 자신들도 자기가 위선자라는 것을 모릅니다.
모르니까 고쳐서 바로잡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위선이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늘 반성하고, 또 반성해야 합니다.
겸손도 마찬가지인데, 교만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겸손한 사람인 줄로만 알고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의 ‘거짓 섬김과 낮춤’은 그 자체로 위선입니다.
진짜로 겸손한 사람은 자기가 겸손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고, “내가 혹시 교만한 것은 아닌가?” 라고 생각하면서 항상 조심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