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의 正見] (345) 깨어남이 늦어지는 이유
'내'가 공부하려 들기 때문
진리인 법신생명 말고는 나머지는 다 내가 있다고 해서 잠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신기루 같은 환영에 불과합니다. /셔터스톡
깨어남이 늦어지는 이유는 자꾸 내가 공부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세간 공부는 그렇게 해야 하지만 출세간 공부는 정반대입니다.
석가도 6년 고행을 하시다가 안 되어 포기한 채 무작정 보리수 아래 앉아서 무심해지시니 그간의 선정력에 무위공력이 더해져 대각(大覺)을 이루신 것이지요.
왜 내가 공부하면 안 되냐면 나도 그렇지만 내가 무엇을 한다는 행위의 본질 자체가 모두 다 오온(생각, 느낌, 감정)의 집합체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으로 실상을 이리저리 규정해 자기가 만들어낸 내 문제 속에서 그것을 또 내가 해결하려는 것은 결국 자기식대로 문제를 만들고 제가 풀어가는 공부놀이밖에는 안됩니다.
물론 그 과정 중에 부수적으로 마음이 쉬어져서 평안해지긴 하겠지만 본질적으로 그런 것들은 다 마음이 활동해서 만들어낸 내용물들이지 마음의 본질 자체에 깨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을 깨닫는다는 게 뭐냐 하면 우리가 아는 모든 게 전부다 우리들 생각이 만들어낸 이름과 모습(환영이미지)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나도 그렇고 내면, 외면이니 하는 분별도 그러하며 세상조차도 다 그렇습니다. 잠재의식(아뢰야식)이니 에고(말나식)니 하는 것들조차도 다 스스로 실재하는 게 아니라 그런 것이 있다고 생각 느낌으로 규정지어 만들어냈기에 비로소 [있다]는 것입니다.
즉 실상은 우리 성품자리 하나가 만들어낸 꿈(환영)이란 겁니다.
그러므로 꿈(생각+느낌)에 불과한 내가 또 꿈에 불과한 대상을 가지고 닦아서 청정하게 만든다는 생각은 다 법상(法相)에 불과하니 아공(我空)만 알고 아직 법공(法空)은 모르는 소승불교만의 공부법이라 하겠습니다.
일초즉입여래지와 직지인심을 지향하는 대승불교는 그게 다 마음(생각)이 만든 장난이란걸 봅니다.
진리인 법신생명 말고는 나머지는 다 내가 있다고 해서 잠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신기루 같은 환영에 불과합니다.
즉 백년 전에 없었던 내 잠재의식이나 에고를 공부 대상으로 삼아 씨름하는 건 어차피 본래 환영인 것을 분별로 실체시하며 그 환영을 붙잡고 닦겠다는 것이니 진짜 실상을 다루는 공부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보리도차제론에서는 천국에 가는 공부나 수행을 하사도(下士道), 개인의 마음이나 잠재의식을 정화하여 무아로 만드는 소승불교를 중사도(中士道), 일체의 본질이 다 진리인 성품자리와 그 활동 하나임을 보고 성품자리를 즉각 깨달아 우주의 근본과 합일하는 대승불교를 상사도(上士道)라고 밝히신 것입니다.
글 | 김연수 한양특허 대표
출처 : 마음건강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