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 30. 큐티
마태복음 18:12 ~ 20
길을 잃은 양 한 마리
관찰 :
1) 잃은 양 비유
- 12절.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 양 백 마리가 있는 사람의 양 하나가 길을 잃었습니다. 양을 치는 목축문화가 주류를 이루던 유대인들에게는 이 의미가 무엇인지 살갑게 다가오는 비유였을 것입니다. 양을 쳐본 사람은 이 상황에 빠르게 대처하지 않으면 잃은 양은 영원히 잃어버리게 됨을 아는 것입니다. 고도 근시에다가, 다리도 짧고, 달리기도 못하고, 공격무기도 변변히 갖추어지지 않은 양은, 무리에서 떨어지게 되면 모든 야생 짐승의 표적이 되고 이내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 그 양을 찾고자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산에 두고라도 잃은 양을 찾아 떠나는 것은 목자의 당연한 모습이었습니다. 서양의 공리주의에 의하면 이러한 결정은 미련한 결정이 되는 것이지만 참 목자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에서는 오히려 이렇게 잃은 양을 찾아 떠나는 것이 맞는 것이었습니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은 무리들과 함께 있지만 길을 잃은 양의 위험 천만의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아는 참 목자는 그 양을 찾고자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 13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 그 이유는 잃은 것을 찾았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그 가치가 아흔 아홉 마리보다 더 우선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주님은 잃은 영혼을 되찾는 것의 기쁨을 그렇게 묘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 14절.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 이 말씀은 작은 자 중의 하나가 잃어버리게 되는 일도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의도하심도 뜻도 아닙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그 자신의 죄 때문일 수도 있지만,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은 실족하게 하는 자의 죄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은 신앙이 어린 사람이 신앙이 바로 섰다하는 이로 말미암아 실족하게 되어 신앙을 떠나게 되는 일에 대해서 엄중하게 경고를 하시고 있습니다.
2) 죄를 범한 형제를 실족함으로 잃어버리지 아니하려면
- 15절.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 실족하게 하지 않도록 하여야 하겠지만, 그 형제가 죄를 범한 경우에도 내버려 둘 수는 없는 것이기에 주님은 그런 경우의 대처법을 가르쳐주십니다.
-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그 형제를 얻는 것이요” => 개인적인 권고를 먼저하도록 하는 것은 그 형제의 인격과 수치를 면하게 해 주기 위한 방편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 16절.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 개인적으로 권고함을 듣지 않으면 한 두 사람을 함께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확증하게 하라. 여기까지도 이 사람의 인격과 수치를 면하게 해 주는 방편을 제시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 17절.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무조건적으로 한정없이 용서하고 용납하라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인격적인 조치를 다 취했음에도 여전히 죄를 범하고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분명하고 단호한 조치를 취하도록 명하십니다. 교회의 치리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여기서 이방인과 세리를 무시하고 멸시하는 것을 인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당시에 그렇게 이방인과 세리를 무시하고 냉냉하게 대하는 것을 빗대어서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이방인과 세리를 무시하라는 것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3) 교회의 권세에 대한 가르침
- 18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 공동체적인 권위로서 한 사람의 죄에 대해 회개하고 용서를 구함에 대해 주님이 인정하여 주심에 대해 이렇게까지 세워주시고 있습니다. 또한 이 말이 교회의 모든 분야에 대한 권위를 주시는 말씀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여전히 한 작은 자 하나를 실족하게 하는 것과 연관해서 이 말씀을 하시고 계심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혹 죄를 지은 자에 대해서 어떻게 그를 잃어버리지 않을 것인가에 대해서 주님이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놓쳐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 19절.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 이 말씀의 전제되는 요구사항은 20절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는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 예수 그리스도가 왕 되심으로 모여지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리심과 통치가 전제되어 모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지도 않고, 모이기는 했지만 예수님의 통치와 다스리심을 바라지 않음에도 교회의 이름으로 모였다고 구하는 모든 것을 거저 받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여 예수님의 통치를 받는 중에 예수님의 마음으로 잃어버린 소자를 위하여 간구할 때 주님이 그 간구를 이루어주시며, 통치하고 다스려 주실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 20절.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 뒤에 이어지는 베드로의 용서에 대한 질문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이 교회의 권위도 잃은 자를 어떻게 다시 찾을 것인가에 대하여 이어지는 본문임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 본문만 따로 떼어서 두 세 사람이 모여서 무엇이든지 간구하면 다 주님이 응답해 주신다고 하셨다는 식의 해석은 경계해야 합니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만, 이 본문이 의도하는 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르침 :
1) 잃어버린 영혼, 실족하는 한 작은 자에 대한 주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한 영혼이 실족하게 되는 것, 한 영혼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니고, 하늘 아버지의 뜻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이 아님에도 일어나는데, 그 이유는 양 한 마리가 길을 찾지 못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또한 실족하게 하는 자의 실수와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 잃은 양 혹은 실족한 자를 받아들여야 하는 공동체의 부족함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모든 상황을 안타까와하시는 분이시고, 어찌 하던지 스스로 길을 잃은 양이던지, 타인에 의해 길을 잃었던지 찾아내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죄에 대해서는 분명하고 엄하게 선을 그어 주십니다. 개인적으로, 두 세 사람이, 교회 공동체의 권면까지 거부하는 자에게는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잘라버리라는 것입니다. 출교조치입니다. 모든 판단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이지만, 이러한 적법한 절차를 치렀다면 그에게 구원이 없음을 선언해 버리라는 것입니다. 무서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교회는 치리를 바르게 함으로 자정 능력을 키울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는 교회의 치리에 바르게 순종함으로 혼탁한 세상 속에서 교회의 정결함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지도자와 지도자회의는 성도로부터 치리에 순복할 수 있는 모범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똥 뭍은 개가 겨 뭍은 개를 나무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치리의 핵심은 세상을 경영하는 것이 아니라 잃은 양, 실족하는 작은 자를 구제하고자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3) 죄의 문제는 심각해서 교회 안에서도 교회를 오염시키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거룩해야 할 교회가 오염되는 상황에 대해 경계해야 하고, 그것을 방지하도록 하늘과 땅을 묶고 푸는 일을 하는 것이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적용 :
1) 잃은 자, 작은 자 중의 실족하는 자가 내 주위에 누가 있는가 살펴보겠습니다.
2) 교회 내의 치리에 대한 문제는 매우 안타까운 영역입니다. 과거 섬기던 교회에서 치리를 통해 개인과 공동체를 살리는 길이 있었는데 그것을 제대로 하지 못한 일이 있었습니다. 가끔 그 사람을 기억하게 되거나 그 이름이 거론되면 언제나 속상합니다. 영적 지도자라는 것은 부담을 짊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 내의 치리를 하려면 지도자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죄라는 것의 속성이 떨어지려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도려내려하면 같이 죽자고 덤비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죽는 죽음의 용기가 그래서 필요합니다. 특별히 미얀마에서 일어난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치리해 주시고 공의를 드러내 주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