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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18: 19
칼빈의 창세기 논증(1)
1.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는 하늘과 땅의 감탄할 만한 구조에서 과시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표현적인 면에서 세계의 창조의 역사를 그 숭고성 그대로 설명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의 정도가 너무나 협소하기 때문에 그런 위대한 일들을 이해할 수가 없으며, 우리의 혀는 그와 똑같이 그것들을 충분히, 그리고 실질적으로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고 무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대만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그분께서는 찬양을 받을만합니다. 공손함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일들을 생각하는 자는 찬사를 받을 자격이 있는 것처럼 만약 이런 류의 일에서 주어진 능력대로 다른 사람을 도우려고 노력하면 우리의 봉사가 하나님이 인정해 주신 것에 부족하지 않은 인정을 경건한 사람들로부터 받게될 것을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변명과 또 신자들을 권고하기 위한 제언(提言)으로서 이것을 선택하였는데 만약 그들이 하나님의 역사(役事)들에 관하여 생각하는 가운데 우리와 함께 유익을 받기를 간절히 원한다면 먼저 그들은 건전하고 유순하며 온화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것들을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우리의 눈으로 세상을 보며 우리의 발로 직접 땅을 밟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수없이 많은 종류의 하나님의 역사의 결과들을 직접 손을 만지고 있는가 하면, 또한 수풀과 꽃들로부터 달콤하고 상쾌한 향기를 맡고 있는 무한한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느 정도밖에 알지 못하고 있는 바로 그 사물 가운데서 우리의 모든 감성을 흡수하는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과 광대 무변한 지혜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역량에 알맞게 그것들에 대하여 적절한 맛만 보게 되면 그들은 만족을 받게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전생애 동안에 오직 이 푯대를 향하여 매진해 나갈 수 있게 되어 비록 우리가 아주 늙었을 때에 우리의 하는 일에 조금이라도 진보가 있었다면 우리가 이룩한 발전을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2. 세상의 창조로 시작되는 모세는 책에서 그의 의도는 말하자면 하나님의 작품들 가운데서 우리가 그분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책없는 건방진 인간들이 일어나서 왜 이것을 모세에게 지시해 주었는가 라고 비웃으며 질문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일들을 모세가 우화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으로 짐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자기가 기록한 일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 아니며 그렇다고 글을 읽어보고 그 진리들을 배운 것도 아니라고 그들은 이유를 붙이며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부정직성은 쉽사리 폭로되고 있습니다.
3. 만일 그들이 역사란 오랜 과거 세대의 연속을 추적한 것이라는 이유로 역사의 사실성을 부인한다고 하면, 그들은 역사 같은 태도로 선지자들의 예언을 현재 발생하지 않은 먼 미래의 사건이라는 이유로 거짓으로 돌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확신하거니와 그런 일들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모세는 이방인들의 생업에 관련하여 그것들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역사적인 일들은 그가 죽은 이후 거의 2천년이나 되었을 때에 완성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먼 미래에 되어질 일들을, 그리고 인간의 능력으로도 감지할 수 없는 시대에 감추어져 있는 것을 성령의 도움으로 미리 볼 수가 있던 그에게 이세상의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는 역량이 없었겠는가? 특별히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것을 감안해 보면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여기서 그 자신의 예견을 제시하지 않고 다만 모든 인간들이 알아야 될 중요한 일들을 책으로 엮어서 알리기 위하여 그는 성령님의 도구로만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창조의 순서가 하필이면 그에 의하여 상세하게 묘사되고 설명되었어야 했던 사실을 불합리한 것으로 여기는 데에 큰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모든 사람들이 전에 전혀 듣지 못한 일들을 기억하도록 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때까지 기나긴 세월을 내려오면서 그의 조상들이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전하여 결국은 자손에게 전달했던 사실들을 그가 최초로 기록으로 옮기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연 인간이 이 세상에 살도록 배치를 받았을 때 인간 자신에 대한 기원과 그들이 항유하고 있는 모든 사물들의 기원을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로 이 땅에 살게 하셨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절대로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정신이 온전한 사람은 아무도 아담이 그 모든 일에 관하여 다 지시를 받았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정말로 아담이 그 후로는 벙어리가 되었단 말인가? 그리고 거룩한 족장들이 그런 교훈들을 아예 말하지 않고 침묵으로 묵살해 버릴 만큼 배은망덕한 사람들이었는가? 아브라함은 그의 족속의 선생이며 주인이었다고 하는 묘사로 두드러지게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창18:19). 그리고 모세의 시대가 도래하기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조상들과 맺은 언약에 대하여는 전체 백성들이 공통적으로는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뽑은 거룩한 인종에서 나온 백성이라고 말할 때에 그 말을 새롭고 특별한 것으로 생각하고 언급한 것이 아니라 단지 모든 사람들이 이미 지니고 있으며 노인들이 직접 조상들로부터 받은 것이며 또한 간단히 말하면 그들 가운데서 전혀 논란이 되지 않았던 것을 상기시켜 주는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언급한대로 세상의 창조가 고대와 조상들의 항구적인 전통을 통하여 이미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전혀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하나님의 진리가 인간들에 의하여 의곡 되어서 말하자면, 세월의 긴 연륜 가운데서 그 진리가 그 본연의 위치에서 벗어나 전략되는 것이 무엇보다도 쉽기 때문에 그것의 순수성을 항구적으로 보존하기 위하여 여호와께서는 그 역사를 기록하게 하는 것을 기쁘게 결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그의 책에 포함된 그 교리의 신빙성을 확립해 놓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런 기록이 없었다면 인간의 태만으로 그 역사를 잃어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4. 이제는 모세의 기획 또는 모세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신 성령의 기획에 우리의 주의를 돌려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불가시적인 하나님을 오직 그분의 사역들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저자인 사도는 세상일들을 우아하게 묘사하면서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다 라고 하여 마치 사람이 ‘사물을 보여주는 것은 분명한 것이 못된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기록하고 있습니다(히11:3). 이것은 여호와께서 자신에 대하여 알도록 우리를 초대하기 위하여 어떤 모양으로 자신을 계시하면서 우리들이 보는 눈앞에 천지의 조직을 펼쳐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은(바울이 말한 대로) 하늘과 땅의 조직에서 전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롬1:20). 그리고 다윗의 선포는 가장 사실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는 말하기를 언어도 없지만 하늘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웅변적으로 선포하고 있으며 자연의 이 극치에 달하는 아름다운 질서는 조용하게 감탄을 자아내는 그분의 지혜를 선포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시19:1). 아주 소수에 불과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는 올바른 방법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가 더욱 더 열심을 내서 관찰해야 될 과제입니다. 그런가 하면 한편으로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피조물들에게만 집착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인간들은 공통적으로 이 두 가지 극단에 복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하나님을 망각하고 있는 어떤 자들은 그들의 혼신의 힘을 ‘자연’을 사고하는 데에 쏟고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사역을 도외시하는 다른 무리들은 그분의 ‘본질’에 대하여 추구하는 데에 어리석고 미치광이 같은 호기심을 가지고 동경을 금치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두 가지가 모두 헛된 수고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연의 창조주인 하나님께 시선을 돌리지 않고 자연의 신비를 탐구하는 데에 그처럼 몰두하는 것은 지극히 의곡된 연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연을 주어 우리에게 혜택을 베풀어주고 계시는 창조자를 인정하지 않은 채 자연에 있는 모든 것을 향유하는 것은 가장 기초적인 면에서 배은망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교가 없는 철학가들이라고 자처하며 마치 자연에서 하나님과 모든 경건한 지각들을 제거할 수 있는 것처럼 망상하는 그들은 언젠가는 누가가 인용한 바울의 표현의 위력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증거가 없이는’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신 분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행14:17). 그러나 그토록 명백하게 제시되어 있는 증거에 대하여 귀머거리와 무감각한 자들처럼 자처해 왔기 때문에 형벌을 모면하고 무사히 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의 임재에 대한 표들을 모든 곳에서 주시는 하나님을 전혀 볼 수가 없음은 사실상 그들의 고의적인 무지의 소치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비웃고 있는 자들이 지금은 그들의 트집으로 교묘하게 피해 나간다고 해도 이 지상의 생활이 끝나면 그들은 오직 자신들이 고의적으로 그리고 악의에 가득 차서 소경이 되어 하나님을 무시하고 알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들의 무서운 멸망이 증거해 줄 것입니다. 그리고 완전히 노출된 본질을 지니고 계시는 하나님을 찾으려고 세상 위에 높이 떠서 교만을 부리고 있는 자들에 대해서는 결국 그들은 모호한 허구들의 무더기 가운데 자신들을 빠뜨리는 결과 외에 다른 결과는 전혀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불가시적인 다른 방법들로 말하자면 ‘세상의 모형’으로 자신을 옷 입히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세상의 모형 가운데서 하나님은 자신을 제시하셔서 우리가 관조(觀照)할 수 있게 하십니다. 천지의 비교할 수 없는 의복으로 장관을 이루는 성장(盛裝)을 하고 계시는 그분을 보려고 하지 않는 자는 이후에 그들의 광적인 열정으로 가득찬 교만스런 멸시에 대하여 정당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의 귀에 들리거나 그분에 대한 생각이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게 될 때는 즉시 그분에게 이 가장 아름다운 장식으로 옷 입혀 드립시다. 끝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로 알기를 원한다면 이 세상을 우리의 학교로 삼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5. 여기서 또한 모세를 대항하여 트집을 잡았던 자들의 불경건성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이 창조된 이후로 시공간성이 아주 짧게 축소되었다는 것을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을 창조하는 일이 왜 그토록 갑자기 하나님의 마음 속에 떠오르게 되었으며 왜 하나님은 하늘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활동하시지 않고 계셨는지를 반문하면서 거룩한 일들과 승강이를 하므로 결국은 멸망에 귀착되는 그들의 교묘한 재간을 부리고 있습니다. 삼부사(三部史)에서는 경건한 사람이 제공한 해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 해답에 대하여 언제나 기뻐하고 있습니다. 불결한 개가 하나님에 대하여 조소를 퍼붓고 있을 때 이런 방법으로 그는 반박하기를 하나님은 그때 죄수들을 사용할 지옥을 마련하고 계셨기 때문에 절대로 활동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추론으로 그런 자들의 거만스런 조소를 제지할 수 있겠는가? 이런자들에게는 절제가 공공연하게 한갖 모욕적인 것과 추악한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비활동에 대한 약점을 잡아내는 데에 마음껏 희열을 만끽하고 있는 그들은 확실히 그들 자신의 막대한 희생이 되는 결과를 발견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그들이 들어갈 지옥을 준비하는 면에서 무한한 것임을 결국 알게 될 것입니다.
6. 우리 자신들에게도 자족(自足)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분이 선하게 여기시지 않은 필요 없는 세상은 창조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아주 불합리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더욱이 그분의 뜻이 모든 지혜의 척도가 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 하나만 가지고도 만족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거스틴은 마니교도들에 의하여 그런 불의가 하나님에게 행해졌다고 분명하게 긍정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뜻보다 월등한 원인을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거스틴은 신중하게 그의 신자들에게 경고하기를 공간 속의 무한성에 관한 것 외에 그 이상의 문제, 즉 기간의 무한성에 관하여는 문제를 제기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정말로 천체들의 순환이 유한적이며 조그마한 지구본과 같은 이 지구는 한 중심에 위치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무지한 자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이 보다 먼저 창조되지 않았다고 오해하고 있는 자들은 수많은 세상을 만들지 않았다고 하나님을 도리어 충고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전혀 세상이 없이 많은 시대가 지나갔을 것이라고 하는 말은 불합리한 것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그들도 역시 텅빈 무한한 황무지에 비하여 하늘과 땅은 단지 작은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것이라는 주장은 자신들의 성질의 막대한 부패를 입증해 주는 증거로 인정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의 영원성과 그분의 영광의 무한성은 둘 다 모두 이중적인 미궁을 입증해 주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공손하게 여호와의 인도와 지시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 이상은 추구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우리 자신들을 만족시킵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