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양령대군 - 평생 속 썩인 심술보 큰 형
세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는 데에는 양녕, 효령 세 형제간의 우애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진다.
처음에 양녕 자신의 능력이 동생에 못 미침을 알고 일부러 미친 체 방탕하니, 효령대군은
세자인 형님이 폐위되면 다음 차례로 자신이 세자가 될 것이라 짐작하고, 열심히 글을 읽으며
왕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던 중 양녕이 이를 짐작하고는 들어와서“어리석다. 아버지 의중이 충녕에 있음을 어찌
알지 못하느냐?” 하였다.이에 효녕도 크게 깨달아 불교에만 정진하였다.
그러나 이 소설 같은 이야기는 실록등 정사와는 전혀 다르다.
양녕은 끝까지 왕위를 탐했고 아버지의 사랑이 아우 충령에게 기울자 그를 엄청 시기했다.
세종의 즉위 후 그의 심술은 왕위에 있은 32년간 계속되었다.즉위 1년 처소에 몰래 기생들
을 들여 뭇사람을 놀라게 하더니 아버지가 지정해준 집에서 월담하여 도주한 일로 애첩 어
리가 자살하는 사건이 터졌다.
담을 넘어 광주목사의 첩을 빼앗으려다 실패하는 망신을 당하고 그 후에도 토지,재물,노비,
여종 등을 수없이 탐하여 그 때마다 조정에서 돈을 주고 무마해야했다.
금지된 장소에서 활쏘기와 고기 잡기 등 유희를 즐기는가하면 비밀리에 무뢰배와 사냥을
나가거나 인사 청탁을 하고, 향응을 받기도 하였다.무단으로 마을사람들을 동원, 사역을
시키고 강제로 술을 먹여서 죽여 고발당하자 세종에 불손한 편지를 보내기 까지 했다.
아버지 태종의 상중에도 기생을 끼고 유희를 즐기며 노비와 간통하고도 부끄러운 줄 몰랐
다고 실록에 기록되어있다.그의 아들도 하는 짓이 비슷하여 여인이 홀로 있는 집에 침입하
는가하면 술주정으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였다.
딸 또한 품행이 바르지 못하다고 소문이 자자했으니 왕실 망신은 극에 달했다.하인들 또한
상전의 힘을 믿고 함부로 남의 재산을 빼앗고 재미로 남의 집 개를 쏘아죽이기도 했으니 그
원망은 고스란히 임금인 세종 몫으로 돌아왔다.
태종은 세종에게 위의 두 형들과 우애 있게 지낼 것을 당부하였고, 세종 또한 재위 기간 중
에 각별하게 큰형님에 대한 우의를 지켰다.하루는 놀이를 좋아하는 형님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왕이 스스로 탈을 쓰고 탈춤꾼 속에 들어가 함께 춤을 추기도 하였다.
물론 탈을 벋으니 형님이하 모두 놀라고 황송해 했다.왕은 신료들이 큰형의 잘못이 극히 사
리에 벗어났다고 지적해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모두 덮어 감싸주었다.
양녕의 奇異한 행동도 이해는 간다.
세자인 자신과 동생을 수시로 비교하고 결국 밀려날 때 그 스트레스와 원망은 얼마나 컸을까?
세자나 왕은 그 자리를 쫓겨나는 순간 대부분 곧바로 죽음이다.
세자로 있을 때 그 측근 세력들이 다음 왕에게 큰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동생인 세종에게 자신을 죽이자는 상소가 끝없이 올라오고, 늘 자신을 감시하는 싸늘한 눈초
리를 알지 못하는 바보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행실은 임금은 물론 왕실 어른의 제목도 못 되었다.
세종이 승하한 후 그가 69세에 죽을 때 까지 문종이 병약하여 어려울 때, 단종시절, 그리고
세조의 왕위 찬탈까지 왕실의 제일 어른으로서 그가 한 언행은 세조의 쿠데타를 부추기고 단
종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등 철저하게 동생인 세종 집안을 망가지게 만들어 즐기는 일 뿐 이
었다.이를 두고 후세 사관들은 ‘네가 얼마나 잘 되나보자.’ 하는 심술의 화신으로 평가하고
있고 실록에는 ‘품성이 어리석고 어리석어…….’ 하며 못난 탓으로 기록되어있다.
2. 효령대군-깊이를 알 수 없는 침묵의 제왕
세종의 작은 형님인 효령대군은 평생 자신의 의중을 들어내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세자 자리가 형님에서 곧바로 아우에게 넘어간 이 때 그가 느낀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바로 그것이었다.
아버지 태종 그가 누구인가? 할아버지와 칼부림하여 거의 강제로 왕위를 빼앗았고, 큰 아버
지 방간을 유배시켰으며, 나아가 작은 아버지 방석과 외삼촌인 민무구등 외가를 몰살시킨
냉혈한 아닌가?왕위의 보전을 위해서는 인정을 두지 않는 그에게 자신은 방해되는 인물로
보였겠고, 불평 한마디면 그대로 죽음을 당할 것을 잘 알았다.
그는 불경을 공부한다며 사찰에 틀어박혔다.
이는 동생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일이었음이 분명하다.
유학자 시대인 그 당시 불경 공부는 정치와는 결별함을 상징하는 것이다.
세종은 이러한 작은 형님이 매우 고맙고 어려웠을 것이다.
하루는 가뭄이 극심하여 왕이 기우제를 지내고 돌아오는 행렬이 그의 집 근처에 오자,비가
내리기 시작하니 왕 일행은 잠시 들려 쉬고 갔다.이 때 왕이 남긴 글씨 ‘오늘 이 비는 나의
정성이 아니라 우리 형님의 은덕이로다.’ 가 최근에 발견되어 형제의 우애를 짐작하게 한다.
실록에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글에 밝으며 형제와 우애 있고 나라에 충성하였으며
무예에도 능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그의 학문은 매우 심오하고 생각 또한 깊어 아버지 태종도 그의 뜻을 도저히 헤아릴 수 없
다고 하였다. 그 만큼 깊이를 알 수 없는 큰 도량을 가졌다고 할 것이다. 그는 백성들의 자치
규범으로 ‘향헌56조’를 제정, 백성들의 윤리 도덕과 의식교화에도 헌신했고 효에 대한 이론
을 정립했다.
불교에 해박하여 연화경, 금강경, 원각경 등을 번역하여 많은 백성이 쉽게 보게 했으며 ‘탑골
공원 10층 석탑(국보2호)’의 건립과 ‘보신각종’의 주조를 직접 감독했다.
조카인 세조가 원각사를 지을 땐 그 역사를 주관했으며, 불법의 수련을 독실하게 정진하였고,
연주암(관악산),무위사(월출산),백련사(만덕산),회암사(양주) 등 많은 사찰을 중건,중수했다.
왕의 형님으로, 나라의 어른으로서 큰일을 소리 없이 해낸 그에게 후대에서 원망하는 것은
조카인 세조가 국가를 전복할 때도 중립을 지키며 침묵한 일이다.
이 또한 침묵만이 자신이 할 봉사로 생각한 때문일까?
그러나 말년인 성종 때 어른으로서 나라 정사에 쓴 소리를 많이 한다.
아마 그 때는 할 말을 해도 괜찮은 시기라고 판단한 것 같다.그는 불가에 귀의하여 승려가 되
었다고 잘못 알려져 있으나 자식 복을 타고났는지 엄청 많은 자손을 낳아 왕실 종친 중 그 후
손이 가장 많고, 재물 복 또한 많았는지 현재까지 종친회 소유지도 엄청 풍성하여 당시 권력
형 부정축재를 의심하게 한다.
수명도 매우 길어 아우 세종이 죽은 후 무려 36년을 더 살아 1486년(성종17년) 9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는데 왕실의 큰 어른으로서 종실과 신하들에 극진한 예우를 받으며 편안하게 살았다.
후에 자손들은 두 형님을 세종임금의 종묘 배향공신에 넣어 예우하였다.
(세종 배향공신 - 황희, 최윤덕, 허조, 신개, 양녕대군, 효령대군)
-옮긴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