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석 “동창 윤동주는 못 펼쳐 본 국어사전… 지금도 늘 뒤적인다”
[나의 현대사 보물] [2] 철학자 김형석 교수
원로 철학자 김형석(103) 연세대 명예교수의
연구실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책상에
놓인 낡은
국어대사전에서 깊은 인상을 받는다.
김 교수가 일흔 살 무렵인
1991년 구입해 30년 넘게 써 온
금성출판사 국어대사전이다.
광복 이후 비로소 국어사전을 볼 수 있었고
이후 여러 차례
사전을 바꿔 가며 사용해 오던 것을,
당시 나온 최고 수준 사전이라 여겨 지금껏
바꾸지 않고 쓰고 있다고 했다
◇ 백살 넘어서도 늘 찾아보는 국어사전
“우리 세대는 1920년대 일제 치하에서
태어나 일본말로 교육을 받았어요.
근대 학문을 통해
빨리 개화(開化)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서양 지식을 열심히 공부했죠.”
평남 대동군의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그는 일본말로 대화했고 영어로 공부하다
보니 정작 놓친 것이 있었다.
한국어, 그리고 한국의 정신이었다.
20대 시절 일본 조치(上智)대에서
서양철학을 공부하던 1940년대 초 일이다.
“아르바이트를 하던 곳이 도쿄 우에노
공원 도쿄도미술관 지하 식당이었어요.
1년 내내 전시회를 구경할 수 있었죠.
예술은 잘 몰라도 그 그림들을 보면
‘아, 이게 일본화로구나’ 깨달을 수 있었어요.”
그때 청년 김형석의 머리를 강하게 치는
질문이 있었다.
‘그럼 한국적인 것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가 21일 오후
강원도 양구 근현대사 박물관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자신이 기증한 백자의 한국적인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고 있다.
박상훈 기자
해방 직전
고국으로 돌아와 깨달은 것이 있었다.
“지금까지 한국어 문법을 제대로
배운 적이 한 번도 없구나!”
이것은 그에게 평생 한(恨)으로 남았고
스스로 ‘나는 우리말 어휘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품고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 치하, 전시(戰時),
그것도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인해
국어 연구 자체가 철퇴를 맞은 상황에서
한국어 사전을
구해 보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1945년 해방을 맞았을 때
김교수는 스물다섯 살이었다.
“나의 우리말 공부는 그 때부터
독학으로 시작됐다”고 그는 회고한다.
김 교수는 지금도
글을 쓸 때마다 국어대사전을 펴본다.
백 살 넘은 학자가
“지금도 내가 잘 모르는 단어는
반드시 이 책을 찾아보기
전까지는 절대 쓰지 않는다”고 말한다.
특히 “형용사가 좀 모자람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는 것인데,
예컨대 “봄을 표현하기 위해
조지훈의 시(詩)를 읽고 거기 나온
형용사를 사전에서 찾은 뒤
비로소 내 언어로 삼았다”고 했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가
양구근 현대사 박물관에 기증한 국어대사전.
박상훈 기자
김 교수와 평양의 숭실중학교를 함께
다닌 동창이 시인 윤동주(1917~1945)다.
“그때 나는 그를 병아리 시인이라 생각했고,
크게 되면 세상을 울릴 거라고 여겼는데
과연 그렇게 됐다”고 했다.
“돌이켜 보면 그 사람은 죽을 때까지
한 번도 국어사전을 펴 보지 못했죠.
거기에 비하면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선백자에서 깨달은 ‘한국의 정신’
강원도 양구군의 양구 근현대사박물관에는
조선백자를 비롯한
도자기 600여 점이 소장돼 있다.
분청사기와 청화백자, 사발·병·항아리 등
다양한 작품들은 문화재로 지정될 만한
명품은 아니지만 백자의 미(美)를
잘 살린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 백자들은 김형석 교수가
014년 기증한 것이다.
2012년 그와 안병욱(1920~2013)
전 숭실대 교수를 기념하는
‘김형석·안병욱 철학의 집’이 두
사람의 고향인 이북과 가까운
강원도 양구군에 세워졌다.
도자기 기증은 이 같은 양구와의 인연을
이은 것이다.
김형석 교수가 도자기 애호가가 된 것은
젊은 시절 도쿄도 미술관에서
생긴 의문과 관련이 있다.
청년 김형석에게는 어떻게
‘근대인’이 되고 ‘현대인’으로 진화할지가
주요 관심사였다.
그러다 보니 정작 ‘한국의 정신’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모르고 살았다.
김 교수가 기증한 조선 백자를 전시하고 있는
양구근현대사박물관 전시실.
김 교수는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도자기를 모았다고 한다.
박상훈 기자
8·15 광복을 맞은 뒤 월남해
중앙고 교사를 거쳐 연세대 교수로
일하면서 한국 미술에 관심을 가졌다.
“그때 우리나라 회화를 보니
아직 중국의 전통을 벗어나는
단계에 있다고 생각했죠.
전통 회화보다는 문인화,
그보다는 호랑이 담배 피우는 민화가
더 한국적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러다 그의 눈에 띈 것이 당시는
웬만해선 골동품으로도 치지 않던
조선백자였다.
별 물욕이 없던 그가
인사동과 청계천을 다니며 백자를
헐값으로 하나둘 모으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 백자를 가까이하며
그는 깨달았다.
“한국의 전통과 미(美)가 가장 많이
스며든 예술품은 조선백자였습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가장 일본적인 것,
가장 에스키모적인 것이 세계적이다?
아닙니다.
가장 인간적인 것이기 때문에 보편적이고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김형석 교수는 자신이 틈틈이 사 모은 조선백자를
포함한 600 여점의 도자기를
양구근현대사박물관에 기증했다.
박상훈기자
한국의 백자에서 그는 인간적이기 때문에
세계적인 요소 세 가지를 찾아냈다.
“자연을 닮은 선(線)과 기품이 살아있고,
사람의 생활에 밀착돼 있으며,
사람의 감정이 스며들어 있다는 것이죠.”
한마디로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인간미’
‘단순하면서도 소박한 정(情)’이
한국의 정신이었다.
이것을 깨달은 뒤로
김형석은 자신의 수필에도 ‘한국적인 것’이
스며들었음을 느끼게 됐다.
“우리의 것을 알아야 남의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데 나는 순서가 바뀌었던
것이다.”
◇도산 안창호의 가르침 반영한 강의 노트
김형석 교수가 소장했던 물건 중 일부는
양구 인문학박물관
‘김형석·안병욱 철학의 집’에 전시돼 있다.
그중 눈에 띄는 것이 수십 년 전에
작성한 강의 노트다.
강의 내용이 컴퓨터 프로그램처럼
정교하게 짜인 그 노트 속에,
기독교는 교회의 의식이나 제도를
가장 으뜸으로 여기는
‘교회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있다.
김 교수는 “그 생각은 오래전
도산 안창호(1878~1938) 선생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가 17세였을 때 갓 감옥에서
나온 안창호가
송산리 교회에서 강연을 했다.
200여 청중 앞에서 안창호는
“기독교는 교회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릇의 크기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고당 조만식(1883~1950)도 비슷한 말을 했다.
그들의 가르침이 훗날
김 교수의 강의 노트에 반영됐다.
“예수님은 살아 계실 때
교회 걱정을 한 적 없지만
지금 목사들은 교회 얘기만 하지 않는가!”
인터뷰를 끝내며 김 교수는 이런 말을 했다.
“법조계와 운동권의 공통점은
국제 감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세계시민을 키워야 할 때입니다.
세계적인 것을 알아야
한국을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한국적인 것’을 평생 찾아다녔던
노학자가 젊은 세대에게 주는 충고였다.
양구=유석재 기자
받은글(태초로님) 편집입니다!
2023.5.4.아띠할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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