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정재규는 삶의 현장에서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잔잔하면서도 아름다운 시로 엮어내는 남다른 재주를 가진 듯한데...내가 이 시인을 처음 만난 건 거의 4반세기 전이었지 아마? 어느 연수를 수강하고 있었는데 문학 관련 강사로 나온 그가 강의 마지막에 시간에 쫓기면서도 시(詩)-IQ 91인 나의 기억엔 황지우 선생의 시였던 듯 한데- 한 편을 능청스러우면서도 진한 감흥을 담아 낭독하면서 '끄읕(fnale)!' 하는 것이었다. 처음 겪은 일이라 순간 황당했지만 뭐 강사님의 시에 대한 사랑을 전해 주는 것이라 여기면서 아직까지도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다.
시인은 나이 이순(耳順)에 접어들면서 시집『마음에 선을 긋는다』(도서출판 지혜,2021.)를 출간했는데, 생각이 원만하게 되어 모든 일을 이해할 수 있다는 나이에 든만큼 주변의 현상과 사물에 대한 한층 완숙한 경지의 생각을 담고 있는 시집이라 보여진다.
이하 타(他)에 생명에의 의지(依支)가 되어주는 '그늘'과 아(我)의 처절한 삶을 향한 의지(意志)를 묘사하는 정재규 시인의 '그늘'과 '세발낙지'란 시에 대하여 논평한 전 진주교대 교수이자 문학평론가인 송희복의 글을 일부 발췌하여 옮겨 보면서 시를 음미해 본다(여기서 나의 생각이 쪼매 들어간 데는 청색의 글로 표시함).
그늘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운동장 한구석에 아름다리 느티나무 그늘이 햇빛을 모으고 있다. 햇빛이 많이 모일수록 더 진한 그늘을 만들어 놓고 바람에 밀려오는 새들의 소리를 하나하나 챙기고 있다. 그늘은 어린 시절에 길 가다 더위에 지쳐 물 한 모금이 생각날 때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풀썩 주저앉아 옷을 벗어던져 놓고 드러눕던 편안한 안식처였다. 바로 옆에는 가끔씩 길을 잃은 개미가 나무줄기를 타고 올라가다 무리의 흔적을 되찾아 땅 위로 내려와 쏜살같이 나무 밑구멍을 찾아 들어가기도 했다. 개미들을 무심코 바라보며 누구나 한 번쯤은 가졌을 또 다른 그늘을 생각하곤 했다.
어두운 그늘이 드리운 마음에 포근한 그늘을 덮어 주고 힘든 세월 속에서도 따뜻한 정을 주셨던 어머니의 그늘. 외로울 때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놀아주었던 친구의 그늘. 삶이 힘들고 지쳐 있을 때 마음 속에 만들어진 나만의 그늘을 찾아본다. 보이지 않게 힘이 되어 주었던 그늘에서 또 다른 그늘이 온몸을 감싸 준다.
햇빛이 더욱 강하게 그늘을 만들어 주면 늘 아껴 주었던 사람들의 숨겨진 그늘이 더욱 그립다.
시에서 운동장 한 구석의 아름드리 느티나무 그늘은 삶을 이야기하는 단초(端初)가 되고 있다. 여기에서 그늘은 편안한 안식처가 되기도 하고, 모성의 이미지를 갖추어 있기도 하고, 늘 함께하는 친구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온몸을 감싸주는 보이지 않는 힘이 되기도 한다. 그늘은 다름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난 것이 거의 없다는 의미의 은미(隱微)한 삶의 표상이다.
그늘이라고 하니까 문득 비평가 임우기가 1996년에 출간한 비평서『그늘에 대하여』에서 "그늘은 아픈 콤플렉스같은 무의식의 상처이지만 동시에 삶의 생명력이다. 나는 그런 그늘을 예술의 근본 범주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이른바 '그늘론'이 생각난다. 독자들은 이 경구를 염두에 두고 정재규의 시 '그늘'을 음미해 보기를 권한다.
세발낙지
짜디짠 바닷물과 갯벌 속에 뒤엉켜
필사적으로 삶을 이어가는 운명
때로는 태양 빛을 몰래 훔쳐보며
끓어오르는 힘을 모으나
탐욕스러운 사람들의 입맛에 주눅 들고
갯벌을 휘젓는 어부들의 손끝이 매서워
미끌미끌한 몸뚱이는 땅속 깊이 파고든다
갯벌에는 필사적인 몸부림으로
녹초가 된 세발낙지의 벅찬 숨소리가 가득하다
그래도 갯벌 깊숙한 흙속에서
겨우 참고 목숨을 부지했건만
처연한 모습으로 식탁에 올라와 있다
접시에 긴 다리를 바짝 붙여보지만
나무젓가락 사이에 끼어진 채 돌돌 뭉쳐져
입 속에서 일생을 마감하는 처연한 삶
갯벌 속에서 유영하던 강인한 힘은
사람들의 입속에서 힘겹게 녹지만
인간의 눈빛에 짓눌려 잡혀온 세발낙지는
온몸을 비틀며
있는 힘을 다해 갯벌로 달려간다
시인 정재규에게 '그늘'이 생명의 의지((依支)라면, 여기에서 소재로 삼고 있는 '세발낙지'는 생명에의 의지(意志)라고 하겠다. 사람들 중에서 누가 세발낙지를 먹으면서 이것의 물성에 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겠는가? 시인 정재규의 독특한 시적 발상이 우리를 다시금 성찰하게 만든다. 마침내 갈가리 찢어진 처연한 모습으로 식탁에 오르지만, 그것의 물성은 필사적인 몸부림으로 갯벌 속으로 자신의 잔명(殘命)을 보듬는다는 데 있다. 근디 시에서는 시인이 세발낙지의 삶을 향한 처절한 몸부림을 담담하게 그려낸 것으로 보이는데, 평론가 송희복은 낙지의 의지(意志)와는 상관없는 물질의 속성이라 할 물성(物性)으로 표현한 게 내 생각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어휘인 듯 하지만...내가 문학적 소양이 너무 얕아서 그런가, 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