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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에드워즈의 참 부흥과 거짓 부흥 분별 방법론
-「성령의 역사 분별 표지」를 중심으로-
백금산 목사(예수가족교회)
I. 부흥에 대한 바른 이해
부흥에 대한 관심
2007년은 1907년 ‘한국의 오순절’이라 불리는 평양 대부흥이 일어난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따라서 한국 교회 전체적으로 또는 교단마다 평양 대부흥 100 주년을 기념식을 준비하면서 자연스럽게 부흥에 대한 관심이 다시 고조되고 있다. 그동안 최근 몇 년 동안 '부흥'이니 '영적 각성'이니 하는 말들이 일종의 유행어처럼 사동 되기도 했다. 각종 집회의 제목에 '부흥', '리바이벌', '영적 대각성'이라는 말이 단골 메뉴로서 나타나기도 했다. 또한 '부흥'이라는 제목의 복음송이 젊은이들 사이에 가장 인기 있는 곡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주의깊게 살펴보면 사람마다 '부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내용이 의미하는 바는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부흥'이라는 용어
어떤 사람들은 '부흥'이란 말을 일종의 '전도 집회'와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전도집회라고 하는 용어가 약간 식상하다고 생각한 이들이 전도집회라는 이름대신에 약간의 신선함과 유행성을 고려하여 '전도집회'라는 이름대신에 표현만 바꾸어서 '영적 대각성 집회'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부흥'을 '부흥회'와 동일시하고 있다. 그동안 전통적으로 한국교회에서 1년에 1회 내지 2회씩 주로 봄. 가을로 '심령대부흥집회'를 개최했다. 전통적인 이러한 '심령부흥회'는 성도들의 신앙 열심을 자극하기 위한 교회의 연례적인 전통적인 집회였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부흥'이란 단어가 '교회성장'이란 말과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모교회가 개척 몇 년만에 크게 부흥했다'라고 사용될 때의 '부흥'이란 단어는 '모교회가 개척 몇 년만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게 되었다'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즉 교인수의 증가를 부흥과 같은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다. 이처럼 '부흥'이라는 용어는 쓰이는 문맥에 따라서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우리 일상의 가장 대표적인 용례가 되고 있다.
전통적으로 부흥회 집회에 대한 거부개념과 80년대의 성경공부 모임의 한계
부흥 혹은 영적 각성이라는 용어가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 않고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한국교회의 지난 경험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선교 20주년이 조금 지난 1907년 1월 2-15일까지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4개 장로회 연합으로 개최된 평안남도 겨울 사경회 때 일어난 소위 ‘한국의 오순절’ 사건을 기점으로 이후 평양과 전국적으로 확산된 대부흥을 경험했다. 1907년의 대부흥은 한국교회의 오순절에 해당되는 경험으로서 지금까지도 한국교회의 영성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1907년의 부흥경험은 지금까지도 알게 모르게 대다수의 교회의 전통을 형성하는 몇 몇 중요한 요소를 우리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었다. 무엇보다 모든 한국교회의 필수집회형태인 '새벽기도회'의 정착과 연중 '부흥회'의 개최 등은 1907년의 부흥경험으로부터 비롯된 전통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부흥집회'가 시간을 지나면서 점점 순기능보다는 많은 부작용과 문제점을 드러내는 '역기능'을 가지게 되자 대략 1980년대부터 젊은층 들과 지성인들에게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가진 '부흥회'보다는 각종 성경공부프로그램들이 교회 안에 도입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부흥회'는 점차 시들해지거나 각종 다양한 세미나와 강좌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심령부흥회'가 주로 감정적인 자극을 위주로 하는 집회의 형태였다면 최근까지의 '소그룹 성경공부'는 다분히 지성적인 활동을 위주로 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룹성경공부'니 '제자훈련'이니 하는 프로그램이 20여년을 지나는 동안 교회 안에 메마른 지성주의를 가져오게 되자 이제 교회는 또다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되었고, 이러한 교회 안에 정체성에 대한 탈출구로서 좀더 감정적이고 감각적인 '경배와 찬양'형태의 '찬양집회'와 예배의 각종 의식적 요소를 강화하는 '예배갱신운동'이나 현상중심의 몇 가지 활동들 즉 '제 3의 물결운동인 '빈야드 운동'이나 빈야드의 한 갈래로서 크게 현상적인 면이 부각되었던 '토론토 블레싱'등에 눈을 돌리기도 했다. 또한 이외에도 ‘기윤실’ 이나 ‘경실련’ 운동 같은 기독교 사회운동이나 ‘내적 치유’같은 심리적 운동 또는 전도, 새신자 정착, 교회 성장 운동 등의 실험이 지금도 왕성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 모든 일들이 무엇인가 침체된 교회의 갱신과 회복과 변화를 위한 몸부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전통적인 의미에서 ‘부흥’이라 말할 수는 없다. 전통적인 교회의 부흥 경험과는 다른 경험들이다.
부흥에 대한 정확한 개념과 이해가 필요한 시점
따라서 우리는 '부흥'에 대한 용어의 정확한 의미를 규정할 필요가 있다. '부흥'이란 용어에 잘못 면역되어 '부흥'의 깊고 심원한 의미를 바르게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 얼마나 안타깝고 통탄할 일인가?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남용 혹은 오용하고 있는 ‘부흥’에 대한 참된 의미를 고찰해 보도록 하자. 부흥이란 무엇인가? 를 정의하기 전에 먼저 부정적으로 무엇이 부흥이 아닌지를 살펴보는 것이 유익하다.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부흥이 아닌 것을 부흥이라고 잘못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흥에 대한 오해내지 피상적인 견해가 무엇인지를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부흥의 본질을 선명하게 알 수 있다.
교회의 외적 성장 즉 교인수 증가가 부흥은 아니다
첫째로 부흥은 교회성장 즉 교인수의 증가를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의 수가 갑자기 많이 늘어나게 될 때, 그 교회가 부흥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부흥이란 단어만 부흥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뿐 실제로는 교회의 교인수가 많이 늘었다는 것이다. 물론 부흥의 역사를 살펴보면 부흥과 회심자의 증가, 부흥과 교인수의 증가는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 부흥의 결과로 전도가 활발하게 일어나서 수많은 사람이 회심하여 교회에 들어오는 일이 생기고, 그 결과로 교인수의 증가가 일어난다. 그러나 거꾸로 교인수의 증가라는 결과를 보고 무조건 교회가 부흥되었다고 말하는 것을 잘못이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다가 부흥을 경험하게 되면 교회가 교회답게 된다. 즉 비유컨태 잠자던 교회가 깨어나는 것과 같고, 죽은 것처럼 보이던 교회가 생명력이 충만한 상태가 된다. 이와같이 교회가 깨어나고(영적각성), 교회가 살아나게 되면 이 영향의 여파로서 활발한 전도가 일어나게 되고 수많은 불신자들이 회심하게 됨으로 교회 안에 가입하게 되고 그 결과로서 교회의 교인수가 증가 하게 된다. 따라서 부흥의 결과로서 교인수의 증가가 일어난다. 그러나 교인수의 증가를 ‘부흥’이라 부를 수 없는 것은 교인수의 증가는 부흥이 아닌 다른 이유로도 얼마든지 증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교회답게 되는 부흥을 통해서가 아니라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게 되는 세속화를 통해서도 교인수는 증가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과 그 이후 기독교 국교화로 로마제국 치하의 교회는 엄청난 수의 교인들이 늘었다. 그러나 이것은 참된 부흥의 결과로 인한 회심의 결과로 교인수가 증가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세속적인 이익을 얻을 목적으로 오히려 교회 안으로 대거 몰려온 일이 생긴 것이다. 진짜 거듭난 사람들의 증가로 교인수가 증가한 것이 아니라 거듭나지 않은 세상에 있던 불신자들이 눈에 보이는 가시적 교회 안의 불신자로 위치이동을 한 결과로 교인수가 증가하는 경우였다. 이처럼,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여러 가지 이유로 가시적 교회 안에서는 일시적으로 교인수가 증가하는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가 있다.
기존신자들의 위치이동으로 인한 교인수 증가가 부흥은 아니다.
또는 교인들의 수평이동의 결과로 교인수가 늘어나는 경우도 있다. 이미 다른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이 교회를 옮기는 결과에 의해서 교회의 교인수가 증가하는 경우다. 지금까지 수평이동에 의한 교인수의 증가에서 가장 중요한 몫을 차지한 것은 도시화, 아파트화, 신도시화에 따른 인구 이동이었다. 첫째는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농촌에서 이미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이 도시에 들어오면서 도시에 있는 교회에 골고루 분산되지 않고 특정한 몇몇 교회로 몰려들면서 교인수가 증가하는 경우가 있다. 둘째는 도시의 특정지역이 아파트 단지로 개발되면서 다른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아파트단지로 이사 가면서 아파트 단지에 있는 교회에 집중적으로 몰려들면서 교인수가 급성장하는 수가 있다. 서울에 있는 강남지역이 바로 대표적인 경우다. 최근 10-30년 안에 급성장한 대형교회들은 대부분이 강남의 밀집된 아파트 단지에 위치해 있는 교회들이다. 세째는 새로운 신도시가 형성되면서 이미 믿던 신자들이 신도시로 이사 가면서 신도시 지역의 몇 몇 교회가 교인수가 급증하기도 한다.
왜 같은 도시, 같은 강남지역, 같은 신도시에 있는 교회인데 어떤 교회는 교인수가 더욱 증가하고, 또 어떤 교회는 그렇지 못하는가? 여기에는 여러 가지의 원인이 있을 것이다. 수평 이동하는 교인들이 선택하는 교회의 기준은 무엇일까? 담임 목사님의 설교가 재미있어서? 알아듣기 쉬워서? 감동적이어서? 진리를 바르게 선포해서? 아니면 교회의 건물이 크고 좋고 주차 시설과 각종 편의시설이 잘 되어 있는 복합시설을 갖춘 교회여서, 아니면 수많은 프로그램이 있어서 다양한 영적, 사회적, 심리적 필요를 채움 받을 수 있는 교회여서, 교인수가 많아서 자신을 깊이 드러내지 않아도, 헌신하지 않아도 적당히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교회여서인가? 아니면 교회의 예배 분위기가 좋고, 소그룹 모임이 활성화되어 있고, 기도를 열심히 하고, 전도를 열심히 하는 교회이기 때문인가? 당연히 이런 여러 가지 조건들을 두루 잘 갖춘 교회일수록 수평 이동하는 교인들이 빠른 시간 내에 더 많이 모여들 가능성이 많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도시교회에서는 갑자기 뻥튀기 하듯이 교인수가 증가해서 대형교회가 되는 수도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위 돈이 돈을 벌어주듯이, 또는 눈덩이가 구르면서 점점 더 많은 눈을 흡수해서 더 큰 눈덩이가 되듯이 대형교회가 되면 교인수가 더욱 증가할 가능성이 더욱 커지게 된다. 사실 소수의 교회가 갑자기 교인수가 늘어나서 대형교회가 되는 이면에는 다른 다수의 소형교회들이 문을 닫는 일과 맞물려서 진행되기도 한다. 대형 백화점이나 대형 할인점이 들어서게 되면 수많은 구멍가게들이 문을 닫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와같은 기존신자의 위치이동에 의해서 교인수가 증가하는 것을 부흥이라 부르지는 않는다. 단지 교인들의 수평이동으로 인한 교인수의 증가로 교회가 외적으로 수적으로 성장한 것일 뿐이다. 또한 교인수의 크기가 반드시 건강한 교회의 척도는 아니다. 건강한 대형교회가 있을 수 있고, 병든 소형교회가 있을 수 있다. 반대로 건강한 소형교회가 있을 수 있고, 병든 대형교회가 있을 수 있다. 몸무게가 몸의 건강 척도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부흥회 개최가 부흥은 아니다.
둘째로 부흥회를 개최하는 것이 부흥은 아니다. 사람이 부흥회를 개최할 수는 있다. 사람들이 부흥회의 시간과 장소와 부흥회의 프로그램을 계획할 수는 있다. 그리고 사람들을 부흥집회에 초청할 수는 있다. 그리고 부흥회의 순서를 평상시의 예배와는 다른 방식으로 진행하면서 기존 예배와는 차별성이 있는 집회분위기를 연출할 수는 있다. 평상시는 조용하고 엄숙하게 예배를 드리던 교회가 부흥회를 하면서는 박수도 치고 열정적으로 찬송을 부르기도 할 수 있다. 평상시 예배시간에는 한 시간의 예배를 지루하게 느끼던 성도들이 2-3시간씩 진행되는 부흥집회를 잘 견뎌낼 수도 있다. 평상시 30분의 설교를 지루해 하던 사람들이 부흥강사로 초청된 사람의 간증담이나 설교를 장시간 들으면서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일시적인 감동이나 깨달음을 느낄 수도 있다. 이 모든 일들은 교회가 계획하고, 진행하고 목표로 한 어느 정도의 결과를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부흥집회가 곧 부흥은 아니다.
부흥의 본질적 의미
그렇다면 ‘부흥’ 혹은 부흥과 동의어로 사용되는 ‘영적 각성’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부흥이라 부를 수 있는가? 부흥에 대한 정의는 여러 가지로 내릴 수 있겠지만 필자는 부흥을 ‘성령의 부으심이 교회위에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일어나는 사건’으로 정의하고자 한다. 즉 부흥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3가지의 요소를 고찰해 보아야한다. (1) 부흥의 내용은 무엇인가? 부흥이 일어나면 어떤 체험,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2) 부흥은 누구에게 일어나는 것인가? 부흥의 대상은 누구인가? (3)부흥은 누가 일으키는 것인가? 부흥의 주체는 누구인가? 전통적으로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서 (1)교회위에 (2) 주권적으로 (3)성령을 부어주시는 사건‘으로 정의할 수 있다.
부흥은 성령충만, 하나님의 임재 충만이다
첫째, 부흥의 내용은 무엇인가? 부흥은 내용면에서 성령 충만, 성령의 부으심이다. 다른말로하자면 부흥은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한 것이다. 성령이 평상시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역사하시면 하나님의 임재를 평상시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체험하게 된다. 부흥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성령의 충만한 임재로 통한 하나님의 임재 충만, 그리스도의 임재 충만으로 생기는 일들이다. 성령이 교회위에 한량없이 부어지는 부흥이 일어날 때,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과 거룩을 새롭게 체험하게 되며, 죄악에 대한 깊은 자각과 회개를 경험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감격을 회복하며, 거룩하게 살려고 하는 노력과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구령의 열정이 불붙게 된다.
성도 한 개인이 부름받고, 중생하고, 회심하고,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의롭다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고, 거룩하게 되고, 영화롭게 되는 모든 일들은 전부 성령의 역사로 일어난다. 교회가 하나님을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며, 서로 교제하고 봉사하며, 세상에 전도하고 선교하는 모든 일들도 성령의 역사로 일어난다. 그러나 우리가 부흥이라 불리는 시기 동안은 성령의 역사가 평상시보다는 아주 강력하게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즉 부흥은 성령이 교회 안에 역사하시되, 미풍처럼 부드럽게, 이슬비처럼 소리 없이, 화롯불처럼 은근하게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폭풍처럼, 소나기처럼, 산불처럼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부흥이 특별한 것은 부흥이 일어나면 교회가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성령의 전혀 새로운 일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평상시에 경험하는 일들을 더욱 크고 강하게 경험하게 된다는 점이다. 부흥이 일어나기 전에도 교회는 예배, 말씀, 기도, 교제, 전도, 선교 등의 모든 일을 성령의 역사를 통해 행하게 된다. 그러나 평상시에는 이런 모든 일들에 생기가 없고, 마치 잠든 것 같고, 죽은 것 같은 침체를 경험하기도 한다. 그러나 부흥이 일어나 교회가 성령의 충만, 성령의 부으심을 경험하게 되면 예배는 예배답게, 설교는 설교답게, 기도는 기도답게, 교제는 교제답게, 전도는 전도답게 되는 일들이 생겨난다. 그래서 교회가 경험하는 부흥의 기간은 성령이 교회 안에 강하게 역사하는 시기라는 측면에서 교회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소나기’를 경험하는 ‘성령의 장마철’이라 부를 수 있다.
부흥은 교회위에 임하는 것이다
둘째, 부흥은 누구에게 일어나는 것인가? 부흥은 대상 면에 있어서 일차적으로 세상이 아니라 교회가 경험하는 사건이다. 부흥은 교회위에 성령이 충만히 임하는 것이다. 교회가 성령 충만 받음으로 그 영향력이 세상에까지 미치게 된다. 따라서 부흥이 일어나면 교회만이 아니라 세상도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러나 부흥은 어디까지나 세상이 아니라 교회가 경험하는 것이다. 또한 부흥은 성도 한 개인이 성령 충만을 경험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집단적으로 성령 충만을 경험하는 사건을 말한다. 부흥은 특정한 한 교회나 한 지역 내의 여러 교회 혹은 특정한 한 국가나 대륙이나 혹은 여러 대륙에 걸친 교회위에 성령이 일정기간동안 엄청나게 부어지는 것을 말한다. 태풍을 상상해보라. 태풍이 크면 클수록 태풍이 미치는 범위가 넓어지게 된다. 부흥도 마찬가지다. 부흥이 크면 클수록 부흥이 교회에 미치는 범위가 커지게 된다. 성령 충만, 성령의 부으심 범위가 크면 클수록 즉 부흥의 범위가 크면 클수록 교회사에서 더 큰 부흥 즉 대부흥이 된다. 18세기의 대부흥은 잉글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영국 식민지였던 미국 등 영어권 전 지역에 일어난 큰 부흥이었다. 1907년의 평양 대부흥은 평양의 장대현 교회에서 시작은 되었지만 부흥의 크기는 곧 평양을 벗어나서 한반도 전 지역의 있는 교회위에 성령의 부으심이 있는 전국적인 부흥이 되었다. 물론 교회가 전체적으로 부흥을 경험하지 못한 시기에도 개인적으로 성령충만, 성령의 부으심을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개인적인 성령충만 경험을 부흥이라 부르지는 않는다. 부흥은 교회의 집단적인 성령 충만 체험을 말한다.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다
세째, 부흥은 누가 일으키는가? 주체 면에서 볼 때 부흥은 사람의 노력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일어난다. 따라서 사람이 인위적으로 부흥회를 개최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교회에 부흥을 주시는 것과는 별개의 것이다. 사람이 부흥회를 개최할 수는 있다. 사람들이 부흥회의 시간과 장소와 부흥회의 프로그램을 계획할 수는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부흥을 만들어 낼 수 는 없다. 부흥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다. 부흥이 일어나는 시기도, 부흥이 일어나는 장소도, 부흥시 사용되는 사람도, 부흥이 일어나는 형태도 모두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자신의 주권으로서 결정하시는 것이다.
교회사의 모든 부흥은 오순절의 반복
우리가 내린 이러한 부흥의 정의에 대한 성경적인 모델은 바로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오순절 사건이다. 오순절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교회위에 성령이 충만히 부어지신 사건이다. 그러므로 교회사에 나타난 수없이 많은 부흥은 (한국의 1907년 부흥을 포함) 곧 오순절의 반복이라고 말해질 수 있다.
이안 머리는 <오순절 성령 강림 오늘도 반복해서 일어날 수 있는가?>(Pentecost-today: The Biblical Basis for Understanding Revival)라는 책에서 오순절 성령강림이 다시 반복될 수 있는가? 하는 입장에 따라 교회사에서 부흥에 대한 3가지의 견해가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첫째는 부흥이 오순절 성령 강림의 반복이라는 가능성을 부인하는 견해인데 대표자는 아브라함 카이퍼(1837-1920)이며 대부분의 화란 개혁파가 취하는 입장이다.
둘째는 부흥이 오순절 성령 강림의 반복이지만 이러한 반복은 인간적인 수단과 노력에 의해서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고 보는 부흥관이다. 이러한 견해의 대표자는 찰스 피니(1792-1875)이며, 교회사에서 볼 때 1860년대 이후부터 현대의 많은 대중전도자들이 이러한 피니식 부흥관을 따르고 있다.
셋째는 부흥이 오순절 성령 강림의 반복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부흥이 인간의 수단과 방법에 달린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일어난다고 하는 입장이다. 이러한 부흥의 대표자는 조나단 에드워즈(1703-1758)이며 이러한 부흥관은 1860년 이전까지 미국의 제1차 대각성, 2차 대각성, 1857-59 부흥 때까지의 전통적인 견해였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러한 전통적 부흥관의 원조이며, 교회사 최초의 부흥신학자이자, 교회사 최고의 부흥신학자라고 말할 수 있다.
II.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에 나타난 참된 부흥 분별법
참된 부흥을 어떻게 분별할 것인가?
따라서 본고에서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부흥관 중에서도 참된 부흥과 거짓 부흥을 분별하는 방법에 대한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진짜와 가짜가 섞여있다. 중요한 것일수록 모조품이 많다. 그래서 가짜가 흔한 세상일수록 진짜를 분별하는 법이 중요하다. 교회 내에서도 마찬가지다. 부흥은 본질상 많은 체험을 동반하게 된다. 체험적 신앙은 부흥의 본질을 구성하는 필수적인 요소다. 그러나 신자들이 경험하는 모든 체험을 참된 신앙 체험 혹은 부흥 체험이라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우리 신앙의 영적 체험에도 가짜와 진짜가 있다. 즉 성령에 의한 체험일 수도 있고, 악령에 의한 체험일 수도 있다. 또는 인간 본성의 법칙에 의한 자연적인 체험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체험을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성도들의 체험가운데서 어떤 체험을 과연 진정한 성령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만일 교회가 어떤 체험을 했다면 이 체험이 과연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악령의 역사에 의한 것인지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이는 교회의 건전한 신앙 생활을 위한 참으로 중요한 질문이다. 1741년 발간된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은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성경적이고도 분명한 대답을 우리에게 제시해주는 교회사의 명작이다.
이 책이 발간된 역사적 배경
조나단 에드워즈(1703-1758)가 살았던 18세기는 교회사적으로 위대한 부흥시대, 영적 대각성의 시대였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영국의 조지 휫필드와 웨슬리 형제, 웨일즈의 하월 해리스와 다니엘 로울랜드 등과 함께 이러한 18세기 대각성의 운동의 중심인물이었다. 특히 에드워즈는 미국 뉴잉글랜드 지역의 메사추세츠주 노샘프턴에서 약23년 간 목회 기간 중(1727-1750) 2번의 부흥을 경험했다. 에드워즈의 탁월한 점은 자신이 체험한 이러한 부흥을 관찰하고, 해석하고 변호하는 부흥에 대한 일련의 중요한 저술들을 쏟아냄으로써 부흥신학에 대한 기초를 놓았다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1737년에「놀라운 회심이야기(A Faithful Narrative)」, 1741년에「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론(The Distinguishung Marks」, 1742년에 「균형잡힌 부흥론(Some Thought concerning the Revival」, 1746년에 「신앙 감정론(The Religuous Affections)」등의 연속적인 부흥 신학 시리즈를 발간함으로써 교회사에서 최초로 부흥에 대한 성경적 근거와 구속사적 의미, 그리고 부흥시 교회와 성도들에게 일어나는 영적 체험의 범위와 깊이 등에 대해 다각도로 분석하고 적용하는 부흥신학의 원조가 되었다.
에드워즈가 체험한 첫 번째 부흥은 1734-35년에 에드워즈가 목회하던 노샘프턴 교회를 중심으로 코네티컷 강변에 있는 마을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코네티컷 골짜기 부흥이었다. 에드워즈는 자신이 경험한 이 코네티컷 골짜기 부흥에 대한 이야기, 즉 이 부흥 중에 자신의 교회에서 일어난 놀라운 회심에 대한 이야기를 1737년 「놀라운 회심에 대한 신실한 이야기」라는 제목의 책으로 발간했다. 이 책은 18세기 대부흥 운동과 관련된 공식적인 첫 번째 부흥문서가 되어 대서양 양쪽 영어권 지역에서 18세기 대각성 운동의 불씨 역할을 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1740-42년, 생애 두 번째로 오늘날 우리가 제1차 대각성 운동이라 부르는 놀라운 부흥을 체험했다. 1차 대각성 운동은 규모면에서 약4-5년 전의 코네티컷 부흥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부흥이었다. 코네티컷 골짜기 부흥은 말 그대로 코네티컷 강 주변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부흥이라면 1차 대각성 운동은 식민지 13개 지역 전체에 영향을 미친 부흥이었고, 특히 뉴잉글랜드 전 지역에 깊은 영향을 미친 부흥이었다.
제1차 대각성 운동의 중심 인물은 영국인 조지 휫필드(1714-1771) 였다. 1735년 부활절 몇 주 후에 일어난 21살 조지 휫필드의 회심은 영국, 웨일즈, 스코틀랜드, 미국등 18세기 영어권 지역 전체 대부흥의 신호탄이자 도화선이 되었다. 휫필드는 회심이후 약 34년간 영국 전역과 웨일즈는 물론이고, 미국을 7번 방문, 스코틀랜드를 14번 방문하며 약18,000여회의 설교를 통해 영어권 전체 지역 부흥의 불씨가 되고, 활활 타오르는 부흥의 불길의 중심이 되었다. 미국의 제1차 대각성 운동은 휫필드의 7번에 걸친 미국 방문 중에서 두 번째 미국 방문 기간(1739.10.30-1741.1.16, 25-27세) 중에 일어났다. 휫필드가 춘계, 하계, 추계 때 13개 식민지 전체를 돌며 순회 설교를 하는 동안 성령의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났다. 1740년 가을에는 미국 동북부 6개 지역을 통칭해서 부르는 뉴잉글랜드 지방을 73일동안 800마일을 여행하면서 130회에 걸쳐 설교를 했다. 휫필드의 이 뉴잉글랜드 순회 설교 기간중 뉴잉글랜드 지방에서도 부흥의 불길이 옮겨 붙기 시작했고, 1740년 10월 7일부터 4일간 조나단 에드워즈가 목회하던 노샘프턴에 머물면서 설교를 하는 동안 노샘프턴은 다시금 옛날 1734-35년때의 부흥때와 같은 은혜의 물결에 휩싸이게 되었다. 노샘프턴을 떠난 휫필드는 뉴헤이븐에 있는 예일대학에서도 설교하여 수많은 학생들이 큰 감화를 받았다. 이 때 휫필드의 설교로 큰 감화를 받은 학생중의 하나가 후에 유명한 인디언 선교사가 된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였다. 이후 휫필드는 1741년 1월 16일 미국 2차 방문을 마치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갔다.
휫필드의 뒤를 이어 뉴잉글랜드 지방에 부흥의 불길을 계속해서 부채질한 사람은 길버트 테넌트(1703-64)였다. 길버트 터넨트는 휫필드가 1740년 10월에 뉴잉글랜드 지방에 붙여놓은 부흥의 불길을 1740년 12월부터 약 3개월 동안 강력한 설교를 통하여 더욱 활활타게 만들었다. 길버트 터넨트의 사역은 많은 회심자를 얻는 결실을 가져왔고, 부흥의 열기를 더 한층 고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나 한편 환상을 보고, 황홀경에 빠지는 등의 열광주의적인 반응으로 인한 부작용도 생겨나면서 사람들 속에 휫필드의 순회설교 때 싹텄던 반부흥주의 정서를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이렇게 휫필드와 길버트 터넨트 등의 사역으로 불붙기 시작한 뉴잉글랜드 지역의 부흥은 여러 지역 목회자들에 의해 1741년 4월에는 20여개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여름에는 더 넓은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이 기간 중 에드워즈는 여러 지역으로 순회설교를 다니게 되었고, 특히 1741년 7월 8일 앤필드에서 행한 ‘하나님의 진노의 손아래 있는 죄인’이라는 설교는 이후 에드워즈의 가장 유명한 설교로 알려지게 되었다. 1741년8-9월에 부흥은 최고봉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지나친 열광주의로 인해 오히려 부흥에 찬물을 끼얹고 반부흥주의 노선에 있는 사람들의 입장을 강화시켜주는 사건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러한 열광주의를 부추킨 대표적인 사람이 제임스 데이븐포터(James Davenport, 1716-57)였다. 데이븐포트는 아주 좋은 집안 출신이었다. 할아버지는 뉴 헤이븐 식민지의 설립자요 목회자였으며, 아버지는 코네티컷주의 존경받은 목회자요 예일대 이사를 역임하기도 한 사람이었다. 데이븐포트는 1732년 16살에 예일대를 졸업하여, 1738년 22살 때 롱아이스랜드의 사우스홀드(Southold)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1740년 휫필드의 놀라운 성공 소식에 깊은 열등감을 가진 그는 교인들을 모아놓고 24시간 연속집회를 가졌다. 여기서부터 드디어 문제가 터졌다. 데이븐포트는 회심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형제라 부르고 나머지 사람들은 이웃들이라 불렀다. 이후 이웃마을들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24살 때인 1740년 봄 목회지를 떠나 6월에는 회심하지 않은 목사들의 위험성을 강도높게 경고하는 사역을 하고 있었던 장로교 부흥사 길버트 테넌트와 그리고 10월에는 휫필드와 개인적인 교제를 나누었다. 1741년 한여름 하나님이 자신을 더 큰 일을 위하여 목회지를 떠나도록 부르셨다는 확신을 가지면서 코네티컷 지역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해안선을 따라 여러 지역을 차례로 순회하면서 데이븐포터는 목사들에게 자신들의 영적 상태를 확인하며 회심여부를 판단하라고 외쳤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목사들에 대해서(대부분이 그랬다) 공개적으로 회심하지 않았다고 선언하며, 회중들로 하여금 이러한 목사를 무시하며,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올 것을 촉구했다. 여름이 끝나고 데이븐포트는 겨울을 나기위해 사우스홀드로 돌아갔다. 데이븐포터의 이러한 행동은 사려깊은 사람들로 하여금 “부흥이 통제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것들이 부흥의 참열매라면 심지어 부흥이 방어될 수 있을까?” 하는 큰 우려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것이 조나단 에드워즈가 1741년 9월 예일대 졸업식에서 ‘성령의 역사에 대한 분별 방법’을 설교하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데이븐 포터가 떠난 지 며칠 뒤인 1741년 9월 10일 조나단 에드워즈는 예일대 졸업식에서 요한일서 4:1절을 본문으로 당시 뉴잉글랜드 지방의 태풍의 눈으로 떠오른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었다. 에드워즈는 이 설교에서 부흥시 발생하는 강력한 체험, 특히 부흥에 대한 열광주의적인 극단으로 인해 초래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을 보고 부흥 자체까지 반대하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밝혔다. 오히려 성경이 말하는 참된 성령의 역사에 대한 증거를 살펴볼 때, 지금 일어나고 있는 부흥은 성령의 역사에 의한 참된 부흥임을 강조했다. 에드워즈의 이러한 설교에 대해 예일대 학생들은 열렬한 반응을 보였으나 교수진들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이는 이후 부흥운동에 대한 친부흥파와 반부흥파의 분열을 예고하는 전조이기도 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은 바로 이 예일대 졸업식 설교를 확대하여 책으로 발간한 것이다. 보스턴에서 발간된 초판은 다음과 같은 긴 제목을 가지고 있었다.
「성령의 역사의 분별 표지: 특히 부흥에 동반된 특별한 상황을 고려하여 최근 이 지역의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나타났던 비범한 일에 적용함.」(The Distinguishing Marks of a Work of the Spirit of God, Applied to That Uncommon Operation That Has Lately Appeared on the Minds of Many of People of this Land: With a Particular Consideration of the Extraordinary Circumstances with Which This Work Is Attended,)
이 책의 구조와 주제
이 책은 일반적인 청교도 설교 구조와 같이 본문-교리-적용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제1부는 본문에 대한 간략한 설명으로서 이 책 전체의 서론에 해당된다. 2부와 3부는 이 책의 본론에 해당되는데 2부는 성령의 역사라고 말할 수도 없고,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는 중립적인 증거 9가지를 다룬다. 2부에 기록된 9가지 현상을 가지고서 이것이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반대로 2부에 기록된 9가지 현상을 가지고 이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말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3부는 요한일서 4장에 기초해서 성령의 역사임을 입증할 수 있는 5가지 증거를 밝힌다. 이러한 성경적인 5가지 증거야말로 확실한 성령의 역사임을 입증해 줄 수 있는 긍정적인 증거다. 4부는 이 책의 결론에 해당되는데 본론에서 발견한 진리를 적용하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3부에서 발견한 5가지 성경적인 성령의 역사에 대한 분별기준에 근거해 볼 때, 1741년 당시 진행되고 있었던 부흥은 성령의 역사임이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에서 당시 부흥에 대해 찬성과 반대 혹은 중립 등의 여러 가지 입장을 취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적용한다.
성령의 역사를 분별할 수 없는 부정적 혹은 중립적인 기준 9가지
에드워즈는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의 1부에서 성령의 역사 분별 기준으로서의 부정적인 9가지 증거들 혹은 중립적인 9가지 분별기준을 말한다. 이것은 당시 부흥반대주의자들이 부흥을 반대하는 근거로 사용한 중요한 기준들이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부흥반대주의자들이 부흥을 반대하는 데 사용한 이러한 기준들은 성령의 역사를 분별하는 바른 기준점들이 될 수 없음을 밝힌다. 오히려 이러한 기준들은 중립적이다. 성령의 역사일 수도 있고, 성령의 역사가 아닐 수도 있다. 즉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도 이러한 일들은 일어날 수 있고,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도 이러한 일들은 일어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만을 가지고 ‘이것이 성령의 역사다. 또는 이것이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를 구분할 수는 없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중립적인 분별기준 9가지를 먼저 소개한다.
첫째, 아주 비범하고 특별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만 가지고는 성령의 역사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다. 부흥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부흥시 일어나는 비범하고 특별한 일을 가지고 ‘이것이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는 증거’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일을 무조건 반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옛날에 없었던 일이라고 무조건 반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새로운 일들을 행하실 수 있다. 성경의 계시역사가 이것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의 초림과 오순절 성령 강림사건 등은 모두 이전에 비해 비범하고 특별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둘째, 몸에 특별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즉 눈물을 펑펑쏟고, 큰 소리를 지르며, 실신하는 것 등이다. 부흥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부흥시 발생하는 이런 몸의 특이한 현상을 가지고서 이것이 참된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몸의 특별한 현상만 가지고는 성령의 역사를 분별할 수 없다. 몸과 마음은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몸이 마음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마음이 몸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는 법이다. 우리는 정신적인 충격이 몸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사람은 너무나 비극적인 소식을 들었을 때, 실실할 수 있다. 또한 너무나 기쁜 소식을 들었을 때, 실신할 수도 있다. 따라서 큰 영적인 체험을 하면 몸에도 영향이 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예를 들어 지옥을 체험했을 때, 몸에 어떤 현상이 생길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크게 체험했을 때 몸에 어떤 현상이 생길 수 있다. 따라서 몸에 어떤 특별한 현상이 생겼다고 해서 이것만을 가지고‘ 이것이 성령의 역사다. 혹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라고 분별할 수는 없다.
셋째, 기독교에 대한 이슈가 사회에 공론화되는 것이다. 부흥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부흥시 일어난 현상으로 사회가 온통 소란스럽게 된다는 것을 들어서 부흥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판단을 잘못된 것이다. 부흥으로 인해 교회는 사회의 주목을 받게 된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초대교회 때도 그랬다. 교회가 변화될 때, 교회의 변화가 사회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오히려 정상적인 것 아닌가? 부흥이 일어나면 사회에도 이슈가 된다.
넷째, 상상력에 큰 영향을 받는 것이다. 즉 환상을 보거나 하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어떤 강력한 영향을 받을 때, 상상력이 크게 자극된다. 따라서 상상력이 크게 자극받아 심상에 어떤 강력한 인상이 새겨지고 때로는 환상을 보는 것만 가지고 이것이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는 증거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러한 일들은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도 일어날 수 있고,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도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이것만 가지고는 성령의 역사인지에 대한 분별 기준을 삼을 수 없다.
다섯째, 모범을 보고 따라 하는 것이다. 부흥을 반대하는 어떤 사람들은 부흥시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보고 따라하기 때문에 동일한 일이 일어나는 것임으로 이것은 참된 성령의 역사일리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이를 부인한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보고 영향을 받는 것은 정상적인 것이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보고 자극을 받았다는 것만 가지고서 이것이 성령의 역사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은 되지 못한다. 성경에 의하면 다른 사람의 선한 행동을 본받으라는 것을 적극 권면하고 있고, 또한 다른 사람의 모범에 영향을 받는 것은 인간 행동의 합리적이고 자연스러운 결과이기 때문이다.
여섯째, 때로 지혜롭지 못하고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다. 사람들 속에는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뒤섞여 있다. 또한 구원받은 한 개인 안에도 여전히 죄의 세력은 잔존하고 있다. 따라서 부흥시에 어떤 사람이 때로 지혜롭지 못한 행동을 하고, 때로 실수를 한다고 해서 부흥의 모든 현상들을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도매금으로 부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심지어 베드로 사도까지 실수한 적이 있지 않았는가? 또한 고린도 교회 안에도 많은 문제가 있지 않았는가?
일곱째, 사람들이 많은 실수를 범하는 것이 분별기준이 될 수는 없다. 많은 사람들의 실수하는 것을 보니 잘못된 것 아닌가? 아니다. 은혜 받은 사람도 잘못할 수 있다. 그것만 가지고 전부를 부정해서는 안된다. 한 사람의 심령 속에 은혜와 죄가 공존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여덟째, 이단에 빠지는 사람이 생긴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 아닌가? 아니다. 가룟유댜를 보라. 초대교회의 니골라를 보라. 때로 부흥운동의 지도자처럼 보였던 사람들이 세상으로 나가거나 이단으로 변질되는 사태가 있다고 해서, 전체 부흥운동을 매도해서는 안된다.
아홉째, 많은 목회자들이 율법설교, 지옥설교를 하고 있다는 자체가 잘못된 것 아닌가?
아니다. 지옥이 실재한다면 어떻게 무덤덤하게 지옥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는가? 지옥이 있다면 겁을 주어서라도 지옥을 피하게 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불타는 집에 있는 어린아이에게 이 사실을 알려 줄 때, 어떻게 말해줄 것인가? 이것은 물론 율법만 설교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율법에 대해, 죄와 지옥에 대해 설교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에드워즈의 중립적 증거는 부흥반대주의자와 부흥열광주의자의 양극단에 대한 효과적 방어책이다
에드워즈가 말하는 이러한 부정적 혹은 중립적인 증거 9가지는 사람들에 의해서 두 가지 잘못된 방향으로 사용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증거들이 나타날 때 너무나 쉽게 이런 증거를 기준 삼아서 이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단정지을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지성주의자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만 가지고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현상들은 성령의 역사가 없어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성령의 역사에도 이러한 현상들이 동반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반대로 이러한 현상들이 나타나면 무조건 성령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잘못된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대부분 열광주의자들이다. 이러한 것만 가지고 성령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현상들은 꼭 성령의 역사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드워즈가 제시한 이러한 9가지 기준은 성령의 참된 역사를 분별하는 기준으로서는 ‘부정적인 기준’들이며, 또한 성령의 역사일 수도 있고, 성령의 역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점에서 ‘중립적인 기준’들이다.
성령의 역사를 분별할 수 있는 긍정적인 증거들 혹은 5가지 바른 분별기준
그렇다면 성령의 역사를 분별할 수 있는 바른 기준은 무엇인가? 에드워즈는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 2장에서 성령의 역사를 분별하는 바른 기준 5가지를 소개한다. 성령의 역사를 분별하는 기준은 무엇보다 먼저 성경이 제시하는 기준이어야 한다. 에드워즈는 요한일서 4장에서 발견한 성령을 분별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 5가지를 제시한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에 반드시 동반되는 일이다. 사탄은 부정적인 혹은 중립적인 9가지 증거들은 일으킬 수 있지만, 긍정적인 5가지 증거들은 만들어 낼 수 없다. 이러한 5가지 긍정적인 증거들은 오직 성령님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어떤 현상이나 어떤 체험 혹은 어떤 운동이 일어났을 때, 이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입증할 수 있는 5가지 분별기준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성령은 무엇보다 예수님을 높인다. 성령은 예수님을 알려주러 오신 분이시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앙을 고백하고 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며, 예수님께 순종하게 만들어준다. 따라서 성령 충만은 곧 예수님 충만이다. 예수님 충만하지 않은 성령 충만은 잘못된 것이다. 따라서 어떤 성령운동이 일어날 때, 어떤 외적인 현상이나 체험에만 몰두하고 예수님의 성품과 예수님의 사역이 강조되지 않을 때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성령의 역사는 반드시 예수님을 높이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열매를 맺기 마련이다.
둘째, 성령은 성경을 높여준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사랑하게 해 준다.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게 만든다. 만일 성경을 무시하고, 성경을 부인하는 영이 있다면 그는 분명 성령과는 다른 영이다. 성경이외의 다른 어떤 수단이나 방법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려고 만드는 각종 운동은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신비주의가 바로 이런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성령 충만은 반드시 성경 충만임을 명심하자. 성령과 성경은 언제나 함께 간다.
셋째,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의 진리 즉 교리와 신학에 관심을 가지게 만든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다. 성령은 성경 속에 나오는 진리를 통하여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간다. 만일 어떠한 운동이 우리로 하여금 기독교의 기본진리를 무시하게 만든다면, 또한 기본적으로 교리와 신학에 대한 거부감을 조장시킨다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로 보기 힘들다. 교회사에서 성령의 역사가 가장 활발하게 움직였던 종교개혁시기와 부흥시기에는 성경의 주요 진리, 기독교의 중요 진리에 대한 강렬한 관심과 신앙고백도 함께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따라서 성령 충만은 곧 진리 충만이요, 교리 충만이요, 신학 충만이라 이라 해도 틀리지 않다.
넷째,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한 각성과 회개로 이끈다. 그리고 거룩을 추구하도록 한다. 성령은 우리가 깨달은 진리, 성경, 예수님을 통하여 결국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닮도록 한다. 하나님을 닮도록 한다. 성령은 성결의 영이기도 하다. 만일 어떤 운동이나 현상이 우리로 하여금 더욱 죄에 대한 각성과 회개를 불러일으키고, 더욱 성결하도록 한다면 그것은 분명 성령의 역사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 충만은 곧 회개충만, 거룩 충만이라 할 수 있다.
다섯째,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사랑하게 만든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반드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있다. 성경의 핵심이 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기 때문이다. 진리에 대한 깊은 이해는 사랑의 열매로 나타나야한다. 거룩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 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따라서 성령의 역사는 반드시 사랑의 역사로 이어진다. 성령 충만은 곧 사랑 충만이다.
참된 성령의 역사는 반드시 이러한 요소들이 모두 함께 결합되어 있다. 만일 이러한 것들 가운데 특정한 어떤 것만을 주장하고 다른 요소들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 예를 들어 성령의 역사인 사랑 충만한 하더라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 모두를 가지게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분명하다. 그러나 하나님만 사랑한다고 하고, 인간에 대한 사랑은 관심 없는 종교중독자는 잘못된 것이다. 또한 인간만 사랑한다고 하고, 하나님 사랑 없는 인본주의도 성령의 역사는 아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는 반드시 있어야 할 필수요소만이 아니라 필수 요소들이 모두 있도록 우리를 인도하신다. 따라서 우리로 하여금 기본적으로 예수님 충만, 성경 충만, 진리 충만, 거룩 충만, 사랑 충만하도록 만들어주는 어떤 운동이나 현상도 우리는 그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분별할 수 있다.
부흥이 성령의 역사라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에드워즈는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 3장의 결론부분에서 지금까지 말한 진리를 당시 부흥과 관련해서 다양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한다. 즉 부흥을 반대하는 사람들, 부흥에 대해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사람들, 부흥에 대해 찬성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적용한다.
부흥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대한 적용
첫째, 부흥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적용한다. 성경의 분별기준으로 볼 때 지금 일어나고 있는 부흥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분명하다. 분명 요한일서 4장에서 사도요한이 말하는 성령의 분별 기준으로 볼 때, 현재의 부흥은 분명 하나님의 성령에 의한 역사가 틀림없다. 부흥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반대사유는 부흥시 사람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특이한 행동을 한다는 것 등이다. 그런데 에드워즈는 이에 대해 죄에 대한 엄청난 깨달음을 가지거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엄청난 깨달음을 가졌을 때, 이런 외적인 현상이 나타날 수 있음을 주장한다. 또한 부흥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현재 부흥을 경험한 사람들 속에 드러나는 실수를 문제 삼기도 한다. 에드워즈는 현재의 부흥에 이러한 사소한 실수들이 있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소한 실수만을 가지고 부흥 전체를 반대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점을 주지시킨다. 창조사역과 이스라엘 백성 속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사역을 보면,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모든 것을 완전하게 만드시지 만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때로는 부흥 때에 젊은이들이 많은 영향을 받는데, 젊은이들의 특징 중의 하나가 혈기 많고 실수를 잘하는 때라는 점이다. 때로는 목회자들이 바른 지도를 해 주지 않아서 그런 점도 있다. 그러나 부흥시 일어나는 이러한 사소한 문제들은 시간과 경험이 많이 해결해 준다. 요컨대 부흥시 발생하는 사소한 문제들로 인해서 부흥전체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목욕물을 버리려고 하다가 아이까지 버려서는 안 된다.
부흥에 대해 중립적 태도를 취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적용
둘째로 에드워즈는 현재의 부흥에 대한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고 있는 중립파에 대해서 찬성과 반대의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함을 경고한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역사를 거부해온 역사가 많이 기록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예수님의 초림 때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했다. 또한 오순절 성령강림 때도 유대인들이 거부했다. 따라서 현재의 부흥에 대해서도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현재 침묵하고 있는 것은 곧 반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신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걸림돌만 볼 것이다. 사실은 신중하게 처신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이 것에 대해 부지런히 조사하지는 않고 있다. 이것은 중립을 표방한 사실상의 거부나 마찬가지다.
부흥에 대해 찬성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적용
셋째로 에드워즈는 부흥이 하나님의 역사라고 찬성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현재의 부흥의 불길이 꺼지지 않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적용한다. 부흥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일반적으로 교만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특별히 3가지를 조심해야한다.
첫 번째 조심해야 할 점은 내적 충동이나 직통계시나 예언에 집착하면 안 된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은혜와 은사를 구분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은혜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은사는 불신자에게도 주어질 수 있다. 말하자면 은사를 받고도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가게 하는 것은 바로 은혜다.
은사는 은혜를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의도된 것이다.
성령의 은혜의 역사를 이루지 못한다면 은사는 무익하다.
두 번째 조심해야 할 점은 공부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목사들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만 받으면 되었지, 공부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아이들에게 공부시킬 필요가 어디 있는가?’ 라는 주장과 같다. 4살짜리 아이와 30살짜리 교육을 잘 받은 성인이 동일한 은혜를 받았다고 가정해보자. 어느 사람이 하나님의 교회 사역에 유용한 사람이 되겠는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교육받은 성인이다. 공부와 교육이란 그런 것이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일수록 선한 일에도 악한 일에도 크게 사용된다. 공부를 많이 한 목사와 공부를 거의 하지 않은 목사가 동일한 은혜를 받았다고 가정하자. 어느 사람이 성도를 가르치고 세우는데 유용하게 쓰임 받겠는가? 이런 면에서 독서와 공부하지 않는 목회자는 그 영향력이 미미하다. 교회사의 영적 거장들은 거의 모두가 바로 독서와 공부의 대가들이었음이 결코 우연이 아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하기만 하면 되지, 공부는 왜 필요하냐고 생각하는 것은 가장 비신앙적인 행동이다. 기도만 하면 되었지 설교준비는 왜 하느냐고 생각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생각이다.
세 번째 조심해야 할 점은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는 점이다. 상대방이 구원을 받은 사람인지, 그렇지 않은 지를 내가 판단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최후의 심판 때 하나님만이 하시는 권한이다. 은혜를 받았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열심히 특심한 사람들은 자꾸 다른 사람의 회심여부를 손쉽게 판단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잘못된 것이다. 물론 이것이 교회에 가입하려고 하는 사람들, 세례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대한 교회적인 차원에서 정당한 회심자를 구별하려고 하는 노력까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을 생각해보라. 다른 사람의 회심을 미리 지례 짐작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은 우리에게 성령의 역사를 분별하는데 있어 반드시 알아야 할 3가지 중요한 점을 가르쳐준다.
참된 부흥이 발생할 때 마다, 에드워즈의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이 중요한 참고서가 된다
첫째, 에드워즈 시대의 교회는 부흥을 경험함으로써 크고 깊고 다양한 많은 신앙체험들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때로 부작용도 있었고, 실수도 있었고, 문제도 있었다. 그래서 부흥시 발생한 이러한 체험을 두고서 성령의 역사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란까지 일었다. 이는 마치 고린도교회의 사정과 비슷하다. 성령의 은사가 너무 충만하다 보니 은사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인한 교회 안에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 시대의 교회는 이러한 영적 체험들이 너무 많아서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없어서 문제가 되는 교회다. 그래서 지금 당장 에드워즈의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에서 다루어지는 문제가 교회적인 문제로 쉽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에드워즈의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에서 다루어지는 문제는 언제든지 누구에게나 성도 개인에게 일어날 수 있는 문제다. 또한 수시로 우리 주변에서 각종 이단 내지 불건전한 운동이 발생할 때마다 일어날 수 있는 문제다. 물론 참된 부흥이 일어날 때도 마찬가지다.
영적 체험을 분별할 때, 외적 현상에만 치우치면 안 된다
둘째는 우리가 어떤 체험을 분별할 때, 그 체험의 외적 현상에만 너무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배우게 된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방언, 치유, 예언, 환상, 기적, 몸의 특이한 현상‘ 등등 우리의 몸이나 감정에 일어나는 크고 특이한 현상에 관심을 주목하기 쉽다. 그래서 이러한 몸에 생겨나는 특정 현상들을 가지고서 한 편으로는 ’이것이 성령의 놀라운 역사다. 아니면 또 한편에서는 이것이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 라고 너무 쉽게 오판을 한다. 언제나 교회를 소란스럽게 하고, 양분시켰던 수많은 운동과 사건은 대부분 이러한 외적인 현상에 대한 해석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조나단 에드워즈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지혜는 우리에게 발생하는 이러한 현상과 체험은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다는 것이다. 즉 몸에 일어나는 현상은 중립적인 것이다. 성령에 의한 역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이다. 가장 최근 교회사에 있었던 카나다의 소위 ’토론토 블레싱‘의 경우 ’특이한 웃음‘이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토론토 블레싱‘이 성령의 역사라 믿고 있었던 당사자들이 주로 주장한 근거는 사실 에드워즈가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의 1장에서 말한 부정적 근거들이었다. 어이없게도 토론토 블레싱 주창자들은 자신들의 체험이 성령의 역사라고 단정한 역사적인 근거를 조나단 에드워즈에게서 찾았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러한 현상과 체험은 중립적이며 성령의 역사라는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없음을 말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에드워즈가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을 발간할 당시에는 이러한 현상들이 참된 부흥에도 동반될 수 있음을 말하고자 하는데 더 강조점이 있었다. 에드워즈의 무게중심은 당시 뉴잉글랜드의 부흥이 참된 부흥임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내 세우는 근거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는 데 사용될 수 없는 부증적 혹은 중립적 증거들임을 논증하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어쨋던 외적 현상만을 가지고 성령의 역사를 분별할 수 없다는 에드워즈의 경고는 우리가 언제나 명심하고 있어야 할 영적 분별의 공리다.
신앙 생활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무엇인지를 배우게 된다
세째,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분별할 때, 에드워즈가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 2장에서 말하는 참된 분별 기준 5가지를 통해 성령의 역사에 동반되는 가장 중요한 내용들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된다. 또한 이러한 바른 분별 기준 5가지를 통해서 우리 신앙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지, 교회가 추구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은혜가 무엇인지를 아울러 배우게 된다. 사실 에드워즈가 말하는 성령의 바른 분별기준 5가지는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요소들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결국 이러한 일들이 우리의 영혼 속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 성숙한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에 의해 이러한 요소들이 우리 안에 더욱 풍성해지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에 의한 부흥이란 한 개인의 성도 안에, 그리고 집단적인 교회 내에서 이러한 요소들이 평상시보다 더욱 크게 비범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과 사랑, 성경의 권위에 대한 존중과 성경탐구의 열심, 진리와 교리와 신학공부에 대한 관심, 죄에 대한 회개와 거룩과 성결한 삶의 추구,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등이야 말로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서 언제나 성도들과 교회가 힘써 추구해야 할 성령의 역사다.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역사적 평가
이양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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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즈는 1703년 10월 5일에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지난해 2003년은 에드워즈 탄신 300주년을 기념하였습니다. 에드워즈 탄신 300주년을 바라보면서 2002년 12월 7일 에드워즈를 사랑하는 몇몇 학자들이 모여 “한국에드워즈학회”를 창립하였습니다. 이 창립총회에서는 이상현 박사님을 회장으로 선출하였고, 저는 부회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상현 박사님이 한국에 계셨으면, 이 강연을 이상현 박사님이 맡아 하셨을 텐데 그렇지 못해 제가 맡아서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에드워즈 연구가가 아니라 칼빈 연구가이기 때문에 사실 에드워즈에 대해 깊이 있게 말씀드릴 수 없음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이 강연을 수락한 것은 한국에드워즈학회 부회장이라는 직임 때문이기도 하며, 또 에드워즈를 누구 못지않게 사랑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한국에드워즈학회는 창립총회 때 이상현 박사님을 모시고 “에드워즈의 사상”이라는 특별 강연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2003년 3월 10일에는 장경철 교수님을 모시고 “에드워즈의 종말론”이라는 주제로 연구발표회를 개최하였습니다. 2003년 10월 22일 “조나단 에드워즈 탄신 300주년 기념 감사예배 및 특강”을 가졌습니다. 특강은 이상현 박사님께서 “신앙과 실천 -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이라는 주제로 하셨습니다. 2003년 12월 13일에는 김성광 박사님을 모시고 “에드워즈의 영성 신학”이라는 주제로 연구발표회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2004년 5월 17일에는 노병기 박사님을 모시고 “에드워즈의 중생론”이라는 주제로 연구발표회를 가졌으며, 2004년 12월 18일에는 양낙흥 박사님을 모시고 연구발표회를 가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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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즈를 예찬하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반면에 에드워즈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20세기 초는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도덕주의에 반하여 진보주의가 영향을 미치는 시대였으며, 이 때는 에드워즈에 대하여 비판적이었습니다. 1920년대에 에드워즈 전기를 쓴 팍스(Henry Bamford Parkes)는 에드워즈를 젊은 날의 “범신론적” 통찰을 칼빈 신학의 엄격한 틀 속에 집어넣은 비극적 인물로 보았습니다. 팍스는 에드워즈가 칼빈주의에 대해 심사숙고했더라면 미국 사상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 되었을 것이며, 미국의 미래 역사 전체를 변화시켰을 것이라고 아쉬워했습니다. 그러나 1949년에 에드워즈에 대한 지적 전기를 쓴 페리 밀러(Perry Miller)는 에드워즈를 미국의 가장 위대한 천재로 묘사했으며, 부수적으로 칼빈의 범주들을 사용한 심원한 현대적 철학자로 묘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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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즈는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 평가받을 만합니다. 마스덴도 에드워즈에 관해 “모든 미국 신학자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신학자” 라고 평가하였습니다. 밀러는 에드워즈를 “18세기에 견줄 만한 사람이 거의 없었으며” “그 당시 지적으로 가장 현대적인 사람”이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마스덴은 에드워즈에 관해 “그는 가장 예리한 초기 미국 철학자이었다” 하고 평가하였다. 이 위대한 신학자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활발합니다. 에드워즈에 관한 새로운 저서들이 매년 여러 권 나오고 있으며, 수십 편의 논문들과 서평들과 박사 학위 논문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마스덴은 에드워즈에 저작에 관해 “그의 저작들 가운데 적어도 세 저작 - 종교적 감정, 의지의 자유, 참된 덕의 본질 - 은 기독교 저작의 역사에 있어서 걸작으로 남아 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에드워즈의 저작들은 여전히 많은 평신도 독자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에드워즈는 정치와 군사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에드워즈는 미국 혁명 이전 영국의 한 주에서 산 사람이었습니다. 이 구세계는 엄격한 계급적 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에드워즈는 뉴잉글랜드 기준으로 보면 귀족정 지지자이었습니다. 에드워즈는 성직자, 행정관, 판사, 군인 지도자, 지방 귀족, 상인 등 지배 계층에 속한 엘리트 가문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에드워즈 가문이 통혼한 스토다드 가문과 윌리암스 가문 등은 커넥티캇 강 계곡 혹은 서부 매서츄세트 (햄프셔 군)과 커넥티캇의 일부를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에드워즈는 영국의 프로테스탄트 문화, 프랑스의 가톨릭 문화, 인디안 문화 등 세 개의 문화들이 갈등하는 소용돌이 속에 살았습니다. 각 문화는 북미를 지배하려고 격렬하게 분투하고 있었습니다. 결과는 영국의 프로테스탄트 문화가 승리하였지만, 에드워즈 당시에는 아직 그 결과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 국제적 맥락이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크게 중요하였습니다. 에드워즈는 로마 가톨릭교와 인디안들에 대해 염려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습니다. 에드워즈는 복음을 위한 전망과 관련된 세계 전쟁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역사를 보았습니다.
에드워즈는 그의 시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종교적, 사회적 운동의 중심에 있던 활동가이었습니다. 그는 그 지역의 놀라운 부흥 운동을 감독하였으며, 그 부흥 운동은 미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적 실천들 가운데 하나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에드워즈의 설교인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들”은 미국의 가장 유명한 설교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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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즈는 칼빈주의적 전통에 서 있는 신학자이었습니다. 페리 밀러는 홈즈(Stephen R. Holmes)의 표현을 빌리자면 에드워즈를 “원형적 로크주의적 경험주의자”(prototype Lockean empiricist)로 재구성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에 반해 체리(Conrad Cherry)는 에드워즈를 칼빈주의적 전통에 굳게 서 있는 신학자로 평가하였습니다. 놀(Mark A. Noll)은 에드워즈의 사상을 역사적 칼빈주의를 18세기의 철학적 언어로 다시 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에드워즈의 사상의 중심적인 원리는 하나님의 주권인데, 이것은 칼빈주의적 유산에 충실한 것이었습니다. 성서에 계시된 것처럼 삼위일체이시며 영원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주의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십니다. 단순하게 말한다면, 하나님의 주권이란 어떤 선, 특히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어떤 선이 하나님의 것이냐 아니면 인간의 것이냐 하는 의문의 문제가 있을 때 그 대답은 항상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통치를 저 멀리 추상화시키는 것을 피하였습니다. 오히려 그는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구원의 위대한 일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우주의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성격을 가리킵니다. 에드워즈의 사상의 중심적 원리가 하나님의 주권이었다면, 그의 삶과 활동의 중심적 실천적 동기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과의 영원한 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는 그의 확신이었습니다. 에드워즈는 이 중심적 원리와 이 중심적 원리에 근거한 행동을 다 강조하는 사람으로 사상가이면서 활동가이었습니다.
에드워즈는 17세기 퓨리탄 전통과 유럽 대륙의 칼빈주의적 전통에서 이어받은 신학에 중실하였으며, 18세기 국제적 복음주의의 출현에 중추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마스덴은 “에드워즈는 후의 복음주의자들에게 나타나는 몇몇 특징들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칼빈주의적 사상가였다는 사실과 그가 철저하게 지성적이었다는 사실과 그리고 그가 18세기에 활동하였다는 사실 때문에 그는 그의 복음주의적 후예들과는 매우 다르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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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즈는 그의 신앙론에 있어서 칼빈과 칼빈주의적 전통에 서 있었습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신앙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습니다. 즉, 신앙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애에 대한 확고하고 확실한 인식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어진 약속의 진리에 근거한 것이며 성령을 통해 우리 지성에 계시되고 심정에 인쳐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정의에 의하면 신앙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칼빈은 “신앙은 성령의 주된 일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성령의 은밀한 에너지에 의해 우리는 그리스도와 모든 그의 유익들에 이르며,” “성령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자신에게 효과적으로 연합시키는 띠이다” 라고 칼빈은 말하였습니다.
칼빈에게 있어서 신앙이 성령의 일이듯이 에드워즈에게 있어서도 신앙은 성령의 일이었습니다.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성경은 많은 곳에서 크리스찬의 사랑에 대해 말할 때 마치 그것이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성령과 동일한 것이거나 혹은 적어도 영혼 속에 있는 성령의 으뜸가고 가장 자연스러운 호흡과 활동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에드워즈는 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을 설명할 때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특별한 행동을 하기 전에는 아무도 구원의 상태에 있을 수 없으며, 또한 믿음이 역사하기 전에는 한순간도 성화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데, 이 주장은 사실일 수 없다. 모든 경우에 행동이 있기 전에 원리가 있어야 한다. 변화에 수반되는 행동이 있기 전에 먼저 죄인의 마음속에서 변화가 있어야 한다. 성결이 실행되어지기 전에 성결의 원리가 있어야 한다. (원인이 결과 앞에 오듯이) 본질상 믿음의 행위가 있기 전에 변화가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만약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이 성공적인 행위가 되려면, 즉 정신의 한 생각과 행동이 어떤 식으로든 다른 것을 뒤따르는 행위가 되려면 적절한 시간 안에 이루어져야 한다.” “먼저 정신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관념, 즉 그에 대한 적합하고 참으로 어울리는 관념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영혼이 성화되기 전에는 있을 수 없다. 또한 참된 믿음, 즉 받아들이려는 의지의 행위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도 성화 전에 있을 수 없다. 또한 그리스도를 죄에서의 구원자로 받아들이기 전에 죄에 대한 증오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또한 이것은 성화 없이 있을 수 없다.” 이에 대해 체리는 “‘마음의 변화’, ‘성결의 원리’, 신앙 안에서 그리스도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선행하는 지성 안에 있는 관념적 행위는 에드워즈가 다른 곳에서 성령의 임재를 표시한 것이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또한 신앙에 있어서 지적인 면도 있지만 의지적인 면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 점에서 칼빈과 에드워즈는 견해를 같이했습니다. 칼빈의 신앙 정의에 의하면 신앙은 성령의 일인데, 우선 성령은 우리 지성에 계시합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태양과 같아서 그것이 선포되는 모든 사람들에게 비치지만 맹인에게는 아무 효과를 끼치지 못한다. 이제 우리 모두는 본성상 이 점에 있어서 맹인들이다. 따라서 성령이 내적 교사로서 그의 조명을 통해 말씀을 위한 입구를 만들지 않으면 말씀이 우리의 지성 속에 들어올 수 없다.” 성령은 우리의 지성에 계시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심정에 인칩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심정이 성령의 능력에 의해 강화되고 지원을 받지 않는다면 지성이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조명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스콜라 학자들을 비판하여 “이 문제에 있어서 스콜라 학자들은 완전히 잘못 되었다. 그들은 신앙을 고려하면서 신앙을 지식에서 나오는 발가벗고 단순한 동의와 동일시하며 마음의 신뢰와 확신을 배제시킨다”고 말하였습니다.
체리는 에드워즈의 신앙관을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에드워즈의 신앙 안에서의 ‘맛봄’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대신해 줄 수 없고, 다른 사람에게 줄 수도 없는 경험이다. 그것은 무엇에 대한 단순한 인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의 인식이다. 마치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꿀의 달콤한 맛을 지각할 수 없으며,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없듯이, 신앙의 지식도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도달할 수 없고 다른 사람에게 줄 수도 없다.” 또 체리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마치 어떤 사람이 꿀의 달콤한 맛에 대하여 알 때가 아니라 실제로 지각할 때만 꿀의 달콤한 맛을 참으로 알듯이, 신앙의 단순한 관념을 관조하기 위해 뒤로 물러갈 때가 아니라 그것을 직접 지각할 때 신앙의 단순한 관념을 참으로 안다.” 체리는 “맛의 비유에 내포된 인간 감정에 대한 강조는, 에드워즈가 신앙을 묘사함에 있어서 인식과 살아 있는, 감정적 의지의 작용이 상호 밀접하게 결합된 것으로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에드워즈는 “영적인 이해는 주로 영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마음의 감각으로 이루어진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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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에게 있어서 신앙과 구별되는 구원의 확신이라는 가르침이 있었는가, 혹은 칼빈에게 실천적 삼단논법이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막스 베버(Max Weber)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이라는 저작이 나온 이후 많이 논쟁되어 온 문제이긴 합니다만, 칼빈에게 그런 사상이 있음이 분명합니다. 비크는 칼빈에게 실천적 삼단논법이 있음을 입증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빌립보서 1:6 주석을 인용합니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유익들을 끊임없이 명상하라. 이는 그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격려하고 확증하며 그들의 마음 속에 항상 이 삼단논법을 숙고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예언자가 증거한 것처럼(시 138:8; 사 64:8) 그 자신의 손들이 시작한 일을 버리지 않는다. 우리는 그의 손들의 일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가 우리 안에 시작한 것을 완성할 것이다.” 이어서 비크는 “요컨대 칼빈은 실천적 삼단논법의 오용에 대해 경고하는 만큼 그것을 부인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칼빈은 요한일서 주석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신앙이 행위들에 근거한다고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비록 모든 사람이 그의 행위들로부터 그의 신앙에 대한 증거를 가지지만 신앙이 행위들에 근거된다는 것이 아니라, 행위들이 표시로서 첨가된 후속적 증거이다. 신앙의 확실성은 그리스도의 은총 속에만 있다. 그러나 삶의 경건성과 거룩성은 참된 신앙을 하나님에 대한 허구적이고 죽은 지식으로부터 구별지어 준다.” 이 구절을 볼 때 칼빈은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부정하지만 신앙에는 행위가 따르며, 그 행위는 참된 신앙의 증거임을 주장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표시로서 첨가된 후속적 증거입니다. 신앙의 확신의 문제에 있어서 중심적인 것은 하나님의 은총, 그리스도의 공적, 성령의 역사이지만 삶의 표적들도 주변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성령이 성도의 확신을 위해서 성도의 마음 속에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음에 그런 작용을 할 때 의지가 변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의지가 변할 때 그 변화는 실생활 가운데 식별됩니다. 그 곳에서 의지는 내적인 면 뿐만 아니라 외적인 면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생활의 투쟁과 시련 가운데서도 크리스찬의 삶을 이행하려고 노력할 때, 인간의 영에 대한 성령의 증거는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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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에드워즈는 삼위일체적 도식에 있어서 칼빈과 생각을 같이 하였습니다. 신앙에 관한 칼빈의 정의에 있어서도 삼위일체적 도식이 나오지만 다른 곳에서도 삼위일체적 도식이 많이 나타납니다. 칼빈은 이런 자기의 도식이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설에 부합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구원에 있어서 동인은 하나님 아버지시며, 질료인은 그리스도이시며, 형상인 혹은 도구인은 신앙이며, 목적인은 하나님의 공의, 혹은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또한 사도행전 22:16을 주석하면서 “그러므로 죄의 용서에 있어서 우리는 하늘 아버지 이외 다른 창시자를 찾지 말아야 하며 그리스도의 피 이외 다른 질료인을 상상하지 말아야 한다. 형상인으로 말하면 성령이 참으로 지도적인 역할을 하시지만 복음의 선포와 세례와 같은 하급 도구가 첨가된다.”라고 말합니다. 이 본문들을 보면 칼빈은 대체로 하나님을 동인으로, 그리스도를 질료인으로, 성령의 활동을 형상인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17년 구마(Louis Goumaz)는 요한 칼빈의 신약성서 주석에 따른 구원론이라는 저서에서 위와 비슷한 해석을 한 바 있습니다. 구마는 하나님 아버지를 구원의 동인으로, 그리스도를 질료인으로, 성령의 활동을 형상인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인으로 해석했습니다.
홈즈는 에드워즈의 신학을 삼위일체론적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또한 대너허(William J. Danaher Jr.)도 에드워즈의 윤리를 삼위일체론적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성부는 구세주를 지명하고 제공하시며, 스스로 그 값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사도록 허락하신다. 성자는 그 자신을 바치고 스스로 그 값이 되심으로 구세주가 되신다. 그리고 성령은 자신을 전달해 주심으로써 값 주고 산 그것을 우리에게 직접 전달해 주시는데, 그가 값 주고 산 것이다. . . . 그래서 우리의 유익이 구매된 것도 성령에 의해서이며, 그것을 구매하신 분도 성령이며, 구매된 대상도 성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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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과 에드워즈가 자연에 나타난 계시를 중시한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칼빈은 우리에게 있어서 세계의 아름다운 질서는 하나님을 명상하는 거울이라고 말했습니다. “정교하게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는 이 세계야말로 일종의 거울이요, 바로 이 거울로 달리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정관할 수 있다.”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를 보여 주는 증거는 하늘과 땅에 셀 수 없이 많다. 그것은 천문학이나 의학, 또는 일체의 자연 과학의 엄밀한 연구 대상으로 정해진 심원한 것들만이 아니라 가장 배우지 못하고 가장 무지한 자라도 보지 않을 수 없게 제시되어 그들이 눈을 뜨기만 하면 반드시 그것들을 목격하게 되는 것들이기도 하다. 사실 이러한 학문을 다소나마 수학한 사람들이라면 그 도움으로 하나님의 지혜의 비밀을 보다 더 깊이 통찰할 수 있다.” 이어서 칼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학문에 무식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창조와 솜씨를 충분히 관찰할 수 없다든가,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별의 운행을 조사하고, 그 위치를 정하여, 그 간격을 측정하고, 그 특성들을 기술하기 위해서는, 기술과 정밀한 수고가 필요하다. 이러한 것을 연구할 때, 하나님의 섭리가 한층 더 명백하게 그 자체를 보여 주는 것처럼, 인간의 마음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더 높은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 눈으로만 배운 일반 대중이나, 가장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그 기술의 탁월함은 깨닫게 마련이다. “그것은 특수하면서도 질서 정연한 천상의 무수한 다양성이 그 자체를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창조물 가운데서도 특히 인간의 몸은 창조주의 슬기를 잘 나타낸다. “우리가 갈렌(Galen)의 노련한 기술로 인체의 관절, 균형, 미, 효용 등을 조사하기 위해서는 탁월한 재간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인체의 구조가 정묘하기 때문에, 그 창조주가 당연히 놀라운 일꾼으로 판단되어야 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것이다.”
이상현 박사님에 의하면, 에드워즈는 자연과학이라는 관념 속에 들어가 그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지적하려고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에드워즈가 아주 젊었을 때 쓴 글들 중에 원자에 대한 논문이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원자라는 것은 그 이상 부술 수 없는 물체, 더 이상 어떤 힘도 그것을 쪼갤 수 없는 그 무엇, 그것이 원자라고 했습니다. 에드워즈는 그 당시 과학자들의 정의를 받아들이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원자라는 것이 모든 물체의 근본적인 어떤 무엇이며 더 이상 부서질 수 없는 무엇이라고 할 것 같으면 결국 그것은 하나님의 힘이 아니냐, 하나의 어떤 행위가 아니냐, 즉 부서지는 것을 저항하는 그 행위, 결국 원자의 본질은 힘이요 행위다. 그런데 세상의 어떤 유한한 것도 그것을 부술 수 없다면 그건 무한한 힘이 역사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런 무한한 행위가 곧 원자라면, 원자는 결국 무한하신 하나님의 행위”라고 에드워즈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상현 박사님은 “이렇게 에드워즈는 자연과학의 도전에 겁을 먹기는커녕 과학자들이 얘기하는 원자 그 속에서 실제로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지적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에드워즈의 대담하고 독창성 있는 신학자로서의 또 철학자로서의 지성을 엿볼 수 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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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즈는 칼빈처럼 창조의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에 두었습니다. 칼빈은 제네바 교회의 교리문답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인간의 삶의 최고 목적이 무엇입니까?” “인간들이 자기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무슨 이유로 당신이 그렇게 말합니까?”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영광을 받기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이 세상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의 시원이시기 때문에 우리 삶이 그의 영광을 지향하는 것이 확실히 적절합니다.”
놀은 에드워즈가 하나님의 영광을 전하는 것을 목회자와 신학자로서의 자신의 의무로 생각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에드워즈 신학의 통합적 중심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였습니다. 에드워즈는 실체와 형상으로 실재를 설명하는 전통적인 서구의 형이상학으로부터 이탈하여, 그것을 성향적 힘(dispositional forces)이나 경향성들(habits)과 같은 하나의 역동적인 조직체로서의 실재라는 아주 현대적인 개념으로 대체하였습니다. 이상현 박사님은 뉴턴과 로크가 현실재에 대한 정태적이고 입자적인 견해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반면, 에드워즈는 그것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보았습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완전한 현실태일 뿐만 아니라, 계속적인 활동을 통하여 완성된 그 현실태 자체를 계속 재현(repetition)하는 성향, 즉 경향성입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마음의 경향성은 합리성과 도덕적 행위를 가능케 하는 기능을 갖습니다. 그러므로 경향성은 존재와 생성의 원리임과 동시에 앎의 원리입니다. 이러한 경향성을 통하여 앎은 존재와 생성에 연결됩니다. 역사 안의 모든 순간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의 재현 또 그 재현의 반복으로서 이해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한한 하나님의 영광의 절대적이고 완전한 재현은 무한한 시간을 요구하며 다 성취되는 한 초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존재는 본질적으로 아름다움인데, 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그 본성에 의하여 “드러나며, 빛을 내며, 나타내고, 또 자기를 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저 아름다운(beautiful) 존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아름답게 만드는(beautifying) 존재입니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하나님이 하나님이며, 다른 모든 존재들과 구별되며, 또한 그들보다 뛰어난 것은 주로 그의 신적 아름다움에 의해서”입니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하나님의 가장 기초적인 성향은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에 대하여 기뻐하는 성향, 곧 하나님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보는 경우 기뻐하는 성향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완전한 관념을 가지는 동시에 하나님 자신을 무한히 사랑하십니다. 충만한 가운데 현실태로 존재하는 하나님은 또한 아름다운 관계들의 증식을 통하여 자신의 자아를 더욱 확대하고 증대하며 증식시키는 경향성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름다움에 아름다움을 더할 수 있으며, 또한 존재에 존재를 더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이상현 박사님은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가 아직도 현실화의 과정 속에 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원초적이며 영원토록 완성된 현실태가 관계의 팽창을 향하여 아직도 나아갈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하고 말합니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이 세계를 만드신 것은 자신의 영광을 전달하고, 피조물은 그 영광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인데, 이는 그 영광을 지성과 가슴으로 받도록 하기 위해서이다”고 말했습니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시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자기 재현의 과정은 무한한 시간을 필요로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내적인 충만성이 무한히 완전하기 때문이다.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피조물을 사랑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피조물들에 의해 존경받는 것을 참으로 사랑하신다. 이는 모든 이들이 자기들이 사랑하는 자들에 의해 좋게 생각되는 것을 사랑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일이 하나님께 참으로 기쁨이 되도록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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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즈가 교회론에 있어서도 칼빈주의 전통에 충실하였는가 하는 것은 논쟁되는 문제입니다. 적어도 당시 미국의 칼빈주의 전통에 서 있던 사람들과는 불화했습니다. 에드워즈는 자기의 외조부 스토다드(Solomon Stoddard)와는 다른 입장을 가졌으며, 그의 이종사촌인 윌리엄스(Solomon Williams)와도 다른 입장을 가졌습니다. 윌리엄스는 에드워즈를 재세례파, 독립파, 영국 국교회를 후원하는 자, 독립적인 반율법주의적 분리주의를 후원하는 자라고 비판하였으며, 회중에게 독재를 하는 로마주의적 사제들과 연결시켰습니다. 그래서 놀은 에드워즈의 교회론은 청교도 전통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았습니다.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의 왕국을 위한 두 경쟁자, 즉 그리스도와 사탄이 있다. 종교를 공적으로 고백하려는 계획은 사람들이 어느 편에 있는지를 선언하려는 것이다.”
칼빈도 그의 교회론에서 권징을 강조했습니다. 칼빈은 교회 안에 참된 신자가 아닌 사람들이 들어와 있는 것은 “그들이 합법적인 재판에 따라 정죄되지 않거나 엄격한 권징을 마땅히 해야 할 만큼 항상 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칼빈은 이 점에서 교회 안에 사악한 자들이 많이 있다는 재세례파의 주장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사실상 교회들이 질서가 잘 잡혀 있다면 그 품안에 사악한 자들을 품고 있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했습니다. 목회자들이 권징을 게을리하거나 아니면 엄격하게 권징을 실행할 수 없기 때문에 드러난 악인들조차 성도들의 집단으로부터 제거되지 않고 있습니다. 칼빈은 “나는 이것을 잘못이라고 인정하며 가볍게 보려고 하지 않는다” 하고 말했습니다. 칼빈은 사악한 자들과의 친교를 삼가는 것이 경건한 사람들의 임무임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악인들의 장막을 피하는 것과 그들을 싫어하여 교회와의 친교를 끊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권징을 통해 가시적 교회 안에 있는 위선자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시적 교회 안에 위선자들이 있다고 해서 교회를 떠나 다른 집단을 형성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서 구속활동을 하는 두 방편은 말씀과 성례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순수하게 전파되고 성례가 바르게 집행되면 하나님의 교회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옛날의 카타리파나 노바티아누스파나 도나투스파 그리고 칼빈 당시의 재세례파는 교회의 일치를 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25:32의 말씀처럼 양과 염소를 분리시키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유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순결하지 못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교회에서 분리해 나가는 일은 그리스도를 찢는 일이어서 용납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양떼로부터 제외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한 머리 아래 한 몸으로 모으는 것을 제외하고는 희망할 안전이 없기 때문이다. . . . 그리스도는 그의 교회로부터 찢어지지 않을 것이며 찢어질 수 없다. 그것에 그는 불가분리의 매듭으로 결합되어 있다. . . . 그래서 우리가 신자들과의 일치를 이룩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로부터 단절된 것으로 본다.” 칼빈은 삶의 순수성의 문제로 분리해 나가는 것도 잘못이지만 교리에 다소 불순성이 개입된다 하더라도 분리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더욱이 교리들에 있어서나 성례들의 집행에 있어서 어떤 잘못들이 들어올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를 교회내의 교제로부터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참된 교리의 모든 조항들이 동일한 종류에 속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것들은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것으로서 모든 사람들은 그것들을 종교의 고유한 원칙들로 확정하고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 그리스도는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 우리에게 있어서 구원은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해 있다는 것 등등이다.” 칼빈에 의하면 교리들 가운데 본질적인 것이 있고 비본질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런 본질적인 것이 부정되면 참된 교회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들 중에는 신앙의 일치를 깨뜨리지 않는, 논쟁이 되는 다른 것들이 있다.” 즉, 비본질적인 것들이 있습니다. 칼빈은 빌립보서 3:15을 인용하고 나서 “이것은 이런 비본질적인 문제들에 대한 불일치가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분열의 자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지적해 주지 않는가?” 라고 묻습니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시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향의 충만한 실행이며, 하나님의 외향적 자기 재현의 완전한 실현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이후의 세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성취된 것의 영속적인 재현으로 의도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성향이 참으로 행사된 이후에도, 하나님은 계속적으로 자신의 신적인 성향을 행사합니다. 하나님이 계속적으로 자신의 신적인 성향을 행사하는 것은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이미 성취된 바로 그것을 증대시키기 위함입니다.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마치 그리스도가 교회를 향해 자연적 경향성을 가지고 있어서 교회가 없으면 그리스도가 완성되지 않은 것인 양, 교회는 그리스도의 완성이라고 말한다(엡 1:23). 우리가 어떤 것을 향한 자연적 경향성이 있는데, 그것이 결여되어 있다면 우리는 불완전하다. 남자는 여자 없이 불완전하다. 여자가 남자 그 자신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신부 없이 불완전하다. 영혼은 육체 없이 불완전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영혼들은 육체 안에 거하려는 자연적 경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 . 성자는 하나님의 충만이며, 교회는 하나님 아들의 충만이다.” 그리하여 교회의 점진적 세워짐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의 증대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영원한 세대에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에드워즈는 교회의 실재를 완성된 실재로 보는 동시에 점점 더 충만해지며 완벽해지는 과정 속에 있는 실재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에드워즈는 교회의 가시적 성격을 강조했습니다.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모든 가시적 그리스도인들 혹은 성도들,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모든 제자들 혹은 청중들은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성서 관념에 따라 그리스도에 대한 구원의 관심을 고백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에 대한 관계를 고백하는 것임이 명백하다” 이 고백은 심정의 경건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심정의 경건과 관계된 것들을 고백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교적인 것 혹은 그리스도의 종교를 고백한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 에드워즈는 가시적이고 고백적인 성도들이 아닌 사람은 그리스도의 가시적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에드워즈는 구원의 신앙을 고백한 사람들에게만 성찬 참여를 허락할 것을 주장하다가 결국 노샘턴 교회를 떠나야만 했습니다.
칼빈과 에드워즈 두 사람이 다 권징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하여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밀한 예정에 따라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많은 양들이 밖에 있으며 많은 이리들이 안에 있다”고 말함으로써 에드워즈만큼 나가지 않았습니다. 요컨대 칼빈은 교회 안에 예정받은 자와 예정받지 않은 자가 있음을 주장하지만 누가 예정받은 자인지는 하나님만 아신다고 말함으로써 권징을 끝까지 밀고 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칼빈의 이 구별을 회심을 경험한 자와 회심을 경험하지 않은 자로 나눔으로써 구별의 기준을 가시적이 되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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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즈는 비교적 단명했습니다. 1703년 10월 5일에 태어나서 1758년 3월 22일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55년을 채 살지 못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356년부터 430년까지, 루터가 1483년부터 1546년까지, 칼빈이 1509년 7월10일부터 1564년5월 27일까지, 웨슬리가 1703년부터 1791년까지 산 것과 비교한다면 가장 단명하였습니다. 에드워즈의 부모들에 비교하면 그는 훨씬 단명하였습니다. 에드워즈의 아버지는 1758년 89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어머니는 1771년 98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에드워즈가 좀더 오래 살았더라면 더 많고 더 훌륭한 저작들을 세상에 내놓았을 것입니다.
에드워즈는 훌륭한 후손들을 많이 두었습니다. 그의 아들인 조나단 에드워즈 2세(Jonathan Edwards Jr., 1745-1801)는 에드워즈의 신학 전통을 계승하였으며, 그의 손자인 드와이트(Timothy Dwight, 1752-1817)는 1795년 예일 대학의 총장이 되어 부흥 운동과 개혁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윈쉽(Albert E. Winship)은 1900년 죽스와 에드워즈: 교육과 유전에 관한 연구(Jukes-Edwards: A Study In Education and Heredity)라고 하는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윈쉽은 이 책에서 죽스(Max Jukes) 가문과 에드워드 가문을 비교하였습니다. 죽스 가문의 1,200명의 후손들 중에는 300명 이상의 “직업적인 걸인들”, 50명의 탈선 여성들, 7명의 살인범들, 60명의 절도범들, 130명의 다른 죄수들이 있었습니다. 반면에 에드워즈 가문의 1,400명의 후손들 중에는 수십 명의 성직자들, 13명의 고등 교육 기관 총장들, 65명의 교수들, 그리고 다른 많은 명사들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영성, 조나단 에드워드와 미국을 하나로 만든 대각성운동
조나단 에드워즈는 미국 청교도 후예 가운데 대표적인 목회자, 선교사인 동시에 신학자요 철학가이다. 그는 1703년 10월 5일 East Windsor, Connecticut 에서 청교도 2세로 태어났다. 아버지 디모데 에드위즈(Timothy Edwars)는 이곳에 있는 교회의 목사였고, 어머니 Esther는 Northampton, Massachusetts에서 시무하는 솔로몬 스토달다(Solomon Stoddard)목사의 딸이었다. 자녀 11명을 두었는데 조나단은 다섯 번째 아이여서, 위아래로 10명의 여형제를 둔 독자로 자라났다.
어릴 때부터 청교도적인 경건 생활에 썼으며, 학문적으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가정학교에서 철저한 기독교적인 교육을 받던 중 13세에 예일대(Yale college)에 입학하였다. 뛰어난 관찰력과 지적인 호기심으로 곤충에 대한 연구를 하였는데 거미줄의 모습과 형태, 목적에 관한 상세한 과학 리포트를 작성했다. 그는 여기서 거미가 거미줄을 뽑아 내는 신비한 모습에서 창조자의 끝없는 선하심과 오묘하신 지혜를 발견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아이작 뉴톤의 과학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졌으며, 14세에는 “자연 과학”(Natural Philoso- phy)라는 제목으로 물질주의와 무신론을 반박하는 글을 모아 출판하기도 했다. 그는 지식의 경지에 다다르면 반드시 하나님의 손길(touch)을 발견하게 된다고 믿었기에, 기독교인의 학문 추구를 적극 장려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된 마음을 가진 신앙인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섭리를 터득하는 지혜를 갖게 된다고 가르쳤다. 17세에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바로 예일대 신학부에 진학하여 목회자 과정을 2년간 공부하였다. 신학생 시절인 1721년(18세)에 그동안 의심을 가졌던 예정론을 수용하면서, 하나님의 주권(divine sovereignty)과 성경과 자연에 계시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새로운 인식(“new sense”)을 가지게 되었다.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영광은 그의 경건 생활의 중심 주제가 되었다. 재학 중 1년간 뉴욕시에서 목회하기도 하였다. 1723년에 졸업한 후 3년간 예일대학에서 강의를 하였다(1724~26).
24세 때(1727) 장인이 시무하는 Northampton에 부목사로 갔는데, 2년 후인 1729년에 장인께서 돌아가시자 30세 에 담임목사로 취임하여, 대각성 운동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그의 목회 말년에 교회에서 나가라고 권고를 받았는데, 그 이유는 성찬식 문제에 있었다. 그가 성장할 때는 청교도들의 2세의 신앙이 상당히 약해져 있었다. 열정적인 신앙이 식어갔던 것이다. 조나단은 장인이 시작한 Halfway Covenant(유아세례를 받았지만 입교하지 않는 아이들도 성찬에 참석해도 된다는 주장)를 반대하였다. 이 주장에 의하면 초신자들도 교회에 초청하여 성찬식에 참여하도록 했다(let bring them to the Church and become member!). 그러나 조나단의 생각은 신앙이 없이 성찬식을 받으면 무의미하다는 것이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회심한 세례교인만 주의 만찬에 참여하도록 가르치고 실행하였다(1749년). 여기에 반발을 느껴 교인들의 불평이 생겼다. 불평을 늘어놓았는데 목회자가 서재에 너무 많이 앉아 있고 심방이 부족하다(하루에 10시간 이상 공부함), 너무 잘산다, 장로들의 자녀들을 책벌하다 등이었다. 이리하여 조나단은 1750년 7월 1일 고별설교를 하고 23년간 시무한 교회를 사임하였다.
이듬해인 1751년에 인디언 마을인 Stockbridge에서 원주민 선교사로 봉사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사역하는 동안 원주민 언어습득, 병치레, 인디언 전쟁들, 강력한 개인적인 적들로부터 공격당해 어려운 시간을 보내면서도 저술 활동에 심혈을 쏟았다. 그의 유명한 저서 Freedom of Will이 이때 출판되었다(1754년). 그의 유고작인 Concerning the End for Which God Created the World(1765)과 The Nature of True Virtue(1765)에서 하나님의 완전성과 창조성을 연결시켰다. 주요 질문은 “하나님께서 왜 세상을 창조하셨는가?” 이다. 모든 것이 완성된 하나님은 더 이상 소원이 없는데(모든 것이 실체화됨) 왜 창조를 하셨나? 하나님께서 달성하지 않는 것이 무엇이냐? 창조하실 때 원인은 없다라고 이야기하면 세상과 인생의 목적이 없게 된다. 심심해서 창조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하심으로 하나님은 더 완전한 분으로 되고 있다고 과정신학에서 이야기한다. 그러면 세상이 없으면 하나님이 없는가? 그에 의하면 천지 창조는 하나님의 영광의 나타남이다. 창조와 구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다보며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행복이라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내적 하나님(God ad intra), 외적 하나님(God ex extra)을 구분하고 있다. 내적인 하나님이란 사랑의 힘으로 연결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의 내면적 구조를 말한다. 사랑과 아름다움에 대해 완전한 실재화(disposition to love and beauty)를 이룬다. 이 사랑과 아름다움의 본성(nature)과 힘(power)이 외적으로 표현 (재현, 발표)되는 것이 우주를 창조한 것이다. 그래서 창조의 목적은 내적인 사랑의 삼위일체 관계, 내적인 아름다움, 영광이 외적으로 계속 발표하기 위함이다. 사람이 창조된 목적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고 기뻐함으로써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에 되풀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 죄를 통해 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인간의 삶과 생애를 통해 우리 눈에 보이도록 보여주시고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신다. 인간이 예수를 보고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깨닫도록 한다. 기독교인들이 성령의 힘이 없으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경험 못하며, 성령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우리도 사랑할 수 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경험하게 하신다. 이것을 되풀이시킨다. 하나님의 내적인 아름다움이 무궁하기에(infinite) 이것을 다 표현하기 위해 무궁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종말이란? 에드워즈의 종말론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교인들로 하여금 교회가 완성될 때 예수께서 재림(교회는 신부, 신랑예수의 혼인잔치)하신다는 것이다(wedding without end). 인간의 역사는 계속된다. 이 세속사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계속 반복되어 상처를 치유하며 위로하신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영원히 계속 된다. 영원히 성도들은 하나님의 내적 아름다움과 사랑을 되풀이하여 끝이 없이 계속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천국에 대해 열망(exciting expectance)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신이 물려받은 개혁전통을 세상과 조금도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세상에 맞은 메시지를 선포하였다. 그의 사상 배경에는 다음 것들이 있었다.
1) 경험주의(John Locke) 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은 경험을 통해 들어온 정보로 온 것을 토대로 안 것인데, 마음속의 반성(reflection), 하나님 존재, 인간의 자유, 인과관계 등을 부인한다. David Hume도 주장하기를 성냥을 그은 것과 불이 붙는 사건이 있을 뿐이지 이 사이에 원인이 없다고 한다. 에드워즈의 반박: 밖의 세계의 구조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밖의 정보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알 수 없다. 성령께서 인간 마음을 각성, 새롭게 만들지 않으면 우리가 사물을 볼 때 연결시킬 수 없다. 성령의 역사로 모든 만사가 하나님과 연결, 그렇지 않으면 사물을 바로 볼 수도 파악할 수도 없다. 예를 들면, 나무를 볼 때 나무의 실재를 봄; 성령의 실재를 주장한다.
2) Isaac Newton의 자연과학 ꡈ 자연과학의 역사가 200~300년밖에 되지 않는다; 과학의 법칙에 의하면, 현재는 하나님께서 간섭하지 않고 자연법칙으로 움직인다. 아프면 의사에게 간다. 에드워즈의 반박: 하나님의 주권강조. 원자(atomꡈ전전기임, 운동임)를 당시 과학자들이 더 이상 깰 수 없는 입자라고 주장. 마지막 물체라고 이해. = 원자는 하나의 힘의 작동(act of resist power) 하나의 운동임; 어떤 유한한 것도 부술 수 없으면 무한한 힘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임 ꡈ in other words, 과학자들이 말하는 원자의 물체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힘을 추가함. 존재의 원인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함.
3) 알미니언주의(Arminianism) ꡈ 네덜란드 신학자 Jacobus Arminius가 주장한 것이 영국 성공회에 널리 퍼져 있는 이론이었다. 감리교도 이를 채택하고 있는데 장로교의 예정론에 반박하여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고 있다. 원죄의 무능력을 (disabling effect) 최소화하며, 도덕성(morality)를 기독교 신앙의 본질로 삼는다. 에드워즈의 반박: 1734년 11월에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제목의 설교를 하였다. 이 설교로 노스햄톤 뿐만 아니라 케네테컷 강 유역 지역에 큰 부흥의 물결이 일어났다. 교인중 300명 이상 거듭나는 체험을 하였다. 이 사건을 보고한 책 A Faithful Narrative of the Surprising Work of God(1737)은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에까지 영향을 미쳤는데 회심의 유형과 단계를 소개하고 있다.
4) 대각성 운동(The Great Awakening, 1730년대, 1740년대); 1740~42년 사이에 대각성 운동이 미동부 지역 전역에 번졌다. 영국 감리교 운동의 성공적인 부흥사였던 조지 휫트필드(George Whitefield)와 뉴저지 주 장로교 목사인 길벗 테넨트(Gilbert Tennent)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들의 감동적인 설교로 수많은 사람들의 회심하고 변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의 설교는 대체로 조용한 편이나 대각성 운동이 한창 진행되던 때인 1741년에 행한 설교 “Sinners in the Hands of an angry God”은 공포의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하였다. 에드워즈는 대각성 운동을 대체로 지원하였다. 신앙의 체험과 감정문제를 취급하면서, affection(자연적으로 따라오는 뜨거운 감정, 아는 것과 병행하는 것)과 passion(단순 감정)을 구별한다. affection을 ‘사랑의 열정’이라 번역할 수 있는데, 의지를 행동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 바로 신앙적인 열정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 감정은 단순 감정을 지양한 affection이라고 주장한다. 모든 참된 신앙의 본질은 거룩한 사랑(holy love)에 있으며, 이 사랑은 내적인 질과 실지적 결과들에 의해 순수성을 증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평생 쉬지 않고 기도하며 말씀을 준비하고 가르치며 방대한 신앙저술을 하면서도, 그 시대의 복잡한 심리학, 사회학, 철학, 과학적 논쟁들을 연구하고, 거기에 대한 균형 잡힌 신앙인의 자세를 명확히 제시하였다. 1758년(55세)에 현재 프린스톤 대학교의 전신인 College of New Jersey (당시 학교는 목사양성기관이었음)의 학장으로 청빙을 받았으나 사양하였다. 이에 노회가 결정하여 편지를 보내어서(Letter of Nassau Hall) 마지못해 부임하였다. 건강이 좋지 못하여 저술에만 전력을 하려고 했던 계획을 변경해야 했었다. 학장 겸 교수로 취임하였다(1758년 2월 16일). 당시 신 개발된 천연두 주사를 맞았는데 부작용이 생겨 투병하다가 총장으로 부임한지 1달 반인 3월 중순경 에 사망하였다. 1758년 3월 22일이다. 현재 뉴저지주 프린스톤 시내에 있는 공동묘지(Princeton Cemetery, Cleveland대통령도 묻혀 있음)에 묻혔다. 그의 부인도 6개월 후(9월) 별세하셨다.
그리스도의 탁월성 -조나단 에드워드
"장로 중의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계시록 5:5-6상).
I. 그리스도 안에는 양극단의 탁월성들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여러 가지 신적 완전성과 탁월성을 가지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신적인 인격이시기에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그대로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양극단의 성품이 보여주는 차이점은 상대적이며 우리의 생각에 그렇게 이해되는 것뿐입니다. 양극단적인 탁월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고 있습니다. 두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안에는 무한히 높아지심과 무한히 낮아지심이 만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 보다 무한히 크시고 높으십니다. 그리스도는 왕의 왕이시오 주의 주가 되시기 때문에 이 땅의 어떤 왕보다도 더 높으십니다. 그는 하늘보다 높으시고 하늘의 지극히 높은 천사들 보다 더 높으십니다. 그리스도는 이처럼 위대하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 모든 왕들과 군주들은 그 앞에서 땅의 벌레와 같습니다. 천하 만국도 물 한 방울과 같고 가벼운 먼지와 같습니다. 그 분 앞에서는 천사들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는 이처럼 높으시기 때문에 전혀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면에서 우리보다 위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에게 아무런 유익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지각 위에 계시기 때문에 그를 온전히 알 수도(comprehend) 없습니다.
"그 이름이 무엇인지 그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잠30:4) 우리가 아무리 애써도 우리의 이해력은 그의 신적 영광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하늘 보다 높으시니 네가 어찌 하겠으며 음부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욥11:8).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시며 위대한 소유주이십니다. 그는 모든 것의 절대 주권자이십니다. 그는 온 우주를 통치하시고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무엇이나 행하십니다.
그의 지식은 한이 없으시고 그의 지혜는 완전하시고 아무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의 능력은 무한하시고 아무도 그를 저항할 수 없습니다. 그의 풍부는 무한하시고 측량할 수 없습니다. 그의 위엄은 무한히 엄위하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무한히 낮아지셨습니다. 일찍이 그렇게까지 낮아지거나 저급한 자리에 떨어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은 만민으로부터 은혜로운 주목을 받기에 합당하십니다. 창조주이신 그분이 인간과 같이 천한 피조물의 자리까지 낮아지셨습니다. 그리하여 군주들이나 위대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가난한 자"(약2:5)인 가장 비천한 계층의 사람들도 주목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들에게 멸시받던 그들을 결코 멸시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고전1:28).
그리스도는 낮아지셔서 거지들(눅16:22)과 가장 멸시받던 사람들도 주목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야만인이나 수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의 구별"이 없습니다. (골3:11).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높으신 분이지만 어린 아이를 은혜로운 눈길로 주목하실만큼 한없이 낮아지셨습니다. "내게로 오는 어린아이를 금하지 말라" (마19:14)
더욱이 그리스도는 정말 무가치하고 죄로 찌든 피조물들, 좋은 대접은 커녕 무한한 저주를 받아 마땅한 자들도 은혜로운 눈길로 주목하실 만큼 낮아지셨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은 위대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은혜로운 눈길로 바라보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친구가 되시며 영적 결혼을 통해서 그들의 영혼을 자신에게 연합시키기에 충분합니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은 인간의 본성을 입으시며 그들 중 하나와 같이 되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위하여 그들보다 더 낮아지셨습니다. 심지어 수치와 침 뱉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자신을 무지막지한 죽음에 넘겨주실 만큼 낮아지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낮아지심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스도는 가장 미천하고, 가장 비열하고, 가장 경멸스럽고, 가장 무가치한 사람들을 위하여 그처럼 낮아지셨습니다! 이와 같이 한 인격 안에 무한한 높아지심과 무한한 낮아지심이 연합되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높이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마리의 벌레가 좀더 많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는 것 때문에, 또는 좀더 큰 거름더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 때문에, 다른 벌레에 비해 좀 더 높아 보인다면 얼마나 높겠습니까? 높아져봤자 바로 밑에 있는 벌레보다 얼마나 높아졌겠습니까? 낮아져봤자 얼마나 낮아지겠습니까?
그리스도는 우리의 발을 씻기기 위해서 낮아지셨습니다. 세상에서 위대하다는 사람들(더 큰 벌레에 불과한)은 그보다 훨씬 덜 낮아져도 큰 모멸감을 느낍니다!
2) 예수 그리스도안에는 무한한 공의와 무한한 은혜가 서로 만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무한히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십니다. 죄를 미워하시고 죄에 대해 마땅한 형벌을 내리십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심판자요 무한히 의로운 심판자이십니다. 그는 결코 악인들을 용서치 않으시며 죄를 그저 지나쳐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무한히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십니다. 비록 그의 공의는 모든 죄와 불법에 대해서 매우 엄격하지만, 그리스도는 모든 죄인 심지어 죄인의 괴수에게조차 풍성한 은혜를 차고 넘치도록 부어주십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가장 무가치한자들에게도 자비와 축복을 베풀어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가장 좋은 축복을 베풀어주십니다. 주님의 은혜는 그들에게 모든 축복을 베푸시며 그들을 위해서라면 모든 일을 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너무나 풍성하기 때문에 아무리 큰 죄인에게도 부어질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는 너무나 위대하기 때문에 이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어떠한 대가라도 크다고 할 수 없습니다. 위대한 일을 행하려면 고난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가장 극심한 고난, 심지어 죽음조차도 감수해야 합니다. 아니 죽음뿐만 아니라 가장 수치스럽고 가장 고통스러운 일들과 온갖 두려운 일들도 감당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사람의 육체만을 괴롭힐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인간이 가할 수 있는 최악의 고통도 견뎌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영혼의 고통까지도 감당하셨습니다. 그것은 그가 책임지신 사람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직접적인 결과였습니다.
II. 이와 같이 그리스도안에서 양극단의 탁월성이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은 당신이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세주로 모셔들일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종류의 논증과 동기들도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도록 당신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구주로서의 충만하심과 충족하심이 위에 언급한 탁월성 안에 영광스럽게 나타나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말로 다할 수 없이 비참한 상태에 떨어져 있습니다. 더욱이 그 상태에서 무력한 가운데 처해 있습니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핏덩이 채 버려진 유아처럼 가련하고 미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유다 지파의 사자 (the Lion of the tribe of Judah) 이십니다.
우리는 약할지라도 그는 강하십니다. 타락한 인간은 천하고 비참한 피조물이며 혐오스러운 벌레와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는 무한히 존귀한 분이십니다.
타락한 인간은 부패했지만 그리스도는 무한히 거룩하십니다. 타락한 인간은 가증스럽지만, 그리스도는 사랑스러우십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지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대상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크게 자극하였지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눈에 무한히 고귀한 의를 이루셨습니다. 바로 여기에 무한한 능력과 무한한 존귀가 있을 뿐 아니라, 무한한 낮아지심과 사랑과 자비가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긍휼을 베푸시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빠져있는 가련하고 고통하는 죄인이라면 그리스도께 나아가기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는 당신을 도울 능력과 소원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영혼의 필요를 채워주기에 충분한 강력한 기초요 측량할 수 없는 보화가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가련하고 무가치하고 두려움에 싸여있는 영혼을 초청하고 담대하게 하는 무한한 은혜와 온유함이 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받아주신다면, 당신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안전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당신을 보호하는 강한 사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나아 오기만 하면 당신은 아무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나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양과 같으십니다. 주님은 그들을 무한한 사랑과 은혜로 받아 들여주십니다.
그가 두려운 위엄을 가지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는 크신 하나님이시오 당신 위에 높이 계신 분이시지만,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사람이시라는 사실은 불쌍한 죄인을 격려하고 담대하게 해줍니다. 그는 창조자이시면서 피조물이시며 그는 하늘과 땅의 어떤 피조물보다도 가장 겸손하시고 낮아지신 분이십니다. 이것은 불쌍한 죄인들이 그에게 나아오도록 용기를 줍니다.
당신은 조금도 주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에게 달려가 자신을 그에게 던지십시오. 당신은 은혜롭고 온유한 영접을 받을 것입니다. 비록 그가 사자일지라도 그는 단지 당신의 원수에게 사자일 뿐이고 당신에게는 어린양이십니다.
당신의 환경이 어떠하든지 당신은 이와 같은 한 구주께 나아 오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이 가장 악한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여기에 충분한 은혜가 있습니다. 당신이 가장 천하고 비열하고 무지한 죄인이라도 경멸을 당할 위험이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당신보다 큰 분이시지만, 그는 당신보다 무한히 더 겸손하시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고통을 안고 찾아올 때 멸시하는 부모는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만일 당신이 마음 중심으로 그분에게 나아 온다면 어떤 부모보다도 더 기쁘게 영접해 주실 것입니다.
이제 무거운 짐을 지고 고통하는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왜 당신의 영혼을 담대하게 그리스도께 맡기는 것을 두려워하십니까? 그가 당신을 구원할 수 없을까봐 두려워하십니까? 그는 당신의 영혼의 원수를 정복할 만큼 강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십니까?
어떻게 그리스도 즉 "전능하신 하나님"(사9:6)보다 더 강한 자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무한한 능력보다 더 큰 능력이 필요합니까? 그리스도께서 은혜로운 눈길로 당신을 주목하실 만큼 낮아지지 않으실까 두려워하십니까?
그렇다면 관정에서 군인들이 때리고 침을 뱉도록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복된 얼굴을 바라보십시오. 그를 때리는 사람에게 등이 벗겨진채 꽁꽁 묶인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있는 그를 바라보십시오. 당신은 자신을 낮추어 그들이 이런 일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게 하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기꺼이 영접해주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영접하셔도 성부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용납하지 않으실까 두려워하십니까?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영원 전부터 지금까지 성부 하나님의 무한한 기쁨의 대상이신 아들을 거절하시겠습니까? 성부 하나님께서 아들을 거절하시는 것은 자신을 거절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2. 당신이 구원자에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가운데 그리스도안에 없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외에 다른 구원자를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그의 탁월성에 부족한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이 위대한 것이고 선입니까? 무엇이 존귀하고 유익한 것입니까? 무엇이 찬양하고 기뻐할 만 한 것입니까? 그리스도 안에 부족한 것이 무엇입니까?
당신은 남들의 눈에 당신이 불쌍한 죄인으로 보이지 않게 함으로써, 그리스도를 크고 영화로우신 분이 되게 하시려고 합니까?
그리스도는 당신이 의존하기에 합당한 분이 아니십니까? 그는 당신의 구원이라는 고귀한 사역을 위하여 지명되기에 충분히 높으신 분이 아니십니까?
당신은 지극히 높으실 뿐만 아니라 고난과 유혹을 받는 자들을 동정하기 위해서 그의 위엄에도 불구하고 온갖 고난과 시험을 당하실 만큼 낮아지신 그분을 모시지 않으시렵니까?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위하여 충분히 낮아지지 않으셨습니까? 충분히 고난을 당하지 않으셨습니까?
당신이 지금 겪고있는 고난을 맛 보셨을 뿐 아니라, 당신이 지금 두려워하는 내세의 엄청난 저주를 다 경험하신 그분을 모시지 않으시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나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수 천 배의 경험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에게 가까이 계셔서 중보사역을 효과적으로 담당하는 구세주를 원하십니까? 독생자이신 그리스도보다 더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계실 뿐만 아니라 당신에게 가까이 계셔서 당신이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는 그리스도를 모시기 원하십니까? 아내와 남편, 포도나무와 가지, 머리와 지체와 같이 영적인 연합으로 하나가 된 그 분보다 더 가까운 자를 원하십니까? 당신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그와 같이 당신과 연합될 것입니다.
당신은 말씀으로 뿐만 아니라, 그가 행하신 일을 통해서 죄인에 대한 긍휼과 사랑에 대하여 크고 특별한 증거를 보여주신 구주를 모시기 원하십니까? 그리스도가 행하신 것 보다 더 탁월한 일을 생각할 수 있으십니까?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영원토록 참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참 사람이 되시기 위해서 인성을 덧입으신 것은 얼마나 위대합니까? 설령 그가 행하신 일이 전혀 특별한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죄인을 위하여 담당하신 고난은 사랑의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구세주는 죄인들을 위해서 그리스도보다 더 큰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구주가 되기에 부족한 것이 무엇이며, 무엇이 더해져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주로 영접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 특별히 두 가지를 생각해 봅시다.
(1) 그리스도는 당신이 나아와서 신뢰하게 하시려고 당신을 초청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정말 달콤한 은혜와 친절을 가지고 시간 시간마다 당신을 부르시고 초청하십니다.
"사람들아 내가 너희를 부르며 내가 인자들에게 소리를 높이리라"(잠8:4)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55:1).
갈한 심령을 초청하시고 "물로 나아오라, 와서 사 먹으라"고 거듭 거듭 부르시는 주님은 얼마나 은혜로우신지요!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돈 없이 값없이 오라"고 당신을 초청하시는 그분의 초청은 얼마나 탁월합니까! 당신의 가난도 초청을 거절하는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은혜로운 논리와 충고로 당신을 초청하십니까!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사55:2)
말하자면 이제는 자신의 의로 이 세상에서 누릴 안식을 추구하는 것처럼, 결코 당신이 얻지 못할 것을 위해서 수고하고 애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좋은 것, 너를 만족시킬 것을 완벽하게 준비해 놓고 너를 영접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놓고 있다. 두려워 말고 내게 나아오라. 너의 모든 필요가 채워주겠다. 너를 행복하게 해 주겠다." 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3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잠언 9장 초반부를 보십시오. 얼마나 은혜롭고 달콤한 초청을 하시는지요! "무릇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당신이 아무리 가난하고 무지하고 눈먼 사람일지라도 당신은 환영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귀절에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서 친히 준비해 두신 것이 무엇인지 말씀하십니다.
"와서 나의 양식을 먹으며 내가 혼합한 포도주를 마시라."
당신이 가난하고 굶주린 상태에 놓여있으면서 죽어 가는 당신의 영혼을 먹일 수 있는 양식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당신은 무언가를 추구해왔지만 당신을 비참한 가운데 있습니다.
그의 빵을 먹고 그가 혼합한 포도주를 마시라는 그리스도의 초청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마11:28-30절에서 그리스도는 어린 양처럼 초청하시지 않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오, 비참하고 고통받는 영혼이여! 당신이 누구든지 그리스도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부르실 때 바로 당신을 부르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는 만일 그에게 나아온다면 당신에게 안식을 주신다고 수없이 반복해서 약속하십니다. 28절에서는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말씀하십니다. 또 29절에서는 "너희 영혼이 쉼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당신이 원하는 바입니다. 이것은 당신 그렇게 오랫동안 추구했지만 얻지 못했던 바로 그것입니다. 오, 그 안식은 얼마나 달콤할까요! 그리스도는 당신을 격려하기 위해서 자신을 어린양으로 나타내셨읍니다!
그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말씀십니다. 당신은 그런 분에게 나아오는 것을 두려워 하십니까?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나는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그리스도는 당신을 부르시려고 낮아지셨을 뿐만 아니라 그는 당신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는 당신의 문에 찾아 오셔서 문을 두드리십니다. 그는 신하를 보내서 반역자와 악당 같은 당신을 체포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당신이 그 분을 친구요 구주로서 집안에 모셔들이도록 당신의 문에 오셔서 두드리십니다. 그는 당신의 문을 두드리실 뿐만 아니라 당신이 등을 돌리고 있는 동안에도 여전히 밖에 서서 기다리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는 당신이 그를 영접한다면 당신을 위해 어떤 일을 행하시며 어떤 특권을 주실 것인지 약속하십니다.
"그리스도는 당신과 더불어 먹고 당신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먹을 것입니다."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22:17-17)
그리스도는 당신 앞에 더 말할 나위없이 매력적인 탁월성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는 자신 뿐만 아니라 성령과 신부의 초청을 선포하시기 위해서 낮아지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당신이 초청에 응답하도록 격려하십니다.
그리스도는 값진 생명수를 값없이 마시게 하기 위해서 모든 사람을 초청하십니다!
(2) 당신이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면 그는 영광스러운 능력과 권세로 당신을 보호하는 사자가 되실 것입니다.
그의 모든 탁월성은 당신의 것이 되며 당신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 사용될 것입니다. 그는 사자처럼 당신의 원수와 싸우실 것입니다.
누구든지 당신을 건드리거나 해치는 자는 사자처럼 일어나실 그분의 진노를 촉발시키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원수가 이 사자를 정복하지 않는 한 그들은 당신을 파멸시키거나 해칠 수 없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보다 더 강하지 못하다면 그들은 당신의 행복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그 식물을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에 그것을 치려고 여러 목자가 불려왔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소리로 인하여 놀라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의 떠듦을 인하여 굴복치 아니할 것이라. 이와 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 산과 그 영위에서 싸울 것이며"(사31:4).
(3)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분만을 당신의 친구요 기업으로 삼도록 격려하기 위해서 한가지를 더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안에는 여러 가지 탁월성이 만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신의 사랑을 드려야 합당한 모든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친구에게 있어야 할 것 또는 있을 수 있는 것은 전부 다 가장 높은 수준으로 그리스도안에 들어 있습니다.
당신은 존귀한 분을 친구로 선택하기 원하십니까? 자기보다 더 높은 사람을 친구로 삼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천한 여종이 위대하고 탁월한 왕자에게 사랑의 대상이 된다면 얼마나 기쁠까요! 그리스도는 왕의 왕이시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왕들보다 높으시며 당신보다 무한히 높으신 분입니다. 이처럼 귀하신 분이 당신에게 가장 가깝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당신은 위대(great)할뿐만 아니라 선한(good) 친구를 선택하고 싶으십니까? 그리스도안에서 무한한 위대함과 무한한 선이 만나며 광채와 영광을 발합니다. 그의 위대함은 그의 선하심이 사랑스럽게 빛납니다.
선함이 없이 위대한 사람은 위대할수록 더 악해집니다. 그러나 무한한 선이 위대함과 결합될 때 영광스럽고 존귀한 위대함이 됩니다. 또한 그의 무한한 선하심은 그의 위대하심 때문에 더욱 빛이 나게 됩니다.
위대한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또는 선한 자는 그보다 못하면서 선한 자보다 더 존경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선함은 그 자체로서 아름답고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위대함과 r결합될 때 그것은 탁월하게 됩니다. 금은 그 자체로도 값이 나가지만 더 귀한 것과 결합될 때 가치가 높아지는 것과 같습니다.
위대한 창조자시요 하늘과 땅의 주권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낮아지셔서 천하고 무가치한 자들에게 부드러운 사랑과 긍휼을 베풀어주시는 광경은 얼마나 영광스러운지요! 그의 전능한 능력과 무한한 엄위와 자족성(self-sufficiency)은 그의 넘치는 사랑과 은혜를 더욱 돋보이게 합니다.
그의 낮아지심과 연민은 그의 위엄과 능력과 주권을 감싸면서 아름답게 해 줍니다. 당신의 친구가 아무리 위대하고 존귀하다고 해도 그의 높은 지위가 우정을 방해하지 않도록 언제나 그에게 나아갈 수 있도록 낮아지기를 원하지 않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당신의 친구의 당신에게 더 가까이 나아오기를 원하지 않으십니까?
당신보다 훨씬 더 높지만 당신과 같은 수준으로 내려오신 그를 친구로 모시지 않으시렵니까?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높은 사람을 친구를 삼기 원하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환경이 비슷한 친구를 원합니다. 그리스도가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크신 하나님이시지만 당신의 수준으로 내려오셔서 당신과 같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당신의 주님이 되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형제요 친구가 되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성품을 입고 오신 목적입니다. 그의 신성은 인간과 무한한 거리를 가지게 하지만 인성은 친숙한 교제를 가능케 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사모하였습니다.
"네가 내 어미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었더면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에 입을 맞추어도 나를 업신여길 자가 없었을 것이라"(아8:1)
복음 안에 담긴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님만이 우리의 온전한 경배의 대상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는 주님께 경배를 드리려는 성향뿐만 아니라, 사람들과의 우정을 더 추구하는 성향도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덕스럽고 거룩하게 되어도 이러한 본성의 경향은 없어지거나 약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성향까지도 만족시켜 주는 분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이 땅에 내려오셨고 우리와 같은 본성을 취하셨으며, 우리 중의 하나처럼 되셨고, 자신을 우리의 친구요 우리의 형제요 우리의 동무라고 칭하셨습니다.
"내가 내 형제와 붕우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내 가운데 평강이 있을 지어다".(시122:8)
그처럼 높고 위대하신 분이 무한히 낮아지셔서 당신과 같은 본성을 취하시고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당신이 그 분 앞에 나아오도록 격려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당신에게 좀더 용기를 주기 위해서 그리스도는 놀랍도록 온유하고 겸손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는 당신을 위하여 사람이 되셨을 뿐 아니라, 모든 사람 들 가운데 가장 온유하시고 가장 겸손한 분이십니다. 그런 분은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더욱이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의 탁월성을 완벽한 형태로 지니고 계십니다.
그리스도를 당신의 친구요 기업으로 선택한다면, 당신은 다음의 두 가지 무한한 유익을 얻게 될 것입니다.
1. 그리스도는 당신의 충만하고 영원한 즐거움을 위하여 그 분 안에 있는 여러 가지 탁월성과 함께 그 자신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는 당신을 영원토록 사랑하는 친구로 대하시며, 당신은 그가 계신 곳을 갈망하며, 그의 영광을 보게되며, 가장 자유롭고 친밀한 교제와 즐거움을 가지고 그와 함께 거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들이 하늘에 가게 되면, 그들은 그리스도를 보고 영광스럽고 은혜로우신 주권자의 신하와 종이 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는 그들을 친구요 형제로 대우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제자들과의 교제의 방법을 통해서 배우게 됩니다. 비록 그는 그들의 절대주권자로서 그들에게 최고의 존경과 경배를 요구하셨지만, 또한 그는 세상의 왕이 신하를 취급하듯이 그들을 취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그들을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고 자녀들에게 둘러 쌓인 아버지처럼 매우 친밀하게 대하셨습니다. 12제자에게는 물론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에게도 그렇게 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종이 아니라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가슴에 의지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에서는 지상에서보다 더 큰 자유와 사랑으로 대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은 우리와 멀리 떨어지게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도리어 우리를 그가 앉으신 존귀한 자리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랑하는 친구들이 자신과 함께 영광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의 영광 중에서 영광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살리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17:22-23)
그리스도께서 무한히 높아지신 것은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백성의 머리로서 높아지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그들을 위해서 높아지셨습니다. 즉 첫 열매가 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과 좀더 멀리 떨어지기 위해서 가 아니라 그들을 높여주기 위해서 먼저 높아지셨습니다. 머리의 존귀와 영예는 머리와 지체의 거리를 더 멀리 떨어뜨려 놓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신자들이 하늘에 올리울 때 그리스도는 그들을 자신과 같이 변화시킬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보좌에 앉아 계시기 때문에 그들도 그와 함께 그의 보좌에 앉으며 그와 같이 변화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늘로 가시면서 잠시 후에 다시 와서 그들도 주님과 영원히 함께 있도록 그들을 데려가겠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며 위로하셨습니다. 제자들이 하늘로 간 후에 땅에 있을 때보다 그리스도와 더 멀리 떨어져 있게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친구로서 껴안아 주시고 아버지의 집과 영광 속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의 친구였던 사람들, 이 세상에서 주님과 함께 슬픔과 고난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이제 그와 함께 영광과 안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그들을 자신의 신방으로 이끄시고 그의 모든 영광을 보여줄 것입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요17:24)
그리고 그는 (그들을) 생명 샘으로 인도하시고, 그의 기쁨에 참여시켜 주실 것입니다.
"나의 기쁨을 너희 안에서 충만케 하시리라"(요17:13)
그들은 약속하신 그대로 주님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그의 만찬 석에 앉게 될 것입니다.(눅22:30) 그들은 주님이 성만찬에서 약속하신 그대로 그의 거룩한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시게 될 것입니다. (마26:29)
그렇습니다. 성도들은 하늘에서 이 땅에서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유롭고 친밀한 교제를 나눌 뿐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좋은 교제를 나누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불완전한 생명적 연합이 하늘에서는 완전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그들을 그리스도로부터 분리시키고 분열시키는 죄와 어두움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는 전부 제거될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붙잡으려고 할 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요20:17)라고 한 말씀에서 보여지듯이, 아직은 주님을 온전히 알게 되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영광스럽게 나타나는 때가 아닙니다. 성도들이 하늘에서 그리스도의 영광과 높아지심을 보게 될 때, 그들이 마음은 더 큰 찬양과 경배의 마음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친구요 기업으로 선택한다면, 우리는 영원토록 그분의 영접을 받기 때문에, 그 어느 것도 그리스도를 온전히 누리며 영혼의 갈망을 만족시키는 것을 방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거룩한 즐거움에 대한 우리의 신령한 욕구는 완전하게 충족될 것입니다. 그때 그리스도는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마시고 많이 마시라."(아5:1)
바로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영원토록 누릴 기쁨입니다! 이 행복은 끝없이 이어질 것입니다. 그 어느 것도 우리의 영원한 행복을 중단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2. 당신의 존재가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서 당신은 가장 영광스러운 하나님과의 연합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높은 차원에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지체가 됨으로써 그들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가진 관계를 공유하게 됩니다. 그들은 중생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독생성자와의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4:4-6)
교회는 하나님이 말씀과 성령으로 낳으셨기 때문에, 또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딸입니다.
그리스도와 성부 하나님, 그리고 자기 백성이 하나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계획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17:21-23)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사람들이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오며, 그와 그의 아버지와 그의 백성이 한 공동체, 한 가족을 이루며, 교회가 성삼위 하나님의 교제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구속 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아멘
조나단 에드워즈의 기독교 철학
이경직 (천안대, 기독교 철학 전공)
I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18세기 뉴잉글랜드에서 일어났던 대각성 운동의 중심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가 탁월한 철학자이기도 했다는 사실은 일반인에게 그리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프랑스 철학자 리용에 따르면, 그는 미국이 배출한 가장 위대한 형이상학자이다. 또한 에드워즈가 식민지 상태의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고 유럽 대륙에서 태어났으면 라이프니츠(Leibniz)와 칸트(Kant)를 잇는 철학자로서 불멸의 체계를 창시했을 것이다. G. Lyon, L'Idéalisme en Angleterre au xvviiie siècle (Paris, 1888), 406면 이하.
에드워즈는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도 불린다. 당대에 물려받았던 기독교 신학의 전통을 새롭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업의 바탕에는 예일 대학에서 공부한 데카르트주의, 존 로크의 인식론과 아이작 뉴턴의 광학, 캠브리지 플라톤 학파의 사상 등이 깔려 있었다. S. H. Daniel, The Philosophy of Jonathan Edwards. A Study of Divine Semiotics (Bloomington/Indianapolis: Indiana University Press, 1994), 68면.
예를 들어, 에드워즈에 따르면, 인간은 부족함을 채우려는 목적으로 행동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행동하시는 동기는 그렇지 않다. 그분은 충만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행위는 충만성에서 흘러나오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생각은 신플라톤주의의 유출설을 연상시킨다. J. Piper, The Supremacy of God in Preaching (Grand Rapids: Baker Books, 1990), 76-77면.
그가 대학에서 접한 청교도 플라톤주의는 캠브리지 플라톤주의와 피터 라무스(Peter Ramus)의 플라톤주의에서 나왔다. 청교도 플라톤주의에 따르면, 영적 세계만 실제로 있으며, 눈에 보이는 우주는 그림자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조명을 받아 하나님께서 계심을 깨닫는데 이르도록 하나님께서 마음을 창조하셨다. A. A. Maurer, “Edwards, Jonathan”, in: P. Edwards (ed.), The Encyclopedia of Philosophy vol. 2 (New York/London: MacMillan, 1967), 460면.
또한 에드워즈는 예일 대학에서 사무엘 존슨(Samuel Johnson)을 통해 영국의 새로운 철학을, 특히 존 로크의 생각을 배웠다. 그는 로크의 『인간 오성론』(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을 읽고 보물을 얻은 것보다 더 큰 기쁨을 얻었다고 고백했다. 이 시기는 그가 회심을 경험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는 종교적 진리의 척도가 가슴으로 느꼈느냐에 있다는 확신을 얻었으며, 이 확신을 로크의 인식론을 통해 설명하려 했다. Ibid., 460면; H. L. Bond, “Edwards, Jonathan (1703-1758)”, Theologische Realenzyklopädie Band IX (Berlin/New York: de Gruyter, 1982), 299면, 301면.
그는 관념론적인 플라톤주의를 경험론과 엮고자 했다. 그는 인간의 관념이 모두 감각에서 나온다는 생각을 로크에게서 받아들이며, 공간이 하나님의 감각 기관(sensorium)이라는 생각을 뉴턴에게서 받아들인다. 순수한 무(無, nothing)는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존재가 없었던 때는 없다. 따라서 존재는 영원하며, 모든 곳에 있다. 그런데 공간이 없는 경우는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공간은 영원히 존재하며, 결국 신적이다. 그런데 로크의 인식론에 따르면, 존재는 의식에 대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우주가 존재하려면 하나님의 지성과 의지에 매순간 매달려야 한다. 따라서 영적인 것만 실체가 된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물질적 사물이 들어있는 공간이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여겼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캠브리지 플라톤주의자와 뉴턴의 생각을 따랐다. A. A. Maurer, op. cit., 460-461면; T. A. Schafer, “Edwards, Jonathan”, in: Encyclopaedia Britannica vol. 8 (Chicago etc.: Encyclopaedia Britannica, INC., 1970), p. 14.
에드워즈의 이러한 형이상학은 존 로크의 생각을 발전시킨 조지 버클리(Jeorge Berkeley)의 철학과 매우 비슷하다. 그래서 에드워즈가 버클리의 저술을 읽고 그의 『존재론』(On Being)을 썼는지에 대해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많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버클리의 저술을 접하지 않은 상태에서 독자적으로 생각을 발전시켰던 것 같다. D. Philips, “Edwards and the New England Theology”, in: J. Hastings (ed.), Encyclopaedia of Religion and Ethics vol. V (New York: T.&T. Clark, 1912), 222면, 225면.
또한 칸트 이전 철학자인 라이프니츠(Leibniz)의 생각과도 매우 비슷해 보인다. 우주가 하나님의 마음속에만 존재한다는 주장은 잘못 이해되는 경우 범신론으로 이해되기 쉽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에드워즈는 그가 배운 일반 학문을 통해 칼빈주의 신학 전통을 재해석했다. 연구 방법과 표현 방식에서는 당시 철학자들의 장점을 받아들이면서 내용적으로는 칼빈주의를 회복시켰다. 방법론적으로는 철학 용어를 사용하면서 기독교 신학의 내용을 이성적으로 설명함으로써 당대 기독교에 쏟아졌던 비난들을 물리쳤다. 이상현, 『조나단 에드워즈의 철학적 신학』(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9), 14면; 정부홍, 『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9), 175면.
그는 뉴턴의 우주론과 로크의 인식론을 정통 칼빈주의 신학과 연결하려 했다. H. L. Bond, op. cit., 299면, 301면.
사퍼에 따르면, 에드워즈는 개혁 신학을 뉴턴의 세계관과 연결하고, 로크의 경험론을 아우구스티누스의 조명설과 연결하고, 기독교의 구원 계획과 역사관을 플라톤의 관념론과 신플라톤주의의 유출설과 연결했다. T. A. Schafer, op. cit., 14면.
이 가운데 이 글에서는 로크의 인식론과 그의 신학의 연결점에 주로 초점을 두고자 한다.
에드워즈는 위대한 설교가, 훌륭한 목회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동시에 훌륭한 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펜을 항상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에게 떠오른 생각이 있으면 논리적으로 끝까지 밀고 나가는 습관이 있었다. D. Philips, op. cit., 222면, 225면.
그는 여름에는 승마와 숲길 산책, 겨울에는 장작 쪼개기 등으로 운동을 대신했는데, 승마와 산책을 하러 갈 때 항상 펜과 잉크를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있으면 메모하며 생각을 발전시킬 수 있기 위해서였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에드워즈는 전인격적 신앙을 갖춘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빛나는 지성과 불타는 마음이 있었다. 그는 이성을 강조하면서 감성은 평가절하하던 계몽주의 시대에 살았다. 그러나 이 시대는 영적 대각성 운동이 일어나던 시기이기도 했다. 두 가지 흐름이 서로 대립될 때, 차가운 이성주의와 순수 감정주의로 나타나기가 쉬웠다. 이성주의는 영적 대각성 운동을 감정에 치우친 광신으로 몰았다. 실제로 대각성 운동에 그러한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했다. 에드워즈는 두 극단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자 했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진정한 영성을 가짜 영성과 구분한다면, 영성을 부정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진정한 영성과 가짜 영성을 구분하는 근거는 성경에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진리를 전달해준다. 이 진리는 감성으로 느끼는 것만도, 이성만으로 판단하는 것만도 아니라, 이성을 통해 이해하고 판단하고 감성을 통해 느껴야 하는 진리이다. 이를 통해 에드워즈는 이성주의자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이성을 사용하여 이성주의의 도전을 물리쳤다. 장호익, “죠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 죠나단 에드워즈, 서문강 옮김, 『신앙과 정서』(서울: 지평서원, 20002), 590면.
그가 정신을 집중하고 그가 다루는 주제를 논리적으로 밀고 나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강한 종교적 감정이었다. D. Philips, op. cit., 225면.
에드워즈는 영적 정서와 지성을 균형있게 조화시키고자 했다. 그에 따르면, 정서는 오성 때문에 얻는 깨달음과 실천하려는 의지 사이에 오는 것이다. 깨달음은 머리를, 감동은 가슴을, 의지는 손과 발을 요구한다. 주도홍, 『개혁교회사』(서울: 솔로몬, 1998), 253면.
신앙은 세 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정신뿐 아니라 감정까지 포괄하는 신학적 입장을 정의하려 했다. 콘라드 체리, 주도홍 역,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서울: 이레서원, 2000), 15면.
이 글에서는 에드워즈가 마주했던 당대 문제를 먼저 짚어 보고, 그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대 계몽주의 철학을, 특히 존 로크의 경험주의 철학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에드워즈가 존 로크의 인식론을 많이 활용하기 때문에, 페리 밀러와 같은 학자는 에드워즈를 로크의 계승자로 여긴다. S. H. Daniel, op. cit., viii면, 20면.
하지만 에드워즈는 로크의 입장을 수정없이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의 출발점은 개혁주의 신학이었지 로크의 인식론이 아니었다. 이는 오늘날 철학적 신학 또는 기독교 철학이 신학과 교회에 어떻게 이바지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한 창조물이다’는 신학적 고백이나, ‘모든 곳에 부분적으로 진리가 있다’는 초대 교부의 말이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라’는 신약 성경의 권면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기독교의 영성과 경건을 비이성적인 것으로 몰던 계몽주의 철학에 대해 그 철학 자체를 전면 거부하는 길을 택하기보다, 잘못 사용되는 이성에게 ‘세례’를 주어 올바른 신학 안에서 제 역할을 하도록 자리매김했다는 점에서, 에드워즈는 균형잡힌 신앙인이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찬양 집회나 심령대부흥회와 같은 집회가 TV 등을 통해 보여질 때 비기독교인들은 거부감을 갖기 십상이다. 겉으로만 보아서는, 시사프로그램에서 문제로 다루는 이단 종파들의 집회 장면과 그리 달라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CCM 컨서트와 같은 공연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기뻐하고 은혜를 받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이 과연 하나님께서 주시는 감정인가? 아니면 공연자가 인위적으로 조작해내는 감정인가? 이러한 물음이 끊임없이 제기된다. 이는 설교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설교 말씀에 은혜받는 이유가 말씀 자체의 역사에 있는가? 아니면 설교자의 설교 기법에 있는가? 아니면 둘 다에 있는가? 이는 비약적인 성장을 경험한 한국 교회에 던져지는 질문이다. 아직 이 질문에 대해 체계적이고 정확한 대답이 주어지지 않은 것 같다.죠나단 에드워즈, 서문강 옮김, 앞의 책, 13면.
이는 18세기 뉴잉글랜드에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처했던 상황과 비슷하다. 1740년에 시작한 대각성 운동은 초기에 매우 순수했다. 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왔다. 많은 사람이 뉘우치고 삶을 바로 잡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나라가 뉴잉글랜드에 임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성령께서 일하시게 하지 않고 일부 부흥사들이 일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흥운동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했다. 정부홍, 앞의 책, 107면, 109면.
한국 교회에도 이와 비슷한 경우가 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은사로 주시는 방언도 1주일 합숙훈련하면 배울 수 있다고 가르치는 사람이 있다. 이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통치를 인정하는 칼빈주의 전통의 개혁주의 신앙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가르침이다. 그 가르침은 인간의 노력과 의지를 통해 구원과 관련하여 무엇인가 이룰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에드워즈가 후기에 자유의지 문제를 다루면서 알미니우스주의를 세차게 공격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부흥운동과 관련하여 알미니우스주의는 성령께서 일하시는 대각성 운동을 왜곡하고 인간의 인위적 조작을 통해 가짜 영성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II
영적 대각성 운동의 후유증 때문에 참된 영성과 가짜 영성을 구별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게 되었다. 대각성 운동 초기에는 감상적인 어투로 기도하고 설교하는 것을 크게 인정하고 높게 여겼다. 사람들의 감성을 움직일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방식은 이성을 중시하던 계몽주의 시대 사람들에게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설교와 기도에 대해 불쾌감을 느끼고 경멸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래서 교회와 일반 사회의 골은 더욱 깊어만 갔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너무 감성에 호소하는 초기 예배와 설교가 극단적이라면, 감성을 경멸하는 태도 역시 정반대의 극단이다. 죠나단 에드워즈, 서문강 옮김, 앞의 책, 71면.
에드워즈는 두 극단 모두 사단의 전략에 말려들었다고 여겼다. 감성만을 중시하는 입장과 이성만을 중시하는 입장에 공통점이 있다. 모두 하나님의 일을 위해 열심을 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결과 신앙이 헛된 말싸움으로 전락하게 된다.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이러한 극단에 빠져 있을 때, 일반 성도는 혼란에 빠져 회의적 입장을 갖게 된다. 그래서 이단과 불신앙과 무신론을 낳고 만다. 앞의 책, 22면.
그래서 목회적 관점에서 볼 때도,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일이 중요하게 된다. 목회자 에드워즈가 당대의 뛰어난 신학자이면서 철학자이어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에드워즈는 참된 영성과 가짜 영성이 섞여 있는 당대 현실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점을 먼저 지적한다. 구약의 요시야 시대에 대개혁과 신앙 부흥이 있었지만, 요시야 통치가 끝나자 말자 유다 백성이 모두 하나님을 떠났다(렘3:10; 4:3,4). 세례 요한 시대에 유대인에게 성령을 부어주었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배척했다(요5:35). 예수린 설교에 감동받은 사람은 많았지만, 시험을 이겨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신약 성경에도 알곡과 가라지 비유가 나온다. 사도 시대에 성령을 크게 부어주었지만 초대교회 안에 문제가 많았다. 이는 종교 개혁 시대와 이후의 대부흥 시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사단이 사용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를 허용하신다는 것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신비에 속한다. 문제는 부흥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위험에 쉽게 노출되면서도 문제를 잘 알지 못한다는데 있다. 그래서 참된 신앙과 거짓 신앙의 차이를 분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앞의 책, 16-22면.
그런데 인간 능력 가운데 무엇을 구별할 수 있는 기능은 이성에게 있다. 이성은 원래 쪼개고(분석) 쪼갠 것을 다시 합치는(종합) 능력이기 때문이다. A와 A가 아닌 것을 구별하고 그 구별을 통해서 A의 정체성을 밝히는 것이 이성의 기능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떤 사물의 정의(定義)를 유(類)와 종차(種差)를 합친 것으로 이해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유는 다른 사물과 같은 점을 나타내고, 종차는 다른 사물과 다른 점을 나타낸다. ‘다름’이 확보되어야만 사물의 정체성을 알 수 있다. 정의를 나타내는 definition이라는 단어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define 동사는 fine(끝)을 정해준다(de)는 뜻이다. 달리 말하자면, 한계선을 긋는다는 이야기이다. 한계선을 그음으로써 그것과 그것 아닌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뜻이다. fine는 헬라어 peras에서 나온 단어이다. peras는 선, 금, 한계선, 한정(限定)이라는 뜻이다. 제한을 둔다는 뜻이다. peras의 반대어인 apeiron은 무한정(無限定)을 뜻하며 따라서 시간에 적용될 때 무한 시간, 즉 영원한 지속이 되며, 공간에 적용될 때 무한 공간이 된다. 지속 안에 선을 긋게 될 때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시간(時間)이 나타나며, 무한 공간 안에 선을 긋게 될 때, 앞, 뒤, 좌, 우, 상, 하, 삼각형, 사각형, 오각형, 정사면체, 정육면체, 정십이면체 등의 형태들이 나타난다. 플라톤이 지식의 대상을 이데아(idea)로 부른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데아’는 형태를 나타내는 헬라어이다. 지식의 대상이 되려면, 즉 정의가 주어지려면, 서로 다른 점을 나타내는 구분선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 여기에 있다.
그래서 에드워즈가 참된 영성과 거짓 영성을 구분하기 위해 이성에 호소하는 것은 철학사적으로, 개념적으로 볼 때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는 이성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뜻은 아니다. 계몽주의는 이성에게 자율성을 주었지만, 에드워즈는 이성이 특정 방향을 향해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 인간의 정서(affection)이며 성령께서 인간에게 거룩한 정서를 주신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앞의 책, 36-37면.
그런데 인간의 정서에는 거룩한 정서와 그렇지 못한 정서가 있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정감어린 뜨거운 마음뿐 아니라 지성의 빛도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알곡과 쭉정이, 정금과 찌꺼기를 가려내듯이 지성의 빛을 통해 참된 정서만을 골라내어야 하기 때문이다. 참되고 거룩한 정서는 신앙의 내용을 바로 이해(understanding)하는데서 나온다. 앞의 책, 69면, 71면.
에드워즈는 『신앙과 정서』(Treatise Concerning Religious Affections)에서 먼저 종차를 밝히고, 이어서 유를 밝힌다. 이를 통해 그는 전통적 정의(定義) 방식에 따른다. 참된 신앙의 표식이 될 수 없는 것의 목록을 먼저 밝히고, 이어서 참된 신앙의 표식의 목록을 제시한다. 그 목록의 근거는 진리의 말씀이 담긴 성경이다. 이를 통해 그는 종교적 삶에서 의지와 지성이 모두 필요함을 밝힌다. 이를 통해 그는 보수주의 개혁신학자로서 계몽주의가 표방하는 이성주의와 알미니우스주의가 옹호하는 열광주의라는 두 극단을 모두 피한다. F. L. Cross/E. A. Livingstone (eds.), “Edwards, Jonathan”,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Oxford/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7), 532면.
(1) 감정의 폭이 크다고 해서 참된 신앙은 아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호산나’라고 광적으로 외쳤던 사람들이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동조했기 때문이다.
(2) 몸에 반응이 일어난다고 해서 참된 신앙은 아니다. 마음과 몸에 오는 영향이 서로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에 오는 정서가 몸에 오는 정서보다 중요하며, 몸에 오는 정서에 영향을 준다.
(3) 자신의 신앙을 뜨겁고도 자신있게 말한다고 해서 참된 신앙은 아니다. 입과 혀는 무성한 나뭇잎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참된 신앙은 열매를 통해 알 수 있다.
(4) 자기가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감정이 생겼다고 해서 참된 신앙은 아니다. 그 감정이 성령께서 주셨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외부 환경에 의해 유도되었을 수도 있다.
(5) 감정이 성경 내용과 연결된다고 해서 참된 신앙은 아니다. 성경을 남용하는 감정도 있고, 마귀가 ‘은혜받은 듯한’ 착각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귀도 성경을 이용할 줄 안다.
(6) 감정 때문에 사랑을 나타낸다고 해서 참된 신앙은 아니다. 모조품이 더 아름다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7) 여러 가지 감정이 같이 나타난다고 해서 참된 신앙은 아니다. 고가품일수록 가짜가 많기 때문이다. 예후는 열심을 내었지만 가짜 열심이었다(왕하 10:16).
(8) 감정이 순서대로 온다고 해서 참된 신앙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죄의 비참을 깨닫고 두려움을 느끼게 한 다음에 위안을 주시지만, 마귀도 두려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의 작용은 신비로워서 도식적으로 파악하기 어렵다.
(9) 신앙적인 일에 시간을 많이 들이고 예배의 외적 의무에 열심을 낸다고 해서 참된 신앙은 아니다. 돌밭같은 사람도 말씀을 참 잘 들으면서도 행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10) 입으로 하나님을 찬미하며 영광을 돌린다고 해서 참된 신앙은 아니다. 일시적 감격과 믿음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11) 확신에 차 있다고 해서 참된 신앙은 아니다. 예수님을 배척한 바리새인도 확신에 차 있었다. 마음의 자극을 은혜로운 계시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12) 체험 고백이 감정을 불러일으킨다고 해서 참된 신앙은 아니다. 나쁜 감정을 훌륭한 교리적 지식으로 위장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죠나단 에드워즈, 서문강 옮김, 앞의 책, 76-176면, 225면.
이어서 에드워즈는 참된 신앙의 표식을 제시하려 한다. 그 근거는 성경에 있다. 그러나 이 표식을 통해 약한 사람이나 불신자와 비교하여 오만하게 되어서는 안된다. 앞의 책, 178-179면.
에드워즈는 참된 신앙의 표식을 제시한다.
(1) 이익을 초월하는 하나님 사랑이 참된 신앙의 표식이다. 악인도 이익이 될 때 감사하고 감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이 참된 신앙의 표식이다. 하나님의 거룩성의 아름다움이 우리의 호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3) 조명을 통해 영적 이해에 도달할 때 참된 신앙이다. 지식없는 열심은 비성경적이기 때문이다. 영적 이해는 성경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지, 새로운 의미를 집어넣는 것이 아니다. 성경과 동떨어진 체험담 등은 경계해야 한다.
(4) 복음의 확신을 갖고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보아야 참된 신앙이다. 바리새인도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이적을 보았지만 복음의 확신이 없었다.
(5) 복음적 겸손이 나타날 때 참된 신앙이다. 거룩한 지식 덕분에 우리는 우리의 무지를 깨닫는다. 그래서 은혜받을수록 하나님이 더 커 보이고 자신이 너무 작게 여겨지기 때문에,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길 수밖에 없다. 겸손한 척 하면서 체험을 자랑하는 사람이나, 자기 겸손을 크게 생각하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며 참된 신앙인이 아니다.
(6) 성품이 변해야 참된 신앙인이다. 신앙이 있는데 향기가 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7) 그리스도의 성품이 나타나야 참된 신앙이다. 그래서 사랑과 온유, 고요함과 용서, 자비가 있어야 한다. 도장과 도장 자국은 일치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8) 대칭과 균형이 아름다워야 참된 신앙이다. 따라서 사랑의 정서는 참된 정서들과 함께 나타나야 한다.
(9) 더욱 거룩해지려는 열망이 커질 때 참된 신앙이다. 미완성은 완성을 갈망하기 마련인데, 거짓 정서는 그 자체에 만족해서 안주하기 때문이다.
(10) 실천에서 열매맺어야 참된 신앙이다. 열매 없는 나무는 나무가 아니기 때문이다(눅 6:44). 그래서 신앙 고백과 체험 간증은 다르다. 신앙 고백의 참된 증거는 실천뿐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형제 사랑이 경건을 나타내는 표식이다. 앞의 책, 247-588면.
III
에드워즈는 이성을 통해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성경에 토대를 두어 참된 신앙과 거짓 신앙을, 참된 영성과 거짓 영성을, 참된 정서와 거짓 정서를, 참된 경건과 거짓 경건을 구분했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정서’(affection)은 무엇인가? 이 개념은 존 로크의 인식론과 연결되며, 에드워즈 사상의 독창성을 잘 드러내는 개념이다.
철학사적으로 볼 때, 인간의 인식 능력은 대체로 두 가지이다. 이성과 감성이다. 감성은 감각 기관을 통해 들어오는 외부의 자극을 느끼는데서 성립하며, 그래서 항상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다. 이와는 달리 이성은 기억과 상상력, 구성력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을 수 있다. 그래서 수동적이기보다 능동적이다. 전통 철학에서는 이성을 감성보다 우위에 두었다. 감성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기 때문에 항상 변할 수 있고, 따라서 불변하는 것이어야 하는 지식의 자격 요건에 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당대 수학자들을 비판하면서 눈에 보이는 도형에서 시선을 거두어 보이지 않는 이상적 도형에 눈길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눈에 보이는 도형은 언제나 불완전하며 변하기 때문이다. 불변하는 지식을 얻으려면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이상(理想) 세계를 보아야 한다. 이는 플라톤의 관념론을 비판한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현실 세계가 실제로 있다고 주장했지만, 그 역시 개별 실체 외에 추상 개념을 포함하는 제2실체를 인정함으로써 지식의 대상을 역시 감성의 대상이 아닌 이성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에드워즈가 중심 개념으로 삼는 ‘affection’은 라틴어 affectus에서 온 단어이다. affectus는 ‘어떤 일을 겪다’를 뜻하는 afficiô 동사의 과거분사로서 어떤 일을 겪는 상태 또는 겪은 결과를 나타낸다. afficiô 동사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paschô이며, 과거분사는 pathêma이다. 이 단어는 고대 그리스부터 감정, 성향, 상태를 나타내면서 인간의 수동적 측면을 강조했다. 이성이 적극적으로 범주(category)를 갖고 바깥 사물을 인식 대상으로 삼는데 반해, 감각 기관은 밖에서 주어지는 자극에 의해 느낄 수만 있지 적극적일 수 없다. ‘겪는다’는 어원이 이를 잘 보여준다. 전통 철학에 따르면, 이러한 성격을 지닌 정서는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런데 에드워즈에게 학문 방법론을 제공한 존 로크의 철학은 정서에게 이전보다 높은 지위를 주었다. 존 로크에 따르면, 인간의 지식은 모두 경험에서 나온다. 인간이 경험하기 이전에 타고난 관념, 즉 본유 관념(innate ideas)은 없다. 이 점에 있어서 존 로크는 플라톤에서 시작하는 이성주의 전통을 부정한다. 플라톤에 따르면, 인간은 태어나기 전에 모든 것을 알고 있다. 태어날 때 망각(lethe)의 강을 건너야 하기 때문에 그저 잊어먹었을 뿐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외부 자극을 받아들임으로써, 즉 감각을 통해서 인간이 잊어 먹은 것을 다시 일깨우는 작업이 교육이다. 교육은 새로운 것을 집어넣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고대 그리스인에게 있어서 진리(aletheia)가 망각(lethe)을 없애는(a-) 것이라고 해석했다. 플라톤에 따르면, 태어날 때 인간의 마음은 겉으로는 백지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 그 안에 모든 글이 쓰여진 종이이다. 탁본을 만들어내듯이 외부에서 자극을 가할 때, 또는 특수 잉크를 부을 때 원래 쓰여졌던 글이 나타나는 것이 교육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도 다르지 않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잠재성을 갖고 태어난다. 그 잠재성이 밖으로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자기 실현이며 곧 행복이다. 때로 장애물 때문에 잠재성이 완전히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으며, 그 때는 실현되지 않은 만큼 행복하지 않은 것이다. 현대 생물학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은 이미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다.
그러나 존 로크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은 태어날 때 백지 상태(tabula rasa)에 있다. 밖에서 오는 자극이 밀랍과 같은 마음에 도장찍듯이 흔적을 남기는데서 인간 지식이 생겨난다. F. L. Cross/E. A. Livingstone (eds.), “Locke, John”,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Oxford/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97), 991면.
밖에서 인간의 감각 기관에 자극을 주는 것은 분명히 있지만,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what-we-know-not)이다. 앎은 오직 감각에서만 성립하기 때문에, 감각과 무관하게 따로 있는 것은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존 로크의 주장을 일관되게 밀고 나간다면, 인간의 감각과 무관하게 따로 있는 것이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이는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에게서도 마찬가지이다. 칸트의 물 자체(物自體, Ding an sich)는 인간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 있다. 감각이 성립하려면 감각을 가능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요청 때문에 물 자체가 있는 것이다. 로크의 경우에도, 외부 사물 자체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지만 인식이 성립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로크는 자기 이론에서 모순을 일으키는 줄 알면서도 외부 사물 자체가 있다고 인정한다. 그래서 철학사가들은 그를 ‘정직한’ 철학자라고 부른다.
그런데 외부 사물이 감각에 흔적을 남길 때 감각이 백지 상태에 있다면, 달리 말하자면 감각이 수동적이어서 바깥에서 들어오는 것을 어떤 식으로든 변형 또는 왜곡시킬 수 없다면, 감각에 남은 흔적은 외부 사물을 어떤 방식으로든 반영할 것이다. 플라톤의 『테마이테토스』(Theaitetos)에 나오는 경험주의적 설명에서처럼 로크에게서도 밀랍이라는 비유가 나타난다. 밀랍에 도장을 찍으면 밀랍에는 도장에 새겨진 것과 같은 형태가 남게 된다. 이러한 생각은 에드워즈의 신학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참된 영성 또는 정서의 표식을 언급할 때, 참된 신앙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수께서 우리 영혼에 인을 치시고 당신의 형상을 새겨놓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영혼에 그리스도의 성품이 나타나면 그 흔적을 남기신 분은 그리스도이시며, 그렇지 않으면 그 흔적을 남긴 자는 사단일 것이다. 죠나단 에드워즈, 서문강 옮김, 앞의 책, 418면.
또한 우리 안에 있는 거룩하고 참된 정서가 우리가 임의로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만드신 것이라는 에드워즈의 주장도 로크의 백지설에 근거를 두는 셈이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절대 통치를 주장하는 칼빈주의 신학을 로크의 백지설을 통해 정당화하고 있다.
이제 바깥에서 감각 기관에 주어지는 자극 때문에 관념이 생겨난다. 로크는 이 관념을 단순 관념(simple ideas)이라고 부른다. 단순 관념은 네 가지로 나누어진다. (1) 얼음의 딱딱함과 설탕의 달콤함과 같이 한 감각에서 생기는 관념, (2) 공간이나 형태, 정지나 운동과 같은 두 감각 이상에서 생기는 관념, (3) 지각이나 생각, 의지나 자발성과 같이 반성(reflection)에서만 생기는 관념, (4) 쾌락, 즐거움, 고통과 불편함과 같이 감각과 반성 모두에서 생기는 관념. J. Locke, Essays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2, 5; 1, p. 158; 2,6;1, p. 159; 2, 7, 1;1, p. 160.
이러한 관념의 공통점은 모두 수동적이라는데 있다.
하지만 로크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은 수동적인데 그치지 않는다. 마음은 단순 관념을 재료로 삼아 복합 관념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합 관념을 마치 하나의 관념인 것처럼 여겨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아름다움과 중력, 인간과 군대, 우주’가 그 예이다. Ibid., 12,1;1, p.214.
인식 대상의 측면에서 볼 때, 복합 관념은 양태(mode), 실체(substance), 관계(relation)로 나누어진다. 양태는 다시 단순 양태와 복합 양태로 나누어진다. 예를 들어, 단순 양태는 1의 관념이 반복되어 생겨난 3의 관념이다. 1의 관념과 3의 관념은 수라는 측면에서 볼 때 같기 때문에 3의 관념은 1의 관념에 대해 단순 양태(variation)이다. 복합 양태는 서로 다른 종류의 단순 관념이 모여서 이루는 관념이다. ‘아름다움’이 그 예이다. 그런데 이러한 양태에 해당하는 것이 실제 세계에 있을 수 있지만,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 세계에 양태에 해당하는 것이 있다 해도, 예를 들어 꽃이 아름다운 시기가 짧은 반면, 인간의 마음속에는 아름다움이 기억의 형태로 더 오랫동안 남아 있을 수 있다. 로크에 따르면, 양태는 정서(affection)이다. F. Copleston, A History of Philosophy vol. V. Hobbes to Hume (Westminster, Maryland: The Newman Press, 1961), 82-83면.
이러한 생각은 에드워즈의 생각에 영향을 준 것 같다. 에드워즈는 세계를 미적 관점에서 본다. 그에 따르면, 성령께서 인간 마음에 주시는 거룩한 정서는 아름다운 정서이다. 또한 아름다움의 정서는 참된 다른 정서들과 분리되어 따로 있지 않고, 다른 정서들과 함께 결합되어 있다. 로크의 말처럼, 아름다움의 정서는 단순 양태가 아니라 복합 양태이기 때문이다. 또한 칸트에 따르면, 아름다움의 정서는 현실 세계보다는 인간의 마음 속에서 더 지속적이다. 이러한 논리를 더 밀고 나간다면, 에드워즈의 생각처럼 아름다움의 정서는 유한한 인간의 마음속에서보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더 지속적이며 영원할 것이다. 로크에게 있어서 세계의 모든 인식 대상이 인간 마음의 관념으로서만 존재하듯이, 에드워즈에게는 세계의 모든 인식 대상은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는 관념으로서만 존재한다. 그래서 에드워즈에 따르면, 세계와 세계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존재하려면 하나님께 매어달려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주장하는 에드워즈의 칼빈주의 신학 사상과 일치한다.
그런데 로크에 따르면, 우리는 단순 관념에서 가장 먼 것처럼 보이는 복합 관념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은 분석과 종합이다. 먼저 복합 관념을 단순 관념들로 해체해야 한다. 단순 관념은 우리가 감각과 반성을 통해 직접 파악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단순 관념들을 다시 모아서 하나의 복합 관념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이 과정을 통해 인간은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한 관념도 형성할 수 있다. 복합 관념 자체를 마치 단순 관념인 것처럼 여겨 분석 작업과 종합 작업을 하지 않는다면, 복합 관념을 제대로 알 수 없다.
로크의 이러한 생각도 에드워즈에게 영향을 준 것 같다. 에드워즈는 불완전 언약(Half-Way Covenant)을 주장했다. 불완전 언약에 따르면, 신조를 고백하지만 회심의 경험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이 은혜의 언약에 들어오는 것은 허락되지만 완전히 허락되지 않고 반만 허락된다. 또한 그러한 사람의 자녀는 세례를 통해 교회에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그 부모는 성례에 참여할 수 없다. 이를 통해 그는 그의 외조부이면서 노스햄프턴 회중교회의 선임목사였던 솔로몬 스토다드(Solomon Stoddadd)가 완전 언약(Whole-Way Covenant)을 받아들여 신조는 고백하지만 회심의 경험은 고백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성찬을 주는 것을 문제삼았다. 이를 계기로 에드워즈는 오랫 동안 설교하고 목회했던 노스햄프턴 회중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몰렸다. 18세기 미국에서는 평판이 좋은 성도라야 정계에 진출할 수 있었는데, 에드워즈의 입장은 그들의 야망을 꺽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에드나 게르스트너, 황규일 옮김, 『조나단 에드워즈의 영적 생활』(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9), 113-115면; 정부홍, 앞의 책, 79면.
에드워즈가 불완전 언약을 주장할 수 있었던 인식론적 근거는 로크에게 있었던 것 같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로크에 따르면, 복합 관념은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주어진 단순 관념들로 해체되는 과정을 먼저 거쳐야만 참된 지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일반 성도에게 강조해서 말한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나 교육을 통해 들은 것에 만족해서 증거도 없이 기독교가 진리라고 고백하는 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다. 죠나단 에드워즈, 서문강 옮김, 앞의 책, 335면.
이때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직접 체험하는데 있다.
그런데 로크는 1차 성질의 관념과 2차 성질의 관념을 구분한다. 고체성, 연장, 형태, 운동성 등처럼 대상에서 분리될 수 없는 성질이 1차 성질이다. 예를 들어, 밀알을 쪼개도 이러한 1차 성질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에 반해 2차 성질은 그렇지 못한 성질이다. 로크는 1차 성질과 2차 성질의 근본적 차이를 대상을 닮은 것(resemblances)이냐에 두었다. 1차 성질은 대상속에 있으면서 대상을 닮은 것인데 반해, 2차 성질은 대상 안에 있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인식 주관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인식 주관에 관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힘(power)이다. 이러한 2차 성질 이론은 이미 갈릴레오와 데카르트, 더 나아가서 데모크리토스가 내놓은 이론이다. 데모크리토스는 원자와 허공만 인정하고, 나머지 성질은 모두 허공 속에 원자가 어떤 순서로 배열되느냐에 따라 나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볼 때 데모크리토스는 환원론자이다. 이 점에 있어서 로크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모든 관념을 결국 단순 관념으로 환원시키려 하며, 2차 성질도 1차 성질의 관계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로크는 심각한 문제에 부딪친다. 그의 경험론적 전제에 따르면, 우리 지식은 모두 감각과 반성에서 나온다. 감각은 외부 대상에 대한 감각이며, 반성은 인간 내면에 대한 감각이다. 그래서 우리 지식은 언제나 우리 마음속에서 관념의 형태로만 있다. 그런데 우리가 관념밖에 알 수 없다면, 1차 성질이 2차 성질과는 달리 외부 대상을 닮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로크는 상식적인 인과율에 호소함으로써 대답한다. 로크에 따르면, 단순 관념들이 특정 방식으로 계속 모여서 복합 관념을 이룰 때(예를 들어, 불 관념이 생기면 언제나 연기 관념이 뒤이어 생길 때) 우리는 이러한 관념의 원인이 되는 외부 사물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상식적으로 볼 때 이 추론은 타당하다. 상식은 로크의 경험론적 전제 이상을 요구한다. 외부 대상에 대한 지식이 어떤 방식으로든 필요하기 때문이다. F. Copleston, op. cit., 86-90면.
버클리가 바로 이 점을 지적했다. 그는 로크의 전제에 충실한다면 2차 성질뿐 아니라 1차 성질마저도 외부 대상을 닮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는 데이빗 흄(David Hume)이 도달한 결론이기도 하다. 하지만 버클리 주교는 신의 존재를 상정함으로써 그와는 다른 길을 간다. 1차 성질과 2차 성질 모두 관념으로서만 존재하지만(Esse est percipi), 그 관념은 인간 마음속에뿐 아니라 영원히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속에도 있다. 따라서 1차 성질과 2차 성질은 일시적이거나 상대적이지 않다. 이러한 생각은 에드워즈에게서도 잘 나타난다. 칼빈주의 신학은 우주의 창조주이며 절대적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인정한다. 에드워즈는 우주에 있는 것이 모두 하나님의 마음 속에서 존재한다고 여기며, 하나님 없이는 절대 존재할 수 없다고 여긴다. 대서양을 가운데 두고 에드워즈와 버클리가 비슷한 결론에 이르렀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에드워즈의 신 개념과 관련해서 로크의 실체 설명이 눈길을 끈다. 에드워즈는 고전적 실체 개념을 어느 정도 받아들여서, 실체(substance)를 성질의 담지자인 기체(基體, substratum)으로 이해하며 신을 궁극적 기체로 받아들인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개별 사물에서 우연적인 속성(accidental property)을 차례로 제거(abstraction)하면 결국 모든 속성을 담고 있는 그릇과 같은 것, 즉 순수 실체를 찾을 수 있다. 플라톤은 이것을 수용자(hypodochê)라고 표현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는 이는 장소(topos) 또는 공간(chôra)라는 개념이 된다. 로크에게서도 실체는 우리 마음 속에 관념을 낳는 성질이 있도록 뒷받침하는(support)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실체가 있다고 가정해야 하지만, 그 실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이 점에서 로크가 따르는 데카르트에 따르면, 우리의 인식 대상이 되려면 명석(clear) 판명(distinct)해야 한다. 명석 판명함이라는 개념이 무슨 뜻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지식으로 성립하려면 그것과 그것 아닌 것 사이에 구분(distinction)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라는데는 모두 동의한다. 그런데 모든 규정들을 빼버리고 남은 것에는 구분이 하나도 남지 않는다. 결국 이러한 실체는 데카르트의 순수 공간이 되고 만다.
외연과 내포라는 개념이 논리학에 있다. 외연은 개념이 가리키는 범위를 나타내고, 내포는 그 개념에 담긴 의미를 나타낸다. 그런데 외연이 커질수록 내포가 작아지고, 내포가 커질수록 외연이 작아진다. 소크라테스를 예로 들어보자. ‘소크라테스’의 외연은 매우 작다. 그 말은 특정 한 사람만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소크라테스’의 내포는 엄청나게 많다. 존재, 사람, 남자, 매부리코의 소유자, 크산티페의 남편, 플라톤의 스승 등과 같은 내포가 ‘소크라테스’에 들어 있다. 이와는 달리 공간의 경우, 외연이 가장 크기 때문에 내포는 전혀 없게 된다. 따라서 신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 실제로 이것은 로크의 생각을 끝까지 밀고 나간 데이빗 흄이나 칸트가 도달한 결론이기도 하다.
그런데 공간은 모든 것을 다 담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 있어서 버클리와 에드워즈가 생각하는 신의 역할과 같은 역할을 한다. 우주 안에 있는 것은 모두 신의 마음속에서 관념으로서 존재한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볼 때 버클리와 에드워즈는 신을 공간과 동일시했다. 이러한 경우 신의 내재성이 강조되며, 일종의 만유재신론을 주장하는 셈이 된다. 또한 외부 대상은 신의 마음 속에 있는 관념으로서 존재하며 인간의 인식 대상이 되지만, 정작 신 자신은 우리에게 알려질 수 없는 존재가 된다. 항상 신의 마음 속에 있는 관념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상정되는 존재만 된다.
하지만 로크에 따르면,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좋은 성질들의 관념을 무한히 늘려서 하나로 모아서 만든 복합 관념도 신 관념이다. 이러한 경우 신은 우리의 인식 대상이 될 수 있다. 무한히 많은 규정이 모여 신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신은 아무런 규정이 없는 일반적인 실체라기보다 ‘소크라테스’와 같은 개별 실체이다. 신에게 순수 공간과 같이 아무런 규정이 주어지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모든 규정이 다 주어질 수 있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전체성이라는 규정과 유일하다는 규정이 신에게 모두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신의 마음 속에 관념으로서만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관념으로 가지고 있는 신 자체에게는 아무런 규정이 없다. 신은 우주 전체이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주 전체를 담고 있다. 하지만 신은 유일하다. 신을 넘어서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은 개체성을 갖는 개별자이다. 개별자인 한에서 신은 ‘소크라테스’와 같이 많은 단순 관념들이 모여 이루는 복합관념으로 파악된다. 독일 철학자 라이프니츠가 단자론을 주장할 때, 존재론적으로 볼 때 각 개체에 우주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고 말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개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존재하는 모든 것인 우주 전체는 개별자인 한에서 우주 안에 있는 개별자와 같다. 인식론적으로 말하자면, 개별자 관념은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관념과 어떤 방식으로든 관계를 갖는 관념이다. 서양 고대철학에서부터 줄곧 내려오는 대우주와 소우주의 일치라는 생각이 여기서 다시 나타나고 있다.
로크는 일반적 실체와 개별 실체를 구분한다. 이 구분은 실재하는 본질과 명목상의 본질 사이의 구분과 일치한다. 공간으로 표현되는 신은 일반적 실체로서 실재하며, 좋은 규정을 모두 다 갖고 있는 신은 개별 실체로서 사실은 수많은 단순관념의 복합체에 불과하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신 관념은 일반적 실체에 대한 관념으로서 단순 관념이어야 한다. 그런데 로크에 따르면, 단순 관념은 감각에 의해 직접 경험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에드워즈의 신학에서도 나타난다. 신은 직접 경험하고 체험해야 하는 대상이다. 일차적으로 신은 논리나 추론에 의해, 교육에 의해 배울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또 다른 한편, 단순 관념들이 모여 이루어진 복합 관념인 신은 신의 속성으로 표현되는 단순 관념들을 통해 이해되어야 한다. 그래서 신을 알려면 신의 속성을 하나 하나 떼어서 생각해보고 그 속성들을 하나로 모아서 전체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인간의 인식 능력을 이해(understanding)와 정서(affection)으로 나누었다. 이해는 대상에 대해 개념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신에 대해서 신의 속성들을 통해 신을 이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서는 일반 개체인 신을 경험하는 것이다. 정서에는 구분하고 나누는 작용이 없다. 또한 신이라는 복합 관념을 이루는 단순 관념들도 인간 이성 또는 오성을 통해 파악될 수 있지 않다. 진정한 의미에서 볼 때, 단순 관념은 먼저 감각된 것이어야 한다. 감각은 일차적으로 수동적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신에 대해 단순 관념이 있으려면 외부에 존재하는 신이 우리 속에 단순 관념을 낳는 감각을 불러 일으켜야 한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신이 불러일으킨 정서인가 아니면 사단이 불러일으킨 정서인가가 참된 정서와 거짓 정서를 구분하는 기준 가운데 들어간다. 감각은 일차적으로 수동적이기 때문이다. 에드워즈는 수동적으로 성립한 감각을 성향이라고 부르고, 이 성향이 외부로 드러날 때 의지라고 부른다. J. E. Smith/H. S. Stout/K. P. Minkema (ed.), A Jonathan Edwards Reader (New Haven/London, Yale University Press, 1995), xx면.
IV
그런데 정서만을 강조하고 이해를 무시해서는 안된다. 철학사적으로 존 로크는 지식의 영역과 한계를 밝히려 했다. 이를 통해 그는 우리의 인식 대상이 되기에 적합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구분하려 했다. 인간 정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씨름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F. Copleston, op. cit., 71-72면.
바로 이러한 태도는 계몽주의에 맞서 신앙의 감성적 요소를 옹호하려 했던 에드워즈의 눈길을 끌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대편 극단으로 넘어가서 신앙의 감성적 측면만 강조할 수는 없다. 일정 한계 안에서 지식은 나름대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에드워즈는 이성주의와 회의주의 또는 감정주의를 극복하려 했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정서는 사랑이다. 그런데 사랑을 하려면 대상을 알아야 한다. 모르는 대상을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진 일차 목적은 바로 사랑할 대상을 알도록 하는데 있다. 정부홍, 앞의 책, 137면.
또 다른 한편, 에드워즈는 부흥운동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내세운 ‘냉정하고 합리적인’ 신앙관을 물리친다. 그에 따르면, 참된 신앙의 본질은 ‘거룩한 사랑’이다. “그 사랑의 순수성은 내적 성품과 실천 결과에 의해 입증된다.” 장호익, 앞의 책, 598면.
사랑의 순수성은 이성적인 추론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직접 체험하는데서 나온다.
설교도 듣는 사람을 이성적으로 이해시키는데 그쳐서는 안된다. 듣는 사람의 마음에 거룩한 정서가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 그러려면 말씀을 온전하게 전함으로써,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시도록 해야 한다. 설교의 목적은 듣는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의 진리로 빛나고 뜨겁게 불타도록 하는데 있다. 여기서 에드워즈는 멋진 비유를 사용한다. 그는 이성적 이해를 빛에, 정서와 체험을 열에 비유한다. 그에 따르면, 신앙에는 가슴과 머리가, 깊은 즐거움과 깊은 교리가 함께 있어야 한다. 설교자는 감정을 조작해서는 안된다. 말씀을 이성적으로 잘 분석해서 성령께서 그 말씀을 통해 듣는 사람의 마음을 뜨겁게 하고 움직이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설교자는 우선 말씀을 명석판명(clear and distinct)하게 분석해야 하고 이를 전체적으로 종합할 수 있어야 한다. J. Piper, op. cit., 84-86면.
하나님이라는 관념은 단순 관념들이 모여 이룬 복합관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에드워즈는 설교를 할 때 제스처나 웅변 등을 사용하지 않고 거의 부동자세에서 준비해온 원고를 읽어나갔다. 정부홍, 앞의 책, 164면.
하지만 그 말씀은 듣는 사람의 영혼을 움직였다. 분별하고 판단하는 이성을 통해 말씀이 전달될 때, 성령께서는 듣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고자 하는 성향을 갖도록 하신다. 이상현, 앞의 책, 31면.
그래서 그러한 성향을 가진 사람은 말씀을 기쁨으로 받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정서(affection)를 열정(passion)과 구분해야 한다. 정서는 올바른 이해에 바탕을 둘 때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감정이며 성향이다. 이에 반해 열정은 올바른 이해에 바탕을 두지 않는 감정이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성부, 성자, 성령께서 다같이 인도할 때 건전한 신앙을 가질 수 있다. 창조주이신 성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깨닫는 기능을 모두 사용하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감동을 주실 때 참된 신앙이 나타난다. 그래서 참된 부흥운동은 하나님을 바로 이해하고 체험하며, 올바른 이해에 바탕을 둔 정서를 갖는데 있다. 참되고 거룩한 정서는 거룩한 것에로 향하려 하고 거룩하지 않은 것을 멀리하려는 경향성이다. 따라서 참된 정서가 있는 사람은 거룩한 일을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어떤 정서에서 실천이 따라 나오는지 살펴 보면 그 정서가 참되고 거룩한 정서인지 알 수 있다. 앞의 책, 19면.
그래서 참된 정서에는 균형과 대칭이 있다. 『호세아』 7장 8절에서처럼 뒤집지 않아서 한 쪽이 너무 타버린 전병은 이성만을 중시하는 계몽주의와 열정만 내세우는 감정주의 모두에 해당한다. 죠나단 에드워즈, 서문강 옮김, 앞의 책, 445-447면.
V
이 글에서는 18세기 대각성 운동의 기수로 알려진 조나단 에드워즈의 기독교 철학을 살펴보려 했다. 그가 특히 존 로크의 경험론적 철학을 어떻게 활용했는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물론 모든 면을 다 다루지는 못했다. 먼저 에드워즈라는 인물과 그가 당시 직면했던 문제를 다루었다. 이어서 그가 『신앙과 정서』에서 참된 신앙과 거짓 신앙을 구분하기 위해 그가 내놓은 척도와 그 이유를 간략하게 정리했다. 또한 존 로크의 경험론적 인식론을 일부 소개하면서 에드워즈의 신학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드러내고자 했다. 마지막으로 참된 정서와 열정을 구분함으로써 신앙이 열정주의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에드워즈가 『신앙과 정서』를 썼을 때, 대각성 운동이 식어가면서 여러 가지 부작용 때문에 계몽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던 당대 지식인들이 대각성 운동을 열정주의, 비이성주의로 매도하면서 교회와 신앙을 공격하고 있었다. 또 다른 한편, 교회 안에서는 이에 대한 반발로 이성을 비신앙적인 것으로 무시하고 신앙의 감성적 측면만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에드워즈는 계몽주의의 중심 인물인 존 로크의 경험론을 배격하지 않고 그 경험론의 의미를 확대해서 전통적 칼빈주의 신학(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통치)을 세우는데 사용했다. 이상현, 앞의 책, 208면.
하지만 그가 존 로크의 철학을 모두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존 로크와 그의 입장을 논리적으로 밀고 나간 조지 버클리와는 달리, 에드워즈는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전제한다. 그는 인간의 마음 속에 상대적으로 주관적으로만 있을 수밖에 없는 인식대상들을 하나님의 마음 속에 옮겨놓는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제 자리를 찾아준다. 이를 통해 그는 인간의 지식이 상대적이지 않고 절대적일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또한 로크의 경험론에 바탕을 두어, 인식에 있어서 이성과 감성을 모두 강조함으로써 전인격적 신앙을 옹호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이를 통해 에드워즈는 당대 교회의 문제를 극복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오늘날 한국에서 신학과 기독교 철학을 하는 사람이 배워야 할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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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의 실재 (The Really of Conversion, 17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요 3:10-11)
그리스도께서는 중생 교리에 대한 니고데모의 무지와 의심을 책망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책망하시면서 사용하신 논증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니고데모는 이러한 교리를 알아야 할 특별한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평범한 사람들보다 신앙의 여러 교리를 더욱 잘 알고 있어야 하며, 다른 사람을 가르쳐야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둘째, 11절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중생 교리는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매우 강한 어조로 니고데모가 중생해야 한다고 단언하신 것은 아주 분명한 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교리) 중생 사건은 분명 있다.
회심 또는 중생 교리는 기독교의 가장 위대하고 기본적인 교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것은 본문과 문맥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이 교리를 가르치시고,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주장하시는 방식을 통해 잘 드러납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반드시 알고 믿어야만 하는 무한히 중요한 교리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회심 또는 중생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르면 인간의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교리는 많은 반대를 받아 왔으며, 불신자들이 의심하기 쉬운 교리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코 이런 회심을 체험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교리는 다른 세상에 있는 것을 다루는 교리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다루는 교리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믿기 어려워합니다. 참된 회심이 일어날 때 영혼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중생하지 않은 자연인에게는 천국과 같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은 회심 교리를 크게 의심하며, 회심 교리를 일종의 꿈 같은 것으로 여겨 크게 반대합니다. 그러므로 회심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이 회심에 대한 교리를 의심하는 것은 거짓이나 위선이거나, 공상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또한 회심 교리에 대해 반대하며, 니고데모처럼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라고 질문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저는 회심하지 못한 자연인에게 몇 가지 분명한 이유를 제시함으로써 그들에게 회심이 실제한다는 확신을 주고자 합니다. 여기서 저는 특히 몇 가지 명백한 사실을 함께 제시함으로써 우리가 흔히 ‘회심’이라고 무르는 사건 혹은 변화가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자 합니다.
1. 인간의 행복은 창조주와의 연합에 달려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단지 물질적인 것이나 감각적인 것만으로 만족하는 짐승보다는 더 높은 행복을 누리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짐승보다 더 탁월하고 다양한 기능을 가진 존재로 만들어졌습니다. 만일 인간에게 짐승보다 더 뛰어난 기능이 없다면 인간이 짐승보다 더 나은 행복을 위해 만들어 졌다고 추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 짐승보다 더 뛰어난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창조주에 대한 지식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짐승은 자신이 창조주에 대한 지식이 있다는 것에 대한 어떤 증거도 보여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의 행복은 짐승보다는 더 고차원적인 것으로 구성되며, 인간의 행복은 창조주와 연합하는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창조주를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피조물이 자신의 창조주에게서 소외된 상태로 있는 것이나, 창조주와 의견이 대립되고 다툼과 적대감이 있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얼마나 비합리적입니까?
2. 이성은 인간이 거룩하지 않은 본성으로는 창조주와 연합할 수도 없고 기쁨을 결코 누릴 수 없음을 가르쳐 줍니다. 왜냐하면 본성이 하나님과 일치하는 것이 본성의 거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성이 하나님과 일치하지 않고는 어떤 사람도 하나님과 연합할 수 없다는 것을 이성은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아모스 3장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 하나님이 자신의 본성과 상반되는 본성을 가진 어떤 사람과 연합하거나, 하나님 안에 거하며 하나님을 기뻐하도록 허용해 주신다는 생각은 비합리적입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과 연합하도록 허용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하나님께 혐오스러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본성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본성과 반대 되는 본성을 가진 자를 혐오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본성이 싫어하는 자를 하나님이 자신과 연합하게 하시고, 자신을 기뻐하도록 허용하신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시편 5 편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 게다가 만일 하나님이 자신의 본성과 반대되는 본성을 가진 사람을 기꺼이 하나님 안에 거하며 하나님을 즐거워하도록 하려 하신다 해도 이것은 본질상 불가능합니다. 이런 경우 하나님이 사람을 혐오하실 뿐만 아니라 사람도 하나님을 혐오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본성과 반대 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일 인간이 하나님을 싫어한다면 인간이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어떤 사람도 자신이 미워하는 것을 좋아하거나 즐거워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본성이 싫어하는 것을 가까이 하거나 연합하려는 것은 인간에게 전혀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인간은 자신이 싫어하는 것을 멀리하려고 합니다.
3. 경험은 인간이 보편적으로 거룩하지 않은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본성이 변화되지 않는 이상 거룩하게 될 수 없습니다.
4. 이성은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 창조주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아니면 변화할 수 없음을 가르쳐 줍니다.
5. 이런 변화는 틀림없이 아주 큰 변화일 것입니다.
6. 성경은 이런 큰 변화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증언합니다.
7. 수많은 사람의 삶 속에서 인간의 본성이 변화되어 거룩하게 되는 것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수많은 사람 속에 이러한 탁월한 마음의 변화가 있다는 것은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변화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변화를 경험했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그 변화의 결과가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변화의 결과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 줄 수 있는 사람이 두세 명이 아니라 수백 수천 명, 아니 수십만 명, 수백만 명이라면 이것은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변화했다는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이런 증거는 두 부류의 사람들에게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첫째, 악명 높은 많은 사람입니다. 둘째는 순교자들입니다.
첫째, 예전에 악명 높고, 방탕한 삶을 살며, 모든 종교를 경멸하고, 온갖 불경스럽고 타락한 삶을 살며, 사람이기보다는 짐승 같고 마귀같이 보였던 사람들이 놀랍게 변화되어, 헛되고 악한 삶을 사는 대신 겸손하고, 경건하고, 영적이며 천국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경우는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던 시대와 종교개혁 시대에 특히 많았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 9~11절이 잘 보여 주는 것처럼 사도 시대에 우상숭배, 간음, 음란, 도둑질, 탐욕, 술 취함, 욕설, 강탈 등을 일삼던 많은 사람이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깨끗하고 거룩하고 의롭게 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잔인한 박해자가 성령으로 변화되어 겸손하고 온유하고 열심 있는 성도가 된 경우도 많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런 삶의 변화는 일시 동안만이 아니라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그들은 온갖 어려움과 시험 속에서도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거룩하게 살았습니다. 수많은 사람 속에 있는 이런 놀라운 변화는 개인의 회심보다 많은 사람의 회심 속에서 더 분명히 드러납니다. 우리는 놀랍게 삶이 변하는 수많은 사람을 볼 때, 마음의 변화가 있다는 큰 증거를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어떤 한 사람이 마음의 변화 없이도 외적인 삶과 행동이 놀랄 만큼 변한 것처럼 보이고, 탁월한 성도처럼 행동하는 듯이 보일 수는 있지만 수많은 사람에게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는 없습니다.
둘째, 순교자들 속에서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납니다. 수천의 순교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큰 증거는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본성이 변화했다는 것입니다. 순교자들이 착한 양심과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고난을 견디고, 삶에서 큰 변화를 보이며, 마음의 거룩함을 보여 주는 것은 마음이 변화했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그러나 고통 속에서 거룩을 드러내는 것은 더 큰 변화입니다. 왜냐하면 고통은 고통 없는 상태보다 마음에 더 큰 시험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불신자들과 회심의 실제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환경을 선택할 수 있다면 그들은 회심의 실재에 대한 가장 좋은 증거를 얻기 위해 고통스러운 환경, 즉 큰 고통을 당하는 것으로 시험당하는 것 같은 환경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해 극심한 시련을 겪은 수백만 명의 성도는 하나님에 대한 초자연적인 사랑과, 세상을 버리는 것에 대한 놀라운 증거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장 극단적인 고통과 인간이 고안해 낼 수 있는 가장 잔인한 고문으로 시험을 받아 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이 겪은 많은 고통은 아주 긴 고통이었습니다. 박해자들은 온갖 고문을 통해 순교자들의 마음을 약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그리스도를 부인하기보다는 온갖 고통을 겪으며 심지어 죽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박해자들은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도 순교자들의 신앙과 사랑과 용기를 꺾을 수 없었습니다. 순교자들은 아주 침착하고 크게 기뻐하며 모든 고통을 이겨 냈습니다. 또한 많은 순교자가 고통 중에서도 크게 기뻐했으며,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했습니다. 그러므로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용감하게 고통을 이겨낸 것은 소수의 사람만이 아닙니다. 모든 계층의 수많은 사람이 이런 고통을 이겨 냈습니다. 여기에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이 모두 포함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사랑과 용기를 가지고 지상의 가장 크고 잔인한 왕들을 이겨 냈습니다. 가장 치명적인 상황 속에서도 그들은 자신의 구주와 조금이라도 떨어지는 것보다는 기꺼이 고통당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역사를 읽는 사람은 이들이 자연적인 본성 이상의 어떤 것을 가졌다는 것 즉 사람들이 자연적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어떤 초자연적인 강력한 원리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또한 한때 기독교에 대한 잔인한 박해자였다가, 자신의 죄를 깨닫고 마침내 그리스도와 복음을 전하며 인내로 고통을 이겨 낸 많은 사람이 있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모든 시대의 교회에서 순교자들이 보여 준 믿음, 견고함, 쾌활함은 기적이 계속된다는 사실과 회심의 실재를 보여 줍니다. 우리가 모든 상황을 고려한다면, 순교자들의 이런 행동은 그리스도와 사도 시대에 이루어진 기적 같은 하나님의 능력을 놀랍게 보여 줍니다. 기독교 외에 다른 종교에서는 자신의 종교의 진리를 증명하기 위해 그러한 순교자를 많이 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따르는 성도는 박해를 받는 가운데서도 인내함으로 승리했습니다.
본성을 바꾸고, 본성의 힘을 능가하는 힘을 주는 원리를 주입하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어떤 강력한 역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무엇이 어떤 특정한 기질이나 조건을 가진, 두세 사람이 아니라 모든 시대, 모든 삶의 조건 속에서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바꾸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겠습니까? 모든 고난을 견디며,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 기쁨으로 보이지 않는 대상을 사랑하려면 본성 이상의 어떤 것이 필요합니다. 인간의 본성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을 강하게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자신이 잘 알고 있는 대상에 대해 일시적인 감정을 가질 수는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에 대해서는 그렇게 강하게 마음을 밀착시킬 수 없습니다. 비록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대상이지만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같은 크고 가시적인 결과를 갖다 주는 사랑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이 역사하신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에 이런 사랑을 넣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성의 목소리, 성경, 경험, 가장 탁월한 사람들의 증언은 회심이 반드시 있다는 것에 일치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회심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음을 이성은 많이 가르쳐 줍니다. 만일 하나님이 계신다면, 의심할 여지 없이 하나님은 세상의 통치자요 심판자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의 이성적인 피조물이 하나님 자신을 기뻐하게도 하시며,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에 일치하지 않을 때 그들을 하나님의 임재에서 추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본성적으로 거룩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을 기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본성이 변해야 합니다.
성경은 회심의 교리를 많이 가르칩니다. 만일 우리가 회심을 부인하면 사실상 우리는 성경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회심의 필요성과 우리의 마음이 죄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서야 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을 부인하면 성경 전체를 부인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경이 회심에 대해 가르치는 것을 부인하면, 성경의 나머지는 우리에게 전혀 의미가 없게 됩니다.
경험은 회심과 같은 일이 있음을 자주 가르쳐 줍니다. 수많은 성도가 자신의 말로만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으로도, 좋은 환경 속에서의 자신의 행동만이 아니라 큰 고난 속에서의 행동에서도 실제로 자신이 회심했음을 보여줍니다.
만일 이 회심 교리가 이성의 소리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만일 이 회심 교리가 이성에 아주 어려운 교리라면,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하나님 자신의 목소리로 이 문제를 결정하는 것은 충분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계신다면 당연히 하나님은 구원의 방법과 하나님께 나아오는 방법을 타락한 사람에게 계시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외에 어디에서 우리가 그러한 계시를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성경이 이런 회심 교리를 가르쳐 주고 있다면, 하나님은 사람보다 이 문제에 대해 더 많이 알고 계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만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과 수많은 시대의 경험도 회심과 같은 마음의 변화와 인간 본성의 변화가 반드시 있음을 보여 줍니다.
8. 자신 안에 이러한 변화를 체험했다고 말하는 모든 사람의 증언을 거절하는 것은 비합리적입니다. 만일 그들이 지성적으로 아주 떨어지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그들의 증언을 거절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정직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이 분명하다면 우리는 그들의 증언을 거절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증언한 것은 그들이 체험했든 그렇지 않든 간에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불신자들에게는 아주 이상한 것이고 자신의 마음으로 도저히 생각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증언들은 서로 멀리 떨어진 사람들 사이에서도 아주 크게 일치합니다. 또한 그들의 증언은 본질이 같습니다. 그들의 증언은 시대가 달라도 같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들의 증언을 믿는다면 그들의 체험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신적인 일들(사랑, 겸손, 복종)을 맛보는 새로운 감각이 그들에게 있습니다. 한때는 그들이 체험하지 못했던 것들을 이제는 수시로 체험합니다.
반대: 많은 사람이 제기하는 가장 큰 반대는 자신이 회심했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이 아주 나쁜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답: 이런 나쁜 행동은 바르게 생각하기만 하면 오히려 성경이 우리에게 회심에 대해 말해 준 것을 확증해 줍니다.
(1) 성경은 불법적인 것이나 양의 탈을 쓴 이리가 있을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2) 성경은 사람이 종종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속인다고 가르쳐 줍니다. “대저 주의 원수가 훤화하며 주를 한하는 자가 머리를 들었나이다. 저희가 주의 백성을 치려하여 간계를 꾀하며 주의 숨긴 자를 치려고 서로 의논하여” (시 83:2~3).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롬 2:29).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눅 11:44).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눅 16:15). 마태복음 25장 1~13절은 어리석은 처녀들도 지혜로운 처녀들처럼 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3) 경건한 자들도 죄와 죽음을 경험하고, 때로 나쁜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만 가지고 우리는 그들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4) 많은 거짓 증언이 있다고 해서 참된 증언이 전혀 없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많은 거짓 증언이 어떻게 참된 증언은 전혀 없다고 하는 증명이 될 수 있습니까? 이것은 거짓말이 많다고 해서 모든 진술이 거짓말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불성실함이 많다고 해서 전혀 정직함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금처럼 보이는 많은 것이 금이 아니기 때문에 금은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많은 것이 진짜 다이아몬드가 아니라고 해서 진짜 다이아몬드는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5) 자신의 행동을 바르게 하면서 크고 강한 증거가 있는 사람들을 회심하지 않았다고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적용)
이 교리에 기초해서 저는 자연적 상태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에게 간절히 회심을 추구할 것을 권면합니다. 만일 본문이 말하는 이런 회심이 있다면, 회심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또한 회심한 사람은 복있는 사람이며,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가장 비참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지옥 뚜껑에 매달려 있으며, 매일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질 위험에 처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회심이 있는 것이 틀림없듯이 회심하지 않은 상태에 있는 여러분 모두는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으며, 날마다 지옥의 비참한 상황으로 떨어질 위험 가운데 있고, 지옥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만일 실제로 회심이 있다면,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지금 처해 있는 상황에서 어떤 안식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제 여러분에게 간절히 권면합니다. 하나님께 참되고 구원 얻을 만한 방향전환을 함으로써 여러분이 처해 있는 현재의 상태에서 벗어나기를 추구하십시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것과는 다소 다른 방법으로 적용을 하겠습니다. 저는 먼저 여러분에게 회심하기 위해서 해야 하는 지침을 드리겠습니다. 그런 다음 이런 지침을 따르도록 여러분을 설득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회심하기 위해 따라야 하는 지침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두 견해 사이에서 오랫동안 머뭇거리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하려고 하는 일에 어떤 결정을 내리십시오. 회심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면, 이처럼 중요한 문제에 대해 아직 아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 걱정하십시오. 그것은 얼마나 비합리적입니까? 여러분은 어떤 결정을 내리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까? 여러분은 시간이 그렇게도 남아돕니까? 여러분의 삶을 개혁하는 것이 최선인지 아닌지에 대해, 어떻게 하는 것이 여러분의 최선의 선택인지를 결정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에 어떤 결정을 내리십시오. 열왕기상 18장 2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그러므로 저는 이렇게 말하려고 합니다. 만일 여러분의 정욕을 좇는 것이 최선이면 정욕을 좇으십시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을 좇는 것이 최선이면 하나님을 좇으십시오.
(2) 미래의 유익을 바라고 미루지 마십시오. 벨릭스처럼 되지 마십시오. 벨릭스는 바울이 신앙에 대해 말했을 때, 바울을 내어 보내면서 나중에 기회가 있을 때 다시 바울을 부르겠다고 말했습니다(행 24:25). 여러분이 지금 젊고, 아직도 더 많은 기회가 있다는 생각 때문에 미루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했던 많은 사람이 결코 이 세상에 더 머물지 못했으며, 그들의 상태는 영원히 결정되어 그들이 결심도 하기 전에 지옥이 그들의 거처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후로 여러분이 여유는 더 많아지고, 유혹은 더 적게 받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미루지 마십시오. 또 다른 때 우리 마을에 성령이 부어지실 것을 희망하면서 미루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생애 동안 또 다른 성령의 부어지심이 있을지 없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또한 만일 또 다른 성령의 부으심이 있다 해도 여러분이 그런 혜택을 받게 될 것인지는 불확실합니다. 성령이 여러분을 각성시켜, 여러분으로 하여금 구원을 추구하도록 해 주시기를 기다리며 미루지 마십시오. 이것은 가장 치명적인 추측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령의 영향을 받는 방법은 정해진 모든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며, 지혜의 문 옆에서 기다리며, 지혜의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잠 8:34)
(3)여러분이 어렵다고 느끼는 일에 순종하십시오. 여러분의 부패한 본성에 아주 어렵다고 느끼는 것에 순응하기까지 여러분이 회심할 수 있는 희망적인 길에 들어섰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많은 사람이 쉽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길 또는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찾으려고 엄청나게 공부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에 우리의 노력을 너무 많이 쏟아부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코 그 길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영생으로 인도하는 문은 여전히 좁은 문입니다. 넓은 문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데 보낸 시간은 아주 무익하게 보낸 시간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 길을 부지런히 찾다가 갑자기 지옥에 떨어지게 되면, 그들의 모든 계획과 희망은 끝장이 납니다.
구원을 얻는 데 필요한 것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어려워 보입니다. 어떤 의무들은 인간의 자연적인 욕구와 성향과는 정반대되는 것으로서 아주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자신에게 달콤하게 보이는 것과 자신이 많이 즐기는 것을 부인해야 합니다. 그들의 본성은 끈질기게 그런 것들을 요구하며, 그래서 그들은 끈질긴 자신의 욕구에 ‘아니오’ 라고 말하는 법을 모릅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 해야만 하는 어떤 것들은 노력해야 한다는 점에서 아주 어렵게 보입니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은 편안함을 좋아합니다. 그들은 신앙적인 일에 끊임없이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아주 어려워합니다. 신앙적인 것들은 평소 자신들이 해 왔던 일과는 너무 다른 새로운 것입니다. 그들에게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자신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어려움에다가 새로운 어려움을 더 추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신앙에 속한 많은 것이 사람들에게 어렵게 보이는 이유는 신앙적인 것들이 그들의 기질과 아주 상반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그들의 기질에 상반되며 자신들이 행하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처럼 신앙적인 대화를 하는 것은 어떤 사람들의 자연적인 성향에 반대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주 내성적이어서 자신의 마음을 열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내적인 어려움과 유혹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아주 어려워합니다.
어떤 것들이 사람들에게 어려워 보이는 것은 환경 때문입니다. 어떤 환경에서는 아주 쉬운 의무가 다른 환경에서는 아주 어렵게 보입니다. 구원받는 데 필요한 것들이 사람들에게 아주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그들의 교만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때때로 예수 믿는 친구들이나 지인들이 하는 신앙적인 이야기를 듣는 것을 매우 힘들어합니다. 특히 책망을 받을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마찬가지로 이웃에게 어떤 잘못을 했을 때, 돌아와서 이웃에게 질문을 고백하는 것이 사람들에게는 어렵습니다. 또한 자신의 영적인 어려움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이 많은 사람에게는 교만 때문에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찬식에 오는 것을 어려워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성찬식에 참여하려면 자신들의 신앙 지식을 점검받아야 하는데 교만한 마음 때문에 그들은 자신이 무식하다는 평가를 받는 것을 싫어하여 아예 성찬식에 참여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명령 가운데 많은 부분은 회심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아주 어려운 말씀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많은 시간을 들여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해도 좋은 이유를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회심하려고 한다면 여러분에게 아주 어려워 보이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삶과 죽음이 여러분 앞에 있는데 왜 여러분은 그렇게 머뭇거리고 있습니까? 머뭇거릴 여유가 없습니다.
(4) 죄에 속아서 여러분의 눈이 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이것은 회심의 가장 큰 장애물 가운데 하나이며, 당연하게도 이것이 수많은 사람의 회심을 방해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문제에 대해 눈을 부릅뜨고 철저하게 여러분의 마음을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악한 행동에 대해 핑계를 대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여러분이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해 속지 않도록 하십시오. 여러분 가운데 많은 분이 그것이 합법적이라고 생각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주 나쁘고 하나님의 순수한 눈에 혐오스러운 것들을 행했습니다. 인간은 이런 일을 행할 때, 특히 이런 생각을 하면서 언제, 어떻게 계속해서 죄를 지을 때, 강한 선입관을 갖게 되어 자신들의 이전 습관을 계속 반복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러한 행동을 합법적인 것이라 여기게 되고, 자신들의 행동이 악하거나 정죄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죄책감을 갖지 않게 됩니다. 사람들이 악한 습관에 빠져 있으므로 사람들에게는 큰 죄책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죄책을 제거하기 위해 필요한 첫 번째 일은 죄책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죄에 속아 죄책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속임수를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미래의 행동에 대해 눈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아무 해가 없다는 생각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거나 여러분의 영혼에 해가 되는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의 원칙을 굽히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말하자면 여러분의 생각과 여러분의 성향이 일치하도록 노력하십시오. 사람들은 원칙 없이 행할 때 잘못된 방향으로 가기 쉽습니다. 여러분이 원칙 없이 행동하면 좌우로 치우치거나 넘어지거나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사람의 지혜는 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법칙으로 삼아 살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또한 삶의 원리와 실천이 일치하는 방법을 찾아 내려고 시도하지 않습니다. 이런 경향성이 사람이 구원받는 것을 크게 방해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기만은 자신에게 파괴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막지 못합니다. 잠언 14장 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신을 영원한 죽음과 멸망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5장 20절에서 이런 자들에게 화를 선언합니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
사람들이 이처럼 하나님과 자기 양심에 대해 거짓되게 행하는 성향이 죄인들이 하나님께 참되고 철저하게 회심하는 데 가장 큰 방해가 되며, 아무리 경고와 조언을 받아도 소용이 없는 가장 큰 이유가 됩니다. 이런것이 회심에 반드시 필요하고 회심에 이르는 길에 큰 진보가 되는 철저한 개혁을 방해합니다. 히브리서 3장 12~1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또한 고린도후서 11장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라.”
(5) 어떤 죄는 짓지 않았다고 우쭐대지 마십시오. 만일 죄를 지었다면 죄인 줄 몰랐기 때문이라고 변명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종종 이러저러한 죄를 지은 것은 몰랐기 때문이라고 어리석게 변명합니다. 또한 사람들은 악한 행동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했을 때, 비록 자기가 그런 행동을 하기는 했지만 진심으로 원해서 한 것은 아니라고 변명합니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악한 행동입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이런 행동을 하며, 전혀 고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행동이 구원받기 위해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는 데 큰 방해가 됩니다.
(6) 의심스러운 것 즉 합법적인지 그렇지 않은지가 불분명한 것은 피하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육체적 욕구를 채워 주는 어떤 것에 이끌린다면, 또는 합법적인 것인지 불법적인 것인지가 명확하지 않은데도 물질적으로 풍족하게 해 주거나 명예롭게 해 주는 것이라면, 또는 어떤 일을 할 때 하나님 보시기에 잘못한 것을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계속 들 때, 여러분을 위해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4장 23절에서 한 말을 들어 보십시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금지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열매는 맛보지 않는 것이 최선입니다. 의심스러운 일은 하지 마십시오. 단지 순간적인 쾌락을 위해서나 친구와 행동을 같이 하기 위해서나 잠시 동안 세상적인 유익이나 명예를 위해 양심을 불안하게 하거나, 여러분의 영혼을 위험에 노출하는 일은 하지 마십시오.
(7) 만일 여러분의 회심에 방해되는 것은 무엇이든 피하려고 한다면, 명백히 죄악 된 것만이 아니라 죄로 인도할 수 있는 것들도 피하십시오. 그리스도는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1:41). 그러므로 유혹으로 달려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회심을 크게 방해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세상의 유혹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회심에 방해받지 않기를 바란다면 여러분 안에 있는 거짓만이 아니라 세상의 유혹을 피하십시오.
그 자체로서는 악하게 볼 만한 것이 아닌 어떤 습관적인 행동이 여러분의 영혼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게 하거나, 개인 기도나 다른 신앙적인 의무를 소홀히 하게 하거나, 죄악 된 말이나 행동으로 자꾸 인도하는 등 경험적으로 여러분에게 해가 된다는 것을 발견할 때, 또는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설교를 통해 이것이 죄짓도록 만드는 성향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아주 확실히 그런 행동을 피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회심으로 가는 길에 놓인 모든 장애물을 피해야 합니다.
(8)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행하는 것만으로 회심을 추구하지 마십시오. 사람에 대한 의무도 추구하십시오. 참된 회심에 이르는 길은 철저하게 여러분의 삶을 개혁하고 십계명의 두 돌 판에 기록된 모든 의무를 수행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회심을 위해 해야 할 일은 성경 읽고, 기도하고, 설교 듣고, 예배에 출석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사람에 대한 공의와 자비를 행해야 합니다. 부모에 대한 의무, 형제와 자매에 대한 의무, 남편과 아내와 자녀에 대한 의무, 이웃에 대한 온유와 공의와 자비의 의무를 행해야 합니다.
성경읽기, 기도, 예배 참석은 어떤 미덕이나 힘을 가진 회심의 수단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수단은 하나님이 은혜와 복을 주시려고 지정하신 방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에 대한 도덕적 의무는 하나님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추구하는 방법으로 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에 대한 의무가 영적인 은혜를 받는 방법임을 성경에서 발견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백부장이 바로 이런 경우였습니다. 백부장은 자신의 근무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자비가 탁월했습니다. 누가복음 7장 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백부장은 이런 일을 통해 그리스도께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백부장의 종을 고쳐 주심으로써 백부장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고넬료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넬료는 하나님께 기도에 힘쓸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자선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하여 고넬료와 그의 가족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아 구원받고 이방인의 첫 열매가 되었습니다(행 10:4, 11:14).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외적인 의무와 사람에 대한 도덕적 의무를 비교한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후자가 더 우선적입니다. 마태복음 9장 13절은 하나님이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9) 만일 여러분이 회심하기를 원한다면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의 법칙으로 삼으십시오. 만일 위대한 신앙고백과 좋은 평판과 큰 체험을 한 성도가 있더라도 그런 성도들의 모든 것을 본받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결코 그들을 여러분의 법칙으로 세우시지 않았음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의 법칙으로 주신 것은 순수하고 전적으로 옳은,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좋은 본보기를 존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삶의 법칙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본보기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장점과 결점을 지나치게 관찰하며 살필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고 내가 시험에 들어 넘어질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의 법칙대로 산다면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됩니다. 그러나 작든지 크든지 다른 사람의 잘못은 따라 하지 않는 것이 안전합니다. 다른 사람의 삶에는 우리가 풀 수 없는 어려운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우리가 억지로 풀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재판관이나 주인으로 임명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삶의 방향에 필요한 충분하고 확실한 법칙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나쁜 행실을 보고 어떤 결정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야고보서 4장 11절의 말씀대로 우리는 율법을 지키는 자로 부름받았지 율법의 재판관으로 부름받지는 않았습니다.
(10) 어려운 시기에는 더욱 분발하도록 하십시오. 사람들이 회심을 얻는 데 유익이 되는 시간에는 많은 다양성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성령이 크게 부어지시는 시간은 회심을 얻는 복된 시기요 영광스러운 기회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크게 반대 되는 시기도 있습니다. 이 때 물결은 정반대로 흘러갑니다. 모든 것이 회심을 방해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에게는 지금이 바로 이런 때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아주 많은 사람이 어려운 때에 죽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죽음은 좋은 때만이 아니라 어려운 때에도 찾아옵니다. 죽음은 사람이 성령 충만함을 받을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회심은 성령이 부어지는 시기만이 아니라 그렇지 않은 시기에도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회심하기에 어려운 때는 회심에 대한 더 많은 관심과 더 큰 노력과 부지런함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악한 시대의 유혹과 나쁜 본보기들을 더욱 경계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악한 물결이 거셀수록 더욱 힘을 내어 대처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이 악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말했습니다(행 2:40).
(11) 여러분이 구원을 추구하는 동안 마귀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이 회심을 추구하기 시작하면, 마귀는 이 사람에 대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마귀는 회심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성공하지 못하도록 온갖 술책과 유혹을 사용합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자기 나라의 백성 하나를 잃어버리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회심을 추구하는 사람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많은 것을 제안합니다. 마귀는 회심을 추구하는 사람을 자만에 빠지게 하거나 낙심에 빠뜨리려고 합니다. 마귀는 회심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으며, 은혜의 날은 지나갔다고 말합니다. 때로 마귀는 아주 불경한 생각을 집어넣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회심하기를 원한다면 마귀의 이런 유혹에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그러한 제안들은 보통 마귀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마귀는 여러분의 적입니다. 야고보서 4장 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결코 마귀에게 굴복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마귀의 제안을 물리치십시오. 마귀의 모든 유혹에 대항하십시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분을 안전한 길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마귀의 말에 귀 기울이면, 마귀는 곧 여러분을 벼랑 끝으로 데리고 가서 구렁과 수렁에 빠뜨려 여러분의 영혼을 멸망시킬 것입니다. 만일 사탄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불경스러운 생각을 하도록 하면, 가장 좋은 대응 방법은 사탄과 토론하거나 사탄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입니다. 마귀와 토론하려고 하지 말고, 마귀에게서 여러분의 귀를 돌리십시오. 여러분에게 더욱 유익한 것을 생각하도록 하십시오.
(12) 여러분의 영혼에 큰 관심을 기울이는 것 외에 그 어떤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거나 관심을 기울이지 않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빼앗는 많은 것이 있습니다. 때로 모든 사람의 확신과 회심을 추구하며 행했던 것들이 이런 것들 때문에 상실됩니다. 여러분의 생각과 감정과 시간을 빼앗는 어떤 것이 있습니다. 이런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뿌려진 밭에서 씨가 자라지 못하도록 막는 가시덤불 같은 것입니다. 때로 이것은 마음을 빼앗는 어떤 즐거움입니다. 때로 이것은 어떤 세상적인 일, 새로운 사건입니다. 때로 이것은 어떤 사람의 환경 속에서 벌어지는 새로운 일입니다. 때로 이것은 공적으로 토론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마음이 이런 일로 너무 분주하여 영혼이 둔감하게 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누가복음 21장 3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13) 자만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모든 사람이 자만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 있는 모든 사람은 자기가 죽기 전에 회심할 수 있을 것이며, 마침내 지옥에 들어가지 않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지혜를 자랑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지혜로 자신을 위한 합당한 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굳은 결심을 의지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가 많이 해 놓은 기도를 의지합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에게 유해하고 치명적인 것으로 입증되었습니다. 시편 36편 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가 스스로 자긍하기를 자기 죄악이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 자만은 회심에 필요한 각성과 위기의식을 빼앗아 갑니다. 그래서 자만은 위험에서 탈출하려고 시도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그런 자만에 빠지지 않도록 특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14) 회심을 위한 수단을 철저히 사용하려고 노력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이 고의로 그런 일을 무시했다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이 임종의 순간에 자신이 안전하다는 아무 확증도 없을 때, 어리석게도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을 무시한 것 때문에 여러분이 망하게 되었다고 여러분의 양심이 여러분을 고소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십시오.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전 9:10). 어떤 은혜의 수단도, 의무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모든 은혜 수단과 섭리와 기회와 은사를 선용하십시오.
(15) 여러분이 회심하는 방법을 알기 원한다면 비밀스러운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말고 계시된 것에 주의를 집중하십시오. 신명기 29장 2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비밀한 뜻 특히 여러분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대한 것으로 혼란스러워하지 마십시오. 사람과 천사들에게 감추어진 하나님의 비밀을 고치꼬치 물으려 하지 말며, 하늘에 있는 자나 땅에 있는 자나 그 누구도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치 않은, 일곱 인으로 봉해진 책의 봉인을 풀려고 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이런 것들로 자신의 생각을 혼랍스럽게 할 때, 그들은 불행한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그런 함정을 피하고, 여러분에게 충분히 주신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노력하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명령하신 것,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조언과 지침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채우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을 전부 이런 것에 두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잘 되는 길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영원한 비밀 계획 같은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어지럽힌다면, 여러분은 빗나간 길로 걷는 것이며 불행과 파멸의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16) 여러분이 행한 것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지난 행동에 너무 집착하지 마십시오. 즉 여러분이 다른 사람보다 얼마나 많은 것을 했는가, 얼마나 많이 실패했는가, 얼마나 많은 기도가 응답받지 못했는가, 얼마나 오랫동안 추구했는데도 얻지 못했는가 등을 생각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지 마십시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3장 13절에서 말한 것처럼 뒤에 있는 일은 잊어버리십시오. 여러분은 앞으로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을 더 충분히 생각해야 합니다. 즉 은혜와 기회의 날이 아직 남아 있을 때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까지 여러분이 손에 쥔 좋은 것들이 무엇인지, 어떻게 그런 것들을 증진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충분히 생각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고 마침내 성공할 수 있는 길입니다.
(17) 여러분이 한 것이나 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신뢰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이 어떤 것을 했을 때, 여러분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여러분의 가장 작은 죄라도 속죄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조금이라도 받을 만한 값을 지불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한 행동 중에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행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한 것이 있다면, 아니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천 배나 더 많이 어떤 일을 했다 할지라도 여러분이 하나님께 대한 반역자로서 행한 일이므로 하나님께 존중받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영원한 비참에서 구원해 주시거나 여러분에게 작은 은혜라도 주시거나, 여러분의 어떤 기도나 간구에 응답해 주셔야 할 정도로 여러분이 하나님께 자비를 받을 만한 가치 있는 행동을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는 무한한 잘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여러분이 수만 시대를 기도와 고난과 깨어 있음과 수고로 채운다 해도 이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죄를 속죄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이 회심하여 하나님께 돌아가게 하기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지침을 여러분에게 제시했습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지침을 잘 따르기를 권면합니다. 여러분의 회심을 위해 여러분에게 제시된 지침을 잊어버리지 마십시오. 저는 회심하기를 바라는 모든 사람이 이런 지침을 계속 간직하고 자주 생각해서 이런 지침대로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지침으로서 이제 여러분이 왜 지침을 따라야 하는지에 대해 두세 가지로 간단하게 결론적인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이런 지침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여러분의 영생을 위한 것입니다. 잠언 4장 13절에 나오는 지혜자의 말이 여기에 잘 적용됩니다. “훈계를 굳게 잡아 놓치지 말고 지키라 이것이 네 생명이니라.” 제가 여러분에게 지침을 주는 것은 여러분의 영생을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영생은 말 그대로 일시적인 삶보다는 엄청나게 더 긴 삶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을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하기 위한 것이며, 여러분의 영생을 위한 것입니다. 영생은 결코 평범하거나 비천한 삶이 아닌 영광의 삶입니다. 영생은 면류관과 왕국을 소유하고 영원히 살며, 큰 영광과 행복 가운데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2) 이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 가운데 나이가 어리든지 많든지, 자유자이든지 종이든지, 부자든지 가난한 사람이든지 회심의 가능성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집의 문을 활짝 열어 놓았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제공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회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회심하는 데 필요한 수단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팔을 벌리고 여러분 모두를 영접하십니다. 잠언 8장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아 내가 너희를 부르며 내가 인자들에게 소리를 높이노라.”
(3) 만일 여러분이 이러한 지침을 따른다면, 여러분은 회심하게 될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잠언 2장 1~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나의 말을 받으며 나의 계명을 네게 간직하며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지식을 불러 구하여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은을 구하는 것같이 그것을 구하면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지침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이 주시는 지침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여러분이 이런 지침을 따른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회심하기를 원하고 멸망에 들어가지 않기를 원한다면, 여러분은 지금 회심하고 지옥에서 해방되며, 죽음을 더 잘 준비하고, 영원히 행복하고 즐겁게 살 수 있는 방법을 들은 것입니다.
조난단 에드워드의 복음과 사상
양낙흥(고신대 교수)
조나단 에드워드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할 뿐 아니라 그의 가장 유명한 글들 가운데 하나는 비교적 그의 목회 초기에 속하는 1734년에 쓰인 "하나님의 영에 의해 영혼에 직접 수여된 신적 초자연적 빛이 성경적이고 이성적인 교리임을 증명함"이다. 동시에 이것은 에드워드의 대표적 설교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심지어 미국 문화사에서 식민지 시대 미국의 대표적 작가들 중 하나로 에드워드를 다룰 때 이 글은 그의 대표작들 중 하나로 선택된다. 신령한 빛에 관한 에드워드의 지론을 담은 이 설교의 본문은 마태복음 16:17,"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였다. 이 본문에 근거하여 그는 "영적이고 신적인 빛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 영혼에 곧바로 전달된 것으로 자연적 수단에 의해 획득된 어떤 것과도 다른 성질의 것"이라는 교리를 제시한다.
이 설교에서 에드워드는 성령의 조명을 "신적이고 초자연적인 빛"(divine and super-natural light)이라 표현한다. 그는 이 영적 조명이 없는 사람은 영적인 사실에 대해 장님에 불과하다고 단언한다. 교리에 대한 지성적, 관념적, 사변적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복음이 사실임을 믿고 확신하는데 이르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복음에 대해 확신을 얻기 위해서는 필히 성령이 직접 영혼에 비추어 주시는 신적 초자연적 빛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에드워드 신학의 일관된 핵심적 주제들 중 하나이다.
그러면 이 영적 신적 빛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신적 탁월성(the divine excellency)에 대한 진정한 지각(a true sesnse)," 혹은 "이해"(apprehension), 그리고 "그것들의 진실성과 실재성에 대한 확실한 깨달음"이라고 대답한다. 에드워드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 더 좁혀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구속의 사역, 그리고 하나님의 길과 사역들"에 대한 "영적이며 구원 얻는 확신들"은 그것들의 신적 탁월성과 영광에 대한 안목이 생겨야 비로소 얻을 수 있다.
신령한 빛이 영혼에 비춰 우리의 영안이 열릴 때 비로소 복음의 진리를 이해하고 "보고"(see) "지각할"(sense)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체험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영화로우시다는 사실을 단지 "이성적으로 믿는"데서 끝나지 않고 자기 마음속에 하나님의 영화로우심에 대한 감각(sense)이 있다고 에드워드는 주장한다. 하나님이 은혜로우시다는 사실을 단지 사변적으로 판단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스러우신가를 감지한다(sense)는 것이다.
에드워드에 의하면 선(good)에 관한 두 종류의 지식이 있다. 하나는 사변적이거나 순이론적(notional)지식이다. 다른 하나는 마음의 감각으로 이루어지는 지식이다. 그것은 어떤 것의 아름다움, 사랑스러움, 혹은 달콤함에 대한 감각이다. 그리하여 그것에 대한 생각이 떠오를 때 마음으로 기쁨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전자에서는 단시 사변적 기능 혹은 이해력이 활용된다. 후자에서는 의지 혹은 성향(inclination), 혹은 마음(heart)이 주로 관련된다. 에드워드는 견해(opinion)로서의 지식과 감각sense)으로서의 지식을 구별한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고 은혜로우시다는 사실에 대한 견해를 갖는 것과 그 거룩함과 은혜스러움의 사랑스러움과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을 갖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다른 예를 들어, 꿀은 달다는 이성적 판단을 가지고 있는 것과 그것의 달콤함에 대한 감각을 가지는 것과는 다르다. 꿀맛이 어떤 것인지 모르면서도 전자는 가질 수가 있다. 그러나 자기 마음속에 꿀맛에 대한 관념(idea)이 없으면 후자가 결코 있을 수 없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이 아름답다고 믿는 것과 그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을 가진 것과는 차이가 있다. 전자는 소문에 의해 얻을 수 있는 것이고 후자는 오직 그 용모를 봄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에드워드는 단순히 어떤 것을 탁월하다고 사변적,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것과 그것의 달콤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을 가지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거듭 주장한다. 전자는 단지 머리에만 머무르는 것으로 오직 사변만이 그것에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후자에는 마음이 관련되어 있다. 어떤 것의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을 마음으로 지각할 수 있을 때는 그 이해(apprehension)로부터 필연적으로 즐거움이 우러나게 된다.
에드워드는 하나님이 직접 마음속에 집어넣어 주시는 신령한 빛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성경적이고 합리적인 두 가지 증명을 시도한다. 첫째는 이 주장에 대한 성경적 증거들이다. 성도가 불신자들과 다른 점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 그리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눈을 가졌다는 점임을 성경은 누누이 보여 준다고 그는 주장한다.
"범죄 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 하였느니라"(요일3:6).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 하였느니라"(요삼1:11).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요14:19).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이러한 지식은 결코 단지 사변적 지식일 수는 없다고 에드워드는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보는" 과 "아는" 것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식은 단지 정도의 차이 뿐 아니라 본질적으로 그 종류가 다른 지식이라는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이러한 빛과 지식은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주어지는 것이라고 에드워드는 이해한다.
"그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 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11:25-27).
여기서 이 지식을 주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선물과 역사로 되어있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4:6)는 구절이 분명히 보여주는 바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신적인 최상의 영광 및 탁월함을 발견하는 그러한 일이 있다는 것이라고 에드워드는 해석한다. 그것은 그의 능력과 의지의 직접적인 결과다. 하나님이 천지창조시에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빛을 만드신 것을 그것에 비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드워드의 관찰에 의하면 성경은 인간의 회심시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주신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때에..."(갈1:15-16).
성경은 그러한 지식을 분명히 하나님의 직접적인 선물이라고 말씀한다.
"내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119:18).
여기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이란 에드워드에 의하면 "말씀의 명령들과 교리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과 완전성의 아주 놀라운 탁월성들과 경이로운 표현들, 그리고 거기 계시되어 있는 저 하나님의 역사들과 경륜들이다. 그리하여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의 섭리, 은혜언약, 그리고 자기 백성들을 향한 은혜의 방편에 대한 지식은 성도들에게 고유한 것이며 오직 하나님의 의해 주어지는 것이라고 에드워드는 지적한다.
"여호와의 친말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시25:14)"
이러한 발견으로부터 복음의 진리에 대한 "참되고 구원 얻는 믿음"(saving faith)이 생긴다는 것이 에드워드의 지론이었다. 그러므로 신적 초자연적 빛에 대한 에드워드의 신학은 결국 구원론의 일부였다. 어떻게 하면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가 하는 청교도적 관심이 에드워드의 "신적 초자연적 빛"의 신학을 낳았다는 것이다. 자신의 주장에 대한 성경적 근거로 에드워드는 요한복음 6:40을 제시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 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또 요한복음 17:6-8에서도 그것이 나타난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요한복음12:44-46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그를 영적으로 보는 것이 병행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에드워드는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을 정죄한 것은 그들이 그가 그리스도라는 것과 그의 가르침이 진실임을 신적인 것 속에 있는 고유한 맛과 향기(inward and distinguishing taste and relish)를 통해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고 지적한다. 누가복음 12:56-57에서 그리스도는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별치 못하느냐?"고 유대인들을 책망했다. 마태복음 16:3에서는 그것을 "시대의 표적"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면서 그는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치 아니하느냐?"고 덧붙인다. 에드워드에 의하면 그것은 "너희는 왜 거룩하고 신성한 것을 구별할 수 있는 저 참된 탁월성에 대한 감각(sense)을 갖고 있지 않으냐?"하는 말이었다. "왜 나와 나의 가르침의 영광과 신성을 볼 수 있는 수단인 하나님의 일들에 대한 미각(savor)을 갖고 있지 못한가?"라는 것이다.
에드워드의 해석에 따르면, 베드로는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을 본 것"이 복음의 진리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된 계기였다고 말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벧후1:16). 여기서 베드로는 변화선상에서 그리스도의 변형시에 제자들이 보았던 그 가시적 영광을 언급하고 있다고 에드워드는 이해했다. 그 영광은 너무나 신성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 위엄, 그리고 은혜를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신적 존재임이 명백히 드러났다는 것이었다. 에드워드는 "만일 그리스도의 외적 영광을 본 것이 그의 신성에 대한 확신을 주었다면 그의 영적 영광에 대한 이해가 어찌 그런 확신을 주지 못하겠는가?"고 묻는다. 그리스도의 변형시에 나타났던 그 외적 영광이 그의 신성을 보여 주었던 것이 그것이 그의 영적 영광의 형상이요 반영이었다는 것이다.
종교적 정서 제 2부에서 은혜스러운 정서의 확실치 않은 열두 가지 표지를 논할 때도 에드워드는 "어떻게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는가?"의 문제를 다루면서 인간은 복음의 빛이 비취어야 믿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성령의 조명 없이 자기 의지의 발동만으로 믿음을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에 유행하는 일반적 복음전도 방식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 되는 주장이다. 그는 "아무 영적 빛이나 조망 없이 사람들에게 믿으라고 밀어붙이거나 촉구하는 것은 흑암의 왕자의 기만을 크게 도와주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한다.
에드워드는 참된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신령한 조명이 꼭 필요하며 그것이 없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라고 확신했다. "영적 빛이 없는 믿음은 빛의 자녀들의 믿음이 아니라 어두움의 자녀들의 주제넘은 상상이다." 소위 무조건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
싸구려 믿음주의(easy-believism)에 대한 정면 공격인 것이다. 아마 에드워드가 보기에 현대의 기독교가 피상적이고 그리스도인들이 무력하며 불신자들과 큰 차이가 없는 삶을 사는 이유는 이처럼 신령한 조명 없이 자신의 의지의 결단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하고서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자처하는 데 있을 것이다.
따라서 에드워드는, 우리가 조명 받는 만큼만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어떤 영적 빛이 없이는 믿음을 구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영적 빛을 가진 꼭 그 정도만 믿음을 구사할 수 있다."
에드워드는 "생생한 은혜의 역사", 혹은 "감지되는 기독교적 체험"없이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은혜의 체험이란 바로 신령한 빛을 비췸 받아 하나님과 그의 진리를 보게 되는 것과 동의어다. 그러므로 영적 조명을 통해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생기기 전에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믿음 내지 신뢰를 가지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에드워드는 체험, 즉 영적 조명 없이 "믿음으로 산다."주장하는 사람들이 믿음에 대한 터무니없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구원받았다고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기의 구원에 대해 의심하는 것이 무서운 죄라고 생각해서 자기는 구원받았다고 무조건 믿는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만일 그런 것이 믿음이라면 바리새인들도 굉장한 믿음을 가졌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사죄 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고 그리스도는 가르쳤다. 성경에 의하면 믿음은 그것에 의해 구원으로 인도되는 것이지 자기가 이미 구원받았다고 믿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기가 믿음을 가졌다고 믿는 것"이거나 "자기가 믿는다고 믿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요즈음처럼 전도를 통해 그 자리에서 예수를 영접하고 믿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중요한 도전이 되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즉석 전도를 통해 복음을 받아들이고
당장에 구원받았다고 하는 많은 경우들이 여기에 해당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에드워드는 체험 이외는 은혜의 다른 증거가 없다고 보았다. 그는 체험을 가지는 것이 은혜를 가지는 것임을 인정했다. "대단한 체험을 하는 것은, 만일 그 체험들이 참된 것이고 언급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대단한 은혜를 받는 것과 동일한 일이다." 참 체험이 있으면 반드시 은혜가 따른다. "참 체험들 치고 은혜의 역사가 없는 것은 없다. 그리고 은혜와 성결의 정도는 참 체험의 정도에 정확히 비례한다." 그러므로 체험을 은혜의 증거로 받아들인다고 해서 그들이 그리스도를 버렸다거나 은혜체험에 의지해서 산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에드워드는 사람이 먼저 믿기 전에 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게시되는 법은 없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방법은 그들이 믿기 전이 아니라 ale음 후에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들에 대한 그들의 분깃(interest in the promises)을 계시하는 것이다." 아직 믿음이 없는 자에게 성령께서 그들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법은 없다. 다시 말해서, 아직 믿지 않아 아무런 은총이나 그리스도 안의 분깃을 갖지 못한 불신자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이 은혜의 약속에 참여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성경 구절을 제시하는 일은 없다. 특정인이 사죄 받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고 선언하는 성경 본문은 없다.
에드워드에 의하면 믿음의 유일한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도 복음의 축복에 초청받았다고 믿을 수 있는 "유일한 확실한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은 그 정도의 자격을 가진 자들도 초대한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그 말씀을 하신 분은 진실하여 거짓말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구원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은 첫째, 하나님의 진실하심에 대한 확신이 생기고 둘째, 성경이 하나님의 밀씀임을 확신하며, 셋째, 성경은 와서 복음의 은택에 참여하라는 죄인들을 향한 초청으로 가득하므로 자기도 초대되었음을 확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개인적으로 그에게 새로이 말씀하시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에드워드는 단언한다.
그러면 사람이 어떻게 그 복음의 초청을 믿을 수 있게 되는가? 믿음을 인간의 능력으로 일으킬 수는 없다면 성경에 나타난 구원의 약속을 어떻게 믿고 자기에게 적용할 수 있는가? 에드워드는 성령의 "영적조명(spiritual enlightening)과 영향에 의해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마음에 적용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복음의 초청, 혹은 제시(offer)를 "영적으로 적용(spiritual application)하는 것은 "제공된 거룩하고 신적인 축복들", 그처럼 은혜로운 제공을 베푼 "제공자의 달콤하고 경이로운 은혜"및 자기가 제안하는 것을 성취하시는 "그의 거룩한 탁월성과 신실성", 그리고 그것을 위한 그의 영광스러운 충족성"에 대한 영적 감각(spiritual sense) 혹은 미각(relish)"을 인간에게 줌으로써 인간의 미음을 인도하고 이끌어 그 제안 을 받아들이게 하고 그리하여 제공된 것에 대한 그의 소유권(title)의 증거를 그에게 주는 것이다.
에드워드에 의하면, 은혜스러운 감정은 정신이 "조명되어"(enlightened) 하나님의 일들을 바로 그리고 영적으로 "이해하는"데서 비롯된다. 즉 거룩한 정서는 "빛 없는 열"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정보, 어떤 영적 가르침에서 생겨난다. 말하자면 "빛"을 받아 지식이 생겨야 거룩한 감정이 일어난다. 성령의 조명이 있어야 하나님, 그리스도, 복음에 제시된 영광스러운 것들을 더 잘 볼 수 있고 그것들에 대한 더 낫고 뚜렷한 이해가 가능해진다. 지식이 감정을 낳는다면 그것은 어떤 지식인가? 즉 "지식이야말로 완악한 마음을 열어 정서들을 키우는 열쇠"라고 주장할 때 에드워드가 염두에 두고 있는 지식은 어떤 지식인가? 에드워드는 지식을 두 종류로 나눈다. 하나는 지적 지식이요 다른 하나는 영적 지식이다. 전자는 사변적이요, 후자는 초자연적이다. 에드워드가 이해로부터 감정이 생긴다고 말할 때 그 이해는 물론 후자의 것이다. 그런데 영적 초자연적 이해는 성도에게만 고유한 것이다. 성도가 아닌 자들은 그것을 전혀 가질 수 없다고 에드워드는 주장한다.
빛으로부터 발생한 열이 아니라면 그 열은 거짓이라는 것이 에드워드의 일관된 확신들 중 하나다. 그러므로 에드워드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내용", 즉 교훈, 가르침, 혹은 사실이 우선적이다. 본질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정서가 발생해도 그것이 성경적 진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헛것이다. 심지어 "성경 구절이 마음에 떠오른 결과로 생긴 감정이라 하더라도 그 구절의 의미를 바로 이해한 결과가 아니라 단지 그것이 마음에 떠오른 신기한 방법에 근거한 것이라면 그 정서는 거짓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에드워드 신학의 대 주제에 도달한다. 진정한 종교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신적인 것들에 대한 사랑"(love of divine things)이다. 참된 신앙의 기초는 신적인 것들의 사랑스러움에 대한 지식(knowledge of the loveliness of divine things), 혹은 이해이다. 이러한 지식으로부터 참된 종교적 정서가 우러나온다. 그러나 이 지식은 지적인 것이 아니라 체험적이고 영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에드워드에게 있어 인간의 구원과 성화 여부는 모두 이 영적 지식을 획득 혹은 체험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본다.
영적 이해 (spiritual understanding)
지금 우리는 에드워드의 신학 전체의 주제에 도달해 있다. 에드워드가 말하는 "영적 이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새로운 교리적 지식이나 전에 접하지 못했던 새로운 명제(proposition)를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설교자들이 흔히 말씀을 자의적으로 이해하고서는 그것이 영감 받은 해석이라고 주장하는 주관적 이해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에드워드에 의하면 그것은 영안이 열려 영적 실재를 보게 되는 것이다. 전에는 영안이 닫혀 보지 못하던 신령한 사실들을 이제 마음의 눈이 열려 보게 되는 것이다(시119:18). 그것은 "마음이 영적으로 조명을 받아 성경을 바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영적 이해는 영적 감각 혹은 미각(taste)에 의해 가능하다. 이러한 영적 감각은 성경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에드워드는 강조한다. 어떤 식으로? 부패한 욕망(appetite)의 편견들을 제거하여 생각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 하나님 말씀에 빛을 던져 그것의 진정한 의미가 아주 자연스럽게 머리에 떠오르게 해 줌으로서이다.
영적 감각이 없이는 성경을 제대로 이해 할 수 없다면 이 영적 지각력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수적인 것임에 분명하다.
마음의 감각 (a sense of the heart)
이러한 영적 이해력, 혹은 감각을 가지게 되는 것을 에드워드는 "마음의 감각"이 생긴 것이라 표현한다. 에드워드 신학에 있어 결정적 열쇠인 "영적 이해"는 "하나님의 일들의 거룩성, 혹은 도덕적 완전성의 지고한 아름다움과 달콤함에 대한 마음의 감각"이다. 그것은 "종교의 일들에 대한 저 모든 분별과 지식"을 동반하는데 그것은 "그러한 감각에서 흘러나오고 그것에 의존 한다" 이것은 에드워드 신학의 핵심에 관계된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밀하게 분석하고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영적 이해는 "마음의 감각"이다. 그것은 단지 지성적이거나 사변적인 이해가 아니다. "마음"은 우리의 중심, 그리고 전 인격을 대변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전인격적 이해이다. 단지 머리의 이해는 "마음의 감각"이 아니다. 영적 이해는 "일차적으로""신적 일들"의 "더덕적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 혹은 "미각"이다.
둘째, 그 이해의 대상은 "신적 일들"(divine things), 즉 하나님에 관한 일들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 그리스도, 복음, 구원, 십자가의도 등에 관한 것이다. 한마디로 성경적 계시에 관한 이해다.
셋째, "마음"이 그러한 대상들에서 느끼는 감정, 혹은 감각은 "아름다움"과 "달콤함"이다. 그것은 지적 이해가 아니라 감정적 미학적 이해다. 아니 정서적 감각적 향유다. 따라서 복음을 단지 머리로만 이해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정서가 그 의미를 이해하고 맛보고 누리는 것이다. 물론 그 감각은 육체의 감각기관을 통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마음" 혹은 영혼의 감각이다. 왜냐하면 그 감각의 대상도 물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여기서 에드워드는 [신적 초자연적 빛]에서처럼 두 종류의 지식을 구분한다. 하나는 사변적(speculative)이고 지적(intellestual)인 지식이며 다른 하나는 영적 지식, 즉 "마음의 감각"에 의한 지식이다. 전자가 관념적이라면 후자는 사변적일뿐 아니라 감식적(sensible)인 것도 포함하므로 그 지식의 획득에 있어서는 맛보고 느끼고 끌리는 기능이 사용된다. 전자는 삼각형이나 사각형이 무엇인가에 관한 지식이라면 후자는 사랑스러움과 혐오스러움, 달콤함과 구역질남과 같은 것에 대한 감식(sensible per- ception)이다. 후자의 주체는 단지 바라볼 뿐 아니라 그것에 끌리거나 그것을 기뻐하거나 싫어하는 "마음"혹은 영혼이다. 그런데 종교적 진리의 인식은, 에드워드에 의하면 전자보다 후자에 속한다.
넷째, 그 마음의 감각에 동반되는 것은 "종교의 일들"에 대한 "분별력과 지식"이다. 그것은 구체적 내용이 없이 단지 막연한 아름다움과 달콤함을 맛보고 누리는 것이 아니라 아주 분명한 교리적 실체에 대한 이해를 수반한다. 지식이나 식별력은 "영적 이해"의 "이차적"부분이다.
다섯째, 그 복음의 내용에 대한 지식은 "마음의 감각"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지성적 이해에서 감성적 이해로 가는 것이 아니라 감성적 이해로부터 지성적 이해로 가는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마음의 감각"을 에드워드는 "영적 이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마음의 감각"도 일종의 "이해"이다. 단 그것은 "사변적"이해만은 아니다.
<영적지식(spiritual knowledge)>
영적 이해, 혹은 마음의 감각에 의해 우리는 영적 지식을 얻게 된다. 영적 지식이란 참으로 선하고 거룩한 것의 "사랑스러움과 아름다움에 대한 미각"이다. 여기서도 에드워드는 지식을 미각이라는 감각과 연결시킨다. 감각되지 않는 지식은 참된 지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이 이러한 "영적 이해력"을 가지게 되면 엄청난 일이 일어난다. "마음의 감각"을 가진 사람에게는 신천지가 열린다. 영혼이 "신적 일들 속에 있는 거룩함, 혹은 도덕적 선의 참된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을 발견하게 되면 새 세계가 눈에 들어온다. 에드워드에 의하면 이처럼 영안이 열려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마음의 감각"을 가지게 되는 것은 인간에게 지고한 중요성을 지닌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도덕적 완전에 영광을 돌리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손으로 지음 받은 만물의 특별한 목적"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도덕적 완전, 혹은 거룩함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인간을 포함한 피조물들의 존재 목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영광을 볼 수 있는 "마음의 감각"을 갖지 않은 존재들은 자기 존재의 목적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지 않고 있는 인간들은 존재할 가치가 없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덕적 완전성의 아름다움을 감지할 그 "마음의 감각"을 갖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을 찬양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영적 이해력"혹은 "마음의 감각"을 소유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가?
위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에드워드의 글들에 가장 자주 나타나는 어구들 중 두 가지는 "그리스도의 탁월성" 혹은 "도덕적 아름다움"이란 말들이다. 에드워드에게 있어 그리스도의 인격의 "탁월성"은 그의 "도덕적 완전성"과 동의어이다. "그리스도의 도덕적 완전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때 비로소 신자가 그의 인격의 탁월성에 대한 지식을 가지게 된다"고 그는 주장한다. 에드워드에 있어 하나님의 일들의 "도덕적 아름다움"이란 "중보자로서 그리스도의 충족성"과 직결되는 개념이다.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보혈의 귀중한"과 속죄를 위한 그것의 충족성을 실감하는 것은 그의 "인격의 탁월성"을 볼 때라고 그는 주장한다. 그것이 "그처럼 탁월하고 사랑스러운 인격적 존재의 피"이기때문에 그것이 그처럼 소중하다는 것이다.
영적 아름다움(spiritual beauty)에 대한 감각
에드워드는 "거룩의 아름다움"을 보는 자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위대한 것"을 본다고 주장한다. "성결의 미"야말로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없으면
온 세상은 텅 빈 것이 되고 만다. 그것이 없으면 세상은 무보다 나은 것이 없으며 오히려 그보다 더 약하다. 그것을 보지 못하면 볼 가치가 있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셈이다. 왜냐하면 그 외에 어떤 참된 탁월함이나 아름다움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해력이라는 고상한 기능을 발휘할 가치가 있는 어떤 대상도 없다.
"거룩의 아름다움"은 에드워드 사상의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그가 다음과 같이 강한 수사를 사용하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다.
이것[거룩의 아름다움]은 신격(Godhead)의 아름다움이요 신성중의 신성이며...선의 무한한 원천의 선(the good of the infinite Fountain of Good)이다. 이것이 없다면 하나님 자신도 ...무한한 악일 것이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 자신도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이것이 없다면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에드워드에 의하면, 영적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이 없는 자는 "영적 세계에 대해서는 전혀 캄캄하다." 거룩의 아름다움을 못 보는 자는 성령의 은혜들 중 하나를 알지 못하는 자다. 그는 영혼의 은혜스러운 모든 움직임들, 모든 거룩한 위로와 기쁨, 인간의 마음에 대한 성령의 구원하는 영향력의 결과들에 대한 아무 개념이 없는 자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사역들에 대해서 무지한 자다. 피조물에 대한 감각으로부터 기독교에 대한 모든 참된 체험적 지식이 비롯된다. 그것은 새로운 지식의 세계다.
그리하여 에드워드는 여기서 그러한 오해를 시정하면서 회심론의 핵심들 중 하나를 지적한다. 즉 비록 "양심이 죄를 깨닫는"단계가 회심의 전 경험으로 필요하며, 그러한 죄에 대한 양심적 확신이 종종 공포를 야기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공포가 죄에 대한 깨달음의 본질은 아니다. 공포는 종종 다른 요인들에 기인할 수 있다. 성령의 영향에 의한 죄의 확신의 본질은 다음 몇 가지에 대한 확신이다. 즉 "마음과 삶의 죄악 됨." "가공할 엄위와 무한한 거룩의 하나님을 대항해 지은 죄의 무서움", "죄에 대한 증오" 그리고 "하나님이 그것을 벌하시는 것은 아주 정의롭다"는 확신이 그것들이다.
에드워드가 볼 때는 죄에 대한 참된 깨달음이 없이도 그것이 있을 때 흔히 수반되는 감정들과 유사한 체험을 가지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자기들을 삼키려고 입을 벌리고 있는 무시무시한 구덩이 지옥" "그들을 태우려고 기다리고 있는 불길들" "그들을 붙들 준비가 되어 있는 악마들"에 대한 몸서리 쳐지는 우려들을 가진 어떤 사람들이 자신들의 마음과 삶의 죄악 됨을 참으로 확신시켜주는 밝은 양심은 거의 가지지 못하고 있는 경우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마귀도 사람을 공포에 빠뜨릴 수는 있으므로 공포 후에 어떤 긍정적인 감정이 온다고 해서 그것이 다 참된 은혜는 아니라는 말이었다. 에드워드는 은혜의 모조품이 얼마나 정교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열거한다. 예를 들면 마귀는 은혜의 준비 단계마저도 모조할 수 있다고 그는 보았다. 심지어 죄에 대한 커다란 확신과 그로 인해 겸비해진 마음도 모양만 모방할 수 있다.
또 마귀는 죄에 대한 깨달음 뒤에 위로가 따르는 그 순서도 흉내 낼 수 있다. 그러나 참 회심자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그러한 순서와 방법을 따라 누군가가 죄에 대한 깨달음 뒤에 위로를 체험하는 순서를 밟았다고 해서 그것이 참 회심의 은혜를 받은 것이라는 증거는 전혀 아니라고 에드워드는 주장한다. "회심에 있어 성령의 역사의 순서라고 일반적으로 주장되는 그러한 순서와 방법을 정확하고 분명히 밟은" 자들, 즉 "죄에 대한 깨달음 후 감정을 체험하는 식의 규칙대로 회심한 것처럼 보이고 자신들의 그러한 체험을 멋있게 진술한 자들이 결국은 참 회심자가 아닌 것으로 드러나는 일들이 종종 있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에드워드는 인간은 회심하기 전에 자신의 죄와 비참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정말 회심하기 원한다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비참과 무가치함을 깨닫기 위해 애쓰는 일이었다. 그는 서둘러 그리고 신속히 이 일에 착수해야 한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성경적 근거로 에드워드가 제시한 구절은 레위기 26:40 -45 이었다. 이 본문에 의지해서 그는, 하나님은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굉장한 은혜를 주시기 전에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와 비참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그것을 달라고 기도하는 방식을 쓰신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에 대한 또 다른 성경적 근거로 에드워드는 그리스도의 초청이 "수고하고 짐진자들"에게 특별히 제공된다는 본문을 지적한다. 그 말씀은 최소한 부분적으로 죄책과 위험에 대한 인식으로 인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에 대한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러면 어느 정도로 죄를 깨달아야 회심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단계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그러한 질문에 대해 에드워드는 자기가 지옥에 가야 마땅한 존재라고 생각할 정도로 죄를 철저히 깨달아야 한다고 대답했다. "인간은 자기가 지옥에 합당한 존재임을 깨닫기 전에는 자신의 죄책을 철저히 인식했다고 말할 수 없다. "...또한 자기가 속수무책임을 깨닫기까지는 자신의 비참을 철저히 깨달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좀 더 리얼하게, 지옥의 문턱에서 벌벌 떨면서 절망하고 있을 때 사람은 은혜를 받은 준비가 된다고 에드워드는 확신한다. "영혼이 지옥 구덩이의 가장자리를 떨며 서 있을 때,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움에 대해 완전히 절망했을때 비로소 구원의 소식을 기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럴때 복음은 그에게 참으로 기쁜 소식이 되고 그리스도는 아주 귀하게 여겨진다.
에드워드는 예상되는 혹은 실제로 제기될 수 있는 반론들에 대한 답변을 제시한다. 첫째 반론은 "구도론은 공덕 사상, 또는 행위 구원 사상의 발로 아닌가?"하는 것이었다. 모든 종교적 도덕적 의무를 다 이행하면서 회심의 은혜를 기다리라는 에드워드의 주장은 인간의 노력이나 행위가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행위 구원 사상이 아닌가 라는 의문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은혜의 수단은 사용하는 노력이 구원을 위한 공적이나 공로나 공적을 쌓는것은 아님을 분명히 했다. 사람들이 자신의 구원을 위해 최선을 다해 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구원 얻을 만한 공을 쌓기 위해서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구원의 자비에 자신들을 추천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사람은 자기가 행한 어떤 일 때문에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충분한 공을 이루셨습니다.
사실상 에드워드는 자신의 많은 저작들에서 알미니안주의적 교리를 누구보다도 열렬히 비판하고 비난하고 있었다. 그는 은혜의 수단들을 사용하는 행위 자체에 어떤 능력이나 덕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구원은 수단을 사용하는 노력에 대한 보상이나 대가가 아니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성례에 참석하는 것이 회심의 수단이 되는 것은 그 의무들 속에 무슨 미덕이나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찾고 기다리도록 하나님이 정하신 방식이 그것들이요 하나님은 그것들 안에서 은혜와 축복을 베푸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도덕적 의무들도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사람들이 은혜를 찾도록 정하셨다"고 그는 주장했다.
둘째, 반론은 "구도론이 구도자들로 하여금 자기 의를 의지하게 할 위험성이 없는가?"는 것이었다. 그에 대해 에드워드는 실상은 오히려 그 반대라고 답변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일반적으로 열심 있는 구도자들보다는 느슨하고 나태한 구도자들이 자기 행위를 의지한다고 에드워드는 지적했다. "덜 각성된 양심의 소유자들이 보다 더 각성된 양심의 소유자들보다 자기가 행하는 도덕적 의무들 속에 더 많이 안주 한다"는 것이었다. "보통 안일한 태도로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는 자들이 천국으로 침노하는 자들보다 자기들의 행위를 훨씬 더 의지합니다. 그들의 태만이 그들을 마비시키고 그들 자신에 대한 무지로 인도하기 때문에 그들은 가장 형편없는 피난처조차도 충분한 것처럼 의지하는 것입니다"고 에드워드는 역설했다. 에드워드에 의하면, 참으로 철저하고 진지하게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더 빨리 자기 자신을 알게 되고 그리하여 자신에게 절망하게 되므로 자기 능력이나 의에 대해 신뢰를 포기했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가장 빨리 알게 되는 것은 가장 열심히 구도할 때입니다. 이런 식으로 [구도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를 보다 더 많이 생각하게 되고 자기 자신들을 더 엄격히 관찰하게 되며 다른 사람들보다 자기 자신의 마음을 더 많이 살피게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 자신의 약점을 더 많이 경험하게 되어 조만간에 자기가 죄 중에 죽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에드워드는 진지하고 열심 있는 구도자는 결국 도망할 곳이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비록 그가 계속 자기 자신의 의로 달아나고자 하는 성향이 있을지라도 그는 아무 곳에서도 안식을 누리지 못합니다. 한 도피처에서 다른 도피처로 쫓겨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수록 그는 피조물 속에서 어디서도 안식을 얻거나 의지할 곳이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따라서 "더 많은 추구를 하면 할수록 혹은 더 철저한 구도자일수록 자기 행위 속에 안주할 가능성이 더 적어지며 자기가 하는 모든 일이 허사임을 더 빨리 보게 됩니다."고 에드워드는 단언했다. 그러므로 "열심 으로 수단을 사용할수록 그만큼 더 그 일에 의지한다."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라고 에드워드는 결론지었다.
셋째 반론은, "회심의 은혜를 얻기 위해 꼭 그처럼 힘든 구도의 수고를 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회심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라면 구도적 노력 없이 그냥 받을 수는 없는가? 하나님은 왜 꼭 인간으로 구원을 향한 수고를 하게 하시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에드워드는 하나님께서 구원의 전제조건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그러한 일을 하게 하시는 데는 여러 가지 목적이 있다고 대답한다. 첫째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것을 요구했다. "나태함과 사악함"을 권장하는 인상을 주는 방식으로 인간에게 구원을 허락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불리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므로 "근면과 거룩함"을 권장하는 식으로 구원이 제공되어야 했다. 둘째, 위대한 가치와 커다란 중요성을 가진 일은 거기에 상응하는 많은 노력과 근면에 의해 획득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에 부합된다는 것이 에드워드의 생각이었다. 이를테면 높은 학문이나 고매한 인격을 얻기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이 요청된다. 그렇다면 구원이라는 엄청나게 위대한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얼마나 더한 노력이 필요하겠는가 하는 것이다.
결국 에드워드의 이론에 따르면 구원이 구도적인 노력에 전적으로 좌우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 없이는 아무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렇게 되면 첫째, 구원을 얻는 것이 현대인들이 막연히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 아니가 하는 의문이 떠오를 수 있다. 여기에 대해 에드워드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믿기만 하면 되므로 구원 얻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라고 말하는 현대의 전도자들과는 달리 에드워드는 그것이 아주 어렵다고 말한다. "오랜 세월동안 최고의 진지함과 수고를 기울이면서 구원을 얻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 얼마나 지루한 것인지 미리 각오하십시오!" 구원 얻는 것은 "아주 많은 어려움이 수반되는 일입니다..." "천국을 얻고자 하는 이들에게 요구되는 모든 의무들을 수행하는 것은 참으로 심히 어려운 일입니다"
이 글에서 우리는 에드워드의 구원론을 분석하면서 청교도 전도 방식을 고찰해 보았다. 그 결과 현대의 전도가 청교도식 전도와 다른 점이 두 가지 발견되었다. 그것은 첫째, 전자가 그 과정에 죄에 대한 깊은 깨달음의 단계를 결하고 있다는 점이요, 둘째, 전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로 하는 개인의 결단을 "구원 얻는 믿음"으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즉 패커가 현대전도 방식에 대해 제기하는 도전은 죄에 대한 깊은 통회의 과정 없이 어떻게 인간이 구주의 필요성을 깨닫고 그를 믿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그 하나요 다른 하나는 인간이 스스로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단하는 것이 참된 믿음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청교도들이 볼 때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는 구도자들에게 줄 수 있는 최악의 충고는 "그 사람이 아직 자기의 특별한 죄악들의 죄성을 직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죄악 된 행위들을 버리고 거룩하게 되기를 참으로 바라는 지점에 도달하지도 않았는데 그에게 죄에 대해 근심하기를 중지하고 당장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라고 말해주는 것"이었다고 패커는 지적한다. 이 말은 현대 한국 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아주 커 보인다. 80년대 이후 한국 교인들이 사회의 대형 비리 한 복판에 연루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 이유가 바로 이런데 있지 않을까? 죄악에 대한 미련을 끊기도 전에 예수를 신뢰하라는 충고를 주는 것은 죄인들을 거짓평안과 거짓소망으로 인도함으로써 위선자들을 낳는 길이라는 생각인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현대식 전도, 혹은 전도 집회에서 일어나는 "회심"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그것을 참된 구원의 역사로 볼 것인가? 아니면 부분적으로만 참 회심인가? 아니면 그것은 완전히 거짓이거나 착각인가? 현대식 혹은 피니식 전도에서는 죄인이 자기 죄를 깊이 깨닫는 역사가 일어날 수 없는가? 그것은 꼭 많은 세월을 요하는 일인가? 에드워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 컨빅션의 수준, 즉 지옥의 언저리에서 벌벌 떨며 서 있는 체험에서는 못 미친다 하더라도 그냥 자신이 죄인이라는 깨달음만 가지고는 회심에 이를 수 없는가? 회심을 위해서는 죄에 대한 어느 정도의 깨달음이 필요한가? 현대의 전도가 구원을 너무 쉬운 것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사영리 한번 듣고 예수를 영접하겠다고 말하면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선언하는 식의 전도는 너무 피상적이고 안일한 인상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에드워드를 비롯한 청교도들이 회심의 필수적 과정으로 죄에 대한 깊은 깨달음의 과정을 강조한 것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현대의 회심에서 그것이 생략되었거나 너무 약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피상적 회심의 결과가 한국 교회의 변화 되지 않은, 혹 회개하지 않은 신자들의 범람일 것이다.
그러나 한편 사영리 한번 듣고 예수를 영접하거나 전도 집회에서 그렇게 함으로써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의 결단을 너무 과소평가 하는 것도 잘못일지도 모른다. 청교도 시대와 달리 종교에 대해 전적으로 무관심한 세속화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겠다는 한 사람의 결심이 비록 즉석에서 이루어진 결단이라 하더라도 어쩌면 그것은 사소한 것이 아닐 수 있다.
왜냐하면 영접의 행위를 한 이상 적어도 그는 교회에 출석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시작할 것이며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한 변화를 무시한 것인가? 실제로 사영리식 전도나 전도 집회를 통해 예수를 알게 된후 신실한 제자의 길을 걷게 된 그리스도인들도 많이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러한 전도 방법을 완전히 무시할 것인가? 실제 패커도 결국은 피니식 전도 방법을 전면 부정하지 않는다. 사실 논문의 중반 이후에서 그는 전반부에서의 자신이 강경하고 극단적인 입장을 상당 부분 철회하는 변화를 보인다. 그 방향전환이 너무 급격해서 좀 실없는 사람으로 느껴질 정도이다. 그는 피니식 방식이 온전히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만은 아니며 "비록 오류가 조금 있는 진리라 하더라도 그것마저 자비롭게 축복하시는 하나님께서 피니의 방식을 계속 사용하셔서"이전에 교회에 다닌 적이 있거나 친구들의 전도를 받은 적이 있는 사람들을 "결정적이고 지속적인 헌신으로 인도하셨다"고 인정한다.
일급의 신학자에게는 같은 글속에서 자신의 판단을 거의 뒤집다시피 하는 것이 이례적이며 불명예스러운 일임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 패커는 완전히 발을 뺀다. 비록 피니의 집회에서 거짓 회심한 많은 자들이 나중에 신앙에서 탈락했지만 피니의 '연장 집회'는 "전 세계에 걸쳐 충분한 영적 열매를 거두었"으며 "피니 방식의 수정판을 사용하는 빌리 그래함은 근년에 세계 기독교 무대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인물들 가운데 하나"라고 추켜세우는 것이다.
패커의 결론은 타협적이다. 그는 청교도식 전도와 피니식 전도가 상호보완적이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현대의 전도가 열매를 맺으려면 "항상' 청중들이 청교도식 전도에 노출된 경험이 필요하다고 그는 말한다. 청교도식 전도란 그에 의하면 "오랜 시간을 두고 깊이 있게 파고 들어 가는 전도, 교회-공동체-친구 중심적이며, 여흥지향적 이라기보다는 예배 지향적"전도이다. 즉 "청교도 전도가 먼저 씨를 뿌리면 현대 전도가 수확을 거둔다."는 것이 패커의 견해이다. 패커는 구도자들을 교리문답 교육반, 양육반, 교회 예배 등의 "통회와 헌신의 신실함을 표현하는 적당한 방법"으로 인도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권장한다.
어쨌든 그는 청교도식 전도가 항상 필요불가결하다고 주장한다. "오랜 시간을 두고 복음을 충실히 설교하고 가르치는"청교도식 전도는 "언제 어디서나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요컨데 평생 아무런 종교적 관심이 없던 사람이 어느 날 집회에서나 개인 전도를 받고 갑자기 믿기로 결단하는 것보다는 기독교 메시지를 오래 동안 들으면서 구도자로서의 일정한 세월을 거친 후 예수를 믿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청교도식 전도 방식이 오늘날의 보통 교회들에서 행해지는 설교 내용의 일부와 동일시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현대의 일반 교회들의 예배에서 전해지는 설교들이 구원과 관련해서 청중들의 마음을 어느 정도 "깊이 파고 들어가고" 있는가? 현대 한국 교인들이 목사들의 일반 설교를 들으면 들을수록 각성과 죄의식이 더 깊어지고 자기 영혼의 구원에 대한 문제의식이 심화되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오랜 세월 설교를 듣고 있는 한국 청중들 가운데 죄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거쳐 회심에 이르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이제까지의 글은 한국 개혁주의 설교 연구원 18기 정기 세미나에 발표된 양낙홍님(고신대 신대원)의 글이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의 설교관(백금산 목사님)
서론.
에드워드는 16세에 처음 설교 하여 37년동안에 설교했다. 현재 그의 설교 전문은 약1200 여편 남아있다. 그의 설교처기에는 풀전문으로 작성하다 어느때부터 요약본으로 설교문을 작성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부흥의 시기 때 바빴던 거의 사역과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익숙해진 설교술로 인함이었다.
본론. 에드워드 그의 설교의 특징..
1. 내용의 충실한 그의 설교..
좋은 설교는 좋은 내용과 좋은 전달 이두가지가 함께 가는 것이다. 당시 휫필드의 경우는 전달의 측면에서 최고의 탁월자였다. 그러나 에드워드의 경우는 비록 전달의 측면에서는 그를 따라가지는 못했으나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최고의 탁월자였다.
휫필드는 초기때 성경을 연구한 경우를 빼고는 거의 성경을 연구할 시기가 없었다. 그러나 에드워드의 경우는 하루 13-4시간을 연구했던 성경연구자였다. 그러하기에 그의 설교는 누구도 따라갈수 없는 넓고 심오한 깊이가 있었다. 그러한 그의 설교는 단 한편이라도 소책자로 묶어내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는 소중한 설교들이었다.
* 감수성인 측면에서는 스펄젼의 설교가 탁월!
2. 형식의 있어서의 에드워드의 설교.
그의 설교는 본문, 교리, 적용 3가지의 형식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는 17세기에 청교도들이 실제 설교에 적용했던 방식이었다.
1) 본문해석
본문을 살펴볼때 본문의 핵심주제를 뽑아내서 명제로 제시한다.
2) 교리주장
제시된 명제를 방대한 방식으로 증명해내간다. 두가지 방식으로 증명해 나가는데 한가지는 다른 성경의 주장을 언급함이고 다른 하나는 이성으로 할수있는 최대한으로 주장을 증거해 나가는 것이다.
3) 생활에 적용.
철저한 현실로서의 적용과 실제적으로 실행하기 위한 실제적 지침서..
* 그의 설교의 양을 미루어 볼 때 설교시간이 약 2시간 정도였을것이라 추측된다. 현대 설교와 당시의 설교를 비교해볼때 현대에 들려지고 있는 설교는 본문과 교리의 두 측면이 강조되지 않고 단지 적용측면만이 강조되고 있다. 설교가 본문이 말하는 핵심주제와 그의 분명한 교리위에 기초되지 않을때 적용부분에서 단순 윤리적인 설교로 전락될수 있음을 유의하자!
3. 에드워드의 평생 관심사..
1) 신앙 묵상 일기집.
그는 평생 묵상집을 작성한 묵상가였다. 그는 자신이 생각난 것은 거의 대부분을 필기하였다. 그의 설교 대부분은 그의 묵상일기에서 기초한 것이었다.
2) 성경 주해 작업.
체계적인 작업은 아니었지만 평생
3) 여백 성경..
여백성경에서 자신이 깨달은 것과 자신의 묵상집과 연구집의 내용을 이 성경에 필기해놓았다.
4. 그의 설교에 영향을 준 요인들..
1) 뜨거운 전도설교자였던 그의 할아버지의 설교의 영향..
에드워드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모두 청교도의 영향을 받은 설교자들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깊은 말씀을 증거하는 자였고 그의 할아버지는 깊은 말씀과 더불어 뜨거운 구령의 열정을 지닌 설교자였는데 에드워드는 이 두분의 믿음의 선조를 통해 일찍이 설교자로써 준비되고 있었다.
2) 독특한 그의 사고 체계..
그는 언제나 깊은 사고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그가 독서나 관찰을 통해 사고한 것들은 언제나 그의 내면에서 정화되어서 더욱 심오한 것으로 숙성되어 그의 언어로 재탄생되었다. 이러한 그의 사고체계는 더욱 깊은 성경본문을 우리에게 선보이는 훌륭한 도구가 되었다.
3) 탁월한 그의 그림언어..
그는 성경의 진리를 가슴에 각인시켜주는 최대의 묘사를 잘 사용하였다. 혹자는 그의 비유가 정도가 넘는 것이라 생각하였으나 그는 죄인을 경고하기에는 이러한 비유가 전혀 지나침이 없는 것이라 말했다.
5. 존 파이퍼의 에드워드의 설교의 분석..
현재 미국에서 에드워드를 연구하며 귀한 목회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존 파이퍼는 다음과 같이 에드워드의 설교의 특징을 제시해준다.
1) 거룩한 감정을 최대한 불러 일으키는 설교..
설교의 긍극적인 목적은 행동케 하는 것이다. 그러나 행동을 유발하게 하기 위해서는 감정적인 요동이 있어야 한다. 그러하기에 거룩한 감정을 일으켜야 한다.
이러한 방변에 특별한 대가는 스펄젼이었다. 총제적인 감각을 사용하여 가슴을 뜨겁게 불태웠다.
2) 감정을 일깨우되 단순 자극이 아닌 지성으로 청중을 일깨운 설교..
그는 감정을 뜨겁게하는 것을 중시여겼다. 그러나 단지 자극적인 언어로 감정을 흥분시킨 것이 아니라 언제나 지성을 일깨움으로 청중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데 노력했다.
3) 성경으로 설교를 충실히 채운 그의 설교..
그의 설교는 단순히 그의 논리로 청중을 깨운 것이 아니라 청중을 성경속으로 이끈 설교자였다. 그의 설교의 모든 부분은 성경의 이야기로 가득채워져 있다.
4) 비유와 그림언어의 탁월한 그의 설교..
그는 진리의 내용들을 청중들이 더욱 잘 이해할수 있도록 비유와 그림언어를 사용하여 설교하였다.
*이 방면에 특별히 탁월했던 자는 스펄젼임을 기억하자..
5) 위협과 경고를 사용한 그의 설교..
회심치 않을때에 다가올 진노에 대해서 그는 과감한 예화를 사용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설교스타일에 혹자들이 비방하기도 하였으나 그는 그 비방보다 죄인의 회심이 더욱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다.
6) 반응을 촉구..
그는 설교의 적용부분에서 회중들의 실질적인 삶의 변화를 촉구하였다. 설교는 단지 회중의 마음을 흐뭇하게 하기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하고 그의 삶이 하나님앞에 다가서도록 변화시키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7) 심리적인 상태를 잘 분석한 그의 설교..
에드워드는 어릴적부터 체험적인 요소와 관찰력이 뛰어났다. 그리고 이를 자신의 내면에 깊히 이해했다. 이러한 그의 삶의 방식들이 사람들의 심리에 대한 뛰어난 이해가 있었다.
8) 기도로 성령님께 요청하라..
9) 설교자 자신이 상하고 애통하는 심령이 되라...
지성과 감성을 최대한 반영한 그의 설교가 그의 설교의 특징이었다. 최대한 이성을 사용하여서 청중의 지성을 일깨웠고 수많은 비유와 그림언어로 청중의 감성을 깨워서 하나님앞에 세우길 힘썼다. 그리고 이러한 에드워드의 설교의 영향을 받은 자가 바로 로이드 존스였다.
6. 빛과 열의 조화 불붙는 논리를 증거하기 위해서...
1) 성경연구...
평생동안 깊은 성경연구..
2) 깊은 기도생활..
하나님과 깊은 교제속에서의 기도생활..
* 백금산 목사님의 견해..
1. 실질적으로 이둘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 너무도 어렵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빛고 없고 열도 없다. 당신의 설교는 어떠한가? 당신의 준비됨은 어떠한가?
2. 에드워드의 설교.. 청교도 설교의 절정을 이룬 설교였다. 그의 설교와 우리의 설교를 비교해볼때 우리의 설교가 너무도 미비함을 느낄수 있다.
결론
설교자는 다음의 네 종류의 부류로 나누어진다.
1)빛과 열을 모두 지닌 사람.
2) 빛은 있으되 열은 없는 사람.
3) 빛은 없고 열만 있는 사람.
4) 빛도 열도 없는 사람..
당신의 설교는 어떤 설교인가? 빛과 열로 가득찬 불붙는 논리를 증거하는 자가 되길 원한다면 에드워드의 본을 명심하라..
깊은 연구와 깊은 기도... 불붙는 논리는 그 속에서 태어나는 걸작품이다.
경건의 그림자인 그의 일기
어떤 사람의 사후 백 년이 지나 누군가가 그 사람에 대한 연구를 하는 이가 지상에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남다른 위대한 삶을 산 사람일 것이다. 내가 쓴 책을 백 년이 지난 후에 단 한 권이라도 누군가가 읽고 글을 쓰는 이가 있다면 나는 꽤 성공한 인생을 산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 사후 무려 250년이 지났다. 놀랍게도 그에 대한 관심과 연구의 열기는 갈수록 더해지는 것 같다. 단지 여기저기의 개인적 관심을 가진 이들에 의해서만 아니라 예일 대학을 비롯한 세계적 대학들과 연구 기관들, 그리고 일급의 학자들이 그의 책을 출판하고 연구 논문을 쓰고 그에 대한 연구 학회를 조직하고 있다. 해마다 신학은 물론이요 철학, 심리학, 교육학, 역사학, 미국학, 문학 등의 분야에서 그에 대한 박사 학위 논문이 무수히 쏟아지고 있다.
우리와 똑같이 그리스도인으로, 그리고 한 사람의 지역 교회 목사로 생을 살아갔는데 무엇이 그를 그처럼 비범하게 만들었을까? 무엇이 그에게 남다른 위대성을 부여했는가? 에드워즈의 생애에 그처럼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고 그로 하여금 교회 역사에 그리고 심지어 세속사에 그처럼 깊은 영향을 미치게 한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거룩에 대한 갈망
에드워즈는 이미 20세 전후에 모든 면에서 ꡒ완전한 그리스도인ꡓ이 되고 그리스도의 복된 이미지를 닮으며 모든 일에 복음의 순수하고 달콤하며 축복된 규율들에 따라 살고자 하는 불타는 욕망을 느꼈다. 이러한 영적 갈망을 실현하기 위해 그는 강도높은 경건의 훈련을 쌓았다. 어떻게 하면 더 거룩해져서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제자로 더 합당한 모습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당시 그의 ꡒ밤낮 끊임없는 질문이요 투쟁ꡓ이었다. ꡒ나는 끊임없이 나 자신을 검토하면서 거룩한 삶의 방법을 연구하고 고민했다. 전에는 어떤 일에 대해서도 그만큼 부지런하고 엄격했던 적이 없었다.ꡓ
이러한 체험을 통해 그는 자신의 ꡒ연약과 무력ꡓ 그리고 자기 마음 속에 있는 ꡒ은밀한 부패와 허위의 무한하고 끝없는 깊이ꡓ를 절감했다. 약관 20세의 나이에 거룩한 삶에 대해 이처럼 강한 열망을 가지고 그것을 추구한 사람이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 역사의 하나의 경이로 보인다. 그러한 청년기를 보낸 이가 위대한 성도가 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사라진 강조점들 중 하나는 거룩의 중요성에 대한 것이다. 현대 교회들 중 교인들에게 성결한 삶에 대한 열렬한 추구를 권고하는 데가 얼마나 되는가? 아니 ꡒ거룩ꡓ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이 마치 시대착오적 행위인양 멸시당하는 경향은 없는가?
영성과 능력의 원천으로서의 경건의 훈련
에드워즈는 젊은 시절 건강을 해치지 않을 정도로 경건을 훈련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그는 아마 자주 금식 기도를 했던 것 같다. 때로는 그것을 건강을 해칠 정도로 한 것이 아닐까 스스로 염려할 정도였다. ꡒ육신을 죽이는 일을 너무 계속하고 경건의 훈련을 너무 강도높게 하면 건강을 해치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분명히 그것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을 때까지는 중단하지 않겠다. 건강이 상하지만 않는다면 내가 얼마나 지치고 피곤한가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ꡓ(1723년 1. 12 일기). 30대의 나이에 들어선 1734년에도 에드워즈는 식사를 꼬박꼬박 챙기는 것보다는 신령한 일 추구하는 것을 더 중시했다. ꡒ내가 신령한 명상에 적합한 마음 상태에 있거나 아니면 성경 읽기나 신학적 주제의 연구에 몰두해 있을 때, 나는 저녁 식사하러 가느라고 그 일을 중단하느니 차라리 식사를 거르는 것이 낫다고 생각된다ꡓ(1월 22일).
1735년의 일기에 이러한 종교적 결심이 나타난다. ꡒ특별한 주제들을 두고 명상하는 날들을 따로 떼어 두기로 하다. 때로는 하루를 떼어서 내 죄들의 크기를 생각하고, 또 하루는 불경건한 자들이 미래에 당할 비참의 확실성과 무서움을 생각하고, 또 하루는 기독교의 진리와 확실성을 생각하고, 그런 식으로 성경에 약속되고 위협된 미래의 큰 일들에 대해 생각하는 날을 가지는 식으로 말이다ꡓ(6월 11일).
젊은 에드워즈의 일기와 결심문에는 기도 생활에 대한 결의도 두드러진다. 기도의 필요성과 중요성은 누구나 인정하지만 대단한 결의와 각오로 노력하지 않으면 그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알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 평생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하고 자기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아뢰는 삶을 살기로 작정했다. ꡒ내 평생 이 점에서 대단한 노력을 경주하기로 결심하다. 즉 내게 가능한 최대의 개방성으로 내 모든 길들을 하나님께 아뢰고 내 영혼을 그에게 여는 것이다. 내 모든 죄악들, 유혹들, 어려움들, 슬픔들, 두려움들, 소망들, 바램들, 그리고 모든 것, 모든 상황을 말이다....ꡓ(65번째 결심문).
남달리 높은 표준의 헌신을 결심함
에드워즈는 자신이 지구상에 살았던 사람들 중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타협적인 삶을 살아 가더라도 자기는 하나님에 대한 지조와 신실함을 지키겠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ꡒ지구상에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기독교가 그 진정한 광채를 발하게 한 사람, 즉 어느 모로 보든 탁월하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식, 말하자면 모든 면에서 완전했던 그리스도인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면 내가 바로 내 시대에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전력을 다하기로 결심했다ꡓ(63번째 결심).
이와 거의 꼭 같은 결의가 1723년 1월 14일과 7월13일자 일기장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참으로 영웅적인 결심이었다. 에드워즈가 성인이 되어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신학자요 미국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친 인물들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외적인 존재가 되기를 두려워한다. 모든 면에서 그저 남들만큼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특히 예수 믿는 것도 너무 ꡒ별나게ꡓ 믿는 것을 꺼린다. 그러나 청년의 정욕에 이끌리기 쉬운 이십 세 청년의 나이에 하나님께 이처럼 철저히 자기 삶을 헌신하기를 기뻐한 사람은 인류 역사상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처럼 비범하게 헌신한 사람이었기에 에드워즈는 영적 거인이 될 수 있었고 하나님께 유별나게 크게 쓰임을 받을 수 있었다.
1723년 1월 12일자 일기에도 에드워즈의 헌신의 결의가 나타난다. ꡒ나는 하나님께 기도한다....이제 나를 온전히 그 분의 것으로 받아주시고 모든 면에서 나를 그렇게 취급해 주시기를.... 그가 나를 괴롭게 하시든 아니면 잘되게 해 주시든, 나를 향해 그가 기뻐하시는 바를 무엇이든 이루어 주시도록. 그러므로 이제 나는 어떤 식으로도 나 자신의 것인양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내가 나의 능력의 어떤 부분이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지 않거나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을 나의 일의 전부로 삼지 않는다면, 만일 내가 고난에 대해 조금이라도 불평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잘 되는 것을 보고 내가 슬퍼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내가 사랑없이 행한다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해를 당했다고 해서 내가 화를 낸다면, 만일 내가 복수한다면, 어떤 것이라도 순수히 내 자신을 즐겁게하기 위해 한다면, 내 자신의 안일을 위해 어떤 것을 회피한다면, 어떤 것이 커다란 자기 부인을 요하는 일이라는 이유로 생략한다면, 만일 내가 자신을 신뢰한다면, 내가 행한, 혹은 하나님이 나를 통해 행하신 선행의 어떤 부분에 대해서라도 내가 영광을 받는다면, 어떤 식으로든 내가 교만해진다면 그것은 내가 내 자신의 것인양 행동하는 것이다.ꡓ 스무 살에 이런 결의를 하는 사람이 위인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자기 성찰의 생활
에드워즈는 20세가 되기 직전 자신의 평생의 지침으로 70 가지를 결심하고 기록해 두었다. 그것이 에드워즈의 저 유명한 「결심문들」(resolutions)이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 기록해 둔 그 결의들을 잊지 않고 ꡒ매주 한번씩 읽기ꡓ로 다짐했다. 그 중에 자기 성찰에 대한 다음과 같은 항목이 있다. ꡒ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 내가 어떤 점에서 게을렀는지, 어떤 죄를 범했는지, 어느 부분에서 내가 자신을 부인했는지 자문하기로 결심한다. 마찬가지로 매주, 매월, 그리고 매년 말에도 그렇게 하기로 한다.ꡓ(37번째 결심문).
일기를 쓰는 것은 청교도들의 전형적 작업이었다. 에드워즈가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1722년부터였는데 그것은 1725년까지 계속되었다. 일기장은 그들에게 마치 ꡒ영혼의 엑스 레이ꡓ 같은 것이었다. 1723년 5월 19일에 에드워즈는 철저한 자기 성찰을 결심하면서 이렇게 적고 있다. ꡒ하루를 시작할 때는 내가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루를 마칠 때, 그들의 유익을 위해 나는 무엇을 했는가를 나의 질문에 추가하기로 결심하다.ꡓ 그 해 7월 1일, 에드워즈는 일상적인 자기 성찰뿐 아니라 특별한 문제가 있을 때 더욱 철저한 자성의 노력을 기울이기로 결심했다. ꡒ일이 조금이라도 잘못되거나 내 내면이 조금이라도 불편하거나 아니면 외적으로 틀어지는 일이 생기면 가장 엄격한 조사를 통해 내 자신을 검토하기로 결심한다.ꡓ
감정적 동요나 불안정이 생길 때도 에드워즈는 자기 성찰에 착수했다. 1723년 7월 4일과 13일일자 일기에 그러한 결심이 나타난다. ꡒ내 감정들이 조금이라도 궤도를 벗어나거나 나의 내면에 최소한의 불편함이라도 의식되거나 혹은 외적으로 최소한의 비정상이 발견되면 즉시 나는 최대의 엄격한 자기 성찰에 돌입하기로 결심했다.ꡓ.(60번째 결심) 그는 아마도 그리스도인이 내적 평안을 잃고 불안을 느끼는 것은 자신의 죄악이나 과실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음에 틀림없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 검토를 통해 그 문제를 해결함으로 다시 내면의 평안과 안정을 회복하고자 했다.
시간의 소중함에 대한 처절한 인식
생활에 대한 결심들 중 에드워즈가 가장 자주 언급하는 것들 가운데 하나는 시간을 아끼고 선용해야 한다는 인식이다. 그는 아주 젊은 나이에 이미 인생의 유한함을 절감하면서 짧은 생애를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1723년 9월 23일 그는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결심하고 있다. ꡒ나의 인생은 너무 짧다. 그러므로 모든 공부를 다 완벽하게 할 시간이 없다. 따라서 이제 나는 결심한다.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공부들 외에는 모두 생략하고 미루어 두기로 말이다.ꡓ 예일 대학 강사 시절인 1724년의 일기에 청년 에드워즈가 얼마나 시간을 절약하면서 살았는지 극명하게 나타난다. 그는 먹는 음식의 양에까지 신경을 쓰면서 시간을 아끼려 했다. ꡒ식사를 적게 함으로써, 그리고 가능한 한 가볍고 소화가 잘 되는 음식을 먹음으로써 보다 명료하게 사고할 수 있으며 시간을 벌 수 있다. 첫째, 나의 생을 연장시킬 수 있다. 둘째, 식후 소화에 시간을 덜 들일 수 있다. 셋째, 건강이 상하지 않고 깊이 공부할 수 있다. 넷째, 수면 시간을 줄일 수 있다. 다섯째, 두통으로 고생하는 일이 드물게 될 것이다.ꡓ 그는 시간 활용을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는 일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말을 1728년 1월의 일기에 기록하고 있다. ꡒ그리스도께서 무덤에서 아주 일찍 일어나심으로써 조기 기상을 추천하셨다고 나는 생각한다.ꡓ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대한 열심
참된 경건의 증거들 중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에 대한 순수한 갈망이다. 거짓 경건은 자기 이익의 확장에 대한 욕심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의 본질 중 하나는 하나님의 왕국이 건설되는 것을 보고자 하는 열망이다. 에드워즈는 그러한 거룩한 소원을 가지고 있었다. ꡒ나는 세상에 그리스도의 왕국이 진전되는 것에 대한 커다란 갈망을 가지고 있었다.ꡓ고 그는 술회한다. 문제있는 신앙의 또 하나의 증거는 기도가 주로 자기를 위한 제목들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에드워즈의 은밀한 기도는 대부분 그리스도 왕국의 확장을 위한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지구상에 복음이 전파되고 영혼들이 구원받았다는 소식을 들을 때 진심으로 기뻐했다. ꡒ만일 내가 세상 어느 귀퉁이에서 일어난 것이든, 이런 저런 식으로 그리스도의 왕국의 이익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보이는 어떤 일에 대한 최소한의 암시라도 접하면 내 영혼은 열렬히 그것에 매달렸다. 그 소식은 나를 크게 고무하고 소생시켰다. 나는 주로 그 목적으로 공중 소식지들을 열심히 읽곤 했다. 기독교의 이익에 유리한 무슨 소식이 없는가 찾아 보기 위해서였다.ꡓ 이것은 분명 아주 강한 선교적 마인드였다. 교회사상의 대각성이 거의 다 그러했지만 제일차 대각성의 가장 중요한 결과들 중 하나도 세계 선교열의 고조였다. 그것이 우연이 아니었음은 장차 대각성의 지도자가 될 청년 에드워즈의 영혼 속에 이처럼 불붙는 구령의 열정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0세를 갓 넘은 나이에 에드워즈는, 만일 자기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몇 사람의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다면 ꡒ기꺼이 그들의 종이 되어 그들의 발 아래 엎드릴 수 있을 것ꡓ이라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수 년이 지난 후의 기록에서도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대한 에드워즈의 열렬한 관심을 발견한다. ꡒ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진전되는 것에 큰 관심을 가져왔다. 과거에 그리스도의 왕국이 확장된 것에 대한 역사는 내게 달콤하게 느껴졌다. 지나간 시대의 역사를 읽을 때 내가 가장 즐겁게 느꼈던 이야기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확장된 것에 대한 것이었다. 내 마음은 그리스도의 나라가 지상에 확장되는 것에 대한 성경의 약속들과 예언들을 읽을 때 크게 고무되고 즐거워했다.ꡓ 여기에 비하면 오늘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너무 자기중심적인 것이 아닌가? 오늘 우리들 중 자기 관심사를 벗어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관심에 지배당하는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나가면서
한 인간이 남다른 비범한 삶을 살았다면 그것은 이유 없이 되는 일이 아니다. 비범함에는 틀림없이 그것에 상응하는 원인이 숨어 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 그것은 어릴 적부터의 남다른 경건의 훈련, 거룩에의 갈망, 철저한 헌신의 각오, 그리고 무서울 정도의 엄격한 시간 관리,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심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현미경 같은 자기 성찰의 삶을 살아 갔다. 그것이 모두 장차 비범한 일을 하기 위한 준비였다. 오늘 목사, 선교사, 신학생들 중 진작부터 이러한 철저한 자기 관리와 경건의 훈련을 쌓아 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도 에드워즈 같은 남달리 쓰임받는 인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나이가 들었고 많은 것이 몸에 배여 버렸다 하더라도 낙심하지 말자.
지금부터라도 하나님 앞에 철저한 자기 관리와 경건의 훈련을 쌓아 간다면 지금까지보다는 훨씬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고 열매가 훨씬 더 풍성한 사역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위대한 종이 되기에는 좀 늦었다면 최소한 우리 자녀나 손자들은 그렇게 양육해야 하지 않을까?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조나단 에드워드(1703-1758)
18세기 미국의 칼빈주의 청교도 신학자.
1734-1735년과 1740-1741년에 걸쳐 두 번의 영적 대각성 운동을 주도
마틴 로이드 존스에 의하여 바울 사도에게 가장 가까이 갔던 사람이라고 칭함받은 사람
구원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절대적으로 믿고 알아야 하는 분량의 성경적 칭의 체계는 어쩌면 매우 단순하여 가장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이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칭의와 관련하여 그 이상으로 가르쳐 주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칭의 교리는 인간의 타고난 이성을 빛을 초월하는 순전한 계시이며 또한 칭의교리야말로 복음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가 가장 분명하게 입증되는 곳임을 모두 인정합니다. 또 우리는 천사들도 사람들도 도무지 생각해 낼 수 없었던 놀라운 화해의 방법을 하나님께서 친히 생각해 내셨음을 모두 인정합니다.
1. 로마서 4장 5절의 본문관찰과 교리도출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5)
이 구절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요점들을 주목해 볼 수 있습니다.
관찰1. 칭의는 사람을 ‘경건치 아니한 자’로 간주합니다.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 말씀은 곧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을 의롭다 칭하시는 행위에서 하나님께서는 의롭다함을 얻게 될 사람 안에 있는 것을 일절 고려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가령 그 사람 안에 있는 경건함이나 작은 선함도 일절 고려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사람을 의롭다 칭하시기 전에는 단순히 그 사람을 경건하지 않은 피조물로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롭다함을 얻게 되는 사람 안에 있는 경건함은 칭의의 근거가 되어 그 사람의 칭의에 선행(先行)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다는 성경의 기록을 보면서, 시력의 회복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긍휼의 행위보다 먼저 있었고 또 그것이 긍휼을 받게 된 이유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리석듯이 말입니다. 또는 어떤 부자가 관대한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을 부유하게 만들어 주었다는 기록을 보면서, 가난한 그 사람에게 그와같은 관대함이 베풀어진 이유와 가난한 그 사람이 그와같은 관대함을 얻게 된 자격은 그 사람의 재산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매하듯 말입니다.
관찰2. 이 구절에서 ‘일을 아니할지라도’라는 표현은 의식법(儀式法)을 순종하지 않는 사람만 가리키는 것이 분명 아닙니다.
‘일을 아니한 자’와 ‘경건치 않은 자’는 분명 동의어 표현임이 명확합니다.
칭의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있는 그 어떤 경건함도 일절 고려하지 않으신다는 사실! 바로 이 사실을 말해주고 싶어서 ‘경건치 아니한 자’라는 표현을 ‘일을 아니할지라도’라는 표현 바로 다음에 덧붙여 쓴 것입니다.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4절 말씀,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라는 말씀에 드러난 요점은 무엇입니까? 경건치 않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바로 복음의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관찰3. 본문에서 분명하게 나타나 있는 것은 의롭다함을 얻는 수단으로 여기에 언급되고 있는 믿음이 일련의 순종이나 의로움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 믿음을 해석하되, 율법에 대한 일련의 순종을 이행하는 것, 율법을 범하는 일을 피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믿음을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과연 성경의 가장 명확한 의미를 살려 충실하게 해석하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되 의롭다 하시는 이로서 하나님을 믿는 것과 율법 수여자로서의 하나님 앞에 복종하는 것은 분명하게 다릅니다.
관찰4. “그것을 의로 여기시나니”라는 본문의 표현을 볼 때 명백히 드러나 있는 요점은, 칭의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그 안에 의로움이 전무(全無)한 사람으로 고려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의로 여기신다”라는 표현이 명백하게 시사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원대로 은혜를 베푸실 수 있는 전적인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다루심에 있어서 아무런 의도 없는 그 사람을, 결과적으로는 마치 그 사람이 실제로 의를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고려하기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까닭은, 실제로 의를 가지고 있는 어떤 것과 죄인이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앞서 나오는 “의로 여기신다”라는 표현의 취지입니다.
그러므로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이라는 표현이 무엇을 의미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 스스로 일을 전혀 하지 않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기신다는 것 외에 달리 무엇을 의미할 수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말씀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교리를 추론할 수 있습니다.
교리 :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결코 우리 자신의 선함이나 미덕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2. 이신칭의(以信稱義-믿음으로써 의롭다 칭함)교리의 의미
질문 1.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질문 2.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결코 우리 자신의 선함이나 미덕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질문 3.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답변 1.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정하실 때, 즉 그 사람이 죄로 인해 응당받아야 할 형벌과 죄책으로부터 벗어났으며 영원한 생명이라는 상급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인 의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때, 그 사람은 의롭다함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의롭다함을 얻다’라는 단어를 이런 의미로 해석하는 것, 또 판사가 어떤 사람을 소극적인 의의 소유자로 인정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의의 소유자로도 인정하고, 결과적으로 그 사람을 형벌 받을 이유가 전무한 사람으로 여길 뿐만 아니라 정의롭고 의로우므로 오히려 적극적인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으로 여기는 것처럼 ‘의롭다함을 얻다’는 단어 역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그와같은 방식으로 인정받음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것은 그 단어의 어원과 본래 의미를 생각할 때 가장 합당합니다. 왜냐하면 ‘의롭다함을 얻다’라는 단어는 어떤 사람을 의롭다 판단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의롭다함을 얻다’라는 단어가 성경에 사용된 취지를 보아도, 이 단어를 그와같은 방식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이 분명히 옳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이 ‘칭의’라고 할 때 이 단어가 의도하는 뜻은 오직 죄사함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런 것입니까? 칭의의 본질을 숙고할 때 우리는 그와 같은 생각이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전반적으로 하나님의 규례나 하나님의 율법과 관련하여 어그러짐 없이 올바르게 행하고 있다는 판단을 받으려면, 죄책(罪責)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이 그 사람에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첫 보증인이었던 아담은 사람으로서 존재하게 된 첫 순간부터 율법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순종을 성취하기도 전에 또는 율법이 요구하는 순종을 성취하고 싶어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검증하는 시험을 여느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치르기도 전에 율법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은 것이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 아담은 적극적으로 율법을 온전히 순종하는 일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의롭다함을 얻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죄를 용서받은 것만으로, 율법에 따라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나 율법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아담이 온전한 순종을 성취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는 의롭다함을 얻었을 것이고 틀림없이 그의 칭의는 단순히 소극적인 내용보다 더 많은 내용을 포함했을 것입니다. 그는 율법의 의를 이룬 사람으로서 인정을 받았을 것이고, 그에 따라서 율법의 의를 이룬 사람에게 수여되는 상급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보증으로 삼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칭의 안에서 실질적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데), 우리의 두 번째 보증인이 되시는 그리스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부 하나님께서 그에게 위임하신 직무를 완수하시고 모든 시련 속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의 계명을 모두 준수하시기까지는 의롭다함을 얻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모든 일을 이루신 이후에 부활에서 의롭다함을 얻으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는데(벧전 3:18),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셨던 그 분은 바로 그 때 영으로 의롭다함을 얻으셨습니다(딤전 3:16).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면서 그리스도를 의롭다하실 때, 그리스도를 위해 무슨 일을 행해 주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한 굴욕으로부터 그리스도를 풀어 주시고 죄로 인한 더 이상의 수난이나 비하로부터 그리스도를 방면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저 영원하고 불멸하는 생명으로 그리스도를 인도해 들이셨고 그리스도께서 이미 행하신 일에 대한 상급인 승귀(乘歸)의 시작으로 그리스도를 이끌어 들이셨습니다.
참으로 신자의 칭의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신자들의 머리요 보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칭의와 교제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는 것, 바로 이것이 신자의 칭의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죄의 형벌을 받으시되 개인의 자격으로 형벌 받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보증인으로서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의 형벌을 다 감당하신 후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을 받으셨고, 바로 그 때 그 부활 안에서 의롭다함을 얻으셨습니다. 그런데 이것 역시 개인의 자격으로 의롭다함을 얻으신 것이 아니라 그를 믿을 모든 사람들의 보증인과 대리인의 자격으로 의롭다함을 얻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순히 자기 자신을 위한 부활이 아니라 우리의 칭의를 위한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4장 25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그러므로 사도가 로마서 8:34에서 말하는 요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그러나 이런 사실을 좀 더 직접적으로 교훈해 주는 성경구절은 따로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의 칭의가 단순히 죄사함이나 죄에 합당한 형벌로부터의 사면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의에 대한 상급인 내세의 영광도 얻게 되는 자격을 부여한다는 사실은 로마서 5:1-2과 요 5:24에 좀더 직접적으로 교훈되고 있습니다.
[롬 5:1-2]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답변 2. 두 번째 질문은 칭의가 결코 우리 자신의 어떤 미덕이나 선함으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는 것이었습니다. 이 질문은 두가지 질문으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질문 2-1.어떤 이유로 칭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습니까?
질문 2-2.어떤 이유로 칭의는 우리들의 선함을 모두 배제하고 오직 믿음으로만 말미암습니까?
답변 2-1 어떤 측면에서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칭의와 구원의 조건을 성취하십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볼 때는 믿음도 칭의의 조건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구원의 조건이라고 하는 일상적인 의미로 이해할 때, 믿음은 구원과 칭의의 유일한 조건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에 수반하고 믿음으로부터 파생되는 다른 것들이 많이 있는데 그것들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도 칭의가 가능하냐 불가능하냐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수많은 구절을 보면, 칭의와 구원에 관한 여러 가지 조건 명제 안에 그것들(믿음에 수반하고 믿음으로 파생되는 것들)이 다양하게 조건의 자리에 들어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는 바 믿음에 수반하고 믿음으로부터 파생되는 다른 것들이란, 하나님께 대한 사랑, 형제들에 대한 사랑,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것, 그리고 그 밖의 많은 선한 자격들과 행위들입니다. 또한 영생을 얻기 위해서 믿음 이외에도 우리가 추구하고 이행해야 할 것으로 성경이 우리에게 직접 제시하는 것들이 여럿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것들을 이행하거나 성취한다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지만, 반대로 우리가 그것들을 이행하지 못하거나 성취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멸망하고 말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이 칭의의 유일한 조건이라면, “믿음은 칭의의 조건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다”라는 성경 구절의 의미를 과연 제대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분명히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지 않으셨다면, 그래서 칭의를 살 수 있는 값을 치르지 못하셨다면, 우리에게 그 어떤 자격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적당하고 합당한 일이 결코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시된 법을 따라 신자를 의롭다하시는 이유는 틀림없이, 신자가 의롭다함 얻는 것을 합당하게 만들어 주는 무엇인가를 이 믿음이라는 자격 안에서 보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라는 이 자격 안에 신자가 의롭다함을 얻는 것을 합당하게 만들어주는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기 때문에 신자를 의롭다 하신다는 것입니다.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권리와 함께 죄사함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다”하는 표현을 보게 될 때, ‘믿음으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에 대해서 달리 해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만한 사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요, 현재 다루고 있는 칭의 문제와 관련시켜 말하자면 우리를 칭의 은혜의 적법한 수혜자로 만드는 것이로구나!”라고 해석하는 것 외에는 달리 해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믿음 이외의 다른 여러 가지 것들도 칭의와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는 것들 중에서 우리로 하여금 칭의 은혜를 얻기에 합당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은 오직 믿음 뿐입니다.
답변 2-2. “어떤 이유로 칭의는 우리들의 선함을 모두 배제하고 오직 믿음으로만 말미암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더 나아가서 다음과 같이 질문할지도 모릅니다.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의롭다하시는 은혜를 얻기에 합당한 자격을 갖도록 만들어 준다면, 그래서 우리가 그 은혜를 받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적당하거나 합당한 것이 되도록 만들어 준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의 거룩이나 우리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 중에서 믿음 못지 않게 탁월하고 믿음 못지 않게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고 있으며 믿음못지 않게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다른 부분들은 왜 우리에게 그만한 자격을 주지 못하고, 왜 그만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인가?
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의로움이나 선함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말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이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합당하다는 하나님의 판단이 우리 안에 있는 그 어떤 자격이나 그 어떤 행동의 탁월함이나 선함을 고려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믿는 신자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는 이유는 결코 믿음 안에 있는 그 어떤 탁월함이나 가치 때문이 아니라 이 은혜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맺고 있는 관계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의롭다함을 얻는데, 믿음은 바로 그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관계나 연합은 (그것이 실제로 무엇이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모든 은혜를 얻을 수 있게 되는 권리의 근거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와 참된 신자의 연합을 다음과 같은 연합에 비유하는 것을 합당하다고 생각하십니다. 몸의 지체들이 머리에 연합되어 있는 것. 몸의 지체들은 머리에 연합되어 있음으로써 머리에 있는 생명에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나무 가지가 나무에 연합되어 있는 것. 나뭇가지가 나무의 수액과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나무에 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연합되어 있는 것. 아내가 남편과 모든 소유를 함께 누릴 수 있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남편과 맺고 있는 관계 때문입니다. 율법에 보면 남편과 아내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한 몸으로 간주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참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법적인 연합이 존재합니다. 그 결과 온 우주의 최고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 둘을 하나로 여기십니다.
믿음은 그 사람 편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위에서 말한 연합을 이루게 만드는 바, 그 사람에게 있는 그 무엇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속죄와 공로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고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값주고 획득하신 모든 은혜를 누릴 권리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소유할 수 있는 성경적 근거는 성경의 표현대로라면 그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우리가 그리스도의 모든 공로와 모든 은혜를 우리 자신의 것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말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그리스도 자신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소유했거나 우리가 그리스도께 연합한 결과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측면에서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있는 어떤 자격을 보시고 그리스도의 모든 공로와 은혜에 대한 소유권을 그 사람에게 주시는 것과, 그 자격의 가치와 사랑스러움을 보시고 또는 그 자격의 탁월함에 대한 일종의 상급으로서 그리스도의 모든 공로와 은혜에 대한 소유권을 그 사람에게 주시는 것은 크게 다릅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참된 제자들은 특별한 관계로 맺어져 있으며, 그 관계로 인하여 성경은 그들을 일컬어 어떤 의미에서 한 몸이라고 말합니다. 이 점을 인정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그리스도인 쪽에서 그리스도와 이런 관계나 연합을 맺기위해서 적극적으로 무엇인가를 행하는 일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 쪽에서 자신을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려고 행하는 어떤 행동 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나 관계를 성사시키기 위하여 행하는 어떤 행동. 저는 믿음이 이런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감히 의롭다함을 얻는 믿음을 정의하거나 그 안에 얼마나 많은 내용이 함축되어 있는지를 단정지어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정도로만 확실하게 말씀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곧 이전에는 그리스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고 분리되어 있던 영혼이 그리스도에게 연합될 수 있는 것, 또는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된 이전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나 앞서 언급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나 관계에 들어설 수 있는 것은 바로 믿음을 통해서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표현을 빌어서 말하자면, 영혼이 그리스도께로 나아오고 그를 영접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믿음을 통해서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전에 그리스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들로 하여금(즉 그리스도의 백성들에게 마땅히 있어야 하는 그리스도와 관계나 그리스도의 연합과 무관하게 살고 있던 사람들로 하여금) 더 이상 그리스도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며,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친밀함을 형성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에 대한 보상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나 그리스도에 대한 소유권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믿음이 그리스도와 연합하고자 하는 영혼의 적극적인 행동이기 때문에, 또는 믿음 자체가 믿는 사람들 쪽에서는 연합의 실제 행동이기 때문에, 믿는 사람에게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나 그리스도에 대한 소유권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지적이고 활동적인 두 개의 존재나 인격 사이에 연합이 이루어지고 그 결과로 그들이 하나로 간주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쌍방이 자기 자신을 상대방에게 연합시키고자 하는 적극적인 행동으로 서로를 받아들이는 상호행동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을 서로 연합하게 만드는 것이 그들에게 실제로 있고 그들 사이에 실제로 있어야만,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나로 여기시는 일이 비로소 적법성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믿는 사람들에게 그들을 그리스도와 연합시켜 주는 성질의 어떤 행위나 자격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바로 그것 때문에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나로 간주하시고 인정하시는 일이 합법성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바로 그 행동이나 자격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속죄와 공로를 믿는 사람들의 것으로 인정해 주시는 일 역시, 곧 마치 그리스도의 속죄와 공로가 믿는 사람들 자신의ㅣ 속죄와 공로인 것처럼 인정해 주시는 일 역시 지대한 타당성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우리를 의롭게 한다는 말이나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속죄와 모든 공로를 소유하게 하며 그리스도께서 그처럼 값주고 사신 모든 은혜에 대한 권리를 소유하게 한다는 말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자신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키는 사람을 구주와 연합된 사람으로 인정하고, 또한 그 결과 그리스도를 소유한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을 합당하다고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는 이유는 바로 도덕적 적합성 때문이 아닌 특성적 적합성(그 사람이 구비하고 있는 자격들이 도덕적으로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 사람이 구비하고 있는 자격들의 특성과 그 지위의 특성이 서로 일치하고 조화되고 동일하다는 것)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는 결단코 그리스도의 모든 공로를 우리의 것으로 인정하시지도 않을 것이며 그리스도의 모든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지도 않을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그리스도에게 적극적으로 연합하는 일이 없으면 결단코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간주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은 행위언약에 의해서 사람이 의롭다함을 얻게 되는 방식으로 우리를 의롭다 하지도 않습니다. 행위 언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의 행위를 기뻐하시거나 그 사람의 순종에 내재되어 있는 탁월함과 아름다움을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증거로 영원한 생명에 대한 권리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구주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모든 행동을 그 안에 포함합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려는 영혼의 적극적인 모든 행동, 또는 소위 그리스도께로 나아감과 그리스도를 영접함이라고 일컬어지는 모든 행동은 성경에서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아무리 다른 것들이 믿음만큼 탁월하다 하더라도, 중보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은 오직 믿음 만이 할 수 있습니다. 믿음 이외의 다른 그 어떤 은혜나 그 어떤 미덕도 그 일만큼은 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단지 의롭다함을 얻는 믿음(justifying faith)의 구성 요소에 들어가고 그 믿음의 특성에 속하는 것 뿐입니다.
논증 1. 그 사람을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 연합시키는 방법을 제외한 다른 방법으로는, 결코 그 사람이 구주를 소유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구주의 모든 은혜에 대한 권리를 소유하는 것을 합당한 일로 만들지 않습니다.
이유 1. 죄인이 실제로 의롭다함을 얻기 전까지 짊어지고 있어야 하는 무한한 죄책(罪責), 곧 죄의 무한한 사악함이나 가증스러움으로부터 생기는 무한한 죄책을 생각할 때, 그런 일은 결코 허용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참으로 기이하게도 죄의 무한한 사악함을 부인하는 주장을 펼칩니다. 이런 사람들은 죄가 무한한 존재를 대상으로 범해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무한한 사악함을 가지게 된다는 사실을 부인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나 죄의 사악함과 가증스러움은 그 대상이 되는 존재안에서 그것 때문에 일어나는 손실에 비례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나 죄는 그 대상이 되는 존재가 그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것을 상실하느냐에 비례하여 사악하고 가증스럽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무한히 존엄하신 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에 순종하는 일이 필요했는데, 이와같은 일이 우리에게 필요했던 까닭은 상대적으로 무한한 우리의 비천함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율법에 불순종하였고 그것으로 인해 우리의 불순종은 한없이 악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행한 불순종의 비열함을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이 필요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자신이 이룬 순종의 가치로서 우리가 행한 불순종의 비열함을 말끔이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이 필요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무가치한 것만큼 위대하고 가치있는 분이 우리에게 필요했던 것입니다.
의롭다함을 아직 못한 죄인의 인격을 어느 정도 용납하시고 기뻐하시는 일. 의롭다함을 아직 얻지 못한 죄인을 어느 정도 사랑스러운 대상으로, 불쾌함과 진노를 덜 불러 일으키는 대상으로 용납하시고 기뻐하시는 일, 이런 일이 하나님께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죄인이 아직까지 그리스도를 실제로 소유하지 못하고 의롭다함을 얻지 못했다는 것은 그가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무한한 죄책을 가진 존재로 남아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또 무한한 죄책은 죄사함을 받지 않는한 결단코 제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 안에 선한 것이 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가지고 있는 무한한 죄책이나 무한한 비열함에 비할 때 그 사람의 선함은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선함은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무한한 죄책에서 유한한 선함을 빼서 남은 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그 사람의 실체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에 따라 그 사람을 보시고 그 사람에게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칭의 이전에도 영적으로 선한 것이 사람 안에 있습니다. 하지만 의롭다함을 얻은 후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의 경건함이나 탁월함으로써 인정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칭의에 있어서 사람(자연인)은 전적으로 가증스러운 존재로 고려됩니다.
이유 2. 구주를 통해서 어떤 사람을 의롭다하시는 일보다 먼저 앞서는 하나님의 법이 그것을 허용치 않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법 또는 율법에 속하게 되는데, 모든 사람은 율법을 위반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 또는 율법에 의해서 정죄를 받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정죄로부터 죄인을 자윸케 하시는 구주를 실제로 소유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정죄된 상태 가운데 계속 갇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한 율법의 공의로움으로 어떤 사람을 정죄하신 후에 아직 그 정죄가 제거되지 않았는데도 그 죄인에게 있는 어떤 것을 인정해 주신다는 것은 하늘과 땅의 왕이신 하나님의 위엄에 걸맞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인류가 맨 처음부터 속해 있던 옛 율법 아래 있지 않다. 이제 하나님은 인류를 긍휼히 여기사 엄격하고 호된 옛 율법을 폐지하시고, 우리를 새로운 법 아래 두셨다. 좀 더 관대한 법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율법 자체가 더 이상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율법의 정죄가 지금도 남아 있어서 우리의 미덕이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것을 방해한다고 생각할 필요도 전혀없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의 정죄를 피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 율법을 만족시키고 성취하신 구주를 실제로 소유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사람이 구주를 실제로 소유하지 않는 한, 율법의 정죄는 그 사람의 미덕이 하나님 앞에서 조금이라도 인정받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만큼 매우 효과적으로 그 사람을 대적하는 힘을 계속 발휘합니다. 율법이나 하나님의 법 자체가 폐지되지 않는 한, 율법의 정죄는 그 사람이 구주를 소유하기 이전이든지 아니면 그 사람이 구주를 소유하기 위한 사전단계이든지 그 사람을 효과적으로 대적하는 세력으로 작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논증 2.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즉 사람이 최종적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의롭다함을 얻은 상태에 지속적으로 거함으로써만 가능하고, 사람이 의롭다함을 얻은 상태에 지속적으로 거하는 것은 지속적인 순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주장은 사람이 처음 복음을 받아들이는 순간에는 조건적으로만 의롭다함을 얻고 조건적으로만 죄사함을 얻는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죄를 용서한다는 것은 죄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이나 죄에 당연히 따라야 하는 영원한 비참함에서 죄인을 풀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사람이 복음을 처음 영접하는 순간에 죄사함을 얻고 그와같은 비참함에서 자유롭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아직 최종적인 자유를 얻은 것은 아니고 오히려 앞으로도 남아있는 몇몇 조건들을 어떻게 성취하느냐 하는 것에 실질적인 자유가 유보되어 있다면, 그것은 조건적으로만 죄사함을 받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결국 이런 경우는 철저하게 그리고 실제적으로 죄사함을 받은 것도 아니고 죄의 형벌로부터 면제된 것도 아닙니다. 다만 앞으로 전개되는 상황에 따라 죄를 완전히 용서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만을 가지고 있을 따름입니다. 현재 하나님께서는 만일 그가 지속적으로 순종한다면 결국 죄사함을 받을 것이고 지옥으로부터도 실제로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을 따름입니다.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사도 바울의 위대한 교리를 휴지조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조건부 죄사함은 결코 죄사함이나 칭의가 아닙니다. 이것은 복음을 받아들이든지 안 받아들이든지 모든 인류에게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일단 복음을 받아들이고 앞으로도 진실하게 순종하기만 하면 최종적인 칭의를 얻을 수 있다는 약속이 모든 인류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의 미덕이나 순종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생각은 중보자의 영광을 훼손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의에만 속하는 것을 사람의 미덕으로 가로채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자리에 사람을 대신 올려놓고, 사람을 자기 자신의 구주로 만드는 것입니다.
답변 3.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란 넓은 의미로 쓰일 경우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속을 위해 행하시고 고난받으신 모든 것을 우리의 것으로 넘겨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우리는 죄책에서 놓임받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으로 서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는 그리스도의 속죄와 순종을 모두 우리의 것으로 넘겨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는 것은 다른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것으로 하나님 앞에 열납되고 우리 자신에게 있어야만 하는 완전한 내적 의로움으로 대신 인정받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완전한 순종은 우리의 것으로 간주되고, 그 결과 우리는 마치 우리 자신이 직접 완전한 순종을 이행한 것처럼 그에 따르는 혜택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생에 대한 권리가 이렇게 전가된 의에 대한 상으로 주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이 ‘전가하다’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 의미는 어떤 사람에게 속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속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뜻입니다. 가령 사도 바울이 빌레몬서 18절에서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하라”라고 말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율법의 형벌로부터 건짐 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의 형벌을 감당하시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상을 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을 순종하시는 일이 똑같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이 두가지 일이 꼭같이 필요합니다. 율법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을 순종하시는 일이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의 형벌을 감당하시는 일과 똑같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것과 관련하여 틀림없는 사실이 한가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율법의 형벌을 감당하셔야만 했던 까닭은 다른 것 때문이 아니라 율법을 성취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의의 상급을 받기 위해서는 누군가 우리 대신 완전한 순종을 이루어야 할 필요가 똑같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형벌을 감당하신 것,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를 위해 속죄를 하신 것은 단지 우리의 죄책을 제거할 뿐이고, 그럼으로써 처음 창조된 처음 순간에 아담이 처해 있던 상태로 우리를 되돌려 놓는 것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형벌을 감당하셨다는 사실 만으로는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이 타당성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마치 아담이 아무런 순종을 하지 못한 상태인데도 사람으로 존재하자마자 영원한 생명과 확고부동하게 행복한 상태를 그에게 상급으로 주는 것이 타당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때 아담은 한 번도 죄를 범하지 않은 순진 무구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단지 그것 때문에 상급을 받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적극적으로 순종을 해야만 상급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단순히 악한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뿐만 아니라 선한 일을 했다는 것이 있어야만 상급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해 우리의 죄책이 제거되었다고 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적극적으로 순종하시고 선한 일을 행하신 것도 반드시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생명이라는 상급을 얻기 위해서는 죄의 형벌을 감당하는 것 외에도 무엇인가 더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적극적인 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곧바로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보다는 먼저 검증해 보시는 좋겠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의지와 행동으로 하나님의 권위에 전적으로 복종하고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하게 순종하여 먼저 하나님의 권위를 영화롭게 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리스도의 속죄로 죄인의 죄가 속해졌을지라도 적극적인 의로움이 죄인에게 없는 상황에서, 영원한 생명을 죄인에게 하사해 주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율법의 영광은 결코 충분하게 옹호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받드시 있어야 하는 순종의 조건을 채우지도 않은 상황에서 죄인이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율법을 철회하셔야만 할 것이고, 약속된 상을 주셔야만 할 것이며,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율법에 존경과 영광을 돌리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을 율법에 굴복시키시고 순종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율법과 율법의 수여자이신 하나님의 권위를 크게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비록 불완전할지라도 진실한 순종만 있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죄인을 의롭다 하신다고 말하는 것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재판장 앞에서 불완전한 의는 아무런 가치도 없기 때문입니다. 정해진 규범을 충족시키는 것 대신에 규범에 미달하는 것을 용납하는 것은 공정한 행위나 재판관다운 행위가 아닙니다. 재판관에게는 오직 법에 일치하는 것만이 의입니다. 법은 재판관의 규범입니다. 만일 재판관이 죄로 성립하는 것을 은폐하고 용서해 준다면, 그럼으로써 사실상 판결을 내리지 않는다면, 그 재판관은 역할을 하고 있지 않거나 잘못 재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가 없는 사람을 결코 의롭다 하실 수 없습니다!
칭의의 선언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완전히 의로운 사람으로 공포하시는 것입니다. 칭의 선언에서 하나님은 그 사람을 완전히 의로운 사람으로 공포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면, 그 사람은 의롭다함을 얻은 다음에도 또 다른 칭의를 필요로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해 그 사람의 죄가 제거되었다는 사실만으로는 그 사람의 칭의가 성립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을 의롭다고 칭하는 것은 단순히 그 사람이 죄가 없고 결백하다고 선언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사람은 자신이 속해 있는 법과 관련하여 올바른 상태에 있고 생명을 상으로 얻기에 합당할 만큼 완전히 의롭다고도 선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우리의 보증인이셨기 때문에 사람의 죄책을 짊어지신 후에 고난을 받으시기 전까지는 사면될 수 없으셨고 순종을 하시기 전까지는 상을 받으실 수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개인의 자격으로 사면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대표 자격으로 사면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사면 안에서 사면됩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개인의 자격으로 순종에 대한 상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대표 자격으로 상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순종 안에서 상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의롭다함을 얻으신 것은 두가지 모두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곧 우리 대신 짊어지셨던 죄책으로부터 놓임받으셨다는 것과, 우리 대신 순종하신 일에 대한 상으로 승귀(乘歸)와 영광을 받으셨다는 것 모두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신자들만이 믿는 즉시 그리스도께서 얻으신 이런 의롭다하심에 참여하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예수는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본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과 전적으로 동등하셨기 때문에 성부 하나님께 복종해야 할 의무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을 대신하는 자리에 서야 할 그 어떤 의무도 없었고, 사람의 법 아래 굴복해야 할 어떤 의무도 없었으며, 어떤 상태로든 하나님께 복종해야 할 그 어떤 의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사이에 언약이 먼저 체결되었고, 그 언약에 따라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되셨고 율법 아래 나셨습니다. 그 언약에 따라 그리스도께서는 자원하여 율법 아래 처하기로 책임을 맡으셨고, 순종하고 고난받으시기로 책임을 맡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행하시기로 책임 맡은 모든 일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이미 실제로 행해진 일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 언약에 근거해서 하나님이 행동하신 것을 보면 이 점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일들이 실행되기 한참 전에도 그 모든 일들이 이미 실행된 것처럼 행동하시며 죄인들을 의롭다 하시고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부 하나님과 더불어 언약을 체결하신 이후에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순종해야 하고 형벌을 받아야만 하는 두가지 책임을 모두 짊어지게 되셨습니다. 왜냐하면 언약이 체결되는 순간부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보증인 또는 대표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순종의 행위는 목숨을 내어놓으라는 계명에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시는 일은 그리스도의 순종가운데 중심적인 행위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없이 큰 어려움을 수반하는 명령에 대한 순종이요, 그렇기 때문에 그의 순종을 시험하는 가장 중대한 시금석인 명령에 대한 순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순종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입증하신 하나님께 대한 자기의 경외심과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경외는 그 순종에 수반하는 어려움만큼이나 위대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토록 영광스러운 상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으신 까닭은 주로 이런 순종의 행위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죽음에 내어 주신 일은 우리의 구원을 획득한 유일한 순종행위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전 생애를 통해서 한 순간도 빠짐없이 우리 구원의 공로가 되는 순종 행위를 이행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죽음에 내어 주신 일은 화목을 이루는 유일한 고난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전 생애에 걸쳐 한 순간도 빠짐없이 당하신 모든 고난이 화목을 이루는 고난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순종이 무한한 가치를 가지는 이유는 그렇게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인격이 무한히 존귀하기 때문이요, 동시에 그런 순종을 이행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무한한 대가를 자원하여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3. 복음적 순종과 칭의의 관계
그리스도인다운 삶이나 복음적 순종에 속하는 여러 가지 행위들의 경우 선행이라는 자격으로나 그 안에 있는 도덕적 선함 때문으로는 칭의와 그 어떤 관계도 가질 수 없습니다. 또한 그런 행위들은 율법의 행위라는 자격으로나 도덕적 탁월함이라는 자격으로나 그것의 일부분이라는 자격으로도 칭의와 그 어떤 관계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결론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다운 삶에 속하는 여러 가지 행위들은 그 사람 안에 있는 믿음을 겉으로 드러내는 표현이라는 이유와 구주이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행위들로 간주될 수 있다는 이유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이유로든 칭의와 관련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질문. 그리스도인다운 순종에 속하는 여러 가지 행위들은 이런 점에서 칭의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습니까?
답변. 이 질문에 대한 확정적인 답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다른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믿음의 맨 처음 이후에 있게 되는 믿음의 다른 행위들도 우리의 칭의와 관련되어 있는지, 또 믿음 안에서의 견인(堅忍)이나 믿음의 지속적이며 갱신된 행위들도 칭의와 관련하여 어느 정도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지를 먼저 해결해야 합니다.
어떤 면에서 칭의는 특별한 방식으로 믿음의 첫 행위로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임에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인은 믿음의 행위를 하는 그 즉시 실제적으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의롭다함을 얻기 때문입니다. 또한 믿음은 그 첫 행위에서 견인에 관하여 비록 연약하지만 진실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다른 여러 가지 혜택들 중에서 견인에 관한 권리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칭의 사건에서 믿음의 견인이 배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의 견인은 칭의와 확실하게 관련되어 있을 뿐 아니라 죄인이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는 근거나 수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에 반드시 포함되어야만 합니다.
저는 앞에서 칭의가 어떤 방식으로 믿음에 의지하는지를 말씀드렸습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의를 소유하는 일의 적합성을 결정하는 자격이기 때문에, 또는 그 안에 적합성을 소유하고 있는 자격이기 때문에, 칭의는 믿음에 의지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견인에 대하여 숙고하는 일은 이와같은 적합성과 별도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의 견인과 이와같은 적합성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소유하기에 적합한 사람들은 누구이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그의 의를 주고 사신 영원한 은혜들을 소유하기에 적합한 사람들은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현재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왜 현재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만 이런 일이 적합합니까?
먼저 영혼은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합하거나 하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그리스도와 하나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영원한 은혜들을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유하는 것은 그 안에 특성적 적합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적합성은 영혼이 그리스도와 연합하되 지속적으로 연합해야 효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은 이유 때문에 현재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혜를 소유하기에 적합한 것입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 뿌리로부터 여러 가지 혜택을 계속해서 얻으려면 포도나무에 지속적으로 붙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사람의 영혼도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하시는 은혜와 은총 등 여러 가지 혜택을 계속해서 얻으려면 그리스도 안에 지속적으로 거해야 합니다.
[요 15:6-7]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 15:9-10]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어야만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맨 처음에 필요했던 그 이유와 동일합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지속적으로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한번이라도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와 동일합니다. 영혼이 지금 현재 의롭다함을 얻은 상태에 있기 위해서는 지금 현재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이전에 한 번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것으로는 안됩니다.
단순히 과거 한 때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는 경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해서 구원을 얻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지금 현재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구원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28에서 사도 요한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사람들이 내세에서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서는 단순히 과거 한 때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는 경력이 아니라 현재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일이 꼭 필요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맨 처음 이루어지기 위해서 믿음이 꼭 필요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지속되기 위해서도 그 연합을 가능케 해주는 자격인 믿음이 변치않고 계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죄인은 믿음의 행위를 맨 처음 실행하자마자 실제적으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의롭다함을 얻지만, 바로 그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영원한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일의 적합성을 결정하는 한 요소로서 믿음의 견인을 고려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처음 믿는 순간에 이루어지는 칭의의 행위에서 믿음의 견인을 믿음의 첫 행위에 사실상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고려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법에 의하면 참된 믿음은 반드시 견인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의롭다 하실 때에 믿음의 견인을 고려하시되 마치 믿음의 견인이 이미 다 완성된 것처럼 고려하십니다. 그리고 믿는 신자는 그것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의 견인은 믿음의 첫 행위에 들어있는 한가지 속성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될 정도로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첫 믿음과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신자가 처음 믿을 때에 믿음의 견인을 그 믿음의 속성으로 생각해 주십니다. 그래서 칭의는 믿음의 견인이 완성되는 때까지 보류되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믿음의 견인을 이와같이 생각해 주지 않으신다면, 칭의는 죄인이 실제적으로 믿음 안에서 견인하기 전까지 유보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와같은 사실, 곧 죄인이 회심할 때 이루어지는 결정적인 칭의 행위에서 하나님께서는 믿음 안에서의 견인과 믿음의 장래 행위들을 믿음의 첫 행위 안에 사실상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하신다는 것은 다음의 사실을 통해서 더 명확해집니다.
즉 죄인이 회심할 때 이루어지는 칭의 안에는 죄인이 영원토록 받아 마땅한 형벌과 관련하여 죄사함이 사실상 내포되어 있는데, 죄인이 회심할 때 이루어지는 첫 칭의는 결정적이고 완전한 칭의이기 때문에, 이 죄사함은 과거의 모든 죄에 대한 용서뿐만 아니라 장차 범하게 될 모든 죄와 허물에 대한 용서까지도 포괄하시는 죄사함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볼 때, 하나님께서는 맨 처음 칭의 행위 안에서 믿음의 견인을 믿음의 첫 행위 안에 사실상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하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순리대로 보자면 ‘죄사함’이라는 것은 ‘범죄’가 성립한 이후에 그리고 용서받아야 하는 죄와 관련된 회개와 믿음의 행위 이후에 오는 것이 맞습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도 그렇고 성경적으로 볼 때도 그렇고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가령 시편 32편을 보십시오. 시편 32편 첫부분에서 다윗은 죄사함에 관해서 말합니다. 이 때 다윗은 자신이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오던 차에 범했던 죄에 대해서 말했음이 분명합니다. 아무튼 다윗은 자신의 죄가 용서되었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죄를 범한 다음에, 그리고 그 죄와 관련하여 자신이 회개하고 믿은 다음에 죄사함이 베풀어졌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로마서 4장에서 사도 바울은 다윗이 말한 이런 죄사함을 믿음으로 인한 칭의의 실례로 사용합니다.
다윗이 시편 32편에서 언급한 죄는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를 살해한 죄일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이 시편에서 언급한 죄사함은 선지자 나단이 사무엘하 12장 13절에서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라고 말했던 것을 볼 때, 죽음 곧 영원한 형벌로부터의 사면일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선포만 시간 순서 상으로 다윗의 범죄 이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의 죄가 용서된 일자체도 순리대로 그 죄와 관련된 다윗의 회개와 믿음이 있은 후에 이루어졌습니다. 무엇을 보면 이것을 알 수 있습니까? 시편 32편에 회개와 믿음이 있어야만 죄사함을 얻을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인은 맨 처음 의롭다함을 얻는 순간에 영원히 의롭다함을 얻고 죄의 영원한 형벌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된다는 점을 생각할 때,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회심이후에 있게 되는 믿음과 회개는 맨 처음 믿음과 회개 속에 사실상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입니다. 회심이후에 범하는 죄들에 대한 회개와 그런 죄들과 관련하여 구속주를 믿는 믿음, 또는 그와같이 실제적인 회개와 믿음을 본성과 기질로 소유하고 있는 마음 안에 그런 습성과 원리가 지속되는 것까지도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확실히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회심 이후에 있게 되는 믿음과 회개는 맨 처음 믿음과 회개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입니다.
한편 회심 이후에 범해진 죄에 대한 용서 자체는 그 죄들이 범해진 이후에 있게 되는 믿음과 회개 행위 다음에 순리를 따라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곧 회심 이후에 있게 되는 믿음과 회개가 맨 처음 칭의에서 고려되는 것과 똑같이 회심이후에 범하게 되는 죄들도 맨 처음 칭의에서 고려된다는 것입니다. 회심 이후에 있게 되는 회개와 믿음도 의롭다하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맨 처음 회개와 믿음 안에 사실상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마치 회심이후에 범하게 되는 죄로부터 신자들을 의롭게 하시는 일이 맨 처음 칭의에 사실상 내포되어 있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하여 믿음의 첫 행위 이후에 있게 되는 믿음의 다른 행위들도 우리의 칭의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 입증되었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만일 믿음의 첫 행위만 칭의와 관련되어 있고 이후에 있게 되는 믿음의 다른 행위들은 칭의와 아무런 관련도 없다면, 어떤 문제들이 파생되겠습니까?
당연히 믿음의 첫 행위가 아닌 다른 행위로는 절대 칭의를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올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만일 회심 이후에 있게 되는 믿음의 다른 행위들로서는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면, 그런 믿음의 행위들을 통해서 칭의를 추구하는 것은 결코 그리스도인의 의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결국, 회심한 이후에 사람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추구하거나 죄책으로부터의 구원과 죄사함을 얻기 위해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결코 의무가 될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책으로부터의 구원은 칭의의 일부분인데, 앞에 전제한 것에 의하면 회심이후에 있게 되는 믿음의 다른 행위를 통해서 칭의를 추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회심한 사람들이 죄책으로부터의 구원과 죄사함을 얻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통해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옳지 않다면, 그것을 얻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옳지 않다는 말이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인이 어떤 복을 얻고자 하나님께 바치는 기도는 그 복과 관련하여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믿음의 표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는 다른 것이 아니라 믿음의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죄책으로부터의 구원과 죄사함을 얻기 위하여 기도한다는 것은 그런 복에 대하여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인데, 앞에 전제한 것에 의하면 ‘회심한 이후에 사람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추구하거나 죄책으로부터의 구원과 죄사함을 얻기 위해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결코 의무가 될 수 없다’라고 했으므로, 결국 그런 복을 얻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옳지 않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주기도문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기도 제목으로 사용하기에 또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서 기도 제목으로 사용하기에 부적절하다는 결론이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결국, 그런 기도 제목을 가르쳐 주신 그리스도께서 잘못되었다는 말이 됩니다. 왜냐하면 가룟 유다를 제외한 모든 제자들이 이미 회심한 사람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기도 제목을 사용하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기도 제목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실 때 염두에 두고 계셨던 ‘죄’는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죄가 응당 받아야 하는 형벌과 우리가 하나님의 공의에 지고 있는 일만 달란트 빚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는 것은 죄로 인해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하는 형벌로부터 우리를 구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과 같은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죄로 인해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면케 해주는 것과 우리가 하나님의 공의에 지고 있는 빚을 모두 탕감해 주는 것은 칭의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전제한 것에 의하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는 것은 잘못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회심한 이후에 사람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추구하거나 죄책으로부터의 구원과 죄사함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결코 의무가 될 수 없다’고 전제했기 때문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회심 이후에 있게 되는 믿음의 다른 행위들은 칭의와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생각과 그렇기 때문에 회심 이후에 있게 되는 믿음의 다른 행위들을 통해서 칭의를 추구하는 옳지 못하다는 생각은 또다른 문제를 초래합니다. 이런 생각은 자신이 행한 믿음의 첫 행위에 확신이 없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믿음이 가져다 주는 기쁨과 평안을 얻지 못하도록 그들을 영원히 단절시켜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의롭다함을 얻는 믿음의 본분은 하나님과의 화평과 죄사함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함으로써 결국 하나님과의 화평과 죄사함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같은 신뢰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화평과 죄사함을 얻게 되고 그것을 인식함으로써 신자들은 의롭다하는 믿음을 통해 기쁨과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행한 믿음의 첫 행위에 관하여 확신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행한 믿음의 첫 행위로부터 그와 같은 기쁨과 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행한 믿음의 첫 행위에 관하여 확신이 없는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에 이미 전제되어 있는 것처럼, 이런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행한 믿음의 첫 행위가 정말로 믿음의 행위였는지도 확신치 못하고 있고, 따라서 그런 믿음의 행위를 통해서 실제로 기쁨과 평안을 얻었는지도 확신치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에 제일 좋은 해결책은 그와같은 축복을 얻기 위해 바로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그렇게 해도 좋다는 정당한 자격이 자신에게 있는지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해결책으로부터 단절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쩌면 이 사람은 이미 회심을 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만일 이 사람이 이미 회심한 사람이라면, 이 사람은 그와 같은 축복을 얻기 위해서 바로 지금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정당한 자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회심이후에 있게 되는 믿음의 다른 행위들은 하나님과의 화평이나 죄사함을 얻기 위한 합당한 방편이 아니라고 전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회심 이후에 있게 되는 믿음의 다른 행위들은 하나님과의 화평이나 죄사함을 얻기 위한 합당한 방편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이 사람은 믿음이 가져다 주는 기쁨을 결코 합당하게 얻을 수 없게 됩니다.
참된 믿음의 행위라 할지라도 매우 연약한 믿음의 행위들이 있습니다. 또 회심 이후의 믿음의 행위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믿음의 첫 행위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믿음의 첫 행위는 자궁 안에 있는 태아의 최초 태동처럼 거의 알아볼 수 없는 것일수도 있습니다. 믿음의 첫 행위는 굉장히 연약한 행위일수도 있습니다. 그 결과 그것을 자세히 검토해 보면 아무리 참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행한 믿음의 첫 행위가 참으로 믿음의 행위였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를 확정짓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과 많은 경험을 통해서 명백하게 드러난 사실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이 행한 믿음의 첫 행위가 정말로 참된 믿음의 행위였는지를 확정짓지 못해 안절부절못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상당한 정도로 만족했던 사람들까지도 크게 퇴보하고 타락할 경우 쉽게 영원한 형벌에 대한 큰 두려움에 빠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합당한 방법은 회개를 통하여 죄를 버리고 죄로 인하여 응당 받아야 할 영원한 형벌로부터 구원받기 위해서 지금 그 자리에서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만일 영원한 형벌로부터 구원받는 것이 이런 방법으로 얻어질 수 없다면, 그 방법은 구원받을 수 있는 합당한 방법이 아닐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회심이후에 있게 되는 믿음의 행위도 우리의 칭의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차원에서 입증하려고 했습니다. 곧 회심 이후에 있게 되는 믿음의 다른 행위들은 하나님과의 화평과 죄사함을 얻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될 경우,어떤 문제들이 생기는 지를 말씀드림으로써 그것을 입증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지금 주장하고 있는 사실에 대한 훨씬 더 분명하고 직접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그 증거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위대한 약속과 관련하여 아브라함이 행사했던 믿음의 행위입니다. 아브라함이 보인 믿음의 행위에 대해서 갈라디아서 3장 6절 말씀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아브라함이 행사한 이 믿음의 행위는 사도 바울이 로마서 4장 전체와 갈라디아서 3장 전체에서 이신칭의에 관한 자신의 가르침을 확증하면서 정말 매우 강력하게 역설하는 중요한 실례요 증거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얻게 된 이 믿음의 행위가 아브라함이 행사한 믿음의 첫 행위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이 행위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본토와 친척을 떠난 지 오래 후에 행해진 것이었고(히 11:8),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탁월한 친구로 인정을 받은 지 오랜후에 행해진 것이었습니다.
제가 주장하고 있는 사실을 입증할 더 분명하고 직접적인 증거는 아브라함이 행사한 믿음의 행위만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행사한 믿음의 행위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회심한 이후에 행한 모든 일에서 자신이 얼마나 간절한 심정으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추구했는지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얼마나 간절한 심정으로 그리스도를 얻고자 했으며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의를 획득하고자 했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빌 3:8-9]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그리고 나서 그 다음에 이어지는 두 구절에서 사도 바울은 다른 표현을 사용하여 동일한 내용을 반복해서 말해줍니다. 곧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은혜에 참여하기 위하여 자신이 어떻게 수많은 고난을 통과하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게 되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빌 3:10-11]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여기에서 ‘부활’은 사도 바울이 다른 곳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바대로 특별히 칭의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칭의였습니다.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셨던 그리스도께서는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그와같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얻고자 노력했으며, 그렇게 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고자 했다고 말해 줍니다. 그리고 지금은 자신은 스스로를 이미 얻은 자로 여기지 않으며 오히려 계속해서 달려가야 할 사람으로 여긴다고 말해줍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믿음의 견인은 칭의의 적합성에 꼭 필요한 것임이 분명합니다. 죄인이 믿음의 첫 행위에서 의롭다함을 얻고 믿음의 견인이 약속된다고 해서 믿음의 견인이 칭의의 적합성에 덜 필요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맨 처음 칭의에서 믿음의 과거 행위를 고려하실 뿐만 아니라 믿음의 미래 행위들에 대한 자기 자신의 약속과 아직까지는 자기 자신의 약속 안에서만 보여지는 자격의 적합함까지도 고려하십니다.
이처럼 믿음 안에서의 견인이 구원에 필요하다는 사실, 곧 단순히 구원의 전반적인 부수물로 필요할 뿐만 아니라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근거를 제공해 주는 대상이 되기 때문으로도 구원에 필요하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성경 구절을 살펴 볼 때 명백한 사실로 보입니다. 저는 그 중에서 서너 개의 성경구절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히 3:6)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히 3:14)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히 6:12)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롬 11:20)
결정적인 칭의의 적합성이 믿음의 첫 행위뿐만 아니라 믿음 안에서의 견인에도 달려있기 때문에 흔히 ‘양심 안에서의 칭의의 표명(表明)’은 믿음의 첫 행위보다는 그 이후에 있게 되는 믿음의 행위들로부터 훨씬 더 많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첫 행위가 칭의와 관련을 갖게 되는 독특한 차이점은 소위 부수적인 차이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첫 행위를 조금이라도 특별하게 고려하시거나 믿음의 첫 행위가 우리 구원의 일에 있어서 특별한 성격의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차이점이 아니라. 시간적인 상황 때문에 즉 시간상 믿음의 첫 행위가 다른 행위보다 먼저 오기 때문에 발생하는 차이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와같이, 참으로 그리스도인다운 행실과 복음적이고 순수하며 믿음있는 순종은 우리의 칭의 사건에 관련되어 있으며 성경도 때때로 그리스도인다운 행실과 복음의 순종에 관하여 그렇게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성경은 그리스도인다운 행실과 복음적인 순종을 일컬어 유일한 구주이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견인하는 믿음의 증거라고 종종 말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에게 연합하고, 그 결과 칭의에 적합성을 부여합니다. 믿음은 그저 싸늘하게 식어 있는 원리로 마음속에 남아있음으로써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면서 존재하고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그렇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순종은, 그것이 참으로 복음적인 순종이며 마음 속에 보내심을 받은 아들의 영으로 이행되는 순종이라면,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와 전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같은 순종은 그 영혼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있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모든 복음적 선행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이룬 선행입니다. 내면에서 우러나오고 영혼의 활동으로 일어나는 모든 복음적 순종의 행위는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영광의 구주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새롭고도 유력한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 2:20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라고 가르칩니다(골 3:17).
한편 칭의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믿음의 첫 행위를 고려하실 뿐만 아니라 장차 견인하는 믿음의 다른 행위들까지도 함께 고려하신다는 사실은 로마서 1:17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히브리서 10장 38-39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순종은 오직 믿음의 증거라는 자격으로만 칭의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 외의 다른 자격으로는 순종은 절대 칭의와 무관합니다.
조나단 에드워드와 설교 (Jonathan Edwards and Preaching)
Frederick S. Leahy/서창원 역
조나단 에드워드의 설교를 읽는 것은 겸손함과 마음을 다 기울이게 하는 경험이다. 비록 차가운 인쇄물이기는 할지라도 그 내용은 우리들의 심성을 관통하는 놀라운 것이다. 신학자요 역사가요 철학자로서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 에드워드의 설교들은 따스하고 설득력이 있는 말씀들이다. 그 설교들은 수용하는 교회들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설교신학임을 입증하는 것들이다. 하나님의 인도 하에 그 설교들은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좋은 열매를 낳게 할 것이다.
1. 에드워드의 설교 방식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그의 설교들은 스타일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강해적이며 신중하게 구성되어 있다. 그의 설교들은 싫증남이 없이 잘 소화되는 것들이다. 그리고 전체로서 성경의 문맥에서 본문이 있음을 본다. 에드워드는 한 번도 한 본문 속에 다른 것을 읽는 법이 없었다. 그의 관심은 말씀을 말씀으로 순수하게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들려지게 하는 것이었다. 거기에 열정과 긴장감, 애원함이 있었다. 그것들은 그의 설교를 듣는 자들에게 설교를 듣고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움직이게 하는 강한 진동을 불러 일으켰다. 강단을 위한 준비만큼 더 큰 일은 없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설교자의 마음이 설교 준비만큼 똑같이 준비되는 것이었다.
에드워드는 그의 설교를 전부 적었다. 그리고 조지 휫필드가 에드워드가 목회한 메사추세츠 주 노스햄프톤에서 설교했을 때까지 원고 그대로 읽었다. 휫필드의 즉흥적인 설교에 상당히 깊은 인상을 받은 에드워드는 간편한 메모를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은 간단한 요약보다는 약간 더 기록된 메모였다. 그는 설교 원고를 단지 읽기만 한다고 오랫동안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노스햄프톤에서 일어난 첫 부흥의 때에 설교 원고를 읽는 것이 이롭지 않은 것이 아님을 입증하였다. 설교할 때 어떻게 설교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령의 기름부음이다. 그것은 예배에 있어서 설교 원고를 읽는 방식을 추천하는 것은 아니었다.
죄인들에게 향한 에드워드의 말씀 적용은 아주 엄격하기 그지없었고 종종 큰 두려움을 느끼게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경건치 못한 자들을 일깨우기 위한 타오르는 열정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설교에 반응을 보이는 자들에게는 용기와 위로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 사도행전 16:29-30 말씀의 설교를 끝맺으면서 에드워드는 그의 청중들에게 다음과 같이 촉구하였다:
하나님께 진지하게 많이 기도하십시오, 그가 여러분의 눈을 뜨게 하시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영광스러운 은총을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사람들의 영혼들은 다 눈이 멀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아름다움과 탁월함을 전혀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의 충분성을 보지 못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구원의 아름다운 사역을 보지 못합니다. 그들이 이처럼 볼 수 없는 상태에 머무는 한 그들의 인생을 그리스도와 함께 마감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 자들의 심령은 알지 못하는 구세주에게 결코 이끌림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에드워드의 감탄할만한 예표론은 흥미진진한 것들입니다. 그 방면에서 그처럼 할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대형(對型,antitype)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와 그의 구속 사역이 성경에 기록된 모든 사건에 예기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2. 에드워드 설교의 생명은 감동을 주는 것이었다.
그의 설교 주제들은 교회 훈육, 천사들의 지위, 기독교의 자선, 사회 관계, 가정 예배, 사단을 쫓아냄, 최후 심판 및 악한 자의 종말, 윤리적 행위, 시간의 고귀함, 기독교인의 순례길, 찬양, 슬픔 및 애도 등이었다. 우리가 에드워드의 설교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구원론에 강조를 많이 하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하나님의 주권, 창조, 기독교 변증론, 윤리 및 전도 등이 강조되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교회의 삶과 개인적인 생활, 불신자든 신자든 그들의 삶을 다루는 것을 그냥 지나친 적이 없었다. 에드워드에게 있어서 좁은 의미의 근본주의 색깔은 전혀 없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나라가 전 인류의 활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칼빈주의적 문화관 및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설교는 구속사의 폭넓은 흐름 속에서 생성이 되었다. 창조로부터 시작하여 새 하늘고 새 땅이 드러날 때까지 구속의 절정을 다루었다. 교회역사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은, 혹은 자기 교회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을 에드워드는 결코 독자적으로 해석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광의의 뜻에서 본 하나님의 섭리하심 가운데서 그 해답을 찾으려고 했다. 역사를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생각은 (교회 생활까지 포함하여) 그것이 축복이든 혹은 징벌이든 오늘날 교회가 부여잡아야 할 필요가 있는 에드워드의 설교의 깊이와 견고함을 가져다 준 비결이었다고 본다. 넓이와 깊이 차원에서 볼 때 에드워드의 설교는 메튜 헨리의 설교와 견줄 수 있다. 그들의 스타일 역시 서로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의 설교는 모든 삶의 유형의 다 포괄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도덕법을 총괄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그는 심지어 교회당에서 조는 것까지도 포함하여 그냥 지나치는 죄는 하나도 없었다. 에드워드는 죄를 두루뭉실 다루는 법이 없었다. 그는 죄악들에 대하여 세세하게 다루었던 것이다.
3. 에드워드의 설교는 교회와 사회에 팽배해 있던 상황의 문맥 가운데서 연구되어져야만 한다.
에드워드는 한편으로 증가하고 있는 알미니안주의와(그는 이단으로 간주했음) 씨름해야 했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목회하고 있는 지역에 사는 젊은이들의 도덕적 방종 씨름해야 했다. 특히 후자에 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이 마을의 젊은이들 사이에 방탕함이 지난 몇 년 사이에 급속히 번져갔습니다. 그들 중에 상당수가 밤늦게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며 종종 술집에 드나들며 추잡한 일들을 벌이고 있습니다...그들은 자주 함께 모여서 음담패설을 일삼으며 환락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일들을 신바람 난 일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종종 밤이 맞도록 그같은 일들을 하며 다닙니다... (놀라운 회심의 이야기들, p. 347)
에드워드는 잘못된 교리와 잘못된 행동은 서로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였음이 분명하다. 그것들은 이미 성경에서 확고히 지적하고 있는 바이며 특히 목회서신들 속에 명백하게 나타나 있는 것들이다. 바울 서신에서 찾아지는 알미니안주의와 부도덕성의 쌍둥이 문제 거리들을 직면한 에드워드는 그것들을 거짓된 가르침과 곁들여서 다루기로 결심한 것이다. 바울 서신에 언급하고 있는 것들이 에드워드 당시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불쾌한 일들을 지적하는데 사용되는 적합한 메시지임을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1734년 가을에 그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설교 시리즈를 설교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날 동일한 악한 일들을 직면하고 있는 우리들 중에 얼마나 많은 분들이 에드워드가 접근한 방식을 취하고 있는가? 그것은 용감한 결단이었다. 그러나 성경적인 방식이기도 하였다. 하나님은 같은 해에 부흥을 보내심으로써 에드워드의 사역을 높이 사셨다. 그 다음 해에 부흥은 노스햄프톤 지역을 넘어서 번져갔던 것이다.
4. 에드워드의 설교 목적은 죄인의 구원함에 있어서 받으시는 하나님의 영광이었다.
이 목적을 위하여 에드워드는 그의 청중들에게 지속적으로 그리스도를 소개하였다. 그는 의도적으로 회심을 설교하였다. 그것이 바로 그의 설교에서 말씀의 적용이 왜 그토록 강렬한 것이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는 죄인들을 어디에도 숨도록 방치하지 않았다. 그는 성령의 검을 가혹하게 휘둘렀던 것이다. 다음의 글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죄인들이라는 그의 유명한 설교에서 발췌한 것이다(이 설교는 1741년 7월 8일 엔필드에서 한 설교로서 엄청난 결실을 얻은 것이었다):
하나님의 진노의 활이 들려졌습니다. 그 화살이 줄에서 당기어질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공의는 이제 여러분들의 심장을 향해 겨냥되고 있습니다. 활이 당기어집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서 그의 진노의 화살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피를 흘리게 하는 일로부터 단 한순간이나마 지켜준다는 어떤 약속이나 의무가 전혀 없이 당겨지는 화살입니다.
에드워드는 그 설교를 다음과 같이 끝맺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밖에 있는 자들은 누구든지 일어나 임박한 진노의 화살을 피하기 바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진노는 의심의 여지가 없이 이 회중의 상당수에게 임하고 있습니다. 소돔성으로부터 달아나십시오. 여러분이 살기 위하여 급히 서두르십시오. 뒤를 쳐다보지 마십시오. 타 없어지지 않도록 산으로 도망치십시오.
5. 에드워드 설교로부터 배우는 교훈들
우리는 그가 하나님의 전 경륜을 충실하게 다 선포하고 있는 사실에 대하여 상당히 감동을 받는다. 그러나 자연인에게 익숙하지 않은 교리를 다룰 때 에드워드는 사람들이 싫다고 해서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이 위협적인 설교를 했다. 우리는 그런 사실을 그가 지옥에 대하여 설교했을 때 여러 번 언급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오늘날 가급적이면 지나치고 마는 현대 설교하고는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요즘은 그런 설교는 상당히 변증적인 방식으로 전달되고 있다. 그렇게 우물쭈물한 태도는 영원한 형벌에 빠질 긴급한 상황에 처해 있는 자들에게는 불충분한 메시지인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한 에드워드의 설교에 나타나는 번개와 천둥소리 뒤에는 그의 회중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안전을 확보하게 되기를 갈망하는 그의 진지한 마음이 있었다. 그의 경고에 메시지는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에 의한 것이었다.
에드워드의 설교들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교리적이었다. 그러나 항상 성경적인 용어들을 사용하였으며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구사하였다. 그는 그의 교리들을 체계적으로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강단에서조차 조직신학자처럼 설교한 것은 아니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교리에 박식했던 칼빈과 닮았다. 그럼에도 그의 설교들은 백성들에게 아주 친밀한 용어들을 사용하였으며 일상생활로부터 사용되고 있는 표현들을 구사한 것이었다. 이 부분에 있어서 우리 주님은 설교자중 황태자로서 완벽한 모범이시다.
에드워드는 그의 설교 본문을 지지하는 모든 성경을 사용하였다. 그는 성경이 성경 해석의 최고 해석자임을 알았다. 그의 설교들은 성경에 대한 그의 박식함을 입증한다. 그러한 지식은 설교자에게 매우 귀중한 것이다. 이점에 있어서 에드워드의 모범적 실제는 계시된 진리 안에서 성경의 조화를 확증시켜줌으로써 그의 설교의 권위를 더해 준 것이었다.
그의 설교를 통해서 우리가 배우는 네 번째 교훈은 윤리로부터 교리를 분리시키거나 행동으로부터 신앙을 따로 분리시켜 설교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추상적인 교리를 설교한 적이 없다. 그러나 다양하게 그가 믿고 있는 교리가 함축하고 있는 것들을 실천사항을 위하여 전달하였다. 이 방면에서 그는 성경적 패턴을 따랐다. 그는 기독교는 삶의 방식임을 알았다. 지로부터의 구원은 즉각적으로 도덕적인 삶의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았다. 이처럼 교리와 삶을 연계시키는 그의 설교방식은 오늘날에도 아주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다. 특히 오늘날 사람들이 그 순서를 반대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즉 경험이 먼저이고 그 후에 교리를 가르치면 된다고 말하고 있는 지금 에드워드의 실천은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다. 그는 바른 순서를 가지고 있었다. 교리가 행위를 규정한다. 성경이 삶의 근본이 무엇인지를 규정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삶이 우리가 고백하고 있는 진리와 일관된 것이 되게 하는 것이다.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것들이 드러나리라”고 기술한 사도 베드로는 바로 이어서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권면하고 있다(벧후 3:10-12). 거기에 보면 교리와 삶이 차레로 연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진리를 알라. 우리는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여야 하는 것이다(요삼 4절)
에드워드의 설교를 연구하는 기독교 목사는 더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는 도전을 받게 될 것이다. 또 설교 준비를 위한 연구를 철저하게 하며 강단을 더욱 사랑하는 열정을 가져야 한다는 도전을 받게 될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실제 하루에 13시간이나 연구에 몰두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이안 머레이 목사는 ‘만일 이것이 한쪽측면에서 볼 때 과다한 것이었다고 한다면 오늘날 현대 기독교 사역의 흐름은 다른 쪽에 과다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것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현대 그렇게 많은 교회의 일들이 별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고 있는지 그 기본적인 이유는 사적으로 영적인 우선권이 무시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Iain Murray, Jonathan Edwards: A New Biography, p. 147
시간이 지나면서 에드워드는 부흥의 기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점차적으로 영적 상황이 기울어 가는 것에 의하여 매우 슬퍼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후퇴는 앞서 일어난 것들에 대한 가치를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다. 에드워드는 부흥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이 부흥을 주시기도 하고 거두시기도 한다. 그는 부흥이 인간의 노력이나 계획에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주권적인 행위로 말미암아 오는 것임을 알았다.
예일 대학교에 있는 Beinecke Rare Book and Manuscript 도서관에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 방문하는 자들을 위해 그 도서관에는 보물이 있다. 거기에서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죄인들’이라는 설교원고를 포함하여 에드워드의 설교 원고들을 열람할 수 있을 것이다. 에드워드는 설교역사와 부흥의 역사에 남는 흥미진진한 연구대상자들 중 한 사람으로 남아 있다. 역사학자 필립 샤프는 그를 ‘미국의 칼빈’이라고 불렀다. 칼빈은 자신을 무엇보다도 설교자로 간주하였다. 다라서 모든 기독교 목사들도 먼저 자신을 설교자로 간주하여야 할 것이다.
한국개혁주의설교연구원『진리의깃발』 64호.
조나단 에드워즈의 결심문
1. 나의 전 생애 동안 하나님의 영광과 나 자신의 행복과 유익과 기쁨에 최상의 도움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하자. 지금 당장 이든지 아니면 지금부터 수많은 세월이 지나가든지 간에 시간은 전혀 고려하지 말자.
내가 해야 할 의무와 인류 전체의 행복과 유익에 최상의 도움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하자. 내가 부딪히게 될 어려움이 무엇이든지 간에 또한 그 어려움이 아무리 많고 크다 할지라도 그렇게 하자.
2. 전에서 언급한 사항을 잘 지키기 위해 도움을 주는 어떤 새로운 수단이나 방법을 찾기 위해 계속적으로 노력하자.
3. 혹시라도 내가 넘어져 점점 무감각해져서 이 결심문 중의 어떤 내용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면, 다시 제정신이 돌아왔을 때 내가 기억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회개하자.
4. 하나님의 영광에 도움되는 것이 아니면 영혼에 관계된 것이든지 육체에 관계된 것이든지 또는 적든지 많든지 간에 어떤 것이라도 절대로 하지 말자. 만일 내가 그런 일을 피할 수 있다면 피하자.
5. 한 순간의 시간도 절대로 낭비하지 말고 그 시간을 가능한 한 최대로 유익하게 사용하자.
6. 내가 살아 있는 동안 힘껏 살자.
7. 만일 내 생애의 최후 순간이라고 가정했을 때, 하기가 꺼려지는 것이면 절대로 하지 말자.
8. 모든 면에서, 즉 말과 행동에 있어서 아무도 나처럼 그렇게 악하지는 않는 것처럼, 또한 내가 다른 사람과 똑같은 죄를 범하고, 똑같은 잘못과 실수를 범한 것처럼 행동하자. 다른 사람의 실패를 나 자신의 잘못을 살피는 계기로 삼고, 나의 죄와 비참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기회로만 삼자.
9. 매사에 나의 죽음과 죽고 난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자.
10. 고통스러울 때는 순교의 고통과 지옥의 고통을 생각하자.
11. 해결해야 할 어떤 신학원리가 있을 때, 만일 상황이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그 문제 해결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즉시로 하자.
12. 만일 내가 교만이나 허영이나 이런 것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어떤 것을 좋아하고 있다면 즉시로 그런 것들을 버리자.
13. 도움과 사랑을 꼭 받아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를 찾기 위해 노력하자.
14. 절대로 복수심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하지 말자.
15. 비이성적인 인간에게는 아무리 사소한 화라도 내지 말자.
16. 절대로 다른 사람을 비방하지 말자. 그렇게 하는 것은 다수간 다른 사람을 불명예스럽게 하는 것이며, 실제로 아무런 유익이 없기 때문이다.
17. 내가 죽게 되었을 때, '그 일을 했었으면 좋았을 텐데'하고 바라는 것처럼 그렇게 살자.
18. 내가 최고로 헌신한 상태일 때, 그리고 내가 복음과 천국에 대해서 가장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 그때 내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언제나 그렇게 살자
19. 마지막 나팔 소리를 듣기 전, 최후의 한 시간도 남지 않았을 때라고 가정하고 그 때 하기가 꺼려지는 것은 절대로 하지 말자.
21. 먹고 마시는 것은 엄격하게 절제하며 살자.
22.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나의 힘, 능력, 활력, 열심, 적극성을 다하여 가능한 한 천국에서 많은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하자.
2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닌 것 같이 생각되는 일을 할 때는 매우 신중하게 행하자. 그리고 그 일의 원래 의도와 계획과 목적이 무엇인지 원인을 파악하자. 만일 그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일을 '결심문4'를 어기는 것으로 간주하자.
24. 내가 어떤 현저한 나쁜 행동을 할 때마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철저하게 추적하자. 그런 다음 더 이상 그런 행동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자. 또한 나쁜 행동의 원인이 되는 것과 내 힘껏 싸우도록 하자.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드는 일이 무엇인지를 조심스럽고도 지속적으로 찾아내자. 그런 다음 내 모든 힘을 다해 그것과 싸우자.
25.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드는 일이 무엇인지를 조심스럽고도 지속적으로 찾아내자. 그런 다음 내 모든 힘을 다해 그것과 싸우자.
26. 내 구원의 확신을 약화시키는 것들을 발견하면 버리자.
27. 절대로 고의로 어떤 일을 태만하게 하지 말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태만은 예외지만, 자주 내 태만을 점검하자.
28. 성경을 아주 꾸준하게 지속적으로 자주 연구하자. 그렇게 해서 깨닫고, 쉽게 이해한 지식을 바탕으로 자라가자.
29. 절대로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것이라고 바랄 수 없는 것을 기도라고 생각하거나 기도로 인정하거나 기도의 간구라고 하지 말자. 또한 하나님께서 받아주실 것이라고 바랄 수 없는 것을 죄 고백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30. 지난주보다 신앙과 은혜를 실천하는 삶이 더 나아지도록 매주 노력하자.
31. 결코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어떤 말을 하지 말자. 그러나 성도의 명예를 아주 실추시키거나, 인류에 대한 사랑을 아주 저해하는 것에 대한 비난은 정당하다.
32. 잠언 20장 1절에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랴'라고 기록된 것이 나에게 해당하는 말이 되지 않도록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내 신념에 충실하자.
33. 다른 면에서 지나친 손해가 생기지 않는다면 언제나 평화를 만들고 평화를 유지하고 평화를 지키는 방향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도록 하자.
34. 이야기하면서 어떤 사실에 대해서 말할 때는 반드시 참되고 단순한 진실만을 말하자.
35. 내가 지킨 의무에 대해서 의심이 많이 생길 때마다 그 일로 내 마음의 고요함과 평안함이 깨어지면 의문 사항들을 기록하고 그 의문을 풀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자.
36.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나쁘게 말하지 말자. 단 그렇게 하는 것이 잘했다고 말할 수 있는 어떤 특별한 경우는 예외다.
37. 매일밤 잠자리에 들기 전 내가 게으름을 피웠는지,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내 가 자신을 부인했는지 등에 대해서 자문해 보자. 또한 매주 말, 매월 말, 매년 말에도 그렇게 하자.
38. 일에는 절대로 농담이나 우스개 소리를 하지 말자
39. 절대로 합법성에 의문이 많이 제기되는 일을 하지 말자. 동시에 그런 일을 하고 난 후에는 그 일이 합법적인 것인지 아닌지를 생각하고 조사하자, 또한 만일 내 가 어떤 일을 하지 않는 것이 합법적인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는 일도 마찬가지다.
40. 매일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먹고 마시는 일에 있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는지 자문해보자.
41. 매일, 매주, 매달, 매해의 마지막에 어떤 면에서 더 낫게 행동할 수 있었는데 그렇지 못했던 것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자문해 보자.
42. 세례 받을 때 하였고, 성찬식 할 때 진지하게 하였던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종종 새롭게 하자. 그리고 오늘 1월 12일 나는 진지하게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새롭게 하였다.
43. 오늘부터 죽을 때까지 내 인생이 나의 것인 양 행동하지 말고 전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하나님의 것인양 행동하자. 토요일에 깨달은 것과 일치하게 행동하자.
44. 다른 어떤 목적도 아닌 신앙만이 나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도록 하자. 신앙적인 목적이 아니라면 어떤 환경 속에서도 행동하지 말자.
45. 신앙에 도움되는 것이 아니면 그 어떤 것에도 절대로 쾌락이나 고통, 기쁨이나 슬픔 등을 느끼지 말자. 어떤 감정도, 조금의 감정도 품지 말자. 그리고 그런 것과 관련된 어떤 환경도 만들지 말자.
46. 부모님에게 어떠한 걱정이나 심려도 끼쳐 드리지 말자. 가능한 한 말이나 눈동자에 전혀 내색을 하지 않도록 해서 그런 결과가 생기지 않도록 하자. 그리고 특히 가족 중의 누구에 대해서도 존경심을 가지고 그렇게 하도록 조심하자.
47.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선하고, 보편적으로 부드럽고, 친절하고, 조용하고, 평화롭고, 만족하고, 편안하고, 자비롭고, 관용적이고, 겸손하고, 온유하고, 순종적이고, 의무를 다하고, 부지런하고 근면하며, 자애롭고, 침착하고, 인내하고, 절제하고, 용서하고, 진지한 성품에 도움되지 않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하지 말자. 그리고 항상 이러한 성품이 되도록 하자. 그리고 매 주말마다 내가 그렇게 실천했는지 여부를 엄격하게 점검하자.
48. 내가 참으로 그리스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그렇지 않는지를 알기 위해서 그리고 내가 임종의 순간에 이 문제에 대해서 회개할 무관심의 죄를 조금 도 짓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아주 세밀하고도 부지런하게 그리고 가장 엄격하게 내 영혼의 상태를 조사하도록 하자.
49. 만일 내가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수만 있다면 절대로 그런 잘못을 하지 않도록 하자.
50. 내가 내세에 들어갔을 때, 그렇게 한 것이 최선이었고, 가장 지혜로운 것이었다고 판단하게 될 것처럼 그렇게 행동하도록 하자.
51. 죽을 때 내가 뒤를 돌아보면서 '이런 일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하고 생각하는 것처럼 모든 면에서 그렇게 하자.
52. 나는 종종 노인들일 자기가 인생을 다시 살 수만 있다면 어떻게 살겠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된다. 그러므로 내가 노인이 되었다고 가정했을 때, 그때 가서 '내가 이런 일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하고 생각되는 바로 그런 일들을 하자.
53. 내가 가장 기분이 좋은 상태일 때 모든 기회를 이용해서 내 영혼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 던지고 맡기자. 주님을 신뢰하고 의뢰하자. 완전히 주님께 헌신하자. 이로써 내가 나의 구속주를 알므로 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54. 어떤 사람을 칭찬하는 내용을 들을 때마다 나도 그런 칭찬 받을 만한 일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되면 그 일을 본받도록 노력하자. 1723년 6월8일
55. 이미 천국의 행복과 지옥의 고통을 맛본 사람처럼 행동하도록 최선을 다하자.
56. 아무리 내가 실패하더라도 내 안에 있는 부패와의 싸움을 절대로 포기하지도 말고 조금도 긴장을 풀지도 말자.
57. 불행과 불운에 대한 염려가 생길 때, 내 의무를 다했는가를 돌아보고 의무를 다 하도록 결심하자. 그리고 그런 사건들이 일어난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자. 할 수 있는 한 나는 내 의무와 내 죄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자.
58. 대화를 나눌 때 불쾌하거나 초조하거나 화를 낸 표정을 짓지 말고 사랑스럽고 즐거우며 친절한 모습을 보이도록 하자.
59. 나쁜 성질과 분노가 가장 많이 치밀어 오르려고 할 때, 가장 많이 노력해서 좋은 성격이 드러나도록 행동하자. 그렇다. 그럴 때 비록 다른 측면에서 불이익이 있을 수도 있고, 다른 때는 경솔하게 될 때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좋은 성격을 드러내도록 하자.
60. 감정이 극도로 불안정하게 되기 시작할 때마다 내 마음속에 아주 불편한 마음이 생기거나 감정이 밖으로 일관성 없이 표출될 때는 내 자신을 엄격하게 검사해 보자.
61. 핑계가 무엇이든지 간에- 사실 게으름은 핑계 거리를 만들도록 하는 경향이 있지만- 신앙에 온전하게 집중하지 못하도록 내 생각을 흐트러뜨리고 풀어지게 하는 게으름에 빠지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62. 결코 어떤 일을 의무감으로만 하지말고, 에베소서 6:6-8에 따라서 기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자. 어떤 사람이 어떤 선한 일을 하든지 간에 그는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것이라는 것을 알자.
63. 어떤 순간에도 모든 측면에서 인격의 어떤 부분이나 어떤 환경 하에서도 언제나 성도다운 참 빛을 비추며, 탁월하고 사랑스럽게 행동하는 참으로 완벽한 성도가 세상에 단 한 명 있다고 가정할 때, 만일 내가 그 한 사람이 되기 위해 내 힘껏 노력한다면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처럼 행동하자.
64. 바울 사도가 말하는 '말할 수 없는 탄식'과 시편 기자가 시편119:20에서 말하는 '주의 규례를 항상 사모하는 마음'이 내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있는 힘을 다하여 이것들을 향상시키도록 하자. 또한 나의 소원을 아뢰기 위해 간절히 노력하는 것이 약해지지 않도록 그리고 그러한 열심을 반복적으로 내는 것이 약 해지지 않도록 하자.
65. 전 생애 동안 이것을 있는 힘을 다해 연습하자. 즉 맨톤 박사의 시편 119편 설교에 따라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 열린 마음을 가지고 나의 모든 죄와 유혹과 어려움과 슬픔과 두려움과 희망과 소원 그리고 모든 것과 모든 상황 속에서 나의 길을 하나님께 맡기면서, 나의 영혼을 하나님께 열어 놓자.
66. 어느 곳에서나, 어느 누구에게나 말이나 행동에 있어서 항상 친절한 태도와 분위기를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자. 의무상 다르게 행동해야 할 때는 예외다.
67. 고난 후에는 고난으로 인해 내가 더 나아진 점이 무엇인자. 어떤 유익을 얻었는지, 또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를 묻도록 하자.
68. 약점이든지 죄이든지 간에 내 안에서 발견되는 모든 것을 나 자신에게 솔직히 고백하자. 만일 그것이 신앙에 관련된 것이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필요 한 도움을 간구하자.
69.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볼 때, 나도 저렇게 했으면 하는 것들을 항상 행하도록 하자.
그리스도인의 지식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히5:12).
이 말씀은 사도가 히브리 그리스도인에게 나타낸 불만의 말씀입니다. 그들에게서 마땅히 기대될 만한 종교의 교리와 비밀들을 아는 문제에 있어서 성숙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불만을 나타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가르침 받은 것들을 친숙하게 아는 것에 있어 진보하지 못하였다고 말입니다. 마땅히 그들은 그런 면에서 진보를 보였어야 했습니다.
그가 그들을 질책하는 것은 단순하게 신적인 것들을 아는 ‘신령하고 체험적인’ 지식에 있어서도 부족하였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학의 진리들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도 부족함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도가 진리들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도 부족함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도가 이 책망의 표현을 도입하는 방식을 통해 명백하게 보여지는 바입니다.
그 질책을 도입하는 방식은 이러합니다. 우리가 다루는 본문 바로 앞 구절에서 사도는 그리스도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상으로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자’로 지칭합니다. 구약의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멜기세덱은 그리스도의 탁월한 모형으로 제시됩니다.
구약의 멜기세덱에 관한 기사에 복음적인 비밀들이 많이 발견됩니다. 사도는 이 비밀들을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지적해 주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지식이 연약함으로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 할 것임을 사도는 알았습니다. 그래서 멜기세덱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잠깐 멈추고,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가 어려우니라.”(11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을 풀이하면, 사도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곧, “멜기세덱에 관한 것 중에는 복음의 놀라운 비밀들을 내포하고 있는 것들이 많다. 만일 내가 너희를 향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면 그것들을 주목하게 할 것이다. 내가 염려하는 것은 너희가 이러한 것들을 이해하는데 둔하고 더디어서 멜기세덱에 대한 내 강론이 너희를 혼란케 하고 어리둥절한 만들어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하리라는 점이다. 그것이 너희에게는 단단한 식물 같아서 너무 어려울 것이라고 걱정하고 있다.”라고 말입니다. 그러하기에 본문 말씀을 생각해 봅시다.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먹을 자가 되었도다.”
이 말씀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너희가 그러한 비밀을 능히 이해하고 소화해낼 정도로 성경을 충분하게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정작 알고 보니 그렇지 않구나.”
사도는 그들이 ‘인간적인’ 가르침에 의해 전달되는 지식과 같은 일에 있어서 숙달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이 표현을 보면 그러합니다.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터인데.”라는 말씀은 진리와 종교적인 비밀에 대한 실천적이고 체험적인 지식뿐 아니라, ‘교리적인 지식’을 포함하는 이야기입니다.
자라지 않는 걱정스런 어린 아이들
다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신적인 것에서 보다 추상적이고 난해한 것들을 이해하는 능력을 갖게 하는 그러한 지식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질에 속한 것들은 큰 기술을 요합니다. 다음의 두 구절에서 그 점이 보다 더욱 충분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신앙의 초보 원리에서 발전하게 만드는 바 지식과 연단입니다.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라고 한 말씀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히브리서 다음 장 초두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초보를 버리고…완전한데 나아갈지니라.”라고 충고합니다.
이러한 부족함이, 그들이 신앙을 가진 기간에 합당하게 ‘성숙하지’ 못한 사실에서 드러남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연륜으로 따지면 마땅히 선생이 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므로 그들의 할 일은 그리스도인다운 지식을 배우고 획득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배우는 자들이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마땅한 바대로 시간을 배움에 잘 활용하였으면, 사도가 이 편지를 쓸 때쯤 해서는 마땅히 이 학교에서 선생이 되었을 것입니다.
어느 누가 어떤 일에 종사하든지, 배우고 자신을 온전케 하기 합당하게 들여진 시간에 비례하여 온전하게 될 것은 아주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언제나 어린 아이의 자리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있어서 자라야 합니다. 어린 아이가 먹는 연한 것을 버리고 질긴 고기도 소화해 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교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신학의 지식에서 자라나는 일에 진력하여야 합니다. 이는 실로 신학생들과 교역자들의 임무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고 다른 교훈적인 책들을 연구하여 지식을 획득하는 일이 그들의 일로 여겨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 일을 다른 이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오직 그들에게 일임된 사항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도가 이 개념을 염두에 둔다면,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이 선생이 되기에 충분한 지식을 갖추지 못한 일로 나무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니면, 사도는 이런 일을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수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었거나, 이런 일들을 위해 많은 시간을 바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다면, 그들이 배우는 데 소요된 연륜에 합당하게 지식에서 자라지 못한 일로 책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 주제를 다룸에 있어서 저는, ‘신학’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신학이 어떤 유의 ‘지식’을 의미하는 것인지, 어째서 신학적 지식이 필요한지 그 ‘이유’를 제시해 드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지식에서 ‘자라기’ 위하여 진력하여야 하는지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Ⅰ. 그리스도인의 지식의 대상으로서의 신학이란 무엇을 말함인가
이 주제에 대해서 다룬 이들마다 이에 대해 여러 가지 다양한 정의를 내렸습니다. 저는 지금은 원칙적으로 가장 정확한 정의가 어느 것인지 따져 보려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신학의 개념에 가장 합당하다고 생각되는 쪽으로 초점을 맞추어 정의하고 묘사하겠습니다. 신학은 종교(물론 여기서는 참 유일한 종교인 우리 복음적인 기독교를 일컬어 말함-역자주)의 큰 임무에 관련된 모든 진리들과 모든 원칙들을 다 함축하는 학문, 또는 교리입니다.
각각의 목적에 따라 학교에서는 다양한 예술과 학문을 가르칩니다. 철학과 같이 일반적으로 본질에 속한 일들을 연구하는 학문도 있습니다. 천문학과 같은 눈에 보이는 하늘에 관하여 연구하는 학문도 있습니다. 아니면, 해양학과 같이 바다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도 있습니다. 지리학과 같이 땅을 연구하는 학문도 있습니다. 논리학과 영물학(靈物學)과 같이 사람의 영혼을 연구하되, 그 힘과 여러 자질들을 연구하는 학문도 있습니다. 정치학이나 법학같이 인간을 다스리는 문제를 다루는 학문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모든 것보다 우선하는 학문, 그런 유의 지식과 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과 종교의 큰 임무에 관한 것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신학은 다른 학문같이 인간의 본성적인 이지의 계발로 인하여 배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가르칠 목적으로 우리에게 주신 바 교훈이 가득한 책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 책은 이런 유의 지식을 탐구하는 데 길잡이로 하나님께서 주신 원칙입니다. 또한 이런 성질에 속한 것으로 우리가 알기에 필요한 모든 것의 요약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실로 ‘자연 종교’라고 불리워지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관해서나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의무에 관해, 자연의 빛으로 명백하게 나타나는 진리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소위 ‘기독교 신학’이라고 불리우는 것은 자연의 빛으로 분명해 지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계시(啓示)에 의존합니다. 타락한 상태에 있는 우리의 조건 때문에 하나님에 관하여 우리가 알 필요가 있으면서도 필요한 방식을 따라서 자연의 빛으로 분명해 지는 것이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
지식의 원천은 절대적으로 성경이다
신학의 진리를 아는 지식이 어떤 방면에서도 복음적 체계에 속하지 않거나 중보자와 관련되지 않으면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자연의 빛은 신학의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진리의 어느 부분이라 할지라도 자연의 빛으로 그걸 아는 지식에 이르게 된다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기독교 신학을 가르쳐 주는 것은 오로지 구약과 신약을 다 포함한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기독교 신학은 성경에서 가르쳐진 모든 것을 다 포함합니다. 그처럼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에 관하여,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에 관하여,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의 행복에 관하여 우리가 알 필요가 있거나, 아니면 알려진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일반적 신학은 ‘하나님을 향한 삶의 교리’라고 정의됩니다. 보다 정확하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을 향한 삶의 교리’라고 저의하기도 합니다. 기독교 신학은 예수님 안에 있는 모든 교리들을 전폭적으로 포함하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영위하는 삶의 지도하는 모든 기독교 법칙들을 포함합니다. 그리스도인과 성도의 생활과 전혀 관계가 없거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삶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교리나 약속이나 법칙은 기독교 신학에서 제외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학에 포함된 교리들과 원칙들은 두 방면에서 이런 우리의 삶과 관련됩니다. 곧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삶을 촉진하는 경향을 가진 것이고, 다른 방면에서는 이후 내세에서 하나님을 충만하게 누리는 완전하게 거룩하고 행복한 삶을 우리에게 떠올려 주는 경향이 있습니다.
Ⅱ. 교리란 어떤 유의 신학 지식을 말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지식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사색적(思索的) 지식’과 ‘실천적 지식’입니다. 다른 차원에서 말한다면, ‘본성적 지식’과 ‘신령한 영적 지식’입니다. 전자(前者)는 머리에서만 머무는 지식입니다. 이해력의 기능만이 관련된 지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지식은 종교에 속한 것들에 대한 본성적이나 이성적인 지식으로 이루어지고, 아니면 하나님의 특별한 비춤이 없이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여러 기능들을 본성적으로 행사하여 얻어지는 지식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후자(後者)의 경우 머리에서나, 아니면 사물들에 대한 사색적인 개념에만 안주하지 않고, 마음도 관계하는 지식입니다. 그것은 주로 마음의 의식을 내용으로 합니다. 의지나 의향이 업는 단순한 이지(理智)는 그 지식의 좌소(座所)는 아닙니다. 또한 그 지식을 단순히 보는 것이나, 느낌이나 취향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포함된 교리에 대한 바른 사변적인 개념을 갖는 것과, 마음으로 그 교리에 합당한 지각을 갖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전자는 그 교리에 대한 사변적인, 또는 본성적인 지식을 내용으로 하고, 후자는 영적이거나 실천적인 지식을 내용으로 합니다.
이 두 국면은 교리에서 서로 배타적인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실천적인 혹은 영적인 지식을 ‘위하여’ 사색적인 지식을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후자, 혹은 영적이고 실천적인 지식이 가장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지식인 없는 사색적인 지식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사색적인 지식은 있는데 영적인 지식이 없으면, 우리의 정죄를 더 크게 할 뿐입니다. 그러나 사색적인 지식이 없이는 영적이고 실천적인 지식을 가질 수가 도저히 없다는 의미에서 무한하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영적 지식을 위해 사색적 지식도 갖추어라
저는 이미, 사도가 영적인 지식에 대해 말할 뿐 아니라 두 가지 지식 사이에 상호 교통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는 지식에 대해서도 말한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사색적인 지식을 완전히 배제한 채, 오직 영적인 지식만 생각하고 있었다고 여겨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그는 히브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영적 지식을 가지기 위해 사색적 지식을 가질 것을 촉구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색적인 지적 지식을 가장 ‘직접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독서를 통해서나 다른 합당한 방편을 통해 신학에 대한 올바른 ‘이성적인 지식’을 추구할 의도로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반면에 영적이고 실천적인 지식은 ‘간접적’인 방식으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지적인 지식의 인도를 받아서 구해야 하는 것이 그 영적이고 실천적인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가 봅시다.
Ⅲ. 신적 진리를 아는 지식의 유용성과 필연성
아무리 유익을 줄 수 있는 방편이라도 지식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는 유익을 끼칠 수가 없습니다. 배움이 없는 가르침은 다 허사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설교할 때 이지(理智)에 지식을 전해 주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 안에서 선생들의 반열에 들게 하신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르침을 통하여 이러한 지식을 전혀 얻을 수 없다면 그들이 가르치는 것은 헛된 것입니다.
그들의 가르침과 설교가 은혜의 방편이고 듣는 자들의 마음에 선한 것을 준다 해도, 지식을 전달하여 이해를 돕지 못한다면 설교하여 듣는 이에게 아무런 유익을 끼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는 방언으로 설교하는 것은,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설교하는 것으로는 전달되지 못하는 것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차이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설교하는 것은 아무런 유익을 끼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아무것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 지식도 전해 주지 못하면 아무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 지식도 전해 주지 못하면 아무도 덕 세움을 입지 못합니다. 고린도전서14:2-6절에서의 사도의 논증과 부합하는 이야기입니다.
지식을 전달해 주지 못하는 말은 은혜의 방편이 될 수 없습니다. 지식을 전해 주지 못하는 말은 은혜의 방편이 될 수 없습니다. 지식을 전해 주지 못하는 그러한 말은 마치 아무도 없는 허공에 대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은 점을 지적한 고린도전서 14장 6-10절에서 그런 논리가 따라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이성적인 존재로 다루고 계십니다.
믿음을 행사한다 함은, 자기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마음을 기울인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있어서 드는 일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듣는 일은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롬10:14)
지식이 없는 사람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전혀 알지 못하는 대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의 성질에 합당한 일이 아닙니다.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대상에 마음을 기울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영혼으로 하여금 사랑하도록 매력을 주는 이유들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마음에 합리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기 전에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경은 여러 가르침으로 가득한 책입니다. 그러나 이 책이 이지에 어떤 지식을 전달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아무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만일 성경이 우리가 한 마디도 알아 볼 수 없는 이상한 나라의 말로 기록되어 있다면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될 수 없습니다.
복음의 성례전이 어떤 지식을 전달해 주지 않는다면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성례들은 눈에 보이는 표지들로 인하여 어떤 것을 주지 못한다면 그 표지란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해의 문을 열지 않으며, 알아야 하는 대상이 마음에 좌정할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 사람의 본질입니다.
교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이가, 그 교리의 탁월성과 진리성을 안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합니다. 사람이,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해 어떻게 행하셨는지를 먼저 듣고 이해하기 전에는, 그런 일을 행하신 그리스도의 놀라운 탁월성과 사랑을 알 수 없습니다. 먼저 그런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신적 진리의 관대함과 탁월성을 알 수 없습니다.
신학에 있어서 지식이 없다면 가장 무지하고 야만적인 이교도들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이교도들은 가르침을 받지 못하여 신적 진리를 아는 지식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여전히 극심한 흑암에 남아있는 것입니다.
만일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아는 지식을 전혀 갖지 못하면, 그들 속에 있는 이성의 기능은 전적으로 허사일 것입니다. 이성과 이해의 기능은 ‘실제적인’ 이해와 지식을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만일 실제적인 지식을 전혀 갖지 못한다면, 아는 기능과 능력은 그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그리고 만일 실제적인 지식을 갖는다 해도, 자기 존재의 궁극적인 목적을 아는 지식이 모자라면 여전히 그의 이성의 기능은 헛된 것입니다.
사실, 인간에게 짐승보다 더 큰 지혜를 주신 것은 바로 그것들을 이해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을 헛되게 만든다면 사람이기보다 짐승이라고 하는 게 나을 것입니다. 신적인 주제들은 우리에게 주어진 이성의 기능으로써 알아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것들은 우리 존재의 목적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큰 임무를 위해 지은 바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지식을 가지는 것보다 자기의 이해의 기능을 선하게 사용하는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런 유의 지식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밖의 지식들도 매우 유용할 수 있습니다. 즉 천문학이나 자연 철학, 그리고 지리학과 같은 학문도 그들 나름으로 매우 탁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신학을 아는 지식은 모든 다른 학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고 유용합니다.
Ⅳ.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신학을 아는 지식에 자라기 위해 진력해야만 하는 이유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이 이미 얻은 신학 지식만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구원을 얻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최소 분량의 지식만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 지식에서 자라나려는 마땅한 노력이 마치 부수적인 것인 양 취급당해서는 안됩니다. 아예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 일을 의무로 삼아야 합니다. 그들은 그 일을 하루의 일과로 여겨야 하며, 일과의 어떤 작은 부분으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자기들의 높은 소명의 아주 상당한, 그리고 중요한 부분으로 생각하고 이 일을 위해 진력해야 합니다. 이제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짐승과 다르게 창조되었기에
우리의 임무란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를 짐승들과 구별되게끔 부여해 주신 기능들을 올바르게 활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야수들보다 더 우월한 기능들을 부여받은 이유는, 우리가 더 우월한 일을 행하도록 지음 받았다는 데 있습니다.
창조주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그 목적과 의도는 짐승을 창조하신 목적과 의도보다 훨씬 높은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조주께서는 우리에게 더 탁월한 기능들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의심할 것 없이, 그런 우월한 기능들을 계발하는 것이 우리가 할 상당한 임무여야 합니다. 우리가 짐승들과 크게 구별되는 것은 이해의 기능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그 기능을 유익하게 활용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임무여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우리가 이 기능을 계발하는 일을 ‘부수적인 일’로 여기면, 사실상 그 이해의 기능 자체를 ‘부수적인 기능’으로 만드는 격이 되고 맙니다. 이렇게 말해도 좋을지는 모르지만, 그 기능을 다른 기능들보다 덜 중요한 것으로 취급하는 일이 됩니다. 사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능들 중에서 가장 높은 기능인데도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이 지성적인 기능을 실제적이고도 능동적인 지식을 얻는 일에 활용하지 않는다면, 달리 그 기능을 활용하여 계발하는 일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일을 자기들의 일로 그다지 크게 여기지 않고, 또 지식을 얻기 위해 자기들의 이해력을 계발하지 않는 이들은, 열등한 기능에 자신들을 가장 크게 드리는 자들입니다. 즉 자기들의 감각을 즐겁게 하거나, 자신들의 욕구들을 만족시키는 쪽으로 자신들을 드리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답지 않게 처신할 뿐 아니라, 마치 자기들이 사람인 것과, 하나님께서 이해력을 주심으로써 자기들을 짐승보다 더 높게 세우신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것같이 처신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짐승과 공통되는 것들도 주셨습니다. 인간의 외면적인 감각들과 몸의 소욕들, 몸을 즐겁게 하는 능력들이나 아픔을 느끼는 지각, 그리고 다른 동물적인 기능들이 그런 것들입니다.
배우지 않으면 짐승이 된다
어떤 경우에는 짐승들보다 더 우월한 것들을 주셨습니다. 그런 것들 중에서 제일되는 것은 이해와 이성의 기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탁월한 기능들이 짐승들의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열등한 기능들에 복속되라고 주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큰 논란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을 짐승들의 종이 되게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열등한 능력들을 아울러 주신 것은 사람의 이해의 기능에 복종적으로 활용되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지식을 얻음으로써 인간의 이해력을 활용하는 것이 사람이 해야 할 일의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신적 지식이나, 신학에 속한 것들을 아는 지식을 얻는 데 이해력을 활용하는 것을 자기 일의 주요 여겨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아는 지식이 이 기능의 주요한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이해의 기능을 주신 것은 주로 신적인 것들을 이해케 하려 하심입니다.
지혜가 많은 이교도들도 사람의 주요한 임무는 자기 이해력을 활용하고 행사하는 것이라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해력이 [동양철학에서는 이 기능을 오성(五性)이라고 칭함-역자주] 가장 주요하게 어떤 대상을 향하여 활용되어야 하는지를 몰랐습니다. 그들 지혜로운 이교도들 중 많은 이들이 이 기능을 가장 크게 사용한 학문은 철학이었습니다. 따라서 철학을 연구하는 것을 자기들의 제일 되는 임무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빛을 누리는 우리는 더욱 복됩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어둠 속에 그냥 버려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적 가르침으로 충만한 책을 주셨으며, 모든 이성적인 피조물들이 자기들의 이해력을 제일로 활용해야 하는 영광스런 많은 대상들을 제시하여 주셨습니다.
이 가르침들은 능력이나 조건이 다 다른 모든 인격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또한 학식이 있는 자들뿐 아니라 배웠든 배우지 못하였든, 남자든 여자든, 젊은이든 노인이든 모든 유의 사람들이 연구하기에 적당한 교훈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에 대하 지식을 얻는 것은 성경을 누리는 이점을 가진 모든 자들의 주요한 임무여야 합니다.
2. 학문적 대상으로 탁월하기에
신학의 진리에는 최고의 탁월성이 있습니다. 그 진리에 대한 지식을 아는 일에서 자라나려고 모든 이들이 힘쓸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 진리들은 다른 학문들 안에서 다루어지는 것들보다 훨씬 높되, 하늘이 높음과 같습니다. 영원한 삼위(三位)이신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 학문의 제일 되는 대상이십니다. 그 다음이 신인(神人)이시요, 중보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 하신 영광스러운 구속의 역사가 이 학문의 제일 되는 대상입니다.
그 일은 역사 속에서 행해진 여러 일 중에서 가장 영광스런 일입니다. 그 다음 복음 안에서 약속된, 하늘 세계에 속한 일들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게 된 영광스러운 영원한 기업이 또한 신학의 대상이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도리와 우리 자신이 천사들과 같이 될 수 있는 방식, 우리의 분량에 맞게 하나님과 닮게 되는 방식 등이 신학의 대상들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거룩한 족장들과 선지자들과, 사도들과, 이 세상에 살았던 이들 중에서 가장 탁월한 자들의 연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또한 하늘에 있는 천사들의 연구의 주제이기도 합니다(벧전1:10-12). 그것들은 지극히 탁월하고 가치 있어서 그것들을 아는 지식은 부지런히 찾는 수고와 고통과 노력에 대한 풍성한 대가가 될 것입니다. 만일 금이나 진주와 같은 큰 보배가 있어 누구나 다 주워서 모을 수 있는 대로 가질 수 있는 처지라면, 그 일이 다 끝날 때까지 그 보배를 주워 모으는 일을 아예 일삼아 한다고 해서 누가 가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에 들어있고, 할 수 있다면 최대한 많이 가질 수 있게 공급되어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보배는, 금이나 진주보다 훨씬 더 부요한 것입니다. 전 세계에 퍼져있는 모든 유의 사람들이 부(富)를 끌어 모으는 데 얼마나 분주한가요! 그러나 이 지식은 세상 모든 유의 사람들이 그렇게 열심히 힘들여 찾는 보배보다 훨씬 더 나은 유의 부요입니다.
3. 만인에게 보편적으로 관련되기에
하나님의 진리는 교역자들에게만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무한한 중요성을 가진 것입니다. 신학의 교리는 철학이나 다른 학문들의 이치와 같지 않습니다. 다른 학문들은 일반적으로 사색적인 요점으로 인간 생활에 전혀 관련이 없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알든지 모르든지 그것은 우리들의 세상적인 관심거리나 영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별반 차이를 가져오지 않습니다.
철학자들은 그런 문제들에 대하여 서로 의견을 달리 합니다. 어떤 이는 이런 의견을, 다른 이는 저런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이 그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뜨거운 논란을 벌이고 있는 동안에 다른 이들은 이런 일들에 대하여 무관심하여 그들이 서로 논쟁을 하도록 내버려둡니다. 이가 옳든 저가 옳든 그것은 그들에게 별로 큰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신학적 지식은 모든 성도에게 필요
그러나 신학의 문제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신학의 교리들은 모든 이들에게 다 관련이 있습니다. 신학의 모든 사람의 영원한 구원과 행복에 관련된 것들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이런 문제들은 교역자들이나 신학자들에게 맡기자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 문자, 그런 문제들이 우리에게는 관계가 없다.”라는 식으로 일반인들이 말할 수 없는 까닭은 신학 교리들이 개별의 사람들에게 무한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본질, 속성, 실재(實在) 등에 관련된 교리들은 모든 이들만이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무한하게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지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거동하며 있느니라.”라고 말한 것처럼 그분은 만유의 주가 되시며, 우리 모두는 그분으로 말미암았습니다. 그분은 우리 존재의 궁극적 목적이시며, 우리 행복의 오직 유일한 원천이십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중보, 성육신(成肉身), 생애, 죽으심, 부활하심과 승천, 아버지 보좌의 우편에 앉으심, 대언의 기도를 하심 등에 관한 교리들은 신학자만이 아니라 모든 일반인들에게 무한한 관계를 가진 것입니다. 일반인들도 이 구주를 필요로 하되 교역자들과 신학자들만큼 필요로 하며, 교역자들과 신학자들만큼 구주의 인격과 직무와 행하시고 고난 받으신 일들에 관계됩니다.
죄인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 교회에 대해서도 역시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죄인이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의 효력에 참예하게 되는 것에 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다 동일하게 그 모두에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이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을 동일한 필요성을 가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 모두가 자연적인 상태에서는 당할 수밖에 없는 영원한 멸망은 그와 동일하게 모든 이에게 있어서 무서운 참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마음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에 관한 교리들 중, 유효한 부르심과 성화에 구속의 효력을 적용시키는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도 모든 이들이 다 동일하게 관계됩니다.
4. 세상 학문과 성별하셨기에
우리는 같은 입장에서, 이런 문제에 대하여 우리를 가르칠 양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근거로 논증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학문의 경우는 우리 자신에게 일임하여 주셨습니다. 다시 말한다면 이성의 빛에 따라서 행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신적인 일들은 우리들에게 더욱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불확실한 안내자를 따라가게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이 문제들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계시를 주셨고, 여러 세대에 걸쳐 성령으로 직접 감화를 받은 선지자들을 일으키셨고, 기존의 자연법칙을 벗어나 헤아릴 수 없는 이적들과 기사들로 그들의 메시지들을 확증시켜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일련의 여러 선지자들을 일으키시고, 그 일련의 선지자들의 사역이 여러 세대 동안 견지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족속들과는 달리 이스라엘을 참으로 놀라운 방식으로 구별하시고 보전하시되,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맡기시고,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이 세상에 전달되게 하신 것은, 다분히 그런 목적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흔히 천사들을 보내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가르침을 전달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친히 이적적인 상징들을 나타내시거나 당신의 임재를 여러 모양으로 나타내시기도 하셨습니다.
이제 이 마지막 날에는 당신 자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모내시되, 위대한 선지자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는 선지자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학의 총채를 포함하고 있는, 신적 가르침의 책인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일들을 행하신 것은 교역자들이나 학식이 있는 자들을 가르치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모든 유의사람들, 학식이 있거나 없거나, 남자거나 여자거나, 어린이거나 아니거나 모든 유의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 그렇게 큰 일을 하셨다면, ’배우기 위해 어떤 일인가를 해야 마땅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일들로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시는 것은 하나의 부수적인 일로 하신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위대하고 놀라운 여러 섭리들을 통하여 그 일을 행하시고 진척시켜 나가셨습니다. 그 일에 하나님의 마음이 크게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때로 성경에서는 그 일을 가리켜, 하나님께서 일찍 일어나사 우리를 가르치시고 우리에게 선지자들과 교사들을 보내신 일로 표현되기도 하였습니다.
“너희 열조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었으되 부지런히 보내었으나”(렘7:25)
그리고 13절에서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제 너희가 그 모든 일을 행하였으며, 내가 너희에게 말하되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였고”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말씀은 상징적인 어법으로 하나님께서 이 일을 아주 크게 중요한 일로 여기시며 하셨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에 큰 간심을 가지시고 마음을 크게 기울이셨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들이 열심을 내는 일을 수행하기 위해 일찍 일어나기에 그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시는 일에 그렇게 열심을 내신다면, 우리는 배우는 데 게을러서 안되는 게 확실합니다. 그것을 배워 알며 자라는 일을 우리 삶의 아주 큰 과업 중 하나로 여겨야 합니다.
5. 성경이 지식을 요구하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교훈의 풍성함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주신 책의 위대함과, 거기에 내포된 내용의 다양함을 근거로 해서 논리를 끌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옛적에 모세를 통하여 가르치신 것이 많은데, 우리는 그것을 우리에게 전이시켰습니다. 또 다윗과 솔로몬을 통하여 가르치신 것이 많고, 선지자들을 통해 전달된 탁월하고 많은 교훈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들로 충분하다 생각지 않으시고, 후에 그리스도와 그 사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그들로 말미암아 그 거룩한 책에 위대하고 탁월한 보화가 더해 졌습니다. 우리가 이 중요한 주제를 연구함에 있어서도 그 거룩한 책을 우리의 원칙으로 삼습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 책은 모든 사람들이 사용하도록 하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모든 사람은 성경을 상고하라는 지시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5:39)라고 했고,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사34:16)라고 한 것이 그것입니다. 이 책을 읽고 이해하는 이들은 복이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드는 자들과…복이 있나니”(계1:3)라고 말씀합니다. 요한계시록이라는 성경의 한 책에 이것이 해당된다면, 성경 전반에 걸쳐서는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교훈을 받아들이는 것을 부수적인 것으로 여기도록 의도하시고 성경을 주셨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풍성하게 많은 교훈을 거기에 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그 모든 풍성한 교훈들은 우리가 이해할 만한 것들이기 때문에 주어진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것들은 가르침의 교훈들이 아닐 것입니다. 배우는 자가 이해하게 할 양으로 주어지지 않은 것은 배우는 자를 가르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학을 아는 지식 가운데서 자라나려고 애를 쓰지 않는다면, 그런 교훈들 거의 대부분이 우리에게는 헛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경에서 깨달은 것 이상으로 유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통해 그렇게 풍성하고 다양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신 것 때문에 하나님을 찬미할 이유를 가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을 주신 일을 들어 하나님을 찬미한다는 것은 외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궁핍을 충족시키기 위해 우리 앞에 매우 큰 보물창고의 문을 여셨고, 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많은 것을 주신 데 대하여 감사하였다고 합시다. 그런데도 우리가 게을러서 보화를 모으지 못하고 그 보물창고의 거의 대부분이 손을 대지 않은 채 있다면, 지금 우리는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에 비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기가 훨씬 더 유리합니다. 그 시대 이후의 정경에 포함된 책들이 아주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갖고 있는 유리한 입장을 활용하지 않고 태만하면, 그 백성들보다 더 나을 게 결코 없을 것이며, 그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빈약한 지식에 머물러 있게 될 것입니다.
6. 진리가 무궁무진하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얻기 위해 아무리 부지런히 애를 쓴다 해도, 그 진리를 아는 지식의 완전성에 도달하려면 더 나아가야 할 여지가 항상 있기 마련입니다. 이미 모든 것을 알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기 위한 노력을 부지런히 하지 않는다고 핑계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기 위해 더 이상 할 일이 없다고 핑계될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인 신학에는 언제나 있는 힘을 다하여 애를 써서 얻어야 할 부분이 항상 있기 마련입니다.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으려고 아무리 면밀하게 노력을 경주하고 아무리 오래 연구했다 해도, 그 사람이 사실은 알아야 할 것 중에 아주 적은 부분밖에 알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의 문제는 아무리 해도 밑이 드러나지 않는 주제입니다. 이 신학의 주인공이신 분은 무한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의 완전하심의 영광에는 끝이 없습니다. 아울러 그의 하신 일들은 놀랍고, 그 일들의 완전한 깊이를 다 밝혀 낼 수는 없습니다. 특히 신학의 주요한 관심거리인 구속의 역사는 측량할 수 없는 기이함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신학 속에서 우리로 하여금 배우게 하기 위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의 목적을 위해 경주하게 하기에 충분한 것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장 유능한 신학자들의 머리를 총동원하여 세상 끝까지 연구해도 더 연구해야 할 충분한 여지가 남아있을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인간에게 속한 일들에는 끝이 있음을 알고, “내가 보니 모든 완전한 것이 다 끝이 있어도 주의 계명은 심히 넓으시니이다.”(시119:96)라고 고백합니다. 이 하나님을 아는 신학에는 성도들과 천사들이 합동으로 영원토록 깨달아 가기에 충분한 것이 있습니다.
7. 그리스도인의 업이기에
직업, 곧 주요한 소명에 속한 일들을 아는 지식을 더욱 가속화시키는 것은 의심할 것도 없이 모든 이들에 관한 것입니다. 만일 어떤 일이나 지혜나 지식에 있어서 더욱 자라나려고 하는 일이 사람들에게 관련된 일이라면, 사람들의 주요한 직업이나 사역에 속한 일들을 더욱 알려고 하는 것들은 틀림없이 사람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명이나 일은 하나님을 위해 살기 위함입니다. 빌립보서 3장 14절에서는 그것을 ‘위에서 부르신 부름’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사업입니다. 이렇게 말해도 좋을지 모르겠으나,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무역이요, 그의 주요함 임무이며, 실로 오직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하는 하 가지 일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일이라도 그 목적을 이루는 데 이런저런 면에서 일익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어떤 일도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 임무를 완성하고 그 임무에 철저한 준비를 하기 위해 그 일에 속한 것들에 아주 잘 친숙하도록 애를 써야 합니다.
8. 가르치는 자를 세웠기에
그르므로 하나님께서 이런 목적, 곧 이런 것들을 알기 위해 지식을 얻는 데 사람들을 돕도록 세운 사람들의 계층에는 차서가 있다고 논증할 수 있습니다. 선생이 되도록 하나님이 정하신 자들이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그런 사람들을 얼마간 세우셨습니다.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들입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1,12)
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을 교사로 세워 그들로 그 일을 하게 하셨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식을 나누어 주는 일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유의 지식입니까? 철학이나, 인간의 법이나 기술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인 신학입니다.
가르치는 자를 세웠다면 배워야 할 자는 누구인가
만일 하나님께서 어떤 자들로 하여금 그런 교사들의 임무를 감당하게 하셨다면, 그 외의 자들에게는 배우는 임무를 주셨다는 결론이 성립됩니다. 가르치는 선생들과 배우는 자들은 서로 관계 있는 자들입니다. 가르침을 받을 사람이 없다면 선생이 무슨 필요가 있겠으며, 선생이 없다면 가르침을 받는 자들이 어찌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마땅히 배우는 수고를 하지 않으려는 자들에게 가르치는 수고를 하라고 선생들을 세운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지식을 받으려는 마땅한 노력을 경주하지 않는 자들에게 지식을 나누어주기 위해 시간을 보내라고 사역자들에게 명한 적이 없습니다.
신약성경에서 흔히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제자들’이라고 하는데, 그 말은 ‘학생들’과 ‘배우는 자들’이란 뜻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학교에 들여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 학교에서 그들이 할 일을 그들의 선생이요 상전이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가르치라고 임명받은 교사들로부터 지식을 배우거나 받는 일입니다.
9.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기에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속한 일들에 관한 지식에서 자라나기 위해 간절한 부지런함을 가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성경에서는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지식뿐 아니라, ‘모든 지식으로 부요해’ 지는 것이 하나님의 계시된 뜻이기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고전1:4,5)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빌립보 그리스도인들이 사랑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인 알아야 하는 ‘지식’에 있어서도 더욱 풍성해 지기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빌1:9)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가,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벧후1:5)이라고 충고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초보를 떠나서 온전한 데 나아가라고 권고합니다. 사도는 그들이 처음 입교하여 세례 받을 때 배운 회개와 믿음과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기본 교리들에만 머물러 있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얻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라는 권고
여러분 자신이 그리스도의 학교에 입학한 학생이나 제자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하는 지식에 있어 능숙해지기 위해 열심을 내십시오. 여러분이 어린 시절에 배운 교리, 그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구원받기에 필요한 원리들을 아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도 안됩니다. 만일 그런 식으로 만족하고, 열심을 내지 않으면 사도가 경계하며 막는 일을 감히 저지르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죽은 행실에서 회개하는 일에 기초만 놓고 그 뒤로 새 집을 짓는 일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하게 그것을 본분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본분에 속한 것들을 아는 지식을 얻는 데 열심을 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지식을 나누어주느라 신간을 보내는 선생들이 여러분을 볼 때 전혀 배우려 하지를 않는다고 서글퍼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가르치는 자에게는, 열심히 배우기 위해 마음을 기울이는 자를 만나는 일은 정말 큰 힘이 되지만, 그런 경우에는 가르치는 일이 즐거움이 됩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큰 보고를 옆에 두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보고에서 아주 적은 것만 가지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여러분에게 많은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할 수 있는 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애를 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모두 이성적인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성이나 이해의 고상한 기능을 묻어 두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오다가 접하는 지식 정도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말씀을 설교하는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자상하게 가르쳐 주는 일이 흔하니, 어떤 의미에서 피할 수 없는 방식으로 지식을 받게 됩니다. 그런 경우에는 할 수 없이 설교를 듣기 때문입니다. 또는 대화를 통해서 우연한 지식을 얻기도 합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여 지식을 추구하십시오. 은광이나 금광에서 은과 금을 캐는 자들이 하는 것과 같은 부지런함과 힘씀으로 지식을 얻으려고 애를 쓰십시오.
특별하게 이와 같이 힘을 쓰는 젊은이들에게 충고하고 싶습니다. 사람이란 아무리 늙어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젊음의 시절은 특별히 배우는 시간입니다. 지식을 얻어 쌓아두기에 아주 좋은 시기입니다. 더 나아가 저는 젊은이나 노인이나 다 배우는 일에 충실하라고 촉구하면서, 한번 깊이 생각해 보라고 간청하는 바입니다.
1. 시간을 아껴 일을 찾아라.
여러분이 부지런히 이 일에 열중한다면 일상적인 업무에서 벗어나 쉬고 있는 동안에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의 시간을 유익하게 보낼 수 있습니다. 한가한 시간에 이집 저집 다니고 무익한 대화를 하느라고 시간을 보낸다든지, 아니면 고작해야 심심풀이를 하면서 시간을 다 써버리는 일이 아닌 다른 일거리를 찾을 것입니다. 저녁에 여러 집을 방문하느라고 보내는 대부분의 시간이 제가 위에서 말씀드린 것보다 훨신 더 나쁜 목적으로 쓰여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솔로몬은 우리에게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잠10:19)라고 말합니다. 이집 저집 돌아다니며 허물 있는 말을 하거나, 어느 누구나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그런 하찮은 말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일 외에 다른 일을 찾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 말씀이 입증되지 않습니까?
자기 본분을 살피는 일은 왕도(王道)
기분 전환은 물론 합법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 시간의 아주 많은 부분이나 긴 저녁 시간을, 아주 나쁜 일들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저 기분을 좋게 하거나 심심풀이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한 것으로 모두 허비한다면, 그것은 죄악적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식의 자세는 외적으로 사람을 궁핍하게 하지는 않을지라도 결국 영혼의 궁핍을 가져오기 때문에 성경은, “모든 수고에는 이익이 있어도 입술의 말은 궁핍을 이룰 뿐이니라.”(잠14:23)라고 말씀합니다.
그밖에, 사람들이 아무 할 일없이 앉아서 노닥거리게 되면, 어리석고 죄악적인 대화로 빠져들게 되고, 자기들의 부패한 성향을 자극하여 다른 사람들을 비방하는 말을 하거나, 이웃을 시기하거나 악하게 평하는 자리로 나아갈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교훈을 통하여 여러분은, 말다툼이나 분쟁을 불러오기 쉬운 정치적인 대화가 아닌 다른 일에 시간을 할애해야 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젊은이들은 분요한 무리들 속에서 헛된 일에 시간을 보내지 않고, 다른 일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들에게 더 유익한 일, 결국 어떤 선한 결과를 가져올 일을 찾을 수 있을 것이란 말씀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유혹의 길에서 벗어나기도 하고,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거나 복락을 받는 길에 더욱 견고하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노인들도 육체적으로 힘든 일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에도 자신들을 드려 할 일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흔히 나타나는 경우이지만, 노인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유익하게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에서 발견되는 여러 진리들을 서로 비교하고 묵상하는 일에 시간을 보내면 그렇게 힘에 겹지 않을 것입니다.
2. 본분을 살펴라.
앞에서 권고한 대로하면 여러분은 아주 ‘고상한 방식’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베뢰아 사람들에게 그런 별명을 붙여 주셨습니다. 그들은 그 일을 부지런히 하였기 때문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하늘에서 하는 일과 아주 흡사합니다. 하늘의 거민들은 자기들 시간 대부분을 하나님께 속한 위대한 일들을 상고하고 온 힘을 다해 그것들에 대한 지식을 얻으려는 데 쓸 것입니다.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벧전 1:12)라는 성경 말씀이 보여주듯이 말입니다. 여러분이 빛의 천사들과 합세하여 그 일을 하고 싶어할 것이 틀림없듯이, 영원토록 여러분이 하게 될 일과 아주 잘 부합되는 일이 바로 그 일입니다. 솔로몬은,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잠25:2)라고 말합니다. 틀림없이 다른 일보다도 하나님의 일을 살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왕의 영화라면, 여러분에게는 참으로 큰 영화가 아니겠습니까?
3. 지식이 즐거움을 준다.
그 일은 시간을 활용하는 즐거운 방식입니다. 지식은 지성있는 피조물들에게는 즐겁고 유쾌한 것입니다. 다른 것보다 하나님께 속한 일을 아는 지식은 더욱 그러합니다. 그 신적인 것들에는 가장 탁월한 진리들이 들어있기 때문이며, 가장 아름답고 우아한 것들이 드러나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을 하는 것이 아무리 지루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라도, 일단 그렇게 하여 얻어진 지식은 드려진 수고를 넘치도록 보상해 줄 것입니다. “곧 지혜가 네 마음에 들어가며 지식이 네 영혼에 즐겁게 될 것이요”라고 솔로몬은 말합니다.
4. 대화를 유익되게 하는 지식
이 지식은 그리스도인의 ‘실제의 삶’에 있어서 극히 ‘쓸모’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많이 가진 자들은 영적이고 구원얻는 지식을 위해 큰 방편과 이점들을 갖고 있는 자들입니다. 어떤 은혜의 방편도 지식을 통하지 않고는 어떤 구원의 효력도 나누어주지 못합니다. 신적인 일들에 대하여 이치에 맞는 지식을 가지면 가질수록, 성경에서 여러분의 심령을 감동시키게 될 때 그런 일들의 탁월성을 알고 그 진미를 맛볼 기회가 더 많아지게 될 것입니다. 복음의 내용들을 아는 이성적이 지식을 전혀 갖고 있지 않는 이방인들에겐 그것들의 탁월성을 알 기회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아는 이치에 합당한 지식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그것들의 신적인 탁월성과 영광을 아는 기회가 이점을 더욱 많이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선지자들과 임금들보다 지식에 우리가 유리
다시 말씀드리지만, 여러분이 하나님께 속한 것을 아는 지식을 많이 가질수록,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더욱 잘 알게 됩니다. 여러분이 가진 지식은 여러분이 처해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며 지도하는 데에도 크게 쓰여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 가지의 시험을 막아내는 데 더 좋은 무장을 한 셈이 됩니다. 마귀는 흔히 사람들의 무지를 이용하여 우리를 넘어뜨리려 합니다. 여러분이 지식을 가짐으로 여러분의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길에서 더욱 신중하고 바르게 처신할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을 위해 더욱 유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호의적이며 마음이 착한 심령으로 가득하면서도 신중함이 부족하여 복음종교를 훼손하는 행위를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 열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지식을 따라 행하지 않아서 선보다는 해를 끼치는 이들이 많습니다. 많은 경우에 아주 선한 자들이 결코 선하게 처신하지 못하는 것은, 은혜는 원하면서도 지식은 원하지 않는 경우입니다. 그 외에 지식을 많게 하는 것은 유익한 대화를 나눔에 있어 크게 유용합니다. 여러분이 함께 모이거나 이웃을 방문하게 될 경우에 선한 대화의 소재를 제공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신이나 다른 이들의 마음을 해롭게 하는 대화로 시간을 보내는 시험을 덜 받게 될 됩니다.
5. 복된 시대를 사는 우리
여러분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더 많이 갖게 됨으로 여러분이 얻게 되는 이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보다도 그런 지식을 얻는 데 훨씬 더 유리한 위치에 있습니다. 그 시대보다 정경이 더 확대되었고, 지금은 복음의 진리들이 더욱 선명하게 계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방면에서는 오늘날의 평범한 이들이 구약시대의 가장 큰 선지자들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는 데 더욱 유리한 위치에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의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에게 적요될 수 있습니다.
“너희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드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눅10:23,24).
어떤 방면에서는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보다 지금 교회사의 후기에 속한 자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는 데 훨씬 더 좋은 위치에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인쇄술로 말미암아 성경이나 신학의 여러 책들이 아주 많이 반포되게 되었습니다. 오날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보다 그리스도인의 지식을 얻는 데 도움을 주는 장비를 훨씬 쉽고 값싸게 갖출 수가 있습니다.
6. 지식으로 답변하라
우리가 붙잡고 있는 종교의 원리들 때문에 우리가 어떤 반론을 만나게 될지 모릅니다. 복음과 그 진리들을 대적하는 원수들이 많다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일 그런 진리들을 수용한다면, 그런 원수의 공격을 받게 될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것들에 관하여 잘 알지 못하면 어떻게 우리 자신을 방호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명하기를, 우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이들에게 대답할 말을 항상 예비하고 있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아는 상당한 지식이 없이는 그렇게 하리라 생각할 수 없습니다.
Ⅵ. 그리스도인의 지식을 얻기 위한 몇 가지 방침
1. 지식의 원천은 성경
열심을 내어 성경을 읽으십시오. 성경은 모든 신학의 지식을 얻는 원천입니다. 그러므로 이 보고를 그냥 묵혀두는 게으름을 피우지 마십시오. 읽을 수 있는 보통의 이해력을 가진 자는 누구나 즐거운 마음으로 성경과 친숙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얼마나 놀라운 것을 얻게 됩니까?
2. 호기심으로 읽어서는 안되는 성경
의미를 파악하지 않고 그저 호기심어린 마음으로 성경을 읽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이는 성경을 읽는 방법 중에서 아주 나쁜 방식입니다. 그런데 평생을 그런식으로 성경을 읽는 습관으로 일관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여러분이 읽을 때 그 읽는 바를 관찰하십시오. 그 내용이 어떻게 된 것인지를 주목하여 살피십시오. 교훈의 취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의 이 대목과 저 대목을 서로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여러 다른 부분들이 서로 잘 조화를 이루어 성경의 부분들이 서로 빛을 던져 주고 있습니다.
서로서로 지식을 더해 주는 복된 성도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에게 성경을 상고하라고 분명히 지시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의 그 지시는 성경을 단순하게 호기심으로 읽는 것 이상을 가리킵니다. 성경의 의미를 알아내기 위해 방편들을 이용하십시오. 여러분이 성경 말씀을 설명하려고 할 때는 그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만일 어느 때든지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는 어느 말씀이, 만족할 만큼 아주 선명하게 깨달아지거든 표시해 두고, 모아놓고, 가능한 기억해 두십시오.
3. 경건 서적을 보조로 읽어라
성경을 아는 지식을 자라게 하는 데 도움을 주는 다른 책들을 확보하고 부지런히 사용하십시오. 이러한 지식을 가지게 하는 데 여러분을 크게 진보케 하여 주는 놀라운 책들이 많습니다. 그런 책들은 여러분의 여가 시간에 매우 유익하고 즐거운 유희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적은 대가를 지불하기도 싫어하여 이런 성질에 속한 도움을 더 이상 갖추지 않은 많은 이들에게는 분명하게 아주 큰 결함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 이들은 실로 그럭저럭 주일에만 읽는 책들을 몇 가지만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책은 너무 오랫동안 소장하고 있었고 자주 읽어서 아주 지겨운 책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젠 그런 책들을 읽는 것이 다분한 이야기가 되었고, 그저 단족로운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4. 지식을 서로 전하라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이런 목적을 위해 선용하십시오. 만일 할 수 있으면 대화를 통하여 서로간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얼마나 많이 촉진시켜줄 수 있을까요. 무시간 사람들은 자기들의 무지를 솔직하게 시인하고 다른 이에게 배울 기꺼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지식을 갖고 있는 자들은 교만함이나 오만한 자세 없이 지식을 전달해 주어야 합니다. 모든 이들이 서로간에 세워 주고 서로 가르침을 주고받기 위한 대화를 하려는 마음가짐을 더욱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는 데 서로간에 얼마나 큰 자극을 줄 수 있을까요.
5. 지식을 교만의 도구로 쓰지 말라
갈채를 받거나 다른 이들과의 논쟁에서 이기기 위한 목적으로 지식의 증가를 원해서는 안됩니다. 오직 여러분의 영혼의 유익을 위하고, 실제적인 삶을 위해 지식을 추구해야 합니다. 만일 갈채를 받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면, 여러분은 진리를 아는 지식에 이르기가 쉽지 않을 것이고, 자신들의 지식을 자랑하는 자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오류에 빠져서 자신을 파멸에 이르게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아는 지성적인 지식을 얻었다 하더라도, 목적이 그러하면, 여러분에게 유익을 주기보다는 교만으로 마음을 들뜨게 만들기 쉽습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6. 지식을 얻기 위해 기도하라
여러분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추구하는 데 인도해 주시고 복을 주십사고 하나님께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거룩한 지식의 원천이시기에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라고 솔로몬은 고백합니다.
오류에 빠지지 않고 참된 지식을 얻기 위해 자신의 눈멂과 무지와 하나님의 도움을 긴급하게 필요로 하는 자신의 진상을 깨달으려고 노력하십시오. 바로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라는 성경말씀처럼 되도록 애쓰십시오.
7. 지식에 따라 행하라
여러분이 가진 지식에 따라서 실제의 삶을 영위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더 많은 지식을 가지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시편 기자의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지식의 경험에 비추어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지식을 추구하는 데 이 방법을 간곡히 권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도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라고 말씀하시며 같은 것을 권하고 계십니다.
이상현 교수(美프린스턴대학)
청교도 신앙과 신학을 여러 가지로 학자들이 분석하였지만,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체험적 신앙과 성도의 실천이 가장 기본적인 청교도의 성격이라는 것이다. 체험과 실천이 구원의 필수적 증거이고 결과이기 때문에 청교도의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그리고 예정론과 연결된다. 그리고 실천은 역사 종말에 확실히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삶을 지금 현실화한다는 각도에서 종말론과 연결된다. 성서의 권위는 바로 성도들의 권위였던 "신앙과 실천의 지침"(Rules of Faith and Life)이라는 데 있다는 것으로 청교도는 이해한다.
에드워즈는 하나의 청교도 신학자이며, 동시에 청교도의 테두리를 넘어서는 기독교 서구 신학의 중심적 흐름에 창조적 공헌을 한 신학자다. 여기서는 에드워즈가 하나의 청교도 신학자라는 관점에서 그의 신학의 중요성을 지적하려고 한다.
1.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 경험에 대한 새로운 이해
에두워즈는 신앙 경험을 "하나님의 사랑과 아름다우심에 대한 심미적 감각"(A Sense of the Heart)이라고 규정하고, 그 감각은 다른 심미적 감각과 연관성이 있으면서도 그 감각을 완전히 초월하는 것으로 분석하면서 자연과 은혜의 연속성과 비연속성을 동시에 주장하였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하나님에 대한 이 새로운 인식은 사람의 감정과 의지의 인식을 포함하는 사람 전체의 경험이다. 그는 이렇게 봄으로써 신앙에 대하여 포괄성 있는 이해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 신앙의 감각은 성령의 임재 없이는 불가능한 것으로 주장하여 개혁주의 전통의 '오직 은혜로'(Sola Gratia) 원칙을 준수하였다. 이 점에서 에드워즈는 청교도운동이 중요시하는 '구원의 체험'의 본질을 창조적으로 표현하고 정립하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에드워즈의 이 신앙 경험 분석에서 이성적인 것과 감정적인 것을 분리하지 않고 포괄적인 견해를 제시한 것은 하나의 중요한 공헌이었다. "감정이 신앙 체험에서 어떻게 중요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에드워즈는 Passion과 Affection을 구별한다.
즉 Passion은 마음의 이성, 지성을 완전히 무시하고 고립적으로 일어나는 하나의 감정인 반면, Affection은 마음의 모든 이성적 활동을 동반하고 포함한 감정이라고 규정하고, 기독교 신앙 체험에서 Affection으로서의 감정은 필수적인 데 반해, Passion으로서의 감정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신앙과 정서'(Religious Affection)라는 책에서 말하고 있다.
2. 신앙 체험과 실천의 진실성 문제
청교도 운동의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가 바로 신앙 경험의 신빙성, 즉 진실된 신앙 체험과 참된 토대가 없는 신앙 체험을 어떻게 구별하는가 하는 문제다. 이는 신앙 체험과 실천을 강조하는 청교도들에게는 중대한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에드워즈는 '신앙과 정서'에서 신앙 체험의 징표(sign)를 열거하면서 '의존할 수 없는 징표들'과 '의존할 수 있는 징표들'을 구별하고,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에 대한 새로운 심리적 감각'과 기독교인의 실천을 포함한 12개의 믿을 만한 징표들을 논하고 있다. 그는 균형된 그리고 말씀과 성령이 동시에 역사하시는 신앙 체험을 강조하여 청교도 신앙의 신앙 체험을 분석하고 이를 개혁주의 신학 테두리 안에서 재정리하였다.
에드워즈는 두 가지의 회심의 징표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였다.
의존할 수 없는 징표들(회심의 신실성을 증명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점들)
. 회심했다는 사람들이 아주 강한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것
. 그들의 회심이 그들의 몸에 육체적으로 무슨 영향을 주었다는 것
. 신앙에 대해서 많은 말을 열심히 하는 것
. 회심 체험이 자기 자신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
. 회심체험이 어떤 성서구절이 생각나는 것과 동반하였다는 것
. 회심했다는 사람이 이웃 사랑을 행하는 것이 보이는 것
. 여러 가지의 감정을 경험한다는 것
. 회심 체험이 어떤 특정한 단계를 거쳤다는 것
. 교회에 시간을 많이 드리고, 교회의 여러 가지 봉사를 열심히 한다는 것
. 그들이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
. 자기 회심의 진실성에 대하여 깊은 자신감을 가졌다는 것
. 그들의 간증이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킨다는 것
의존할 수 있는 징표들
. 성령의 직접적인 임재에 근거하여 경험하는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새로운 마음의 각각
. 신앙 체험의 객관적 토대가 모든 것을 초월하는 하나님 자신(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난)의 아름다움 그 자체를 우리의 유익과 관계없이 기뻐하고 사랑하는 것
. 모든 신앙의 감정이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에 토대를 두었을 때
.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을 참으로 이해하고 인식하는 마음의 앎이 믿음의 감정과 동반할 때
. 하나님에 대한 모든 진리가 참된 진리라고 마음이 신실하게 판단할 수 있을 때
. 믿음의 감정들이 복음에서 오는 겸손을 동반할 때
. 회심한 사람의 성격, 인격 자체에 변화가 있을 때
. 회심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하신 태도를 닮았을 때
. 믿음의 감정이 부드럽고 관용성 있는 마음과 동반할 때
. 믿음의 감정에 아름다운 균형이 있을 때
. 현재의 영적 상태에 만족하지 않고 더 높은 영적 발전을 추구하는 노력이 있을 때
. 신앙 감정이 실천의 열매를 맺을 때
3. 신앙 실천의 궁극적 의미 :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관과 기독교인의 실천
에드워즈는 청교도가 강조하는 실천을 신관과 창조의 목적의 큰 궤도 안에서 보았다. 기독교인의 실천은 하나님 자신이 추구하시는 작업에 참여한다는 실천의 궁극적 의미를 정리하였다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에드워즌 로크의 경험주의와 뉴턴의 자연과학의 영향력이 막대한 시대에 살았다. 그런데 두 사상 조류가 모두 전통적인 '실체'에 관한 이해에 도전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실재는 '실체'라는 관념으로 이해되어 왔었다. 그러나 경험주의는 그 '실체'는 경험의 대상이 아님을 지적하였고, 자연과학은 '실체'보다 '에너지' 그리고 '움직임'의 관념으로 실재를 생각하려고 하였다. 실체라는 전통적 관념의 정당성이 치명적인 비판을 받는 것을 에드워즈는 잘 의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에드워즈는 대담하고 획기적인 새로운 철학적 방향을 제시하였다. 실재의 본질을 '경향성'이라는 동적인 관념으로 생각하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은 하나의 '경향성'들의 조직이며 한 개의 물체의 본질도 '경향성'들의 밀접이라는 것이다. 실체의 존재론을 에드워즈는 '경향성'의 존재론으로 재정리한 것이다.
에드워즈는 자신의 동적인 존재론을 신에 대한 관념에도 유용하였다.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과 아름다움의 경향성이라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무한히 완전하시기 때문에 모든 실재를 다 가지신 분이다. 완전히 현실화되신 분이란 말이다. 그는 하나님의 완전성에 대하여서는 타협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의 관계를 통하여 무한하게 완전히 현실화되신, 더 이상 그 무엇이 더 필요 없으신 분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과 아름다움의 경향성이라는 것이다. 즉 실제와 경향성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영원히 경향성이신 하나님은 사랑과 아름다움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완전성을 고수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동적이고 창조적인 분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내적으로 완전히 현실화되었으나 하나님의 본질인 경향성은 하나님 밖으로 역사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이유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A Dissertation on the End of Which God Created the World)이라는 그의 중요한 논문에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은 바로 그 하나님의 경향성의 발휘의 결과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경향성의 발휘는 하나님 자신이 내적 완전하심, 즉 하나님의 완전하신 그 사랑과 아름다움을 재현(Repetition)하신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영원히 완전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내적으로 완전히 현실화된 아름다우심을 외적으로 시간과 공간에 재현시키기 위하여 천지를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기에 인간과 자연도 그 목적을 달성하는 작업에 동참하게 되는데, 인간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아름다우심을 알고 기뻐할 때 바로 그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내적 사랑과 아름다우심이 시간과 공간에 재현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내적 영광은 무한하시기 때문에 그 재현의 작업은 무한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그 재현이 다 끝나는 순간은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신학에서 말하는 종말은 무엇인가? 에드워즈에 의하면 종말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진행하신 구원의 작업이 끝나는 날이라고 한다. 인간은 죄를 짓고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을 달성하는 작업에 참여하지 않고 반항하였다. 그렇게 빗나가 버린 인류를 옳은 궤도에 다시 올려놓고 하나님의 작업에 동조할 수 있도록 해 놓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인 것이다.
그 작업이 끝나는 날 예수께서 신랑으로 오셔서 완성된 교회, 즉 신부와 만나 연합하게 되는데 그 날을 '끝이 없는 결혼의 날'이라고 그는 표현한다. 그 이유는 종말에 구원의 작업을 끝나고, 죄로 가득한 인간의 역사는 끝나지만, 역사 자체는 끝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끝나지만, 역사 자체는 끝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끝나지만 변화되어 새 하늘 새 땅에서 연속되어 계속된다는 것이다. 새 하늘 새 땅은 우리가 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동시에 그것을 포함하는 영역이다. 그러므로 새 하늘 새 땅에서 역사는 계속되며,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달성하는 작업은 그곳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되고 영원히 전진되는 것이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알고 기뻐하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아름다우심이 재현되는 것이 무한한 시간 동안 진전된다.
에드워즈의 이러한 창조의 목적과 역사의 의미에 대한 이해는 성도들의 실천 행동을 참으로 거대한 신학적 틀 안에서 볼 수 있게 한다. 즉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실천할 때마다 그 실천의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이 실현된다는 말이다. 성도의 실천은 하나님께서 직접하시는 작업에 참여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성도의 실천은 하나님 자신의 목적 달성에 이바지한다. 그 이상 더 깊은 의미는 주어질 수 없다. 에드워즈에 의하여 청교도의 실천 강조의 참된 기반과 궁극적 의미가 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2002년 10월 28일에 한국 기독교학술원 주최로 열린 '청교도 신앙과 한국교회'라는 주제의 공개 세미나와 2003년 3월 15일 한국교회갱신연구원 주최로 서울교회에서 열린 '청교도 신앙' 세미나에서 시행한 강연의 개요이다)
영광화(榮光化)의논리(The Logic of Glorification):
조나단 에드워즈의 종말론 연구
장경철 교수(서울여대)
1. 서론
기독교 신학에서 20세기는 종말론의 관심이 새롭게 일어났던 시기이다. 물론 19세기의 신학자들도 하나님의 나라 등과 같은 종말론적 개념을 사용했으나,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본질적으로 이 세계적인 개념이었을 뿐이며, 따라서 그들 신학의 중심 개념은 종말론이기보다는 윤리나 교회론이었을 뿐이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이 세계적인 하나님 나라를 향한 과정에서 위대한 예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종류의 세계 내적인 예수 이해, 하나님 나라의 이해에 대항하여 우선 성서신학의 분야에서 초월적인 종말론 이해가 전개되었다.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있어서 종말론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요하네스 바이스(Johannes Weiss)가 강조한 이후로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등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과 신학의 종말론적 성격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칼 바르트(Karl Barth)는 종말론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만일 기독교가 전적으로 종말론이 아니라면, 그 가운데는 그리스도와 아무런 관련성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종말론은 기독교 신학의 한 부록이 아니라, 기독교 소식의 전 부분을 관통하는 열쇠와 같다고 본 몰트만(J. Moltmann)의 견해는 옳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단지 부록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기독교는 종말론이며, 희망이며, 앞을 향해 보고, 앞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기에, 그것은 또한 현재를 혁명화하고 변혁하는 것이다. ... 따라서 종말론은 기독교 교리의 오직 한 부분만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종말론적인 전망은 모든 기독교 선포와, 모든 기독교 실존, 그리고 모든 교회의 특징이다.
기독교 종말론은 역사의 마지막에 대한 관심일 뿐 아니라, 역사의 핵심에서 움직이는 역동적인 힘이라는 점이 또한 강조되었다. 기독교 신학에서 이러한 종말론의 재발견으로 인하여, 새로운 종말론적 자각이 싹트게 되었다. 이러한 종말론적인 자각으로 인하여, 기독교 신학에서 종말론의 근본적 중요성이 새롭게 인식된 것은 대단히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종말론의 이러한 강조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으로 기독교적 종말을 다루는 내용들은 아직도 추상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있음을 지적할 수밖에 없다. 요셉 라칭거에 따르면, 종말론의 부흥에도 불구하고 "그저 미래의 신학과의 대화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닌 종말론을 쓰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종말론의 형식적 강조 가운데 종말론의 고전적 주제들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는 아직도 분명히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적으로 건강한 종말론을 정립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성서적으로 건강한 종말론을 정립하려는 기독교적 시도들은 두 가지의 극단적 입장에 의하여 어려움을 겪어 왔다. 그 첫째는 인간 역사의 종말론적 차원을 부인하는 입장으로서 계몽주의 이후로 성경의 종말론적 희망을 무지한 두려움의 산물로만 치부하는 입장이다. 이러한 영향 가운데, 근대 신학의 종말론 이해는 "기독교 교의학의 결론에 추가된 짧고, 전적으로 무해한 한 장(章)"이 되고 말았다.
둘째는 인간 역사의 묵시적, 종말론적 차원만을 배타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인간의 책임을 외면하는 입장이다. 이들은 성경의 종말론적 선포를 소위 성서적 종말 날짜 산정을 위한 자료들로서 간주하는 가운데, 종말론을 세계의 멸망에 대한 단순한 예측정도로 만들어 버렸다. 그들의 종말론적인 비전이 기본적으로 이원론적 세계 이해에 근거해 있기에, 그들의 종말론적 의식은 세계의 책임으로부터의 도피에 불과한 것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예에서 보이듯이, 성서적으로 건강한 종말론 이해는 제대로 발견되지 않는다. 첫째 입장은 역사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고는 있으나, 역사의 종말론적 차원을 외면하고 있다. 둘째 입장은 역사의 묵시적, 종말론적 차원을 강조하고 있으나, 그 댓가로 운명론을 선택하고 있다. 또한 이 입장에서는 종말론적 시각이 역사로부터 사라지고, 오직 인간의 영혼에만 배타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다니엘 밀리오리는 자신의 책에서 기독교 종말론의 중심적 문제들을 논하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의 나라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인가, 아니면 인간이 그들의 노력으로 그 나라를 이루어 가는가?" 여기서 우리는 종말론적 비전을 전개함에 있어서 하나님 차원과 인간의 차원을 균형적으로 강조하는 종말론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 논문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이 성서적으로 건강한 종말론을 정립하는 데에 있어서 귀중한 시각과 자료들을 제공한다는 확신으로부터 출발한다.
우리는 이 논문에서 인간의 마지막 일들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 하나님의 차원과 인간의 차원, 수직적 차원과 수평적 차원을 균형적으로 전개하는 에드워즈의 종말론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하려고 한다. 특히 우리는 에드워즈의 종말론에 있어서 성도들의 운명에 우리의 촛점을 맞추는 가운데 에드워즈가 하나님의 주권의 차원과 인간의 참여의 차원을 균형 있게 조화하고 있음을 강조할 것이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인간의 종말과 역사의 종말은 도피주의적, 개인주의적, 정적인 관점에서 살펴질 수 없다. 종말을 향하여 나아감에 있어서 인간은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 곧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 속에 더 심층적으로 참여하고, 공동체의 삶 속으로 끌려들어 가며, 하나님의 풍성함을 누리는 보다 역동적인 생명을 부여받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에드워즈의 종말론을 분석하고 해석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과 피조물의 영화(榮化)로서 이해하며,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에드워즈 종말론의 중심 개념으로 이해한다.
여기에서 전개되는 에드워즈의 종말 이해는 종말론뿐만 아니라 에드워즈 해석 분야에 있어서도 작은 공헌이 될 수 있는데, 이는 에드워즈의 신학이 근본적으로 개인주의적이며, 정적이고, 영혼 중심적이라는 잘못된 인상을 교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과 피조물의 공동체로서 이해되며, 그 가운데 하나님과 피조물의 영광이 실현되는 장(場)으로 여겨진다.
에드워즈의 신학을 해석함에 있어서, 그의 종말론적 비전을 둘러싼 날카로운 논쟁이 있어 왔는데, 특히 그의 후천년설을 둘러싼 해석은 매우 날카로운 대립을 보여왔다. 한 편으로는,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을 해석함에 있어서 인간의 참여와 성취적 요소를 강조한 흐름이 있다.
예를 들어, 알랜 하이머트(Alan Heimert)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최고로 뛰어난 기독교 국가"라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의 초월적 차원을 강조한 흐름이 있는데, 예를 들어 대롤 브라이언트(M. Darrol Bryant)는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관심을 인간의 시도를 향한 원동력으로서 이해하고자 한 하이머트의 시도에 도전하였다. 브라이언트에 따르면, 에드워즈의 신학적 비전은 근본적으로 "초월적인 목표"를 향한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을 지향하는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은 초역사적이며 영적이라는 것이다.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의 목표를 둘러싼 이러한 논쟁은 오직 에드워즈의 신학적, 종말론적 비전을 전반적으로 분석함을 통해서만 그 결론이 얻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 논문에서 우리의 주장은 에드워즈가 최종적 상태에 대한 균형적인 시각을 전개하고 있으며, 이러한 시각 가운데 에드워즈는 자신의 신학의 중심특징인 하나님 중심성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인간의 참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라는 최종적 목표는 분명히 인간의 고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화(榮化)에 있다. 그러나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의 하나님 중심적 특성은 인간 책임의 외면을 뜻하는 것이 아닌데, 이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위대한 계획은 모든 만물의 회복과 완성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 역사의 변혁과 모든 성도들의 영화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을 완성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에 필수적인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 역사의 변혁이라는 종말론적 주제들은 서로 균형 가운데 존재한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강조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이 세계 가운데 책임적인 존재가 되는 것을 막지 않는다.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시각은 이 세계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성을 더욱 강화시키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하여 자신의 나라를 완성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자신의 종말론적 비전에서, 에드워즈는 성도들의 운명이 하나님 자신의 운명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주장한다. 다시 말하자면,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손상하지 않는 가운데 인간의 운명을 하나님의 최종적 운명과 연관시킨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하나님의 영화는 성도들의 영화를 포함하는 데,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성취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피조물의 선을 완성하려는 위대한 계획을 통하여 실현되기 때문이다.
이 논문의 목표가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을 고찰하는 것이므로 이 논문의 범위는 하나님과 피조물의 영화의 마지막 단계들을 다루는 것이다. 이는 인간 영혼의 문제, 중간상태의 문제, 천년왕국의 문제, 그리고 최종적 완성의 문제 등을 포함한다. 다시 말하자면, 구원의 사역이 개별 신앙인들과 인간 역사를 통하여 완성되는 모습을 살펴본다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영화의 위대한 계획
이 항목에서 우리는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의 토대가 되는 삼위일체론적 하나님의 영화의 틀을 살펴볼 것이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삼위일체론적 하나님의 영화는 그의 독특한 성향론적 하나님 이해에 근거하고 있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하나님은 현실태를 가지고 있는 동시에 성향으로서 존재한다. 하나님은 피조물의 세계에 대하여 전적으로 우선하여 존재하는 분이다. "하나님은 무한히, 영원히, 불변하게, 그리고 독립적으로 영광스러운 분이며, 또한 완전한 분"이며, "피조물로부터 어떤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거나, 피조물로부터 어떤 이득을 받거나, 피조물로부터 받을 어떤 것이 있는 분이 아니다." 여기서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자존성, 자기충족성 등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이 세계와 아무런 관계가 없이 존재하는 분임을 뜻하거나, 이 세계의 역사와 아무런 관련을 맺지 않는 분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행복에 대하여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자기충족성, 독립성, 불변성 등으로부터 비롯된다. 하나님의 영광과 행복은 그 자신 안에서, 그 자신으로부터 존재하며, 또 그것은 무한하고 덧붙여질 수 없으며, 또 전적으로 모든 부분에서 변화될 수 없기에 하나님은 피조물로부터 완벽하게 독립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다음의 내용이 추론되거나 그 내용이 사실인 것은 아닌데, 곧 하나님은 피조물에게 상대적인 자신의 행위나 자신의 전달 가운데, 또는 자신이 피조물 안에 일으키는 결과들 가운데 그 어떤 참되고 본래적인 기쁨, 즐거움, 또는 행복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내용이 사실인 것은 아니다.
즉, 에드워즈는 이렇게 완전한 현실태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역동성에 대하여 말한다. 즉, 하나님의 존재는 본질에 있어서 성향적이라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성향적 하나님 이해를 통하여 서구 신학의 실체론적 하나님 이해를 넘어서서 역동적인 하나님 이해를 전개하고 있다. 성향적 하나님 이해는 다름 아니라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자신의 내적인 존재를 확대하는 경향성을 가진 분임을 뜻한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은 충만한 현실태로서 존재하는 동시에, 그러한 현실태를 계속 반복하며 그러한 반복 가운데 자신의 영광을 피조물의 세계를 향하여 전달하는 분이라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하나님 이해를 삼위일체론적 하나님의 영화 이해를 통하여 보다 명료히 서술하고 있다. 하나님은 내적인 삼위일체 안에서 이미 하나님으로서 존재한다. 즉 피조물의 공헌이나 피조물의 존재가 없어도 하나님은 이미 하나님으로 존재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가 아직도 생성 가운데 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점에서 에드워즈의 신론은 과정신학의 신론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이 실존하기 위하여 세계를 창조할 수 없으며, 또는 그러한 속성, 완전성, 본성을 가지기 위한 목적으로 세계를 창조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존재는 "하나님의 행위나 계획에 선행하여"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선행적인 현실태와 초월성을 손상시키지 않는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이유에 관하여(Concerning the End for Which God Created the World)라는 논문에서, 자신의 종말론적 비전과 영생 이해에 대한 신학적 초석을 놓고 있다. 여기에서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영광 개념에 대한 역동적인 이해를 전개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하나님의 영광이란 창조와 구속의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에드워즈 신학의 핵심은 이러한 하나님의 영화의 과정 속에 인간이 참여하는 것에 있다. 우리는 이러한 영화의 틀 속에서 개인적 종말, 인간 역사와 공동체의 종말, 그리고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실현이 모두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이유는 하나님 자신의 내적인 존재와 영광을 외적으로 드러내고 전달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가장 뛰어난 존재이기에 그 자신보다 열등한 존재를 자신의 창조의 목표로 삼을 수 없다. 반면에 하나님은 세계의 창조 이전에 이미 하나님이기에 하나님 자신의 존재를 창조의 목표로도 삼을 수 없다. 왜냐하면 헤겔이나 과정신학의 하나님과 달리, 에드워즈의 하나님은 세계사의 과정을 통하여 그 존재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의 주로서 이미 자존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 양자택일의 곤경을 어떻게 풀 수 있는가?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내적인 존재의 외적인 전달이라는 틀로서 이 문제를 해결한다. 즉 하나님은 내적인 삼위일체로 이미 완전한 하나님으로서 존재한다. 하나님이 세계의 창조와 구속과 완성을 통하여 의도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존재의 실현이 아니라, 이미 내적인 충만한 하나님 존재의 외적인 전달이며 반복이다. 이러한 하나님 영광의 외적인 반복은 에드워즈의 독특한 하나님 이해, 곧 성향적 하나님 이해에 근거한다.
하나님은 이미 현실태로서 존재하는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의 충만한 현실태는 또한 성향으로서 존재한다. 즉 하나님의 존재는 하나님이 끊임없이 하나님 자신을 영화롭게 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하나님의 영화는 하나님의 내적인 지식, 사랑, 행복이 지각 능력이 있는 존재에게 전달됨으로써 그들이 또한 하나님 밖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내적인 교제를 반복하고 증가시키는 과정 속에서 성취된다. 즉, 내적인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존재하며 향유되었던 하나님의 지식, 사랑, 행복이 외적으로 피조물을 통하여 반복될 때 하나님이 더욱 영광을 받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유출과 회귀의 신적 운동(the divine movement of emanation and remanation)이라는 에드워즈의 이해를 만나게 된다.
피조물이 하나님을 알고 존경하며, 사랑하고 기뻐하며, 또 찬양함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은 드러나며 인정되며, 하나님의 충만성은 수용되는 동시에 또한 되돌아온다. 여기에 유출이 있으며 회귀가 있다. 그 광채는 피조물 위에, 또 피조물 속에 비추어지며, 또한 빛을 발하는 발광체에게로 되돌아간다.
창조와 구속의 목표를 하나님의 영화로서 이해하는 에드워즈의 신학적 원리는 자신의 종말론적 비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함축적 의미를 가지게 된다. 첫째,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은 하나님의 자기 영광화라는 궁극적 맥락에서 펼쳐지는 것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그저 다가오는 미래, 아직 알려지지 않은 미래의 하나님만이 아니다. 스타인이 지적한 바와 같이,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섭리는 종말론의 범위를 확장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서 과거, 현재, 미래를 하나의 촛점 아래 위치시키며, 동시에 땅의 차원과 하늘의 차원의 균형을 맞추어 놓는다."
그러므로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종말론적 기대란 미래의 알려지지 않은 추상적인 사건들의 예측에 그 촛점이 있지 않다. 오히려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은 하나님의 영화의 궁극적인 실현에 있으며, 이것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화라는 궁극적인 차원에 미달하는 것은 에드워즈의 희망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둘째, 삼위일체 하나님의 궁극적 영광화라는 이러한 맥락은 그저 일원적이며 단선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화는 반드시 피조물의 완성을 포함하고 있으며, 반면에 피조물의 완성은 또한 하나님 자신의 영광 받으심을 함축하고 있다. 그 자신의 종말론적 비전에서 에드워즈는 피조물의 영광과 창조주의 영광을 매우 밀접하게 연관시키고 있기에, 피조물의 완성이 없는 하나님의 영광은 어떤 의미에서 불완전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영광은 피조물의 완성을 통하여 더욱 영광 받으시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인식론적인 확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더욱 확산되고 증대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자신의 종말론적 비전에서, 에드워즈는 피조물의 운명을 하나님의 운명과 동일시하고 있기에, 하나님의 영광화는 피조물의 선이 없다면 어떤 의미에서는 불완전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기서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행동하는 것, 또는 자신의 최종적 목표로 삼는 것과, 하나님이 피조물을 위하여 행동하는 것은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여겨져서는 안되며, 또는 서로 어긋나는 것의 반대 부분들로서 여겨져도 안된다. 오히려 그것들은 서로 일치하는 것으로 여겨져야 하며, 다른 것 안에 함축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에드워즈는 자신의 종말론을 전개함에 있어서 개인적 종말론과 일반적 종말론 사이의 구분을 가지고 있는데, 개인적 종말론이란 개개인의 성도들을 영화롭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인 반면에, 일반적 종말론은 인간의 전 역사와 관련하여 피조물을 영화롭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의미한다. 비록 에드워즈가 이러한 구분을 두는 것은 사실이지만, 에드워즈는 이 두 가지를 분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두 가지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화라는 큰 틀 안에서 통합되고 있다. 두 측면의 종말 이해를 다룸에 있어서, 에드워즈는 전자(前者)의 계획을 후자(後者)의 계획 안에 위치시키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성도 개개인의 영화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라는 커다란 틀 속에서 살펴지고 있다.
하나님의 영화라는 위대한 계획은 인간 몇몇의 구원에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로 확장되는 것인데, 이는 인간들뿐만 아니라 모든 세계가 파괴되었고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에드워즈는 종말론적 성취의 영역에서 우주적 실재를 배제하는 개인주의적, 영혼주의적 하나님 나라 이해를 거부한다.
에드워즈의 말에 따르면, "모든 하늘과 땅이 전복되었기에", 하나님의 계획은 "모든 것을 회복하는 것, 말하자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단지 몇몇 개인들의 구원이나 또는 영혼만의 구원으로 이해될 수 없다.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피조물의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로서 이해되며, 따라서 모든 우주의 완전한 새롭게 됨이며 이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표상된다.
개인의 영화는 인간 역사 전체의 영화의 틀 안에서 이해되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우리는 여기서 에드워즈 종말론의 특징을 하나 지적하고자 한다. 즉, 여기서 에드워즈는 인간과 인간 역사의 영화가 심지어는 하나님 자신의 영화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지적한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개인의 구원과 인간 역사의 변혁과 완성이 중요한 것은 그러한 사건이 단지 피조물 자신의 운명과 관계되어 있기만 하여 그런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내적인 영광이 "영광스러운 피조물 존재의 사회"에 전달될 때, 하나님의 영광은 반복되면서 또한 증대한다. 따라서 피조물의 영화는 피조물 자신의 영화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영화로 이어진다. 에드워즈는 심지어 피조물의 완성과 영화를 통한 하나님의 내적인 영광의 외적인 반복을 "하나님 자신의 충만과 완성"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이 절(節)의 내용을 요약하도록 하자: 우리는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이 그가 전개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 곧 영원 전부터 영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가진 영화의 틀 속에서 전개되고 있음을 보았는데, 이러한 하나님의 영화의 틀은 그의 독특한 하나님 이해에 근거한다. 에드워즈는 삼위일체 하나님 이해와 성향적 하나님 이해를 결합함으로써 역동적인 하나님 이해를 전개하며, 그에 상응하여 역동적인 세계의 종말 이해를 전개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영화의 과정 속에서 피조물은 능동적인 역할을 부여받는다.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자기충족성, 자존성, 주권 등이 철저하게 강조되고 있다는 의미에서 하나님 중심적이다. 하지만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님 중심성은 이 세계의 최종적 완성의 과정에 있어서 인간의 참여의 중요성이 무시되고 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에드워즈는 인간 삶과 인간 역사의 최종적 순간을 하나님의 영화의 역동적인 과정으로 이해하는데, 이러한 역동적 과정이란 다름 아니라 인간이 능동적으로 참여할 역할이 있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에드워즈는 피조물의 차원의 진정한 중요성을 손상하지 않는 가운데 종말에 대한 하나님 중심의 비전을 풍성하게 만들고 있다. 이 항목에서 우리는 에드워즈가 하나님의 주권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참여의 진정한 공헌을 긍정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자신의 종말론적 비전에서 에드워즈는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있어서 인간 역사의 상대적이나 진정한 공헌을 강조하고 있다.
3. 인간 역사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진보
우리는 이전 항목에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화에 있으며, 하나님의 영화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내적인 영광의 외적인 표현이며 반복에 있음을 살펴보았다. 하나님의 내적인 영광은 이미 내적인 삼위일체 안에서 충만하고 완전하게 실현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내적인 영광을 외적으로 반복하는데 그 영광을 계속 실현하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영광의 이러한 외향적 실천은 피조물의 존재를 향하여 계속해서 나아가며, 또 다시 하나님에게로 돌아온다. 하나님의 영광의 외적인 유출과 회귀라는 이러한 영원의 운동 속에 피조물의 선은 자리를 잡는다. 그러므로 피조물의 선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실현 안에 포함되어 있게 된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궁극적 영광화는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실현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궁극적인 영광이 충만하게 드러나고 실현되는 최후의 공동체로서 이해된다. 이러한 하나님과 피조물의 보편적 공동체는 역사의 최종적 순간에 완성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러한 궁극적 공동체가 이 세계의 역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역사의 최종적 완성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계의 역사 속에서 비록 잠정적인 모습이기는 하지만, 참으로 성취된다.
이 항목에서 우리는 역사와 천년왕국에 대한 에드워즈의 이해를 살펴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에드워즈 자신의 후천년설을 통하여 역사에 대한 역동적인 이해를 전개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신념과 하나님의 영화에 대한 역동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에드워즈는 적극적인 역사이해를 펼치는데, 이에 따르면 역사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점진적으로 실현되는 장(場)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에드워즈의 비전은 그 나라의 시간적인 실현에 대한 기대를 고양시킨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에드워즈의 종말론이 역동적인 역사 이해에 공헌한다고 말하는데, 이는 그의 후천년설에 나타나는 것이다.
역사적인 시각에서 보았을 때, 하나님의 내적인 영광의 외적인 반복으로서의 하나님의 영광화는 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것을 통하여 이루어지며, 이것은 또한 구속의 역사가 지향하는 바이다. 에드워즈는 구속의 사역의 역사(A History of the Work of Redemption)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구속의 역사를 통하여 실현되고 있으며, 천년왕국은 하나님 나라의 역사 내적인 실현의 한 단계임을 강조하고 있다.
먼저 에드워즈는 구속의 사역의 역사에서 인간 역사를 세 단계로 구분하고 있는데, 곧 그리스도 이전의 시대, 그리스도의 시대, 그리고 그리스도 이후의 시대이다. 이 시대 구분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그리스도 이후의 시대는 모두 종말로서 간주된다는 것이다. 세 번째 단계는 "세계의 종말"로서 불릴 수 있는데, 그것은 "이 모든 시대가 사물을 위대한 목적에로 마무리하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로 세계의 종말에 이르는 단계는 하나님 나라의 건설로 특징 지워진다.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표는 그 속에서 자신의 아들을 위한 나라를 제공하기 위함이다."
에드워즈는 인간 역사를 하나님 나라가 점진적으로 실현되는 영역으로 파악하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미래 역사에 대하여 적극적이고 희망적인 태도를 전개한다. 즉,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교회를 위한 진정한 미래의 가능성을 긍정한다. 다시 말하자면, 에드워즈는 전천년설이나 무천년설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후천년설적인 역사 이해를 전개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에드워즈의 후천년설이 낙관적인 인간 이해에 그 기초를 두고 있지 않음을 지적해야 한다. 인간의 실상에 대해서 에드워즈만큼이나 현실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인간의 죄악된 실상에도 불구하고, 에드워즈는 후천년설적인 역사 이해를 전개하는데, 그의 역사 이해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믿음과 자신의 내적인 영광을 외적으로 실현하는 하나님의 전달적인 속성에 대한 확신으로부터 비롯된다.
개신교 종교개혁자들은 천년왕국설에 대하여 대체로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 개혁자들의 비판은 천년왕국설이 미래에 대한 세상적이며, 육체적인 기대를 꽃피웠고,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영적인 성격에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칼빈은 천년왕국적인 사고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한다. 천년왕국에 대한 칼빈의 비판은 중요한데, 그것은 칼빈의 비판이 주요 종교개혁자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칼빈은 천년왕국설이 기독교 희망의 진정한 내용을 가난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그것을 비판한다. 칼빈에 따르면, 천년왕국설은 기독교 희망의 거짓된 시간화이다.
이러한 비판에 대하여, 에드워즈를 변호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브라이언트는 천년왕국적인 기대가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브라이언트에 따르면, 에드워즈는 자신의 생애의 말기에 후천년설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에드워즈의 종말론에 대한 하이머트의 해석을 비판하면서, 브라이언트는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이 분명히 "초월적인 목표"에 놓여 있었고, "지상의 나라"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고 말한다. 브라이언트에 의하면,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창조의 목표는 "초역사적이며 영적인" 것으로서, 그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브라이언트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는데, 에드워즈는 "역사적인 과정을 이 세계 내적인 하나님의 나라로서 이해하는 종말론"을 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브라이언트의 이러한 에드워즈 해석은 진리의 반쪽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에드워즈가 역사의 미래에 일종의 황금시대로서의 천년왕국을 기대하였음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이러한 에드워즈의 후천년설이 과연 기독교 희망의 궁극적 차원을 약화시키는가의 문제이다. 칼빈이 비판하고 브라이언트가 변호할 때에 가정하고 있듯이, 에드워즈의 후천년설은 기독교 희망의 내용을 빈곤하게 만드는가? 역사에 대한 후천년설적인 에드워즈의 해석은 그 자신의 근본적, 신학적 주장과 정말로 모순되는가? 여기서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답변할 수밖에 없는데, 에드워즈의 후천년설은 기독교 희망의 내용을 오히려 풍성하게 만들며, 또한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전달적 측면을 강조하는 에드워즈의 근본적, 신학적 틀에 전적으로 합치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화에 대한 에드워즈의 역동적 이해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초역사적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야 할 것을 요구한다. 여기서 천년왕국과 하나님 나라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보다 자세히 고찰해 보도록 하자.
자신의 구속의 사역의 역사에서 에드워즈는 천년왕국의 개념을 보다 포괄적인 하나님 나라의 도래하는 틀 속에 통합시키고 있다.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의 궁극적 대상은 천년왕국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실현임은 분명하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는 초월적인 실재로서 오직 역사의 마지막에만 실현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초월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에드워즈는 또한 하나님 나라의 내재적 성격도 역시 강조한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역사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이 그저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정적인 실재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계의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가시성(visibility)을 추구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드러남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그 초월적 실재를 이 세계 속에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궁극적 실현은 이 세계의 마지막에야 충만히 실현될 것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이 역사 속에서 주기적으로 완성에 다다르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하나님 나라 이해를 그리스도의 나라의 네 차례의 도래의 틀에서 설명한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하나님의 나라는 네 차례에 걸쳐서 다가온다. 그 가운데 세 번째 도래로부터 천년왕국이 시작된다고 보았다. 천년왕국을 하나님 나라의 도래라는 틀에서 파악함으로써, 에드워즈는 인간 역사의 최종적 완성의 중요성을 손상하지 않으면서도 천년왕국의 제한적인 중요성을 강조한다. 즉, 천년왕국은 역사 속에서 성취되는 하나님 나라의 궁극 이전의(penultimate) 실현으로서 이해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 역사의 진보 가운데서 예기적으로 실현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후천년설을 통하여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나라가 단지 먼 미래에만 의미 있는 실재가 아니라, 바로 역사적이며, 세계적인 차원에서도 의미 있는 실재하는 성서적 확신을 긍정하고 있다. 이러한 면에서 천년왕국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필수적이기까지 한데,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란 그저 추상적이고 초역사적인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역동적인 개념으로서 이 역사 속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실현하는 실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내재적 차원에 대한 에드워즈의 강조는 천년왕국을 건설함에 있어서 인간 참여의 실질적 중요성에 대한 강조로 이어진다. 에드워즈는 제1차 대각성 운동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부흥운동을 강조하였다. 부흥운동에 대한 에드워즈의 강조는 단순히 영혼을 모으는 개인주의적, 영혼주의적(spiritualistic) 동기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부흥운동은 하나님 나라의 점진적 발전에서 그 중요성을 찾는다. 에드워즈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의 위험성에 대하여 누차 경고한다. 자신의 후천년설을 통하여, 에드워즈는 세계에 대한 도피주의적 태도를 거부하고, 인간역사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를 전개한다. 다시 말하자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에드워즈의 후천년설적인 희망은 이 세계에 대한 책임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부흥 운동에 대한 에드워즈 이해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역동적인 이해와 그러한 영화의 과정 속에 대한 인간 참여의 강조 속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절(節)의 내용을 정리하도록 하자: 에드워즈의 후천년설에 대한 논의를 통하여, 우리는 에드워즈가 역사 속의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공동체적이며 구체적인 이해를 전개하고 있으며, 따라서 천년왕국에 대하여 개인주의적이며 영혼주의적인(spiritualistic) 이해를 거부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천년왕국이란 인간의 영혼에 대한 그리스도의 영혼적인 지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천년왕국에 대한 영혼주의적 견해를 거부함으로써, 에드워즈는 천년왕국의 신체적, 구체적 차원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천년왕국에 대한 이해 속에서 에드워즈는 인간 역사에 대하여 균형적인 이해를 전개한다. 인간 역사의 궁극적 완성의 차원을 외면하지 않는 가운데,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영광의 역사 내적인 실현의 중요성을 또한 강조한다. 에드워즈는 천년왕국을 구원의 역사의 궁극이전의 완성으로서 이해하는데, 이러한 이해는 역사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로 이어진다.
여기서 우리는 천년왕국에 대한 에드워즈의 강조가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궁극적 비전의 상실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역사의 최종적 목표는 언제나 새 하늘과 새 땅을 지향하는데,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히 드러나는 최종적 완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천년왕국 속에서 인간 역사의 잠정적인 목표를 발견한다.
비록 천년왕국이 새 하늘과 새 땅은 아닐지라도, 하나님 나라의 예기적 실현으로서의 천년왕국은 이 세계 내적인 희망의 구체적 목표로서 기능한다. 따라서 에드워즈는 인간 역사의 최종적 완성의 측면을 간과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비록 잠정적이기는 하지만) 성취에도 주목하고 있으며, 이것은 그가 하나님 나라의 성취에 있어서 인간의 참여가 상대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의 종말에서 실현될 초월적인 실재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 세계 내적인 역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의미에서의 초월적 실재는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실재는 역사의 시간적 차원과 관련을 지음으로써 구체적으로 실현되고 또 드러난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내재성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도 하나님 나라의 내재성은 주의 깊게 그 의미가 밝혀져야 하는데, 그것이 인간의 소유 가운데 있거나 또는 인간 역사와 동일시된다는 의미에서의 내재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충만한 실현은 언제나 인간의 성취를 넘어서 있는 것이므로, 에드워즈는 인간의 참여에 대한 그의 지속적인 강조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인간의 소유로 돌려놓지 않는다.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시간적 실현은 오직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예기적 실현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실현과 반복임을 강조해야 한다.
우리가 살펴본 파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이 역사 속에서 진행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죄와 악의 세력에 대항하여 승리할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전달적인 속성에 대한 강한 신념에 근거하여, 에드워즈는 하나님 나라의 점진적인 진행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보였다. 미래는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보다 충만하게 드러낼 영역이므로, 에드워즈는 역동적인 하나님 나라 이해와 함께 적극적인 역사 이해를 전개한다. 즉, 에드워즈의 적극적 역사 이해는 교회로 하여금 역사 속에서의 구체적인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도록 권면한다.
4. 영원한 생명의 성격: 새 하늘과 새 땅
새 하늘과 새 땅의 주제는 에드워즈의 신학적 성찰에 있어서 매우 소중한 주제이다. 에드워즈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성격을 묵상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보냈고,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모습에 대해서 무엇인가 구체적인 것을 말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다. 먼저,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의 창조, 섭리, 구속의 사역의 목표로서 여겨지고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이전의 모든 혁명의 목표, 그들[성도들]의 수고와 고난의 최고의 보상, 그리고 세계의 이전 부분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섭리의 이러한 놀랍고 이어지는 모든 경륜의 궁극적 목표"로서 이해된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이전의 모든 혁명들의 최종적 목표로 여겨지기에, 지상에서 교회가 누렸던 모든 영광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완성된 영광에 비하면 "희미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부활 이후의 영광에 비하면 이전 시대의 영광은 "아무런 영광이 아니다." 부활 이후의 상태는 "완성의 상태"인 반면에, "하늘과 땅 모두에 있어서, 이전 시대의 교회의 영광은 자라 가는 상태에 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영생이란 하나님의 충만함의 참여로서 요약될 수 있는데, 성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인 삶의 외적인 반복 가운데 참여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은 철저하게 삼위일체론적 시각에서 전개되고 있다. 에드워즈의 용어로 표현해 보자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성도들은 "영광스러운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회 속에 용납 받게" 된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모든 일들을 통하여 성부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람들을 하나님의 권속 안에 포함시키게 하며, 따라서 그들은 말하자면 한 사회, 한 가족이 된다. 그리하여 그의 백성들은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의 신성 안에 있는 세 위격의 사회 속으로 용납된다.
기독교 신앙(Christian Faith)에서 베르코프(H. Berkhof)는 영원한 생명을 "세계의 마지막"이나 "시간의 종말"로서 이해하기보다는 "진정한 삶의 시작"으로서 이해하고자 하는 착상을 전개하고 있다. 베르코프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그의 인간 피조물을 이러한 잠정적이며 소외된 형식의 삶으로부터 불러내어, 하나님의 현존이라는 고향 속으로 인간을 데려갈 때, 마침내 삶이 참으로 시작된다." 베르코프의 이러한 주장은 에드워즈의 영생 이해에도 적용된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모든 만물의 마지막"은 "어린 양의 결혼잔치"인데, 이것은 곧 영생의 시작이기에, 영생이란 진정한 삶, 참된 삶의 점진적인 전개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에드워즈의 영생 이해를 살펴보기 위하여, 에드워즈가 전개하는 지복의 비전, 새 땅의 비전, 그리고 천국에서의 행복의 역동성 등의 주제를 살펴보기로 한다.
모든 세대의 신학자들은 영생의 성격을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는데, 전통적으로 영생은 지복의 비전(the beatific vision)으로 여겨져 왔다. 자신의 종말론적 비전을 서술함에 있어서, 에드워즈도 역시 하나님에 대한 지복의 비전을 중요한 표상으로 간주한다. 영원한 축복의 삶에 대한 가장 흔한 정의는 하나님에 대한 지복의 비전(the beatific vision of God)이다. 많은 고전적인 신학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비전을 영생의 핵심으로서 간주하고 있다. 신의 도성(City of God)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늘에서 ... 우리는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비물질적 하나님을 볼 것이다." 신학대전(Summa Theologica)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도 역시 지상의 비전과 지복의 비전을 구분한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지복의 비전은 하나님에 대한 보다 직접적이며, 즉각적인 비전으로, 오직 하늘의 성도들에게만 허락된 것이다. 칼빈도 요한일서 3장 주석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복의 비전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그때에 가려지지 않고 명확한 가운데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볼 것이며, 이것은 새롭고 표현될 수 없을 정도로 전적으로 거룩한 양식의 비전이다."
하지만 이러한 지복의 비전은 현대에 와서 여러 모로 비판을 받아왔다. 지복의 비전에는 세계와의 수평적인 관계에 대한 강조점이 거의 없음이 지적되어 왔고, 따라서 이것은 개인적이며 수동적인 비전으로서 여겨졌다. 또한 이것은 사변적인 개념으로서,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피할 수 없는 경계를 무시하고 있음이 지적되기도 하였다. 요약하자면, 하나님에 대한 지복의 비전은 영생에 대한 우리의 기대의 본질적인 면을 다루고 있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버카워가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에 대한 지복의 비전이 성서적 증언 가운데 포함되어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늘나라의 주요한 축복에 대하여 논하면서, 에드워즈는 이러한 시도 속에 수반된 한계를 잘 알고 있다. 종말이 아직 다다르지 않았으므로, "그러한 것들[즉, 마지막 일들]에 대해서 우리는 거의 알지 못한다." 게다가, 에드워즈는 천국의 행복에 대하여 논하면서 언어의 불충분성에 대해서 말한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우리의 가장 뛰어난 수사(修辭)를 통해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전부도 분명한 진리 그대로의 모습에 비하면 참으로 한참 아래에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드워즈는 천국의 행복을 기술하는데, 이는 천국의 행복이 성도들이 현재 누리는 행복과 전적으로 불연속적인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천국의 본질적 행복은 구속받은 성도와 삼위일체 하나님이 누리는 존재론적 교제의 완성이지 그 부정(否定)이 아니다. 여기서 에드워즈는 영생 이해를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존재론적 교제의 맥락 속에서 전개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에 대한 지복의 비전은 성도가 하나님과의 존재론적 교제 속에 참여함으로 맛보게 되는 것이지, 인간의 지성적인 한 기능이 하나님화(化) 함으로써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참여로 인하여, 성도들은 하나님이 내적인 삼위일체 안에서 서로 누리는 지식, 사랑, 행복에 참여하게 된다. 따라서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영생의 본질적인 성격은 지적인 투시와 시각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적인 교제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에드워즈의 지복의 비전이 순전히 지적인 투시와 시각이기보다는 존재론적인 교제와 참여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여기서 성도들은 인간학적인 고양(anthropological elevation)에 의하여 하나님의 공동체 가운데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인한 기독론적인 관계(christological relationship)에 의하여 하나님의 공동체 안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에드워즈의 지복의 비전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신비적 합일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하나됨은 피조물의 고양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관계적 역사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천국의 성도들은 지상의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면에서 하나님에게 의존한다.
천국의 성도들은 자신의 모든 행복, 자신의 모든 거룩함, 그리고 자신의 모든 빛에 있어서 지상의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에게 의존한다. 지상에서와 마찬가지로, 거기에서 모든 것은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지복의 비전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으로 가득차 있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에드워즈의 영생 이해가 인간의 피조물 됨을 부인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하는 것이 또한 중요하다. 천국의 완성된 삶이란 인간의 유한성의 폐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의 피조물 됨을 완성하며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공동체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과 피조물이 하나의 의식이 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관계는 언제나 상호관계로 남는 것이다. 이에 대한 헨드리의 언급은 적절하다.
하나님의 영광의 주권에 대한 그의 강조에도 불구하고, 에드워즈는 이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하나님을 하나님이 아닌 것과 관계지우는 영광으로서 간주한다. 에드워즈가 하나님에의 회귀 가운데 있는 영광의 완전성에 대하여 사고하였을 때, 에드워즈는 이러한 완전성을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관계를 폐기시키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러한 창조주-피조물 사이의 관계를 더욱 고차적으로 완성시키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에드워즈가 말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피조물과 자신 사이의 무한하도록 완전한 하나됨"을 지향한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덧붙임으로써 에드워즈는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혼돈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그러나 "그 하나됨이 이제 무한하게 완전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특정한 때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지복의 비전에 대한 에드워즈의 이해는 그의 계시 이해와 일맥 상통하는 것으로, 이는 지복의 비전이 계시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전달의 종말론적 실현이기 때문이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계시란 하나님에 관한 어떤 한 교리의 전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전달이다.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아름다움과 탁월성에 해당하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늘나라의 주요한 행복은 하나님에 대한 지복의 비전에 있다. 하나님에 대한 지복의 비전이 성도들의 궁극적 행복으로 여겨지나,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다른 종류의 행복이 제외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궁극적 영화에 대한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은 다른 궁극 이전의 기쁨들에 대한 여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그의 사변 가운데, 에드워즈는 영생의 육신적 차원을 또한 포함한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성도의 마지막 상태는 단순한 영혼주의적 환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즉, 인간의 완성은 육체를 벗고 영혼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성도의 최종적 상태를 기술함에 있어서, 에드워즈는 새 하늘의 차원뿐만 아니라 새 땅의 차원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것은 곧 그가 육신적, 공간적 차원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의미한다.
새 땅에 대한 에드워즈의 이해는 매우 중요한데, 그것은 그의 영생에 대한 이해가 부분적이며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통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에드워즈는 영생의 실재를 무시간적이며 무공간적인 영역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영역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새 땅의 측면에 대한 강조를 통하여,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총체적이며 우주적 차원을 강조하기를 원한다. 하나님 나라의 실재는 몇몇 사람들의 영혼에 대한 사역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이 전 우주의 완전한 구속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새 땅에 대한 에드워즈의 강조는 하나님 나라의 우주적 범위에 대한 관점과 상응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성도의 최종적 상태를 생각함에 있어서 새 땅의 측면을 간과한다면, 영생에 대한 성서적 가르침은 축소되고 빈곤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에드워즈가 전개하는 새 하늘과 새 땅 이해의 역동적인 측면에 대해서 고찰해 보자. 에드워즈는 천국의 행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천국의 행복은 점진적(PROGRESSIVE)이며, 여러 시기가 있어서 그 속에서 새롭게 영광스러운 진전이 있다. 그리고 그 행복은 구속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께서 마련하시는 자신의 현현(顯現)을 보는(BEHOLDING) 것 가운데 있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천국의 행복은 이 역사 속에서 전개되는 구속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그런데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 가운데 특기할 만한 점은 이러한 천국 행복의 점진적 성격은 단지 역사적 과정의 영역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의 영역에도 적용되는 데에 있다. 즉, 에드워즈는 영생의 삶 가운데서도 시간적인 요소가 있음을 지적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에드워즈가 말하는 구속의 역사는 천국에서 그 완성에 다다르는가? 우리는 하나님과 피조물의 영화가 이 세계와 역사 속에서 점진적으로 진행되어 왔음을 살펴보았다. 이 세계와 역사 속에서 계속 진행된 그 영화의 과정은 천국에서 그 완성에 이르는가? 에드워즈는 이 문제를 구속 역사의 완성과 그 열매라는 시각에서 답하고 있다. 일단 구속의 역사는 천국에서 그 종말에 이른다. 구속의 역사는 무작정 진행만 되고 그 결말이 없는 역사는 아니다. 에드워즈는 말한다: "구원의 사역은 영원한 사역이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사역은 언제고 계속되기만 하면서 결코 완성되지 않는 사역은 아니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곧 바로 덧붙인다: "하지만 이 사역의 열매는 영원한 열매이다." 즉 마지막 시대는 "만물의 궁극적이며 가장 완전한 상태의 시작"이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더욱 풍성하게 드러낼 것이며, 성자의 영광이 더 풍성히 드러날 것이며, 따라서 성도들의 영광도 더욱 증가할 것이다. 물론 이것은 구속의 사역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구속(救贖)의 현실태의 영속적인 증대는 계속될 것이다.
에드워즈는 하나님과 피조물의 영화의 시작을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비유하는데, 이 혼인은 영원한 영광의 오직 시작일 뿐이다.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러한 혼인날은 결코 그치지 않을 것이다. ... 혼인의 기쁨은 영원토록 지속될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의 행복은 점진적(progressive)이기에 "하늘나라의 행복이 변화가 없는 것이며, 새로운 경우에 새로운 기쁨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는 견해는 하늘나라의 행복에 대한 잘못된 견해이다." 물론, 하늘나라 그 자체는 어떤 사악한 변화에도 영향을 받지 않으며, "그것을 파괴하거나 방해하는 모든 변화들"을 넘어서서 존재한다. 성도의 영화는 변화 없는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무한한 정도의" 변화를 수용할 수 있다. 변화와 진보의 종말이 쉽게 오는 지상의 행복과 천국의 행복을 대비하면서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지상의 연인들은 서로의 아름다움을 발견함에 있어서 어찌나 빨리 그 마지막에 다다르고 마는가! 그들은 너무도 빨리 서로의 모든 것을 보며, 너무도 빨리 하나되어 결국에는 서로가 누릴 수 있는 교제의 마지막에 다다르고 만다! ... 그런데 이 모든 것에서 영원한 진보가 있는 그 사랑은 얼마나 행복한가! 그 속에서는 새로운 아름다움이 계속적으로 발견되며, 더욱 더 큰 사랑스러움이 또한 발견된다. 그 가운데 우리 자신은 아름다움 가운데 영원토록 자라갈 것이다. 우리가 영원토록 점점 더 사랑스러운 표현을 발견하고 또 주고받을 수 있게 될 때, 우리의 하나됨은 더욱 가까워질 것이며, 우리의 교제는 더욱 친밀해질 것이다.
에드워즈는 영생을 일종의 새로운 역사로서 보는 견해를 전개한다. 즉, 에드워즈의 영생 이해의 이면에는 시간과 영원에 대한 그의 견해가 자리잡고 있다. 기독교 종말론의 영역에서 중요한 쟁점 가운데 하나는 시간과 영원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다. 여기서 에드워즈는 영원을 단순히 시간과 상반되는 것으로 보는 견해를 거부한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시간적 차원의 중요성은 심지어 영원한 삶 속에서도 상실되지 않는데, 이는 천국의 행복이 가장 역동적인 하나님의 내적인 삶에 참여하는 것이며, 그 가운데 피조물의 존재가 영화롭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화롭게 된 성도의 삶은 시간성을 포함한다.
에드워즈는 영생을 새로운 역사로 이해함으로써 자신의 영원 이해를 보다 풍성하게 만든다. 이 지상에의 과거의 삶의 기억과 하나님을 향한 지식과 사랑의 지속적인 성장에 대한 미래의 희망은 모두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영원한 삶의 본질적 특성에 속하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서는 인간의 현재의 역사 가운데 발견되는 것과 같은 과거, 현재, 미래 사이의 분리나 모순은 없을 것이다.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에 따르면, 상호 조화를 이루는 시간적 차원은 영원한 삶 속에서는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영화롭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에드워즈의 영생 이해는 천국 행복의 미래적 차원을 포함한다. "그들(성도들)이 완전한 행복을 누린다는 사실은 모든 증가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모든 희망을 배제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램지(P. Ramsey)가 지적한 바와 같이, 에드워즈의 천국 행복 이해는 "더 행복한 '완전함'으로부터 훨씬 더 행복한 '완전함'으로의 운동"으로 기술될 수 있다.
영원한 삶의 시간성에 대한 강조는 에드워즈로 하여금 또한 새 하늘과 새 땅의 행복이 무한히 진보할 것임을 강조하게 한다. 전통적인 천국 이해는 영원한 삶을 다분히 정적으로 파악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으나, 에드워즈는 영생을 매우 역동적으로 이해한다. 에드워즈의 영생 이해는 창조에서의 타락 이전의 상태의 단순한 회복 이상을 지향하고 있음이 강조되어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섬김 가운데, 하나님의 삶이 끝없이 펼쳐질 것이며, 이에 따라서 성도의 행복도 무한히 진보할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새로운 역사로서 이해함으로써,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은 영생에 관한 잘못된 견해 가운데 한 가지를 수정한다. 영생을 묘사하기 위하여 전통적으로 사용된 표상 가운데 하나는 영원한 휴식의 표상이다. 인간 삶의 완성의 이러한 측면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유명한 구절에도 나타난다: "당신께서는 우리를 당신을 위한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이오며, 그리하여 당신 안에서 안식을 발견하기까지 우리의 마음은 평화를 누릴 수 없읍니다." 히브리서 4:9에 따르면, 하나님의 백성의 최종적 목표는 "안식할 때"이다.
영생의 이러한 측면은 때로 인간 삶의 일종의 은퇴로 잘못 이해되기도 하였으며, 따라서 권태라는 감정을 유발하기도 하였다. 특히 현대인들은 영원한 휴식의 개념을 지루함이라는 개념으로 냉소적으로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에드워즈에 따르면, 권태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삶의 모습을 기술하는 데에 전혀 관계가 없는 단어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에드워즈의 역동적인 비전에 따르면, 하늘나라에서의 삶이 지루하다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견해이다.
물론 에드워즈 자신도 영원한 생명을 기술함에 있어서 휴식의 표상을 사용한다. "하나님께서는 안식할 것이며, 새롭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 모든 사람들은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인데, 이 안식에 비하면 이전까지의 모든 안식은 그 그림자에 불과할 것이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천국은 분명히 휴식의 장소이다. 그러나 천국에서의 영원한 휴식은 천국의 일에의 능동적인 참여와 결코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의 휴식은 무위(無爲)와 모든 행동의 중단에 있는 것이 아니며, 오직 모든 괴로움, 모든 수고, 모든 지겨운 일의 중단만을 의미한다. 가장 완벽한 휴식은 계속적으로 일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하늘나라에 이르면, 실업자(失業者)가 되어서 아무 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영광 가운데 있는 성도는 지상의 성도보다 훨씬 더 능동적이며 활동적인데,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되 모든 무익한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케 된 가운데 하나님을 찬양하기 때문이다. 영광 가운데 있는 성도들은 특히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인 삶 가운데 참여하기에, 성도의 삶은 정적이거나 지루한 삶일 수는 없다. 에드워즈가 말하듯이, "하나님 자신도 무한한 행복을 즐기고 있다. ... 하지만 하나님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 자신의 본성 가운데 하나님은 완전한 행위이며, 또한 계속적으로 일하고 계신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하늘나라에서 성도가 누릴 "거룩함의 원리"는 "가장 활동적인 원리"이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에서의 성도의 삶에 비교해 보면, 지상에서의 성도의 삶은 "매우 단조롭고 지루한 것이며, 따분하며 활발치 못한" 삶이다.
이 세계 속에서 성도들은 매우 지루한 가운데 있어서, 따분하며 활발치 못하였으나, 이제 그들의 타오르는 불과 같다. 그들은 단지 수동적이 아니라, 활동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에 의하여 작용을 받는 대상일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행동하며, 이러한 행동과 재-행동(re-action)에 하늘나라의 행복이 있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영생을 하나님의 지식과 사랑 가운데 영원토록 역동적으로 자라 가는 것으로 간주한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교제 가운데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인 삶 가운데 끌려 들어가기에, 영생은 결코 정적이며 변화 없는 상태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찬양 가운데 하나님의 삶이 끝없이 피조물을 향해 펼쳐질 것이며, 피조물은 또한 하나님 지식과 사랑 속에서 무한한 진보를 경험할 것이다.
5. 결론
우리는 지금까지 종말에 대한 에드워즈의 비전을 살펴보았다. 우리의 분석 가운데서 우리는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이 그의 삼위일체론적 하나님의 영화의 틀 위에 토대를 두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은 근본적으로 삼위일체론적인데, 그것은 그가 영원한 생명의 본질을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삶 가운데의 참여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성도의 최종적 운명은 이 세계적인 현실로부터의 도피로 여겨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체와 역사 안에 더욱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 피조물의 삶과 역사의 영화는 오직 그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삶과 역사 가운데 포함될 때, 이루어진다. 이러한 삼위일체론적 틀에서 살펴볼 때, 우리는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의 몇 가지 특성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은 무엇보다도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공동체적인 차원을 가진다. 우리는 이미 에드워즈의 개인적 종말 이해가 역사적 차원의 종말 이해의 틀 속에서 전개됨을 지적하였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영생이란 고독한 개인적 실존이 끝없이 확장되고 연장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영생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공동체 가운데 성도가 참여하는 것이기에 근본적으로 공동체적인 특성을 지닌다.
맥대널(C. McDannell)과 랭(B. Lang)은 개혁자들의 영생 이해와 하늘나라 이해가 다분히 개인적인 용어로 전개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들의 하나님 중심의 전망에 보조를 맞추는 가운데, 개혁자들은 영생을 일차적으로 성도 개인이 하나님과 최고의 교제를 가지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에드워즈의 새 하늘과 새 땅 이해는 이러한 유혹에 빠지지 않는데, 이는 그가 성도의 행복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체적 삶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성도들은 "삼위일체의 사회 속에 들어가도록 허락된다." 이러한 점에서 개인주의적 종말 이해는 그 시작에 있어서 배제된다. 에드워즈는 고독한 자아의 끝없는 연장 속에서 영생의 삶을 찾지 않는다. 오히려 영생의 본질은 하나님과 피조물의 보편적 공동체 속에 능동적으로 참여함 가운데 발견되고 획득되는데, 이러한 공동체는 곧 하나님의 나라이다.
영생에 대한 에드워즈의 공동체적 이해는 개인의 종말에 대한 이해 가운데서도 발견된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죽음 이후의 성도의 운명은 보다 확장된 성도들의 공동체 속에 더욱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계기가 된다. 죽음의 이후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긴밀한 교제 가운데 있음으로 인하여 성도들의 보편적 공동체 속에 참여한다.
둘째, 우리는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이 가지는 역동적인 차원을 간과할 수 없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영원한 삶이란 무시간적이며 정태적인 삶이 아니라, 역동적인 삶이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영생은 역동적일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영화라는 시간적인 운동에의 참여이기 때문이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성도의 운명은 근본적으로 역사적인 성격을 지니는데, 그것은 성도가 하나님 자신의 영화의 운동 가운데 참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삶은 시간과 역사 안에서 반복되고 있으며, 성도는 바로 이러한 반복 가운데 참여하기에, 영생은 시간적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이러한 영생의 시간적인 성격에 근거하여, 에드워즈는 천국의 행복이 무한히 진보할 것임을 주장한다. 천국에서의 삶이 지루하고 반복적인 삶일 것이라는 우리의 기우(杞憂)는 영생에 대한 참된 이해를 반영하는 것이기보다는, 노동과 삶에 대한 우리의 왜곡된 이해를 반영하는 것일 뿐이다. 다음과 같은 베르코프의 견해는 에드워즈의 역동적 종말 이해의 특성을 잘 설명해준다.
완성(Consummation)이란 과거와 미래의 연속을 다시 한 번 사는 것을 의미하는데, 곧 과거가 우리에게 있어서 축복으로 움직이며, 또 미래가 현재를 통하여 그 빛을 발하는 방식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은 피조물, 특히 인간의 참여의 차원을 강조한다. 에드워즈는 자신의 종말론적 비전을 삼위일체론적 하나님 영화의 틀에 위치지음으로써, 인간의 참여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인간이 창조된 것은 하나님이 이루어 가는 영화의 운동(the divine movement of glorification)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결과들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지각 능력이 있는 존재를 창조하였고 그들은 의지력이 있고 능동적인 주체들 또는 매개체들로서 창조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능동적으로 촉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영생이란 이 세계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며,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삶에의 능동적 참여, 곧 이 역사 가운데 진행되고 있는 구원의 사역에의 심층적인 참여를 뜻한다. 자신의 종말론 이해에서의 성도의 운동에 대한 에드워즈의 견해는 성도의 운명에 관한 그의 이해 속에서 드러난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성도의 죽음은 이 세계로부터 저 세계를 향한 후퇴가 아니다. 오히려, 성도의 죽음은 성도로 하여금 희미했던 구원의 역사를 보다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도우며, 또한 새로운 방식으로 이러한 영화의 사역 가운데 참여하도록 만든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긴밀한 연합 가운데, 죽음 이후의 성도들은 구원의 역사에 대해 보다 강한 관심을 가지고, 또 참여하게 된다.
성도의 능동적 참여에 대한 에드워즈의 견해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의 후천년설적인 역사 이해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우리는 에드워즈의 후천년설을 고찰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함에 있어서 성도의 참여가 대단히 중요함을 살펴보았다. 먼저, 에드워즈의 신학적 비전은 철두철미하게 하나님 중심적임이 지적되어야 한다.
하지만 에드워즈 신학의 하나님 중심성은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있어서 그가 강조하는 인간의 책임과 양립하는 것이다. 에드워즈의 종말론에 있어서의 지속적인 주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화에 있어서 차지하는 성도의 역할에 대한 강조이다. 성도들은 끊임없이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 완성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요청 받고 초대받으며, 이것은 개인적 차원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차원에서도 사실이다.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표가 하나님 자신의 궁극적 영화이므로,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인간의 목표와 과제는 이러한 삼위일체적 영화의 과정 속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그의 확고한 신념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러한 확고한 신념으로 인하여, 에드워즈는 인간의 참여에 강한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갱신의 사역과 천년왕국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고찰하는 가운데, 에드워즈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독교적 희망과 이 세계에 대한 기독교적 책임이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바르트가 말한 바 "위대한 의"에 대한 시각을 놓치지 않으면서, 성도들은 인간 역사의 변혁 가운데 참여하는 것이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성도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는 것은 바로 그 나라가 이 역사 속에서 반복되는 것 가운데 참여하는 것을 통하여 성취된다.
인간의 참여에 대한 에드워즈의 강조점은 영생 이해에서도 약화되지 않는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죽음 이후에 맞이하는 영생이란 인간 삶의 은퇴가 아니라 새로운 삶, 진정한 삶의 시작을 의미한다. 영화롭게 된 성도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삶 가운데 참여하기에, 그들의 삶은 이곳 성도들의 삶보다 훨씬 더 활동적이 된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서론에서 우리가 지적하였던 에드워즈 해석에 관한 쟁점을 올바로 평가할 수 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종말론적 비전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참으로 초월적인 실재인데, 브라이언트는 이점을 올바로 지적하고 있다. 초월적인 실재로서,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성취를 넘어서서 있으며, 일차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신적인 선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하이머트가 주장하는 바와는 달리,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의 목표는 "최고도로 뛰어난 기독교 국가"의 실현에 있지 않았으며, 오직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확립에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영광의 신학자였으며, "경건한 옷을 입은 이념주의자"가 아니었다고 주장한 브라이언트의 논지는 옳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초월적 실재는 그저 공허한 선물(Gabe)로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또한 과제(Aufgabe)로서 주어지는 것임을 우리는 또한 지적해야 한다.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은 현실로부터의 도피로 이해되어서는 안되는데, 그것은 에드워즈가 초월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역동적인 영화라는 틀에서 이해하고 있고, 이것은 브라이언트가 말하는 바와 같은 이 세계적인 책임성으로부터의 후퇴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에드워즈가 이해하는 바 하나님 나라의 타자성(otherness)은 하나님 나라의 타세계성(otherworldliness)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해야만 한다. 여기서 에드워즈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이 세계의 역사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는데, 바로 이 점에서 하이머트는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이 가지는 이 세계적인 성격을 올바로 지적하고 있다.
역사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러한 논의는 우리로 하여금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에 관한 마지막 요점에 대해서 주목하도록 만든다. 우리는 에드워즈의 영생 이해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윤리적인 함축성을 지니고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다시 말하자면,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종말론)과 이 세계에 대한 책임성(윤리) 사이에 내재적인 관련성이 있다는 것이다.
에드워즈가 하나님의 영광을 역사의 최종적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을 이 세계에 대하여 무책임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성도의 궁극적인 희망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언제나 향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성도가 그저 하나님의 나라의 궁극적 실현을 기대하는 가운데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은 그러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역사 내적인 실현에 대한 기대와, 그것에의 능동적 참여를 더욱 고양시키는 것이다.
지나친 도피주의는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에 있어서 그 자리를 발견할 수 없다. 성도들은 역사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도록 부름 받고 있는데, 그것은 영원한 삶이란 세계의 마지막까지 그저 숨겨져 있는 미래의 실재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예기적인 실현은 이미 지금, 여기에서 주어져 있는데,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화라는 이러한 시간적인 운동 가운데 참여하고, 또 그러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도록 이미 초대받고 있다.
우리는 성도의 참여가 신앙인들 자신에게만 의미 있는 주관적인 체험이 아님을 아울러 지적한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의 운동의 참여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성도들의 행복이 증가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된다. 사실상 이 땅에서의 성도들의 참여에 의하여 더 영화롭게 되는 것은 단지 피조물만의 운명이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운명이기도 한데,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도 인간의 참여로 인하여 더욱 그 영광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성도의 참여는 갱신의 사역과 천년왕국 이해에도 나타나고 있는 바와 같이 구원의 전 역사에 있어서 계속되는 중요성을 가진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인간의 참여는 성도 개인의 삶과 인간의 역사를 넘어서는 보다 심층적인 중요성을 가지는데, 그것은 자신을 확대하고자 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운동이 바로 인간의 참여를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구원의 사역 가운데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완성시키는 것으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존재를 보다 영광스럽게 만드는 데에 공헌하는 것이다. 여기서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인들의 윤리적 삶이 그저 피조물에게만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삶의 반복과 확대에도 의미가 있는 것임을 주장한다.
성도의 활동이 하나님과 피조물의 궁극적인 영화의 맥락에서 이해되고 있기에, 에드워즈의 윤리에는 강한 종말론적인 논조가 들어 있는 것이다.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역사 내적인 점진적 실현과 드러남에 참여함으로써, "하늘나라의 즐거움과 기쁨의 전조"를 경험하게 되며, 그 가운데 그들은 이미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한 자신들의 여정 가운데 있는 것이다.
(서울여대 장경철 교수가 프린스턴 신학교에 제출하고 통과된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종말론에 대한 것이었다<Kyoung-Chul Jang, The Logic of Glorification: The Destiny of the Saints in the Eschatology of Jonathan Edwards. [Ph. D. Dissertation] >. 귀국한 후에 장교수는 자신의 학위 논문의 한글판 요약을 <목회와 신학>에 기고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