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생 우리말 사랑 길이 빛나리…
[허웅 학글학회장을 기리며]
설 전에 오랜만에 포근히 눈이 내렸다. 산에도 온통 눈이 쌓였다. 눈 덮인 산 ‘눈뫼’는 26일 타계하신 한글학자 허웅 선생님의 호이다. 86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흰머리 휘날리며 한글 연구에 앞장 서신 선생님의 부고가 너무도 느닷없다. 몸이 약해지셔서 한 달 전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우리말을 지켜온 그 열정과 활력으로 금세 툴툴 털고 일어나실 줄로만 알았다. 학문의 대상으로 국어를 바라보는 관점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국어를 과학적 연구 대상으로 객관화해놓고 보는 시각이다. 둘째는 국어를 우리 민족문화를 창조해 이끌어온 주체로 보는 관점이다.
학자에 따라 이 두 관점 가운데 어느 하나만 중시하고 다른 하나를 경시하거나 무시하는 예를 국어학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국어 연구에서는 과학적 방법으로 국어의 본질을 규명하는 것도 중요하거니와, 국어에 깃든 민족문화의 뿌리를 밝히면서 국어를 발전시키고 보전하려는 의지를 실천하는 것도 매우 가치 있는 일이다.
선생님은 국어 연구의 올바른 방향을 바로 이렇게 생각하셨다. 그리고 이렇게 가르치셨다. 또한 한평생 국어를 연구하는 동안 이를 몸소 실천하셨다. 그런 뜻에서 선생님은 탁월한 업적을 남기신 국어학자이시면서, 우리 민족문화의 바탕을 꿋꿋하게 지킨 국어운동의 실천가이셨다. 학자로서 선생님을 존경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학문적 태도 때문이다.
누구나 선생님을 처음 대하며 느낀 것은 그 밝은 미소에 묻어나는 너그러움이다. 선생님은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한결같이 자상하시면서 너그러우셨다. 늘 허허 웃으시면서 맞이하셨다. 그리고 좀 처지는 제자가 있어도 묵묵히 기다려 주셨다. 그러나 당신에 대해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선생님 표현대로 하면 논문 한 편 쓸 때마다 ‘피를 말리는’ 열정과 엄격함으로 많은 학문적 업적을 이루어내셨다. 선생님은 안으로는 엄격하시면서 밖으로는 너그러움을 지니셨다. 젊은 시절 운동장을 질주하던 축구 선수이자 감미로운 음악을 들려주던 기타 연주가의 모습, 늘 등산과 생맥주를 함께 하시던 모습은 그런 선생님의 일면이다.
선생님께서 일러주신 교훈이 많다. 그 가운데 떠오른 것이 논어의 한 대목이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학문이 어두움에 빠지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학문이 위태로움에 빠지기 쉽다.’ 공부할 때 남의 업적을 앵무새처럼 따라 하고 스스로 독창적인 연구를 게을리하는 것, 그리고 외골수로 자신의 생각만 고집하고 다른 사람의 업적에 눈 감아 버리는 것, 이 둘은 모두 학자가 경계해야 할 학문 태도라고 풀이해주셨다.
배움과 생각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학문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선생님은 가르치셨다. 선생님이 초창기 국어학의 이론적 기반을 마련하고 독창적인 연구 업적을 이루신 것은 바로 이런 배움과 생각을 조화시킨 학문 태도의 결실이다.
선생님은 가셨어도 우리 겨레의 소중한 문화유산인 우리 말과 글에 쏟은 선생님의 사랑은 길이 빛날 것이다. 선생님, 눈 덮힌 산에 고이 잠드소서.
/권재일·서울대 언어학과 교수
입력시간 : 2004/01/27 17: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