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을 받들며
꽃은 색의 세계에 핀 색이다
꽃의 색만 뺀
이 세상 모든 색들의
양보가 여기 있구나
이 어마어마한
꽃의 테두리,
향기로운
꽃은
찬란한 이별의 한복판이다
낮달
어떤가요
이것을 달의 영원한 모습으로 할까요
가난한 자의 편에 서 보았습니다
지나치게 야위었다고요
이렇게 딱 반쪽도 있지요
차거나 기울거나 출발 앞둔
경계선의 긴장감이 너무 팽팽한가요
그럼 둥글게 꽉 채워 볼까요
교만하고 게으른 냄새가 난다고요
그믐
어둠으로 깨끗이 지우고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낮잠도 자야 하는 하늘 화가가
꿈속에서 일을 하고 있나 보다
양곡 버스정류장에서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말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낮은 산골짝마다 작은 공장들이 숨어 있고
캄보디아 베트남 태국 필리핀 미얀마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네팔 몽골 우즈베키스탄 국기가
구멍가게 간판에도 그려져 있는
대곶면행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말들을 닮은 얼굴들
수염을 기른 젊은 말들
깊은 눈빛에서 솟는 말들
웅얼웅얼 굴러가는 어깨 좁은 말들
이곳보다 더 추운 나라에서 왔거나
처음 눈을 맞아보았을 말들이
주말이라 외출을 나왔다가 돌아가며
영하의 공중에 나직나직
말들의 섬을 만들어 놓는다
태양열로 온기를 공급하는
긴 간이의자에 앉아 있다가
곁이 된
한 사내의 통화를 듣는다
먼 고향에서 들려오는 듯
안쓰러움 담긴 나이 든 여인의 음성
찌릿―감전이 되어
사내의 고단한 노동 현장을 그려본다
펭귄 울음소리처럼 몰려 서 있다가
버스가 들어오자 우르르 몰려가는
저들에게, 여기는, 지금은,
저들 인생 어디쯤의 정류장일까
대곶면 사거리 과일가게 앞에서
대곶면 사거리 버스정류장 옆에
동남아 여인이 주인인 과일가게가 있다
도통 이름을 알 수 없는 낯선 과일들뿐인데
손님들은 좋고 나쁘고 신선한 것들을
딱 보아 구별할 수 있는지
검은 비닐봉지에 잰 손놀림으로 골라 담고
주인은 웃으며 말을 건넨다
혹여,
‘고향에서의 과일 신선도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이 과일들이 우리를 위해 여기까지 와준 마음을 헤아리자고’
농담을 던진 건 아닐까
언제였던가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던 사연 하나
‘동남아에서 경상도 시골로 시집을 왔는데
말은 통하지 않고 시집은 너무 가난해
하루하루를 견뎌내기가 힘들었지만
남편의 착한 마음만 믿고 살았지요
고향이 메콩강 강가라
민물고기만 좋아하는 입이 짧은 나를 위해
남편은 자주 민물고기를 잡아 오곤 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물고기를 잡으러 갔다가
물에서 뇌전증 발작을 해 남편이 죽고 말았어요…’
그 동남아 새댁은 어찌 되었을까
그 동남아 새댁의 꿈은 어찌 되었을까
이 땅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저 과일가게 여인처럼 고향 사람들에게
고향의 일부인, 향기 나는 흙, 과일을
전해 주고 있지는 않을까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저리 생각에 젖어 올려다보기도 하며
V자
우리가 날고 있는 방향이 아닌
날아온 길 방향을 봐주세요
먼길 힘들었지요
날갯짓 위로 아래로
쌕쌕 V자로
또 함께 V자 대형으로
기럭기럭 다짐하며 날아왔지요
우리도 땅 위를 두 발로
걷고 또 걸으며 살아간단다
보이니
지상에 가장 많은 글자
동무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