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동화사에서 수태골 방향으로 차를 몰아가면 부인사, 파계사가 잇달아 나타난다. 도로 오른편에 큰 돌로 세워 놓은 '부인사' 이정표를 보고 길을 오르면 포도밭이 좌우로 펼쳐지고, 이어 부인사가 나타난다. 부인사는 동화사의 말사로 7세기경에 창건되었으며 신라시대에 선덕여왕의 축원당으로 사세를 크게 떨쳤다. 경내에 선덕여왕을 모시는 사당 '선덕묘'가 있어, 매년 음력 3월에 제를 올리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거란의 침입을 막기 위해 판각한 초조대장경을 이곳에서 보관하게 했다. 이 초조대장경은 해인사의 팔만대장경보다 200년이나 앞선 것으로 알려졌다. 전성시절의 부인사는 인근 포도밭이 모두 절의 영역이었을 정도로 크게 번성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포도밭 속에 당간지주가 남아 있을 뿐 쓸쓸한 기운이 감돌고 있다. 경내에는 삼성각, 묘사 외에 선덕여왕을 모신 숭모전이 있다. |
파계사
|
| ||||||||||||||||
파계사 주위는 울창한 숲, 맑은 계곡이 선경을 이루어, 마치 속세를 벗어난 듯한 분위기에 젖어들게 한다. 부인사에서 서쪽 방향으로 차로 10여 분 저도 달리면 검문소와 함께 사거리가 나타난다. 이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파계사로 이러지는 오르막길이 펼쳐진다. 파계사는 804년(신라 애장왕)에 의해 창건되었다. 부인사가 신라 선덕여왕과 인연이 있었다면, 파계사는 조선 영조대왕과의 인연이 깊다. 조선조 숙종임금이 어느날 대궐 속으로 승려가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그 꿈이 너무 선명하여 신하를 시켜 남대문 밖을 살펴보게 하니, 정말 한 승려가 그 앞에서 쉬고 있었다. 그 승려가 바로 파계사의 영원선사였다. 기이하게 여긴 숙종임금은 영원선사에게 왕자 탄생을 위한 백일기도를 부탁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숙빈최씨에게 태기가 보였고, 이듬해에 왕자가 탄생했으니 바로 훗날의 영조대왕이다. 크게 기뻐한 숙종임금은 영원선사에게 현응이라는 호를 내린다. 현응은 지혜로운 승려였다. 다시 파계사에는 유생들의 횡포로 승려들이 고역을 치르고 있었다. 이에 현응은 왕실 선대 임금의 위패를 모시도록 숙종에게 청해 유생들의 횡포를 막아냈다고 한다. 지금도 파계사에는 현응대사의 비석과 부도, 그리고 영조대왕의 도포가 보관되어 있다. 파계사 경내에 들어서면 원통전을 중심으로 진동루, 설선당, 적묵당 등 격조높은 당우 4채가 '口'자형을 이루고 있다. 원통전은 그 중심 전각으로 영조대왕의 도포가 발견되었으며, 목관음 보살상(보물 제 992호)이 안치되어 있다.
<신숭겸 장군 유적지> 팔공산 진입로에서 파계사로 올라가는 파군재 주변에는 고려 신숭겸 장군의 유적지가 있다. 신숭겸 장군은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공산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고 전사한 인물이다. 927년 견훤군이 신라에 들어가 약탈을 자행하자, 황건은 군사 5천을 이끌고 팔공산 동수에서 견훤과 맞써 싸운다. 싸움은 의외로 대패하여, 왕건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신숭겸 장군은 왕건과 웃을 바꿔 입고 전장에 나가 장렬한 죽음을 맞는다. 전쟁이 끝난 후 왕건은 장군의 죽음을 애도하여, 지묘사를 창건하고 명복을 빌었다. 파군재에서 파계사로 접어들어 500m 정도 올라서면 나타나는 표충단이 바로 지묘사의 옛터이다. 지묘사는 고려 폐망과 함꼐 폐사가 되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와 그 폐사지에 표충단, 표충사, 충렬비를 창건하였다. 표충단은 나지막한 담장과 백일홍으로 꾸며진 아늑한 공간으로, 좋은 역사교육장이 되고 있다. 공산전투가 치뤄졌던 팔공산 일대는 왕건과 이 견훤군에 크게 패했다는 '파군재'(破軍栽), 전장을 탈출한 왕건이 몸을 숨긴 '왕산'(王山), 탈출로를 비춰주던 새벽달이 외뤄웠다는 '반야월' (半夜月), 이곳에 이르러서야 얼굴이 밝아졌다는 '해안' (解顔), 안심했다는 '안심' (安心) 등이 있다. |
팔공산
|
| ||||||||||||||||||||||
팔공산은 대구의 북동쪽을 감싸안고 있는 대구의 진산(鎭山)이다. 대구 사람들은 마을 뒷산처럼 스스럼없이 오르내리는 산이지만, 실제로는 해발 1,192m 높이에 총면적 122.08㎢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이다. 전체 능선 길이만도 20㎞에 이르는데 주봉인 비로봉에서 좌우로 이어지는 동봉, 서봉들이 날개를 퍼득이는 독수리마냥 기세좋게 뻗어 있다. 예로부터 팔공산은 신성한 것으로 여겨졌으며, 신라시대부터는 호국을 염원하는 불사가 계속되었다. 동화사, 파계사 등 천년고찰이 골짜기마다 들어서 있으며 불상, 탑, 마애불이 수없이 산재해 불교문화의 성지를 이루고 있다. 팔공산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동화사이다. 동화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들의 사령부가 있었던 곳으로, 호국불교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절 좌우로 경관 좋은 계곡이 몰려 있으며, 진귀한 보물과 내력을 간직한 암자들이 산중에 흩어져 있다. 동화사에서 길을 돌려 수태골 방향으로 달리면 부인사, 파계사가 잇달아 나타난다. 부인사는 신라 선덕여왕이 창건한 절로, 고려 최초의 대장경인 초조대장경이 보관되었던 곳이다. 파계사는 수려한 계곡으로 명성이 자자한 곳으로, 계곡의 물줄기가 흘러나가지도 못하도록 모은다는 뜻에서 파계사(把溪寺)라 하였다. 갓바위는 누구에게나 한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는 속설을 간직한 곳으로 관봉 정상에 자리잡고 있다. 정상까지는 돌계단이 길게 이어져 가벼운 등산을 즐기기에 좋으며, 정상에서 바라보는 팔공산 전경 또한 일품이다. 팔공순환도로를 타고 팔공산 기슭으로 접어들면 가산산성, 한티재, 송림사 방면의 길이 이어진다. 가산산성은 정상까지의 길이 평탄해 가벼운 등산을 즐기기에 적당하며, 억새풀이 군락을 이뤄 사진찍기에도 좋다. 송림사에 들어 아름답다는 5층전탑을 구경하거나, 한티재에서 곧장 내달려 삼존석굴을 둘러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동화사
|
|
| ||||||||||||||||
갓바위는 해발 850m의 관봉 정상에 위치한 석조 불상이다. 주차장, 식당 등 편의시설이 조성된 갓바위 집단시설지구에서 돌계단을 밟아 1시간 정도 오르면 정상에 당도하게 된다. 갓바위는 전체 높이 4m인 좌불로, 정식 이름은 관봉 석조여래좌상이다. 머리 위에 두께 15cm 정도의 평평한 돌 하나를 갓처럼 쓰고 있어 갓바위라 불리며, 둥근 얼굴에 굳게 다문 입, 당당하고 건장한 몸체에는 위엄과 자비가 깃들여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 걸작으로, 보물 제 431호로 지정되어 있다. 갓바위는 정성으로 기도하는 사람의 소원 가운데 한 가지는 꼭 들어준다는 소문으로 이른 새벽부터 방문객들로 줄을 잇고 있다. 매월 1일이나 입시철에는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며, 매년 1월 1일은 해돋이를 보려는 사람들로 더욱 붐빈다. 갓바위에서 경산 와촌과 팔공산 동봉으로 가는 길이 있다. 동봉행 등산로는 인봉, 노적봉 등 각양각색의 봉우리와 능선재, 신령재 등을 잇는 팔공산의 오른날개를 이루는 주능선길로, 등산객들에게 인기가 높다.
<북지장사> 동화사의 말사(末寺)인 북지장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고찰로, 보물 제 805호인 북지장사 대웅전, 대구 유형문화재 제 6호인 3층석탑, 대구 유형문화재 제 15호인 석조지장보살좌상이 있다. 북지장사대웅전은 조선 인조 원년(1623년)에 건립된 것으로 극락전으로 사용하던 것인데 원래의 대운전이 불 타 버린 후 대웅전으로 사용하고 있다. 대웅전 동쪽에 위치한 삼층석탑은 동, 서 쌍탑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단층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를 올렸다. 탑의 높이는 각각 3.8m, 화강암으로 조성된 석조지장보살좌상은 약 50년 전 대웅전 뒤쪽 땅속에 있다가 폭우로 지표에 노출된 것을 옮긴 것으로 결가부좌하였으며 높이는 1.1m이다. 갓바위와 동화사로 이어지는 도로변에 이정표가 있으며, 주변에 고려시대 이전의 유물인 건물지, 기단, 석탑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