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청라도(靑羅島)와 부근 섬들
지금 국제도시로서 인천의 총아가 된 청라신도시는 청라도만이 아니라 많은 섬들이 포함되고 광대한 갯벌이 포함된 매립지역이다.
청라도는 부평부 모월곶면의 가장 저명한 섬이었다. 원창동 환자곶 해안에서 3.5km, 연희동 용의머리반도 서단에서 2.5km 떨어진 섬이었다. 해발고도는 67.7m, 면적은 0.79 km²였다. 서곶 사람들은 파란 섬이라는 뜻으로 ‘파렴’이라고도 불렀는데 멀리 보이는 그 섬이 유난히 푸른색이기 때문이었다. ‘염’이 사멸된 우리말로써 섬을 말하는 것이었으므로 파란 섬이라는 뜻이다. 파렴은 서곶 앞바다의 섬들 중 가장 컸다.
썰물 때 부지런히 갯벌을 걸으면 밀물이 오기 전 섬에 이를 수 있었다. 원창동에서 가려면 갯골을 3개, 연희동에서 가려면 갯골 5개를 건너야 했다. 청라매립지가 만들어지면서 육지의 끝이 되어 버렸다.
원창동 환자곶 해안과 이 섬 사이에는 소도(小島), 소문점도(小文占島), 대문점도(大文占島) 등 작은 섬들이 놓여 있었다. 연희동에서는 그것들이 청라도의 일부처럼 보였다. 문점이란 무슨 뜻이었을까. 그 섬들 주변에 문어와 낙지가 많았다는 말씀을 아버지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아마 문어(文魚)에서 유래한 것으로 짐작된다.
청라도의 옛 지명은 고지도에 靑蘿 또는 靑羅로 실려 있는데 넝쿨 라(蘿)인가 벌일 라(羅)인가 따질 필요는 없다. 우리말 지명 ‘파렴’의 훈차이기 때문이다. ‘파렴’은 1911년 발간 『조선지지자료』에 포구 이름으로 실려 있다. ‘청라’가 한자 뜻도 좋고 어감도 좋지만 국제도시 지명을 지을 때 ‘파렴국제도시’라 하는 게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필자가 연희동에서 보낸 유년시절, 이 섬을 아이나 어른이나 ‘파렴’이라고도 불렀다.
청라도에는 지방 관장의 가렴주구에 대한 전설이 있다.
혹독하게 현물세를 받아낸 이야기이다. 선선한 가을이 되면 뭍에 사는 관리인인 좌수가 배를 타고 섬으로 왔다. 좌수는 그 섬에서 그렇게 거둔 새우젖 10독 중 2독을 수송비 명 목으로 빼고 1독은 자기가 먹고 1독은 세도가에게 상납했다. 나머지 6독은 부평관아에 바쳤다. 그러면 부평 부사는 자기 몫으로 또 2독을 떼어냈다. 나머지 4독을 경기감영으로 보내면 감영에서는 다시 2독을 착취하고 결국 2독만을 호조(戶曹)에 바치었다. 그래 서 섬마을은 혹독한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필자는 이 이야기를 서구의 설화집 『천마와 아기장수 외』에 썼다.
그리고 이 ‘파렴’에 관한 추억이 많다. 625 전쟁 때 서곶출장소 부소장이던 아버님이 남쪽 전라도로 탈출하신 뒤 그곳 분들이 우리 가족을 보호해주었기 때문이다. 서구의 역사일 것이므로 여기서 이야기를 해야겠다.
나는 세 살 때라 기억이 어렴풋하지만 누님들과 형님은 선명하다. 전쟁이 나기 직전 우리 집은 건넌방의 구들을 뜯어내고 다시 깔 공사를 하다가 중단했다. 인민군의 서울 점령 소식을 듣고 탈출하시기 전 날 밤, 아버지는 지게로 서류를 가득 담은 가마니 한 개를 지고 와서 내려놓았는데 서곶 12개 동의 호적이었다. 아마 북한군이 노획품으로 가져갈 것으로 판단하신 것 같다. 혹은 인천시에서 급히 명령을 내렸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당시 한미한 농촌이었던 서곶 지역을 관장하는 출장소에서 가장 중요한 게 전 주민의 호적이었다. 아버지는 미완성된 구들 골에 호적 담은 가마니를 집어넣고 밤새도록 흙을 발라 덮은 뒤 새벽에 연희동 용의머리 포구에서 어선으로 탈출하셨다. “나는 전라북도로 피해간다” 한 마디를 남기시고.
서곶은 며칠 후 인공 치하가 되었고 우리 식구들은 어머니가 인민군과 내무서에 붙잡혀 시달리느라 피난가지 못했다. 남편 탈출한 곳이 어디야 물으면 들은 대로 전라도라고 대답하셨다. 중학교 다니던 누님들도 심문 받았는데 전라도라고 들었으므로 그렇게 답했다.
어머니는 간신히 풀려 나오셨다. 이틀 후 깊은 밤에 조용히 누군가가 우리 집에 찾아왔다. 파렴의 중선배 선주인 김 씨였다. 우리 식구들은 밤중에 용의머리 포구로 나가 그분 배를 탔고 청라도에 도착해 김 씨 댁에 숨었다. 그곳 청라분교의 교사 사택에서도 지냈다. 수복된 뒤 알려진 사실, 아버지는 전라도로 가신 게 아니라 인접마을 경서동의 민가에 석 달을 숨어 계셨다. 나는 그래서 청라도를, 아버지를 지켜주고 우리 가족을 지켜준 고마운 섬으로 기억한다. 서곶 12개 동리 주민의 호적은 우리 집 구들에서 나와 다시 출장소로 돌아갔다.
어린 시절 필자는 형과 함께 용의머리반도의 돌출된 곳(돌부리라고 불렀다), 조선 말기 연희돈대가 있던 곳에 서서 파렴으로 출장 가신 아버지가 돌아오시기를 기다렸다. 여전히 서곶출장소에 근무하신 아버님은 청라도에 출장을 자주 가셨다. 바다 위로 멀리 보이는 그 섬이 유난히 푸른색으로 보였고 아버지가 탄 배는 파렴 앞에서 홀연히 나타나 순풍을 타고 뭍으로 왔다. 대개는 문어와 낙지, 굴 조개 같은 것을 들고 오셨다.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형과 나는 아버지를 따라 청라도에 갔다. 네 살 때 피난 갔었으니까 7년 만에 간 것이었다. 전쟁 때 우리 식구들을 숨겨주었던 김 씨 아저씨를 방문했고 형과 나는 큰절을 올렸다.
“‘아부지 빨리 태어 와요.’했던 꼬마가 그 새 많이 컸구나.”
김 씨 아저씨는 내 엉덩이를 툭툭 치며 말씀하셨다.
나는 말을 빨리 배운 아이였고, 배를 몰고 뭍으로 가는 아저씨에게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때 청라분교는 선생님이 없어서 비어 있었던 듯하다. 그 후 교원을 구할 때도 있고 못 구할 때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다가 이민제라는 선생님이 자진해서 분교장이 되어 청라도 아이들을 가르친 특집기사가 『동아일보』에 있다.
내 고향 연희동과 청라도 사이의 바다는 썰물 때 광활한 갯벌로 변했다. 맛조개가 무궁무진하게 잡혔다. 사리 때는 빠른 속도로 물이 밀려들어와 조개 잡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곤 했다. 6월에는 특히 게가 많이 잡혔다. 연희동 사람들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나가, 나문재풀에 암수가 매달려 짝짓기하는 것을 식은죽먹기처럼 잡아 망태에 넣었다.
일도(一島)는 문점도보다 컸다. 청라도 등 뒤에 숨듯이 앉아 있던 섬이었다. 위의 호도처럼 육지에서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매립되어 한국가스공사 기지와 한국전력공사의 인천복합 화력발전소가 앉아 있다. 그리고 위의 장도와 청라도와 더불어 방조제로 연결되어 서곶의 새로운 해안선을 형성하고 있다.
1970년대에 이명수 방죽이 뻗어갔고 청라도 사람들도 노임을 받으며 일했다. 이명수 사장이 동아건설에 이권을 넘겨주는 대가로 얼마를 받았는지 모르지만 그렇게형성된 재산이 청라매립지에 ‘청라 Dalton 국제학교’로 문을 열었다. ‘파렴국제학교’로 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