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시> 2013년 가을호.
* 육봉수 선배님, 감사합니다. 부디 평온하소서.
* 류경무 시인이 작품들을 골랐음. 유고 시는 맹문재가 선함.
육봉수
1957년 경북 구미 선산에서 출생하여 선산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구미, 김천 지역에서 생업에 종사하며 습작활동을 하였다. 1988년 포항의 『한국협화』에서 노조위원장으로 노동운동을 시작, 주로 현장에서의 투쟁의지와 활동을 주제로 작품활동을 해 나가면서 노동잡지「새벽」등에 다수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1990년 창작과비평 봄호에 「파업농성」외 4편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고, 1990년 고향으로 돌아와 노동운동에 뛰어들면서 주)화인정밀에 입사, 노동조합 결성을 주도하였다. 화인정밀의 교육선전부장, 사무국장을 역임하였으나 해고, 복직투쟁을 벌여나갔으며 이후 다양한 소규모 사업장에 입사, 몇 차례의 해고에 이은 복직투쟁과 함께 ‘구미노동자의 집’을 중심으로 구미지역의 노동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나갔다. 이 시기 근로기준법을 작품의 전면에 내세우는 특색 있고 개성적인 시를 써 나갔으며 노동자들의 삶을 보듬고 아우르는 따뜻한 시를 주로 발표했다. 2000년 들어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면서 활동을 지속하다가 낙향, 식구들과 떨어져 창작에 매진하던 중 2013년 5월, 고향 옥성마을 자신이 태어난 옛집에서 영면하였다.
파업농성 11
- 다시 내일
원료분쇄기의 진동음 규칙적으로
쿵쾅거리고 노후한
분사밸브를 얄밉게 빠져 나온
분진들 자욱하게 떠도는 여기 이
작업장 한가운데 함성이 있었다
난생 처음
스스로가 살아 있음을 살아서
숨 쉬고 있음을 확인하던 난생 처음
스스로의 위치를 스스로가 결정짓던 노동자의
눈물보다 통곡보다 어설픈 사랑보다
더욱 강하게 연결되던 함성이 있었다
매끄럽게 미끄러지고 있는 컨베이어 앞
구부정한 허리로 찌부러져 있는 입성들 어디에
그토록 큰 목청 불길 같은 용기 감추어져
있었던지 묻지도 말자 말하지도 말자 한 치의
벌레에도 두 치 오 푼의 혼 깃들어 있다는
그따위 자잘한 말쯤으로도 함께 울고 웃었던
절망과 기쁨 의미 없게 하지 말자
가만히
귀 기울이면 들리지 않는가? 과도한 용량으로
허덕이며 돌고 있는 집진기 흐릿하게 비추며
해삭한 빗살 힘없이 흩뿌리고 있는 작업등
무안하게 만들며 날렵하게 움직이는 손 끝 따라
세심하게 번득이는 눈빛 속 빨려드는
심장의 박동소리 맥맥한 혈관의 꿈틀거림
보이지 않는가? 일견 작업장 바닥 딛고 선
무르팍 위 실팍하게 실리고 있는 근육질의
다시 내일을 기다리는 파릇한 그리움 비로소
말문 열린 사람들의 정곡의 침묵 안전모 위
소리 없이 쌓이고 있는 분진의 두께
모르는 듯 털어 내는 고갯짓들 몸짓들
사이사이로 건너가고 건너오는 소리 없는 이야기들
약속들 들리지 않는가? 보이지 않는가?
점심시간 알리는 차임벨 채 울리기도 전
잡힐세라 식당 향해 뒤뚱대며 달려가는
푼수 없는 기름 빛 작업복 등짝에 묻어 맥없이
풀어지고 있는 햇빛 더미 속 여기 이
분답하기 짝이 없는 식당 어귀에도 어김없이
미칠 듯 뜨거운 함성이 있었다 함성보다 큰
투쟁의 실천이 있었다
근로기준법
1970년
겨울의 막 문턱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 앞 푸른 불꽃 휘감은 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내 죽음을……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외치던 한 청년
재단사의 죽음으로 인해 잠깐 동안
세인의 입초시에 제법은 본때 있게
오르내리기도 했었던 제1장 총칙으로부터
제2장 근로계약 제3장 임금 제4장 제5장
도합 9장 112조의 근로기준법
1953년
전쟁의 포연 한창인 항도 부산
어쩌면 한때 수탈의 음모 지천이었을지도 모를
군국의 적산 가옥 이층 소리 소문 없이
민족이, 민중이, 생산이, 발전이
꼬집자면 역사도, 정치도, 외세 침략의 의미마저도
몰랐을 듯 싶은 한 늙은 권력가의
저녁식사 후의 식상스런 한마디쯤의
지시에 의해 다만 구색만을
오로지 명분만을 목적으로 태어났던 그 이후
맹목적 발전과 번영을 기반으로
북 치고 장구 치던 정권 속 시나브로
개정과 개정 또 개정의 걸레처럼
너덜거리는 실상과는 달리 겉으로는 여전
있는 듯 마는 듯 혹시나 누설될세라
국가 기밀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그냥
보호 보관 소장되어 왔을 뿐인 순진무구
함구무언의 근로기준법, 그렇다고 무슨
기대어 반짝하고 빛나줄 아름다운 노동자의
미래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현장 생활 석삼년
한번만이라도 진정 우리의 것으로 껴안아보기 위해
애면글면 책장 넘기며 밑줄의 치는 것은
그날 그 시각 그 젊은 재단사는
왜 스스로 불붙어 산화했고
묶어라 묶어라 졸라매기만 해야 하는
가늘 대로 가늘어진 내 허리 하마
언제쯤이면 풀어볼 수 있을까? 하는
지극히 어리석은 질문 때문이다 섣부르게
함부로 만들어진 법도 법이지만 일껏
만들어 두고도 뒷전으로
뒷전으로만 내어 돌리려는 그 따위의 아리송한
의문 때문이다. 그렇다 생각할수록 우스운
지극히 어리석은 의문 때문이다.
아내들
직각으로 완강하던 어깨 반쯤 무너진 채
상경 투쟁 마치고 돌아와 열없이
두살배기 아들 어르고 있는 그이의 무릎 앞
관리비 고지서 모르는 척 들이민 날 밤엔
등 돌리고 누워 잠들기 십상입니다
일 년하고도 석 달을 넘긴 날들
눈앞의 돈 몇 푼보다는 노동자로서의 내
자존심 먼저라던 그 말에 꺼뻑죽어
노동자 아내의 자존심도 있긴 있지 그래
당신 멋있어 멋있어 박수치던 날들
속상해 억울해 뒤척뒤척
뒤척이기도 십상입니다
말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그러나
바람 닥칠 조짐 일자 텅 빈 공장 휑하니
제 밥그릇 뚝딱 챙겨 발 빠르게 떠낫다는
돈 되면 삼키고 돈 안 되면 뱉어내는
사장님 족속들의 밉살맞은 행태보다
돈 안 되는 일 부여잡고도 행복한 사람들
더욱 사랑하고 싶어진다 뚬벅하게 말문 닫고
어느 틈 드르렁 코골고 있는 아이의 아버지의
무너진 어깨 다시 일으켜 세우려 곰곰이
아침 밥상위에 올릴 고등어자반 뒤집을 생각으로
아슴아슴 잠들기도 십상인 그런 젊은
밤이기도 합니다 돌아눕긴 했지만
돌겠습니다
웬 떡인가 싶어 들어간 공장들
어영부영 일 년 안에 문 닫고
인심이 좀 좋다 싶어 단골로 내정한
칼국수집 막걸리집 곱창집 다
반년도 못가서 문 닫고
쓰시는 글들 읽을 만하다고 대충
존경할 만하면 절필하시거나 평균
수명도 다 못 채우시고
오십 넘은 나이까지 선거 때마다 흡족하게
찍어준 분들은 또 한분도 당선 안 되고, 참
돌겠습니다.
【유고 시】
2011 부산
-한진 중공업 앞에서
너에게 희망 준다고 달려가는 2차 희망버스 안에서
나는 자꾸 눈물을 훔친다 누가 누구에게
희망을 주고 있는가? 누가 누구에게 과연
희망을 주고 있는가?
줄기차게 비 내린다 즐겁게 두드리는
빗줄기 속에서 너의 삶을 생각한다 여기가
부산인가? 한진 중공업인가? 박창수가
죽었던 곳인가? 곰씹으며 크레인 올라갔을
너의 결정을 생각한다
왔다 간다 동지여 저들이 쳐놓은 차벽 결국
타넘지 못하고 넌지시 너의 희망을 나의
희망으로 껴안듯 고함 몇 번 지르고 빗속에서
행복하게 우리 왔다 간다 너도
행복하게 견뎌라 올해 장마는
유독 길단다.
【조시】
육봉수 외전(外傳)
- 故 육봉수 시인을 추모하며
류경무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찬 쏘주를 붓는다
아 이러다간 오래 못가지 이러다간 끝내 못가지*
형 오월이예요
일 년 열두 달 중에, 형이 제일 지긋지긋해 했던 오월
하지만 형이 제일 앞장섰던 오월,
피 솟구쳐 뜨겁게 앓아누웠던 오월
그날 선산 장날,
‘오월 봄장 너무 좋다 쏘주 먹으러 일루 나오소 형’
‘페헤헤헤헤헤 아침 댓바람에 나가서 미리 먹어뒀지
집에 가면 은기자 혼자 못 먹게 하잖여,
오늘은 갑자기 마누라 보고 싶어서 초곡서 일찌기 나왔어’
근데 이제,
어디로 갈거나 눈부시게 푸르른 오월
그렇게도 기다리던 휴일, 이제 갈 곳이 없다*
다 어디로 갔을까
그때 모두 어깨 꼭 끼고 성큼성큼 나아가던
정형, 이형, 문형*
지금은 다 파헤쳐진,
괴평 낙동강변 버드나무 아래 모여,
밤새워 시 읽고, 노래 불렀던 친구들, 형들, 가시내들
그래 그러고 보니
그때 우리는 모두 노동자였다
지금은 누구는 농사지으러,
누구는 열쇠가게도 열고,
누구는 임시직 공무원이 되고,
누구는 아직 머리띠 매고 철탑 위에 있거나
누구는 또 정치인도 되고,
더러 먼저 세상 버려서 여기 없는 사람도 있고,
그래서 어쩔 수 없지만
그때 우리는 다 동지였고 시인이었다 형!
그리고 지금-여기
아직 남아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든 안다
육봉수는 육봉수,
그때나 지금이나 육봉수는 육봉수,
육봉수는 하나도 변한 거 없다는 거,
거기 모른 척 누웠어도,
육봉수는 육봉수라는 거,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거!
형하고 나하고 닮은 것 하나 없는데,
똑같은 거 하나 있다.
당구 백 오십 갑장!
근데 맨날 형은 나한테 졌다, 왜냐하면 술 먹고 친 당구라서
처음부터 지려고 맘먹은 당구라서
형이 든 화투장은
맨날 다 들키는 화투장, 일부러 다 들키는 화투장
처음부터 돈하고 담 쌓았으니까, 애초에 없었으니까
몸무게 육십 키로 넘은 적 없어
술 취하면 누구나 가뿐히 들어 올렸던 형!
과연, 우리 중에 눈빛 제일 맑았던
보고 싶은 형!
그랬던 형이,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지
죽음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
기어코 형 때문에 우리들 지금 여기 다 모였다
그래서 좋겠다
우리들 사랑! 우리들 분노! *
다시 돌이키게 해서, 속 시원 하겠다
잘 가소 잘 가소
세상에서 제일 선한 눈빛을 하고, 잘 가소 이제 잘 가소
쉰 일 곱 해,
헛것의 몸뚱이에 시봉했던 세월 다 버리고
이제 가서 다시는 여기 오지 마소
부추 꽃 같이 남은 형수,
형하고 똑 닮은 근호 있으니 걱정 마시고 잘 가소
형은 갔어도 햇새벽은 올거니까
형은 갔어도 여기 남은 자들 있으니까
생전 첨보는 젊디젊은 영정 앞에
그렇게도 좋아했던
싸고 굵고 맛있는 담배, ‘하나로’ 한 개피,
차가운 쏘주 한 잔 부어드립니다
영면하소서.
2012. 오월 저녁에
*박노해,「노동의 새벽」,「어디로 갈거나」,「지문을 부른다」(『노동의새벽』,풀빛,1984)
*‘은기자’는 청년 시절 신문기자였던 고인의 미망인을 일컬음
류경무
1966년 부산 동래 출생. 1999년 『시와반시』로 작품 활동을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