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하나님이 유다에 알린바 되셨으며 그 이름은 이스라엘에 크시도다 그 장막이 또한 살렘에 있음이여 그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 거기서 저가 화살과 방패와 칼과 전쟁을 깨치시도다 (셀라) 주는 영화로우시며 약탈한 산에서 존귀하시도다 마음이 강한 자는 탈취를 당하여 자기 잠을 자고 장사는 자기 손을 놀리지 못하도다 야곱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꾸짖으시매 병거와 말이 다 깊은 잠이 들었나이다 주 곧 주는 경외할 자시니 주께서 한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 주께서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시매 땅이 두려워 잠잠하였나니 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판단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셀라) 진실로 사람의 노는 장차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는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너희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으라 사방에 있는 모든 자도 마땅히 경외할 이에게 예물을 드릴찌로다
저가 방백들의 심령을 꺾으시리니 저는 세상의 왕들에게 두려움이시로다 (시 76:1-12)
<설교>
여러분은 하나님이 세상에 살아계신다는 것을 믿는다고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보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 수 있다고도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신앙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는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믿음의 흔적이 없다면 아무리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해도 그것은 믿음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신의 존재성에 대해서는 일반 사람도 세상을 보면서 간혹 생각하고 느끼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1절을 보면 “하나님이 유다에 알린바 되셨으며 그 이름은 이스라엘에 크시도다”라고 말씀하는데,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유다에 알리신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를 알려주셨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존재를 알려주신 것이라면 ‘하나님이 존재하심을 믿습니다’라는 것으로 끝납니다. 하지만 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크신 이름을 유다에 알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크신 이름을 유다에 알리셨을 때 유다 백성에게서 나타나야 할 반응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자기 이름이 부서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이름 앞에서도 자신의 이름이 높임 받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크신 이름을 접한 적이 없고 그 이름 앞에 자신을 세운 적이 없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크신 이름을 유다에 알리심으로 시작하시는 것이 인간의 이름을 부수는 것임을 안다면 자신의 이름이 하나님의 이름 앞에서 부서지는 경험이 있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인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 앞에서 오히려 자신의 이름을 굳건히 하려고 애를 씁니다. 세상에서 자신의 이름이 높아져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면서 자기 이름이 높임 받을 수 있도록 힘이 되는 것을 달라고 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힘이 주어질수록 그 주체성은 더욱 더 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믿고 자기 이름에 모든 자존심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이름의 의미를 모릅니다. 단지 사람과 사람을 구별하여 부르기 위해 붙여 놓은 이름처럼 하나님을 부르기 위해 붙여진 이름으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주’ ‘엘로힘’등을 하나님께 붙여진 이름 중의 하나로만 생각하면서 그 뜻을 파헤쳐서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시는가를 아는 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의 뜻을 파헤쳐 알고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시는가를 알게 된다고 해도 그 이름 앞에 자신의 이름이 무너지는 것이 없다면 단지 하나님을 연구하는 수준일 뿐 죄인으로써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오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으로 하나님이 크신 이름을 유다에 알리신 것입니까? 2,3절을 보면 “그 장막이 또한 살렘에 있음이여 그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 거기서 저가 화살과 방패와 칼과 전쟁을 깨치시도다 (셀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장막이라는 처소에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고통스럽게 하는 모든 전쟁을 깨치심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이 크시다는 것을 알리셨다는 뜻입니다.
5절을 보면 “마음이 강한 자는 탈취를 당하여 자기 잠을 자고 장사는 자기 손을 놀리지 못하도다”고 말합니다. 마음이 강한 자는 자기 힘을 의지하는 자를 뜻합니다. 힘이 있기에 그 힘으로 말미암아 두려움이 없이 마음이 강한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의지할 힘이 없는 사람은 스스로 나약해질 수밖에 없고 힘 앞에서는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마음이 강한 자가 탈취를 당하여 자기 잠을 잔다고 합니다. 세상에 어떤 강한 힘으로도 하나님 앞에서는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을까요? 그것은 신자가 하나님의 크신 이름 앞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안다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모든 것을 소유한 힘 있는 자보다 더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에게 세상의 힘을 대항할 수 있는 힘을 주셔서 세상을 이기는 자로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의 잘못됨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힘을 주시는 분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힘이 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 세상을 이길 힘을 주시고 세상에서 높은 자가 되게 하셔서 하나님이 영광 받으신다는 성경과 전혀 상관없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자기 존재성에 매어 살아가는 인간의 악함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현재의 형편과 환경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불만과 원망을 가지고 ‘하나님 왜 이렇게 하십니까?’라고 반발할 뿐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자신에 대해 참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9절을 보면 “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판단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는 말을 합니다.
온유가 인간의 성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짐작하실 것입니다. 만약 온유가 성품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성품이 온유한 사람을 구원하신다는 뜻이 됩니다. 결국 온유한 성품은 선이 되고 온유하지 못하고 과격하고 급한 성격은 악이 돼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인간의 성품을 선하고 악한 것으로 나눌 수 없음을 생각해 본다면 온유는 성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온유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어떤 환경과 형편이 주어진다고 해도 자신들이 예상하신 못한 하나님의 계획이 자신들을 선으로 인도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라면 신자는 어떤 형편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믿음의 상태가 쉽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수시로 원치 않았던 형편과 상황에 휩쓸리면서, 그리고 그러한 형편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며 힘썼음에도 전혀 나아지지 않는 가운데서 자신의 모든 힘을 포기 해버리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믿고 그 계획에 나를 맡깁니다라는 믿음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온유한 자를 구원하신다는 것은 자신에게 있는 힘을 바라보면서 그것으로 자기 든든함을 삼고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밖에 있는 것이고, 자신에게 있는 그 무엇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힘도 될 수 없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가는 그들이 곧 하나님의 구원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온유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아무런 매력이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세상을 사는 재미는 자기 이름이 높아지고, 나라는 주체가 세상에 부각되고 굳건히 세워지는 것에 있는데 그러한 재미는 포기되고 사나 죽으나 하나님의 계획에 자신을 맡기고 조용히 흘러가는 것을 온유라고 한다면 누가 온유한 자로 사는 것에 흥미를 두겠습니까?
하지만 세상의 힘 또한 영원한 것이 되지 못하고, 하나님에 의해 탈취 당할 수밖에 없고 또한 영원한 생명의 문제에 대해서는 오히려 걸림돌임을 안다면 자신에게 무엇이 있든 상관없이 하나님을 바라보고자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자신의 삶을 맡기고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삶의 무거운 짐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고 참으로 가벼운 삶의 길로 들어가는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온유는 우리 스스로 만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이름 앞에서 서서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위대하심을 보게 되고 상대적으로 나의 이름의 초라함을 알게 됨으로써 그동안 나라는 주체를 위해 살았고, 나의 자존심을 위해 살았던 모든 것들이 악이었음을 알게 될 때 온유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결국 온유는 하나님의 크신 이름에 다스림을 받아 살아가는 상태라고도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런 온유의 자리로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필요로 하십니까? 여러분이 간절히 소망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하루를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돈입니다. 이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루를 살기 위해 필요한 돈은 여러분의 수중에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미래까지, 죽는 그 순간까지의 앞일을 우리가 스스로 결정하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하나님이 살게 하시는 삶이 아니라 내가 살고 싶은 삶을 꿈꾸고 있기 때문에 온유한 자가 아니라 세상과 동일하게 힘을 갖고자 발버둥을 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나의 이름이 높임을 받고 살다가 죽었다고 해도 그 영광은 계속되지 않습니다. 내 이름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내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미래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의해 결정되어 있는 미래를 바라보고 소망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를 사셨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했다고 아쉬워 할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하고자 하신 일은 완벽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내 일이 잘되는 것보다 하나님의 일이 잘되고 성취되는 것이 우리에게 생명이기에 신자는 하나님의 일이 성취되는 것으로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온유한 자입니다. 여러분께 함께 하는 믿음이 여러분을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온유로 이끌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편 75:1-10 뿔
<본문>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사를 전파하나이다 주의 말씀이 내가 정한 기약을 당하면 정의로 판단하리니 땅의 기둥은 내가 세웠거니와 땅과 그 모든 거민이 소멸되리라 하시도다(셀라) 내가 오만한 자더러 오만히 행치 말라 하며 행악자더러 뿔을 들지 말라 하였노니 너희 뿔을 높이 들지 말며 교만한 목으로 말하지 말찌어다 대저 높이는 일이 동에서나 서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여호와의 손에 잔이 있어 술 거품이 일어나는도다 속에 섞은 것이 가득한 그 잔을 하나님이 쏟아 내시나니 실로 그 찌끼까지도 땅의 모든 악인이 기울여 마시리로다 나는 야곱의 하나님을 영원히 선포하며 찬양하며 또 악인의 뿔을 다 베고 의인의 뿔은 높이 들리로다 (시 75:1-10)
<설교>
성경을 보면 볼수록 인간이 하나님을 신앙한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과는 너무 맞지 않다는 것을 실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지 않으시면 하나님을 신앙할 자가 아무도 없다는 말이 이해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믿음은 세상에 얼마든지 널려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믿음은 신을 믿어서 복을 받고, 재앙에서 건짐 받고, 문제가 해결되고, 만사가 형통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믿음이라면 굳이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지 않아도 우리 스스로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믿음은 단지 하나님을 유일한 신으로 인정해주는 수준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유일한 신으로 인정하면서 그 하나님께 자신의 소원을 비는 그러한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하나님을 유일한 신으로 인정하고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신앙인이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큰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1절을 보면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사를 전파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감사에 매우 익숙해져 있을 것입니다. 신자로써 입버릇처럼 나오는 것이 감사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밥 먹을 때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좋은 일 있으면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빼놓지 않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무엇 때문에 감사하느냐 입니다. 우리가 감사하는 것은 세상에서 힘이 되는 것이 주어졌을 때, 즉 우리가 의지할 만한 것이 주어졌을 때입니다. 그렇다면 낙심할 때는 의지할 만한 것이 주어지지 않아서 세상에서 힘없는 자로 존재할 때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고자 하는 것도 모두가 세상에 힘되는 것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어떻게든 힘 있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힘 있는 자로 살면서 인생의 맛을 누려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과연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일하시는 분일까요? 세상에서 힘되는 것을 주시고 그것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도록 일하시는 분일까요? 과연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은혜입니까? 그러한 하나님은 단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만 우상일 뿐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힘되는 것을 주신다면 인간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서 살 것 같습니까? 자기를 부인하며 힘되는 것을 주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신앙으로 살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힘이 주어지면 힘을 바라보고 의지할 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해 주의 이름으로 가까이 오시는 것입니다. 1절이 바로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께 어떤 분으로 오시기를 원하십니까? 오셔서 어떤 일을 해주시기를 원하십니까? 또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소원하시는 대로 이루시고 일하시기를 원하십니까?
세상이 기대하고 원하는 신은 자기 소원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소원 성취를 위해 존재하는 신을 원하는 것입니다. 다른 신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십시오’라고 하면 아예 듣기도 싫어하지만 ‘예수 믿으면 복을 받고, 병이 낫고, 문제가 해결되고, 평안을 누리고 행복하게 됩니다’라고 말하면 그러한 예수는 분명 싫어하지 않습니다. 다만 교회 다닌다고 해서 그렇게 된다는 것을 믿지 않기에 교회를 외면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분으로 오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백성에게 찾아오셔서 의지하고 있는 세상의 힘되는 것을 무너뜨림으로써 세상에 의지할 것은 없음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를 의지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주의 이름입니다. 즉 주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주가 내게 오셔서 어떤 일을 벌이시고 나를 어떠한 길로 인도하시는가를 안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의 이름이 가까운 것으로 감사하고 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이 곧 자신에게 진정한 복이 되고 생명이 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의 이름이 가까이 옴으로써 무너지는 것은 나의 이름입니다. 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살았던 모든 것이 헛된 것임을 발견하면서 주의 이름만이 높임받기를 소원하게 되는 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내 이름이 무너지고 부서지고 박살이 나는 그 현장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시기 위해 오십니다. 그리고 전지전능하신 주의 이름을 의지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주의 이름만으로 감사하게 되고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몇 십 년을 믿었든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몇 십 년, 또는 평생을 교회 다닌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뭔가 얻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교회를 다닌 횟수에 전혀 관심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인간의 공로에서 떠나지 않으려고 하는 우리가 관심을 두려고 할 뿐입니다. 그 모든 것까지 다 부인되고 부서지면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이야 말로 주의 이름 앞에 무너짐을 당한 신자라 할 수 있습니다.
시편 저자는 주의 이름에서 무엇을 봤기에 감사할까요? 2-5절을 보면 “주의 말씀이 내가 정한 기약을 당하면 정의로 판단하리니 땅의 기둥은 내가 세웠거니와 땅과 그 모든 거민이 소멸되리라 하시도다(셀라) 내가 오만한 자더러 오만히 행치 말라 하며 행악자더러 뿔을 들지 말라 하였노니 너희 뿔을 높이 들지 말며 교만한 목으로 말하지 말찌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 보면 주가 정한 기약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즉 주가 정한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약속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약속의 때가 이르게 되면 그동안 세상에서 세상의 것을 힘으로 삼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서 살았던 모든 악인들이 무너짐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의 약속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약속을 바라보는 신자는 약속이 임했을 때의 세상의 결말을 미리 내다보게 됩니다. 세상의 힘을 의지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높이고 살아가는 악인들의 결말을 미리 내다보기 때문에 세상의 힘에 대해 안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주의 이름이 가까이 옴이 감사함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약속을 바라보는 신자에게 약속을 이루시는 주의 이름이 가까이 온다는 것은 곧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들어감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주의 이름에는 우리가 전혀 상상치도 못했던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들어 있습니다. 십자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세상이 상상이나 했습니까? 하나님의 구원이 독생자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는 것으로 나타날지 누가 생각이나 했습니까? 그래서 신자는 주의 이름 앞에서 자신의 생각이 모두 버려져야 하고 대신 하늘의 지혜로 채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높임 받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참으로 허망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신자입니다.
6,7절을 보면 “대저 높이는 일이 동에서나 서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세상에 있는 것들이 자신을 높여 줄 것이라고 생각해서 세상의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살아가지만 사실 낮추고 높이는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높임 받는 자가 누구며, 낮춤 받는 자가 누구냐인 것이지 스스로 자신을 높이기 위해 세상의 것을 찾아 간다면 그것이야 말로 망하는 길로 달려가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높임 받는 사람은 주의 이름을 가까이 하고 그 이름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주의 이름을 의지한다는 것은 달리 의지할 세상의 것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낮아지게 되는 사람은 앞서 말한 대로
세상의 것을 자기 힘으로 삼고 그것으로 자신을 높이기 위해 사는 사람들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세상의 힘되는 것을 구하고 자신이 높임받기 위해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기대하며 주의 이름을 부릅니까? 만약 세상의 힘을 기대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스스로 망하는 길로 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멸망을 자초한다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이 제공하는 하늘의 의를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땅의 것을 의지하고 그것을 힘으로 삼는 것이라면 곧 주의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행악자의 뿔, 즉 세상의 힘의 결말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그 결말을 선명하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정하신 때와 기한이 이르렀을 때 하나님이 세상에 어떤 일을 행하실지를 바라보며 세상의 뿔이 아니라 주의 이름이라는 뿔을 높이 들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주가 나의 구원이고 생명이 되심을 생각하며 주의 이름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뿔은 그리스도뿐입니다. 마지막 때에 우리를 살리는 참된 힘은 오직 그리스도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주를 떠나서는 살 수가 없는 것이고, 주의 이름으로 인해 감사하고 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인간에게서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인간에게서 나오는 믿음이라는 것은 오직 자기중심이고 자신을 사랑해 달라는 욕망으로 나아갈 뿐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결코 우리의 생명이 되지 못합니다.
교회는 같은 주의 이름을 부르고, 주의 이름으로 인해 감사하는 관계를 뜻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나라는 존재가 드러나지도 높임의 대상도 되지 않습니다. 오직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할 분입니다. 세상을 뿔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뿔로 의지하면서 주님만 높이 자랑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이 교회에서는 주의 이름으로 인한 감사로 가득할 것입니다.
시편 74:1-23 탄식과 소망
<본문>
하나님이여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주의 치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발하시나이까 옛적부터 얻으시고 구속하사 주의 기업의 지파로 삼으신 주의 회중을 기억하시며 주의 거하신 시온산도 생각하소서 영구히 파멸된 곳으로 주의 발을 드십소서 원수가 성소에서 모든 악을 행하였나이다 주의 대적이 주의 회중에서 훤화하며 자기 기를 세워 표적을 삼았으니 저희는 마치 도끼를 들어 삼림을 베는 사람 같으니이다 이제 저희가 도끼와 철퇴로 성소의 모든 조각품을 쳐서 부수고 주의 성소를 불사르며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을 더럽혀 땅에 엎었나이다 저희의 마음에 이르기를 우리가 그것을 진멸하자 하고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회당을 불살랐나이다 우리의 표적이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다시 없으며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랠는지 우리 중에 아는 자도 없나이다 하나님이여 대적이 언제까지 훼방하겠으며 원수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능욕하리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주의 손 곧 오른손을 거두시나이까 주의 품에서 빼사 저희를 멸하소서 하나님은 예로부터 나의 왕이시라 인간에 구원을 베푸셨나이다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 악어의 머리를 파쇄하시고 그것을 사막에 거하는 자에게 식물로 주셨으며 바위를 쪼개사 큰 물을 내시며 길이 흐르는 강들을 말리우셨나이다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예비하셨으며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여름과 겨울을 이루셨나이다 여호와여 이것을 기억하소서 원수가 주를 비방하며 우매한 백성이 주의 이름을 능욕하였나이다 주의 멧비둘기의 생명을 들짐승에게 주지 마시며 주의 가난한 자의 목숨을 영영히 잊지 마소서 언약을 돌아보소서 대저 땅 흑암한 곳에 강포한 자의 처소가 가득하였나이다 학대 받은 자로 부끄러이 돌아가게 마시고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로 주의 이름을 찬송케 하소서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주의 원통을 푸시고 우매한 자가 종일 주를 비방하는 것을 기억하소서 주의 대적의 소리를 잊지 마소서 일어나 주를 항거하는 자의 훤화가 항상 상달하나이다 (시 74:1-23)
<설교>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익을 주는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따라서 이익을 주는 것이 아니라면 가치 없는 것으로 대접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에 대한 시각이 바로 그와 같습니다. 십자가를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긴다면 그 대부분은 십자가에서 자기 구원이라는 이익을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으면 내가 구원을 받고, 세상에서도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연히 십자가는 소중한 것이 되고, 십자가를 믿는 것은 가치 있는 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기중심의 십자가일 뿐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종교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께는 고난의 장소이며 하나님께 버림받은 고통의 현장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라는 외침이 있는 현장이 십자가이기 때문에 신자는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버림 받은 예수님을 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자들이 십자가를 예수님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죽은 현장으로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어떻게 사랑하는 아들이신 예수님을 버릴 수가 있는가?’라는 자기 상식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 상식을 뒷받침 하는 것이 예수님이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비록 예수님이 죽으시도록 놔두셨지만 어쨌든 사흘 만에 부활하도록 하셨으니 예수님을 버리신 것이라고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버림 받으신 예수님을 잊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을 인간과 아무 관계가 없는 분으로 여겼을 때 가능한 말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의 대표자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으심도 부활도 우리와 무관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함께 우리도 죽었고, 예수님의 부활하심과 함께 우리도 부활한 자로 세상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버림 받으심 또한 우리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신 그 말씀 안에서 하나님께 버림 받아야 하는 자신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1절을 보면 “하나님이여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주의 치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발하시나이까”라는 호소를 합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사랑에 대해 들어온 분이라면 이 말이 쉽게 이해가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선택하셨다면 그들이 어떤 죄의 길을 가도 버리지 않으시는 분이고, 그래서 사랑이시고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신 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라는 말이 이해가 안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위해서 사랑하는 아들까지 버림의 자리로 밀어 넣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우리를 버리시는 것이 이상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구원만을 생각하고, 내게 유리하고 이익이 되는 하나님만 생각하려고 하기 때문에 나를 버리시는 하나님은 하나님답지 않은 것이고 따라서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으면서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았다고 여기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이방인이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주의 성소를 불사르고 하나님의 회당까지 불사르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고 아무 반응도 하지 않으시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 버림 받았다고 호소를 하는 것입니다.
4-8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이방인에게 어떻게 짓밟히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예루살렘뿐만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까지 초토화 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무엇입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과 함께 하심을 보여주는 영광의 전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 전에 더러운 이방인에 의해서 부서지고 불타는데도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그래서 9절을 보면 “우리의 표적이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다시 없으며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랠는지 우리 중에 아는 자도 없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성전이 이방인에 의해 부서지고 유린당할 때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불을 내려 이방인을 몰살하는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이 원한 표적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원하는 그런 표적이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선지자가 있어서 그러한 고통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아예 원하지 않습니다. 12-17절에서 시편 기자가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해 언급한 것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을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고, 사망에서 건져주시며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을 보면 우리가 기대하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시편기자가 ‘우리의 표적이 보이지 아니하며’라고 호소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에도 우리가 기대하고 원하는 하나님의 표적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아예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기도 합니다. 이것이 시편 기자의 호소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호소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저자가 이런 말을 합니다. “언약을 돌아보소서 대저 땅 흑암한 곳에 강포한 자의 처소가 가득하였나이다”(20절)
하나님께 영원히 버림받은 것 같은 상황에서 시편 기자가 생각하고 믿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었습니다. 현실이 어떻다고 해도 하나님은 언약을 결코 바꾸거나 포기하지 않으시고 기어이 이루시는 분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약을 돌아보소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신자가 현실을 이기는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눈에 보이는 현실에 지지 않고 이기는 것은, 어떤 현실이 주어진다고 해도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은 상황이 계속되고 하나님께 버림 받은 것 같은 비참한 상황이 주어진다고 해도 하나님의 언약은 파기됨이 없음을 믿고 하나님의 일을 믿는 것이야 말로 신자의 승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약대로 이루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자기 백성을 도우시고, 인도하시는 그 모든 일들도 언약의 성취라는 방향을 향해있습니다. 신자가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성전이 이방인에 의해 짓밟히는데도 가만히 계시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 점을 생각하기 전에 이방인이 이스라엘을 치고 성전까지 짓밟는 그 모든 일이 하나님에 의한 것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가만히 계셨던 것이 아니라 일하고 계셨다는 결론이 됩니다. 다만 그 일이 이스라엘에게는 크나큰 고통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의 일로 보지 못하였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동원하여 성전을 짓밟게 하시는 것은, 평소 성전을 가볍게 여겼던 이스라엘을 치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신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얼마나 가볍게 여기고 멸시하였는가를 보게 하기 위해 이방인을 보내신 것이고, 성전이 짓밟히도록 내어 버려두신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이스라엘이야 말로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아 마땅한 존재들임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그처럼 버림 받은 자리에서 언약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버림 받아 마땅하지만 그런 우리까지 건져내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 아닙니까? 그 언약을 생각해 주십시오’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언약이 왜 소중한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버림받아 마땅한 우리를 살려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시고 일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착하고 신자답게 살아서 그런 우리의 선을 보시고 사망에서 건져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만을 본다면 그 누구도 구원을 언급할 수도 꿈꿀 수도 없을 만큼 엉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버림 받고 저주를 받아 영원한 사망에 들어간다고 해도 할 말이 없고, 하나님께 따질 자격도 없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이 있고, 하나님은 우리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언약을 기억하시고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일하시기 때문에 우리 같은 자들도 생명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 자신이 잘만하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구원을 받을 것으로 착각합니다. 조금만 착한 모습이 보여도 마치 자신이 말씀을 잘 실천한 결과고 그것으로 의로운 사람이 된 것처럼 여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복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착각에서 깨어나게 하시기 위해 우리가 하나님께 버림 받은 것 같은 자리까지 밀어 넣으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잠잠하십니다. 아무리 소리쳐 기도하면서 애원을 해도 도와주시지 않고 고통에 빠져 살도록 방치하기도 합니다. 그런 모든 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해가 되고 믿어지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언약의 하나님으로 다가오십니다. 언약대로 일하시고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시고 믿게 하십니다. 그래서 버림 받은 것과 같은 현장으로 밀어 넣으시고 그 자리에서 언약의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의 형편 안에서는 탄식과 고민과 염려가 나오지만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는 소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어떤 형편에 있다고 해도 그 형편에 속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형편은 여러분께 ‘하나님은 안 계신다’ ‘너는 하나님의 사랑 밖에 있다’는 말로 속삭임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너는 본래 버림 받아 마땅한 사람이다. 그러나 언약의 하나님은 기어코 언약을 이루신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언약대로 일하신다는 믿음으로 현실을 제대로 분별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편 73:1-28 참된 현실
<본문>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그러므로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도다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심장이 찔렸나이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시 73:1-28)
<설교>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보면 아마 여러분의 마음에 맞는 것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형편은 두말할 것도 없지만, 세상 여기저기에서 발생하는 일들도 인간의 불만을 자극하고 유발하기에 충분한 것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세상을 바라보면서 과연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못할 것입니다. 어디를 봐도 하나님이 일하신다고 말할 만한 흔적들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들마다 자신이 생각하는 하나님 상을 미리 세워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 기준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기준을 가지고 세상을 보기 때문에 하나님을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때문에 하나님이 없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다고 해도 세상의 일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으신 채 멀리서 하나님의 백성이 천국에 오기만을 기다리는 하나님으로 연상할 뿐입니다.
73편도 저자가 하나님께 불평을 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1,2절을 보면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다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라고 말합니다.
저자는 하나님을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는 선을 행하시는 분으로 세워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자신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이 자신이 생각하던 하나님의 일하심과는 맞지 않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은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는 선을 행하시는 분인데 왜 자신이 실족하고 미끄러질 뻔한 일이 일어나느냐는 것입니다.
흔히 ‘하나님은 사랑이시다’고 말합니다. 물론 성경대로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을 두고 사람들은 자기 멋대로 하나님을 상상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자기 백성이 실족하거나 고통스러운 길로는 가지 않도록 지켜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오히려 고통과 가시밭길이 계속되고 때로는 억울한 일도 겪게 될 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말에 대해 심적으로 부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면서 행여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할 어떤 잘못을 행한 것은 아닌지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덮으시고 용서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부인하는 것임을 알지도 못한 채 말입니다.
신자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 중에 하나는 악인의 형통일 것입니다. 세상의 상식은 의인이 형통하고 악인은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신자의 생각도 아마 이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복을 받아 잘 살고 악인은 심판을 받아야 그것이 하나님의 정의고 세상의 질서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통을 겪는 경우가 흔합니다. 그러한 현실을 목도할 때마다 사람들은 ‘신이 있다면 왜 세상이 이러냐?’라고 한탄을 합니다.
세계적으로 보면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먹지 못해 굶어죽는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이 고통을 겪는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데모를 하기도 하고 자살을 하기도 하지만 세상은 전혀 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약자의 편에 서서 불쌍한 그들을 도와주시는 것도 없습니다. 그런 현실들 하나하나가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세상을 다스리시고 자기 백성을 도우신다’는 믿음에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저자가 겪은 현실도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4-9절을 보면 악인들이 세상에서 어떤 형통을 누리는가에 대해 말합니다. 4,5절을 보면 악인들이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이 편안하고 형통한 삶을 누린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교만을 목걸이처럼 목에 걸고 다니고 강포를 아예 옷처럼 몸에 걸치고 다니는 악한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몸은 눈이 솟아날 정도로 살쪘고 소득은 그들이 원하는 것보다 더 많을 정도로 세상적으로는 넘치는 복을 누리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자가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의 현실이었습니다. 도무지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상이라고 말할 수가 없을 정도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생각하는 의와 공평은 의는 의대로 악은 악대로 그에 대한 대접을 받는 것입니다. 물론 의는 의대로 악은 악대로 대접을 받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평입니다. 문제는 의와 악에 대한 대접이 세상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현실이 악이 악에 대한 대접을 받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에 불공평하다는 말이 나오게 되고 하나님이 없다는 말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문제에 대해 신자는 어떤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까?
17절을 보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저자는 악인이 형통하는 모순적인 세상의 현실에서 답을 얻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성소였습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 악인의 마지막을 깨닫게 된 것이 답이었던 것입니다.
저자는 악인이 현재 누리고 있는 형통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평생을 아무런 재앙도 어려움도 없이 살다가 고통 없이 죽는 인생이 가장 복된 것인 줄 알고 악인이 어떻게 저런 형통과 복을 누릴 수 있는지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는데 하나님의 성소에서 악인의 마지막을 보게 됨으로써 비로소 답을 찾게 된 것입니다.
저자가 하나님의 성소에서 보게 된 악인의 마지막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성소에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가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악인에게는 이처럼 귀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없습니다. 즉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없는 죽음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마지막은 영원한 고통, 즉 지옥입니다. 세상에서 무엇을 누린다고 해도 악인은 영원한 고통을 짊어지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려도 조금은 아쉽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뭔가 하면 이왕이면 세상에서도 형통하게 하시고 죽은 후에도 생명의 복을 누리게 해주시면 얼마나 좋으냐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게 해주실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한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만약 악인은 평생 고통에 빠져 살게 하시다가 죽어서도 지옥가게 하시고, 의인은 세상에서 온갖 복을 누리다가 천국가게 하신다면 여러분은 어느 쪽에 해당될 것 같습니까? 악인 쪽입니까? 의인 쪽입니까?
악인을 그가 행한 악에 따라 심판해 달라는 것은 악인을 하나님의 법에 따라 처리해 달라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법에 따라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고 악인에 대해 법으로 심판하신다면 여러분은 과연 심판을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은 사람을 도덕을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판단기준은 하나님의 법입니다. 하나님의 법에 미치지 못한 모든 사람은 악인으로 규정되는 것이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는 악인이 아닌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여러분 자신은 양심껏 살았고 착한 일도 하면서 도덕적으로 잘 살았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악인이 형통한 것을 두고 ‘모순이다’라고 여길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여러분 또한 악인일 뿐입니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성소에서 이 모든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악인의 결국은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가 없는 심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세상에서는 악인이 형통한 복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결국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없는 영원한 죽음이라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18,29절에서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고 말한 것처럼 악인은 사실 형통한 것이 아니라 파멸에 던짐 받은 존재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것이 참된 현실인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백성은 인자와 긍휼이 있는 심판을 받습니다. 그것이 곧 용서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형편이 어떻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고 살아가는 형통인 것입니다. 잠시 잠간의 육체의 편안함이 형통이 아니라 그 영혼이 영원히 잘됨을 누리는 참된 형통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보이는 것이 전부일 수가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참된 현실이 신자를 둘러싸고 있고 하나님께서 그 현실을 다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성소에서 악인의 결국을 깨닫고 참된 현실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 저자는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심장이 찔렸나이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21-23절) 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못하고 악인의 결국이 어떠함을 바라보지 못한 자신의 어리석음과 무지함으로 인해 마음이 산란해지고 심장이 찔림을 받은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것이 우매하고 무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신자가 십자가 앞에 나오게 되면 하나님을 알게 되고 세상의 참된 현실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육체의 일에 매이기보다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참된 현실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28절)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게 되자 세상에서 건강하고 편안히 살다가 고통 없이 죽는 것이 복이 아니라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것이 복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 앎이 여러분께 있기를 바랍니다.
시편 72:1-19 의를 인한 평강
<본문>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저가 주의 백성을 의로 판단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공의로 판단하리니 의로 인하여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저가 백성의 가난한 자를 신원하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 저희가 해가 있을 동안에 주를 두려워하며 달이 있을 동안에 대대로 그리하리로다 저는 벤 풀에 내리는 비 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 같이 임하리니 저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 저가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 끝까지 다스리리니 광야에 거하는 자는 저의 앞에 굽히며 그 원수들은 티끌을 핥을 것이며 다시스와 섬의 왕들이 공세를 바치며 스바와 시바왕들이 예물을 드리리로다 만왕이 그 앞에 부복하며 열방이 다 그를 섬기리로다 저는 궁핍한 자의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며 저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긍휼히 여기며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며 저희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구속하리니 저희 피가 그 목전에 귀하리로다 저희가 생존하여 스바의 금을 저에게 드리며 사람들이 저를 위하여 항상 기도하고 종일 찬송하리로다 (시 72:1-19)
<설교>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대개 자신이 다니는 교회가 사랑과 은혜가 넘치기를 원합니다. 모든 교인들이 서로 좋은 관계로 지내고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항상 웃음과 평강만이 존재하는 교회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교회를 원하는 그 내면에는 교회다운 교회되기를 원하는 것보다는 내가 다니는 교회는 다른 교회와는 다르다는 우월감으로 인한 기쁨을 누리고 싶은 욕망이 담겨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즉 예수님만을 높이고 예수님만 증거하는 예수님의 교회를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드는 교회를 기대함으로써 자신의 종교생활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 인해 기뻐하려고 하기보다는 교회를 보면서 교회로 인해 기쁨을 가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교회에 문제가 발생하여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다른 교회를 찾게 됩니다. 자기만족이 기준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께서도 과연 교회가 아무런 문제없이 사로 사이좋게 지내는 교회로 만드시는 것을 목적으로 하시는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교회에 모인 사람은 천사가 아닙니다. 자기사랑으로 뭉친 사람들이고 죄로 가득한 사람이 모인 것이 교회입니다. 그러한 교회가 아무런 문제가 없기를 바라는 것부터가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로 가득한 우리를 교회로 모이게 하시는 것은, 홀로 있을 때는 드러나지 않던 내 자신의 악함을 보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국을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피의 은총에 붙들려 있는 것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 은총을 발견하고 깨달음으로써 예수님의 의로우심만 자랑하고 높이는 교회로 굳게 세우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저가 주의 백성을 의로 판단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공의로 판단하리니”라고 기도합니다.
19절을 보면 72편은 다윗의 기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기도를 보면 다윗은 주의 판단력으로 백성을 판단하는 왕이 되기를 구합니다. 그런데 주의 판단력은 주의 의가 기준이 된 판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왕이 주의 의로 백성들을 판단한다면 백성은 왕에게 의에 미치지 못하는 존재로 보이게 됩니다. 그가 다른 백성에 비해 월등한 업적과 선행을 쌓았다고 해도 모두가 주의 의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주의 의로 백성을 판단하는 왕에게 모든 백성들은 하나님의 의에서 벗어난 죄인일 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판단하시는 시각입니다.
이처럼 백성을 주의 의에 미치지 못한 죄인으로 보게 된다면 왕은 백성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주의 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백성을 살리는 것은 오직 주의 의 밖에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러한 마음을 가진 왕이야 말로 이스라엘의 참된 왕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주의 의로 백성을 판단하는 왕을 구하는 기도를 하는 것이고, 이러한 참된 왕으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의를 가지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의 앞에서 세상의 의는 의가 아님이 드러나는 것이고 세상이 추구하는 인격이든 성품이든 선행이든 그 모든 것들은 구원에 보탬이 되지 못하는 쓰레기와 같은 것임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의 의로 우리를 판단하시는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베풀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를 생명의 나라로 인도할 수 있는 예수님의 의입니다. 즉 예수님은 우리를 예수님의 의로 충만한 주의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예수님이 친히 화목제물이 되셔서 우리를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왕은 백성에게 섬김을 받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런데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왕으로 오셨습니다. 자신의 몸을 내어 주심으로 자기 백성을 섬기신 분이 우리의 왕 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왕으로 높이는 모임 안에서는 섬김을 받고자 하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섬김으로 의의 자리에 있게 되었음을 생각한다면 섬김을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섬김이 없는 것으로 애통해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백성이라는 증거입니다.
세상의 왕은 주의 의로 백성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이 하늘의 의가 있어야 할 죄인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은 부자로, 어떤 사람은 가난한 자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라의 경제를 위해서는 부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가난한 자는 도와줘야 할 비생산적이고 거추장스런 존재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그 어떤 왕도 참된 왕은 없다는 증거입니다.
주의 세상을 판단하신다면 그 판단 앞에서 부자 가난한 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모두가 심판의 대상일 뿐입니다. 이처럼 의로써 백성을 판단할 때 백성들에게 무엇이 가장 복된 것인가에 대한 답은 나올 것이고, 왕은 백성들을 하늘의 의로 인도함으로 말미암아 생명에 있게 하는 이것이야 말로 왕의 존재 이유인 것입니다. 이 일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입니다.
4절을 보면 “저가 백성의 가난한 자를 신원하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은 가난한 자를 신원하시고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함께 하는 신자는 가난하고 궁핍한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소유가 없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소유와 상관없이 죄인 된 나를 살리는 것은 주의 의밖에 없음을 알고 주 만 바라보는 그 심령이 바로 가난한 자의 심령인 것입니다. 이러한 심령의 신자에게 주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남들처럼 돈을 많이 벌지 못한 것이 한스러운 것이 아니라 낮은 마음이 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한스러운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12-14절에서도 “저는 궁핍한 자의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며 저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긍휼히 여기며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며 저희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구속하리니 저희 피가 그 목전에 귀하리로다”는 말을 보면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 어떤 분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궁핍한 자가 부르짖을 때 건지고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며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 앞에 궁핍하고 가난한 자로 나오는 것입니다.
신자가 예수님 앞에 궁핍하고 가난한 자로 나오기 위해서는 주의 의로 자신이 판단을 받는 것입니다. 세상의 시각이나 가치관들은 모두 버려 버리고 오직 주의 의를 기준으로 하여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에게서 선행이나 양심이니 인격이니 하는 것들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의에 미치지 못하는 악함이 보일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있는 신자가 주의 의가 생명이라는 것을 절실히 바라보게 되고 세상의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궁핍하고 가난한 심령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세상에서 자신을 도울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압니다. 그래서 주의 의만 바라보고 소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를 예수님은 결코 외면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참된 왕으로 섬기는 신자는 17절에서 “그 이름이 영구함이여 그 이름이 해와 같이 장구하리로다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복을 받으리니 열방이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고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이름만을 영원히 찬송하게 됩니다. 이것이 천국입니다. 천국은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의 이름이 존귀하다는 것을 알기에 그 이름만을 높이고 찬송하는 백성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그러한 천국을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관계와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여서 배우고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문제가 있는 사람을 모아 놓으시고 수시로 문제가 드러나게 하심으로써 그 문제를 통해 인간의 실상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 같은 자는 하나님의 의로 인해 죄인으로 판단 받을 수밖에 없음을 절감하게 하시고 이런 나의 왕으로 오셔서 의가 되시고 그 의로 말미암아 평강의 복을 누리게 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을 찬송하게 감사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영광 받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참된 왕은 없습니다. 아무리 인격이 훌륭하고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대통령으로 세운다고 해도 그가 죄인 된 우리를 의의 나라로 인도하지는 못합니다.
신자가 추구하고 소망한 나라가 경제적으로 부강해지고 잘 사는 그런 것이라면 능력이 뛰어난 왕을 기대할 것입니다. 하지만 의의 나라를 소망한다면 신자에게 진정한 왕은 예수 그리스도 한분뿐입니다. 신자는 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평강을 누리는 복된 자로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여러분의 소망이 되길 바랍니다.
시편 71:1-24 노인의 기도
<본문>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영히 수치를 당케 마소서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 주는 나의 무시로 피하여 거할 바위가 되소서 주께서 나를 구원하라 명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산성이심이니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악인의 손 곧 불의한 자와 흉악한 자의 장중에서 피하게 하소서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나의 어릴 때부터 의지시라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의 붙드신바 되었으며 내 어미 배에서 주의 취하여 내신바 되었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나는 무리에게 이상함이 되었사오나 주는 나의 견고한 피난처시오니 주를 찬송함과 주를 존숭함이 종일토록 내 입에 가득하리이다 나를 늙은 때에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한 때에 떠나지 마소서 나의 원수들이 내게 대하여 말하며 나의 영혼을 엿보는 자가 서로 꾀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저를 버리셨은즉 따라 잡으라 건질 자가 없다 하오니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내 영혼을 대적하는 자로 수치와 멸망을 당케 하시며 나를 모해하려 하는 자에게는 욕과 수욕이 덮이게 하소서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 더욱 찬송하리이다 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 내가 주 여호와의 능하신 행적을 가지고 오겠사오며 주의 의 곧 주의 의만 진술하겠나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사를 전하였나이다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수가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을 장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주의 의가 또한 지극히 높으시니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대사를 행하셨사오니 누가 주와 같으리이까 우리에게 많고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 나를 더욱 창대하게 하시고 돌이키사 나를 위로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또 비파로 주를 찬양하며 주의 성실을 찬양하리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주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내가 주를 찬양할 때에 내 입술이 기뻐 외치며 주께서 구속하신 내 영혼이 즐거워하리이다 내 혀도 종일토록 주의 의를 말씀하오리니 나를 모해하려하던 자가 수치와 무안을 당함이니이다 (시 71:1-24)
<설교>
모든 사람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사람은 죽음의 권세에 붙들려 죽음의 자리로 끌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음을 향해 끌려가고 있다는 그 증거는 이미 우리들의 몸에서 적나라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고왔던 피부가 점차 윤기를 잃어가고, 몸도 쇠약해져가고, 눈도 나빠지는 이 모든 것들이 죽음의 흔적들입니다. 이 죽음의 흔적은 이미 2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서서히 진행이 된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거울을 보며 그러한 죽음의 흔적들을 발견하고 세월이 갈수록 그 흔적이 뚜렷해지는 것을 보면서 한탄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흔적들을 감추기 위해서 화장이라는 것을 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다만 시각적 효과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여배우들이 요즘 말로 ‘생얼’ 즉 화장이 지워진 얼굴을 보여주기 싫어하는 이유도 화장으로 감추어진 죽음의 흔적들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많이 늙었구나’라는 말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그 어떤 노력을 하는 것과 상관없이 죽음은 우리 몸을 통해서 그 흔적들을 가차 없이 드러내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필립안시라는 사람은 늙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어떻게든 젊어지려고 애를 쓰는 풍조를 두고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사후 생명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들에겐 당연한 이상(理想)이다. 젊음은 불확실한 미래를 지연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불신자에게 죽음은 모든 것이 끝남을 의미합니다. 세상에서 자기 존재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자연히 늙어짐을 자기 존재가 완전히 소멸되어가는 과정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늙어지는 것을 늦춰보려고 하는 것은 세상에서 좀 더 오래 존재하고자 하는 열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자에게는 죽음 이후의 세계가 있습니다. 때문에 신자에게 있어서 늙어지고 죽는 것은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 존재의 상태가 달라지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늙음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고 늙어갈수록 세상에서 떠날 날이 점점 가까이 왔음을 생각하며 죽음 이후의 세계를 생각하며 더욱 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에 굳게 서기를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영원한 세계가 없는 세상의 사람들에게 늙어짐은 힘의 소멸을 의미하고 따라서 생존을 위해 염려해야 하는 서글픈 인생으로만 바라봅니다. 그래서 노년을 위한 준비를 미리 계획하면서 노후대책이라는 것을 세우기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신자는 노후대책이라는 것을 세우면 안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세상에서의 삶만을 생각하면서 죽음 이후의 영원한 세계는 잊어버리고 단지 세상에서의 생존에 매이는 것이 잘못임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71편은 그 내용을 보면 저자가 노년이 되었을 때 지은 시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노년에 기도한 내용을 보면 흔히들 기도하는 것처럼 병에 걸려서 자식들 부담되지 않도록 건강하게 살게 해주시고, 편안히 죽게 해달라는 그런 식의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18절을 보면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수가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을 장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께 소원하는 것은 자신을 버리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버림 받을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지 않은 인생은 그가 누구며 세상에서 어떤 위치에 있다고 해도 실패한 인생일 뿐이며 영원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를 버리지 말라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늙어 백수가 되고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자신에게 존귀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죽는 순간까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기를 원하는 것보다는 어떻게 하면 노후를 걱정 없이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고, 노후의 삶을 준비하기 위한 것으로 바쁘다면 그것이 곧 죽음 이후의 세계에는 마음을 두지 않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람이 늙으면 젊을 때의 힘이 점차 소멸됩니다. 따라서 세상에서도 불필요한 존재로 여기고 그동안 하던 일에서 손을 놓게 합니다. 은퇴를 하게 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불필요한 사람이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이고, 육신의 힘이 능력이 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힘이 능력이 되시는 일을 하는 것이 신자기 때문에 늙었다고 해서 은퇴하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15,16절을 보면 “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 내가 주 여호와의 능하신 행적을 가지고 오겠사오며 주의 의 곧 주의 의만 진술하겠나이다”는 말을 합니다.
주의 의만 전하겠다는 것이 저자의 열망입니다. 이 열망은 육신이 늙었다고 해서 소멸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의 의만 전하고자 하는 신자의 일에는 은퇴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굳이 은퇴를 말하라면 세상에서 떠나는 그 날이 세상에서 은퇴하는 날이겠죠.
신자가 주의 의를 전하고 증거하는 것은 나이와 상관이 없습니다. 건강과도 물론 상관이 없습니다. 돈과도 상관없고 세상의 위치와도 상관이 없습니다. 자신이 처한 환경과 상관없이 자신을 사망에서 건지시고 거룩하게 하신 의만을 자랑하고 감사하고 높이면 되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노년이 되어서 자신이 세상에서 떠날 날이 더 가까이 왔음을 생각할 때 하나님에 대해서, 생명의 나라에 대해서, 더 깊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젊었을 때, 자신의 힘으로 살고자 했을 때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있어야 할 열정이라면 죽는 순간까지 십자가 복음만이 자신을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의가 됨을 증거하고자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졺을 때 노후 대비 잘 해서 늙어지면 편안한 삶을 누리다가 편히 죽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는 그런 소원은 영원한 세계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불신자의 몫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불신자에게 늙은 몸으로 살아가는 노년의 삶은 그저 시간을 때우는 하루하루의 삶으로 그칠 뿐이지만 신자에게는 병상에 누워서 죽음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할 일이 있는 존재입니다. 그것이 곧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으로 즐거워하고 주의 의를 전하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주의 의가 생명이며 크신 은총이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드러내다가 하나님이 부르시면 그 부름에 순종하여 세상을 떠나면 된다는 가벼운 마음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신자는 노후를 어떻게 살지 고민하고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자는 살아도 죽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인생만이 가장 복된 것으로 여길 것이고, 나의 생명이시고 나를 살리신 주의 의를 증거하고자 하는 소원과 열정은 더욱 강하게 신자를 붙들어 인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세상에서 편히 사는 것에만 마음을 둔다면 불신자와 동일하게 염려와 불평에서 벗어날 수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1,2절의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영히 수치를 당케 마소서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라는 구절을 보면 이 저자는 하나님이 아니면 자신은 영영히 수치를 받아야 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음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나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의 의로 건져 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주의 의를 향한 열망, 이것이 곧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현실을 발견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주의 의가 아니면 사망에 처한 자로 영원한 비참한 고통을 피할 수가 없음을 알기 때문에 자연히 주의 의를 향한 열망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노년이 되고 백수가 되어서 여전히 주의 의를 증거하고자 하는 열망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할 뿐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의롭게 되었으니 의로움에 반응하여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결국 믿음을 받았으니 십자가는 졸업하고 이제는 자신에게 있는 의를 가지고 그럴듯한 삶을 보임으로써 자신을 증거해 보겠다는 욕망일 뿐입니다.
71편의 저자는 그러한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다만 “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15절)는 기도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감히 측량할 수 없는 주의 의와 구원을 입으로 종일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이러한 열망이 우리에게 있어서 노년이 되어 몸을 쓰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도 오직 주의 의만 말하고자 하는 열정에 붙들려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편 70:1-5 주를 인한 기쁨
<본문>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내 영혼을 찾는 자로 수치와 무안을 당케 하시며 나의 상함을 기뻐하는 자로 물러가 욕을 받게 하소서 아하, 아하 하는 자로 자기 수치를 인하여 물러가게 하소서 주를 찾는 모든 자로 주를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모하는 자로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광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니 여호와여 지체치 마소서 (시 70:1-5)
<설교>
신앙은 신자에게 세상의 영광과 칭찬을 안겨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핍박과 조롱을 안겨줍니다. 신앙이 참되지를 못해서 조롱과 핍박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신앙이기 때문에 핍박과 조롱이 따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가령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환난과 어려움을 겪을 때 세상은 ‘하나님이 너를 잊었다’(시 10:11), ‘하나님이 없다’(시 14:1),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시 42:3)는 말로써 조롱을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있고 자기 백성과 함께 한다면 자기 백성이 힘든 일을 겪는데 왜 가만히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에 대해 무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러한 조롱은 아주 당연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도 1절의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을 보면 원수로 인해서 핍박을 받는 처지에서 쓴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자신을 구원해 달라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을 핍박하는 원수에 대해서도 “내 영혼을 찾는 자로 수치와 무안을 당케 하시며 나의 상함을 기뻐하는 자로 물러가 욕을 받게 하소서 아하, 아하 하는 자로 자기 수치를 인하여 물러가게 하소서”(2,3절)라는 기도를 함으로써 다윗이 어려운 처지에 있게 됨으로써 마치 자기들이 승리한 줄 알고 기뻐하는 원수들로 하여금 오히려 수치와 무안을 당케 해달라고 말합니다.
우린 대개 이러한 기도에서 무엇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신자를 핍박하는 원수로 하여금 수치와 무안을 당케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핍박을 받는 신자에게 힘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원수를 물리치게 하시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은 그러한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에게 힘이 주어져야 원수가 수치와 무안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힘으로 살아가는 세상의 방식에 어울리는 것일 뿐입니다. 즉 사단이 세상을 지배하는 방식에 함께 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빌미로 자기 성공을 소원하는 것은 진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영광을 구하는 욕망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세상에서 힘 있는 자로 만들어서 승리하시고 영광을 받으시고자 하시는 분이라면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시면 안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야 말로 세상이 볼 때는 철저한 실패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힘없이 죽어가는 모습은 세상이 볼 때는 그야말로 실패의 모습이고, 연약한 자의 모습이며, 세상이 기다리는 구세주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모습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을 세상으로 말미암아 죽게 하시고 부활하게 하심으로써 세상의 악에 대해 승리하시고 영광을 받으신 것입니다.
세상은 실패의 자리를 원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도 실패와 고통의 길은 거부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실패와 고통의 길도 마다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십니다. 죽음조차 거부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 순종하신 것이야 말로 원수를 무안하게 하시고 수치스럽게 하신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승리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신자에게 세상의 힘을 주셔서 세상을 이기는 자가 되게 하는 방식으로 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낮아지고 세상이 거부하는 길을 가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를 무안하게 하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 승리는 신자가 고통과 낮아짐과 멸시의 길이라고 해도 그 길을 거부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그러한 인생의 길에도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하심이 있음을 믿으며 하나님을 바라고 자신의 삶을 의지하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그래서 4절을 보면 “주를 찾는 모든 자로 주를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모하는 자로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광대하시다 하게 하소서”라는 기도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을 원수로부터 건지시고 원수로 하여금 수치와 무안을 당케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한 기도 뒤에 생각할 수 있는 주를 인한 기쁨과 즐거움은 하나님이 친히 나서서 원수를 멸하시거나,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이 다윗에게 힘을 주셔서 원수를 패배케 하고 승리하게 결과로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러한 기쁨과 즐거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신자에게 세상을 이길 힘, 즉 세상에서 힘이 되는 돈이나 권력을 주셔서 세상을 이기게 하시는 방식으로 일하지 않습니다. 물론 신자는 부자가 될 수 없고, 권력의 자리에도 앉을 수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자도 얼마든지 부자가 될 수 있고 높은 자리에 오를 수가 있지만, 세상과 달리 신자는 그러한 것을 힘으로 여기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께 봉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할 도구로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신자는 이러한 신앙으로 인해 원수를 무안하게 하는 것입니다.
원수는 항상 우리로 하여금 내게 있는 것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 내게 있는 것을 의지하게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바라보고 그것을 의지하는 이것이 말로 신자에게는 실패와 함께 수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원수는 신자를 이러한 수치와 실패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께 힘을 구하고 그 힘으로 세상 속에서 힘의 경쟁을 하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고자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으로써 그것이 곧 실패고 수치가 되는 것입니다.
주를 인한 기쁨과 즐거움은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본다는 것은 곧 자신에게 주어진 외적인 조건을 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따라서 세상에 내세울만한 외적인 것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실망만 있을 뿐 기쁨과 즐거움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를 인한 기쁨과 즐거움은 주로 인한 구원을 바라보았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늘의 생명을 바라보지 않고 세상에서의 생존을 바라보고 살아간다면 세상에서 기쁨이 되는 일이 주어졌을 때 잠시 기뻐하고 즐거워할 뿐이지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모하는 그 속에서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소리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주의 구원을 사모한다면 ‘하나님은 광대하시다’는 감탄과 찬송이 나오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인생 전부에 녹아져 있는 생명을 향한 하나님의 간섭과 인도하심을 보기 때문입니다.
5절을 보면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니 여호와여 지체치 마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다윗이 말한 가난과 궁핍은 물질적인 가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찾고 원수를 부탁하는 것은 자신에게는 원수를 이길 힘이 전혀 없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 역시 원수에 대해서는 나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 현실을 보는 자가 신자입니다. 이처럼 자기 현실을 바라보는 신자는 하나님께 세상을 이길 힘을 달라고 하기 보다는 힘이 되시는 하나님만을 신뢰할 수 있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만 하나님께서 사단의 머리를 깨뜨리시고 우리를 죄에서 자유롭게 해주시기만을 고대할 뿐입니다.
이러한 소망으로 하나님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심으로 말미암아 사단을 이기시고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신 광대하신 하나님의 일이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광대하시다고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과 자신을 보게 되면 나올 것은 실망과 불만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생존하고 있는 모든 조건들이 불만족스럽게 여겨질 뿐입니다. 하루하루 살게 하시는 하나님으로는 절대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살아도 힘 있는 자로, 세상이 부러워하는 인생을 살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십시오, 그럴 때 세상의 것보다는 나 같은 자를 불러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크게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불러주심으로써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 존재하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할 수 있게 되었음을 생각하십시오. 그럴 때 주를 인한 기쁨과 즐거움이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이 기쁨과 즐거움이 없이 세상의 것으로 낙심하는 것이야 말로 신자의 수치입니다. 생존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문제에 마음을 두시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럴 때 주님이 행하신 모든 일이 여러분의 기쁨과 즐거움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형편이 어떻든 주를 인한 기쁨 즐거움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야 말로 신자의 승리입니다.
시편 69:17-36 여호와의 기쁨
<본문>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환난 중에 있사오니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내 영혼에게 가까이하사 구속하시며 내 원수를 인하여 나를 속량하소서 주께서 나의 훼방과 수치와 능욕을 아시나이다 내 대적이 다 주의 앞에 있나이다 훼방이 내 마음을 상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안위할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 저희 앞에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저희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 저희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 주의 분노를 저희 위에 부으시며 주의 맹렬하신 노로 저희에게 미치게 하소서 저희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그 장막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대저 저희가 주의 치신 자를 핍박하며 주께서 상케 하신 자의 슬픔을 말하였사오니 저희 죄악에 죄악을 더 정하사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것이라 온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케 할찌어다 여호와는 궁핍한 자를 들으시며 자기를 인하여 수금된 자를 멸시치 아니하시나니 천지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바다와 그 중의 모든 동물도 그리할찌로다 하나님이 시온을 구원하시고 유다 성읍들을 건설하시리니 무리가 거기 거하여 소유를 삼으리로다 그 종들의 후손이 또한 이를 상속하고 그 이름을 사랑하는 자가 그 중에 거하리로다
(시 69:17-36)
<설교>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그 말씀을 사랑의 최고의 덕목으로 여깁니다. 사랑을 하려면 이 정도의 사랑은 해야 한다고도 생각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내용을 보면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을 정면으로 비웃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본문에 다윗과 원수가 등장을 하지만 원수에 대한 사랑의 말은 전혀 들어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주의 분노를 저희 위에 부으시며 주의 맹렬하신 노로 저희에게 미치게 하소서 저희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그 장막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24,25절)라고 기도하며 원수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하고도 깊은 심판을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원수에 대한 보복의 기도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다윗의 이러한 기도는 사랑이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사랑이 없는 사람이었습니까? 사랑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알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곧 자신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 또한 잊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과연 그러한 사람입니까?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 사울을 죽일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다윗이 숨어 있던 굴에 들어온 사울을 죽이지 않고 살려줬고, 사울이 진 가운데 누워 자고 있을 때 얼마든지 그를 죽일 수 있었지만 역시 죽이지 않고 살려줬습니다. 이유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자신이 죽일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다윗이 원수에 대한 보복으로 가득한 사람이었다면 당시 사울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을 살려준 것을 보면 다윗은 그저 보복심으로 가득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다윗이 왜 본문에서는 원수에 대한 보복으로 가득한 기도를 하는 것일까요? 오히려 ‘하나님 원수를 내 몸보다 더 사랑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라는 기도를 해야 그것이 더 수준 높은 성경다운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원수에 대한 저주를 퍼붓고 있습니다. 27,28절의 “저희 죄악에 죄악을 더 정하사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라는 기도를 보면 원수들을 아예 지옥으로 보내달라는 저주의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라고는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는 저주의 기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과연 우리는 이 기도를 어떻게 이해해야할까요? 여러분은 이 기도를 개인적 원수에 대한 보복의 기도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은 온통 자기 마음에 들지 않고 미워하는 대상을 향한 보복의 기도 소리로 넘치게 될 것입니다. 서로 죽이고자 하는 피의 소리만 울려 퍼지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분명 신자의 기도는 아닙니다.
그러면 다윗의 기도는 무엇입니까? 우선 다윗이 말하는 원수는 다윗 개인적인 원수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에게 원수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 아래 있는 선택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한 다윗을 죽이고자 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언약을 훼방하는 하나님의 원수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은 자신의 원수를 개인적인 원수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훼방하는 하나님의 원수로 간주하고 이러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원수라고 해도 용서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속성이고 사랑이 아니냐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세상 모두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구원하셔야 하나님다우신 것입니까? 심지어는 사탄까지도 용서하셔야 원자탄 같은 능력의 사랑으로 드러나는 것입니까? 이것은 우리의 큰 착각입니다.
21절을 보면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라고 말합니다. 다윗이 원수에게 당한 고초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 아래 있는 존재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죽이고자 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훼방하는 원수가 되는 것임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처럼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언약의 완성으로 오신 예수님을 환영하기는커녕 세상에서 제거함으로써 자신들의 악이 드러나는 것을 감추고 자신들의 욕망을 그대로 붙들고 살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의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어둠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그 뜻을 외면하고 자신들의 이름을 굳건히 하기 위해 아들을 거부한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은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원수에 대한 다윗의 기도는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원수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데도 용서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원수는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것 자체를 불필요한 것으로 여깁니다. 왜냐하면 스스로를 용서가 필요 없는 의인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용서를 위해 거룩한 희생 제물로 오신 예수님은 거추장스런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용서는 무엇입니까? 용서는 하나님께서 사랑하기로 작정하신 자에게만 주어진 은혜입니다. 다윗이 사형ㅎ에 해당하는 죄를 짓고도 용서받은 것은 그가 하나님의 언약 아래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로 택함 받은 것입니다.
27,28절에서 “저희 죄악에 죄악을 더 정하사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라고 기도하는 것도 주의 의에 들어 올 수 있는 사람인데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달라는 것이 아니라 애당초 주의 의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이니 그에 합당하게 대우해 달라는 것입니다. 생명책에서 도말해달라는 것도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이름을 삭제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애당초 생명책이 이름이 기록될 수 없는 자들이니 그에 합당하게 저주를 내려 달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철저한 구별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할 자와 미워할 자로 구별되어 있는 것이 세상의 현실인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원수는 하나님께 미움 받을 자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며 살아갈 뿐입니다. 예수님의 의도 모르고, 자신의 악함도 모르고, 무엇이 하나님의 원수된 것인지도 모른 채 다만 자신의 욕망에 붙들려 끝까지 살아갈 뿐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사랑하시기로 작정한 주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간섭에 의해서 자신의 악함을 깨닫고 주의 의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주께서 죽으신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죽음을 경험하며 하늘로부터 주어진 영원하고 새로운 생명으로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의해 구별된 인간의 전혀 다른 모습이고, 다른 인생입니다.
세상은 이러한 현실을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보이는 것을 전부로 여기는 착각에 빠져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묵시세계에 대해서는 무지한 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언약을 세우시고 언약대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된 것보다 큰 복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본문을 대하면서 ‘나는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다’는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심판을 받고 영원한 멸망에 처해져야 하는 것이 나의 운명인데 그러한 나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주어졌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구원이 되는 하늘의 의를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놀랍고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9-31절을 보면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것이라”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며 하나님께 뭔가를 드리겠다고 하지만 다윗은 황소를 드리는 것보다 더 여호와를 기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찬송하고 감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신자인 여러분께 있어야 할 싸움입니다. 왜 싸움인가 하면 사람은 항상 자기 이름을 드러내고 높임 받고자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구원이 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의를 높이고 감사하는 그 순간이야 말로 승리가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바로 이 승리를 세상에 증거할 자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세상에 오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의가 여러분의 심령에 강력한 능력으로 역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삶들이 하나님의 원수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감사와 찬송으로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성령이 여러분을 그렇게 만들어 가실 것으로 믿습니다.
시편 69:1-16 나를 삼킨 열성
<본문>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내가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내 목이 마르며 내 하나님을 바람으로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무고히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내 머리털보다 많고 무리히 내 원수가 되어 나를 끊으려 하는 자가 강하였으니 내가 취치 아니한 것도 물어 주게 되었나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우매함을 아시오니 내 죄가 주의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 만군의 주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로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로 나를 인하여 욕을 당케 마옵소서 내가 주를 위하여 훼방을 받았사오니 수치가 내 얼굴에 덮였나이다 내가 내 형제에게는 객이 되고 내 모친의 자녀에게는 외인이 되었나이다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내가 곡하고 금식함으로 내 영혼을 경계하였더니 그것이 도리어 나의 욕이 되었으며 내가 굵은 베로 내 옷을 삼았더니 내가 저희의 말거리가 되었나이다 성문에 앉은 자가 나를 말하며 취한 무리가 나를 가져 노래하나이다 여호와여 열납하시는 때에 나는 주께 기도하오니 하나님이여 많은 인자와 구원의 진리로 내게 응답하소서 나를 수렁에서 건지사 빠지지 말게 하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와 깊은 물에서 건지소서 큰 물이 나를 엄몰하거나 깊음이 나를 삼키지 못하게 하시며 웅덩이로 내 위에 그 입을 닫지 못하게 하소서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내게 응답하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게로 돌이키소서 (시 69:1-16)
<설교>
사람이 가장 피하고 싶어 하는 것을 꼽으라면 그것은 ‘죽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죽음을 피할 수가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죽음을 피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다만 조금이라도 더 죽음에서 멀어지고자 애를 쓰는 것은 있겠지요. 가령 병에 걸리지 않도록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운동을 한다거나, 불의의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노력을 함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는 일은 없고자 하는 것이 사람들의 노력일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노력과 상관없이 인간의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께 달린 문제겠지만 세상은 그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기 운명을 하늘에 맡긴다는 것이 너무 나약하게 보이고, 또한 억울하게 여겨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쨌든 사람은 그 어떤 노력을 해도 죽음을 피할 수가 없기에 죽음이 비록 피하고 싶은 것 1순위라고 해도 그저 ‘죽지 않고 오래 살았으면’하는 바램으로만 끝날 뿐입니다.
그러면 죽음 다음에 사람이 피하고 싶어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 고난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는데, 인생의 행복을 방해하는 것이 바로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곧 고통으로 이어지고 고통은 인간에게서 모든 행복을 빼앗아 버립니다. 기쁨도 사라지고 희망도 사라지고 대신 슬픔과 절망만 남겨 놓는 것이 고통, 즉 고난이기 때문에 이 고난이야 말로 사람들이 죽음 다음에 피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여러분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비록 죽음은 피할 수가 없지만 살아있는 동안은 고난과 고통이 없는 행복한 인생을 누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그 중에 하나가 절대자를 찾아 자기 인생을 부탁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알 수 없는 미래를 절대자가 책임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절대자에게 자신의 인생의 행복을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이러한 목적에서 자유롭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바램을 사정없이 짓밟아 버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성경은 믿음과 함께 고난을 얘기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못 박혀 달리신 십자가가 고난의 자리였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만의 몫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에게도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처럼 십자가에서 죽으라는 뜻은 아니지만 고난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과의 관계에 들어와서 예수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주님이 가신 길을 가는 것을 뜻하는 것이고 그것은 고난과 무관하지 않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따라서 고난이 없는 인생을 꿈꾸며 예수님을 찾는다면 그것은 헛된 꿈을 꾸고 있는 것이고, 또한 다른 예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다윗도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껏 시편을 살펴보면서 다윗의 고난에 대해 많은 내용을 살펴봤습니다. 그저 목축업을 하는 한 집안의 아들로서 양을 치며 살았다면 당하지 않았을 고난을 다윗은 수없이 겪으면서 자신의 고난을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고난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음으로 발생하는 것입니다. 다윗을 죽이고자 하는 원수의 등장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다윗의 죽임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을 훼방하고자 하는 사단의 술수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다윗이 처한 상황이 아주 심각함을 보여줍니다. 2,3절에서 “내가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내 목이 마르며 내 하나님을 바람으로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라고 호소할 정도로 다윗은 원수로 인해서 큰 고통을 겪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대할 때 가장 어려운 점은 다윗과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심정을 갖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은 다윗의 때와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때만이 아니라 선지자나 사도들이 활동했던 시기의 상황이나 형편과도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사람들의 고난이 마음에 와 닿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성경을 대한다면 비록 뭔가를 깨달았다고 해도 그것은 생각에 머무는 것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지금 사회를 보면 기독교인이 감당해야 할 불이익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말 그대로 신앙의 자유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종교가 다른 집안에 시집가서 겪는 어려움을 고난으로 생각하기도 하고, 직장생활 하면서 불가피하게 술자리를 가져야 하는 것도 신자가 겪는 고난으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것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신자의 고난과는 거리가 멉니다.
현대 사회는 분명 종교의 자유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거부합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 살고자 한다면 분명히 고난은 오게 되어 있고, 따라서 짊어져야 할 십자가는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시대와 비교해서 지금은 문화와 문명에서 크게 차이가 있지만 동일한 것은 인간입니다. 인간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악한 사탄의 세력이 세상을 붙잡고 활동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던 다윗에게 원수가 등장한 것처럼, 오늘날도 예수님을 따르는 신자에게는 원수가 등장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다윗의 시대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악한 세대를 살아가고 있으면서, 원수가 없고 고난이 등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주를 좇지 않고 있는 것이겠지요. 즉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서 제자의 길이 아닌 다른 길에 마음을 두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예수님께 붙들려서 진리의 길을 가는 신자에게만 현실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신자가 믿는 예수님은 세상이 환영하고 세상에서 높임을 받다가 인간의 수명을 다하고 죽으신 분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죽으신 분입니다. 이천년 전에 환영을 하지 않고 거부한 예수님을 지금이라고 해서 환영을 하고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대한 세상의 반응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세상이 성인이라고 하면서 높이는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분이 아니라 다른 예수일 뿐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는 신자가 세상으로부터 우호적인 반응을 기대한다면 그것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것이 유대사회가 아니라 세상이라는 것을 간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예수님이 가신 고난의 길을 갈 수밖에 없고,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다는 하나의 증표이고, 그것을 다윗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다윗에 대해 못마땅했던 것은 다윗이 남의 아내를 취하고, 그 남편까지 죽여 버린 놀라운 죄악을 행하고도 하나님의 용서라는 명목으로 멀쩡했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자기 죄에 대해 어떤 탄핵을 받은 것도 아니었고 다만 하나님과의 일대 일의 관계로 끝내버린 것을 두고 많은 백성들이 못마땅했을 것입니다. 그러던 차에 압살롬이 백성을 회유하면서 다윗의 죄까지 이용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5절에 보면 “하나님이여 나의 우매함을 아시오니 내 죄가 주의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는 말로 자신의 죄를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4절을 보면 다윗이 “무고히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내 머리털보다 많고”라고 말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무고히 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다윗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다윗이 무고히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긍휼과 자비의 관계에 있는 자신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결국 다윗의 원수들을 다윗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의 관계에 있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믿되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바라보지 않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바라보지 않는 사람들에게 죄는 구별의 기준이 될 뿐입니다. 즉 인간의 행함을 기준하여 착한 자와 나쁜 자라는 구분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악한 세력이 꾀하는 것이고 세상이 이런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은 하나님의 무조건 적인 용서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의 은혜 또한 세상의 합리적인 생각에는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말하는 신자를 ‘죄짓고 용서만 구하면 다 되는 줄로 아는 사람’으로 조롱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생각할 때는 죄를 지었으면 그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고, 자신의 선으로 죄를 갚는 것이 정당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와 원수된 악한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9-11절의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내가 곡하고 금식함으로 내 영혼을 경계하였더니 그것이 도리어 나의 욕이 되었으며 내가 굵은 베로 내 옷을 삼았더니 내가 저희의 말거리가 되었나이다”는 말도 다윗을 향한 세상의 조롱이 어떠했는가를 말합니다.
다윗은 죄로 인해서 곡하고 금식하며 자신을 경계하였습니다. 또한 굵은 베로 자신의 옷을 삼았다는 것은 평소 다윗이 죄에 대해 회개하고 통회하는 심정으로 살았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다윗을 미워하는 자들은 그것조차 조롱을 한 것입니다.
신자는 죄를 범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대신해 피 흘리신 예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죄를 책임지기 위해 선행을 하려고 애를 쓴다면 그는 신자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복을 받기 위해서, 또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된 행동으로 인해 행여 불이익을 당할까 염려해서 선행을 하고자 한다면 그는 불신자입니다.
다윗의 주의 집을 위한 열심은 오늘날 교회를 위한 열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집에는 거룩한 제물의 희생의 피와 죄 용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자신의 죄로 인해 피 흘리신 거룩한 분을 바라보고 감사하는 것이 주의 집을 위한 열심입니다. 그러나 그 열심은 신자를 고난으로 이끌어 갑니다. 그래도 개의치 않고 주로 인해 감사하는 것이 신자입니다.
시편 68:19-35 구원의 하나님
<본문>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하나님이시라 사망에서 피함이 주 여호와께로 말미암거니와 그 원수의 머리 곧 그 죄과에 항상 행하는 자의 정수리는 하나님이 쳐서 깨치시리로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저희를 바산에서 돌아오게 하며 바다 깊은데서 도로 나오게 하고 너로 저희를 심히 치고 그 피에 네 발을 잠그게 하며 네 개의 혀로 네 원수에게서 제 분깃을 얻게 하리라 하시도다 하나님이여 저희가 주의 행차하심을 보았으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이 성소에 행차하시는 것이라 소고 치는 동녀 중에 가객은 앞서고 악사는 뒤따르나이다 이스라엘의 근원에서 나온 너희여 대회 중에서 하나님 곧 주를 송축할찌어다 거기는 저희 주관자 작은 베냐민과 유다의 방백과 그 무리와 스불론의 방백과 납달리의 방백이 있도다 네 하나님이 네 힘을 명하셨도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을 견고히 하소서 예루살렘에 있는 주의 전을 위하여 왕들이 주께 예물을 드리리이다 갈밭의 들짐승과 수소의 무리와 만민의 송아지를 꾸짖으시고 은 조각을 발 아래 밟으소서 저가 전쟁을 즐기는 백성을 흩으셨도다 방백들은 애굽에서 나오고 구스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그 손을 신속히 들리로다 땅의 열방들아 하나님께 노래하고 주께 찬송할찌어다 (셀라) 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에게 찬송하라 주께서 그 소리를 발하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너희는 하나님께 능력을 돌릴찌어다 그 위엄이 이스라엘 위에 있고 그 능력이 하늘에 있도다 하나님이여 위엄을 성소에서 나타내시나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힘과 능을 주시나니 하나님을 찬송할찌어다 (시편 68:19-35)
<설교>
신자는 자기 구원에만 관심을 두는 사람이 아닙니다. 즉 신자는 자기 구원으로 인해서 기뻐하기보다는 구원될 수 없는 자신을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어떤 수고와 고난과 희생이 동원되었는가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행하심으로 인해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4절에서 “하나님께 노래하며 그 이름을 찬양하라”는 말씀도 단순히 자신이 상상하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찬양하라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계시하고 있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노래하고 찬양하라는 뜻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신자가 자기 구원에 관심을 두게 되면 결국 ‘나는 구원을 받았는가 받지 못했는가?’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그리고 스스로 구원 받은 자라는 확신을 가지기 위해 구원 받은 자의 합당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외적인 조건을 갖추려는 노력을 하게도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로 부름 받은 신자의 본분과는 거리가 멀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절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하나님이시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우리에게 구원의 하나님이시라’는 이 말씀에서 무엇을 생각합니까? 자기 구원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즉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이 옳은 말 같지만 여기에는 큰 함정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일하시는 분으로 생각하게 되면, 결국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분이 되어 버립니다. 지금 거의 모든 교회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바로 이런 하나님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분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은 나를 도우신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도우신다’ ‘하나님은 우리나라를 도우신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를 도우신다’는 등의 별 말이 다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욕망의 존재입니다. 그 누구도 욕망에서 벗어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한 인간이 하나님을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분으로 생각하다면 그가 하나님께 구할 것은 뻔합니다.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을 것이고, 기도하는 모든 내용들도 인간의 욕망에 부합된 것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에게 구원의 하나님이시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해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19절에 보면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이 되어주시기 위해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짐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겪는 힘든 일을 뜻하지 않습니다. 20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하나님이시라 사망에서 벗어남은 주 여호와로 말미암거니와”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대신 지시는 짐은 우리의 사망과 연관이 있는 것이고, 그렇다면 그 짐은 죄의 짐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이 되시기 위해 날마다 우리의 죄의 짐을 대신 지시면서 죄를 해결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신자라면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얘기할 때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다’라고 좋아할 것이 아니라 나 같은 자에게 구원이 되어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행하신 일, 하나님의 희생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죄가 우리를 사망에 가두었는데, 하나님이 그 죄를 대신 지심으로써 우리가 죄로부터 자유를 누렸다는 것을 안다면 죄를 대신 지시는 하나님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감사하고 찬송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1-23절에서도 “그의 원수들의 머리 곧 죄를 짓고 다니는 자의 정수리는 하나님이 쳐서 깨뜨리시리로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들을 바산에서 돌아오게 하며 바다 깊은 곳에서 도로 나오게 하고 네가 그들을 심히 치고 그들의 피에 네 발을 잠그게 하며 네 집의 개의 혀로 네 원수들에게서 제 분깃을 얻게 하리라 하시도다”고 노래합니다.
이 구절도 자기 백성에게 구원이 되시기 위해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관심은 자기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하심으로 향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수의 머리를 쳐서 깨뜨리시므로 자기 백성을 원수로부터 구출하시고 돌아오게 하시고 승리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런 일을 일으키시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증거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구원이 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달아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을 아는 신자는 자기 구원에 관심을 둘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구원에 관심을 두면,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기준 삼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계산하려고 하게 됩니다. 세상의 좋은 것이 주어지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자신을 사랑하신다고 하고, 반대로 있던 것도 잃게 되면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날마다 죄의 짐을 지시고 사망에서 벗어나게 하시며, 원수의 머리를 쳐서 자기 백성을 돌아오게 하시기 위해 일하시는 것은 생각지도 않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송 역시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사건에서도 이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시 홍해 안에는 이스라엘 백성과 애굽 군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홍해에서 건지시고 애굽 군대는 모두 홍해에 잠기에 하십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만 홍해에서 건짐 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에게는 어린양의 희생의 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죄의 짐을 대신 지신 주의 사랑과 긍휼이 있는 백성이기에 홍해에서 건지신 것입니다.
홍해를 건넌 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합니다. 죽을 뻔 한 자신들이 다시 살았다는 것으로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홍해에서 자신들을 건지신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찬양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을 깨닫게 된 신자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의 구원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하나님께 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하나님에게서 증거된 긍휼과 사랑을 감사하고 노래하며 하나님의 언약대로 모든 일을 이루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높이고 그 이름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자는 자기 구원으로 기뻐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의 구원을 위해 죄의 짐을 지시고 희생하시고 피 흘리신 주의 은혜를 기뻐합니다. 죄 있는 자를 죄 없는 자로 만드시고 죄 없으신 거룩하신 분은 우리의 죄의 짐을 대신 지시고 죄 있는 자의 운명을 담당하신 은혜가 우리를 생명에 있게 한 것으로 인해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감사에 머물게 되는 것이 신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이러한 감사와 찬양이 신자로 만들어 가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왜 신자의 삶에 고통과 어려움이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평생을 하나님을 믿었는데도 불구하고 때로는 불신자보다 더한 고통과 어려움에 처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 많은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삶의 이유를 조금이나마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택한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그 이름을 영원토록 높이고 찬송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17절을 보면 “하나님의 병거는 천천이요 만만이라 주께서 그 중에 계심이 시내 산 성소에 계심 같도다”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대로라면 신자는 참으로 든든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병거가 천천이요 만만이며, 하나님은 그 병거를 동원하여 자기 백성에게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는데,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신자보다 더 강한 자가 누구겠습니까? 세상의 어떤 힘이 하나님의 병거를 이기겠습니까?
열왕기하를 보면 아람 군대가 게하시와 엘리야를 둘러쌌을 때 게하시는 두려워 떨었으나 엘리야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람군대보다 더 많은 하나님의 병거가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참된 현실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병거가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고 해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병거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고 인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고통스럽고 어려운 일이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신뢰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비록 육신의 삶에 고통과 어려움이 계속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구원이 되시고 날마다 죄의 짐을 대신 지시며 사망에서 건지시고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분임을 깨닫게 하고, 고통과 어려움의 삶에서도 구원이 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높이고 찬송하게 함으로써 자기 구원에 붙들려 살아가는 세상의 악함을 드러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자신이 세상에서 누리는 복으로 확인하고자 하고, 또 그것을 증거물로 삼고자 하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세상이 보고 알 수 있는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모두지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역사하시고, 자기 백성에게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생명 사건입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온 마음이 여러분 자신의 구원이 아니라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 죄의 짐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여러분에게 참된 현실로 주어진 생명 사건에 온 마음이 향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신 분으로 인해서 우리는 사망에서 구출되었으며 하나님 앞에 죄 없는 자로 서게 되는 이 현실로 말미암아 세상의 어떤 현실에서도 감사가 있고 기쁨이 있는 능력의 삶을 고대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이기 때문에 신자는 고통과 어려움에서도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니 나는 부족함이 없다’는 놀라운 고백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이러한 복음의 증거물로 세상에 세우시기 위해 고통의 길로 밀어 넣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십니다. 그래도 신자에게 하나님은 그 이름을 높이고 찬송해야 할 분일뿐입니다.
32-35절의 “ 땅의 왕국들아 하나님께 노래하고 주께 찬송할지어다 (셀라) 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에게 찬송하라 주께서 그 소리를 내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너희는 하나님께 능력을 돌릴지어다 그의 위엄이 이스라엘 위에 있고 그의 능력이 구름 속에 있도다 하나님이여 위엄을 성소에서 나타내시나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나니 하나님을 찬송할지어다”는 노래처럼 신자는 하나님을 찬송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에는 하나님의 수고와 희생과 고난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죄에 붙들린 인생을 죄 없는 자가 되게 하시고, 사망에서 구출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는 생명에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생명 사건이고 우리의 참된 현실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에 마음이 붙들려서 염려와 걱정으로 계속되는 삶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참된 현실을 깨닫게 됨으로써 세상이 살 수 없는 능력의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편 68:1-18 의인의 찬양
<본문>
하나님은 일어나사 원수를 흩으시며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연기가 몰려감 같이 저희를 몰아내소서 불 앞에서 밀이 녹음 같이 악인이 하나님 앞에서 망하게 하소서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찌어다 하나님께 노래하며 그 이름을 찬양하라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자를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 그 이름은 여호와시니 그 앞에서 뛰놀찌어다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하나님은 고독한 자로 가속 중에 처하게 하시며 수금된 자를 이끌어 내사 형통케 하시느니라 오직 거역하는 자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 하나님이여 주의 백성 앞에서 앞서 나가사 광야에 행진하셨을 때에(셀라)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하나님 앞에서 떨어지며 저 시내산도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서 진동하였나이다 하나님이여 흡족한 비를 보내사 주의 산업이 곤핍할 때에 견고케 하셨고 주의 회중으로 그 가운데 거하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이여 가난한 자를 위하여 주의 은택을 준비하셨나이다 주께서 말씀을 주시니 소식을 공포하는 여자가 큰 무리라 여러 군대의 왕들이 도망하고 도망하니 집에 거한 여자도 탈취물을 나누도다 너희가 양우리에 누울 때에는 그 날개를 은으로 입히고 그 깃을 황금으로 입힌 비둘기 같도다 전능하신 자가 열왕을 그 중에서 흩으실 때에는 살몬에 눈이 날림 같도다 바산의 산은 하나님의 산임이여 바산의 산은 높은 산이로다 너희 높은 산들아 어찌하여 하나님이 거하시려 하는 산을 시기하여 보느뇨 진실로 여호와께서 이 산에 영영히 거하시리로다 하나님의 병거가 천천이요 만만이라 주께서 그 중에 계심이 시내산 성소에 계심 같도다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를 끌고 선물을 인간에게서, 또는 패역자 중에서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려 하심이로다 (시편 68:1-18)
<설교>
시편을 보면 인간을 ‘의인’과 악인’으로 구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의인과 악인이 등장을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구분하시는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즉 하나님 앞에 인간은 의인과 악인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인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들어갈 사람’이고 반대로 악인은 ‘영원한 사망에 빠질 사람’으로 그 운명이 작정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대할 때 사람들이 쉽게 가지는 생각은 ‘의인이 되자’는 것입니다. 지금도 한국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의인이 마치 사람의 노력과 행함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그러한 의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자신의 힘으로 의인되고자 하는 생각을 악한 것으로 말씀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의인이 되기 위해서 모든 정성과 노력을 기울였던 사람들입니다. 당시 그들은 하나님은 당연히 자기들과 같은 의인을 백성으로 인정하시고 구원하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심으로써 바리새인들의 삶의 전부와도 같은 ‘의’를 해체해 버리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행함이나 열심이 문제가 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각이 문제였습니다. 그것은 자기 의(義)입니다. 자신의 선하고 의로운 실천과 삶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를 획득하겠다는 생각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생각으로 똘똘 뭉쳐 있던 바리새인들은 결국 자신의 의를 기준으로 하여 사람을 판단하게 된 것입니다. 죄인과 의인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눈에 세리나 창기와 같은 사람은 이미 지옥에 그들의 자리가 마련된 죄인들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하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그러한 생각에 동조하실까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어떻게 나왔으며 홍해를 어떻게 건넜는가를 잘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열어서 이스라엘을 건너게 하셨고, 애굽군대는 바다 물에 수장되도록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스라엘은 애굽보다 착했기 때문입니까? 애굽은 우상을 섬기는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단지 종교의 수준이었습니다. 믿음은 곧 신뢰인데,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신뢰를 보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홍해가 앞길을 가로막은 현실에서 애굽 군대가 추격하고 있는 것을 본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낸 모세를 원망한 것입니다.
홍해로 인해서 구분된 것은 의인과 악인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의인이었기에 살았고, 애굽은 악인이었기에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의인으로 여김 받은 것은 그들의 삶이나 행함과는 아무 상관없이 오직 어린양의 희생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 내린 장자 재앙에서 살아난 사람은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사람들이라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정결한 어린양의 깨끗한 피가 의가 되어서 이스라엘을 살린 것입니다. 이처럼 홍해 안의 이스라엘은 어린양의 의를 입은 존재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망에서(홍해) 건져 내신 것입니다. 하지만 애굽에게는 그들을 사망에서 건져 낼 의가 없었습니다. 인간의 착함도 의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애굽 군대에는 나름대로 양심 바르고 착한 사람도 있었겠지만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모두 죽은 것입니다. 즉 인간의 양심이나 바른 행동이 사망을 이기는 능력이나 의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넌 후에 구원의 노래를 부릅니다. 자신들을 사망에서 건져내신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하고 기뻐하고 노래한 것입니다. 본문에도 그러한 기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3절을 보면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찌어다"고 노래합니다.
의인의 기쁨은 원수를 흩으시고 악인을 망하게 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한 것입니다.(1,2절) 그렇다고 해서 악인이 하나님에 의해 망하는 것이 고소해서 기뻐하는 것은 아닙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의인은 그 행함과 삶이 선해서 의인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의 의인은 하나님의 언약에 붙들린 사람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붙들려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인도를 받는 그가 의인인 것입니다. 인간의 행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오직 하나님의 행하심에 의해 의인으로 구분된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행함과 본질을 생각한다면 절대로 의인으로 칭함 받을 수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원수를 흩으시고 악인을 망하게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바로 하나님에 의해 흩어짐을 받고 멸망을 받아야 할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한 자신을 언약으로 붙드시고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인자와 성실하심으로 인도하고 계심을 생각하며 자연히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의인의 찬양이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따라서 의인은 우리의 모든 죄를 가리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인자와 성실을 거부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행하심만을 높이고 감사하고 찬송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결국 의인의 의인됨은 인간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선한 행함이나 종교적 행함으로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 신실하심과 인자와 자비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그 이름을 높이고 찬송하는 것으로 증거됨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노래하며 그 이름을 찬양하라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자를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 그 이름은 여호와시니 그 앞에서 뛰놀찌어다”(4절)는 노래 역시 하나님의 행하심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의인의 찬송임을 생각한다면, 의인은 자기 행함을 바라보며 자신을 높이고 자랑하고자 하는 사람이 결코 아님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근거로 생각한다면 현대 교회가 잘못된 것이 무엇인가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현대 교회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말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의를 쌓게 하고 그 의를 기반 삼아 하나님께 나가도록 부추기고 있습니다. 의를 많이 쌓은 사람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전혀 비성경적인 말을 남발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바리새인들의 생각이었고, 그러한 생각은 스스로 악인임을 드러내는 것 밖에 되지 않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의인은 하나님께서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심을 압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소원을 이루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기 위한 것임을 또한 믿습니다. 언약을 성취하기까지 쉬지 않고 신실하게 일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언약 백성이 영원한 의의 나라에 이른다는 것 또한 믿습니다. 그래서 의인은 하나님의 행하심만을 바라볼 뿐이고, 그 행하심으로 감사하고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의 찬송은 하나님의 행하심이 아니라 자신의 행함을 바라보는 사람에게서는 결단코 나올 수가 없습니다.
5,6절을 보면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하나님은 고독한 자로 가속 중에 처하게 하시며 수금된 자를 이끌어 내사 형통케 하시느니라 오직 거역하는 자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을 ‘고아의 아버지’, ‘과부의 재판장’으로 표현한 것은 하나님을 단순히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 편에 서서 도와주는 분으로 말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고아, 과부, 고독한 자, 수금된 자는 모두 애굽에 붙들려 노예로 살아가던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사 형통케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스라엘과 다르지 않습니다. 악한 사단에게 붙들려 있던 것이 우리의 실상이었습니다. 사단에게 전혀 대항할 수 없어 갇힌 자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처지였습니다. 그런 우리를 이끌어 내사 형통케 하시고 자유의 길을 가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고 사랑이고 신실하심입니다. 신자는 찬양해야 할 하나님의 행하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처한 환경과 상관없이 신자는 날마다 강력한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려 인도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7-18절까지의 내용도 지금까지 말씀드린 의미의 찬송입니다. 7절에서 “하나님이여 주의 백성 앞에서 앞서 나가사 광야에 행진하셨을 때에”라고 노래하는 것도, 하나님이 이스라엘 앞에서 행진하시면서 이스라엘이 나아가는 길에 거치는 모든 것을 처리하시면서 이스라엘을 기어코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찬양을 보면 다윗은 비록 원수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위기의 상황이라고 해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앞에서 행진하고 계시는 이상 원수가 자신을 해할 수 없음을 믿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7절에서 “하나님의 병거가 천천이요 만만이라 주께서 그 중에 계심이 시내산 성소에 계심 같도다”라고 노래하는 것처럼, 다윗은 원수보다 더 많은 천사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둘러싸고 있는 것을 진짜 현실로 여겼던 것입니다.
신자가 믿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고 하나님의 백성 또한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으며 하나님께서 인도하고 계시는 참된 현실입니다. 우리의 미래는 하나님께 붙들려 있기에 하나님을 행하심을 믿으며 신뢰하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현재의 것으로 미래의 인생을 예측합니다. 지금의 소유가 넉넉하고, 직장이 탄탄하면 미래의 노후 또한 걱정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것이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인간의 인생을 현재의 것이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이끌어 가심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인생의 전부를 하나님께 의탁합니다. 사단의 손에서 구출해 주시고, 사망에서 건져 주시고 하나님의 언약대로 영원한 의의 나라의 백성으로 세우시기 위해 우리를 붙드시고 인자와 사랑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현재의 고통과 어려움에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행하심으로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는 것이 신자입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가 얼마나 신자로 살지 못했는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승리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두려울 것이 없고 부족할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믿음을 소원하며 이 믿음 위에 굳게 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고통스럽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힘들 수밖에 없고, 때로는 낙심도 하게 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우리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고통의 자리에서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요셉을 형통케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또한 형통의 길로 인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을 보지 마시고 영원히 사는 생명의 나라를 생각하시면 하나님의 인도를 어렴풋이나마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행하심으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감사하고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의인만이 할 수 있는 찬양입니다.
시편 67:1-7 찬송케 하소서
<본문>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복을 주시고 그 얼굴 빛으로 우리에게 비취사(셀라)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만방 중에 알리소서 하나님이여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 열방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찌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판단하시며 땅 위에 열방을 치리하실 것임이니이다(셀라) 하나님이여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 땅이 그 소산을 내었도다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시 67:1-7)
<설교>
이 세상에 진정한 행복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약 누구라도 세상에서 참된 행복을 얻고자 한다면 저는 주저 없이 그 사람을 ‘어리석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여자들은 미모의 탤런트를 바라보면서 ‘저 사람은 참 행복하겠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여자들에게는 ‘미모’가 행복의 조건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또는 많은 부를 축척하고 원하는 대로 마음껏 돈을 쓰고 살아가는 부자들을 보면서 ‘저 사람들은 참 행복하겠다’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는 돈이 행복의 조건이 되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자녀를 둔 부모를 바라보면서 그들은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들에게는 자식 잘 둔 것이 행복의 조건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행복의 조건으로 생각하는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갖추게 해주신다면 진심으로 행복한 삶을 누릴 자신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 16:26)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은 죽음 앞에서는 행복을 잃어버립니다. 온 천하를 얻었다고 해도 그것으로 죽음을 막지 못합니다. 팽팽했던 젊음도 세월과 함께 흘러가 버리고 종국에는 볼품없는 육체만 남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육체마저 흙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인간의 인생이기에 비록 온 천하를 얻어서 행복하다고 해도 그것은 잠시 동안의 즐거움일 뿐 참된 행복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있다면 그는 이 세상에 눈 돌리지 않은 사람일 것입니다. 신자가 바로 그러한 사람입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도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손에 쥐어진 그 어떤 것도 바라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비록 온 천하를 얻었다고 해도 죽으면 아무 소용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앞에 두고 행복할 수 있다면 그는 죽음을 뛰어 넘는 것, 즉 참된 생명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죽음을 뛰어 넘을 수 있는 것은 참된 생명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참된 생명은 곧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영원히 사신 예수님이 참된 생명이시고, 따라서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것이 행복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에 감사하고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복을 주시고 그 얼굴 빛으로 우리에게 비취사(셀라)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만방 중에 알리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 기도를 살펴보면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복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얼굴빛이 자신들에게 비취는 것을 하나님의 긍휼로 말하면서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빛이 비췬다는 것이 무엇이기에 그것을 긍휼로 고백하며 복으로 여기는 것일까요?
민 6:22-27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찌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찌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얼굴빛이 이스라엘에게 비췬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영광의 빛의 자리에 나올 수 있게 됨을 뜻합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대면할 수가 없는데 이스라엘에게는 큰 긍휼을 베푸셔서 하나님의 얼굴빛이 비취는 민족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그것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크신 복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성소입니다. 성소에는 등잔이 있고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의미하는 열 두 개의 떡이 있습니다. 그리고 등잔이 그 떡을 비추고 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비췸을 받는 민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거룩한 제물의 피로 인한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거룩한 제물의 희생의 피로 인해 하나님께 나올 수 있는 긍휼을 베푸신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 역시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이것이 신자에게 주어진 복이며 신자는 이 복으로 인해 하나님을 찬송해야 하는 것입니다.
2,3절을 보면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만방 중에 알리소서 하나님이여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 기도대로 주의 도가, 주의 구원이 땅 위에 드러났고 만발 중에 알린바가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오심과 십자가의 죽으심, 부활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이 세상에 알린 바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하나님의 구원을 찬송하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멸망에 처한 세상에 구원의 길을 여신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외면한 채 자신의 의로 열심히 살아가고 오직 자신을 위한 인생에 매진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악함이고 멸망이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거부한 그것이야 말로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인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실체를 두고 생각한다면 신자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고, 또한 긍휼을 깨달은 자가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감사요 은혜인지 모릅니다. 진심으로 세상 전부를 얻은 것보다 더 큰 복과 은혜를 누리고 있는 것이 신자입니다. 신자가 이 믿음으로 산다면 세상의 경제 불황이니 하는 것들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서 돈으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사는 법을 터득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1-12절)고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비결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배고픔에서도 흔들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배부를 때는 교만하고 배고프면 원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알지 못하고 영원한 사망으로 치닫고 있는 자신의 현실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사망에 처한 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긍휼의 복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자기 것을 챙기기 위한 수단 또는 도구로 예수를 찾을 뿐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은 싫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를 믿되 십자가에 죽은 예수는 믿기 싫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에 만연한 현상입니다.
6절을 보면 “땅이 그 소산을 내었도다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한 땅의 소산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얻은 소산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은 긍휼이 여기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땅의 소산을 얻었는데, 그 소산은 이스라엘이 노동을 한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일하지도 않은 소산을 얻은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일의 결과로 살아가는 땅이 아니라 일한 것이 없이 먹고 사는 땅에 들어온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이고 은혜인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긍휼로 인해 바로 그 은혜의 땅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의 일의 결과를 바라보며 사는 것이 아니라 살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감사와 찬송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노동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님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세상은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세상의 경제 상황에 따라 마음이 흔들리며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경제 상황에 따라 잘살고 못사는 것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살게 하시고 죽게도 하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베푸신 최고의 복은 긍휼을 베푸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얼굴빛을 비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야 말로 지금 당장 죽어도 감사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어떤 형편에서도 감사하고 찬송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자에게만 있는 능력입니다.
하나님께 무엇을 기도하십니까? 하나님을 찬송케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것은 곧 하나님의 긍휼을 깨닫고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온 마음이 점령되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찬송케 해달라는 이 기도가 여러분께 있기를 바랍니다.
시편 66:1-20 하나님이 행하신 일
<본문>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발할찌어다 그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할찌어다 하나님께 고하기를 주의 일이 어찌 그리 엄위하신지요 주의 큰 권능으로 인하여 주의 원수가 주께 복종할 것이며 온 땅이 주께 경배하고 주를 찬양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할찌어다(셀라) 와서 하나님의 행하신 것을 보라 인생에게 행하심이 엄위하시도다 하나님이 바다를 변하여 육지 되게 하셨으므로 무리가 도보로 강을 통과하고 우리가 거기서 주로 인하여 기뻐하였도다 저가 그 능으로 영원히 치리하시며 눈으로 열방을 감찰하시나니 거역하는 자는 자고하지 말찌어다(셀라) 만민들아 우리 하나님을 송축하며 그 송축 소리로 들리게 할찌어다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우리를 끌어 그물에 들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두셨으며 사람들로 우리 머리 위로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행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내가 번제를 가지고 주의 집에 들어가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니 이는 내 입술이 발한 것이요 내 환난 때에 내 입이 말한 것이니이다 내가 수양의 향기와 함께 살진 것으로 주께 번제를 드리며 수소와 염소를 드리리이다(셀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너희들아 다 와서 들으라 하나님이 내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선포하리로다 내가 내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으며 내 혀로 높이 찬송하였도다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실로 들으셨으며 내 기도 소리에 주의하셨도다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저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 (시 66:1-20)
<설교>
국어사전을 보면 신(神)에 대해 “종교의 대상으로 초인간적, 초자연적 위력을 가지고 인간에게 화복을 내린다고 믿어지는 존재”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즉 세상이 이해하고 있는 신은 화와 복으로 인간을 다스리면서 세상을 바르게 이끌어 가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전래 동화나 전설과 같은 것을 보면 선한 자와 악한 자가 등장을 하고 악에 의해 선이 핍박을 받고 억울한 죽음을 당했을 때 신에 의해 악이 징벌을 받고, 선한 자에 대해서는 복을 내려주는 내용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신을 그러한 의미에서 생각한다면, 분명한 결론은 ‘세상에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니면 ‘니체’라는 철학자의 말대로 “신은 죽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현실은 결코 인간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선과 악에 대한 상벌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뒤죽박죽 된 채 악한 자가 복을 받고, 선한 자가 화를 입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시각으로 신을 찾는다면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이 정의로서 세상을 다스리고 있다고 여길만한 증거나 흔적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신을 부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이 행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지요. 이 부분에서는 사실 믿는 자들도 곤란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교회를 다니면서 잘 된 사람들이나, 아니면 병이 나은 사람들, 술 담배를 끊는 등 행동이 달라진 사람들을 예로 들어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일하시는 증거로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기독교만의 보편적인 현상은 아니기 때문에 그 역시 하나님이 행하신 증거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결국 교회도 ‘이것이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다’(세상이 믿든 믿지 않든)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기독교만의 구별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교회 역시 눈에 보이는 것을 하나님이 행하시는 증거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 않는 것처럼, 교회 역시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5절을 보면 “와서 하나님의 행하신 것을 보라 인생에게 행하심이 엄위하시도다”라고 말합니다. 시편 기자는 와서 하나님의 행하신 것을 보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해 당당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와서 보라고 하는 하나님의 행하신 일은 무엇일까요?
6절을 보면 “하나님이 바다를 변하여 육지 되게 하셨으므로 무리가 도보로 강을 통과하고 우리가 거기서 주로 인하여 기뻐하였도다”고 말합니다. 이 구절이 말하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사건은 단지 바다가 갈라져 육지가 되고, 백성들이 걸어서 육지가 된 바다를 건넜다는 체험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다를 갈라져 육지가 되게 하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바다를 통과하게 하여 그들을 구원하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고 홍해를 건너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보내기를 거부하는 바로 왕을 치시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하십니다. 그리고 홍해까지 뒤따라온 애굽 군대는 홍해에서 몰살하게 하십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것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크신 능력과 은혜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행하신 그 일을 보고 하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출 14:30-31절에 보면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의 애굽 사람의 시체를 보았더라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베푸신 큰 일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에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큰 일을 봄으로써 여호와를 경외하며 믿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에서 신자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은 홍해에서 벌어지는 놀라운 사건을 체험을 했으면서도 자신들의 체험에 감격해 하지 않고 자기 체험을 증거하지 않으며, 그 사건에서 오직 큰 일을 행하신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는 종교적인 자기 체험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자기 체험을 믿음의 척도로 삼는 것입니다. 그리고 체험을 한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으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또한 체험 자체를 비교하면서 구분하기도 합니다. 마치 고린도 교회가 은사를 서로 비교하면서 경쟁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체험이 생명의 능력이 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이상하고 신비하게 볼 수 있는 체험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은 그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께 있지 않음을 대변할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홍해를 건너는 놀라운 체험을 직접 겪고 하나님께 구원을 찬양을 한 이스라엘도 얼마 지나지 않아 먹고 마시는 문제로 인해 원망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을 말해줍니다.
죽을병이 나았다고 해도 그 기적 같은 체험이 평생토록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게 하는 능력이 되지 못합니다. 아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체험을 했다고 해도 결론은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놀라운 체험을 했다고 해도, 내일 배가 고프고 죽을 지경이 되면 원망하게 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어제의 감격과 감사가 오늘을 살게 하는 능력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자로 하여금 날마다 믿음의 길을 가게 하는 능력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매일 새로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붙들면서 나아가게 하는 성령께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체험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맹목적으로 자신이 알고 있는 신에 대한 상식을 기준해서 스스로 생각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신 크신 일에서 알고 깨닫게 된 그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들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하는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께서 베푸신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증거하며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베푸신 사건, 즉 하나님이 행하신 큰일은 여러분을 아들의 피로 대속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단의 권세에서 구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날마다 연약한 여러분을 붙들어서 그리스도 안에 살게 하시며 생명의 길로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행하신 크신 이 일로 말미암아 지금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4절에서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발할찌어다 그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할찌어다 하나님께 고하기를 주의 일이 어찌 그리 엄위하신지요 주의 큰 권능으로 인하여 주의 원수가 주께 복종할 것이며 온 땅이 주께 경배하고 주를 찬양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할찌어다”고 하나님을 노래하는 이 찬송은 오늘 여러분의 찬송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고, 그 일에서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은혜를 깨닫고 노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9절을 보면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실족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우리를 붙들어서 실족하지 않게 붙드시고 도우시는 것입니다. 즉 여러분의 믿음은 여러분의 의지와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붙드시고 도우신 결과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막연하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구원받았다’고 가볍게 생각하고 지나칠 것이 아니라, 나같은 인간이 나의 죄를 깨닫고 죄를 고백하며 예수님의 피의 공로를 믿게 되고, 또한 지금 이 순간 예수님을 나의 주가 되시며 나의 전부이신 분으로 고백하게 된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행하신 크신 일임을 알고 그 하나님을 찬송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의 실족함을 허락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비록 택한 자기 백성이라고 해도 힘들고 어려운 길을 가게 하십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우리를 끌어 그물에 들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두셨으며 사람들로 우리 머리 위로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행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10-12절)고 말씀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마음을 하나님께 붙들어 놓기 위해서 시험하시고 단련하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신자를 세상의 풍요가 아닌 하늘의 풍요로운 은총으로 인도하시고 영원한 생명에 거하도록 하시기 위해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세상은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이 생각하는 하나님이 다르고, 바라보고 소망하는 것 자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매일의 삶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삶이 될 수 있고, 하루하루의 삶으로 인해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단지 숨 쉬고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독생자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게 된 것, 주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나라에 소망을 두게 된 것, 세상의 것을 썩어질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바라보게 된 것, 이 모든 것 하나하나가 하나님께서 크신 능력으로 내게 행하신 일로 바라보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20절을 보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저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주시며, 인자하심을 거두지도 아니하시는 분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이처럼 크신 사랑만으로도 하나님을 찬송하며 감사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세상을 바라본다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 또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향해서 ‘와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라’고 외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독생자 아들의 피로 말미암아 자기 백성의 죄를 덮으시고 거룩한 자로 여기시고, 또한 실족함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인자를 거두지 않으심으로 인해서 신자에게 베풀어지고 있는 그 크신 사랑을 생각한다면, 신자는 매일 하나님을 찬송하며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은 오늘도 여러분에게 인자를 거두지 않으시고,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사랑이며 은혜입니다.
시편 65:1-13 신자의 만족
<본문>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사람이 서원을 주께 이행하리이다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땅의 모든 끝과 먼 바다에 있는 자의 의지할 주께서 의를 좇아 엄위하신 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리이다 주는 주의 힘으로 산을 세우시며 권능으로 띠를 띠시며 바다의 흉용과 물결의 요동과 만민의 훤화까지 진정하시나이다 땅 끝에 거하는 자가 주의 징조를 두려워하나이다 주께서 아침 되는 것과 저녁 되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시며 땅을 권고하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케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이 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저희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 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 주시나이다 주의 은택으로 년사에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이 떨어지며 들의 초장에도 떨어지니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나이다 초장에는 양떼가 입혔고 골짜기에는 곡식이 덮였으매 저희가 다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하나이다 (시 65:1-13)
<설교>
신자가 하나님으로 인해 만족을 누린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물론 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주셨을 때에는 자연히 ‘만족한다’는 말을 하겠지만 그것은 하나님으로 인해 만족하는 것이 아닐뿐더러 그러한 만족조차도 약속하지 않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사람은 두 손을 들고 눈물을 흘리며 목이 터져라 찬양을 부르면서도 거기서 놀라운 은혜와 만족을 얻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현상은 심리적이고 감정적인 것일 경우가 많음을 주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 인한 신자의 만족은 하나님의 구원의 소망이 넘쳐흐를 때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소망이 넘쳐흐를 때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 사역에 마음이 향하게 되고,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 사역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과 긍휼을 확증할 수 있기에 그로 인해 감사와 기쁨이 있게 되고 그것으로 만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속에 구원의 소망이 넘쳐흐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소망이 있게 하시기 위해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어떤 본질을 갖고 사는 인간인가를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고 말합니다. 죄악이 나를 이기었다는 것은 항상 죄에 지고 살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 죄만 지으면서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자기 인식입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현실은 항상 죄가 자신을 이기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믿음이 없어서 죄에 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죄에 질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매일 죄에 끌려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 것입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죄에 지고 산다는 말을 실감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매일 자신이 나쁜 짓 하며 살아간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죄가 인간이 자기를 위해 살아가는 모든 것이라고 규정한다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든 매일 자신을 위해 존재하고 자신을 위해 일하며 철저하게 자신만을 위해 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죄악이 나를 이기었다는 말은 ‘나는 언제나 하나님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살아갑니다’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을 죄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4절을 보면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고 말합니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셔서 주의 뜰에 거하게 하셨다는 것은, 인간은 스스로 주의 뜰을 찾지 않을 존재임을 뜻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주의 뜻에는 인간이 원하는 것이 없습니다. 성공도 출세도 돈도 없습니다. 있다면 죄인이라는 고백과 거룩한 제물이 흘리는 피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주의 뜰의 세계이며 곧 십자가의 세계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질상 주의 뜰은 스스로 찾아갈만한 바람직한 곳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한 주의 뜰이 무엇이기에 그 곳에 거하게 하신 사람을 복이 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까?
주의 뜰로 부름 받은 신자가 그곳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죄인에게 주어진 새로운 길입니다. 그것을 신약에서는 복음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거룩한 제물이 흘린 피로 말미암아 모든 죄가 용서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의 뜰에서 경험할 수 있는 새로운 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주의 뜰에 거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셔서 이 은총을 베푸신 것입니다. 이 은총의 가치를 알 수 있는 사람은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전혀 없고 남은 것은 심판뿐임을 자각한 사람일 것입니다. 이들에게만 주의 뜰에 거하게 된 것이 큰 복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는 찬송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은 외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성전에서 베풀어지는 거룩한 제물의 희생과, 그 희생으로 인한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죄인에게는 한없는 은총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아름다움으로 노래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으로 만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을 받은 신자는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됩니다. 생활이 편하든 힘들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타인의 것과 비교하지 않고 모든 것을 죄인인 자신에게는 넘치고 과분한 것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받을 자격이 없고 받아야 한다면 하나님의 심판 밖에 없는 자임을 알기에 입에 들어가는 밥 한 숟갈도 은혜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죄인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난 신자의 심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9절부터 마지막 절까지의 내용을 보면 마치 하나님께서 땅의 것을 넘치고 풍성하게 베푸셔서 그것으로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지금의 세상 현실을 볼 때 과연 하나님의 풍성한 복을 누리고 있는 것으로 보이십니까? 입만 열면 살기가 힘들다고 투덜대는 사람들로 가득한 것이 현실인데 그러한 세상이 여러분의 눈에는 하나님의 풍성하고 넘치는 은총을 누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면 여러분이야 말로 하나님의 은총과 복을 누리는 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을 외면한 채 세상을 바라본다면 지금 세상의 형편은 9절부터의 말씀처럼 풍성하고 넘치는 복으로 가득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경제가 어려운데 무슨 풍성한 복이 넘치는가?’라는 불평만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이 만족이 되는 신자라면 십자가로 확증된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이 그 마음에 감사와 기쁨으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그 마음으로 세상을 본다면 이 세상이 존재하고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 것이고 따라서 세상은 이미 하나님의 풍성한 복을 누리고 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복을 보지 못하는 것이 세상의 어리석음입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진심으로 죄인된 자로 하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형식적인 죄인이 아니고, 말로만 인정하는 죄인이 아니고, 위장된 죄인이 아니라 날마다 죄악이 나를 이기면서 죄에 빠져 살아가는 자신의 실체를 들여다보면서 자신이 악한 자임을 고백하는 죄인으로 하나님께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피 흘려 죽으신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보게 되고 용서의 은총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은총으로 우리의 속이 채워진다면 신자는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만으로도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말씀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당시 바리새인이나 제사장 서기관과 같은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말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은 그들의 삶의 목표와 근거를 무너뜨리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범을 지켜서 거룩하게 되는 것이 삶의 목표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눈에는 자신들은 분명 의인이고 세리와 창녀와 같은 사람은 악한 죄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러한 죄인들을 위해 오셨다는 말씀을 하시니 충격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죄인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거룩을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이 용서의 은총은 감동과 감사로 다가올 수가 없습니다. 용서의 은총이 필요 없이 이미 구원 받은 자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아마 여러분은 ‘나는 바리새인과 같지 않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스스로 죄인이라고 여기고 인정하기 때문에 바리새인은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죄인이라고 하면서도 바리새인들처럼 타인에게 고상하고 교양 있고 거룩한 모습으로 비춰지고 싶어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결국 죄인이라는 말은 하면서도 그 속마음에 죄인의 자리에는 서기 싫어하는 인간의 본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죄인이라는 고백은 열심히 하는데도 하나님의 용성의 은총에 대해 냉담하게 되고, 주께서 택하셔서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복에 대해서도 냉담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상한 인간되고 싶어 하는 그것조차도 우리 자신을 향한 욕망이라는 것을 간파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날마다 죄악에 지고 살아가는 실상을 깊이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은 신자가 평생토록 감사하고 노래할 커다란 복으로 여러분에게 굳게 자리할 것입니다.
시편 64:1-10 혀가 저희를 해함이라
<본문>
하나님이여 나의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원수의 두려움에서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 주는 나를 숨기사 행악자의 비밀한 꾀에서와 죄악을 짓는 자의 요란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저희가 칼 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 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 숨은 곳에서 완전한 자를 쏘려 하다가 갑자기 쏘고 두려워하지 않도다 저희는 악한 목적으로 서로 장려하며 비밀히 올무 놓기를 함께 의논하고 하는 말이 누가 보리요 하며 저희는 죄악을 도모하며 이르기를 우리가 묘책을 찾았다 하나니 각 사람의 속 뜻과 마음이 깊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저희를 쏘시리니 저희가 홀연히 살에 상하리로다 이러므로 저희가 엎드러지리니 저희의 혀가 저희를 해함이라 저희를 보는 자가 다 머리를 흔들리로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의인은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시 64:1-10)
<설교>
이웃을 향한 최고의 사랑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죄인이라는 존재로 이웃에게 다가가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에 가서 선교하고, 양식이 없어서 굶는 사람에게 빵을 주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나도 당신과 똑같은 죄인에 불과합니다’라는 마음으로 다가가는 것이 최고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배고픔을 일시적으로 해결해주는 것에 불과한 빵이 복음이 아니라 굶주리는 것보다 더 비참한 현실인 하나님의 저주에서 우리를 건져주신 분이 예수님이신 것을 증거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신자는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고백한다고 해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죄인된 자신에게 베풀어진 은혜가 무엇인가를 알아야지요. 물론 이 은혜도 안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여러분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은혜를 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앎이 여러분의 지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활동의 결과임을 자각하느냐는 것입니다. 즉 성령이 여러분께 활동하심으로 그러한 앎이 가능함을 잊지 않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문제가 중요한 것은 신자는 자신만이 성령의 활동의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체의 관계에 있는 모든 신자가 성령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이 나에게 일하시고 계신다면 나만이 아니라 함께 한 지체에게도 동일하게 일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성령의 활동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간 것처럼, 함께 한 지체 역시 성령의 동일한 영역 안에서 동일한 일하심으로 하나님을 알아가는 은혜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 얘기는 그 누구도 자신의 앎을 기준하여 타인을 판단하고 비판할 수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웃에 대한 판단과 비판이 나온다면 그것은 자신이 성령의 활동 영역 안에 있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고, 나아가서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죄인 됨을 아는 것 모두 성령의 깨달음이라는 것을 무시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3절을 보면 “저희가 칼 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 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라는 말을 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 다윗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다윗을 비방하는 것에 대한 얘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7,8절의 “그러나 하나님이 저희를 쏘시리니 저희가 홀연히 살에 상하리로다 이러므로 저희가 엎드러지리니 저희의 혀가 저희를 해함이라 저희를 보는 자가 다 머리를 흔들리로다”는 구절을 보면 다윗을 비방하는 말로 인해서 대적들이 하나님께 해를 받을 것임을 말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 다윗을 비방한 대적들에 대해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중요한 것은 ‘왜 심판하시는가?’입니다.
여러분은 다윗에게 평생토록 따라다니는 약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바로 밧세바를 범하고 그 남편 우리아를 죽게 한 일입니다. 다윗의 이 행위는 하나님의 율법대로 하면 사형을 받아야 할 정도로 큰 죄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큰 죄를 하나님이 용서 했다고 해서 백성들이 기억에서 지워버렸을까요? 어쩌면 왕으로써 그토록 엄청난 죄를 하나님이 용서했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두고두고 비방거리로 남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잊기 쉬운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란 죄에 대해서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심을 뜻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용서를 말하면서도 죄를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잊어버립니다. 그런데 타인의 죄를 기억하고 타인을 비방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히 8:12절을 보면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처럼 하나님은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고 모든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용서를 받은 신자는 하나님께는 죄 없는 의로운 자로 기억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서 말한 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말하면서도 타인의 허물과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잊지를 않고 두고두고 기억을 합니다. 그리고 때때로 타인을 공격하고 무너뜨리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아는 신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64편은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길 때 지은 시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5,6절의 “저희는 악한 목적으로 서로 장려하며 비밀히 올무 놓기를 함께 의논하고 하는 말이 누가 보리요 하며 저희는 죄악을 도모하며 이르기를 우리가 묘책을 찾았다 하나니 각 사람의 속 뜻과 마음이 깊도다”라는 내용은 압살롬이 반역을 꾀할 때 백성들을 선동하기 위해 다윗을 비방한 것을 두고 한 내용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실 압살롬이 백성들을 선동하기란 쉬운 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다윗에게는 치명적인 허물이 있기 때문에 그 허물을 드러내면서 그 같은 죄를 범한 다윗은 왕으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선동을 한다면 백성들은 쉽게 압살롬의 편에 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4절을 보면 “숨은 곳에서 완전한 자를 쏘려 하다가 갑자기 쏘고 두려워하지 않도다”라는 말을 합니다. 완전한 자란 다윗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다윗을 과연 완전한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다윗이 도덕적인 기준으로 자신을 바라본다면 절대로 스스로를 완전한 자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다윗만이 아니라 그 누가 감히 자신을 완전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완전함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의 은총 안에서만 가능한 말입니다. 인간이 용서로 인해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기억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죄 없는 완전한 자로 일컬음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용서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의 용서 안에서 완전한 자로 일컬음 받는 다윗을 비방한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용서를 멸시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여기에 대해서 분노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신자는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 안에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 개인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의 관계로 부름 받은 모든 신자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억하지 않으시는 타인의 허물을 내가 기억하고 비방한다면 그것이 곧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않으시는 은혜를 허물고 멸시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분노를 사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희의 혀가 저희를 해한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의인과 죄인이 모이는 곳이 아니라 오직 죄인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타인의 허물과 죄를 드러내고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타인의 허물과 죄를 드러내는 것은 죄 없는 의인에게만 가능한 일인데 우리 모두는 죄있는 죄인으로 하나님께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신자가 서로 모여서 타인의 허물을 놓고 비방하고 판단하는 일을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긍휼 없는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만약 교회에서 죄로 인해 책망을 받고 판단을 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온 우리 모두가 말씀으로 인해서 책망과 판단을 받는 것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마음이 정직한 자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함은 자신의 악한 본질을 그대로 내어 놓으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보면 그 은총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자의 정직함이란 ‘나는 죄인일 뿐입니다’는 고백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이 정직한 신자에게는 타인의 허물을 내어 놓으며 그를 비판하고 비방하는 것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폈을 때 제일 먼저 만나는 원수는 바로 여러분 자신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을 헛되이 하고 멸시하며 살아가는 것이 곧 우리 자신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용서는 마치 나에게만 해당되는 나의 몫으로만 여기고 타인 역시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 안에 머물고 있고, 성령이 그에게 활동하면서 용서의 은혜를 아는 백성으로 만들어간다는 것을 망각하고 산다면 여러분에게서는 간음한 여인을 끌고 예수님에게 나아가는 바리새인, 그리고 함께 한 군중들과 다를 바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항상 자신을 보지 못하고 잊어버립니다.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할 저주의 자식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가 간음했다’는 타인에 대한 고발만 있을 뿐, ‘내가 간음한 자고 내가 죄인의 괴수입니다’라는 자신에 대한 고발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서 자신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 있어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여러분 자신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직한 신자입니다. 이처럼 자신을 고발하고 자신을 쏠 수 있어야 하나님의 용서가 커다란 은총으로 다가오지 않겠습니까?
인간관계가 어렵다는 말을 하지만 사실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죄인이라는 본질을 속에 품고 만난다면 참으로 편한 관계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이해를 가지고 만나기 때문에 ‘내 마음에 든다 안든다’는 주관적인 시각으로 이웃을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웃이 여러분의 마음에 들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신자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자로 산다면 그것으로 다 된 것 아닙니까?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누리는 용서의 은총은 여러분만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지체된 모든 신자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은총임을 잊지 마십시오, 이로 인해 혀로 타인을 해하는 말이 아니라 살리는 말을 하게 되고, 구원자이신 예수님만을 높이고 자랑하는 말이 나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편 63:1-11 주를 앙모하나이다
<본문>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 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내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내 손을 들리이다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내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내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 하오리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거이 부르리이다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저희는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칼의 세력에 붙인바 되어 시랑의 밥이 되리이다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 주로 맹세한 자마다 자랑할 것이나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막히리로다 (시 63:1-11)
<설교>
63편을 읽어보면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해
이런 마음을 드러낸다는 것이 가능할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하나님을 향한 깊은 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윗이 처한 당시의 형편과 상황이 좋았던 것이 아닙니다.
먹고 사는데 아무 부족함이 없이 풍족을 누리고
자신을 괴롭히는 대적이 없는 평안의 삶을 누리며 사는 환경에서
이러한 시를 쓴 것이 아닙니다.
1절을 보면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다윗이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주를 갈망한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지금 다윗이 처한 형편은 물도 없고 먹을 것도 없어서
목마르고 주린 상황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물이 없고 먹을 것도 없는 땅이라면 광야를 의미합니다.
즉 다윗은 대적에 의해서 광야라는 척박한 땅까지 쫓겨 다니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하나님께 도와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은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단지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므로 내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내 손을 들리이다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내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내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 하오리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거이 부르리이다”(4-7절)고 노래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찬송하고 높이며
하나님으로 인해 그 영혼이 만족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모든 형편과 환경을 초월하여
오직 하나님으로만 족함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에게 주어지는 진정한 기쁨과 행복입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이
세상의 것으로 인생의 기쁨과 족함을 누리기 위해 발버둥 치며 사는 것이야 말로
어리석은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인생의 행복이 하나님께 있다는 말을 하면서도
우리가 말하는 길로 가려고 하지 않고
어리석다고 여기는 세상의 길에 함께 동행하려고 하고,
또 동행하며 살아가는 것을 보면
참으로 이율배반적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이 없는지도 모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2절을 보면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 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다윗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봄으로써 찬송을 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3절의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는 내용을 보면
다윗은 생명보다 더 낫고 귀한 주의 인자를 봄으로써
주를 찬양하게 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다윗은 주의 권능과 영광과 인자 앞에서
자신이 살고 죽는 문제 따위는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드러나는 주의 권능과 영광과 인자로 인해서
주를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2절에서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다고 말합니다.
성소에서 주를 바라볼 때
다윗이 보게 된 것이 주의 권능과 영광, 그리고 인자하심이었던 것입니다.
성소란
제물의 피, 즉 희생이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제물의 희생으로 인해서
제사 드리는 자의 모든 죄가 용서되고 가려지는 은총이 베풀어지는 곳이 또한 성소입니다.
결국 성소에 들어갈 때는
죄있는 자로, 죄로 인해 심판을 받아야 할 자로 들어가는데
나올 때는 모든 죄가 용서된 거룩한 자가 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이처럼 죄 있는 자를 용서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것이 곧 주의 권능입니다.
세상에 그 어떤 권능도 죄있는 자를 죄 없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심판에 처한 자를 죄 없다고 선언하고
심판에서 건져낼 권능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힘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제물이 흘린 피는 그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래서 권능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그 권능을 바라보고 의지한다면
세상의 어떤 힘에도 머리 숙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 성소에서 이 권능을 보고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세상은 인간의 선행과 의를 담보 삼아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선행과 의를 쌓아가는 인간이 영광의 대상이 되버립니다.
하지만 성소에서는 인간의 선행과 의를 볼 수 없습니다.
오직 제물의 희생만을 볼 뿐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영광의 대상이 아니라
제물을 피 흘리게 하심으로
죄있는 자를 죄 없다고 하신 하나님만이 영광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계획하시고 이루신 하나님에게서 인자를 보게 되는 것이고
이 모든 것들이 자신이 살고 죽는 것보다
더 크고 위대한 일임을 깨달았기에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본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찬송과 기도는
단지 자신에게 다가온 고난에서 건짐 받고 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기도와 찬송과는 다릅니다.
자신이 살고 죽는 문제보다 더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을 보게 되었기 때문에
자신이 처한 형편과는 상관없이 주를 찬송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살고 죽는 것보다
더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깨달음이 있기 전에는
영혼이 주를 갈망하고 육체가 주를 앙모하는 갈급함으로
주를 노래하는 그 심정은 전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문제는 항상 세상에서 살고 죽는 문제에 집착해 산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현실이 ‘살고 죽는 것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문제가 없다’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 아닙니까?
주의 권능 인자 영광, 그러한 것들은 먹고 사는 문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여긴 채
육신의 문제에만 매달려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실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다윗처럼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성소, 즉 예수님의 피 흘림이 있는 십자가에서 주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 흘림이 없었다면 인간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이
단지 죄의 값인 심판과 사망이 주어질 운명이었음을 깊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사망에서는 돈 많은 자, 돈 없는 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고생하며 사는 사람, 편하게 사는 사람이라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많이 배운 사람,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모두가 비참한 사망에 처할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운명을 우습게 여기기 때문에 주의 권능과 영광과 인자가 귀하게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4절을 보면
다윗은 평생에 주를 송축하겠다고 말합니다.
주의 권능과 영광과 인자하심이 평생토록 주를 찬송할 이유로 자리한 것입니다.
그 평생의 삶이 어떤 길을 간다고 해도
주의 권능과 영광과 인자로 말미암아 주를 찬송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이 원하는 것을 구할 이유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성소에서 자신에게 차고 넘치는 복이 무엇인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십자가에서 무엇을 보십니까?
자신을 구원을 보십니까? 신자가 십자가에서 보아야 하는 것은
사망에 처해져야 할 자신에게 한없이 차고 넘치는 복입니다.
이 복을 보게 된다면 무한한 복을 누리고 있는 것이 자신임을 알게 될 것이고
그로 인해서 감사하고 복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 이 정도의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는 것이 참으로 답답하고 한편으로는 안타깝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말이 당장 여러분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줄 생수가 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생각 같아서는 저도 여러분도 다윗이 알았던 하나님을 알게 함으로써
다윗이 누렸던 영혼의 기쁨과 찬송을 누리도록 해주고 싶지만
그것은 저의 소관이 아니라 여러분이 날마다 힘써야 할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마음을 십자가에 두시고 진심으로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살고 죽는 것보다 더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달아 알게 된다면
다윗과 같은 기쁨과 찬송을 조금이나마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저와 여러분을 기대하면서
다만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님이 일하심을 믿을 뿐입니다.
6-11절을 보면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 하오리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거이 부르리이다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저희는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칼의 세력에 붙인바 되어
시랑의 밥이 되리이다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
주로 맹세한 자마다 자랑할 것이나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막히리로다”
다윗은 한마디로 말해서 울어야 할 형편에서도 즐거워하는 자가 되었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것은 다윗은 주의 날개 그늘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시는 주를 바라보고, 주가 자신을 붙들고 있고,
자신을 해하려는 자를 주가 찾아 대적하심을 바라보면서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현재의 자신의 모습을 가지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읽으려고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려운 형편에서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도, 붙드시고 도우시는 은혜도 볼 수 없게 됩니다.
신자는 오직 십자가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자신을 죄에서 건지기 위해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신 사랑과 은혜가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신자는 형편과 환경을 벗어나 하나님이 하신 일로 인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인생을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편 62:1-12 하나님만 바라라
<본문>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은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박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저희가 그를 그 높은 위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셀라)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 진실로 천한 자도 헛되고 높은 자도 거짓되니 저울에 달면 들려 입김보다 경하리로다 포학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 치심치 말찌어다 하나님이 한두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주여 인자함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시 62:1-12)
<설교>
신앙이란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살아가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개 보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살아가는 삶을 도덕적으로 바르게 행동하고, 종교적인 행동에 부지런한 것으로 오해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선행에 힘쓰고 기도와 묵상, 성경읽기에 부지런하면서 봉사와 헌신에도 열심이 있는 삶을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런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선행이 보이지 않고 종교적인 행동 역시 부지런하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가까이 있지 못하는 것으로 여길 것이 뻔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처럼 외적인 것으로 판단될 수 있는 것이라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과 같은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과 가까운 관계에서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이라는 책망을 들었고, ‘너희의 아비는 마귀’라는 충격적인 말까지 들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바르게 사는 것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생각입니다. 바르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세상에 많습니다. 신자보다 더 많은 선행을 베풀면서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우리의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 모두를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다고는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르게 사는 사람들 속에는 불신자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아무리 신자보다 더 많은 선행을 베푼다고 해도 교회에 다니지 않으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해야 합니까? 그렇다면 ‘바르게 사는 것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것이다’는 말 자체가 모순이지 않습니까? 이런 모순적인 말 때문에 기독교는 종교적인 독선에 빠져 있고, 자기들만 제일이라고 여기는 종교적인 우월감에 빠져 있다는 말을 듣기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으로부터 어떤 말을 듣는 것이 두려운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모순을 안고 있고 모순의 길을 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보지 못하고 마치 진리의 길을 가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어리석음은 볼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서 사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오늘 본문을 보면 알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1,2절)는 다윗의 고백이 곧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나오는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고 크게 요동치 않는 것은 하나님이 굳건하고 강한 힘이 되는 분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았고, 바로 그 하나님을 굳건히 의지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가령 신자가 자기 구원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고 있다면 누군가는 그것을 신자로서 무책임한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구원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인간이 자기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문제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에 의해 베풀어지는 은총임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신자는 자연히 하나님만 바랄 뿐 자기 구원을 위해 힘을 쓰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만 바라는 것은 무능하고 무책임한 모습이 아니라 인간을 알고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가능한 신앙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내어놓을 만한 행위가 없으면 불안하기 마련인데, 아무것도 한 것이 없어도 그 마음이 불안하지도 요동하지도 않은 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지 않고서는 안되는 신앙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행동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앉아서 눈감고 묵상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잠잠히 하나님만 바란다는 것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살았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계획과 방법과 노력이 자신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이 구원의 근거가 됨을 믿고 하나님만 바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에서 자신의 계획과 자기 방법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도 탄식과 불안이 없습니다. 애당초 자기 계획과 자신의 방법과 노력을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람이 자신의 삶에서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갈 수는 있지만 자기 계획과 노력을 의지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은 우리 자신의 계획과 노력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인생을 위해 어떤 계획을 세웠다고 해도 결국 성취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임을 믿는다면 신자는 자신의 계획이 실패한다고 해도 요동하지 않고 하나님이 이루신 일을 잠잠히 바랄 수 있는 것입니다.
3,4절의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은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박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저희가 그를 그 높은 위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는 구절을 보면 62편을 기록할 때의 형편도 어려움과 고통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형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구원만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구원은 주변의 여건과 형편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 달린 것이기 때문에 자신을 행하고자 하는 원수에게 둘러싸인 형편이라고 해도 두려움과 불안함이 없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신자에게서 볼 수 있는 신앙인 것입니다.
다윗은 5,6절에서도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이 하나님만 나의 반석, 구원, 산성으로 고백할 수 있게 되는 것은 다윗의 소망은 세상을 향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향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것,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에 소망을 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것에만 모든 소망을 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에게는 세상의 것을 얻었다고 해도 힘이 아니고 잃는다고 해도 낙심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떠나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베푸시는 사랑과 자비하심과 인자가 소망의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고백하는 신앙의 세계입니다.
이처럼 다윗의 신앙 세계는 요란하지 않고 짐이 되는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잠잠히 하나님만 바랄 뿐입니다. 원수가 자신을 해하고자 하고, 그로 인해 고통의 삶이 계속된다고 해도 요동함이 없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신을 붙들고 있는 현실에서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달려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를 못합니다.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면 마음은 분주해지고 요란해집니다. 나가지 않던 새벽예배까지 나가면서 울며 기도합니다. 주어진 형편에 따라 그 마음도 요동을 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 다윗처럼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는 신앙이 되지 못할까요? 다윗과 우리의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비록 하나님을 부르고 예수님을 부르지만 우리 속에는 내가 원하는 나의 세계, 나의 삶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약속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나의 세계를 바라보기 때문에 불안과 요동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은 문제만 발생해도 자신이 원하는 삶에서 멀어지고 원치 않는 환경의 삶을 살게 될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에게는 자신이 원하는 세계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곧 다윗의 세계였고 다윗의 삶의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하나님에 의해 분명히 성취됨을 믿었기에 어떤 형편에서도 요동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를 요동하게 하는 것은 미래를 향한 욕심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패가 없고 성공만 있으며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성취됨으로써 행복을 누리는 그야말로 환상적인 미래를 꿈꾸지만 말 그대로 그것은 환상일 뿐이며 헛되고 어리석은 생각일 뿐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데 어떻게 우리가 원하는 미래를 살 수 있겠습니까?
대개 보면 세상의 모든 일을 하나님이 주관하시니까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간절히 기도하면 원하는 삶을 이뤄주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유치찬란한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자식이 원하면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다 해주십니까? 학교 가기 싫다 하면 가지 말라하고, 돈도 달라고 하는 대로 다 주십니까? 아이들이 생각하는 행복한 삶은 학교 가지 않고 놀고 싶은 대로 마음껏 놀면서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식의 미래에 결코 좋은 것이 아님을 알기에 때려서라도 학교를 보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지금 당장 내게 좋고 편한 것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전부를 아시고 세상의 마지막까지 계획해 놓으신 하나님이 주고자 하시는 복은 지금 당장 좋고 편한 것이 아니라 마지막 때가 이르렀을 때 세상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복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지금 이 세상에서는 잠시 고통과 어려움의 길을 가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내게는 구원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고통과 어려움이라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은 나를 구원으로 이끄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임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요동이 아니라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는 삶을 살게 할 것입니다.
9,10절을 보면 “진실로 천한 자도 헛되고 높은 자도 거짓되니 저울에 달면 들려 입김보다 경하리로다 포학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 치심치 말찌어다”고 말합니다. 세상에서의 높고 낮음, 힘, 재물 이런 모든 것들은 헛될 뿐이니 그러한 것들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서게 되면 세상의 진정한 현실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시기까지 죄에 대해 보응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은 죄에 갇혀 살아간 마지막이 어떤 것인가를 확실히 보게 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신자는 그러한 미래를 십자가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세상에 임할 참된 현실을 보게 되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의지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하며 따라서 세상의 높고 낮음과 힘과 돈을 위해 살아가는 인생이 얼마나 어리석고 헛된 것인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있으며 하나님만이 소망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하나님만 바라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시편 61:1-8 서원 기도
<본문>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 내 마음이 눌릴 때에 땅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심이니이다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거하며 내가 주의 날개 밑에 피하리이다(셀라) 하나님이여 내 서원을 들으시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의 얻을 기업을 내게 주셨나이다 주께서 왕으로 장수케 하사 그 나이 여러 대에 미치게 하시리이다 저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 거하리니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저를 보호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며 매일 나의 서원을 이행하리이다 (시 61:1-8)
<설교>
기도에 대해서 대부분의 교회가 강조하는 것은 ‘열심히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우리의 소원과 필요를 하나님께 구하여 받는 것으로 일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한 기도를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움직일 수 있는 수단과 도구로 여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것들이 이방인의 기도에 불과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기도는 신자에게 있어야 할 당연한 것이지만 기도가 자신의 열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면 그것은 이미 신앙과 상관없는 기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다윗의 기도가 등장합니다. 우리는 다윗의 기도를 보면서 과연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사람의 기도는 어떤 것이었는가를 배우면서 우리들의 기도와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하나님과 상관없는 것이었는가를 발견하면서 신앙을 말했으나 신앙과 상관없는 길을 걸어온 우리들의 악함도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우리를 놓지 않으시고 붙드시며 고쳐 가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사랑을 깊이 깨닫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61편은 2절에서 “내 마음이 눌릴 때에 땅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라는 기도를 하는 것을 보면, 다윗이 더 이상 다른 피할 길이 없는 땅 끝까지 내어 몰린 상황에서 한 기도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서 쫓겨 다녔던 상황으로 짐작이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윗은 “하나님이여 내 서원을 들으시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의 얻을 기업을 내게 주셨나이다”(5절)는 기도를 합니다.
여러분께 ‘서원’이라는 단어는 아주 익숙할 것입니다. 서원기도라는 말을 많이 들어 보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서원이라는 말은 ‘하나님께 무엇을 하겠다거나 일정기간 동안 하지 않겠다고 자발적으로 약속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서원기도라는 것을 하나님께 어떤 맹세를 하면서까지 자기 소원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냥 기도하는 것보다는 뭐가 하겠다거나 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각오와 결단을 보이면 그만큼 하나님의 마음이 움직여져서 응답받을 확률이 높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을 우상처럼 대하는 망령된 짓거리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위해 뭔가 하겠다고 각오하고 결단한다고 해서 뜻대로 된다고 생각합니까? 또는 하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한다고 해서 그 또한 마음먹은 대로 된다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큰 착각입니다. 세상이, 그리고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주관 아래 있고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잊고 있는 어리석은 생각일 뿐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각오하고 결심한대로 행하며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일단 우리가 약한 존재입니다. 주위 상황과 여건과 형편에 의해서 수시로 마음은 바뀌고 변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언제나 자신에게 유익한 쪽으로 흘러갑니다. 그런데 주변의 여건과 상황이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결심하고 각오한 대로 행하면 큰 손해를 초래할 수밖에 없도록 되었다면 그런대도 애초의 결심과 각오대로 실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또한 아무리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도 있습니다. 가령 하나님께 봉사하겠다고 서원했는데 하나님이 병들게 하시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몸 바쳐 봉사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서원할 수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말한 것입니다. 세상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인간은 무엇을 두고도 맹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은 어떤 서원을 한 것입니까? 4절을 보면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거하며 내가 주의 날개 밑에 피하리이다”고 기도하는데 이것이 다윗의 서원인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서원과는 분명 다를 것입니다. 우리는 서원을 ‘기도를 하겠습니다. 헌금을 하겠습니다. 그러니 제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라는 식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61편의 배경은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기며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는 막다른 상황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다윗이 할 수 있는 것은 주께 부르짖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무작정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부르짖고 있습니다.
6절을 보면 “주께서 왕으로 장수케 하사 그 나이 여러 대에 미치게 하시리이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압살롬에게 쫓기며 더 이상 도망할 곳이 없는 위기 상황에 이르렀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다윗 자손으로 그리스도가 오실 것이라고 했기에 자신의 왕위가 끊어지는 일은 없을 것임을 믿고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다윗 자손으로 이스라엘의 영원한 왕이신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인데 다윗의 왕위가 계속 이어지지 못하고 압살롬에게 넘어간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무너지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신이 비록 땅 끝까지 몰린 상황이지만 왕위가 압살롬에게 넘어가는 일은 있을 수 없음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입에서는 ‘살려주십시오’라는 부르짖음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자신의 왕위는 영원하다는 것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7절을 보면 “저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 거하리니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저를 보호하소서”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계속 자신을 얘기하다가 갑자기 저라는 타인에 대한 말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저’는 6절에서 말한 주께서 장수케 하실 왕,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다윗은 비록 쫓겨 다니지만 그리스도를 보내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실패하지 않고 성취될 것이고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은혜는 대대에 미칠 것이라는 것이 다윗의 기도며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8절을 보면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며 매일 나의 서원을 이행하리이다”는 말을 합니다. ‘그리하시면’이라는 말이 마치 조건부적인 거래처럼 들립니다.
즉 하나님이 약속대로 그리스도를 왕으로 보내시고 영원히 하나님 앞에 거하게 하신다면 내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고 서원을 이행하겠다는 조건을 거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즉 하나님이 약속대로 이루신 것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짐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 신실하시고 전지전능하신 분임을 믿은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하시면’이라는 말은 하나님은 반드시 그렇게 하실 분임을 믿는다는 믿음의 의미를 담고 있는 말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내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며 매일 나의 서원을 이행하겠습니다’라는 말은 압살롬이 패배하고 다윗이 다시 왕의 자리로 돌아온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반드시 그러게 이루실 것임을 믿음 안에서 바라보고 한 말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는 눈에 보이는 것과 손에 쥐어지는 것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자는 믿음 안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믿음 안에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미신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손에 쥐어진 것이 없고 몸으로 누리는 혜택이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 안에서 하나님이 이루어주실 영광된 날을 바라보기에 감사하고 찬송하게 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다윗의 서원은 영원히 주의 장막에 거하고 주의 날개 아래 피하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매일 서원을 이행하겠다는 것은 곧 매일 주의 장막에 거하고 주의 날개 아래 피하여 살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서원을 이행하겠다고 말하는 것도 자신의 실력으로 지키겠다는 뜻이 아니라,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이 자신 또한 주의 날개 아래 피하는 자로 살게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그것을 믿습니다’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러한 다윗의 서원이 오늘 우리의 서원이 되어야 합니다. ‘나를 생명으로 인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나의 장막으로 삼고 주의 피의 은혜 아래 피하겠습니다’가 오늘 우리의 서원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서원은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해 피 흘려 죽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붙들어서 매일 주의 은혜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주께 피하게 하실 것입니다. 신자는 그러한 하나님의 일로 인해서 영원토록 주를 찬송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시편 60:1-12 사람의 구원은 헛되다
<본문>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분노하셨사오나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 주께서 땅을 진동시키사 갈라지게 하셨사오니 그 틈을 기우소서 땅이 요동함이니이다 주께서 주의 백성에게 어려움을 보이시고 비척거리게 하는 포도주로 우리에게 마시우셨나이다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기를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나이다(셀라) 주의 사랑하시는 자를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응답하사 오른손으로 구원하소서 하나님이 그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시되 내가 뛰놀리라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척량하리라 길르앗이 내 것이요 므낫세도 내 것이며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보호자요 유다는 나의 홀이며 모압은 내 목욕통이라 에돔에는 내 신을 던지리라 블레셋아 나를 인하여 외치라 하셨도다 누가 나를 이끌어 견고한 성에 들이며 누가 나를 에돔에 인도할꼬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까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저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자심이로다 (시 60:1-12)
<설교>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개입하신다는 것은 ‘인생에 우연은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일하고 계시는 인생이기에 하나님과 상관없이 우연히 발생하는 사건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자신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다면 인생에 있어서 실패든 성공이든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솔직한 심정으로는 하나님이 내 인생에 개입하신다는 것에 대해 썩 반가운 마음이 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매이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뜻에 따라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다만 자기 인생에 걸림돌이 나타나고 힘든 일이 있을 때 오셔서 도와주시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없이 살아가는 인생의 마지막을 보지 않는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에 개입하셔서 나를 간섭하지 않을 때 내 인생은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간섭이 없이도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는 인생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 속에 강력한 힘으로 군림하고 있는 악한 세력은 우리를 장악하여 멸망으로 끌어갈 것이고, 우리는 그 세력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알고 하나님을 아는 신자라면 하나님이 자기 인생에 개입하셔서 철저히 간섭하시고 주장해 주시기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음을 알고 하나님의 능력에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그러한 신자로 굳게 세우기 위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하나님의 간섭 아래 있는 다윗이 전쟁에서의 실패를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인생에서 부딪히는 실패와 어려움들이 무의미하거나 단지 실망과 고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껏 알지 못했던 새로운 하나님을 알게 하고 만나게 하는 복된 기회들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1절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분노하셨사오나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을 보면, 다윗이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기록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분노하셨사오나’라고 호소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60편의 표제를 보면 ‘다윗이 아람 나하라임과 아람소바와 싸우는 중에 요압이 돌아와 에돔을 염곡에서 쳐서 일만 이천 인을 죽인 때에’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즉 다윗은 전쟁 중에 이 시를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전쟁에 대한 내용은 삼하 8장이나 대상 18장을 보면 알 수 있는데, 거기 보면 다윗이 전쟁에서 패했다거나 어려움을 겪었다는 내용은 없고 모두 승리한 기록만 있습니다.
하지만 60편을 보면 그 내용은 분명 전쟁에서 승리한 자의 노래가 아니라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기록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비록 성경에서는 언급을 하지 않지만 다윗이 전쟁에서 패했거나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9절의 “누가 나를 이끌어 견고한 성에 들이며 누가 나를 에돔에 인도할꼬” 라는 내용을 보면 당시 다윗에게는 에돔이 강한 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표제에 다윗이 아람 군대와 싸우고 있을 때 요압이 돌아와 에돔을 염곡에서 쳤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당시 다윗이 아람 군대와 전쟁을 하고 있을 때 그 틈을 타서 에돔이 이스라엘을 공격을 했고, 다윗은 군대 장관 요압을 보내서 에돔을 치도록 했는데 그 에돔이 강해서 이스라엘을 어려운 상황으로 몰고 갔고 결국 패배한 것이 아닌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윗은 하나님만이 구원자라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60편의 내용은 전쟁에서 승승장구하던 다윗이 쓴 맛을 한번 본 후에 지금까지의 승리는 모두 자신의 힘이 아니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음을 말해주는 내용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11절을 보면 다윗은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은 전쟁에서의 실패를 통해서 지금까지의 승리가 자신의 힘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용사가 되셔서 적군을 치신 결과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실패의 유익입니다.
세상은 실패가 없는 오직 성공만 있는 인생을 원합니다. 이것을 교회에서는 ‘만사형통’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실패하지 않고 성공하도록 도와주는 분으로 가르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실패도 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뜻과 의지와 상관없이 실패를 했을 때 자신의 배후에 누가 계시는가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루 세끼 밥을 먹으면서 배후에 누가 계시는지 생각하겠습니까? 세끼 밥 먹는 것이 무슨 대단한 것이라고 배후에 밥을 먹게 하시는 분이 계신다는 생각까지 하겠습니까? 하지만 병이 들거나 입을 다쳐서 먹고 싶어도 먹지 못하는 형편이 되었을 때, 그동안 세끼 밥 먹으며 살아왔던 것이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였음을 생각할 기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인생이 그와 같습니다. 우리의 삶 어느 하나에도 하나님이 개입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러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살 뿐입니다. 때문에 저마다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이만큼 이루었다는 자기 자랑에서 헤어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전쟁을 할 때마다 승리한다면 배후에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잊어버리고 승리하는 자신을 바라보기 십상입니다. 그런 다윗에게 실패의 경험은 귀한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승리의 힘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돌아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긴 실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진심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기를 소원한다면 나로 하여금 나의 힘을 바라보고 자랑하며 살아가는 어리석음에서 깨어나게 하는 실패를 나의 유익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실패와 고난까지도 하나님이 주신 유익이라는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4절을 보면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기를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나이다(셀라)”라고 말합니다. 기를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위하여 승리하게 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다윗은 하나님은 주를 경외하는 자를 승리하게 하셔서 약속을 이루실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이 약속을 근거로 해서 사람의 구원은 헛되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전쟁에서 어려움을 당하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만약 자신을 바라보았다면 에돔을 당할 수 없는 처지에 실망하면서 에돔을 물리쳐 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하실 것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시되 내가 뛰놀리라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척량하리라 길르앗이 내 것이요 므낫세도 내 것이며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보호자요 유다는 나의 홀이며 모압은 내 목욕통이라 에돔에는 내 신을 던지리라 블레셋아 나를 인하여 외치라 하셨도다”(6-8절)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현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비록 전쟁 중에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그것이 자신을 실패로 끌어가지 못함을 믿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강력하게 자신을 붙들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약속 안에서는 길르앗도 므낫세도 모두 자신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자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는 지금 자신에게 닥친 현실만을 바라보아서는 안됩니다. 영원한 승리자로 오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현실과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지금의 현실이 비록 어려움과 고통이라고 해도 그것이 결코 인생에 실패가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저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자심이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분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피 흘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단의 머리를 밟으시고 승리하셨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것은 곧 승리한 자로 사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고, 부활을 알고 부활을 바라보고 살아가기에 죽음이 두렵지가 않음으로 승리한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의 일로 절망할 이유가 없고, 어떤 형편에서도 자신을 실패한 자로 바라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평안할 때만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의 고통이 주어지고 우리의 생명이 죽음에 넘겨진다고 해도 하나님을 승리의 깃발로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확증하신 그 사랑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어떤 일에서도 그리스도를 승리의 깃발로 세울 수가 있을 것입니다.
세상의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십자가에서 확증되어진 사랑은 세상의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죽으신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흘리신 피가 죄밖에 없는 우리를 향해 흘러들어왔고, 그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며 그로 인해 의로운 자로 여김 받게 되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과 은혜를 받을 수 없는 우리가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받았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예수님이 우리의 승리의 깃발임을 확고하게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서의 어려움, 실패는 우리로 하여금 참된 승리가 누구로부터 나오는가를 보게 합니다. 그리고 그 승리자가 나의 배후에 계셨음을 보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신뢰하며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 곧 이기는 것임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
시편 59:1-17 하나님의 비웃음
<본문>
나의 하나님이여 내 원수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일어나 치려는 자에게서 나를 높이 드소서 사악을 행하는 자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피흘리기를 즐기는 자에게서 나를 구원하소서 저희가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엎드려 기다리고 강한 자가 모여 나를 치려 하오니 여호와여 이는 나의 범과를 인함이 아니요 나의 죄를 인함도 아니로소이다 내가 허물이 없으나 저희가 달려와서 스스로 준비하오니 주여 나를 도우시기 위하여 깨사 감찰하소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일어나 열방을 벌하소서 무릇 간사한 악인을 긍휼히 여기지 마소서(셀라) 저희가 저물게 돌아와서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고 그 입으로 악을 토하며 그 입술에는 칼이 있어 이르기를 누가 들으리요 하나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저희를 웃으시리니 모든 열방을 비웃으시리이다 하나님은 나의 산성이시니 저의 힘을 인하여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 나의 하나님이 그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 내 원수의 보응 받는 것을 나로 목도케 하시리이다 저희를 죽이지 마옵소서 나의 백성이 잊을까 하나이다 우리 방패되신 주여 주의 능력으로 저희를 흩으시고 낮추소서 저희 입술의 말은 곧 그 입의 죄라 저희의 저주와 거짓말을 인하여 저희로 그 교만한 중에서 사로잡히게 하소서 진노하심으로 소멸하시되 없기까지 소멸하사 하나님이 야곱 중에 다스리심을 땅끝까지 알게 하소서(셀라) 저희로 저물게 돌아와서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게 하소서 저희는 식물을 위하여 유리하다가 배부름을 얻지 못하면 밤을 새우려니와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산성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산성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시 59:1-17)
<설교>
신자가 성경을 펴게 되면 이 세상과는 다른 또 하나의 세상을 접하게 됩니다. 성경을 통해 접하게 되는 이 세상은 어떤 사람에게는 아주 낯설고 생소한 세상으로 다가오지만, 반면에 어떤 사람에게는 친숙한 세상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마치 한국에서만 살았던 사람이 생전 처음 외국을 가면 그곳은 낯설고 생소한 나라로 다가오지만 자주 외국을 왕래하였던 사람에게는 오래 살았던 곳처럼 친숙하게 다가오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께 낯설지 않은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돈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면서 돈이 곧 힘으로 군림하는 세상입니까? 아니면 성경을 통해 접하게 되는 또 하나의 세상입니까? 사실 사람이 태어나면서 접하는 세상은 돈으로 살고 돈이 곧 힘으로 군림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세상에 익숙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돈으로 사는 삶에 익숙해져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을 펴면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만나게 됩니다. 그 세상은 돈으로 모든 것이 평가되고 돈이 힘으로 군림하는 세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로 모든 것이 평가되고 판단됩니다. 따라서 성경의 세상에 익숙해진 신자라면 지금껏 살아왔던 기존의 세상이 낯설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 마음이 기존의 세상에 정착하지 못하는 나그네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항상 벗어나고 싶은 열망을 안고서 성경에서 만나는 새로운 세상을 열망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시편 59편에서 기존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59편의 내용을 보면서 여러분은 과연 돈이 없고 형편이 어려워서 낙심하는 이 세상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까? 아니면 자식이 공부를 잘해서 좋은 학교에 입학하기를 바라는 부모의 열망을 볼 수 있습니까? 그것도 아니면 안정되고 화목한 가정을 원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소원을 볼 수 있습니까? 우리는 59편의 다윗의 기도에서 그러한 것들은 전혀 볼 수가 없습니다. 즉 다윗은 전혀 다른 세계에서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다윗의 원수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원수를 하나님께 맡기며 원수로부터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즉 다윗은 원수가 있고 그 원수가 자신을 치려고 하고 해하려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원수가 없습니다. 물론 미워하는 대상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원수와 같은 자는 대개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평소에 성격이 좋아서 인간관계가 원만하고 남에게 원한 살만한 일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 본문의 내용은 말 그대로 생소한 세계로 다가올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개인적인 원수가 있는 사람에게 본문은 전혀 생소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처지에 딱 맞는 내용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다윗이 말하고 있는 원수에 대해 오해한 결과입니다. 다윗이 말하는 원수는 사사로운 개인적인 관계에서의 어떤 대상이 아닙니다.
59편의 표제를 보면 ‘사울이 사람을 보내어 다윗을 죽이려고 그 집을 지킨 때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59편의 배경은 삼상 19:11절의 “사울이 사자들을 다윗의 집에 보내어 그를 지키다가 아침에 그를 죽이게 하려 한지라”는 내용과 연관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울은 다윗이 수금을 탈 때 손에 쥐고 있던 단창을 던져서 다윗을 죽이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다윗은 도망을 칩니다. 그러자 사울은 부하를 다윗의 집에 보내어 지키다가 아침에 죽이라고 지시를 한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울은 다윗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원수입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죄를 범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공격으로 인해 위기에 처하자 전쟁에 나가 승리해서 이스라엘을 위기로부터 건져내는 공을 세웁니다. 이러한 다윗을 치하하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죽이려 하는 사울은 다윗의 입장에서는 원수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 한 사람을 지칭하여 원수라고 말하지를 않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다윗의 원수는 개인적인 입장에서 바라보는 사울이란 사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5절을 보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일어나 열방을 벌하소서 무릇 간사한 악인을 긍휼히 여기지 마소서(셀라)”라고 말합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열방을 벌해달라고 한 것을 보면 다윗의 원수는 한 개인이 아니라 열방, 즉 이 세상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 2:1-4절을 보면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고 말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 세상이 대적하는 것은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입니다. 즉 다윗을 대적하는 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기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윗을 대적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훼방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다윗이라는 한 인간을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기름 받은 약속의 사람을 훼방함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을 훼방하려는 것이 원수의 의도인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것에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약속을 훼방하는 악한 세상을 보게 된 것입니다.
삼상 19:9절의 “사울이 손에 단창을 가지고 그 집에 앉았을 때에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접하였으므로 다윗이 손으로 수금을 탈 때에”라는 내용을 보면 사울이 다윗을 죽이고자 한 것은 그가 악신에게 장악되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울이 악신이 들렸다고 해서 비몽사몽간에 아무 이유 없이 죽이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사울은 자신이 왕이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높임 받을 자는 오직 자기 자신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 자신보다 더 칭송을 받으면 그를 왕권을 위협하는 위험인물로 간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자신의 권력을 위협할 수 있는 경쟁자로 부각되는 사람은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방식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악신에게 장악된 실체입니다.
결국 악신의 속성은 타인이 자신보다 우월해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의 중심에 자신이 있어야 하고 자신이 높아지는 것을 선으로 간주할 뿐입니다. 가령 목사가 교회에서 자신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목사이기 때문에 높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바로 악신에게 장악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악한 속성에 의해서 부목사가 교인들에게 담임목사보다 더 인기가 있게 되면 담임목사는 위기감을 느끼면서 부목사를 제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접하는 세상이 바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그러한 세상과 매우 친숙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 자신 또한 악신에게 점령당한 채 무엇이 우리의 원수인지도 모른 채 예수님을 말하면서도 정작 예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다른 길을 가고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무엇이 우리가 살아가야 할 참된 세상인가를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중심에 여러분이 있기를 원하십니까? 사람들이 여러분 자신을 사랑해주고 인정해주기를 원하십니까? 이미 악한 세력에 장악되어 살아가는 세상은 그러한 욕망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지만 적어도 신자에게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져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곧 우리를 십자가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원수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처한 형편을 보십시오. 1절부터 3절까지를 보면 다윗의 주변은 온통 다윗을 치고 해하고 피 흘리고 죽이려는 자들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다윗의 잘못이나 죄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4절). 그러니 다윗으로서는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그러한 형편에서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산성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산성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16,17절)라며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고 있습니다. 형편이 전혀 나아진 것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다윗이 감사하고 찬송할 수 있는 근거는 8-10절에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저희를 웃으시리니 모든 열방을 비웃으시리이다 하나님은 나의 산성이시니 저의 힘을 인하여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 나의 하나님이 그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 내 원수의 보응 받는 것을 나로 목도케 하시리이다”
다윗은 원수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원수는 결국 하나님에 의해 패배하고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갈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바라보는 하나님의 약속 안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신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이래야 합니다.
사람들이 바라보는 세상은 돈만 있으면 살만하다고 하고, 힘을 갖기 위해 발버둥 치며 살아가지만 신자에게 이 세상은 아무리 돈이 있고 힘을 가졌다고 해도 결국 악한 세력에 장악된 채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럴 때 신자 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모든 허물을 용서하시고 용납하시고 더러운 자를 깨끗하다고 선언하신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의 세계로 부르신 크신 사랑으로 감사하고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처한 형편이 힘들고 어렵다고 해도 말입니다.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은총을 받았고, 세상에서 누릴 수 없는 귀한 은혜를 누리기에 이 은총과 은혜가 능력이 되고 힘이 되어서 기뻐할 수 없는 가운데 기뻐하게 되고, 감사할 수 없는 가운데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을 보지 않고 성경에서 만나는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고 사는 진정한 신자입니다.
이 세상은 싸움이 멈추지를 않습니다. 내가 높아지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밟아야 하는 곳입니다. 다른 사람이 잘하면 나도 지지 않기 위해 기를 써야 하는 피곤한 세상입니다. 이러한 피곤한 싸움에 끼어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식을 가지고 경쟁하는 그런 싸움에도 끼어들지 말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높아지는 것도 마지막의 자리에 서서 바라보면 모두 헛된 것에 불과합니다. 순간 만족을 느끼는 것이 전부일 뿐입니다.
세상을 향한 시선을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지키고 보호하는 거룩한 그 나라에 두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흘리신 귀한 피로 세워진 그 나라에 모든 마음이 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나라에서 예수님이 나의 전부가 되고,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죽는 것도 내게는 복입니다’는 감히 그런 고백을 할 수 있는 복된 신자가 되는 것에 여러분의 소원을 두지 않으시겠습니까?
시편 58:1-11 정직한 판단
<본문>
인자들아 너희가 당연히 공의를 말하겠거늘 어찌 잠잠하느뇨 너희가 정직히 판단하느뇨 오히려 너희가 중심에 악을 행하며 땅에서 너희 손의 강포를 달아주는도다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저희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저희는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곧 술사가 아무리 공교한 방술을 행할찌라도 그 소리를 듣지 아니하는 독사로다 하나님이여 저희 입에서 이를 꺾으소서 여호와여 젊은 사자의 어금니를 꺾어 내시며 저희로 급히 흐르는 물 같이 사라지게 하시며 겨누는 살이 꺾임 같게 하시며 소멸하여 가는 달팽이 같게 하시며 만기되지 못하여 출생한 자가 일광을 보지 못함 같게 하소서 가시나무 불이 가마를 더웁게 하기 전에 저가 생 것과 불붙는 것을 회리바람으로 제하여 버리시리로다 의인은 악인의 보복 당함을 보고 기뻐함이여 그 발을 악인의 피에 씻으리로다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판단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 (시 58:1-11)
<설교>
사람이 살면서 억울한 일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물론 순전히 자기 입장에 서서 억울하다는 항변을 하는 것도 많겠지만 자신이 저지른 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범인으로 몰리는 것도 있을 것이고, 자신의 말이나 행동을 오해해서 악한 사람으로 몰리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특히 연예인들이 근거 없는 소문에 휩싸일 때 억울한 심정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재판 사건을 보면 범인이 아닌 사람이 사형을 받고 나중에 무죄가 밝혀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그나마 고의가 아니라 사건 판단을 잘못한 실수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때로는 정치적인 이유로 자신의 훼방자를 법이라는 힘을 이용해서 처단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예수님도 바로 그렇게 죽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세상에 진실하고 정직한 판단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물론 ‘법정에서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진범을 가려내며 그에 따른 정확하고 정직한 판단을 하는 것은 있지 않는가?’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법정에서의 판단은 눈에 드러난 증거에 의해서만 할 뿐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눈에 드러난 것이 오히려 억울한 증거가 되어 죄인으로 판단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음을 생각해 본다면 이 세상에 진실하고 정직한 판단은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정답일 것입니다.
그래도 세상에는 진실하고 정직한 판단이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면, ‘과연 지금의 세상이 예수님에 대해 진실하고 정직한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현존하는 세상을 굳건히 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너뜨리기 위해 오셨습니다. 현존하는 세상은 결국 사라질 허상에 불과하며 오직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그 나라만이 영원하다는 것을 선포하기 오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지금의 세상이 환영하고 구세주로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세상은 누구든 세상의 체제를 무너뜨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제사장과 장로들, 그리고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고발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야 말로 이스라엘을 무너뜨리는 반역자로 여겼기 때문이 아닙니까? 예수님의 말씀 하나하나가 자신들이 붙들고 지탱해 왔던 체제를 무너뜨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제거함으로써 자신들의 체제를 지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모두가 자신을 지키고, 또한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살아갑니다. 그런데 복음은 세상이 지키고자 하고 붙들고자 하는 것을 잘라내는 방식으로 다가옵니다. 과연 이러한 복음에 대해, 또한 예수님에 대해 진실하고 정직하고 공의로운 판단을 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본문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자들아 너희가 당연히 공의를 말하겠거늘 어찌 잠잠하느뇨 너희가 정직히 판단하느뇨 오히려 너희가 중심에 악을 행하며 땅에서 너희 손의 강포를 달아주는도다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1-3절)
다윗은 하나님께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약속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다윗을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판단하지를 않습니다. 사울의 눈에는 다만 자신의 왕권을 위협하는 정적으로만 보일 뿐이었습니다. 이것은 사울만이 아닙니다. 이 기회를 틈 타 사울에게 다윗을 밀고하여 자신의 위치를 굳게 하려는 사람들 역시 다윗을 정직하게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을 밀고하고 해하고자 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다윗을 이스라엘의 반역자로 판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고하게 사울에게 쫓기고 있음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해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의를 따라 정직하게 판단하고 그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입장에서 자신의 이득을 위해 행동한 인간의 악하고 완악한 실체인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공의를 따라 정직하게 판단하고 그 판단에 따라 의롭게 행동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람이 정직하게 판단하고 의롭게 행동하려면 철저하게 자기 입장이라는 것은 버려야 합니다. 자기 자신은 완전히 버려진 채 오직 의만 그 가슴에 충만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인간이 아닙니다. 우리의 가슴은 의로 가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로 가득합니다. 공의보다는 세상에서의 이익에 더 이끌립니다. 정직한 판단보다는 내 입장에서 내게 유리한 판단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직 내 중심으로 말하고 행동을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완악함입니다.
다윗이 “저희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저희는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곧 술사가 아무리 공교한 방술을 행할찌라도 그 소리를 듣지 아니하는 독사로다”(4,5절)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은 뱀의 독과 같은 남을 죽이는 악한 것 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처럼, 우리도 우리의 악함과 탐욕을 책망하는 말씀에 대해 귀를 막은 채 오직 우리의 이익을 따라 타인의 아픔과 상처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고 내 성질대로만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과연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귀를 열어 놓고 살아간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왜 우리가 추구하고 원하고 소망하는 것이 달라지지 않고 여전히 세상의 것에 매여 살아가는 것입니까? 말씀에 대해 귀를 열어 놓고 있다면 말씀을 통해 전달되는 예수님의 소리를 들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목자의 음성을 양이 알고 따르는 것처럼 예수님의 소리를 듣고 순종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과연 우리의 현실이 그러하다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우리의 귀는 말씀보다는 세상을 향해 더 열려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일에 대해 민감하지 않습니까? 말씀 때문에 고민하고 걱정하고 탄식하는 것보다는 세상의 일 때문에 매일 고민하고 걱정하고 탄식하며 살아가지 않습니까? 이것이 마치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처럼, 그래서 술사가 아무리 공교한 방술을 행한다고 해도 그 소리를 듣지 않고 자신의 길로만 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이 이러한 길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길이 자신에게 유리할 것이라고 착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육신에 득이 되는 길을 찾기 때문에 정직과 공의가 인도하는 길은 회피하게 되고 대신 비록 거짓이라고 해도 득이 되는 길을 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 길을 절대로 인정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저희 입에서 이를 꺾으소서 여호와여 젊은 사자의 어금니를 꺾어 내시며 저희로 급히 흐르는 물 같이 사라지게 하시며 겨누는 살이 꺾임 같게 하시며 소멸하여 가는 달팽이 같게 하시며 만기되지 못하여 출생한 자가 일광을 보지 못함 같게 하소서 가시나무 불이 가마를 더웁게 하기 전에 저가 생 것과 불붙는 것을 회리바람으로 제하여 버리시리로다”(6-9절)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인간이 세운 모든 것을 무너뜨릴 것이고 결국 세상은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만 남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현재의 실상을 전부로 바라보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그 끝에서 세상을 바라보면서 판단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정직한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세상에 기반을 둔 자신의 내일을 바라보고 인생을 계획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자기 인생을 고난의 길을 가는 것으로 계획하겠습니까? 오직 세상에서의 번성과 성공을 기대하며 인생을 계획하고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말씀에 대해서는 귀를 막아 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세상에 기반을 두고자 하는 인간의 계획이 모두 헛됨을 선포하면서 하나님의 계획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10절을 보면 “의인은 악인의 보복 당함을 보고 기뻐함이여 그 발을 악인의 피에 씻으리로다”고 말합니다. 의인이 악인의 보복 당함을 보고 기뻐하는데, 이것은 단지 악인이 보복을 당하는 것이 기분 좋다는 의미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악인에 대해 보복하시고 결국 하나님의 계획대로 성취되는 하나님의 승리를 바라보면서 기뻐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발을 악인의 피에 씻는다는 것이 승리의 의미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승리에 함께 참여되는 신자의 기쁨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바라보는 신자의 시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에서 무엇을 보십니까? 열심히 일하고 노력해서 성공한 인생이 보입니까? 아니면 돈과 권력으로 큰소리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입니까? 그래서 여러분은 스스로 초라하다고 느끼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이야 말로 말씀에 대해 귀를 막은 채 여전히 인간의 완악함과 탐욕을 따라 사는 인생에 불과할 것입니다.
신자가 봐야 할 것은 공의와 진실과 정직으로 판단하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세상입니다. 하나님이 판단하실 때 악한 자는 결국 멸망으로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의인은 하나님의 승리에 참여하여 영원한 기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보이는 것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선한 일을 행했지만 세상은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진리의 말씀을 듣지를 못하고, 은혜를 입지 못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은 모든 선한 증거를 다 베풀었지만 그들이 귀머거리 독사처럼 귀를 막음으로써 소리를 듣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꾀한 악의 길로만 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자신의 기반을 굳건히 세우려고 하고, 이러한 세상에서 성공하고자 하는 것이야 말로 진리의 말씀에 따라 세상을 판단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세상은 진실하고 공의로우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판단하십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판단을 바라보고 살아갈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판단에 박수를 보내고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판단을 현실에서 찾고자 한다면 결국 실망만 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현실은 마치 판단하시는 하나님이 안 계신 것과 같은 모습으로 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항변처럼 여러분이 보는 현실은 악인이 의인을 핍박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믿음이 아무런 힘도 되지 못하는 것이 여러분이 체험하는 현실입니다. 또한 악인이 망하고 믿음으로 살았던 자신의 승리를 보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가 믿는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갚음이 있고 진심으로 땅에서는 하나님의 판단이 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여 보좌 우편에 계시고 예수님께 심판의 권세가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오심이라는 약속 안에서 신자는 악인의 보복 당함을 보면서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 그 끝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신자가 세상에서 세상으로부터 정직하고 온전한 판단을 받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세상은 진리를 알지 못하고 말씀에 귀를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낙심할 필요가 없는 것은 이 땅에 판단하시는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신자는 공의롭고 정직하게 판단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을 바라보고 구하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시편 57:1-11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
<본문>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이 재앙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내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저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찌라(셀라) 하나님이 그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 내 혼이 사자 중에 처하며 내가 불사르는 자 중에 누웠으니 곧 인생 중에라 저희 이는 창과 살이요 저희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저희가 내 걸음을 장애하려고 그물을 예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저희가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스스로 그 중에 빠졌도다(셀라)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찌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찌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열방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대저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시 57:1-11)
<설교>
2절을 보면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날 위해서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은 아마 교회를 다니는 신자라면 누구나 원하고 기대하는 하나님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날 위해 모든 것을 이루어주기만 하신다면 나의 인생은 말 그대로 ‘고생 끝 행복 시작’일 것이라고도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설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어주신다고 해도, 그것으로 인생이 행복해 질 수 있을까요?
혹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이루어주시겠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인생이 구하는 행복의 조건은 세 가지로 압축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돈과 자식과 건강입니다. 이 세 가지 문제만 원하는 대로 주어진다면 평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일 뿐입니다.
물론 이 세 가지로 인해서 순간순간 느끼는 행복감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 동안의 행복일 뿐 평생의 행복은 되지 않습니다. 참된 행복이 아니란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어제의 행복으로 오늘을 행복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령 아들이 반에서 1등을 했습니다. 그 소식을 듣는 순간 부모는 뛸 듯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으로 인해 무한한 행복감을 맛보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면서 그 행복감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새로운 기쁨이 주어져야 다시 행복감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 새로운 기쁨은 반 1등을 뛰어 넘어 전교 1등이 되어야 합니다.
돈 문제 건강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에 1억을 번다고 해도 잠시 지나면 1억 버는 것도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그리고 자연히 1억을 버는 것에서 느꼈던 기쁨과 행복감 역시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시면 행복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면 참으로 어리석다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 33장을 보면 모세는 이스라엘을 향해서 ‘너는 행복자로다’는 말을 합니다. 모세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어주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은 오랜 광야 생활로 인해 피곤하고 지친 상태였습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을 행복자라고 말하는 것은 이스라엘처럼 여호와의 구원을 얻은 백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구원을 얻었으니 너희는 행복자라는 것이 아니라 원망과 불평의 길로만 갔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함께 하시니 행복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 이런 행복을 구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세상과 똑같이 행복의 조건을 세상에 두고 세상의 것으로 행복하고자 하는 것입니까?
세상에 속하고 해 아래 있는 일 중에 싫증나지 않고 영원히 즐겁고 기쁜 일은 없습니다. 원하는 모든 것을 얻는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좋아하지 말기 바랍니다. 그런 하나님은 아예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상일 뿐입니다.
그러면 다윗은 어떤 의미로 하나님을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으로 말하고 있습니까? 57편은 다윗이 사울을 피해 굴에 숨었을 때 쓴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굴에 숨은 적이 두 번 있습니다. 첫 번째는 다윗이 블레셋에서 도망을 나와 아둘람 굴에 숨은 것이고, 또 한번은 엔게디 굴에 숨은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이 어느 굴에 숨었을 때 기록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굴에 숨어 있는 상황에서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굴에 숨어 있는 상황에서 다윗이 말한 ‘나를 위하여’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사울을 피해서 굴에 숨지 않아도 되도록 해달라는 것일까요?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는 것일까요? 여러분 같으면 여러분을 죽이려고 하는 대적의 손을 피해 도망을 치고 있는 상황에서 자식 문제, 돈 문제를 꺼내겠습니까? 결국 사람이 자식 문제 돈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을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세계를 살아가는 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똑같이 세상이라는 현실을 살아가는 자로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도록 일하실 것이고, 다윗을 위해서 행하시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한 일이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을 위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다윗은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다윗 개인을 도우시기 위해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의 성취를 위해 다윗을 위해 일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일하신다면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우리를 사랑해서 아들까지 내어 주신 하나님의 구속의 성취를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욕심을 정해 놓고 그 욕심을 이뤄주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다윗이 말하는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3절부터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3절을 보면 “저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찌라(셀라) 하나님이 그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위해 일하시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인자와 진리를 보내사 다윗을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에게는 모든 것이 되었던 것입니다. 인자와 진리로 인한 하나님의 구원이 다윗의 삶에서 일부를 차지한 것이 아니라 전부였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자와 진리로 구원하시는 하나님만으로도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고 찬송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십자가의 은혜를 말하면서도 그 은혜가 우리의 전부로 자리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속마음은 세상으로 가득하고, 내 자신으로 가득합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우리의 가슴에 아니라 머리에만 남겨 놓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것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것이 아닌 이것이 곧 우리의 악함인 것입니다.
7절부터 보면 다윗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하나님이 다윗을 사울의 손에서 건지셔서 모든 핍박과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윗은 굴에 숨어 있는 상황 그대로였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열방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대저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고 노래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렇게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어떤 형편에 있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감사하고 찬송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다윗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일을 두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이 자신의 일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사심으로써 십자가에 죽으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곧 예수님 자신의 일이었던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께 나온다는 것은 자신의 일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일만을 바라본다는 것을 뜻합니다. 비록 고통과 어려움의 처지에 있다고 해도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럴 때 자신의 처지와 형편으로 인해 낙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다고 해도 결국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의 형편, 조건과 상관없이 감사할 수 있고 찬송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구원에서 인자와 진리를 알았습니다. 다윗이 알게 된 인자와 진리는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세상에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인자와 진리를 알 수 있는 것이고,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영광된 것임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신자는 연약한 존재이지만 하나님은 자기 백성된 자를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할 것이고 구원에 이르도록 모든 역사를 진행시키십니다. 하나님이 신자를 지키시고 도우시는 것도 하나님의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이루십니다. 하지만 나의 욕망이 추구하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에 세우고자 하시는 하나님 백성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이루신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럴 때 신자는 자신이 당하는 고통과 어려움까지도 나를 위한 하나님의 일로 감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세워 놓으신 생명의 길만을 바라보면 됩니다. 나의 욕망이 추구하는 세상의 길은 결국 헛될 수밖에 없는 길임을 깨닫고 그리스도가 곧 나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믿음으로 주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 그리스도가 곧 나를 위한 모든 것이 되는 분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시편 56:1-13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본문>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사람이 나를 삼키려고 종일 치며 압제하나이다 나의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 하며 나를 교만히 치는 자 많사오니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찌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혈육 있는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저희가 종일 내 말을 곡해하며 내게 대한 저희 모든 사상은 사악이라 저희가 내 생명을 엿보던 것과 같이 또 모여 숨어 내 종적을 살피나이다 저희가 죄악을 짓고야 피하오리이까 하나님이여 분노하사 뭇 백성을 낮추소서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가 물러가리니 하나님이 나를 도우심인줄 아나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서원함이 있사온즉 내가 감사제를 주께 드리리니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지 않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시 56:1-13)
<설교>
56편은 다윗이 가드에서 블레셋인에게 잡혔을 때를 배경으로 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56편도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사람이 나를 삼키려고 종일 치며 압제하나이다 나의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 하며 나를 교만히 치는 자 많사오니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는 기도로 시작을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다윗과 같은 기도를 별로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처한 환경이나 형편이 다윗이 처한 그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사울에게 쫓기고 있는 형편이고, 어딜 가도 다윗을 돕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사울에게 밀고하여 득을 보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블레셋으로 몸을 피하고자 했지만 그나마 블레셋 왕의 신하들이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사람인 것을 알아봄으로 인해서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블레셋 왕 앞에서 입에 침을 흘리면서 미친척하여 겨우 살아났습니다. 이처럼 다윗은 몹시 어렵고 힘든 상황에 처해있었지만 지금의 우리에게는 다윗과 같은 불안과 위기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에게는 친구가 많습니다. 친구와 어울려 먹고 마시고 즐길 수 있는 환경이고, 가족과도 함께 즐겁게 살아가고 있는데 다윗과 같은 심정으로 다윗과 같은 기도를 할 리가 있겠습니까?
물론 자식이 말썽을 피운다거나, 일이 잘 안된다거나, 몸이 아프다는 등의 여러 문제들이 있을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문제들이 자기 영혼을 위한 절대자를 필요로 하는 소원으로 나아가도록 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껏해야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다윗의 고난과 핍박이 오늘 우리와 상관이 없는 것처럼 여긴다면 그것은 고난과 핍박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위기를 알아채지 못하기 때문일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처한 처지와 환경이 다윗과 다를 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먹고 사는 문제에만 치중하여 살아감으로써 신자로서의 위기를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일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시 다윗이 겪은 위협과 핍박은 환경적인 문제로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에게는 다윗의 후손이라는 메시야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윗을 죽이고자 한다는 것은 곧 다윗의 후손으로 메시야를 보내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훼방하는 것입니다. 메시야가 오심을 방해함으로써 세상을 장악하고자 하는 세력의 방해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여러분은 이러한 방해를 받지 않고 살아가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앞서 말한 대로 철저하게 먹고 사는 문제에 치중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왕의 초청을 받았으나 소를 산 문제, 밭을 산 문제, 결혼 문제를 내세워서 거절한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위기를 깨닫지를 못하고 “나의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 하며 나를 교만히 치는 자 많사오니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2,3)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가 물러가리니 하나님이 나를 도우심인줄 아나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 말씀을 찬송하리이다”(9,10)는 기도를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위기 상황은 사업이 나빠지는 것도 아니고, 세계의 경제 상황이 나빠지는 것도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찾고자 하는 악한 세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위기 상황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 단지 자신의 복지 문제에만 치중합니다. 목사 역시 사람들의 이러한 눈높이에 맞춰서 설교라는 것을 합니다. 그러니 다윗과 같은 기도는 사라지고 자신의 복지 향상을 위한 기도로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로 하여금 다윗과 같은 기도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 악한 세력의 활동 이유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신자에게 진심으로 필요한 기도는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찌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혈육 있는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4절)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가 물러가리니 하나님이 나를 도우심인줄 아나이다”(9절)과 같은 기도이고 하나님을 향한 이런 절박한 마음이 있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식 문제, 먹고 사는 문제로 인 한 절박한 심정도 부인할 수 없지만 그것보다 자식문제 먹고 사는 문제로 인해서 원수의 문제, 원수를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 기댈 수밖에 없는 절박함은 잊어버리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말한 대로 다윗에게는 원수가 있고, 그 원수를 하나님께 맡기며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다윗은 하나님께 감사제를 드리며 하나님을 찬송을 하게 됩니다. 13절에서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지 않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라고 기도하는 것처럼 원수로부터 자신을 건지시고, 자신을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지 않게 도우시고 붙드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러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습니다. 다윗처럼 원수로 인해 핍박을 받고 죽음의 위기를 겪는 상황이 없고 따라서 다윗처럼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없기 때문에 자신을 죽음의 위기에서 건지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로인한 감사와 찬송이 없는 것 또한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의지하십니까? 의지하신다면 무슨 문제로 인해 하나님을 의지하십니까? 또한 얼마큼의 절박한 심정으로 의지하십니까?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으시면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오직 길이 하나님에게만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아 나오시는 것입니까? 또한 지금 여러분으로 하여금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게 하는 현실은 과연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러한 물음을 통해서 과연 지금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에 마음을 두고 사는가를 점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자로서 봐야 할 것은 보지 못한 채 하나님으로 인하여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 채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신자에게 하나님을 향한 절박함이 없다면 그것은 환경이 좋아서가 아니라 자기 문제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에 대한 깊은 좌절을 맛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자신의 참된 현실로 다가오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문제도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마 26:41절을 보면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은 인간은 육신을 이길 수 없는 존재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 육신을 이기고 스스로 자신의 모든 것을 통제하고 다스리면서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행하고 살아갈 수만 있다면 기도할 이유가 없습니다. 즉 하나님을 의지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원수가 등장을 해도 스스로 싸워서 이기면 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누구도 육신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향한 절박한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자신의 육신조차 다스리지 못하고 결국 육신에게 져서 육신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자신을 보면서 깊은 좌절감이 들지 않습니까?
사단이 신자에게 던지는 유혹은 자기 육신에 가능성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착하게 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에 관심을 갖게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관심은 결국 착하게 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만들어 냄으로써 자신의 의를 남겨 놓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로 하여금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세계에 동참하지 못하도록 훼방하는 사단의 유혹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에 서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둘러보면 절대로 평온한 곳으로 보일 수가 없습니다. 다윗이 어디를 가든 원수가 존재하여 다윗을 위기에 빠뜨렸던 것처럼, 신자가 존재하는 이 세상은 신자로 하여금 십자가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하고자 하는 악한 세력의 훼방이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훼방은 우리가 극복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자연히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께 원수를 맡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다윗처럼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지 않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13절)는 감사의 기쁨과 찬송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매일의 삶에서 주의 능력이 자신을 붙들어 사망에서 건지심을 믿기 때문에, 또한 자신을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항상 실족지 않도록 도우시고 지키심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송하며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어떠한 고난에서도 주님을 향한 그 소망이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주의 능력에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 현실에서 신자는 악한 세력의 훼방을 경험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 훼방에서 신자가 할 수 있는 것은 다윗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사람이 내게 어찌 할 수 없는 능력의 세계에 신자가 속해있음을 알 것이고 그것이 곧 평안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시편 55:1-23 요동치 않음
<본문>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 내게 굽히사 응답하소서 내가 근심으로 편치 못하여 탄식하오니 이는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의 연고라 저희가 죄악으로 내게 더하며 노하여 나를 핍박하나이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이 내게 미쳤도다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황공함이 나를 덮었도다 나의 말이 내가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으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거하리로다(셀라) 내가 피난처에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리라 하였도다 내가 성내에서 강포와 분쟁을 보았사오니 주여 저희를 멸하소서 저희 혀를 나누소서 저희가 주야로 성벽 위에 두루 다니니 성중에는 죄악과 잔해함이 있으며 악독이 그 중에 있고 압박과 궤사가 그 거리를 떠나지 않도다 나를 책망한 자가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찐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가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찐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그가 곧 너로다 나의 동류, 나의 동무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우리가 같이 재미롭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하여 하나님의 집안에서 다녔도다 사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임하여 산채로 음부에 내려갈찌어다 이는 악독이 저희 거처에 있고 저희 가운데 있음이로다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나를 대적하는 자 많더니 나를 치는 전쟁에서 저가 내 생명을 구속하사 평안하게 하셨도다 태고부터 계신 하나님이 들으시고(셀라) 변치 아니하며 하나님을 경외치 아니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리로다 저는 손을 들어 자기와 화목한 자를 치고 그 언약을 배반하였도다 그 입은 우유 기름보다 미끄러워도 그 마음은 전쟁이요 그 말은 기름보다 유하여도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저희로 파멸의 웅덩이에 빠지게 하시리이다 피를 흘리게 하며 속이는 자들은 저희 날의 반도 살지 못할 것이나 나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시 55:1-23)
<설교>
2절에서 다윗이 “내게 굽히사 응답하소서 내가 근심으로 편치 못하여 탄식하오니”라고 기도하는 것을 보면 55편은 다윗이 큰 근심거리로 인해 마음이 편치 못할 때 지은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3절에서 “이는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의 연고라 저희가 죄악으로 내게 더하며 노하여 나를 핍박하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다윗을 근심과 편치 못한 마음으로 몰아간 것은 원수와 악인의 핍박이 그 원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원수와 악인의 핍박으로 인한 다윗의 고통이 어떠한지는 4,5절에서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이 내게 미쳤도다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황공함이 나를 덮었도다”고 말하는 내용을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이러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평안한 안식을 얻고 싶어서 “나의 말이 내가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으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거하리로다(셀라) 내가 피난처에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리라 하였도다”는 말까지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원수들의 소리를 듣고 강포와 분쟁을 보고 있는 것보다 차라리 비둘기처럼 날개가 있다면 광야로 날아가서 아무도 없는 곳에서 편히 쉽고 싶다는 심정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다윗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단지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원수 때문이 아니라 그 원수가 다윗에게 아주 가까운 친구였다는 것입니다.
12,13절을 보면 “나를 책망한 자가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찐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가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찐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그가 곧 너로다 나의 동류, 나의 동무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을 죽이려고 한 원수는 다윗의 가장 가까운 친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가장 가까운 친우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그에게 죽임을 당할 위기를 겪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사람에게는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고 마음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다윗의 이러한 일을 짐작하게 할 수 있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삼하 15장에 등장하는 다윗의 모사 아히도벨의 배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이 다윗을 반역했을 때 다윗을 배신하고 압살롬의 편이 된 사람입니다. 모사는 항상 왕과 함께 하며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에게는 가장 가까운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친구로 표현을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아히도벨이 다윗을 배신하고, 배신으로도 모자라 압살롬에게 다윗의 후궁과 동침하라고 부추기기도 하고(삼하 16:21), 자신에게 군사를 내어주면 가서 다윗을 죽이겠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17:1). 이처럼 가장 가까운 사람이 자신을 배신하고 오히려 죽이려고 하는데 그 마음이 어떠할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히도벨이 다윗을 배신한 것은,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키고 백성들의 마음도 압살롬에게로 향하자 자신의 앞날을 위해 행동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압살롬의 마음에 들고 신뢰를 얻기 위해 다윗의 후궁과 동침하여 압살롬이 다윗을 이겼고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이라는 것을 보여주라는 악한 조언을 하기도 하고, 군사를 주면 자신이 직접 다윗을 죽이겠다는 말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윗과 같은 일을 겪으면 우리의 심정이 어떠할까요? 전혀 모른 사람에 의해서 핍박을 받는 것보다 가장 가까운 친구가 나를 배신하고 죽이려고 한다면 그 심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일 것이고, 하나님 앞에 억울하다는 하소연을 하면서 자신을 배신한 자를 보복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아히도벨처럼 친한 친구를 배신하지 않는 사람들입니까? 21절에서 “그 입은 우유 기름보다 미끄러워도 그 마음은 전쟁이요 그 말은 기름보다 유하여도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다윗의 친구는 겉으로는 우유기름처럼 미끄러운 말로 다윗에게 가까운 친구인척 하지만 그 마음에는 다윗을 죽이고자 하는 칼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그 마음을 다윗을 향하지를 않았고, 오직 자신을 위해 권세를 따라가는 세상의 속성에 머물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와 예수님과의 관계를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여러분은 스스로 예수님과의 관계가 가깝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비록 깊은 신앙으로 살지는 못하지만 예수님을 버릴 마음은 추호도 없고, 더군다나 예수님을 대적하는 원수로 살 마음도 전혀 없다고 자신 있게 고백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들도 과연 그럴까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온갖 말로 그 이름을 높이고 마치 예수님이 아니면 살 수 없는 것처럼 하면서도 세상에서 우리가 선택하는 길은 무엇입니까? 사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말씀하는 예수님에 대해 실망하고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아버린 가룟유다와 다르고, 예수님 편에 서면 목숨이 위태로울 것 같은 상황이 주어지자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한 베드로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즉 우리 역시 스스로 가장 가까운 분이라고 자처하는 예수님을 배신하고 예수님이 아닌 세상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 같은 자는 죽어 마땅하다’는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의 실체를 파헤쳐놓고 보면 우리는 주님의 이름 앞에 살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대적이며 원수가 아닙니까? 제발 ‘나는 예수님 편이다’는 생각은 버리십시오. 우리는 예수님 편에 서지 않습니다. 우리가 항상 선택하고 바라보는 것은, ‘무엇이 나에게 유리한 길인가?’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따라가는 것은 세상이 가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속성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길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우리 자신에게는 그런 힘이 없습니다. 세상을 향한 탐욕과 유혹을 이길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인간의 이러한 실체를 알지 못하고 교회 출석만 잘하고 교회에서 하라고 하는 일에 열심히 참석하면 믿음이 좋고, 예수만 믿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세상이 가는 길에 있으면서도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악함을 보지 못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사람들은 힘든 일이 주어지면 억울함을 호소하게 됩니다. ‘하나님 그동안 열심히 믿었는데 왜 이런 일이 있는 것입니까?’라고 말입니다. 이들이 그동안 자신이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니었음을 모릅니다. 때문에 자신이 처한 어려운 환경이 부당하게 다가오게 되고, 억울한 일로 여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니었고, 다만 예수님의 능력이 자신을 붙들고 있었을 뿐임을 안다면 어떤 형편에서도 억울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죽게 하신다고 해도 나같은 자에게는 당연한 것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입니다.
신앙은 내가 예수님을 붙드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이것을 착각합니다. 자신이 힘을 다해서 예수님을 붙들고 놓지 않는 것을 신앙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은 내가 예수님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어느 한순간도 나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붙들고 계셨음을 아는 것입니다.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이 예수님이 내게 이루신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럴 때 억울함과 부당함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있다면 예수님이 아닌 세상만 의지하는 악함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아는 신자는 모든 짐을 여호와께 맡길 수가 있습니다.
22절을 보면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고 말합니다. 다윗의 이 고백은 18,19절의 “나를 대적하는 자 많더니 나를 치는 전쟁에서 저가 내 생명을 구속하사 평안하게 하셨도다 태고부터 계신 하나님이 들으시고(셀라) 변치 아니하며 하나님을 경외치 아니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리로다”는 신앙을 바탕으로 한 고백입니다. 자신을 치는 전쟁에서 대적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하나님이 다윗 자신의 생명을 구속하셔서 평안하게 하실 것임을 믿은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붙드심을 알 수 있는 것은, 세상의 형통에서가 아니라 나같은 자를 버리지 않으시고 생명에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에서입니다. 심판을 받아 영원한 멸망에 처하게 되는 것이 나에게 주어져야 할 마땅한 보응인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알게 하시고, 내 마음이 십자가를 향하게 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에서 하나님이 구속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앞서 말한 대로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나의 힘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알게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살게 하였음을 알기에 모든 짐은 여호와께 맡겨 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우리를 예수님이 가신 길로 인도하심으로 그 길을 훼방하는 대적이 있다고 해도 두려움보다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주께 붙들려 있음을 아는 신자는 요동함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전에 택함 받은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신자는 죄로부터 벗어나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말하면서도 예수님을 대적하는 원수의 속성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우리들에 대해 하나님은 징계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택한 하나님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하늘의 생명으로 인도하고야 말겠다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에 의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만을 신뢰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원수 되고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들을 주셨고, 그리고 하늘의 영원한 영광과 평안을 선물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원수인 우리의 죄를 위해 자기 몸을 대속물로 내어 놓으셨고, 우리의 모든 죄를 덮으시고 의롭다 하기 위해서 부활하셔서 하늘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짐을 여호와께 맡기고 요동하지 말아야 할 존재인 것입니다.
시편 54:1-7 주의 이름을 위하여
<본문>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판단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 외인이 일어나 나를 치며 강포한 자가 내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셀라) 하나님은 나의 돕는 자시라 주께서 내 생명을 붙드는 자와 함께 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저희를 멸하소서 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 대저 주께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나로 목도케 하셨나이다 (시편 54:1-7)
<설교>
54편은 다윗이 사울을 피해 십 광야로 도망하여 숨었을 때, 십 사람이 사울에게 다윗을 밀고한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52편의 내용도 도엑이 다윗을 밀고했을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생각해 보면, 다윗은 어딜 가도 그를 해하고자 하는 대적으로 가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이처럼 힘든 인생을 살게 된 것은 하나님이 다윗의 인생에 개입하신 결과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자신을 왕으로 삼아달라고 원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다윗을 왕으로 택하시고 기름 부어 세우십니다. 그리고 다윗으로 하여금 블레셋의 장수인 골리앗을 죽이도록 도우십니다. 그로 인해 다윗은 사울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결국 사울을 피해 쫓겨 다니는 인생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만 피하면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울에게 다윗을 밀고하여 자신의 이익을 꾀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윗의 대적으로 등장을 한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해 보면 다윗의 대적, 원수는 결국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세상의 사고방식 자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울은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는 백성들의 외침을 참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이름보다 다윗의 이름이 더 높아지고 칭송을 받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을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이름을 지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윗을 밀고한 도엑 역시 다를 바 없습니다. 다윗을 밀고함으로써 왕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울의 힘에 기대어서 자신의 이름을 높여 보고자 한 것이 그의 속셈이었던 것입니다. 십 사람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다윗은 십 사람들과 원수진 일이 없습니다.
오히려 수 15:24절을 보면 ‘십’은 유다지파에게 분배된 기업인데 그렇다면 십 사람들은 다윗과 같은 유다 지파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다윗을 숨겨 주어야 할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사울에게 다윗을 밀고했다는 것은, 결국 비록 같은 지파 사람이라고 해도 다윗보다는 사울을 택하는 것이 더 이익이라는 계산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것이 곧 세상의 속성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자기 이름을 지키고 높이고자 하는 욕망에 의해서 죽음의 위협을 받은 다윗은 1절에서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판단하소서”라는 기도를 합니다. 다윗의 이 기도는 생각해 보면 이상한 기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의 구원을 위해 기도한다면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 하시고’라고 해도 될 것인데 왜 주의 이름으로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일까요? 또한 “주의 힘으로 나를 판단하소서”라는 기도는 주의 이름이 곧 주의 힘이라는 뜻이 됩니다. 다윗은 어떤 의미에서 주의 이름을 주의 힘으로 여기고 있을까요? 이것이 1절의 내용에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부분입니다.
앞에서 말씀 드리기를 도엑이나 십 사람들이 다윗을 밀고한 그 배경에는 자기 이름을 높이고자 하는 인간의 속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자기 이름을 높이기 위해 사울이라는 권력에 기대는 것입니다.
창 11:4절을 보면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라고 말합니다. 즉 바벨 탑 사건은 인간이 자기 이름을 온 세상에 내기 위해 힘을 모으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 일을 용납하지 않으시고 언어를 혼잡하게 하심으로써 사람들을 흩어 버리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이 자기들의 이름을 높이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신 것은, 세상에서 높임 받아야 할 이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자신을 이름으로 나타내고 알리셨습니다. 때로는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때로는 여호와로 자신을 알리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은 창 1장을 보면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심으로 경배를 받으시는 하나님, 즉 엘로힘으로 권세 있는 분으로 나타내셨고, 2장에서는 생명의 하나님으로, 언약의 하나님으로 나타내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이름을 위해서 일하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생각해 본다면,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라는 말은 ‘나에게 생명의 하나님으로 함께 하시고 언약을 이루심으로 그 이름을 높이시는 하나님이 곧 나에게 구원이 되십니다’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주의 힘으로 나를 판단하소서”라는 말은 이름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이 자신의 판단자가 되기를 원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택하시고 왕으로 세우신 것은, 다윗의 이름을 높여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윗을 세워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자기 이름을 위해 다윗을 대적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도전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다윗은 자기 이름을 위해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세상에 나타내시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이 곧 자신의 구원자요 판단자가 되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3절을 보면 “외인이 일어나 나를 치며 강포한 자가 내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외인이 일어나 다윗을 치고, 강포한 자가 다윗의 생명을 찾고자 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자기 앞에 하나님을 두지 않고 살아감으로 인해서 다윗을 죽이려는 마음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자기 앞에 하나님을 두고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그 말씀을 실천하며 사는 것일까요? 그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생각하면서 자신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를 잊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그 말씀을 실천하려고 힘을 쓰며 산다고 해도 신자의 존재성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면 결국 자신의 행함으로 자신의 이름을 높이는 방향으로 가기 십상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한다’는 말은 하면서도 그 일로서 자신의 이름이 높아지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의 존재성, 즉 ‘나는 나의 이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자신의 이름이 높아지기를 기대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이름에 대적하는 것임을 깨닫지 않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자기 앞에 주지 아니하였다’는 말을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십 사람들은 자신들이 유다지파이며 다윗이 하나님이 택한 사람이고 다윗 또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유다 지파임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다만 다윗을 밀고해서 사울에게 신임을 받고 그로 인해 자신들의 이름을 높이는 것에 있었을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않는 것이고, 강포한 자의 모습이기도 한 것입니다.
다윗의 이러한 고난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겪으신 고난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자신의 이름을 위해 사신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사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을 세상을 배척했고 대적을 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들의 이름을 위해서였습니다.
바리새인과 제사장, 장로, 서기관 이런 인물들은 유대인 사회에서는 명망을 받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즉 그 이름이 높임 받는 위치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 인해 그 이름이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이름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붙잡아 죽인 것입니다. 마치 사울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자기 이름을 위해 살아가는 세상의 속성이었던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주의 이름을 위해 부름 받았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이 높아지기 위해 주의 이름을 부릅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주의 이름을 멸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 9:15-16절을 보면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처럼 주께서 사울을 택하여 바울 되게 하신 것은 주의 이름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주의 이름을 위한 그릇으로 택함을 받은 것입니다. 바울의 이름을 높여주겠다고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신자는 이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신자가 택함 받고 부름 받은 이유 또한 바울을 택하시고 부르신 이유와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이름을 높이는 것에 모든 관심을 두고 산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우리 앞에 두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 하나님은 “주께서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저희를 멸하소서”(5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심판으로 갚으실 것입니다.
신자가 믿을 것은 세상의 마지막 때 결국 주의 이름만이 가장 존귀한 이름으로 세상을 향해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세상이 온통 자기 이름을 위해 살아가고, 인간들이 서로 이름을 두고 경쟁하면서 주의 이름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고 멸시하지만, 하나님이 때가 되면 주의 이름만이 가장 영광스럽고 존귀하다는 것이 완벽히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도 6절에서 “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낙헌제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감사하여 자발적이고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를 말합니다. 즉 다윗은 주의 이름이 선하시다는 것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이 선하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선하다는 것이 아니라 7절의 “대저 주께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나로 목도케 하셨나이다”를 두고 한 말입니다. 모든 환난에서 다윗을 건지시고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목도하게 하신 하나님의 일이 선하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다윗의 시편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승리의 약속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일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에는 그 이름만이 가장 영광스런 이름으로 세상에 굳게 세워질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비록 고난에 있다 할지라도 선하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주의 이름이 힘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어떤 고난에서도 주의 이름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권세 있는 백성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시편 53:1-6 어리석은 자
<본문>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죄악을 행하는 자는 무지하뇨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저희가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너를 대하여 진 친 저희의 뼈를 하나님이 흩으심이라 하나님이 저희를 버리신고로 네가 저희로 수치를 당케 하였도다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고 하나님이 그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시편 53:1-6)
<설교>
53편을 읽어 보면 14편의 내용과 거의 같습니다. 14편의 5,6절과 53편의 5절의 내용이 조금 다를 뿐 나머지는 거의 같은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14편과 53편이 같은 내용이니까 같은 의미로 해석해야 할까요? 그렇다면 53편이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같은 내용이고 같은 의미라면 14편이나 53편 둘 중에 하나는 삭제해도 무방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같은 내용이니까 같은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면 복음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복음서에도 중복된 동일한 내용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동일한 내용이기 때문에 동일한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면 복음서 역시 따로 분류할 것이 아니라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 더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면 14편과 53편은 각각 어떤 시각으로 보아야 하는 것일까요? 14편과 53편을 보면 같은 내용 속에 다른 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이름입니다. 14편에서는 ‘여호와’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반면에 53편에서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이름에 담아서 나타내십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나타나시면서 여호와로서의 일을 하시는 분임을 나타내시고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시면 하나님으로서의 일을 하시는 분으로 나타나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여호와라는 이름의 의미가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은 창세기의 천지창조의 내용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의 기사를 보면 모두 하나님으로만 등장합니다. 그런데 2장을 보면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일을 다시 반복해서 언급을 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으로 등장을 합니다.
이것은 1장에서의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며 주관하시는 분임을 나타내는 이름으로 등장을 하는 것이고, 2장에서 여호와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이 범죄하고 그로 인해 죽음에 처하게 되며 그러한 인간에게 언약하시고 그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나타내기 위해 여호와라는 이름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란 이름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며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고, 여호와는 범죄하여 사망에 처한 인간에게 언약하시고 그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이름인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와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14편의 내용과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53편의 내용은 각기 다른 의미로 해석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14:2,3절에서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는 말씀에서 여호와가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핀다는 것은 과연 누가 여호와가 언약하시고 그 언약을 이루심으로 자기 백성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을 찾는지를 살피신다는 뜻입니다. 언약을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할 사람은 자신의 의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자신을 살린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그처럼 자신의 의를 의지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 것이 세상의 형편이라는 것입니다.
더러운 자가 되었다는 것도 여호와의 언약을 의지하고 언약을 성취하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를 바라보고 높이면서 살아가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53:2,3절에서도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천지를 창조하시고 만물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이 인생을 살폈을 때 하나님을 찾지 않는 자란 어떤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창조주가 아니라 자기 힘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시고 세상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신다면 인생이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고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하나님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연약한 인생임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온통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힘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53편의 하나님이라는 이름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세상의 형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선은 창조주이신 하나님 앞에 항복한 자로 나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일 뿐 자신의 힘으로 이룬 것은 있을 수 없음을 마음 깊이 자각하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높이고 감사하는 것이 선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러한 선한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형편입니다.
이것을 두고 1절에서는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라고 말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마음으로 하나님이 없다고 여기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부패하고 가증한 악을 행하며 살아갈 뿐 선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라고 하는 것을 불신자들의 악으로만 여기면 그것은 큰 착각입니다. ‘나는 신자다’는 자기 함정과 자기 착각에 빠져 있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착각과 함정에 항상 주의를 해야 합니다. 교회를 다니고, 성경을 공부하고 성경을 알며, 교회 일에 봉사하는 자신을 볼 때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인간의 본질을 생각하지 못하고 ‘나는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라는 생각과 함께 자신은 ‘하나님이 없다’고 일컫는 어리석은 사람과는 다르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자신은 하나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믿고 있는 신자라는 착각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나는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는다’라고 고백하고 다짐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어리석은 사람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입술로 고백하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있는 믿음을 나타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다면 분명 그 삶은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살아계셔서 세상을 주관하시고 다스리고 계심을 믿는다면, 또한 자신을 세상에 존재하게 하시고 인도하고 계심을 믿는다면 신자는 세상을 자신의 욕심과 뜻과 계획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또한 현재의 형편이 자신의 욕망에 차지 않는다고 해서 불평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가지고 인도하신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항상 불평과 불만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 이 어리석음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패하고 가증한 악을 행하는 자란 곧 우리 자신을 향한 선언이기도 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의 주라고 하면서도 사실은 내가 나의 주가 되어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나의 뜻을 더 높이려고 하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기보다는 나의 뜻과 계획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2,3절도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누가 하나님을 찾는지 살피시는데 아무도 찾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찾지 않을까요? 하나님이 없어도 아쉬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세상의 것을 힘으로 삼고 있음을 뜻합니다.
쉽게 말해서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는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일용할 양식 정도는 자신의 힘으로도 얼마든지 마련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할 수 있는 것조차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혜임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서 살아가는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이처럼 세상이 하나님의 은혜 아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결국 세상의 형편은 떡먹듯이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하고 착취하면서도 하나님을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4절).
이처럼 은혜가 아닌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 안에 사는 신자는 두려워 할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워 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약자가 되는 것입니다. 타인에게 무시 받고 조롱 받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들을 버리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에 있는 우리에게 진심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더욱 기도하여 세상의 힘을 얻는 것입니까? 세상에 우뚝 설 수 있는 복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그는 버림 받을 자리에 머물고 있는 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6절을 보면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고 하나님이 그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흩으시고 버리신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것이 저와 여러분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고,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세상의 힘을 구하고 있으며, 부패하고 가증한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실상에서 진심으로 구할 것이 무엇이어야 합니까? 여전히 자식의 성공이고 돈이어야 합니까? 자식이 성공하고 돈을 벌어봐야 결국 하나님이 흩으시고 버리실 인생임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바라보고 구할 것은 부패한 나를 구원하실 구원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버림 받아도 할 말이 없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에게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복과 은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크신 복과 은혜를 알고자 한다면 부패하고 악을 행하는 우리의 실상을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왜 십자가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는가를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선을 행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높이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처럼 선을 행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을 행하는 사람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서 그러한 선이 보여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편 52:1-9 강포한 자
<본문>
강포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네 혀가 심한 악을 꾀하여 날카로운 삭도 같이 간사를 행하는도다 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하는도다(셀라) 간사한 혀여 네가 잡아 먹는 모든 말을 좋아하는도다 그런즉 하나님이 영영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취하여 네 장막에서 뽑아내며 생존하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셀라) 의인이 보고 두려워하며 또 저를 비웃어 말하기를 이 사람은 하나님으로 자기 힘을 삼지 아니하고 오직 그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제 악으로 스스로 든든케 하던 자라 하리로다 오직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영히 의지하리로다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영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함으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의지하리이다 (시편 52:1-9)
<설교>
이 시편은 표제에 있는 것처럼 도엑이라는 사람이 사울에게 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의 집에 왔다고 밀고 했을 때 지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도엑이 다윗을 사울에게 밀고한 목적은 사울의 신임을 받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권력자인 사울에게 잘 보이면 뭔가 자신에게 이득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행동인 것입니다.
이러한 도엑을 향해 다윗은 ‘강포한 자’(1절)라고 말합니다. 도엑이 어떻게 강포한가 하는 것은 2-4절의 “네 혀가 심한 악을 꾀하여 날카로운 삭도같이 간사를 행하는도다 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하는도다(셀라) 간사한 혀여 네가 잡아먹는 모든 말을 좋아하는도다”는 구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즉 다윗을 밀고한 도엑의 혀는 자신의 이득을 위해 다른 사람을 찌르는 날카로운 칼과 같았고, 선보다 악을 사랑하였으며, 의를 말하기보다는 거짓을 말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잡아먹는 말을 좋아했으며 이것이 도엑의 강포였습니다.
그런데 도엑의 이러한 강포는 사실 낯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세상에서 처신하며 살아가는 것이 도엑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도엑이 다윗을 밀고하여 권력자인 사울에게 잘보이고 싶어 하는 그 악한 생각이 오늘 우리가 수시로 드러내며 살아가는 생각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다윗이 말한 강포한 자로부터 우리도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다윗은 “강포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1절)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항상 있다는 것은 영원하다는 뜻입니다. 즉 신자에게는 영원한 하나님의 인자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의지하고 자랑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인자하심입니다.
하지만 도엑은 하나님의 인자하심보다는 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바라보고 믿는 것보다는 힘을 가진 자를 자기편으로 만드는 일에 힘을 쓸 뿐입니다. 이처럼 힘을 얻기 위해서 사울에게 쫓기고 있던 다윗을 밀고한 것이야 말로 혀로써 타인을 죽이는 강포였던 것입니다.
7절을 보면 “이 사람은 하나님으로 자기 힘을 삼지 아니하고 오직 그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제 악으로 스스로 든든케 하던 자라 하리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힘으로 삼지 않고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여 그것으로 자신을 든든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 도엑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힘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세상에서 힘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이 힘이라는 말은 하지만 그것은 단지 막연한 기대감에 불과할 뿐, 막상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의지하고 또한 자신을 든든하게 하는 수단으로 삼는 것은 바로 재물이 아닙니까? 세상을 힘 있는 자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보다 재물이 풍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에게 풍부한 재물을 안겨주는 분으로만 여기는 것입니다.
교회를 보십시오. 현대 교회가 과연 무엇을 힘으로 삼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일까요 돈일까요?
현대 교회는 교회들마다 하고 싶은 것이 아주 많습니다. 예배당도 자신의 이름을 알릴만큼 크게 짓고 싶어 하고, 주차장도 있어야 하고 교육관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시설도 갖추기를 원하고, 교회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서 사회사업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에 돈이 빠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일이라는 명목을 내세우며 헌금을 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교회가 좋은 시설을 갖추면 안된다는 것도 아니고 주차장 교육관도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중요한 본질을 잊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이 좋은 시설에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목사가 그러한 것에 매달리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중심에는 자기 자존심과 위상이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목회성공과 능력을 자랑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이 도엑의 악한 계획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항상 함께 하고 있음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도엑은 사울에게 다윗을 밀고하여 사울의 신임을 받고 자신의 위치를 굳건히 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여전히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지할 뿐입니다. 사울에게 쫓기면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힘 있는 자를 찾아서 도움을 받으려고 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인자를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가 함께 하기에 도엑의 악한 계획대로 되지 않을 것을 믿는 것입니다.
5절을 보면 “그런즉 하나님이 영영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취하여 네 장막에서 뽑아내며 생존하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셀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처럼 하나님은 도엑 같은 자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처럼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믿는 신자를 굳게 세우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생명에 있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지 재물이 아닌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인자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처지에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항상 함께 하심을 믿을 수만 있다면 그의 신앙생활은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에게는 재물의 풍요로움이 부러움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재물의 풍요를 의지하심으로 도엑처럼 하나님이 영영히 멸하실 자로 살아가는 것을 안타까워할 뿐입니다.
세상의 힘을 의지하고 재물의 풍요로 자신을 든든하게 하고자 하는 자의 결말은 멸망입니다. 하나님이 결코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멸하시고 무엇을 용납하시는가를 분명히 깨닫고 하나님이 용납하시는 길을 삶의 방향으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8절을 보면 “오직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영히 의지하리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다윗이 도엑처럼 세상의 것으로 자신을 든든하게 하려는 생각으로 살았다면 사울에게 쫓기면서 밀고를 당하고 죽음의 위기를 겪어야 하는 자신의 신세가 처량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지 한탄도 나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신을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는 생각만 해도 행복과 평화가 넘치고 풍성한 열매가 가득한 것을 연상하게 됩니다. 즉 다윗이 겪고 있는 처지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인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진심으로 자신을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로 여겼습니다. 그처럼 다윗은 주어진 상황과 형편을 초월하여 하나님으로 인한 든든함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있는 감람나무는 하나님이 심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심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책임지고 기르실 것이고 뽑히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집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함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하나님이 심으신 나무로서 하나님이 기르시기 때문에 영원히 시들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거하는 신자가 누리는 복이며 풍성입니다. 신자는 이것을 자신의 든든함으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9절을 보면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영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함으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의지하리이다”고 말합니다.
신자가 주께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주가 행하신 일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좋은 것을 주셨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은 참된 감사가 아닙니다. 이러한 감사는 뭔가 받았다고 여겨지는 것이 있을 때만 유효할 뿐, 받은 것이 없다고 여겨질 때는 감사 대신에 불만만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주의 행하심을 두고 영영히 주께 감사한다는 말을 합니다. 다윗이 말하는 주의 행하심은 자기의 악한 계획을 자랑하면서 재물의 풍요를 의지하는 강포한 자를 영영히 멸하시는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집에 심으신 푸른 감람나무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의지하는 자로 만드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행하심으로 인해서 멸망의 자식의 멸망의 길로 가게 되는 것이고, 의의 자녀는 의의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행하심이 신자에게는 찬송이 되어야 하고 감사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하나님의 행하심이 신자를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51:1-19 상한 심령
<본문>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성을 쌓으소서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 (시편 51:1-19)
<설교>
교회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기도 가운데 ‘일주일 동안 지은 죄를 용서해 주시고’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 맹목적이고 습관적인 기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생각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면서 일주일 동안 지은 죄를 용서해 달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은 채 세상일에 파묻혀 살다가 신자랍시고 예배당에 나와서 일주일 분량의 죄를 한꺼번에 해결해 보려는 속셈입니다. 이것은 자기 죄에 대한 애통과 예수님의 용서에 대한 감사가 없이 다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용서를 위한 도구로만 이용하려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현대 교회는 회개와 용서를 가볍게 생각하고 쉽게 말합니다. ‘죄를 범해도 회개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다’라고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시편 51편에 등장하는 다윗의 회개를 보면 회개는 그렇게 쉽게 생각할 문제는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51편은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인 밧세바와 동침하고 자신의 죄가 드러날 것이 두려워서 남편인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게 한 후 나단 선지자로부터 책망을 받았을 때 기록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다윗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합니다. 그것은 4절의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는 내용입니다.
다윗은 남의 아내를 범하고 그 남편을 죽였습니다. 다윗으로 인해서 평온하던 가정이 파괴가 된 것입니다. 또한 다윗의 죄로 인해서 밧세바가 나은 다윗의 자식까지 죽었습니다. 이처럼 다윗의 죄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이 많은 다윗은 그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주께만 범죄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치 ‘내가 비록 죄를 범하긴 했지만 사람과는 아무 상관없고 하나님께만 용서를 구하면 될 문제다’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떳떳하다는 것으로 들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이 ‘주께만 범죄했다’고 하는 것은,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전혀 미안하지도 않다거나 사람에게 용서를 구할 문제도 아니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다윗의 이 말은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삼하 12장을 보면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찾아온 것은 밧세바가 다윗과 동침하고 아이를 낳은 후입니다. 따라서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하고 우리아를 죽인 후 일 년 가까이 되도록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됩니다.
물론 다윗도 양심의 가책을 받기는 했을 것입니다. 즉 죄의식을 가질 수는 있는 것입니다. 또한 다윗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 자신의 죄에 대해 용서를 구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겨우 ‘하나님 제가 간음을 했습니다. 죄 없는 우리아를 죽였습니다’는 수준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나단 선지자를 만난 후에 깨달은 죄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나단이 다윗을 책망하는 삼하 12:7-9절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왕을 삼기 위하여 네게 기름을 붓고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처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
나단의 책망을 보면 단지 우리아를 죽이고 그 처를 빼앗은 악행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부족함이 없이 주셨는데 남의 처를 빼앗고 그 처를 자신의 것으로 삼기 위해 우리아를 죽인 것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의 죄는 하나님이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이 주셨는데 그것이 자신에게 족하다는 것을 모르고 타인의 것을 빼앗아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사람에게 범한 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범한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께만 범한 이 죄는 사람과 상대하여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자신에게 개입하셔야만 해결할 수 있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다윗의 죄를 간음죄와 살인죄로만 본다면 그것은 우리가 윤리와 도덕의 틀에 갇혀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의 죄에 대해서 아무리 듣고 또 들어도 떳떳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다윗처럼 간음하지도 않았고 살인을 저지르지도 않았다’는 생각이 자신을 떳떳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에게 한 나단 선지자의 책망이 여러분에게 주어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도 떳떳할 수 있습니까? 과연 우리가 지금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하나님이 내게 부족함이 없이 주신 것으로 여기고 모든 것에 만족하면서 살아간다고 말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분명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항상 더 채우고 싶은 열망으로 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또한 다윗과 다를 바 없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다윗이 3절에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라고 말하는 것도 죄가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에 가능한 고백입니다.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다는 것은 자신이 죄에서 떠난 적이 없음을 뜻합니다. 이것은 죄를 행위의 문제로 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죄를 행위의 문제로만 본다면 악한 행동이 있을 때만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즉 악한 행동이 있을 때는 죄인이지만, 반대로 선한 행동이 있을 때는 의인으로 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대개의 사람들이 이런 시각으로 죄를 바라보지 않습니까? 십일조 하지 않고, 성경 보지 않고, 기도 하지 않고, 전도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회개라는 것을 하지만, 반대로 십일조를 잘하고 열심히 성경 보면서 기도도 하고 전도도 하고 있다면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하기는커녕 하나님께 복 받을 자로 여기는 것입니다. 즉 회개를 해야 할 이유를 찾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범죄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윗이 말한 ‘주께만 범죄했다’는 말의 의미를 깨닫는다면, 우리 역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한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5절)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 중에 잉태하였다는 것은 죄 덩어리로 세상에 났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질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볼 때 도덕적으로 선한 행동을 한다고 해도 죄악 중에 출생하였다는 본질은 벗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성경 구절에 근거해서 억지로 죄인이라는 고백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범죄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면 죄인이라는 고백, 죄악 중에 출생하였다는 고백은 자연스러운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죄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면 결국 자신의 죄를 가지고 주만 찾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죄가 해결될 수 있는 길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고, 자신의 선행으로도 안되고 오직 주께만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아 나와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1,2절)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신을 용서 해달라는 요청의 말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를 믿는 믿음으로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 안에서 이미 완성된 것이 죄악의 용서라는 것을 다윗이 바라보고 고백하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다윗이 뻔뻔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남의 처를 빼앗고 사람을 죽였으면 ‘하나님 나 같은 죄인은 죽어 마땅하고 지옥가야 합니다.’ 이렇게 나와야 자신의 죄를 깨달은 자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전혀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9절)라고 말하고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11절)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보면 자기 구원에만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자기 구원에만 매달려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의 무거움을 보면서 그와 같은 모든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높이고 노래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12,13절에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는 말을 합니다. 구원의 즐거움이란 구원을 받은 것으로 인한 즐거움이 아니라 나 같은 자도 구원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즐거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모든 범죄자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주의 도도 역시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주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이 w주의 도가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성취되어 서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우리를 말씀 앞에 서게 하시면서 죄를 보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죄인 됨을 철저히 자각함으로써 주의 십자가로만 이루어지는 구원을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피의 공로로만 이루어지는 구원을 노래하고 높이도록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를 용서를 받고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바라본다면 그것은 주님의 은혜가 아니라 자기 구원에 매인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14절에서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고 말하는 다윗의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그런 죄를 범하고서도 하나님을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정말 얼굴에 철판을 깐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가능한 것이 신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이 곧 주의 의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다윗을 세워서 주의 의를 높이고 노래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백은 오직 상한 심령으로부터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17절)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상한 심령은 주의 의만 의지하는 심령을 의미합니다. 그 무엇에도 기대를 걸지 않고 주님의 의에만 모든 기대를 거는 그 심령이야 말로 상한 심령이고, 하나님이 그러한 심령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10절에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정한 마음, 정직한 영이 있을 때 자신의 죄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죄인임에도 불구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의 의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평생토록 신자가 자랑하고 높이고 찬송할 것은 오직 주님의 의밖에 없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상한 심령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주의 보혈의 공로만 높이도록 하기 위해 상한 심령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의 공로만을 높이는 그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신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