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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장 종교적 요구
종교적 요구는 자기에 대한 요구며 자기의 생명에 대한 요구다
우리의 '자기'가 그 상대적이며 유한有限함을 자각하는 동시에 절대 무한한 힘에 합일되고
이것에 의해서 영원한 참생명을 얻으려고 원하는 요구다.
바울이 '이미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내 안에 살아계신다'고 말한 것처럼 육체적 생명의 전부를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오직 신에 의해서 살려고 하는 감정이다.
진정한 종교는 자기의 변환과 생명의 혁신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를 걸머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는 나에게 마땅한 자가 아니다'고 말한 것처럼
여전히 어딘가 한 구석 자기를 믿는 마음이 있는 동안은 아직 참된 종교심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현세의 이익을 위해서 신에게 기도하는 것 따위는 말할 것도 없고,
헛되이 왕생을 목적으로 염불하는 것도 참된 종교심이 아니다.
그러므로 탄이초에도 '내 마음에 왕생의 업을 열심히 비는 염불도 자행自行으로써 할지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기독교에 있어서도 오로지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고, 하느님의 징벌을 두려워하는 것은 참된 기독교가 아니다.
이런 것은 모두 이기심의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나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종교는 자기의 평안을 위한 것이라고 하는 것마저도 잘못된 생각이
아닌가 한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진취적인 활동의 기상을 멸각하고 욕심없고 근심없는 소극적인 생활을 함으로서 종교의
참뜻을 깨달았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우리는 자기의 평안을 위해서 종교를 찾는 것이 아니다.
평안은 종교에서 오는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종교적 요구는 우리가 그칠래야 그칠 수 없는 커다란 생명의 요구며 엄숙한 의지의 요구다.
종교는 인간의 목적 그 자체며, 결코 다른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주의설의 심리학자가 말하듯이 의지는 정신의 근본적 작용이며, 모든 정신현상이 의지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면
우리의 정신은 욕구의 체계다
이 체계의 중심이 되는 가장 유력한 욕구가 우리의 '자기'라는 것이 된다.
그래서 이 중심으로부터 모든 것을 통일해나가는 일, 즉 자기를 유지 발전시키는 일이 우리의 정신적 생명이다.
이 통일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우리는 살아 잇는 것이지만 만일 이 통일이 무너졌을 때에는 설령 육체적으로 살아 있다고
하더라도 정신에 있어서는 죽은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우리는 개인적 욕구를 중심으로해서 모든 것을 통일할 수 있을까.
즉 개인적 생명을 어디까지나 유지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일까
세계는 개인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또 개인적 욕구가 인생 최대의 욕구도 아니다.
개인적 생명은 반드시 밖으로는 세계와 충돌하고 안으로는 스스로 모순에 빠지게 마련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더욱더 커다란 생명을 구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다.
의식 중심의 추이에 의해서 보다 큰 통일을 구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요구는 모두 우리의 공동적 정신이 발생하는 경우에서도 이것을 찾아 볼 수 있지만,
다만 종교적 요구는 이러한 요구의 극점이다.
우리는 객관적 세계에 대해서 주관적 자기를 내세워 이것에 의해서 전자를 통일하려고 하는 동안에는,
그 주관적 자기는 아무리 큰 것이라 할지라도 그 통일은 아직은 상대적임을 면치 못한다.
절대적 통일은 다만 전연 주관적 통일을 버리고 객관적 통일에 일치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원래 의식의 통일이란 의식성립의 요건이며 그 근본적 요구다
통일이 없는 의식은 무나 마찬가지다.
의식은 내용의 대립에 의해서 성립될 수 있으며, 그 내용이 다양하면 할수록 한편으로는 큰 통일을 요구하게 된다.
이 통일이 끝나는 데가 우리의 이른바 객관적 실재라는 것이며, 이 통일은 주관과 객관의 합일에 이르러 그 정점에 도달한다.
객관적 실재라는 것도 주관적 의식을 떠나서 별도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의식통일의 결과,
의심할래야 할 수 없고 구할래야 이상 더 구할 길 없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의식통일의 정점, 즉 주객합일의 상태라는 것은 비단 의식의 근본적 요구일 뿐 아니라,
또한 실로 의식 본래의 상태다
콘쟉이 말한 바와 같이 우리가 처음으로 빛을 보았을 때에는 이것을 본다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보는 자기가 빛 그 자체다
모두 최초의 감각은 갓난 아기에게 있어서는 곧 우주 그 자체라야만 한다.
이 경지에서는 아직 주관과 객관의 분리는 없고, 물아일체는 단지 하나의 사실이 있을 따름이다.
나와 사물이 하나이기 때문에 달리 진리를 구할 것이 없으며 욕망을 채울 것이 없고,
사람과 신이 함께 있어 에덴의 동산이란 이런 것을 말한 것이리라.
그런데 의식이 분화 발전함에 따라서 주관과 객관이 대립되고, 나와 사물이 서로 등을 돌리며, 인생은 여기에서 요구가 있고
고뇌가 있으며, 사람은 신으로부터 떠나 낙원은 영원히 아담의 자손으로부터 폐쇄되는 것이다.
그러나 의식은 아무리 분화발전한다 하더라도 도저히 주객합일의 통일에서 떨어져 나올 수 는 없다.
우리는 지식이나 의지에 있어서 시종 이 통일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의식의 분화발전은 통일의 다른 면이며 역시 의식성립의 요건이다.
의식이 분화 발전하는 것은 오히려 한층 더 큰 통일을 요구하는 것이다.
통일은 실로 의식의 알파요 오메가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종교적 요구는 이런 의미에 있어서의 의식통일의 요구이며 아울러 우주와의 합일의 요구다
이렇게 해서 종교적 요구는 사람의 가장 깊고 큰 요구다
우리는 다양한 육체적 요구나 정신적 요구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다 자기의 일부의 요구에 지나지 않으며, 오직 종교는 자기 그 자체의 해결이다.
우리는 지식이나 의지에 있어서 의식의 통일을 구하고 주관과 객관의 합일을 구한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도 반면의 통일에 지나지 않는다.
종교는 이러한 통일의 배후에 있어서의 가장 깊은 통일을 요구하는 것이다.
즉 지식과 의지가 나누어지기 이전의 통일을 찾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요구는 종교적 요구로부터 분화된 것으로서 그 발전의 결과 이것에 귀착하는 것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인지가 아직 발달되지 못한 때에는 사람들은 오히려 종교적이며 학문과 도덕의 극치는 또한 종교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되게 된다.
세상에는 때때로 무엇 때문에 종교가 필요한가 하고 묻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런 물음은 무엇 때문에 살 필요가 있느냐고 묻는 것과 마찬가지다.
종교는 자기의 생명을 떠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그 요구는 생명 그 자체의 요구다.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자기의 삶이 진지하지 못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진지하게 생각하고 진실하게 살려고 원하는 자라면, 반드시 열렬한 종교적 요구를 느끼지 않고서는 배겨날 수 없는 것이다.
제 2 장 종교의 본질
종교란 신과 인간과의 관계다, 신에 대해선 여러 가지 견해가 있겠지만 이것을 우주의 근본으로 보는 것이 가장 적당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인간이란 우리의 개인적 의식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양자의 관계는 생각하기에 따라서 여러가지 종교가 정해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관계가 참된 종교적 관계일까
만일 신과 나와는 그 바탕에 있어서는 본질을 달리하고 신은 단지 인간 이상의 위대한 힘과 같은 것이라면, 우리는 이것을 향하여 추호도 종교적 동기를 찾아낼 수가 없다.
혹은 이것을 두려워해서 그 명령에 따르기도 할 것이고 혹은 이것에 아첨하여 복리를 구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이기심으로부터 나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본질을 달리하는 것과의 상호관계는 이기심 이외에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스미스(신학자, 동양학자)도 ''종교는 알 수 없는 힘을 두려워하는 데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자기와 혈족관계에 있는 신을
경애하는데서 일어나는 것이다. 또한 종교는 개인의 초자연력에 대한 수의적隨意的인 관계가 아니라, 한사회의 구성원 각자가 그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는 힘에 대한 공동적 관계'' 라고 말하고 있다.
모든 종교의 근본에는 신인동성神人同性의 관계가 있어야 한다, 즉 부자의 관계가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단지 신과 인간이 이해를 같이하고 신은 우리를 돕고 보호한다고 해서 아직 참된 종교는 아니다.
신은 우주의 근본인 동시에 우리의 근본이라야 한다.
우리가 신으로 돌아가는 것은 곧 그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또한 신은 만물의 목적이며, 또한 인간의 목적이라야만 한다.
인간은 각각 신에게서 자기의 참된 목적을 발견하는 것이다.
손발이 사람의 것이듯이 사람은 신의 것이다.
우리가 신에게 돌아가는 것은 한편으로 보면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 같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자기를 얻는 연유다.
그리스도가 '' 그 생명을 얻는 자는 이를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해서 생명을 잃는 자는 이를 얻으리라''고 말한 것이 종교의 가장 순수한 상태다.
참된 종교에 있어서 신과 인간의 관계는 반드시 이런 것이라야 한다
우리가 신에게 기도하고 또는 감사하는 것도 자기의 존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본분의 고향인 신에게 돌아가기를 기도하고 또 여기에 돌아왔음을 감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도 이 세상의 행복을 갖다주는 것이 아니라, 이것으로 하여 자기에게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신은 생명의 원천이며 나는 오직 신에 의해서 산다.
이렇게 되어야만 종교는 생명이 충만되고, 참으로 경건한 마음이 우러나오는 것이다.
다만 체념한다거나 맡긴다는 것은 아직도 자기의 냄새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으며, 아직 참된 경건한 마음이라고 할 수는 없다.
신에게서 참자기를 발견한다는 말은 어쩌면 자기에게 무게를 두는 것처럼 생각될 지 모르지만,
이것은 오히려 참된 자기를 버리고 신을 섬기는 소이이다.
신과 인간은 그 성을 같이하고, 인간은 신에게 있어서는 그 근본으로 돌아가게 한다는 것은 모든 종교의 근본적 사상이며,
이 사상에 의거함으로써 비로소 참된 종교라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와같이 하나의 사상 위에 있어서도 역시 신과 인간의 관계를 여러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신은 우주 밖으로 초월한 것이어서 밖에서 세계를 지배하고 인간에 대해서도 밖으로부터 작용하는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고,
또는 신은 내재적이며, 인간은 신의 일부이고 신은 안으로부터 인간에게 작용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전자는 이른바 유신론의 사고이며, 후자는 이른바 범신론의 견해이다.
후자처럼 생각할 때는 합리적일지 모르지만 많은 종교가들은 이것에 반대하고 있다.
왜냐하면 신과 자연을 동일시한다는 것은 신의 인격성을 없애는 것이 되며, 또 만유를 신의 변형처럼 간주한다는 것은 신의 초월성을 상실하여 그 존엄을 해칠 뿐만 아니라, 악의 근원도 신에게 귀착시키지 않으면 안되는 부당함도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범신론적 사상에 반드시 이러한 결점이 있다고 할 수 없으며, 유신론에 반드시 이러한 결점이 없다고 할 수도 없다.
신과 실재의 본체를 동일시하는 것도 실재의 근본이 정신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신의 인격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어떠한 범신론일지라도 개개의 만물 그대로가 곧 신이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스피노자의 철학에 있어서도 만물은 신의 차별상이다. 또한 유신론에 있어서도 신의 전지전능과 이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악'의 존재는 쉽사리 조화될 수는 없다.
이것을 실로 중세철학에 있어서도 여러 사람들의 머리를 괴롭힌 문제였던 것이다.
초월적인 신이 있어 밖에서 세계를 지배한다는 생각은 비단 우리의 이성과 충돌할 뿐더러 이런 종교는 가장 심오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신의 뜻으로서 알아야 하는 것은 자연의 이법 理法이 있을 뿐이다.
이 밖에 신의 계시라고 해야 할 것은 없다.
물론 신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므로 우리가 아는 바는 그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밖에 하늘의 계시같은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것을 알 도리가 없을 것이다.
만일 이것에 반하는 하늘의 계시가 있다면, 이것을 오히려 신의 모순을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는 것은 그 일생이 가장 깊은 인생의 진리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이란, 천지가 이것에 의해서 자리하고 만물이 이것에 의해서 자라게 되는 우주의 내면적 통일력이라야 한다.
이밖에 신이라고 해야 할 것은 없다.
만일 신이 인격적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실재의 근본에 있어서 곧 인격적인 의의를 인정한다는 뜻이라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서 따로 초자연적인 것을 운운하는 것은 역사적 전설에 의하지 않는다면 자기 자신의 주관적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이 자연의 근저에 있어서 그리고 자기의 근저에 있어서 곧 신을 봄으로써 신에게서 무한한 따사로움을 느끼며,
우리는 신의 품속에서 산다는 종교의 진수에 도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신에 대한 참된 경애의 마음은 오직 이속에서 나올 수 있다.
사랑이란 두 인격이 합쳐서 하나가 됨을 말하는 것이며, 공경이란 부분적 인격이 전인격에 대해서 일으키는 감정이다.
경애의 근본에는 반드시 인격의 통일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경애하는 마음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날 뿐만 아니라 자기의 의식속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의 어제와 오늘이 서로 달라지는 의식이 동일한 의식의 중심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자경자애自敬自愛하는 마음으로써 충만되는 것과 같이, 우리가 신을 존경하고 신을 사랑하는 것은 신과 동일한 근저를 갖기 때문이라야만 한다.
우리의 정신이 신의 부분적 의식이기 때문이라야만 한다.
물론 신과 인간은 동일한 정신의 근저를 지니고 있는 것도 동일한 사상을 지닌 두 사람의 정신이 서로 독립되어 있듯이 그렇게 독립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육체적으로 인간을 보고 시간과 공간적으로 정신을 구별한 것이다.
정신에 있어서는 동일한 근저를 갖는 것은 동일한 정신이다.
우리는 나날이 변하는 의식이 동일한 통일을 갖기 때문에 동일한 정신이라고 보여지는 것처럼, 우리의 정신은 신과 동일체라야만 한다.
이리하여 우리는 신에 의해서 살고 있다는 것도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사실일 수 있다. [웨스트콧트라는 목사도 요한전 제 17장 21절의 주석에 '' 믿는 자의 일치란 단지 목적과 감정 등의 도의상의 합일 (moral unity)이 아니라 생명의 합일 (vital unity)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가장 심오한 종교는 신인동체위에 성립될 수 있으며, 종교의 참뜻은 이 신인 합일의 의의를 획득하는 데 있다.
즉 우리는 의식의 근저에 있어서 자기의 의식을 깨고 작용하는 당당한 우주적 정신을 실험하는 데 있는 것이다.
신념이란 것은 전설이나 이론에 의해서 밖에서 주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부터 다듬어져 나와야 하는 것이다.
야곱베메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가장 깊은 내생에 의하여 신에 도달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내면적 재생에 있어서 곧바로 신을 보고 이것을 믿는 동시에 여기서 자기의 참생명을 발견하고 무한한 힘을 느끼는 것이다.
신념이란 단순한 지식이 아니다. 그것은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의 직관인 동시에 활력이다.
우리의 모든 정신활동의 근저에는 하나의 통일력이 작용하고 있다.
이것을 우리는 '자기'라고 하고 인격이라고 하는 것이다. 욕구와 같은 것은 말할 나위도 없으며 지식과 같은 가장 객관적인 것도 이 통일력, 즉 각자가 인격의 색체를 띠고 있지 않는 것은 없다.
지식이나 욕망도 모두가 이힘에 의하여 성립된다.
신념이란 이처럼 지식을 초월한 통일력이다
지식이나 의지에 의하여 신념이 지탱된다는 것보다는 오히려 신념에 의해서 지식이나 의지가 지탱되는 것이다.
신념은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신비적이다.
신념이 신비적이라고 하는 것은 지식에 반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지식과 충돌하는 것 같은 신념이라면 이것을 생명의 근본으로 삼을 수는 없다.
우리는 지를 다하고 의지를 다한 연후에 믿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신념을 안에서 얻게 되는 것이다.
제 3 장 신
신이란 이 우주의 근본을 말하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나는 신을 우주 밖에 초월하는 조물주라고는 보지 않고,
곧 이 실재의 근저라고 생각한다.
신과 우주와의 관계는 예술가와 그 작품과 같은 관계가 아니라 본체와 현상과의 관계다
우주는 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 신의 표현 (manifestations)이다
밖으로는 일월성신의 운행으로부터 안으로는 인심人心의 기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신의 표현이 아닌 것이 없다.
우리는 이런 사물의 근저에 있어서 하나하나 신의 영광을 우러러볼 수 있는 것이다.
뉴턴과 케플러가 천체운행의 정연함을 보고 경건한 마음에 사로잡혔던 것처럼 우리는 자연의 현상을 연구하면 할수록 그 배후에는 하나의 통일력이 지배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학문의 진보란 이러한 지식의 통일을 말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밖으로는 자연의 근저에서 하나의 통일력의 지배를 인정하듯이, 안으로는 인심의 근저에 있어서도 하나의 통일력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인심은 천태만상으로 거의 정법定法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을 달관할 때에는 고금을 통하고 동서에 걸쳐서 위대한 통일력이 지배하고 있는 것 같다.
한 걸음 나아가서 생각해 볼 때, 자연과 정신은 전혀 교섭이 없는 것이 아니다.
피차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리는 이 양자의 통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이 양자의 근저에는 보다 큰 유일한 통일력이 있어야 한다.
철학이나 과학도 모두 이 통일을 인정치 않는 것은 없다.
그래서 이 통일력이 곧 신이다.
물론 유물론자나 일반 과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물체가 유일한 실재며 만물은 단지 물력의 법칙에 따르는 것이라면 신과 같은 것을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재의 진상은 과연 그런 것일까
내가 앞에서 실재에 대하여 논한 바와 같이 물체란 것도 우리의 의식현상을 떠나서 따로 독립된 실재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직접경험의 사실은 단지 이 의식현상이 있을 따름이다.
공간이나 시간이나 물력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이 사실을 통일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설정한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물리학자가 말하는 것은 같은 모두 우리 개인의 성性을 제거한 순물질과 같은 것은 가장 구체적인 사실에서 멀어지는 추상적 개념이다.
구체적 사실에 가까워질수록 개인적이 된다.
가장 구체적인 사실은 가장 개인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원시적 설명은 신화에서와 같이 모두 의인적이었지만, 순지식이 발달됨에 따라서 점점 일반적이 되고 추상적이 되어
마침내 순물질과 같은 개념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지극히 외면적이며 천박함과 동시에 이러한 설명의 배후에도 우리의 주관적 통일이란 것이 잠재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가장 근본적인 설명은 반드시 자기에게로 돌아온다.
우주를 설명하는 비밀의 열쇠는 자기에게 있는 것이다.
물체에 의해서 정신을 설명하려는 것은 그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뉴턴이나 케플러가 관찰을 통해 자연현상이 정연하다고 한 것도 사실은 우리의 의식현상이 정연한 데 불과하다.
의식은 모두 통일에 의해서 성립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통일이란 작게는 각 개인의 그날 그날의 의식간의 통일에서 크게는 모든 사람의 의식을 결합하는 우주적 의식통일에 도달하는 것이다. (의식통일을 개인적 의식 안에 국한시키는 것은 순수경험에 가해진 독단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계란 이런 초개인적 통일에 의해서 성립되는 의식의 한 체계다
우리가 개인적 주관에 의해서 자기의 경험을 통일하고 다시 초개인적 주관에 의해서 각자의 경험을 통일해가는 것이다.
자연계는 이 초개인적 주관의 대상으로서 생기는 것이다.
로이스도 '' 자연의 존재는 우리 동포의 존재의 신앙과 결합되어 있다 ''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자연계의 통일이란 필경 의식통일의 일종에 지나지 않게 된다.
원래 정신과 자연의 두 가지실재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양자의 구별은 동일한 실재를 보는 관점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직접경험의 사실에 있어서는 주관과 객관의 대립이 없고 정신과 물질의 구별도 없으며 물즉심, 심즉물 오직 하나의 현실이 있을 뿐이다.
다만 이런 실재의 체계의 충돌, 즉 한편으로 보면 그 발전상에서 주객의 대립이 나오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지각의 연속에 있어서는 주객의 구별은 없고, 다만 이 대립은 반성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실재체계가 충돌할 때, 그 통일작용의 방면이 정신이라고 생각되며 이것이 그 대상으로서 이것에 대항하는 방면이 자연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객관적 자연도 실은 주관적 통일이라는 것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주관적 통일이라고 하지만 통일의 대상, 즉 내용없는 통일이 있을 수가 없다.
양자가 함께 동일한 종류의 실재며, 다만 그 통일의 형태를 달리할 뿐이다.
또한 이렇게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것은 추상적이며 불완전한 실재다 이러한 실재는 양자의 합일에 있어서 비로소 완전한 구체적 실재가 되는 것이다.
정신과 자연의 통일이란, 두 가지 종류의 체계를 통일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동일한 통일 아래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실재에 정신과 자연의 구분없이 , 따라서 두 종류의 통일 없이 단지 동일한 직접경험의 사실 그 자체의 관점에 의해서 여러가지 차별이 생긴다고 하면, 내가 앞서 말한 실재의 근저인 신이란, 이 직접경험의 사실, 즉 우리의 의식현상의 근저가 아니면 안된다.
그런데 우리의 의식현상은 모두 체계를 이룬 것이다
초개인적 통일에 의해서 이루어진 이른바 자연현상이라 할지라도 이 형식을 떠날 수는 없다.
통일적인 어떤 것의 자기 발전이란 것이 모든 '실재'의 형식이며 신이란 이런 실재의 통일자다.
우주와 신의 관계는 우리의 의식현상과 그 통일과의 관계다.
사유나 의지에 있어서도 심상이 하나의 목적관념에 의해서 통일되고 모든 것이 통일적 관념의 표현이라고 간주되는 것처럼 신은 우주의 통일자며, 우주는 신의 표현이다.
이 비교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사실이다.
신은 우리의 의식의 최대 최종적인 통일자다. 아니, 우리의 의식은 신의 의식의 일부분이며 그 통일은 신의 통일에서 오는 것이다.
작게는 우리의 일희일우一喜一憂에서 크게는 일월성신의 운행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통일에 의하지 않는 것은 없다.
뉴턴이나 케플러도 이 위대한 우주적 의식의 통일에 감동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우주의 통일자며, 실재의 근저인 신이란 어떤한 것일까
정신을 지배하는 것은 정신의 법칙이라야 한다.
물질같은 것은 앞에서 말했듯이 설명을 위해서 설정된 가장 천박한 추상적 개념에 불과하다.
정신현상이란 이른바 지, 정, 의의 작용이며 이것을 지배하는 것은 역시 지, 정, 의의 법칙이라야만 한다.
그리하여 정신은 단지 이런 작용의 집합이 아니라, 그 배후에 하나의 통일력이 있어서, 이런 현상은 그 발현이다.
이제 그 통일력을 인격이라 칭한다면 신은 우주의 근저인 하나의 커다란 인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자연의 현상에서 인류의 역사적 발전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가 커다란 사상과 커다란 의지의 형태를 이루지 않는 것은 없다
우주는 신의 인격적 발현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도 나는 어느 일파의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신은 우주 밖으로 초월하고 우주의 진행을 떠나서 별도로 특수한 사상이나 의지를 가진 우리의 주관적 정신같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신에 있어서는 지즉행知卽行, 행즉지고 실재는 곧 신의 사상이며 또한 의지라야만 한다.
우리의 주관적 사유 및 의지 같은 것은 여러가지 체계의 충돌에서 일어나는 불완전한 추상적 실재다
이러한 것을 가지고 당장 신에 비유할 수는 없다.
일링워스는 [인간과 신의 인격]이라는 책에서 인격의 요소로서 자각, 의지의 자유및 사랑의 세 가지를 들고 있다
그러나 이 세 가지를 가지고 인격의 요소로 삼기 전에 이러한 작용이 실제로 어떠한 사실을 의미하는 가를 분명히 해두지 않으면 안된다.
자각이란 부분적 의식체계가 모든 의식의 중심에서 통일되는 경우에 수반되는 현상이다.
자각은 반성에 의해서 일어난다.
그리하여 자기의 반성이란 이러한 의식의 중심을 찾는 작용이다.
자기란 의식의 통일작용 외에는 없다.
이 통일이 바뀌면 자기도 바뀐다. 이 밖에 자기의 의식의 본체란 것은 허명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안으로 반성해보고 일종의 특별한 자기의 의식을 얻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것은 심리학자가 말한 바와 같이
이 통일에 따르는 감정에 불과하다.
이러한 의식이 있어서 이 통일이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이 통일이 있음으로써 이러한 의식을 낳게 되는 것이다.
이 통일 자체는 지식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이 자체가 되어 작용할 수는 있지만, 이것을 알 수는 없다.
참된 자각은 오히려 의지활동 위에 있어서 지적 반성에는 없는 것이다.
만일 신의 인격에 있어서의 자각이라고 말한다면, 이 우주현상의 통일이 하나하나 그 자각이어야만 한다.
예를 들면 삼각형의 모든 각의 총합은 180도라는 것은 누구나 어느 시대에서나 이렇게 생각해야만 한다.
이것도 신의 자각의 하나다.
모두가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는 우주통일의 생각은 신의 자기동일의 의식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만물은 신의 통일에 의하여 성립되고 신에 있어서는 모두가 현실이며 신은 언제나 능동적이다.
신에게는 과거도 미래도 없다.
시간과 공간은 우주적 의식통일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다.
신에게 있어서는 모두가 현재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것처럼 시간은 신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신은 시간을 초월하기 때문에 신은 영원한 현재에 있다
그러므로 신에게는 반성이 없고 기억도 없으며 희망또한 없다. 따라서 특별한 자기의 의식도 없다.
모두가 자기며 자기 외에는 사물이 없기 때문에 자기의 의식은 없는 것이다.
다음에 의지의 자유라는 것에도 여러 가지 의미는 있지만, 참된 자유란 자기의 내면적 성질에서 작용한다는 이른바 필연적 자유의 의미라야만 한다.
전혀 원인이 없는 의지라는 것은 비단 불합리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것은 자기에게 있어서도 전혀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며, 자기의 자유적 행위라고는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신은 만유의 근본이며, 신 외에는 사물이 없고 만물이 모두 신의 내면적 성질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신은 자유다
이런 의미에 있어서는 신은 실로 절대적으로 자유다.
이렇게 말하면 신은 자기의 성질에 속박되어 그 전능함을 상실하는 것처럼 보일런지 모르지만 자기의 성질에 반하여 작용한다는 것은 자기의 성질이 불완전하거나 혹은 그 모순을 나타내는 것이다.
신의 완전하면서도 전지전능함과 그의 부정적인 자유의지와는 양립할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아우구스티누스도 '' 신의 의지는 불변이며 때로는 원하고 때로는 원치 않으며 하물며 앞서 내린 결단을 나중에 뒤집는 일은 없다'고 말하고 있다
선택적 의지와 같은 것은 오히려 불완전한 우리의 의식상태에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며, 이것을 가지고 신에 비견할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충분히 숙달한 사항에 있어서는 조금도 선택적 의지를 삽입할 여지가 없다.
선택적 의지는 의혹, 모순, 충돌의 경에 필요해진다.
물론 누구나 말하는 바와 같이 안다는 것 속에는 이미 자유란 것을 내포하고 있다
앎은 즉 가능을 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가능이란 반드시 부정적 가능이어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다.
앎이란 반성의 경우에만 말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직각 直覺도 앎이다.
직각쪽이 오히려 참된 앎이다.
앎이 완전해지면 질수록 오히려 부정적 기능은 없어지는 것이다.
이렇듯 신에게는 부정적 의지, 즉 隨意수의 라는 것이 없으므로 신의 사랑이란 것도 신은 어떤 사람들을 사랑하고
어떤 사람들은 미워하며 어떤 사람들을 번영케 하고 어떤 사람들을 망하게 하는 그러한 편협한 사랑은 아니다.
신은 모든 실재의 근저로서 그 사랑은 평등하고 보편적이라야 한다.
또한 그 자기발전 그 자체가 곧 우리에게 있어서는 무한한 사랑이라야 한다.
만물의 자연적 발전 이외에 특별한 신의 사랑은 없는 것이다.
원래 사랑이란 통일을 구하는 감정이다.
자기통일의 요구가 자애이며 자타통일의 요구가 타애이다.
신의 통일작용은 곧 만물의 통일작용이므로 에카르트가 말한 것처럼 신의 타애는 곧 그 자애라야만 한다.
우리가 자기의 손발을 사랑하는 것처럼 신은 만물을 사랑하는 것이다.
에카르트는 또한 신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수의의 행동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상에서 논한 바와 같이 신은 인격적이라 하더라도 바로 이것을 우리의 주관적 정신과 동일하게 볼 수는 없으며,
오히려 주객이 분리되지 않고 물아物我가 차별되지 않은 순수경험의 상태에 비교해야 할 것이다.
이 상태가 실로 우리의 정신의 시초며 끝이다.
겸하여 또한 실재의 진상이다.
그리스도가 마음이 깨끗한 자는 신을 본다 했고, 어린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한 것처럼 이런 경우에
우리의 마음은 가장 신에 가까이 다가서 있는 것이다.
순수경험이란 것도 단지 지각적 의식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반성적 의식의 배후에도 통일이 있어서, 반성적 의식은 이것에 의해서 성립되는 것이다.
즉 이것도 역시 일종의 순수경험이다.
우리 의식의 근저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순수경험의 통일이 있으며, 우리는 이 밖으로 뛰어나갈 수는 없다.
신은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우주의 근저에 있는 일대 지적 직관이라고 볼 수 있으며, 또한 우주를 포괄하는 순수경험의 통일자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아우구스티누스가 신은 불변적 직관으로써 만물을 직관한다고 말했다.
또 신은 정靜인 동시에 동, 동인 동시에 정이라고 말한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에카르트가 '신성' 및 야곱베메가 '실재 없는 고요' 라고 한 말의 뜻도 엿볼 수 있다.
모든 의식의 통일은 변화 위에 초월하여 확고부동해야만 한다.
더욱이 변화는 여기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즉 움직이면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의식의 통일은 지식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모든 범주를 초월하고 있다
우리는 이것에 어떤 정형도 부여할 수는 없다. 더욱이 만물은 이것에 의해서 성립되는 것이다.
그래서 신의 정신이라는 것은 한편으로 보면 아무리 보아도 불가지적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오히려 우리의 정신과 밀접해 있다.
우리는 이 의식통일 근저에 있어서 곧 신의 모습에 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야곱베메도 '' 하늘은 도처에 있으며 그대가 서 있는 곳이나 가는 곳에는 어디나 하늘이 있다'
라고 했으며 또한 '가장 깊은 내생內生에 의해서 신에게 이른다'고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말할 것이다. 위에서와 같이 논하는 경우에는 신은 사물의 본질과 동일하게 된다.
설령 정신적이라 하더라도 이성 또는 양심과 아무런 구별도 없으며, 그 살아 있는 개인적 인격을 상실하게 되지는 않을까. 개인성은 다만 부정적 자유의지에서 생길 수 있는 것이다.(이것은 일찍이 중세철학에서 스코투스가 토마스에게 반대한 논점이었다)
이러한 신에 대해서 우리는 결코 종교적 감정을 일으킬 수는 없다. 종교에 있어서는 죄는 단지 법을 어기는 것만이 아니라 인격에 위배되는 것이다. 후회는 단지 도덕적 후회가 아니라 부모를 해치고 은인을 배반한 간절한 후회다.
에르스킨은 '' 종교와 도덕은 양심의 배후에 인격을 인정하느냐, 부인하느냐에 따라서 나누어진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헤겔이 말한 바와 같이 진정한 개인성이란 일반성을 떠나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일반성이 한정된 것이 개인성이 되는 것이다. 일반적인 것은 구체적인 것의 정신이다.
개인성이란 일반성에 외부에서 다른 어떤 것을 보탠 것이 아니라, 일반성이 발전한 것이 개인성이 되는 것이다.
아무런 내면적 통일도 없이 단지 여러가지 성질이 우연적 결합이라는 것에는 개인성이라고 해야 할 것은 없다. 개인적 인격의 요소인 의지의 자유란, 일반적인 것이 자기 자신을 한정시킴을 말한다.
삼각형의 개념이 여러 가지 삼각형으로 분화될 수 있는 것처럼 어떤 일반적인 것이 그 속에 내포되어 있는 여러가지 한정의 가능을 자각하는 것이 자유의 느낌이다.
전혀 기초가 없는 절대적 자유의지에서는 오히려 개인적 자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 개성엔 이유가 없다'' 라는 말도 있지만, 참으로 이러한 개인성은 아무런 내용도 없는 무와 같은 것이 아니면 안된다.
다만 구체적인 개인성은 추상적 개념으로는 알 수 없을 따름이다.
추상적 개념으로 나타낼 수 없는 개인성이라도 화가나 소설가의 붓으로는 선명하게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신이 우주의 통일이라 함은 단지 추상적 개념의 통일은 아니다.
신은 우리의 개인적 자기처럼 구체적 통일이다. 즉 하나의 살아 있는 정신이다.
우리의 정신이 앞에서 말한 의미로 개인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처럼 신도 개인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성이나 양심은 신의 통일작용의 한부분이겠지만 살아있는 정신 그 자체는 아니다.
이와같이 신성적 정신의 존재란 단지 철학상의 논의가 아니라 실제상에 있어서의 심령적 경험의 사실이다.
우리의 의식의 밑바닥에는 누구에게나 이러한 정신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성이나 양심은 그 목소리다)
다만 우리의 조그마한 자기에게 방해받아 이것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시인 테니슨도 다음과 같은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조용히 자기 이름을 부르고 있자, 자기의 개인적 의식의 깊은 밑바닥에서 자기 개인이 용해되어 무한한 실재가 되고 더욱이 의식은 결코 몽롱한 것이 아니라 가장 명석하고 확살하다. 이때 죽음이란 가소로우며 불가능한 일이며 개인의 죽음이 곧 참된 삶이라고 느끼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외로이 혼자 있을 때 가끔 이런 경험을 했다고 한다.
또한 문학자 시몬즈도 우리의 일상적인 의식이 점점 희미해짐과 동시에 그 근저에 있는 본래의 의식이 강해져서 드디어 하나의 순수한 절대적, 추상적인 자기만이 남게 된다고 했다.
그밖에 종교적 신비가들의 이러한 경험을 예로 들자면 끝이 없다 혹은 이런 현상을 가지고 전부 병적이라고 할 지 모르지만, 그것이 과연 병적인지의 여부는 합리적이냐 아니냐에 의하여 정해진다.
내가 전에 말한 바와 같이 실재는 정신적이며 우리의 정신 그 작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면, 우리가 자기의 소의식을 깨고 하나의 커다란 정신을 감득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이유가 없다.
우리의 소의식의 범위를 고집하는 것이 오히려 미혹일지도 모른다.
위인에게는 반드시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보통사람보다 한층 심원한 심령적 경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 4장 신과 세계
순수경험의 사실이 유일한 실재고 신은 그 통일이라고 한다면, 신의 성질과 세계와의 관계도 모두 우리의 순수경험의 통일, 즉
의식통일의 성질 및 이것과 그 내용과의 관계에서 알 수가 있다.
우선 우리의 의식통일은 볼 수도 들을 수도 없고 전혀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모든 것이 이것에 의해서 성립되기 때문에 능히 일체를 초절超絶하고 있다.
검은 것을 보고 검은 것을 나타내어도 마음은 검지 않으며, 흰 것을 보고 흰 것을 나타내어도 마음은 희지 않다.
불교는 말할 나위도 없이 중세철학에 있어서 디오니시우스 일파의 이른바 소극적 신학이 신을 부정적으로 논한 것에도 이러한 모습을 나타냈던 것이다.
쿠자누스(신학자, 철학자)는 신은 유무도 초월하며, 신은 '유'인 동시에 '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깊이 자기의 의식의 맨 밑바닥을 반성해 볼 때, 일찍이 야곱베메가 신은 '실재 없는 고요'라거나, '있지 않은 무저無底'라든지, 또는 '대상 없는 의지'라고 할 말에 깊은 의미를 발견할 수도 있다.
또한 일종의 숭고하고도 불가사의한 느낌에 감동을 받는 것이다.
그 밖에 신의 영구함이나, 편재 및 전지전능이라 하는 것도 모두 이 의식통일의 성질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시간과 공간은 의식통일에 의해서 성립되기 때문에 신은 시간과 공간 위에 초절하여 영구불멸이며 없는 데가 없다.
일체는 의식통일에 의해서 생기기 때문에 신은 전지전능이어서 모르는 것이 없고 불가능한 것이 없다.
신에 있어서는 知와 能은 동일한 것이다.
그렇다면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절대 무한한 신과 이 세계와의 관계는 어떠한 것일까?
유를 떠난 무는 참 '무'가 아니다.
일체를 떠난 하나는 참된 하나가 아니다.
차별을 떠난 평등은 참된 평등이 아니다.
신이 없으면 세계가 없는 것처럼 세계가 없으면 신도 없다.
물론 여기서 세계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이 세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스피노자가 말한 바와 같이 신의 속성은 무한하므로, 신은 무한한 세계를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다만 세계적 표현은 신의 본질에 속해야 하는 것이며 결코 그 우연적 작용은 아니다.
헤겔은 '신은 전에 한번 세계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그 영원한 창조자다'고 말했다.
요컨대 신과 세계와의 관계는 의식통일과 그 내용과의 관계다
의식적 내용은 통일에 의해서 성립되지만, 또 의식적 내용을 떠난 통일은 있을 수 없다.
의식적 내용과 그 통일은 통일하는 것과 통일되는 것의 양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실재의 양면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의식현상은 그 직접경험의 상태에 있어서는 오직 하나의 활동이지만, 이것을 지식의 대상으로해서
반성함으로써 그 내용이 다양하게 분석되고 차별되는 것이다.
만일 그 발전의 과정으로 말하면 우선 전체가 하나의 활동으로서 충동적으로 나타난 것이 모순충돌에 의해서 그 내용이
반성되고 분별되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도 야곱 베메의 말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대상이 없는 의지라고 할 발현 이전의 신이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 즉 자기 자신을 거울로 삼음으로써 주관과 객관이 갈라지고 여기서부터 신과 세계가 발전한다고 말하고 있다.
원래 실재의 분화와 그 통일은 하나며 둘이어서는 안된다.
한편에서 통일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한편에서는 분화를 의미하고 있다.
예를 들면 나무에 있어서 꽃은 꽃일 수 있고, 잎은 잎일 수 있는 것이 나무의 본질을 나타낸다. 위에서와 같은 구별은 다만 우리의 사상에 있는 것이고 직접적인 사실에 있는 일이 아니다.
괴테가 '자연은 핵도 껍데기도 갖고 있지 않다. 모두가 핵인 동시에 껍데기이다'고 말한 것처럼 구체적인 참된 실재, 즉 직접경험의 사실에 있어서는 분화와 통일은 유일한 활동이다.
예를 들면 한폭의 그림, 한 곡의 악보에 있어서 그 일필, 일성은 곧 전체의 정신을 나타내지 않는 것이 없고
또한 화가나 음악가에게 있어서 하나의 감흥인 것이 곧장 넘쳐서 천변만화의 산수화가 되고 우여곡절의 음곡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 있어서는 신은 곧 세계며 세계는 곧 신이다.
괴테가 '에페소인의 다이아나 위대하도다' 라는 시에서 읊은 것처럼 인간의 두뇌속에 있는 추상적인 신에게 떠들기보다는 오로지 다이아나의 은감을 만들며, 바울의 가르침은 거들떠보지 않았다는 은세공이 어느 의미에서는 오히려 진정 신에 접해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에카르트가 말한 바와 같이 신마저도 앓어버린 곳에서 참된 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상태에 있어서는 천지가 오직 하나의 손가락이며 만물이 나와 일체이지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한편으로 보면 실재체계의 충돌에 의해서, 다른 한편으로 보면 그 발전의 필연적 과정으로서 실재체계의 분열을 가져오게 된다.
즉 이른바 반성이라는 것이 일어나야만 한다.
이것에 의해서 현실이었던 것이 관념이 되고, 구체적이던 것이 추상적이 되고, 하나이던 것이 다수가 된다.
여기에서 한편에 신이 있으면 다른 한편에는 세계가 있고, 한편에 나가 있으면 다른한편에는 물이 있어서 피차가 서로 상대하고 사물들이 서로 배치하게 된다. 우리의 조상이 지혜의 나무 열매를 따먹고 신의 낙원으로부터 추방되었다는 것도 이러한 진리를 의미하리라.
조상의 타락은 한 아담과 이브의 옛날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서 시시각각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보면 분열이니 반성이니 하여 따로 이러한 작용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통일의 반면인 분화작용의 발전에 지나지 않는다. 분열이나 반성의 배후에는 보다 심원한 통찰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반성은 깊은 통일에 이르는 길이다.
'' 선인은 역시 왕생한다 하물며 어찌 악인에게랴'' 라는 말이 있다
신은 그 가장 깊은 통일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먼저 크게 분열하지 않으면 안된다.
인간은 한편으로 보면 곧 신의 자각이다.
기독교의 전설을 빌어서 말하면 아담의 타락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구원이 있으며 따라서 무한한 신의 사랑이 분명해진 것이다
그런데 세계와 신의 관계를 위에서와 같이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의 개인성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할까
만물은 신의 표현이며 신만이 참된 실재라면 우리의 개인성이란 것은 허위의 가상이며, 물거품처럼 전혀 무의미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될 것일까. 나는 반드시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물론 신으로부터 떨어져나와 독립된 개인성이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우리의 개인성은 전혀 허망한 환상이라고 볼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신의 발전의 일부로 볼 수도 있다
즉, 그 분화작용의 하나라고 볼 수도 있다.
모든 사람이 각자 신으로부터 부여된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하는 것처럼 우리의 개인성은 신성이 분화된 것이다.
각자의 발전은 즉 신의 발전을 완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의 개인성은 영구적인 생명을 지니며, 영원한 발전을 이룰 수가 있는 것이다.
신과 우리의 개인적 의식과의 관계는 의식의 전체와 그 부분과의 관계다
모든 정신현상에 있어서는 각 부분은 전체의 통일 아래 서게되는 동시에 각자가 독립된 의식이라야 한다.
만물은 유일한 신의 표현이라 함은 반드시 각자의 자각적 독립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우리의 시시각각 변하는 의식은 개인적 통일하에 있는 동시에 각자가 독립된 의식이라고도 볼 수 있다는 게 일반적이다.
일링워스는 '' 하나의 인격은 반드시 다른 인격을 구한다. 다른 인격에 있어서 자기가 전인격의 만족을 얻게 되는 것이다. 즉 사랑은 인격의 불가결한 특징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남의 인격을 인정한다는 것은 즉 자기의 인격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상호간의 인격을 인정한 관계는 곧 사랑이며, 한편으로 보면 두 인격의 합일이다.
사랑에 있어서 두 인격이 서로 존중하고 서로 독립하면서 동시에 합일되어 하나의 인격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신은 무한한 사랑이기 때문에 모든 인격을 포함하는 동시에 모든 인격의 독립을 인정할 수가 있다
다음에 만물은 신의 표현이라고 하듯이 범신론적 사상에 대한 비난은 어떻게 '악'의 근본을 설명할 수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바로는 원래 절대적인 '악'이란 없는 것이며 사물은 모두 그 본래에는 '선'이다.
실재는 곧 '선'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된다.
종교가는 극구 육 肉의 '악'을 설교하지만 육욕이라 할지라도 절대적인 '악'은 아니다.
다만 그 정신적 향상을 방해하는데 있어서 '악'이 되는 것이다.
또 진화론의 윤리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오늘날 우리가 죄악이라고 칭하는 것도 어느 시대에 있어서는 도덕이었던 것이다.
즉 그것은 과거의 도덕의 유물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사물 그 자체에 있어서 본래 '악'이란 것이 있는게 아니라 '악'은 실재체계의 모순충돌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충돌이란 것이 무엇에서 일어나는가 하면, 이것이 실재의 분화작용에 의거하는 것으로서 실재가 발전하는 하나의 요건이다.
실재는 모순충돌에 의하여 발전하는 것이다.
메피스토펠레스가 항상 '악'을 구하고 언제나 '선'을 만드는 힘의 일부라고 지칭한 것처럼 악은 우주를 구성하는 한요소라 하여도 무방하다
물론 악은 우주의 통일 진보의 작용은 아니므로 그 자체에 있어서 목적이 될 수 없는 물론이지만, 또한 아무런 죄악도 없고 하등의 불만도 없는 평온무사한 세계는 극히 평범하고 천박한 세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죄를 모르는 자는 참으로 신의 사랑을 알 수 없다.
불만도 고뇌도 없는 자는 깊은 정신적 취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죄악, 불만, 고뇌는 우리들 인간이 정신적 향상의 요건이다.
그러므로 참된 종교가는 이런 것에 있어서 신의 모순을 보지 않고, 오히려 신의 깊은 은총을 느끼는 것이다.
이러한 '악'이 있기 때문에 세계는 그만큼 불완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풍부하고 심원해지는 것이다.
만일 이 세상에서 이러한 것을 모조리 제거했다면 비단 정신적으로 향상하는 길을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그 얼마나 많은 아름다운 정신적 사업이 이와 함께 세상에 사라져버릴 것인가
우주전체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또한 우주가 정신적 의의에 의해서 이룩되었다고 한다면, 이러한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하등의 불완전함조차 찾아볼 수는 없다.
오히려 그 필요불가결한 까닭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죄는 미워해야 하지만 회개한 죄만큼 세상에 아름다운 것도 없다.
나는 여기서 오스카 와일드의 [옥중기]속에 있는 한 구절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는 죄인을 인간의 완성에 가장 가까운 자로서 사랑하였다 재미있는 도적을 수다스러운 정직자로 변모시키는 것이 그의 목적은 아니었다
그는 일찍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방법으로 죄와 고뇌를 아름답고 신성한 것으로 만들었다
물론 죄인은 회개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행한 바를 완성하는 것이다.
그리스인은 인간은 자기의 과거를 변경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신도 과거를 변경할 수 없다는 말도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가장 보편적인 죄인도 이것을 능히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 방탕아가 무릎을 꿇고 울었을 때, 그는 그의 과거의 죄악과 고뇌를 그의 생애의 가장 아름답고 신성한 순간으로 만들었다고 그리스도가 말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와일드는 누구보다도 죄인이었으므로 죄의 본질을 잘 알았던 것이다.
제 5 장 지와 사랑
'지'와 '사랑'은 보통 전혀 다른 정신작용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두가지의 정신작용은 결코 종류가 다른 것이 아니라 본래 동일한 정신작용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떠한 정신작용인가. 한마디로 말하면 주객합일의 작용이다.
나가 사물에 일치하는 작용이다.
어찌하여 '지'는 주객합일인가.
우리가 사물의 진상을 안다는 것은 자기의 망상과 억측, 즉 주관적인 것을 모조리 없애버리고 사물에 진상에 일치했을때다.
다시 말하자면 순전히 객관에 일치되었을 때 비로소 그것이 가능한 것이다.
예를 들면 밝은 달에 거무스름한 곳이 있는 것을 토끼가 떡방아를 찧고 있다고 해석한다거나, 지진은 땅 밑에서 큰 메기가 움직이는 것이라고 하는 따위는 주관적 망상이다.
그런데 우리는 천문학이나 지질학에 있어서 전혀 이러한 주관적 망상을 버리고 순전한 객관적 자연법칙에 따라서 고찰할 때, 비로소 이러한 현상의 진상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객관적이 되면 될수록 더욱더 사물의 진상을 잘 알 수 있게 된다.
수천 년 이래의 학문 진보의 역사는 우리 인간이 주관을 버리고 객관을 좇아온 도정을 나타낸 것이다.
다음으로 어찌하여 사랑은 주객합일인가에 대하여 이야기 하기로 하자.
우리가 사물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를 버리고 다른 것과 일치함을 말한다.
자타합일 그 사이에 한 점의 간격도 없어야만 비로소 참된 애정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가 꽃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가 꽃과 일치하는 것이며, 달을 사랑하는 것은 달에 일치하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이 되고 자식이 부모가 되어서 비로소 부모자식의 애정이 일어나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이 되기 때문에 자식의 일리일해는 자기의 이해처럼 느껴지고 자식이 부모가 되기 때문에 부모의 일희일우는 자기의 일희일우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우리가 자기의 나를 버리고 순전한 객관, 즉 무사無私가 되면 될수록 사랑은 커지고 깊어진다.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의 사랑에서 붕우의 사랑에 이르고, 친구의 사랑에서 인류의 사랑으로 나아간다. 불타의 사랑은 금수와 초목에까지 미쳤던 것이다.
이처럼 '지'와 '사랑'은 동일한 정신작용이다. 그러므로 사물을 알려면 이것을 사랑해야 하며, 사물을 사랑하려면 이것을 알아야 한다. 수학자는 자기를 버리고 수리를 사랑하며 수리 그 자체와 일치되기 때문에 능히 수리를 밝힐 수 있는 것이다.
미술가는 능히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에 일치하며 자기를 자연속에 몰입시킴으로써 비로소 자연의 참된 모습을 간파할 수 있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우리는 자기 친구를 알기 때문에 이를 사랑하는 것이다. 처지가 같고 사상과 취미가 같으며 서로 이해하는 면이 깊으면 깊을수록 동정은 더욱더 짙어가는 법이다. 그러나 '사랑'은 '지'의 결과며 '지'는 '사랑'의 결과인 것처럼, 이 두 작용을 분리해서 생각해서는 아직 '사랑'과 '지'의 진상을 터득한 것이 아니다.
'지'는 '사랑', '사랑'은 곧 '지'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즐기는 것에 열중할 때에는 거의 무의식이다.
자기를 잊고 단지 자기 이상의 불가사의한 힘만이 당당하게 작용하고 있다. 이 때가 주도 객도 없는 참된 주객합일이다.
이때가 지즉애, 애즉지다 수리의 묘에 마음을 빼앗겨 침식을 잊고 이것에 탐닉할 때, 우리는 수리를 아는 동시에 이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남들의 희우에 대해서 전혀 자타의 구별없이 남이 느끼는 것을 곧 자기가 느끼며 함께 웃고 울때, 우리는 남을 사랑하고 또 이것을 알아가고 있는 것이다. 사랑은 남의 감정을 직각하는 것이다.
연못에 빠지려는 어린이를 구하려고 하는 순간에는 귀엽다는 생각조차 일어날 여유도 없다.
일반적으로 사랑은 감정이어서 순수한 지식과 구별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상의 정신현상에는 순지식이라는 것도 없거니와 순감정이란 것도 없다.
이러한 구별은 심리학자가 학문을 연구하는데 편의상 만든 추상적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학리의 연구가 일종의 감정에 의해서 유지되어야 하는 것처럼 남을 사랑하려면 일종의 직각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내 생각으로는 보통 '지'라고 하는 것은 비인격적 대상의 지식이다.
가령 대상이 인격적이라 하더라도 이것을 비인격적으로 보았을 때의 지식이다. 이에 반해 '사랑'이란 인격적 대상의 지식이다.
설령 대상이 비인격적이라 하더라도 이를 인격적으로 보았을 때의 지식이다.
양자의 차이는 정신작용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상의 종류에 의한 것이라고 하여도 무방하다
그래서 예로부터 많은 학자와 철인들이 말한 바와 같이 우주실재의 본체는 인격적인 것이라면, 사랑은 실재의 본체를 포착하는 힘이며 사물의 가장 깊은 지식이다.
분석 추론한 지식은 사물의 표면적 지식이며, 실재 그 자체를 파악할 수는 없다.
우리는 다만 사랑에 의해서만 이것에 도달할 수 있다
'사랑'은 '지'의 극점이다.
이상으로 미흡하나마 '지'와 '사랑'을 서술하였는데, 이제 이것을 종교상의 사항에 적용시켜서 생각해보기로 하자.
주관은 자력이며, 객관은 타력이다.
우리가 사물을 알고 사물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력을 버리고 타력의 믿음에 들어감을 말한다.
인간 일생의 과업이 '지'와 '사랑'이외에 없다면, 우리는 날마다 타력신심 위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학문도 도덕도 모두 불타의 광명이며 종교라는 것은 이 작용의 극치다
학문이나 도덕은 개개의 차별적 현상 위에서 이 타력의 광명을 입는 것이지만, 종교는 우주 전체 위에서 절대무한의 불타 그 자체에 접하는 것이다.
''주여, 당신의 뜻에 합당하면,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뜻대로 하게 마시고 오직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한다든지, '' 염불은 실로 극락에 이르기 위함이 아니오, 또한 지옥에 떨어져야 할 업을 면키 위함도 아니로다. 모두가 알 바가 아니로다'' 라는 말들은 종교의 극의다.
그리고 이 절대무한의 부처님, 또는 신을 아는 것은 다만 이것을 사랑함을써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것을 사랑하는 것이 곧 이를 아는 것이다.
인도의 베다교나 신 플라톤 학파, 또는 불교의 성도문은 이것을 안다고 하며, 기독교나 정토종에서는 이것을 사랑한다고 하며 이에 귀의한다고 말한다. 각각 그 특색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하다
신은 분석이나 추론에 의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실재의 본질이 인격적인 것이라면 신은 가장 인격적인 것이다.
우리가 신을 아는 것은 오직 사랑 또는 믿음의 직각에 의해서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을 모르며, 우리는 다만 신을 사랑하며 또한 이를 믿는다고 하는 자는 신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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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참으로 놀라운 극성입니다. 이 바쁜 와중에 ... 흑!
그래서 ..
소감 한마디씩 반드시 적어주시기를 강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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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는 밤중에 ..
아미타불을 연구하다보면 기독교의 교리를 많이 알게 되요. 기독교와 대화도 가능하구요. 기독교의 하나님을 아미타불로 바꾸어버리면 비슷하거든요. 기독교의 어설픈 교리를 아주 괜찮은 교리로 바꾸어 버릴수도 있어요. 전에 푸른바다님하고 얘기하면서 여호와증인의 교리를 모두 알아버렸거든요. 기독교에게 부러운것이 있다면 현실세상에 종교를 접목시킬려고 무단히 애쓰는 점이죠. 이세상을 신이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현실과의 접목이거든요. 조물주와 피조물의 관계는 엄청난 압박이죠. 그 압박이면 종교에 매달릴수밖에 없는 구조일거예요. 그정도의 압박이면 교회에 안가면 큰일나거든요.
저는 뭐...요가를 했기에 그런지는 몰라도...기법으로 환원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언어 표현에서, 기법을 고려하지 않고 등장할 수 없는 말들이 있어요. 특히 종교에서는 더욱 그러한 편인데요...
기본적으로..."합일"이란 표현은, 삼매 내지 집중을 중시하는 경우에 등장할 수 있습니다. 삼매 내지 집중의 과보가 "합일"입니다.
하지만 연기의 이치에 따르면, 합일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최소한 "둘"이 필요합니다. 연기의 이치에 따르면, "하나"만으로 성립하는 것은 없어요.
그러면 "하나"는 도대체 뭔가? "하나"란 것은, 12연기의 "유(자신으로 간주)"에 이를 정도로 "업"이 성숙할 때 따르는 과보를 칭하는 이름인 겁니다.
결국...집중이란, 삼매란..."유"입니다. 애, 취, 유의 분별을 하려고 노력을 많이 한 편인데요... "애"는 욕동에 가깝습니다. 아직 대상이 선명하지는 않습니다. "취"는 대상 선별이구요, 대상을 선별했으니 달라붙을 수 있는 거예요. "유"는 달라붙은 대상을 자신으로 간주하는 거예요. 이와 같은 방식으로 존재는 발현하며, 존재에서 존재로 나아갑니다.
학창시절...일본어를 모르니 원문을 볼 수는 없지만, 번역된 일본인의 불교 저술을 좀 읽은 편입니다. 또한 각주를 보면 알 수 있는 일본 문헌에 비춰, 소위 일본풍의 불교를 간접적으로 접하기도 했구요... 불교의 경우에는, 일본인의 저술이 참고문헌으로 종종 등장하는 편이죠.
어떻게 보면, 일본 불교만의 문제는 아닌데...상좌불교가 아니라면, 어디서나 "합일"이라는 소재가 주요 테마로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위에서 적은 것과 같은 이유로, 불교와 관련하여 등장하는 "합일"이라는 소재에 상당히 뭐랄까...경기를 일으키는 습관이 있어요.
최소한 불교와 관련하여서는..."집중"은, 합일이 아니라 소멸을 지향하는 거라고 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죠... 상좌불교에서 소위 심해탈이라고 표현되기도 하는 건데요. "주객의 통합"과 같은 표현은, 가능하지 않고..."주객의 소멸"과 같은 표현은 가능하단 뜻이죠... 통합은, 소위 존재와 관련하는 한, 연기의 이치에 따르면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잊지않기님 늘 고맙습니다. 이곳에서 많은 공부 하고 있습니다. 요즘 많이 바쁘고 심란스러운것이 다 탐욕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합니다. _()-
네, 해인님 감사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방문객님의 표현인데요
'' 행복할 때 행복한 줄 알아 취하지만은 않으며, 불행할 때 불행한 줄 알아 밀어내지만은 않는다''
많이 도움이 됩니다.
베단따라는 이름이, 베다의 끝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베다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베다의 계승자일테죠. 우파니샤드는 베다의 내용을 일반화시켜 제시한 [론]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소위 인도의 정통 6파 철학은, 스스로를 베다와 우파니샤드의 계승자로 자처합니다.
그런데 베다의 경우, 기본적으로 샤마니즘을 떠나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특히 리그 베다는 신등에 대한 찬가집입니다. 그래서 제사 내지 제의가 중요합니다. 제사 내지 제의의 의미와 관련하여 탐구가 진행되었고, 이를 통해 우파니샤드가 등장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다음 내용은 논의의 여지가 많은 만구 제 생각인데...
샹카라와 라마누자 중 우파니샤드를 보다 잘 반영한 쪽은, 샹카라로 봅니다. 라마누자는, 바가바드 기타와 더 가깝다고 생각하는 거죠. 물론 우파니샤드나 바가바드 기타나, 같은 뜻을 의미한다고 이야기 되지만...굳이 분별해 보자면, 그렇다는 거죠.
저 역시...본글은, 올려진 세개의 텍스트 내용에 비춰, 라마누자의 베단따와 아주 유사한 입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거의 같다고 할 수 있어요...
원래 기독교가, 해석에 따라, 라마누자의 베단따와 같아질 여지가 많아요. 라마누자의 베단따를 기독교 신학으로 가져다 놔도 별로 하자가 없어요. 따라서 현재까지는 본글 내용은 기독교 신학의 하나라고 평가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법담은, 저의 즐거움이죠... 제일 재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