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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깨달음에 있어서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는 맞는 말인가?
오쇼 라즈니쉬와 저의 경험을 바탕으로 설명하면서 마무리 하겠습니다.
1] 돈오돈수(頓悟頓修)란 찰라에 깨달아 부처가 되면 더는 수행할 것이 없다.
만일 더 수행 할 것이 있다면 그 깨달음은 찰라의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며
따라서 아직 부처가 아니라고 본다.
2] 돈오점수(頓悟漸修)는 문득 깨닫고 난 후 점차적으로 수행을 해야 한다는
뜻으로 믄득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뒤에는 반드시 점진적으로 수행을 해야 한다.
제가 평하지요
믄득, 몰록, 찰라 또는 홀연히 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어떤 경우에도 완전한 깨달음이
아닙니다. 고로 돈오돈수는 틀렸고, 돈오점수 역시 비슷은 하지만 합당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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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즈니쉬의 깨달음 / 1편에 보완을 했지만 못본신 분을 위해 반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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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이란 단순히 과거의 감정과 정서에 의해 가려지지 않은 의식의 체험이다.
의식이 완전히 텅 비어 졌을때 마치 원자폭탄의 폭발과 같은 사건이 있었다.
그대의 전 내면이 빛으로 충만하게 되며, 일단 그것이 일어나면 단 한순간도
그대를 떠나지 않는다. 그대가 잠들어 있을때에도 내면의 그 빛이 있으며
그순간 이후 그대는 사물을 전혀 다른방식으로 볼 수 있다. / 1953년 오쇼나이 21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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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록 어느곳에도 없는 깨달음의 순간을 '라즈니쉬'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1953년 당시에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대의 폭팔은 원자폭탄이였기에
라즈니쉬는 원폭에 비유를 했습니다.
2500년전 인간의 경험상 가장 빠르게 불타 버릴수 있는 것은 '바짝 마른 풀잎'
이였기에 번뇌가 끊어지는 현상을 여화분고초(如火焚枯草)로 비유했습니다.
21세기에 살고 있는 저로서는 초신성의 폭팔 또는 빅뱅과 같은 대폭팔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대화염(大火焰) 대화광(大火光)이라고 했던겁니다.
라즈니쉬와 다른 것은 그는 '내면의 빛'이라고 했는데 저의 경우는
內 外가 없습니다. 온통 빛으로 감싸진 현상을 보게 됩니다.
상상불허의 대폭팔과 상상불허의 화염과 섬광(閃光)에 의하여 사라진 후
마치 땅속에서 새롭게 솟아 나오는 듯한 淸淨한 세상을 봅니다.
다보여래가 땅속에서 솟아 나온다고 하셨던 세존의 말씀이 이해가 됩니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몰록이나 문득하고 비교할 수가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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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글] 2018년 11월 28일
대적광전 기둥에 써져있는 글귀를 소개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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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身普放大光明(불신보광대광명) 부처의 몸에서 두루 큰 광명을 발하니
色相無邊極淸淨)색상무변극청정) 형색의 모습 가없이 극히 청정하도다
如雲充滿一切土(여운충만일체토) 구름이 모든 땅위에 충만하듯이
處處稱揚佛功德(처처칭양불공덕) 곳곳에서 부처님을 찬탄하도나
光相所照咸歡喜(광상소조함환희) 광명이 비치는 곳 마다 기쁨이니
衆生有苦悉除滅(중생유고실제멸) 중생의 괴로움 모두 사라져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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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이 서툴러 얼마전에서야 이런 글귀의 내용을 알게 됐습니다.
이글을 미사어구 없이 보이는대로 전한 저의 글과 대조해 보십시요.
이같은 상황을 보고 알지 못하면 모두 초선의 해오자로 구경각은 커녕
여래의 실상을 모릅니다.
대적광전기둥마다 이렇게 써져있건만 여래는 보지 못하고
죽은 송장같은 상수멸이나 말하고 있기에 장님이라고 하는 겁니다.
진실로
완전한 想受滅定이 되었다면 마땅히 이와 같은 현상이 나타나고 눈으로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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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저는 성오스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겨우 한소식으로 구경각을 말하는 사람은 모두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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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眼(如來를 보는 눈)은 세존때나 지금이나 若見 제상비상 즉견여래
'모든 모양이 걷 모양으로서가 아니고 같은 것으로 보는 것' 입니다.
제가 이런 현상을 경험하기 전에는 라즈니쉬를 삿되게 생각했습니다.
가르치는 방편이 삿된 것 같다는 생각때문이였는데 돌아 보니 그것은
미국(서양)인 들에게 적합한 방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고로 순식간에 미국 전역에서 붐을 일으켰지만 미국 청교도의 모함으로
추방을 당하게 되었는데 이와같은 견처를 보인 조사가 없다는 겁니다.
다만 젊은 나이로 깨친데다 인기에 영합해서 변질 된 건 아닌지?..
아니면 獨覺이 아닌지?, 또 조직이 문제입니다. 조직은 썩게 됩니다.
初禪(아라한과)은 예나 지금이나 선각자의 법문과 화두에 依 하여야
하기에 일대일 대담이 필수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독각(獨覺)이 되고
독각은 성취(성불)가 어렵습니다.
초선에 들면 無學(아라한)이라 하여 이론으로는 더 배울게 없습니다.
그래서 둘이가도 안된다 '무소의 뿔처럼 홀로가라' 고 했던 겁니다.
따라서 一乘은 스승없이 홀로가야 하기에 스승이 없는 無師僧입니다.
오죽하면 세존께서 입멸시 제자들에게 나의 죽음은 일반 사람들에게
맞기고 너희들은 관여하지 말고 수행에 전념하라고 하셨는데..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마치 도둑이 빈방에 들어간 것 처럼 텅빈 마음을 체득했어도 찰라 간에
지나가 몸으로 느끼기는 했지만 생각으로는 전혀 가름 할 수가 없습니다.
지혜가 생겨(慧眼) 묻는 말의 낙처는 알 수 있지만 法의 實像은 모릅니다.
'몸으로 느낀다, 또는 몸으로 알수 있다' 는 말은
생각으로는 찾을 수 없고 생각을 내려 놓으면 몸이 스스로 공의 작용을
감지 할수가 있다는 말로 그 자리를 찾는데도 시간이 걸리고, 이 경지가
되어야 비로서 지관수행도 가능하고 정혜쌍수도 가능하고, 비파사나도
가능하고 圓修三觀과 四念處도 가능합니다.
용어만 다를뿐 모두 같은 길을 가르키는 방편입니다.
번뇌가 곧 보리다 했고, 중생이 곧 부처다 했습니다.
그렇다면 번뇌는 무엇이고 보리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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믄득 일어난 생각에 파묻혀 있다가 정신을 차렸을때 처음 생각과 전혀
다른 생각에 빠져있는 자신을 발견하면 번뇌요, 이렇기 때문에 육신은
死를 모르고 마음은 滅을 모르기에 마음이 자신도 모르게 전도 되듯이
육신 역시 자신도 모르게 윤회의 길로 떨어져 버리는 겁니다.
고로 육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떠도는 것을 방비하기 위하여 제일 먼저
해주는 것이 '시다림' 으로 영가에게 죽음을 인식시켜 주려고 하지만
살았을때도 "몰라서 못하나요, 안되는 걸 어떻게 해요?." 라고 했는데
죽은 후에는 풀어 줄 방법이 없습니다. 망자의 意識은 죽음과 동시에
정지되고 생전의 정보로만 유지되기에 인과를 피할수가 없는 겁니다.
따라서 법계에 중생은 없지만 생사유전 하는 중생심은 끝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 몸 받았을때 한소식이라도 하라는 겁니다.
한소식 후에는 항상 깨어있음을 가르키기 위하여 수식관 백골관등을
설하십니다. 無常을 관하게 하려고.. 사념처 역시 같은 길입니다.
모두가 방편입니다.
비유하면 '미륵반가사유상'처럼 끝없는 사유로 如來를 만날때 까지..
앞에서도 말했지만
고타마는 십바라밀, 37조도법, 입보리행, 사념처같은 수행을 할 시간도
없었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가지수가 많아 수행은 커녕 외우기도 힘듭니다,
이런 논설은 지식 자랑 하는데나 써먹을까...
일단 돈문에 들면 이런 이론에서 벗어나 사유로 들어가야 합니다.
팔정도에도 정사유를 여러가지로 설했지만 그 것 역시 방편입니다.
'무엇을 사유하느냐' 는 정해진 것도 없고 무엇이던 올바른 사유란
편견 없는 생각으로 처음, 중간, 끝이 인연과에 합당하면 됩니다.
저는 누구에게 듣거나 배운 적이 없지만 늘 이런 상태를 지속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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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생각(세존의 법문등)이 떠오르면.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를
끝없이 사유하면서 세존께서 생각하셨던 것과 동일한 결과를 도출해
내려고 했습니다. 그런후 " 아~ 이래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구나~."
스스로 의심없는 답이 나올때까지 모든 것에 회통(會通) 되어야 합니다.
그런 후 또 생각합니다. 누구에게?, 어떤 경우에? 이런 말이 필요할까?
스스로 자문 자답에 의하여 결론을 내고 나면, 일으켰던 생각에 티끌이
사라지듯 머리가 맑아지며 눈앞이 밝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以心傳心은 세존께서 생각하시고 의도 하신던 뜻과 똑같을때 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공이 밝아지고 공이 밝아지면 당연히 눈이 밝아지고
눈이 밝아지면 눈동자에서 피막같은 꺼풀이 벗겨지는 느낌이 들면서
마치 눈이 밝아진듯 사물이 명료하게 보입니다. 法眼이 열리는 거지요.
선각이 1년 후 말하길 '몸은 허공에 뜬 듯 가볍고 山이 다가 옵니다.'
'山이 다가온다' 는 말은 정말로 산이 다가 오는 것이 아니고 눈이
밝아졌기에 산이 가까운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상즉상입과 다릅니다. 그것은 문득 몰록 깨치는 순간 느껴지는 것
으로 찰라간에 지나가지만 밝은 눈은 한번 열리며 계속 지속됩니다.
이와 달리 佛眼은 집짖는 자(如來)를 발견하는 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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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치면 끝인가? 아닙니다. 깨친 사람도 항상 사유속에 있습니다.
친구, 가족, 누구를 만나도 항상 사유하는 가운데 상대를 대하기에
중생과 함께하면서도 '같게도 살지도 않고 다르게도 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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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중도를 제방식대로 말한겁니다.
이와같이 항상 사유속에 깨어 있어야 인연자를 만났을때 곧 바로
상대의 근기를 보고 합당한 말을 해줄 수 가 있게 됩니다.
40여년 설법하신 팔만대장경도 논장을 빼고 經 律만 설한다 해도
하루에 두번 이상 설법을 해야 가능한 횟수가 됩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빛은 간극이 있어도 허공은 간극이 없습니다.
물샐 틈도 없이 세밀하다는 뜻으로 사람의 마음도 그와 같습니다.
그래서 깨달은 사람의 경계를 觀自在菩薩에 비유하는 겁니다.
허공은 텅비어 있다고 흔히 말하길 '일천 성인도 모른다'고 합니다.
허공 자체는 그렇습니다. 그래서 달마는 不識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문제와 답이 있습니다.
無心, 마음이 없다면, 마음이 없는데 누가 무엇을 안다는 말인가?
不識 아는게 없다면, 보고 듣고 아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無心을 不識(모르는 것)을 自覺할 수가 있어야 이해가 되는 말로
三身(법신 보신 화신)四智의 작용을 인식할 수 있어야 가능 합니다.
허공은 가름이 안된다는 것이지 멍한게 아니고 항상 깨어있습니다.
고로 보여 주면 즉각 보고, 들려 주면 즉각 듣는 것이 허공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自覺을 經에는 열반묘심(涅槃妙心)이라고 했습니다.
세존께서 사유를 하시다가 '제자들이 어떤 문제에 걸려 있는가?'를
알아차리십니다. 그리고 어떤 방편과 비유로 설해야 이해를 할까
생각하신 후 아난에게 흝어져 정진하는 제자들을 불러 모이게 합니다.
그런 후 그 법문에 가장 합당한 제자를 앞세우고 설법을 시작합니다.
스승은 제자들이 모르는 바로 앞을 가르쳐 줘야지 너무 멀면 이해를 못합니다.
작금에 선사들은 선문답을 해야 그럴듯 해보이기에 남들이 이해 할수 없는 말로
지혜 자랑하기 바빠서 상대가 어떤 경험을 했는지 살필 줄 아는 눈이 없습니다.
이런 것이 타심통 천안통에 해당하는지 모르겠으나 모두 見에서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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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분들이 보석을 만졌다가 보석인줄 모르고 버리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이것을 볼 줄 모르기에 찾아가면 '기도하라 염불하라' 엉뚱한 소리를 합니다.
선각자는 이런 것을 살펴 되찾아 주는 것이지 무슨 신통술이나 뾰족한 방편으로
가르쳐 주는게 아닙니다. 따라서 방편은 항상 대상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지 미리
준비 하는게 아닙니다.
예를 들면
상대를 만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말해 줘야지' 준비를 한다면 법문이 아니고
講義입니다. 작금에도 화두를 역시 그런 방식으로 주고있기에 안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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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소유상개시허망 역시 무상관입니다.
세존께서 수보리에게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다' 라고 했으니
이미 공을 체득했다면 佛事를 한다고 절을 짖거나 탑을 세워도 안돼고, 돌이나
흙으로 만든 불상에 절을 해도 안됩니다. 그러다 보면 다른 스님들은 물론이고
도반에게도 비난을 받게 될테니 어쩔수 없이 라도 절을 떠날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반대로 가고 있으니 왜그런가?.
대접받고 相 내는 명예욕 때문이니 중생심의 근본인 四相을 벗지 못함이지요.
달마스님은 소림굴에 있었고, 포대화상은 정처 없이 떠돌았고 한사자(寒山子)로
알려진 한산스님은 천태산에 은거하며 바위벽에 게송(寒山詩로 전해짐)을 남겼고
우리나라에도 나옹스님, 재가로는 부설거사, 김시습이 그러했습니다.
참고로 김달진씨가 역한 한산시(寒山詩) 권해봅니다. 수행자를 경책하는
구절이 많은데다 난해한 구절이 많아서 김달진씨의 지혜가 엿보입니다.
믄득, 몰록, 찰라, 첫소식때의 체감(體感)에 대하여 설명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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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소식때 양팔이 들려지고 너울거리는 이유는 찰라 간에 마치 진공의 무중력을
체감하기에 몸이 가벼워 저절로 양팔이 들려지는데 요즘은 설명하기도 쉽습니다.
마치 우주선 안에서 양팔을 벌리고 너울 너울 유영하는 모습과 매우 흡사합니다.
이에 관한 유명한 일화를 소개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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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오래된 사건이지만 너무나 뉴스에 크게 났던 사건이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됩니다. 1960년대 중반 어떤 수좌스님이 사제스님 두분과 함께 속리산
문장대 바위에서 뛰어내려 세분 모두 죽은 사건입니다.
당시는 그 이유를 몰랐는데 돌아보니 그분이 한소식 했다는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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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몸은 허공(솜털)처럼 가벼워 절대로 죽지 않는다" 고 장담을 했고 사제들
역시 사형의 경지를 인정했기에 따라 나섯던 겁니다. 흘러간 기사 꺼리지만
여기에는 그분의 견처가 담겨있지요.
가끔 신비주의를 좋아하는 호사가들이 티벳 고승들이 공중부양 한다고 하는데
그런 것 모두 공체득에서 나온 말이고, 기독교인들이 하늘로 들려진다고
"휴거" 를 말하는 것도 같은 의미라고 생각됩니다.
이와같이 경전에서 가르키는 글자의 실체를 모르면 이러한 착각을 하게 되지요.
살아있는 육신은 어떤 경우에도 자연의 물리적 현상을 벗어나지 못하나니 이미
光(빛)에서 전환된 물질(色)은 자연의 법칙대로 自然生 自然死(생노병사)입니다.
찰라간에 공중에 뜬 듯한 느낌, 그러나 空의 실체를 몰라서 벌어진 현상이기에
이 사건에 비춰보더라도 첫소식이 수행의 출발점 이라는 것을 알수가 있습니다.
진실로 구경각은 나와 대상이 空性(동일성품)으로 합일(合一) 될때 입니다.
고로 누구던지 여래를 보는 순간 " 아! 어찌 이다지도 나와 똑 같을까! " 하는
탄성을 지를 수 밖에 없기에 엉성하게 다른 말은 전혀 할수가 없습니다.
이때는 몰록이나 찰라가 아닙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매우 심각한 고독(孤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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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독한 마음은 어데서 오는가?
첫째, 아무도 내말을 믿어 줄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외로움
둘째, 마치 수미정상에 홀로 서 있는듯 적막(寂寞)한 고독감 (寂滅 인식)
그런 두가지 이유때문에 이대로 入滅하고 싶은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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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생각합니다
본래 이랬는데..
일체중생들이 이미 깨달음속에 있었건만 나만 깨치지 못했었다는 자괴감과
여러분 모두 여래요 부처라고 해도 내말을 믿지 않을테니 말해주고 싶은 마음
마저 상실되어 버리는 허탈감이 열락과 함께 이중 삼중으로 다가 옵니다.
첫소식때는 앙팔을 너울거리며 마치 어린아이처럼 좋기만 했는데,,
오죽하면 나를 이끌어준 스님에게도 말할 수 없는 상황에 봉착합니다.
왜? 스님의 견처를 부정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즉설을 못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대화속에 묻어 나도록 했습니다.
빛(光)으로 옵니다. 빛! 느낌은 파동이요, 보여짐은 빛(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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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초등생도 광합성을 알겠지만 세존당시 광합성이라는 단어는
아무도 이해를 못했겠지요. 光의 부디침(충돌)에 의한 결합작용.
비유하면
특수카메라로 풀잎등 생명체를 찍었을때 물질의 경계는 보이지 않고
그 주변을 빛으로 감싸고 있는 현상과 비슷합니다.
스님과 13년이 지난 지금도 한달에 두어번씩 만나고 있는데 만날때 마다
이렇게 말하십니다. "석가모니 이래 대각을 성취한 분이 몇이나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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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번뇌가 끊어지고, 끊어 졌다는 생각마저도 없어야 된다'고 말하며
그렇기 때문에 '깨달았다고 생각하면 깨달은 것이 아니다' 라고 합니다.
말로는 무슨 소리를 못할까요? 세존당시에도 제자가 항의를 합니다
"세존께서는 시비하지 마라 하시면서 왜 항상 잔소리를 하십니까?."
'번뇌가 끊어졌다는 생각 마저 없어져야 한다' 이런 말은 책에 나오는
글귀라 누구나 아는 소리요, 실제 그렇게 되었다면 자신의 경계를
보여야지 책에 써잇는 글귀야 누군들 말못할까요.
卽見如來는 번뇌가 완전히 끊어졌는가를 검증하는 가장 중요한 잦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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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크게 보면 두문이나, 밝아지는 과정까지는 세관문(三關門)인데
三門이 모두가 頓門이라 돈오돈수도 아니고 돈오점수도 합당치 않습니다.
保林으로 깨달음을 굳건히 하겠다고 하는 것은 空에 안주하는 수행입니다.
따라서
누구던지 이같은 논리로 頓 漸을 주장하면 세존의 법을 비방하는 것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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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에 관해서는 이미 밝혔기에 여기에서는 날자와 검증의 기연을 소개 하지요.
2000년 8월 9일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처음으로 '南山' 이라는 법명을 받고 1년후
2001년 9월 부터 수련회에 동참 했습니다.
2006년 7월 21일 계족산(鷄足山) 비래사(飛來寺)에서 성오스님을 만나고 49시간 후
2006년 7월 24일 오전 7시경 물컵이 식탁에 부딛는 소리에 믄득 空을 체득 합니다.
2007년 7월 14일 오전 11시 55분 여래를 보았습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 모두 이렇게 왔구나." 하는 걸 보고 알게 되는데 知見이지요.
반야는 지혜를 말하지만, 여기에서는 智慧가 아닙니다. 알 지(知) 입니다.
두번째 관문 역시 사유하는 가운데 체득하게 되는데, 공이 밝아지는 현상을 말하지요
2006년 10월 중순 마치 대나무 속 얇은 막 같은 것이 눈동자에서 벗겨지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光明의 빛으로 온 세상을 뒤덮는데 이때도 몰록이 아니고
빛과 함께 동행하며 한동안 지속됩니다. 돌아보니 1980년대 후반으로 이미 20년 전에
경험했던 때와 같았습니다.
보충설명 하자면 온몸에서 광채가 나는 현상은 신라때 백월산에서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 목욕후 온 몸에서 광채가 났다는 상황과 몹시 비슷합니다.
가끔 깨친분들이 心淸淨을 말하는데 心淸淨이 확실하게 됐으면 色淸淨이 되기에,
色淸淨이 되었다면 心淸淨은 따로 설명할 가치도 없이 역부여시 입니다.
마치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와 같습니다.
그래서 空이 밝아지면 법에서 해탈한다고 세존께서 말씀 하셨던 겁니다.
'일체유심조' 에 입각해서 화엄신중과 팔부신중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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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에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중으로 천, 용, 야차, 아수라, 건달바, 긴나라,
가루라, 마루하가를 팔부신중이라 하지만 인도 신화에 나오는 神들 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기억은 물론이요 잠재의식에도 없는 神들 입니다.
'일체 유심조' 를 앞세운 불교가 참으로 기막힌 일입니다.
신중의 가호가 있어야 성불이 가능 하다는 말은 인정하지만 우리나라 사람은
팔부신중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인도인들 의식속에 있는 토속신 입니다.
그리스에는 제우스 신이 있고, 이스라엘에는 야회신이 있듯이, 나라와 지역마다
전통적으로 전래되는 가운데 무의식속에 입력된 신들이 있습니다.
이런 글이 이대로 전승되고 있다는 것은 구경각을 이룬 분이 없다는 반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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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지요,
서양사람은 죽을때 날개단 천사가 오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사람은 도포입고
갓쓴 저승사자가 옵니다. 즉 살아있을때 보고 듣고 기억된 것과 조상 대래로
유전적으로 DNA, 세포에 입력된 정보들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천 용은 그런대로 이해가 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크게 작용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건달바 긴나라 가루라 마후라가는 아무리 생각하고 외워도 七識 八識으로
전도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천지신명과 삼성각에 있는 三神이 호법신중입니다.
우리 민족은 옛부터 죄를 지으면 " 하늘이 내려다 본다,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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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했지 '하느님이 무섭지 않느냐, 하느님이 내려다 본다' 하지 않았습니다.
즉, 텅빈 허공 자체가 두려운 존재로 하늘 외에는 크게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자연에 해당하는 有情 無情이 도와 줘야 성불이 가능하다는 뜻이지요.
계를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하늘 아래 살아있는 생명을 害하지 않고
존재하는 그대로를 존중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경험을 말하지요
어느때 산에서 땅벌집을 발로 밟았습니다. 순식간에 수십마리의 벌떼가 하늘로
솟구치듯 날아 오르더니 곧바로 전폭기가 수직 하강하듯 제 머리를 향해 내려
꼿히는데 전 도망갈 생각도 못하고 그자리에 마치 장승처럼 멈춰 섯습니다.
몸을 움추리느라 두손을 모았는데 마치 합장하는 자세가 되었는데 머리카락속으로
파고 들어오는 놈, 주변을 휘도는 놈, 벌이 크다 보니 날개짖 바람이 대단했습니다.
신기하게도 단 한마리도 쏘지를 않는 겁니다.
저도 모르게 하던대로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念을 하고 있었구요,
수년간 매일 같이 3~4시간 이상 염불을 했던 습관 때문이였을겁니다.
1980년대 초 중반
괴로운 마음을 달래려고 산을 다니며 저도 모르게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했었고, 그러자니 자연스레 등산로가 아닌 숲속을 다니게 되었지요.
길없는 산속이라 멧돼지도 수없이 만났지만 해친다는 생각은 전혀 안했습니다.
새끼들이 대여섯 마리 제 앞으로 지나가는 것을 보고 '아 예쁘구나~" 생각하는 순간
집채 만한 어미가 새끼의 뒤를 따라 가면서 저를 힐 깃 쳐다보고 그냥 가곤 했지요.
어느 때는 발등 위로 뱀이 지나가기도 하고..
그리고 어느때 숲속을 가던중 갑자기 한기가 느껴지며 오싹하고 소름이 돋아나며
두려웠습니다. 되돌아 갈까 하다가 만일 여기서 후퇴를 하면 다시는 이길을 못갈 것
같아 멈춰 섯습니다. 그런후 바위에 가부좌로 앉아 마음속으로 생각(念)했습니다.
" 살아오는 동안 남을 해치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그대들이 누구인지는
모르나 어찌하여 나를 두렵게 하는가?." 그러자 곧바로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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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한기가 사라지고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면서 온몸에 돗았던 소름이 눈녹듯
사라지고 음습했던 기운도 없어지고 동시에 주변이 밝아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훗날 아함경에서 비슷한 예를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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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에서 정진하던 제자들이 무서워 세존을 찾아왔을때 세존께서 하신 말씀.
모든 것은 자아를 고집하기 때문에 텃세를 합니다. 제자들이 수행한다고
머물고 있으니 숲속의 정령들이 자신의 터전을 뺏기지 않을까 우려하는 마음에
제자들의 마음을 두렵게 해서 내쫒으려고 했던 겁니다.
이때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 모든 것은 잠시 머룰다 갈 뿐 어느 누구도 내 것이 없다.
우리 역시 수행을 위해 잠시 머물다 갈 것이니 염녀하지 마라." 이런 내용입니다.
처음에는 숲속의 정령들이 수행자들이 온다고 하니 반갑게 맞이 합니다.
그러나 하루 이틀, 한달 두달 시간이 지나자 그들은 걱정을 합니다.
' 이대로 계속 우리들의 터전을 뺏으려고 하는 건 아닌가?.'
인간은 물론 생명체로 살아있는 유정(有情)들은 똑같습니다.
친구나 친척도 손님으로 왔을때 처음에는 반가워 하지만 몇날이 되어도 가지 않으면
'눌러 살려고 하는가?' 걱정을 하고 쫒아 내려고 박대를 하게 됩니다.
항상 머물때와 떠날때를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 마음을 일으켜 상대가 걱정하는 바를 알아채고 편하게 해주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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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만나는 분들에게 말합니다.
영가던 사람이던 심지어 무정물 까지도 살아있는 사람 대하듯 하라고 합니다.
지난 10월 11일 오후 17년 타고 다니던 차를 폐차 시켰습니다.
가기 전에 차의 안밖을 깨끗히 하고 한동안 운전대를 쓰다듬으며 그동안
나를 위해 발이 되어준 것을 고맙게 생각하며 이제 또 다른 용도로
새롭게 태어날 것이라고 말해줬습니다. 무상은 항상 나와 함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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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心傳心은 사람보다 자연이 더 잘통합니다.
인간은 언어로 소통을 하지만 자연은 교감(파동)으로 소통합니다.
그래서 언어는 상대를 속일 수가 있지만 파장은 속이지 못합니다.
따라서 대상과 하나로 합일된 사람은 언어를 듣는게 아니고 意中을 봅니다.
예를 들지요
"아름 답습니다" 하면 좋아하지만 영어를 모르는 사람에게 '뷰티풀' 하면
소통이 안됩니다. 그러나 자연은 언어가 달라도 그말이 의미하는 파동을
감지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를 제기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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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진언은 해석하는게 아니다' 하더군요. 그러면 산스어를 사용하는 나라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진언(眞言)은 글자 그대로 참된 말 입니다.
참된 말의 뜻도 모르고 앵무새처럼 소리만 내면 되는가?.
물론 진언은 집중과 뜻 두가지가 포함되어 있지만 하나를 간과한겁니다.
전하고자 하는 의미가 교감이 되어야 동일 파동에서 교감(交感)이 됩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계를 지키지 않으면 유정은 물론 무정물에게 까지 害 함을 받을수가 있습니다.
이유없이 바윗 돌을 던져 부수는 사람도 있고 나뭇가지를 함부로 꺽는 사람도
있습니다. 산만한 행동은 돌뿌리에 발가락을 다치기도 할것이요, 풀끗에 손을
베이기도 할겁니다. 또 별로 험하지도 않은 곳에서 발목을 다치기도 합니다.
만사에 신중하고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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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山이란 법명도 그렇지만 山과 인연이 많은듯 합니다.
경기도 양주 소요산 남쪽자락 매봉 아래 산을 보호하는 마을'保山里' 에서
태어나 세살 되던해 서울 南山 밑 한남동에서 6.25 까지 살았습니다.
어려서 부터 몸이 허약해서 그런지 약해 밤마다 꿈을 꾸면 암흑같은 터널속으로
힘들게 빠져 나가는 꿈과, 온몸이 땅속으로 커져 들어가는 꿈의 연속이였습니다.
돌아보면 죽음과 胎로 드는 꿈 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연유로 초등학교 3학년
열살 남짖때 부터 이미 죽음을 생각했고 철이 난 후에도 20살을 넘기지 못할 것'
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
6. 25후 혼란기 교실도 없는 나무에 흙판을 걸어놓고 공부를 가르치던 때 몸이
약해 친구들과 부대끼다 보면 오후에는 녹초가 됐고, 그러다 보니 학교가 싫었고
4학년 여름방학이 끝났을때 부터 학교가 아닌 집에서 3kM 떨어진 세갈래 물길이
합쳐지는 三川里 라는 강처럼 넓은 개울가 나무 밑에서 놀다가 학교가 끝날 무렵
집에 오곤 했었는데 당시는 선생이나 부모나 살기 바빠서 신경도 안쓰던 시절이라
그 버릇은 초등학교 졸업때까지 여름방학이 끝날때마다 계속되곤 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집안 형편이 좋아지면서 서울로 유학까지 가게 되었지만 당시는
한일회담 반대 데모로 학교는 늘 휴강 상태로 공부하는 친구들 몇 몇을 빼고는
모두 놀기에 바빳지요. 그때 배운 것이라곤 당구와 춤 바둑등 오락 잡기였습니다.
당구는 500이상 1000까지.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는 늘 '이게 아닌데,, '
왜 별로 좋지도 않은 과거를 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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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제대후 1년여, 어느날 밤 집에 돌아와 번드르한 정장 양복을 벗으며 거울속에
비쳐지는 내 모습을 보았습니다. 반성을 하면서도 결심하지 못하는 못 난 모습이
싫어서 그날 결심을 했습니다. "잡기를 끊겠다" 그때가 1977년경 가을이였습니다.
결심하기 까지에는 시간이 걸렸지만 실행에 옮길때는 단 번에 끊었지요.
고등학교때 부터 피던 담배까지도.. 그때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남들에 비해 잘하는 것도 없으면서 이까짓 것 하나 내 마음대로 못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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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전하지 못한 생활이 싫어서도 그랬지만 돌아보면 어린시절에 나약한 몸 때문에
오랜동안 죽음을 생각하며 삶에 무상함을 조금 일찍 느꼈다고 할까요,
그런 이유로 불교서적을 자주 보게 되었고, 그때문에 당시 해인사에 다니던 지인이
해인지 1년 분를 보내주웠고 그후 제스스로 십수년간 구독을 했었지요..
깨달음에 있어서 살도음망이 장애 하지는 않습니다.
깨닳기 전은 전생이라고 세존께서 앙굴리마라에게 '금생에는 죄가 없다' 하셨듯
전생(과거)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계는 아라한과에 들었을때 부터 중요합니다.
經에도 나옵니다.
'다섯명의 아라한이 길을 가는데 독용이 길을 막습니다. 그때 허름한 비구가
지나가니 독용이 길을 비켜 줍니다. 이것을 본 아라한들이 놀라서 묻습니다
" 그대는 어떤수행을 하십니까?" 비구가 답하길 " 저는 戒만 지킬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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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내용으로 보아 아라한들이 계를 등한시 했다는 반증이 경에 나옵니다.
작금에도 한소식하고 '모두가 공하다' '인과도 공해서 없다' 하면서 대범한 척
막행막식하는 경우가 있는데 매우 잘못된 일이지요.
세존께서 제자들에게 강조하십니다.
" 나도 바라제목차를 송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너희들은 하지를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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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를 지키지 않으면 올바른 사유가 되지 않습니다.
팔정도의 정견이 초견성에 해당하고 그후 정어, 정업, 정명은 지계입니다.
재가자는 동창회나 사교모임등 사람이 모이는 곳은 일체 피해야 합니다.
"무위법을 닦으려거던 먼저 성품을 본 후에 대상에 대하여 마음을 쉬어라"
성품을 보았다 해도 본 자리를 찾아 유지하기도 어려운데 하물며 그 경지에서
육경(대상)에 끌려가지 않고 마음을 쉰다는 것은 재가자로는 더욱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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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년 전 집사람에게 유마경을 건네주며 한번 보라고 했습니다.
사실 유마경은 환희심 나는 대목이 많지만 어느 대목에 걸렸는지 밤새도록
눈물을 흘려가며 보았다더군요. 그리고 어느날 허실스레 지나가는 말투로
" 땅끗이 어데야?." 하고 물었습니다.
가끔 친구들과 사담중 퀴즈처럼 물어 보았지만 즉답하는 사람은 못봤습니다.
대부분 한참을 생각하거나 해남 땅끗마을을 생각하는데
집사람은 '싱거운 소리 하지 말라'며 발바닥을 내려 딛으며 "여기" 하는 겁니다.
조고각하(照顧脚下)는 글자가 아니고 비파사나를 함축한 말로 현상계를 볼 줄
모르면 말이 머리속에서만 굴러 갑니다. 이렇게 안다해도 열반은 아직 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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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족산 비래사, 첫공양은 수자타, 검증은 가섭, 형상 없는 염라와 문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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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깨달음은 마음은 물론이요, 육신까지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2007년 7월14일 토요일 오전 11시 55분 즉견여래 후 계속되는 열락은 3일간
지속 되었는데 속세라 그렇지 산중에 있었다면 일주일 이상 지속 되었을 겁니다.
그날 오후 3시경 수자타 금감심 보살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 저녁공양을 올리고 싶으니 6시경 오시라는 겁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지요.
구경열반을 自覺하고 첫 공양을 '수자타' 에서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화장실에 앉았는데 마치 몸속에서 더러운 찌꺼기가 나가듯
한없이 빠져나가는데 물을 세번이나 내려가며, 가벼운 몸은 더욱 가벼워졌습니다.
그후 스님은 물론이고 저를 만나는 사람들에게 구경각은 세포가 바뀌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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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으로 보면 바뀌는게 아닐테고 業力(세포, DNA)에 끌려가지 않는 거겠죠.
그리고 삼일 후
꿈을 꾸는데 스님 세분이 한분은 삽으로 땅을 파고, 한분은 삼태기를 들고
한분은 씨를 뿌리고 있었는데 삽으로 땅을 파던 스님이 저를 바라보더니
"깨달음도 땅을 파듯 이렇게 한삽 한삽 파다 보면 언젠가 이룰수 있겠지요?"
하는 겁니다. 그래서 곧바로 말했습니다. " 여보시오 허공이 삽질로 파지겠소?."
그러자 놀라는 눈빛으로 '잠시 기다려 주십시요' 하고 나갔다 오더니
'큰스님께서 뵙자고 하신다'며 사방이 똑같은 단칸방으로 안내를 하더군요.
정면으로 문이 하나 있고 좌측 측면으로 작은 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정면 문을 여니 좌측 천정에서 우측 방바닥을 향해 모기장 같은 그물이 45각도
사선(斜線)으로 드려져 있더군요,
" 왜 그물을 쳐놨는가?" 하며 손으로 그물을 들치고 그물이 없는 좌측에 앉았습니다.
그러자 좌측 문이 열리며 허리가 구부정하고 키가 큰 백발의 노스님이 들어오더니
" 방금전 내시자에게 하셨던 말씀을 다시 해보십시요."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그대로 다시 말해주었지요. 그러자 노스님이 벌떡 일어나더니
" 이쪽으로 앉으십시요" 하며 자신이 앉았던 자리를 내주며 바꿔앉기를 권했고
제가 자리에 앉자 곧 바로 삼배를 하는 겁니다.
그러자 전 이렇게 말했습니다. " 좁은 방에 그물은 왜 쳐놨습니까? 거두시요 "
노스님이 일어나 그물을 직접 걷어 시자에게 건네주는 찰라 꿈에서 께어났습니다.
큰 키에 구부정한 허리 깡마른 얼굴에 길게 느려진 눈썹은 가섭존자의 모습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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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몇일 후 (일주일 가량)
잠자리에 들기 전 잠시 가부좌로 앉았는데 마치 하늘(천정)이 열린듯 휭한 바람이
주변을 감돌더니 형상없는 무엇인가 제앞에 나타나 묻는 겁니다.
"그대가 진정 깨닳았는가?. 만일 거짓이라면 당장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요."
순간적으로 심장이 멋을듯한 상상할수 없는 두려움이 업습 하더군요.
그러나 자신이 있었습니다. " 그렇다 나는 확언 한다. 나를 시험하지 마라!."
경에는 범천으로 나오지만 그것은 인도 신입니다. 이런 현상은 자신의 내면과
자문자답으로 비유하면 죽을때 자신의 죄를 비춘다는 명경대와 마지막 담판
입니다.
' 나를 시험하지 마라' 그러자 곧바로 엄습했던 기운이 사라지고 마치 허공처럼
편안해 지는 겁니다. 열반자각(涅槃自覺)을 모르면 안되는 현상입니다.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명경대) 사라지니 찰라간에 육신이 허공과 계합되기에
염라가 나를 찾지 못하는 거지요.
누구에게 검증받는 것 보다 스스로에게서 자유로워 져야합니다.
구경각은 무사승인데 싯달타나 과거 칠불이 아니면 누가 검증을 해준단 말입니까?
어느때
숭ㅇ스님에게 전법게송을 받았다고 족자를 펴놓고 자랑하던 사람을 만났습니다.
제가 묻기를 " 그분이 깨쳤는가?" 제가 보기에 유명세는 있지만 전혀 아닙니다.
어느때
모선사 조실방에 단둘이 마주 앉았을때 제앞으로 보이는 벽에 스승이 전해 준
전법게송 족자가 걸려있더군요. 참으로 한심해 보이더군요.
2001년
저와 금강경 해석을 두고 다퉜던 학감스님이 계시던 때 당시 강주로 계셨던
스님께서 법문 중에 하신 말씀 " 죽을 때 보자" 당시는 몰랐지만 돌아보니
한소식 하신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자문자답에서 당당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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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참선하는 분들과 이야기 하다 보면 이렇게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 지난 생각은 다 잊었습니다." 흔히 定에 드는 것을 마치 치매로 착각 하는데
전혀 모르는 소리입니다. 색성향미촉법이 허공 성품의 발현이기에 텅빈 가운데
만물을 포섭하고 있습니다.
" 무위법을 닦으려거던 먼저 성품을 보고 대상에 대하여 일어나는 마음을 쉬어라"
여기서 쉰다는 뜻도 어렵습니다. 대상을 보되 현상계를 국집하지 않는 겁니다.
국집 : 어느 한쪽이나 어느 한편으로만 국한하여 생각하거나 집착하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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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통찰에 해당할겁니다. 따라서 양면을 보기에 어느한 쪽에 치우치치 않는
마음을 뜻하기에 중도에 해당하고 경에 의하면 아란나행에 해당할겁니다.
대상에 끌려가지 않으려면 꿈에도 속지 않아야 하는데 치매 같은 소리를 하는
이유는 성품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착각입니다.
마지막으로 경험에 비추어 깨달음에 관하여 몇가지을 조언(助言)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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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계를 논하지 않겠습니다. 스스로 좋지 않다고 생각되는 습관( 버릇)을
끊어야 합니다. 의지와 각오를 다져주는 가장 중요한 밑거름입니다.
2) 수행은 새벽이 좋습니다. 사찰에서 4시 기상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요?.
정해진 시각은 지키되 그날 일정에 맞춰 늘이거나 줄이는 것은 괜찮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미루거나 건너뛰면 안됩니다.
그러나 재가자는 가족, 특히 부부간에 어느 한쪽에서 장애가 있으면 즉시
중단하고 때를 기다려 다시 하십시요, 살아있는 부처가 돌이나 나무로
깍은 부처보다 중하니 순리를 거스르면 역효과가 납니다. 그러므로 가급적
몰라야 하니 라훌라의 밀행 역시 아버지인 세존이 모르게 하는 겁니다.
따라서 신중의 가피가 따로 있는게 아니고 주변이 도와 주는게 가피입니다.
가피는 깨달음을 향한 의지와 각오에 비례합니다. 가끔 스님들 말씀 중에
" 불사기도를 하면 필요한 만큼 도와 준다."
"원하면 이루워진다" 발원이 약하면 장애가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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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월 돌아보면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넘치지도 않고 모자르지도 않게 절약하면 고난을 피할 만큼 도와 줍니다.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추우면 몸을 웅크리듯 그것이 평생을 가더라도..
어려움이 닥쳤을때 발원을 하십시요
이문제를 해결해 주시면 남은 생명은 깨달음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공양게 처럼,, 이몸을 깨달음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게 기회를 달라고,,
사람은 속일수 있어도 허공은 속이지 못합니다. 진실하면 됩니다.
많은 분들이 체면 때문에 실패를 합니다. 체면을 버리면 망하지 않습니다.
수행도 비슷합니다.
가식, 체면, 허세, 거사들이 다가오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도 그러합니다.
3) 선지식을 찾아야 합니다. 셋 이상 단체로 만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안됩니다.
'내가 어느 스님을 안다' 유명스님 안다는 자랑꺼리는 될지 몰라도..
그래서 절밥 오래 먹으면 이런 폐단때문에 수행과 점점 더 멀어지게 됩니다.
예를 들지요
어느때 지역 도반들과 함께 2000년대 초 습의사를 했던 스님의 은사스님을
찾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저런 대화중 잠시 좌정을 하시더니 묻기를
"제가 어느 곳에 있었지 아시겠소?" 모두 어리둥절 했지요.
제가 바로 옆에 있었는데 저를 쳐다 보시기에 "모르겠습니다."
그후 모두 방에서 나와 삼삼오오 흝어져 거닐던중 스님이 제옆쪽으로 오시더니
" 거사님은 가능하십니다." 그때 알아 차렸어야 하는데 무슨 영문인줄 몰랐지요.
말귀를 못알아 들으면 화두가 되는데,, 이해가 안되는 말은 모두 화두입니다.
"왜 그런 말을 했는가?" "이게 무슨 소리인가?" 卽 "이 뭣꼬?" 가 되면 되는데..
다음날 아침 일찍 사시예불시간에 맞춰 상단에 올릴 과일을 사들고 갔습니다.
스님이 놀란 눈빛으로 맞이 하셨고,, 저와 단둘이 사시예불을 마친 후 공양주가
밥상을 스님과 따로 차렸는데 스님께서 옮기게 하시고 겸상을 했지요.
그리고 오후 3시가 넘도록 3시간 이상 대화를 했습니다.
스님께서 기억은 어렵겠지만 만나면 곧바로 알아보실테고 매우 반가울텐데,,
현재 모총림 유나로 계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3년 후 모 선원이 있는 사찰에서 새벽예불에 선방 스님들이 모두 참석
하셨는데 예불이 끝나고 나오던 중 말없는 가운데 마주쳤습니다.
재가 신도들이 여럿 있었는데 주지스님께서 저와 일행 셋을 향해 " 따라 오십시요"
선방스님들과 양쪽으로 마주 앉아 바루공양을 하게 되었는데 훗날 다른 스님에게
물어보니 절법에도 없는 특이한 일이라고 하더군요.
하긴 탱화 점안식에, 스님 천도재도 했으니 특이한 일은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재가 특히 수련 둥문님들 께서 선지식을 단체로 찾아가는 경우가 있으시면
지체하지 말고 다시 찾아가십시요. 작은 인연을 크게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선지식과의 대화는 자신도 모르게 익어갑니다.
왜그런가? 별스런 대화가 아닐지라도 청정한 파장으로 교감되기에 마음으로는
찾아지지 않지만 육신은 기억합니다. 마치 생각으로 허공을 가름할 수 없듯이
생각은 항상 空(육신)을 장애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쉬어라, 내려 놔라" 하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대화가운데 걸려들 수 가 있습니다.
화두는 언제, 어느 때, 누구의 말에 걸려들게 될지 알수가 없습니다.
만일 경허스님이 유명하지 않았다면 [코구멍 없는 소]에 깨쳤다고 하면
모두들 비웃었을겁니다. 선지식도 아니고 한 낮 밭갈던 농부의 말에 깨쳤다니..
저 역시 처음만난 스님이 "거사님 훌륭하시오" 하는 말에 걸려 들었 듯이
스님은 저에게 화두를 주지 않았습니다. 의정은 스스로 거려드는 겁니다.
" 도대체 뭐를 보고 그런 말을 했을까?." 왜? 왜? 왜? 의 연속으로 빠집니다.
의정은 무엇이고 어떤 작용에 의해서 깨쳐지는가? 를 설명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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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깊어지면 생각이 몸으로 들어가고, 생각이 몸으로 들어가면
생각과 관계없이 몸이 작동하기 시작하는데 이때부터가 의정입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몸이 곧 空이라 했듯이 空이 나와 같아 지려고 작동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생각으로 가름 할 수가 없는 상태가 됩니다.
따라서 의정은 공체득 후(깨친 후)에나 알수 있지 당시에는 전혀 모릅니다.
이렇게 설명을 해줘도 때가 되면 걸려듭니다. 그래서 대화가 중요합니다.
4) 깨달음을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요,
"중생이 어떻게 깨닳겠는가" 자책하는 말은 자성을 어둡게 만듭니다.
저와 함께 차를 타고 동문회에 다닐 당시 도반들에게 자주 말했습니다.
" 나는 중생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중생이라는 생각하지 말고
금생에 필이 깨치겠다는 각오를 하십시요."
사실 스님들을 여럿 만나 보았지만 깨달음에 대한 열의가 별로 보이지
않더군요, 관음사에 있을때 겨울방학을 이용하여 잠시 승가대 3학년
늦깍기 스님이 상좌를 하겠다고 왔었던 적이 있었는데 승가대에도 동아리
모임이 있는지 '사진을 찍는다' 고 하기에 "스님 출가를 왜 했소?" 하고
나무랐던 적도 있지만,,
싯달타도 여섯 스승을 만났습니다.
말로는 "일일신우일신(日日新又日新)" 하면서 어제도 오늘 같고 작년도
금년처럼 똑같은 수행에 머문다면 어느 세월에 깨달음을 얻겠습니까?
분발해야 합니다. 먹물 옷이나 승복을 입었다고 불자가 아닙니다.
깨달음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佛子가 아닙니다.
저는 2000년 해인사에 처음 발을 들일때 성철스님보다 자운 스님 사리탑에
먼저 삼배를 올린 후 성철스님 사리탑에 삼배를 올리며
"금생에 꼭 깨치겠습니다." 다짐을 하고 山門으로 들어갔습니다.
왜냐하면
성철스님보다 1년전 입적하신 조계종 최초 단일계단 전계화상으로 계셨던
자운대율사의 행장기와 진표율사의 박참법을 보면서 각오를 다졌었기에
" 내가 만일 절에 발을 들이면 필히 깨칠 것이다." 그런 뜻에서 였습니다.
5) 마지막으로 초기경을 정독하십시요. 이해도 안되는 반야경보다 기초가
단단해야 삿된 길로 빠지지 않습니다. 별 것 아닌듯 하지만 중요합니다.
섯부른 어록이나 반야경은 자칮 여우같은 아름알이나 만들어 줍니다.
예를 들지요
어느때 성철스님이 옷이 올라 계곡에서 몸을 씻고 계셨는데 지나가던
비구니스님이 "깨친 도인도 옷을 탑니까?." 했다가 혼난적 있다더군요,
성철스님께 그런 말을 할 정도였다면 비구니 법납이 제법 될 겁니다.
이렇게 스님도 깨달음에 대해서 착각을 합니다.
스님들도 그럴진데 재가자들이야 말할게 없지요. 어느때 재가자들이
모여 앉아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깨달으면 벽도 통과 한다는데,,"
그런 착각이 머리속에 있는 한 깨달음과는 억겁으로 멀어집니다.
이런 이유는 기초가 부실하거나 내면속에 기적을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요 기적을 바라는 마음속에는 神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로 범천이던 염라던 마왕이던 잠재의식속에 숨어있는 神의 노예에서
벗어나야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가 되어 뒤집힌 생각에서 벗어나
구경열반에 도달할 수가 있습니다.
하긴,, 경허스님도 참선곡에 이르길
"참선 잘한 저 도인 서서 죽고 앉아 죽고 앓도 않고 선세하며 오래살고
곧 죽기를 마음대로 자재 한다" 했습니다. '아프지도 않고 오래산다?'
배탈로 입적하신 세존을 모독하는 말 아닌가요?.
조계종 스님이나 신도라면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금강경 사구게를
평생 외우고 살았으면서도 막상 현실에 부닥치면 신비한 것, 기적에
눈이 멀어 좌탈입망하면 마치 生佛인양 죽은 송장에다 금칠을 하고
부처님 모시듯 하는 중국 사대주의 불교에 물든 것은 아닌지?..
불교라는 이름 하에 도처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세존께서는 " 나는 사는 것도 바라지 않고 죽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生死에 관심이 없다는 뜻입니다.
육신은 죽으면 썩은 나무토막과 같은 것, 너희들은 나의 장례에 참석하지
말고 수행에 전념하라고 하셨던 세존의 말씀은 고사하고 살아 생전에도
제자들에게 "나를 보려거던 法을 보라, 法을 보는자 如來를 본다." 하셨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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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착각때문에 살아생전 유명세를 떨쳤던 스님들이 죽을때 사리를
먹는다는 둥, 좌탈입망을 보여주려고 제자들이 이불로 둘 둘 말아 앉혀
놓는다는 등, 웃지 못할 일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육신은 깨달은 부처나 중생이나 똑같이 생노병사를 피할수 없고 오로지
사대가 허공과 같아지는 涅槃을 自覺하며 寂靜入滅 외에는 없습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깨쳤다는 분이 법문하다 말고 중간에 눈감고 합장하고 나무아미타불을
구성지게 송하는걸 보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미 아미타불의 화신인줄 모르는 소치요 또 생사가 없다, 不來 不去라며
오고 간바가 없다 했는데 어느 곳으로 돌아가 귀의를 한다는 것인지?
두팔을 흔들어 걸림이 없다면 귀의 할 곳도 돌아 갈 곳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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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중도를 말할때 유교의 중용도 아니고 어떤 공간에서 중간 지점을
말하는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이런 복잡한 이론 배격하고 쉽게 말하지요
갓(邊)에 닿지 않으면,, 부디치지 않으면 중도입니다.
대단한 것 처럼 말들을 하는데 간단히 말해서 空을 뜻하는 겁니다.
이해가 안된다면, 오온개공, 색즉시공 공즉시색 하면 이해가 되겠지요.
左三三 右三三 하니 前三步 後三步로 답을 하며 제자리 걸음을 알아채고,
또 간혹 '오고 간바가 없다'고 하니까 말뚝 처럼 제자리에 있는 걸로
이해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어떤 분은 " 돌아 갈 곳 없는 곳으로 돌아 간다" 하더군요.
이런 것은 모두 한소식한 지혜로 이론에 꿰맞춘 대답입니다.
제가 말하지요
삼계를 한없이 휘돌아 다녀도 오염된 중생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시 쉽게 설명하지요
염라의 칼날이 아무리 날카로워도 한치 앞에서는 내몸을 베지 못하니
그렇다면 한치 앞과 십만 팔천리 밖에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 허공은 간극이 없다!."
말뚝처럼 있는게 아니고 허공이 내집이라 중생이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던 함께 하기에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이라고 하는 겁니다.
석가모니는 깨달은 성자를 뜻하는 말이지 '고다마' 가 아닙니다.
눈은 실상을 보고, 귀는 소리를 듣고, 코는 냄새를 맞고, 혀는 맛을 알고,
身은 감각을 알고, 이 모든 것을 보고 아는 것을 知見이라 하니 知見은
智慧를 넘어서 있는 것,
고로 반야바라밀(智慧)에 의지하여 확실한 知見을 얻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보고 듣는 것 외에는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가 있는 겁니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사족을 달자면 오분 법신향에 나오듯
계정혜 삼학을 닦아서 해탈을 하고, 解脫知見을 自覺할 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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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만나는 분들에게 "지금 부터 집중은 다르다" 고 말합니다.
"온 몸으로 집중하라!" 여섯매듭(감관)을 풀어야 가능한 수행입니다.
설명 하자면
보는 것에 집중하면 귀가 어두워지고
듣는 것에 집중하면 눈이 어두워지고
意(생각)에 집중하면 눈귀가 모두 어두워 집니다.
보고 듣고 맛보고 느끼고 아는 여섯감관이 동시에 작동을 해도
여러분 모두 각각으로 알수가 있지 않습니까?. 이겁니다.
이해가 잘안된다면 다시 설명해 보겠습니다.
불이 났습니다.
눈은 불을 보고, 코는 타는 냄새를 맛고, 피부는 뜨거운 것을 느낌니다.
법성게에서 말하는 '잉불잡난격별성'을 멀리서 찾지 마십시요.
모든 것이 이렇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입으로 음식이 뒤섞여 들어가도
뼈와 살, 근육과 지방 모두 제 갈곳으로 찾아가듯 여섯감관도 그러합니다.
고로 성품을 보았다면 六根을 풀어야 올바른 집중이 됩니다.
내몸을 풀어야 대상(法)과 함께 모두가 空함을 얻을 것이 아닌가?
초점 없는 눈은 모든 것을 볼 것이요
집중 없는 귀는 모든 소리를 들을 것이다.
눈과 귀는 好 不好를 가리지 않으니
이것이 관자재 보살의 눈이요, 관세음 보살의 귀입니다.
2018년 10월 17일 草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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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컴이 없음을 탓하지 않지만,,, 마무리가 너무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여러 경로의 우연아닌 인연으로 계기가 되어, 글을 읽고, 댓글 남깁니다. 올리시는 장문의 글(언젠가 느꼈던, 또는 읽었던것 같은) 잘 읽고 있습니다.
(분별/판단하는 ego(자아_오감/생각/감정)은 어떠한 화두에도 망상은 떨어지지 않아, 스스로 답없는 화두 만들어 나날(자각몽에서도)을 보내고 있습니다. ^^;)
고맙습니다!
구경각이 무엇인가? 대적광전 기둥마다 써져있는 글귀를 인용하며 보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