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중국 고전 삼국지에서는 수많은 등장인물과 명대사, 명장면이 나오는데요, 특히 삼국지에서 유래한 고사성어들이 현대에 이르기까지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삼국지에서 유래한 고사성어들을 모아보았습니다.
계륵(鷄肋)
▶ 먹자니 먹을 것이 별로 없고 버리자니 아까운 닭갈비란 뜻.
① 무엇을 취해 봐야 이렇다 할 이익은 없어도 버리기는 아까움의 비유.
② 닭갈비처럼 몸이 몹시 허약함의 비유.
▶ 鷄 닭 계. 肋 갈빗대 륵
▶ ① 삼국 정립 시대가 나타나기 1년 전(219년)인 후한(後漢) 말의 일이다.
유비 (劉備)가 익주(益州)를 점령하고 한중(漢中)을 평정한 다음 위(魏)나라 조조(曹操)의 군대를 맞아 한중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싸움은 여러 달에 걸친 장기전 양상을 띠고 있었는데 유비의 병참(兵站)은 제갈량(諸葛亮)의 용의주도한 확보로 넉넉한데 반하여 조조는 병참(兵站)을 소홀히 하여 내부의 질서가 문란하고 거기에다 탈영병이 속출하여 공격도, 수비도 불가능한 상태에 있었다.
막료 한 사람이 현황을 보고하고 후퇴 여부를 묻자 닭고기를 뜯고 있던 조조는 닭갈비[鷄肋]를 들었다 놓았다만 했다.
그 막료가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나오는데 주부(主簿)인 양수(楊修)가 듣고 장안(長安)으로 귀환할 준비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다른 참모들이 놀라 그 까닭을 묻자 양수는 "닭의 갈비는 먹으려 하면 먹을 것이 없고 그렇다고 내버리기도 아까운 것이오. 한중(漢中)을 여기 에 비유한 것은 승상께서 군대를 철수하기로 작정하신 것이 아니겠소? (修獨曰 夫鷄肋 食 之則無所得 棄之則如可惜公歸計決矣)"라고 답했다.
과연 양수의 예상대로 조조는 그 이튿날 철수 명령을 내렸다.
이때 조조는 이익이 없다고 하여 한중에서 후퇴하고, 그곳을 확보한 유비는 스스로 한중왕(漢中王)이 되었다.
그러나 이윽고 위(魏)나라는 촉한(蜀漢)과 오(吳)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하기에 이른다.
이 이야기는 후한서(後漢書) 양수전(楊修傳)에 실려 있으며, 오늘날 <닭의 갈비[鷄肋]>는 그다지 쓸모 있는 것은 아니지만, 버리는 것은 아까운 일이라는 비유로 쓰여지고 있다.
② 진(晉:西晉, 265∼316)나라 초기에 죽림 칠현 가운데 유령(劉伶)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유령이 술에 취하여 행인과 말다툼을 벌였다.
상대가 주먹을 치켜들고 달 려들자 유령은 점잖게 말했다.
"보다시피 '닭갈비 [鷄肋]'처럼 빈약한 몸이라서 그대의 주먹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소."
그러자 상대는 엉겁결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고 한다.
[유사어] 兩手執餠(양수집병) : 양손에 든 떡. 갖기도 버리기도 아깝다.
[출전] 後漢書 楊修傳
▶ 먹으려면 먹을 고기가 없고, 버리려면 아까운 것.
조조군이 한중에서 철수하기 얼마 전이었다.
그날 밤 조조가 저녁식사를 하려는데 음식이 닭갈비였다.
때마침 하후돈이 들어와,
"오늘밤 군호를 무엇으로 할까요?"
하고 물으니 별다른 생각없이 방금 전에 먹었던 음식 생각이 나서 계륵이라고 했다.
하후돈이 전령하기를 오늘밤의 군호는 계륵이라 하였다.
이때 행군주부 양수가 하후돈의 군호를 듣고는 행장을 수습하여 돌아갈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하후돈이 깜짝 놀라 양수에게,
"그대는 어찌하여 행장을 수습하는 것이오?"
하니 양수가 대답하기를,
"제가 군호를 듣고 위왕께서 곧 귀환하실 뜻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계륵이란 것이 뭡니까. 그러니까 먹으려면 먹을 고기가 없고 버리려면 아까운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처한 전황처럼 이제 나아가도 이기지 못하고 물러가려 하나 남의 치소가 두렵고 여기에 있자하나 아무 이로움 점이 없는 형국과 똑같지 않습니까. 아마 내일이나 모레쯤 위왕께서 철수할 생각이라는 것을 밝힌 것이니 아예 미리 행장을 수습한 것입니다."
하후돈은 원래 똑똑하기로 소문난 양수의 말을 듣고 '과연 학문이 깊은면 위왕의 마음속 깊은곳까지 헤아리는구나' 하고 칭찬하며 자신도 행장을 수습하니 여러 장수들도 덩달아 돌아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날 밤 조조는 심신이 편치못하여 밤바람이라도 쏘이려고 막사밖으로 나왔는데 하후돈의 병사들이 제각기 돌아갈 준비를 하는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
그래서 하후돈을 불러 물어보았더니 양수가 군호인 '계륵'을 풀이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이 말을 들은 조조는 크게 노하였다.
마치 속마음이 들킨 기분이 드는데다가 평소 똑똑한 티를 내는 양수가 얄미웠던 것이다.
그래서 군심을 어지럽혔다 하여 양수를 처형하고 머리를 영문에다 효수했다.
바로 여기에서 계륵이 유래되었다.
괄목상대(刮目相對)
눈을 비비고 본다는 뜻. 곧 남의 학식이나 재주가 전에 비하여 딴 사람으로 볼 만큼 부쩍 는 것을 일컫는 말.
옛날 중국의 오(吳)나라의 노숙과 여몽 사이의 고사에서 나온 말로, 눈을 비비고 다시 보며 상대를 대한다는 뜻으로, 얼마동안 못 보는 사이에 상대가 깜짝 놀랄 정도의 발전을 보임을 뜻함.
▶ 刮 비빌 괄, 目 눈 목, 相 서로 상, 對 기다릴 대
▶ 삼국시대(三國時代) 초엽, 오왕(吳王) 손권(孫權 : 182-252)의 신하 장수 중에 여몽(呂蒙)이 있었다. 그는 무식한 사람이었으나 전공(戰功)을 쌓아 장군이 되었다.
어느 날 여몽은 손권으로부터 공부하라는 충고를 받았다. 그래서 그는 전지 (戰地)에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手不釋券(수불석권)]' 학문에 정진했다.
그 후 중신(重臣) 가운데 가장 유식 한 재사 노숙(魯肅)이 전시 시찰길에 오랜 친구인 여몽을 만났다.
그런데 노숙은 대화를 나누다가 여몽이 너무나 박식해진 데 그만 놀라고 말았다.
"아니, 여보게. 언제 그렇게 공부했나? 자네는 이제 '오나라에 있을 때의 여몽이 아닐세 (非復吳下阿夢)' 그려."
그러자 여몽은 이렇게 대꾸했다.
"무릇 선비란 헤어진 지 사흘이 지나서 다시 만났을 때 '눈을 비비고 대면할 [刮目相對]' 정도로 달라져야 하는 법이라네."
至於今者 學識莫博 非復吳下阿夢曰 士別三日 卽當刮目相對.
[주] 여몽 : 재상 노숙이 병사(病死)하자 여몽은 그 뒤를 이어 오왕 손권을 보필, 국세(國勢)를 신장하는데 힘썼음. 여몽은 촉(蜀) 땅을 차지하면 형주 (荊州)를 오나라에 돌려주겠다던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유비(劉備)의 촉군 (蜀軍)을 치기 위해 손권에게 은밀히 위(魏)나라의 조조(曺操)와 화해, 제휴할 것을 진언, 성사시키고 기회를 노렸음. 그러던 중 형주를 관장하고 있던 촉나라의 명장 관우(關羽)가 중원(中原)으로 출병하자 여몽은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출격하여 관우의 여러 성(城)을 하나하나 공략(攻略)한 끝에 마침내 관우까지 사로잡는 큰 공을 세움으로써 오나라의 백성들로부터 명장으로 추앙을 받았음.
백미 (白眉)
▶ 흰 눈썹[白眉]을 가진 사람이 가장 뛰어났다는 뜻.
① 형제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
② 여럿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나 물건을 일컫는 말.
▶ 白 흰 백. 眉 눈썹 미.
▶ 천하가 위(魏), 오(吳), 촉(蜀)의 세 나라로 나뉘어 서로 패권을 다투 던 삼국 시대의 일이다.
(1) 유비(劉備)는 적벽대전 후 형주(荊州), 양양(襄襄), 남군(南郡)을 얻고 군신 (群臣)을 모아서 앞으로의 계책을 물었다.
이때 유비를 두 번이나 구하여 준 이적(伊籍)이, "새로 얻은 땅들을 오래 지키려면, 먼저 어진 선비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유비가 이적(伊籍)에게 물었다.
"어진 선비가 누구요?"
"형양(荊襄) 땅 마량(馬良)의 다섯 형제가 모두들 재명(才名)이 있는데, 가장 어진 이는 양눈썹 사이에 흰 털이 난 '양(良)'으로 자(字)는 계상(季常)이라고 합니다.
또 향리(鄕里) 에서도 '마씨집 오상(五常)이 모두 뛰어나지만 그 중에서도 백미(白眉)가 있는 마량(馬良) 이 제일 뛰어나다.(馬氏五常 白眉最良)'고 합니다. 공(公)께서는 어찌 청하여 오지 않으십 니까?"
유비는 즉시 마량(馬良)을 청하여 오게 했다.
(2) 유비(劉備)의 촉나라에 문무(文武)를 겸비한 마량(馬良)이라는 이름난 참모[후에 시중(侍中)이 됨]가 있었다.
그는 제갈량[諸葛亮:자는 공명(孔明)]과 문경지교(刎頸之交)를 맺은 사이로, 한번은 세 치[三寸]의 혀 하나로 남쪽 변방의 흉포한 오랑캐의 한 무리를 모두 부하로 삼는데 성공했을 정도로 덕성(德性)과 지모(智謀)가 뛰어난 인물 이었다.
오형제 중 맏이인 마량은 태어날 때부터 눈썹에 흰 털이 섞여 있었다. 그래서 그는 고향 사람들로부터 '백미(白眉)'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들 오형제는 '읍참마속(泣斬馬謖)'으로 유명한 마속을 포함하여 모두 재주가 비범했는데 그 중에서도 마량이 가장 뛰어났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씨(馬氏)네 오형제 중에서 '백미'가 가장 뛰어났다며 마량을 특히 칭송해 마지않았다.
이 때부터 '백미'란 같은 부류의 여럿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나 물건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출처: 三國志天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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