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교정에 세워진 단군상의 목이 없어진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단군상 건립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단군은 결코 5천년 전의 인물이 아닙니다. 단군의 성격과 고조선의 강역, 단군에 대한 기록을 둘러싼 <<환단고기>>의 문제 뿐만 아니라 학계와 소위 재야사학계의 대립 , 북한의 단군릉 발굴까지 해결해야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다음에서 저는 <<한국사 시민강좌>>27집(이기백 책임편집 , 일조각 , 2000)에 실린 노태돈선생과 조인성선생의 논문을 간단히 요약하여 단군과 고조선 , <<환단고기>>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합니다.
<역사적 실체로서의 단군> 노태돈(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단군에 대한 바람직한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서는 , 사실로서의 단군과 상징으로서의 단군을 구분해서 이해 할 수 있어야 하며 , 아울러 우리역사의 각 시기마다 상징으로서의 단군이 어떤 식으로 재해석되어 왔는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단군에 대한 논의는 일단 <<삼국유사>>에 실린 단군신화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단군신화의 요체는 하늘신의 아들과 웅녀가 결합하여 낳은 이에 의해 고조선이 건국되고 그 자손들이 왕위를 이어갔다는 것을 내세운 데에 있다. 단군신화는 동북아시아 고대국가들의 건국신화중 가장 고졸한 면을 지닌다고 할 수 있고 , 이는 고조선이 이 지역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등장한 국가였다는 사실과 연관되는 사항이다. 따라서 단군신화는 고조선 당대의 산물이다. 그렇다면 ‘檀君’은 이름인가 , 칭호인가? 단군은 자연인의 이름이라기보다 , 고조선시기에 나타난 임금을 나타낸 칭호였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고조선의 건국연대로서 기원전 2333년이란 단군 즉위 원년의 절대연대는 사실로서의 의미는 없다. <<삼국유사>>등에서 전하고자 하는 핵심은 단군이 요(堯)와 동시기에 즉위하여 건국하였다는데 있다. 한반도와 남만주 일대에 청동기문화가 보급된 시기는 비파형 동검을 기준으로 기원전 10세기 전후이다. 따라서 고조선의 등장시기는 기원전 10세기에서 기원전 5세기 사이의 어느 시기를 상정해 볼 수 있다.
고조선의 강역은 중심지의 위치를 고찰해볼 때 초기에는 요하 이동의 어느 곳에 있다가 기원전 3세기 초 연(燕)과의 전쟁에서 패퇴한 후 그 중심지를 평양으로 옮긴 것으로 여겨진다. 고조선의 국가형태는 연맹체적인 성격의 것으로 보인다. 즉 , 단군의 휘하에는 고조선을 구성하였던 여러 집단들이 존재하였고 이들 집단은 상당한 자치력을 지녔을 것이다. 이 집단들을 규합하는 통합력으로는 고조선왕이 지녔을 물리적 통제력 뿐만 아니라 제의(祭儀)가 중요한 기능을 하였을 것이다. 고조선 왕인 단군은 제사장으로서 제의를 담당하였을 것이다. 곧 당시 단군은 정치적인 군장인 동시에 제사장적인 성격을 지녔던 것이다.
<단군에 대한 여러 성격의 기록> 조인성(경희대 사학과 교수)
6. 거짓 기록 : 『단기고사』·『환단고기』·『규원사화』
『환단고기』는 1911년 계연수가 『삼성기』『단군세기』『북부여기』『태백일사』의 네책을 묶어 펴낸 것이라고 한다. 그 가운데 조선 전기의 인물인 이맥이 편찬하였다는 『태백일사』가 가장 늦게 만들어진 것으로 되어있다. 『태백일사』에는 ‘부권(父權)’‘남녀평권(男女平權)’‘원시국가(原始國家)’라는 말이 나온다. 이런 말은 조선시대에 사용된 것이 아니다. 근대에 들어와 비로소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비록 『태백일사』의 일부만을 예로 들었지만 이들 세책에는 근대용어들이 자주 나온다. 이는 이것들이 근대에 쓰여졌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전 어느 시기의 저술임을 표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것들은 위서(僞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