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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불거토피아 원문보기 글쓴이: 고물장수
글 / 윤현진 外
한 남자의 인생을 뒤흔든 바보 노무현
오원근 변호사(46)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직후 10여 년간 몸담았던 검사직을 그만뒀다.
오랫동안 흠모하던 존재가 검찰로부터 모욕적인 수사를 받고 힘겨워하다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했다는 것이
그에게는 무척 견디기 힘든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오 변호사는 1992년 12월,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서울 신림동에 있는 관악산 입구 광장에서 당시 대선 후보로 출마한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을 처음 봤다.
"대단한 연설이었어요. 다른 이들의 연설이 무미건조한 반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무척이나 격정적이었거든요.
청중들의 마음을 그대로 사로잡는 듯했고요. 5공 청문회에서의 활약, 3당 합당 반대 등을 통해서 이미 정치인
노무현의 민주주의에 대한 소신을 알고 있던 터에 그의 격정적인 연설을 현장에서 목격하고 난 후, 전 소리 없이
그분의 열렬한 팬이 됐어요.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인생에 있어서도 그분은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저의 스승으로 자리했고요."
그랬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힘없이 무너져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심정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웠다.
아직도 뚜렷이 기억하는 2009년 4월 30일, 노 전 대통령이 대검 중수부에 박연차로부터 불법 자금을 받은 혐의로
소환되던 당시, 오원근 변호사는 서울중앙지검 외사부에서 검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대통령을 태운 차량이 서초역을 지나 서울중앙지검 바로 옆에 있는 대검 청사를 향해 갈 때,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던
직원들은 창문 쪽으로 몰려가 그 모습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는 도저히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치욕을 당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노 전 대통령에게 갖출 수 있는 예의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단한 혁명가였습니다.
대한민국 곳곳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위선과 불합리한 권위를 떨어내려 한 혁명가였습니다.
또한 그분은 생각과 행동, 삶 자체가 자연스러움이었습니다. 민주주의는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놔 두는 것입니다.
현 정부처럼 일방적인 정권은 민심과 소통도 안 되고 답답함만 안겨줍니다."
오 변호사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머리를 긁적이며 말할 때,
눈가에 이슬이 맺히는 것 같더니 그는 이내 손수건으로 닭똥같은 눈물을 훔쳤다.
문득 전직 검사로서 곽노현 교육감과 한명숙 전 총리의 검찰 수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사건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이상 추상적으로 얘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피상적으로 느끼기에는
정치적인 성격이 강합니다. 검사들 가운데는 정치적인 사건뿐만 아니라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시키기 위해
사건을 끄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의보다는 공명심이 많은 검사들도 더러 있습니다."
그가 떠난 뒤 더 이상 검사로 살고 싶지 않았다
그로부터 23일째 되던 날, 노무현 전 대통령은 봉하마을 부엉이바위에서 몸을 던졌다.
그 소식을 듣고 오원근 변호사는 온종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집 안에 있어도, 밖에 나가 산책을 해도
마음이 좀체 가라앉지 않았다. 이 땅의 참된 민주주의를 위해 온몸을 던져 살아온 그분의 삶이 떠오르면서,
자신마저 한껏 작아지는 것 같았다고 한다. 다음날 오원근 변호사는 아내와 함께 덕수궁 대한문 앞으로 조문을 갔다.
분향소는 길바닥에 차려져 있고, 인도와 차도의 경계를 따라 경찰차가 두껍고 길게 벽을 치고 있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더군요. 독재를 한 것도 아니고, 축재를 한 것도 아닌,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헌신한
한 나라의 대통령을 그런 식으로 조문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서글펐어요. 그렇게 네 시간의 기다림 끝에
분향 차례가 되어 그분의 영정사진을 바라보니, 금방이라도 사진 밖으로 나와 다정스러운 말을 시원시원하게 해줄
것만 같아 또 한 번 눈시울이 뜨거워졌어요."
분향을 마치고, 집이 있는 수서역 부근의 조그마한 막걸리 집에 들어간 그는 아내와 막걸리를 한두 잔 마시다가
"이제 검사를 그만두어야겠다"라고 말했다. 안그래도 정권 교체 후 검찰 수뇌부의 행태에 대해서도 굉장히 많은
불만이 쌓여 있던 상태였다.
"검찰이 독립을 지켜야 하는데 제가 볼 때는 정권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수사를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독립성을 잃는 건 검찰에게 엄청난 치욕이거든요. 그런 것들에 대해 동료 검사들과 이야기를 나눠보기도 했는데
저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검찰 내부에는 정말 극소수더라고요. 그래서인지 대화도 잘 안 통하고 가끔은 감정적으로
반발하게 되기도 했어요. 회식 자리에서 일부 검찰 관계자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욕을 하는 것을 도저히 듣기 힘들어
그냥 확 뛰쳐나와 집으로 와버린 적도 있죠."
검찰이라는 조직 생활에도 강한 염증을 느꼈다. 특히 사건의 원만한 해결을 위해 존재하는 검사가
자신과 검찰의 실적을 올리기 위해 본질적인 가치를 훼손해야 하는 일들이 생길 때에는
더 이상 검사로서 공명심을 발휘해야 할 이유마저 잃어버렸다.
"저는 꾸미는 거 싫어해요. 자연스러운 거 좋아하고, 소탈한 편이에요. 그런데 검찰이라는 조직에서는
최대한 자신을 통제해야 해요. 일방적으로 지시하는 내용에 따라야 할 때도 있고, 실적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사건 자체의 순수한 해결보다는 경우에 따라 실적에 따라 사건이 희생되는 경우도 있거든요.
검찰 자체가 잘못됐다는 게 아니라 제 가치관이 그곳의 성격과는 여러모로 잘 맞지 않았던 거겠죠."
그런 상황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까지 세상을 떠나고 나니 오원근 변호사는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마음이 떠난 곳에 계속 남는다면 자신이 더 비겁하게 느껴질 것만 같았다. 아내 역시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그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했다. 결국 얼마 후 사직서를 내고 10년 5개월간의 검사 생활을 끝냈다.
"노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을 때 얼마나 울고 싶던지…. 사직서를 내고 나서야 실컷 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분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저 말고도 많을 거예요. 그래도 저는 김대중, 노무현 두 분이 집권하는 동안
검사 생활을 할 수 있어서 참 행복했어요."
농사짓는 변호사, 온전한 귀농을 꿈꾸다
고향 청주로 가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고,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로 결심했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농사일을 거들며 자연 속에서 성장기를 보낸 그는 늘 귀농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서울중앙지검에서 검사를 그만두기 직전에는 전국귀농운동본부가 운영하는 서울생태귀농학교에 다니기도 했다.
"시골 출신이라 그런지 농사짓는 일에 강하게 끌렸어요. 흙 밟고 바람 소리 듣는 것을 무척 좋아하거든요.
사법시험 준비할 때도 논두렁, 밭두렁 위를 걸어 다니면서 암기했어요. 검사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꾸준히
주말농장에 참여했고요. 그렇게 한 해, 두 해 쌓이다가 제대로 공부를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2009년 초에
서울생태귀농학교에 들어갔죠. 참 좋더라고요."
매일 흙을 밟으면서 에너지를 느낀다.
삽으로 땅을 파거나 호미질하는 소리를 들을 때, 흙을 만지고 냄새를 맡을 때, 새싹이 나고 자라는 것을 볼 때
뜨거운 생명력을 느낀다. 도시에서는 절대 상상할 수 없던 일들이다.
"농사를 지으면 눈으로 땅을 똑바로 볼 수 있어요. 자연의 변화도 실감할 수 있고요. 원래 자연은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건데 도시 생활은 그렇지가 않죠. 사람들은 편한 것, 안정적인 것만 찾으려고 하니까요.
그러한 부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는 행복을 찾기가 쉽지 않아요. 저는 밭에 갈 때마다 마음이 편해져요."
인터뷰가 있던 날 아침에도 귀농을 준비하며 청주시 변두리에 마련한 자신의 밭에 가서 마늘을 심고 왔다고 했다.
40, 50평 정도 되는 그의 밭에는 무, 고추, 참깨, 감자, 옥수수, 상추 등 웬만한 농작물들이 거의 다 있다.
호미질, 낫질은 이제 거의 프로급이라고. 주말에는 아내뿐만 아니라 중학생 큰딸과 초등학생 둘째 아들을 데리고
가서 함께 밭을 일구기도 한다.
하지만 처음 오원근 변호사가 귀농을 할 거라고 했을 때 주위에서는 선뜻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대체 왜 그런 선택을 하느냐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물론 그도 농사가 쉽지 않다고는 생각한다.
게다가 석유를 쓰는 농기계나 비닐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일일이 수작업을 거쳐야만 하는 생태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더욱 힘들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내 평생 소원은 '완전 귀농'과 '불교 수행'
"인간으로서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생계비를 마련할 수 있을지 솔직히 두려운 마음도 크죠.
실제로 귀농한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최소한의 생계비를 만들지 못해서 다시 도시로 돌아가거든요.
저도 그런 두려움 때문에 아직 온전히 농사에 몸을 던지지는 못하고 변호사 일에 다리를 걸치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농사는 저의 오랜 꿈이에요. 흙과 함께 사는 삶만이 온전한 삶이라는 믿음 또한 오래됐고요.
농사 한번 제대로 지어보지 못하고 죽으면 너무나 억울할 것 같아요."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지방대 출신의 고시 합격생이었던 그가 내놓을 만한 것은
어쩌면 검사라는 직업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막상 그 안에는 그가 찾던 행복이 없었다.
검사직을 그만둔 뒤에는 시끄럽고 복잡한 도시를 떠나 스스로 원하는 행복을 찾아 나섰다.
3주간 전라북도 부안에 있는 변산 공동체에 가서 농사를 짓고, 경상북도 문경에 있는 정토수련원에서
100일간 출가해 행자 생활을 하며 스스로를 돌아봤다.
오 변호사는 검사를 그만 둔 이후, 이전부터 귀농에 관심이 많았던지라 윤구병 전 충북대 철학과 교수가 설립한
변산공동체에 가서 3주간 농사를 지었다. 또 문경 정토수련원으로 100일간 출가하여 행자생활도 했다.
그의 평생소원은 '완전 귀농'과 '불교 수행'이다.
주말과 매일 출근하기 전 새벽 한 시간 정도 장인땅 40~50평 텃밭을 손수 가꾸고 있다.
완전 귀농을 위해 흙집도 지을 예정이고, 이를 위해 구체적으로 장소도 알아보며 준비도 하고 있다.
다만 그의 두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독립할 때까지 조금씩 귀농을 준비하고 있는 상태다.
그의 부인도 도시 문명에 반감을 가지고 있으며, 농사하는 것을 굉장히 좋아한다고 말했다. 부창부수다.
귀농을 위해 검소하고 단출한 삶도 지향하고 있다.
23평의 작은 아파트에 살며 기계음이 싫어 청소기도 돌리고 있지 않다고 한다.
오 변호사는 농사를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흙을 밝고 만질 때의 촉감이 너무 좋다.
나를 살아 있게 만든다"며 "도시 속에서 억지로 살아가는 것은 뒤틀린 삶이다.
진정한 생명이 누려야 할 삶은 흙속에 있을 때만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불교대학을 다니며 매주 화요일마다 정토회 법륜 스님의 강의를 들으며 마음 살피는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얼마 전 오원근 변호사는 아내와 함께 괴산군 청천면에 다녀왔다.
완전한 귀농을 위해 가족과 함께 살 시골집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마땅한 집을 찾지는 못했지만
앞으로 그런 식으로 계속 찾아다닐 작정이란다. 이제 변호사 일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으니 내년부터는
농사짓는 데 더 많은 연구와 투자를 할 계획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 게 아니라 행복해 보이기 위해서 사는 것 같아요.
하지만 남들이 말하는 것을 따라가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답니다.
가만히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마음이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해요.
마음이 그리는 대로 따라가면 바로 그 끝에 참된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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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일에 부딪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슬픔 없이 티끌 없이 안운한 것,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행복이네."
첫댓글 우리 카페에 모시고 싶네
노짱님 늘 마음속엔 살아계십니다~ 실천하는 삶이 그립습니다~~
나도 노짱님 처럼 살고싶어요
삶의 양보다 질로....
부디 평온한 나날을 이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저의 블로그로 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