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비극적 결말을 지녔다고도 말할 수 있을텐데, 과연 소설도 그러한지.. 또 영화 속 사건들과 소설 속 사건들은 정확히 일치하고 있는지..
화질이 좋았고, 또 좋은 솜씨로 쇼트마다의 이미지들도 가다듬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기대보다 정윤희 미모의 인상이 강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조금 아쉬웠지만, 어떤 각도, 어떤 조명, 또 어떤 거리에서의 정윤희는 영어 자막에 쓰여진 대로 '님프'와 매한가지였다.
이대근의 연기는 훌륭했고, 조역 윤양하, 또 악역을 맡은 배우의 연기도 전체 구성과 어울려 긍정적 평가를 내려도 좋을 듯했다.
영화의 절정부에서 슬로 모션으로 잡은 이대근, 정윤희의 이미지에는 모든 감정, 주의가 몰입되었을 만큼 긴장감 있고, 또 감동적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즐겁게 보았던 그 영화에 대해 무언가 책잡을 거리를 찾고 있는 마음의 움직임을 발견한다.
그건 정윤희의 역인 순이의 행동, 또 그 행동으로부터 이끌어내진 최후의 결말 같은 것들을 심리적 관점에서 조명해 보았을 때, 감독의, 혹은 시나리오 작가의 의도에 무언가 불분명한 점이, 아니면 인생에 대해 만사를 알고 있다는 식의 완고한 태도가 엿보였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제시되고 있는 사건들을 되돌아 볼 때에는, 순이가 미래의 신랑감/현재의 남편인 현보의 친구로 등장하는, 그리고 당시에는 드물었을 전국을 다 돌아보고 온 칠성이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분명히 느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칠성이에 대한 순이의 호감은 클로즈업으로 잡힌 눈빛으로도, 또 칠성과 남편 현보의 씨름에서 남편이 승리하자, 잠시 머뭇거리며 기쁨을 유보하는 행동에서도 드러난다.
장르에 대한, 아니면 대중 문학/영화에 대한 편견일 수 있겠지만, 이런 장면들을 영화 속에서 확인한 이후에는 결국 순이의 마음은 지금의 남편 현보보다는 세상물정 밝고, 또 전국을 방랑할 정도의 '끼'를 지니고 있는 칠성에게 기울어지고, 그런 마음의 변화가 영화의 이야기의 위기와 결말의 동기로 작동하리라고 짐작하게 마련이다.
순이와 또 현보에게, 그리고 그들의 산속 숯막의 진정한 위기는 순이의 미모에 반해, 그녀를 취하고자 직접적으로 행동에 옮기는 김주사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이 사내다운 매력의 소유자인 현보로부터 오리라고 예상했다.
정말 사건들은 예측한대로 진행되어, 순이의 몸을 얻기 위한 협박 수단으로 현보를 감옥에 가두는 치사한 행동을 하는 김주사는 힘센 칠성이에게 거의 반죽임을 당하고, 현보는 현보대로 3년 내로는 감옥에 꼼짝없이 갇혀야 할 상황에 처하게 된다.
친구의 처이기 때문에 자신의 순이에 대한 욕망/사랑을 간신히 억누를 수 밖에 없었던 처지였던 칠성은 순이의 지금의 불행한 상황이 더할 나위 없는 기회이다.
칠성은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최소 3년을 기다려야 하고, 또 김주사는 당신을 끊임없이 괴롭힐 것이다, 그러니 나와 함께 이곳을 떠나야 한다'고 순이를 설득한다.
약한 자는 언제나 여자이기 때문에 순이는 칠성을 따라나선다.
칠성을 따르며 순이는 묻는다.
'우리가 갈 곳은 어떤 곳인가요? 거기에도 산이 있고, 노루, 뻐꾸기가 있나요?'
칠성은 그 곳은 산이 아니기에 노루도 뻐꾸기도, 버섯도, 나물도 없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언제나 장터에서 나물도, 버섯도 구할 수 있다고 대답한다.
순이는 칠성을 따라 한참을 걷다가 그가 사주었던, 더럽히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었던 새옷을 벗어버리고, 예전의 누더기 옷을 다시 걸치고 자신이 살던 원래의 산속으로 되돌아온다.
순이는 현보가 하던 일도 자신이 떠맡아 하며, 현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러나 그녀를 다시 찾은 이는 기대했던 현보가 아니라, 김주사였다.
이때 순이의 마음엔 어떤 급격한 변화가 일어난다.
그 변화가 너무나 급격해서인지 순이는 실성한 듯 웃기만 한다.
그리고 논개처럼 김주사를 유혹하여 끌어안고, 숯을 굽는 불구덩이 속으로 몸을 던진다.
세월이 흐른 후,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할 정도로 몸을 망친 현보가 순이의 이름을 부르며 집으로 돌아온다.
그를 반긴 건 순이가 아니라, 친구 칠성이였다.
칠성은 현보에게 '순이는 네 여자였어, 너의 복수를 위해 김주사와 함께 죽은 거지' 라고 말한다.
이야기도, 영화도, 모든 사건도 끝이 났다.
사건의 흐름을 주의를 기울여 쫒다보면, 또 뒤에 벌어질 일이 도대체 무언지 궁금하게 만드는 이야기를 엮는 솜씨 덕택에, 이런 주인공의 행동, 이야기의 결말에 대해서는 아쉬움, 동정심, 감동만 남지, 뭐 별다른 비판거리를 당장에 떠오르기란 쉽지 않다.
착한 마음을 가지라고 초등학교부터 도덕 교육을 충실히 받아온 우리로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렇지만, 왜 순이가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멋진 남자 칠성을 뿌리치고, 또 남편 현보를 한번도 찾아가보지도 않은 채, 김주사를 끌어안고 불 속으로 뛰어들어야 했는지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대답을 찾기가 쉽지가 않다.
칠성의 캐릭터는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여성의 유혹자로서 성공하는 경우가 아닌가?
남편에 대한 의리와 정절, 사랑을 구현하기 위해서라도 왜 원수와 함께 죽어야 하는가? 먼저 남편을 찾아가서 그에게 자신의 사랑을 확인해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의 열쇠를 텍스트 내에서 찾는다면, 순이가 현보와 가장 로맨틱한 정사를 나누기 직전에 밝힌 말인 남사당패인 '어머니가 왜 뻐꾸기 소리를 좋아하는지 이제야 알겠어요.'라는 말일 것이다.
그 맥락에서라면, 뻐꾸기 소리는 진정한 사랑, 부부애의 평온함 같은 것일까? 아니면 인간사의 부정, 탐욕으로부터 벗어난 대자연의 순수함에 대한 귀의의 감정일까?
아마 전자, 후자를 모두 포함한 것이 뻐꾸기 소리의 의미일 것이다.
이 대답이 맞다면, 아마 칠성이 현보에게 한 말 '순이는 네 여자였어'는 맞는 말이 아니다.
이 대답을 얻은 우리는 현보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순이는 나도, 너도 아닌, 산의, 자연의, 그래서 산신령의, 성황당의 여자였어'라고.
그래서 산을 떠나, 신령의 가호를 벗어나 세속으로 나가고자 하는 칠성의 유혹을 뿌리칠 수는 있었다 치자.
그렇다고 하더라도 왜 순이는 김주사와 함께 죽어야 했는가?
신령께 불손한 짓은 한번도 한 적이 없고, 오직 신령만을 믿었던 순이가.
신령을 비롯한 신들은 원래 좀 잔인해서이다, 라고 대답할까?
내가 찾은 대답은 '효과'이다.
비극의 효과, 이야기의 효과, 형식의 효과이다.
이유가 없다.
이야기는 원래 그래야 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희생되어야 하고, 그 희생 앞에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식으로 이야기하자면 공포와 연민에 대한 카타르시스를 경험해야 하고, 또 그러한 경험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교적 가치관이 여전히 지배하고 있는 시기의 소설이 원작이기 때문에, 남편에게 절대 복종하고, 정절을 지키는 여자를 형상화하지 않으면 안되는 도덕적 요구의 영향도 없지는 않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슬퍼야 즐거워지게 마련인 이야기, 비극, 소설, 영화라는 형식은 모두 어떤 감정적 효과를 불러일으키도록 의도하기 때문이다.
그 효과 때문에, 현보는 고문과 오랜 옥살이에 몸을 망쳐야 좋았고, 그 눈물 많은 몸에 더 많은 눈물이 흘러내리도록 순이는 죽어야 했다.
그리고 이 모든 사건이 그렇게 진행되도록 힘을 행사한 신령, 산의 모습은 신비하고, 그윽했어야 했으리라.
효과를 위한 이야기의 작위적 구성, 사건의 삽입은 이야기라는 강력한 예술 형식 덕택에 우리의 마음과 감정을 유혹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고 내면적 진실은 이 오래된 무시무시한 괴물같은 힘에마저 복종하기를 거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