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우리 선조님들은 지나가는 과객을 그냥 보내지 않으셨다. 내집에 찾아온 과객은 물론이고 논밭에서 바쁘게 일하면서도 지나가는 길손 소리 질러 손짓해서 시원한 냉수 한 그릇 제누리한때 대접해서 보냈다.
이것이 우리 선조님들의 더불어 함께 사랑가는 지혜요, 생활철학이 있다.
교통수단이 오늘 같이 발달하지 못했던 그 시대는 보통 두 다리와 우리의 몸이 교통수단의 전부였다. 길 떠나면 누구나 다 몸의 피로와 고통을 온몸으로 인내하고 감당해야했다. 몸도 마음도 지치고 기력이 소진되었을때 반겨주는 그 마음마음이 곧 피로회복제요, 힘을 재충전시켜주는 충전소였다.
길손에게 대접하는 냉수 한 그릇 그냥 여느 냉수가 아니다. 냉수는 냉수로되 그 속에 길손을 아끼고 돕는 베푸는 사람의 사랑이 녹아있고, 보약이 담겨있고 정과 생명이 담겨있다. 그 냉수는 주객간의 관계를 너와 내가 아닌 한이웃 한가족으로 만들어주고 원수도 친구로 만들어 주는 노하해의 전도사요 마술사다. 그 냉수의 대접은 모든 난해 문제의 가능성을 창조해내는 희망의 문. 이해의 문. 해결의 문. 만능의 문이다. 그 속에 답이 있다.
왜 부질없이 다투고 싸웁니까 다툴일이 없지요
베푸는 자는 베풀어서 기분 좋고 받는자는 사랑을 받으니 감사하고 이렇게 하루를 즐거운 마음으로 열면 하루가 형통하고 하루가 형통하면 내일의 희망이 열린다. 가는 정, 오는 정, 주는정 받는정 소통의 정 작은 나눔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옛선조님들의 삶에서 배우고 우리의 삶을 복되고 아름답게 가꾸어야 할때가 왔다.
6.25동란 1.4후퇴때 경험했던 잊지못할 따뜻한 감동의 정을 체험한 일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확실한 목적지도 없이 무턱대고 대구, 부산 남쪽을 향해 무작정, 피난민들 인파에 섞여 황급히 남하하던 어느날. 경북 상주지방 어느 마을을 지나는데 돌다리(징검다리)도 없는 개울물, 양쪽 가는 얼음판인데, 그 얼음물을 건너야 했다. 물이 차서 어떻게 건너느냐 엄살부리고 주저 하는 사람 아무도 없었다. 남녀노소 모두 용감하게 잘들 건넜다. 살을 에는듯한 얼음물을 바짝 긴장해서 건너니 거기에는 마을사람들이 길가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얼음물에 꽁꽁언 발을 녹여주고 힘을 실어주기 위해 막걸리를 한 대접씩 대접해주었다. 나는 술을 못마시기 때문에 냉수 한 그릇을 가슴 뜨겁게 받아마셨다. 마을 사람들의 따뜻한 인정과 무엇에도 비교할 수 없는 귀한 사랑에 감동하고 감격했다. 그때 그 고마웠던 응원의 천사님들 지금은 어느곳에 살고 계시는지. 그 순박하고 끈끈한 정과 사랑 이제 어디 가면 맛볼수 있을가 그 순수한 마음과 따뜻한 사랑 그 정이 그립다.
전혀 대가성이 없는 따뜻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그 대접 대접다운 값진 대접. 이제 우리도 우리 삶에서 다시 재생해야 한다.
냉수 한 그릇, 그 물은 생명이다. 그 생명의 냉수 한 대접이 대접중에서 가장 귀한 대접이다. 그 대접을 결코 값싼 대접으로 폄하 평가절하 해서는 안된다. 가장 귀한 참대접이라고 극찬, 예찬에 예찬 안할 수가 없다. 냉수에 담긴 눈에 보이지 않는 정성 밖으로 나타내고 과시하려는 오만이나 교만 가식이 없는 소박하고 순수한 대접 혼이 담겨있는 그 대접이 정말 귀한 대접이다.
그 대접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다. 우리의 고정관념을 바꿀 수 있다. 문화를 바꿀 수 있고, 정치를 바꿀 수 있고 고질적인 이기주의 집단이기주의 지역이기주의 국민정신을 바꿀 수 있다. 냉수한그릇 대접은 가장 작으면서 가장 크고 귀하다.
고급 요리 대접이 물론 맛도 있고 품격도 있고 값비싼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자칫 순수성을 잃을 수 있고, 이해 타산이나 복잡 미묘한 계산이 깔려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냉수에는 그런 대가성이 전혀 없어 순수하고 귀하다.
큰것만 소중히 여기고 선호하는 세상. 작은 대접. 작은일의 소중함을 자칫 놓치는 우를 범하기 쉽다.
거대한 건물의 벽돌 한 장, 별것 아닌가요? 작은 벽돌 한 장 한 장이 쌓이고 쌓여 웅장한 건물이 된 것이다. 그 한 장이 소중하다. 개개인 한사람 한사람이 바로 설 때 전체 한 나라가 바로 선다.
냉수 한 그릇에 담긴 사랑. 이웃 사랑이 나라사랑으로 나라사랑이 나(자아) 사랑으로 바로 이어지고 연결된다. 그 작은 사랑이 진정 건강한 참사랑이다.
큰것에 가리워져 빛을 잃기 쉬운 작은 사랑, 소중한 그 작은 사랑을 놓치지 말자. 작은 사랑 못하면 큰 사랑은 더욱 할 수 없다. 작은 사랑부터 하나 하나 습관화 생활화 체질화 해 보자. 사명감 갖고 힘써 실천해 보자. 하나님의 명령이다. 이 세상에 목적 없이 창조되고 태어난 존재는 없다. 미물 곤충 작은 새 한 마리에 이르기까지 각각 사명과 의무를 주셨다. 나에게도 사명을 주셧다. 그 사명 다하려고 오늘도 힘쓰고 잇다.
스웨덴의 동화작가 라쿠에루레푸가 쓴 <진홍가슴새>라는 동화는 유명하다.(노벨 문학상수상)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각종 짐승과 새를 만드시고 그들에게 하나하나 이름을 붙여 주실 때 작은 새 잿빛 빛깔의 새 한 마리를 만드시고 ‘네 이름은 진홍가슴새’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이 새가 ‘제 몸은 잿빛 털로만 덮여 있는데 왜 진홍가슴새라고 하십니까’하고 물었다. 하나님이 대답하시기를 ‘너는 태어나는 이 순간부터 죽을때까지 열심히 사랑을 실천해서 너의 가슴털을 빨갛게 해야 한다. 그래서 진홍가슴새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노라’ 대답하셨다. 그 후 많은 세월이 흘러 그 날도 한 마리의 어미새가 그 동안 진홍빛의 털을 만들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다가 뜻일 이루지 못하고 죽어간 조상들의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새끼새들에게 들려주면서 ‘얘들아 나도 진홍가슴새가 되지 못했으니 미안하다. 용서해다오’ 이렇게 목메인 소리로 말하면서 임종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때 언덕위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그 언덕을 올려다 보니 남자 셋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가고 있었다. 양쪽의 두 사람은 손발이 끈에 묶여 죽어가고 있는데 가운데 한 사람은 손과 발에 못이 박혀 축 늘어져 피를 흘리면서 죽어가고 있었다. 어미새가 이 광경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얘들아 나는 이세상에서 저렇게 불쌓게 죽어가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우리가서 저 사람을 위로해 주자!’ 하면서 새끼 새들을 태우고 그분앞에 갔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져 가고 있는 그분에게 물었다. ‘ 왜 이렇게 처참하게 죽습니까?’하고 물었다. 그 때 그는 ‘이 세상 사람들의 죄를 내가 대신 짊어지기 위해 나 이렇게 죽는다’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잿빛 어머새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나에게 좀 더 큰 부리를 주셨으면 당신의 손발에 박힌 못을 뽑을 것인데 나에게는 너무도 작은 부리를 주었기 때문에 손발에 박힌 못을 뽑아드릴 수는 없고 이마에 박힌 가시나마 몇 개 뽑겠습니다.’ 하면서 가시 하나를 부리로 물고 힘껏 힘껏 물어 당겼습니다. 안감힘을 다할 때 가시 하나가 뽑히면서 가시 끝에 묻은피 진홍빛 핏방울이 새가슴에 튀었다. 다시 하나를 사력을 다해 뽑자 또 피가 튀었다. 이 때 십자가에 못박힌 남자(예수)가 말했다. ‘새야 사랑을 실천하여 가슴털을 빨갛게 하라’고 하신 하나님이 너희 족속에게 주신 의무를 이제 네가 드디어 해냈구나 축하한다‘
이 글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 삼자의 아픔을 내 아픔같이 함께 아파하는 마음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주린자에게 빵 한조각 목마른자에게 냉수 한잔을 베풀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하다. 머리로 생각하고 가슴으로 느꼈으면 곧 실천해야 한다. ‘시작이 반이고, 천리길도 한걸음부터,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야 보배’라고 했다. 실천이 중요하다. 선은 빨리 서둘러야 한다. 이마에 박힌 가시 하나라도 뽑는 작은새의 그 정성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작은 새 한 마리에게도 의무를 주신 하나님께서는 분명 우리 모두에게 맡겨주신 몫이었고 사명이었다. 새도 자기 의무를 감당하는데 만물의 영장인 우리는 사명앞에 부끄럽지 않게 서로서로 작은 사랑부터 실천해야 한다. 그 사명, 무수한 일들 이웃을 사랑하며 돌보는 일 내가 할 수 있는 작은일 가장 손 쉬운일, 냉수 한 그릇 대접하는 일부터 착실하게 실천할 것을 다짐해 본다. 이웃을 기쁘게 하고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는 일에 앞장서자.
작으면서도 큰 생명을 지닌 활력소 냉수 한 그릇의 그 무게를 느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