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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城門(4성문)의 祭祀(제사)] : 1, 大井門(대정문) 2, 吐山良門(토산량문) 3, 習比門(습비문) 4, 王后梯門(왕후제문)의 제사는 각 부장이 지내는데 梁部(양부)에서 지냈다.
[四川上(4천상)의 祭祀(제사)] : 1, 犬首(견수) 2, 文熱林(문열림) 3, 靑淵(청연) 4. 撲樹(박수)에서 지냈다. 文熱林(문열림)에서는 日月祭(일월제)를 지내고 靈廟寺(영묘사)의 남쪽에서 五星祭(5성제)를 지내고 惠樹(혜수)에서 祈雨祭(기우제)를 지낸다.
[삼국사기 잡지 제1 제사(祭祀)]의 본문 내용과 [신라 五岳(오악)의 中祭祀(중제사)]를 살펴보면 신라의 5악(五岳)이었던 중국의 5대 명산을 한반도 속의 5대산으로 얽어 맞춘 흔적이 뚜렷이 나타나 있습니다. 즉 일제는 삼국사기도 부분적으로 변조했던 것이다.
여호와 하느님의 진실이 밝혀질 때가 왔다
신라국왕은 제사장으로서 산서성 북쪽 恒山(항산)에서 풍년에는 大牢(대뢰: 흰소, 양, 돼지의 세 가지 희생물을 갖춘 제수(祭需)를 사용하고, 흉년에는 小牢(소뢰:양과 돼지 두 가지의 희생물을 갖춘 제수(祭需)를 사용하여 여호와 옥황상제(하느님)에게 제사를 올리었다. 또한 立春(입춘) 후의 亥(해)일에는 明活城(명활성) 남쪽 熊殺谷(웅살곡)에서 농업의 시조이시며, 신라의 先世(선세) 조상이신 염제신농(炎帝神農)에게 제사를 올리었다.
항산(恒山,상산(常山)
항산은 5악 중의 북악이며, 내장성(內長城) 혼원(渾源)현에 있으며 높이는 2219척. 최고봉은 천봉령(天峯嶺)이다. 태상노군(太上老君:도교 도조)과 원시천존(元始天尊)이신 인류의 어머니 여호와 옥황대제(玉皇大帝)님을 모시는 도관이 있다. 산기슭에 북악묘(北岳廟)가 있고 일명 상산(常山)이라고 칭한다. 그리고 항산은 현공사(縣空寺)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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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泰山)
태산은 천지신(天地神)에게 봉선의식(封禪儀式)을 거행하였다. 황제(천자)는 지상이 무사태평하기를 고제(古祭)하여 천지 신으로부터 신임을 받는 의식으로 보통 황제에게는 허락하지 않으며 후덕(厚德)한 황제에게만 선양(禪讓)되는 준엄한 의식이다.
고조선의 천자(天子)와 봉선의식(封禪儀式)
우리나라는 태고적부터 하느님을 숭배한 천손사상(天孫思想)이 전래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진실로 천제(天帝)가 개국한 나라이며, 천자(天子)가 다스린 나라입니다. 오직 천자만이 황제라 칭할 수 있다. 즉 하느님에게 제사를 올리는 제천단(祭天壇)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왕권을 부여받아 제사를 주제한 장손국의 나라입니다.
황제(皇帝)는 자신의 장손이나 아들 등 가까운 친족에게 제위(帝位)를 물려주는 왕위가 아니라 반드시 태산(泰山)에서 제천의례와 함께 선양(禪讓)의식을 취한 뒤 황제가 되었다. 그러므로 중국의 고대 요(堯)·순(舜)·우(禹)는 황제라 칭하지 않고 임금이라 칭했다.
중국의 진시왕은 가짜 황제이다
중국의 5대 명산 5악 중에서 태산(泰山)은 황제 제위전에 반드시 봉선의식을 거행했기 때문에 五岳之長(오악지장),혹은 五岳獨尊(오악독존)이라 하여 천하제일의 명산이다. 역대 제왕은 태산에서 반드시 하느님의 뜻을 받는 封禪(봉선) 의식을 거행했기 때문이다. 사마천사기의 '봉선대전(封禪大典)에서 오직 천제(天帝)의 자손 천자(天子)만이 봉선의식을 지낼 수 있는 특권적 제사의식이다. 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태산은 해발 1545m 최고봉인 천주봉(天柱峰) 정상에 여호와 옥황상제(玉皇上帝, 하느님)에게 제사를 지내는 옥황전(玉皇殿)이 있습니다. 한나라 부족을 통일한 진시왕은 이듬해인 BC 219년 태산(泰山) 정상의 옥황전(玉皇殿)에서 봉선(封禪) 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진시왕(秦始王)이 태산(泰山)에서 봉선제를 거행한 다음 하산하려고 하자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고 억수같은 비를 만나 나무 아래서 피신해야만 했다. 이것이 곧 하느님의 마음이다. 이 광경을 지켜본 신하들과 많은 사람들이 자칭 황제라 칭한 진시왕이 지낸 봉선제를 비웃었다. 라고 사마천 사기는 덧붙이고 있다.
춘추시대 제(齊)나라 재상 관중이 지은 관자(管子)라는 책에는 중국 역대 황제 72명이 태산에서 봉선(封禪) 의식을 행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거짓 허구로 밝혀졌다. 「관자」라는 책이 관중 저작이 아니라 전국시대 이후에 나왔음이 확실한데다 「논어」나「맹자」를 비롯한 그 이전 어느 문헌에도 봉선에 관한 언급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여호와 옥황상제(하느님)에게 제사를 주제한 제사장(祭司長)은 오직 조선국 천자만이 지낼 수 있는 특권적 제사의 봉선의례(封禪儀禮)이기 때문에 중국인들이 황제라 칭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서를 변조, 조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 중국은 ‘묘회’라는 이름으로 해마다 봄철에 재연 축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신라는 제사장의 나라입니다.
현생 인류는 기원전 3500년경 태호복희와 여호와의 일가(一家)에서 시작되었으며, 그의 자손들이 종교 도시국가를 건설하여 군신(君臣)은 없고, 오직 부자(父子)의 관계이며, 전 세계의 모든 종족은 인류의 부모이신 [태호복희 황제와 여호와 옥황상제]를 삼신(하느님)으로 받들어 숭배하고, 신교(神敎)의 일종교리(一宗敎理)로 혼연 일체가 되어 이른바 지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지상낙원을 이룩하였던 것입니다.
때가 왔다. 때가 왔다. 여호와 하느님에 대한 역사적 진실이 세상에 밝혀질 때가 당도했습니다. 진실로 우리나라는 태고적부터 오직 여호와 옥황상제(삼신, 하느님)를 숭배한 제사장(祭祀長)의 나라입니다. 매년 국왕이 친히 제천단(祭天壇:원구단)에서 여호와 옥황상제(하느님)에게 제사를 주제한 종교의 교황청(敎皇廳)입니다. 중국과 한국에 지금도 태호복희와 여호와 삼신 옥황상제의 사당(祠堂:칠성각, 삼신각)이 많이 현존하고 있습니다.
보통 종교인들은 인류 부모국과 종교 원천국의 우리 역사는 외면하고 이스라엘 역사서의 성경만 깊이 탐독하므로서 [여호와 하느님]에 대한 편협한 식견을 갖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느님은 신앙적 절대자이기 전에 지상에서의 행적이 분명한 역사적 인물입니다. 동방의 청제 태호복희 황제와 여호와 옥황상제는 부부로서 인류의 시조(始祖)이며, 신인(神人)이며, 곧 사람입니다. 본생은 어느 한 종교를 신앙하는 종교인이 아니며, 역사를 탐구하는 보통사람으로서 오직 역사적 진실을 세상에 밝힐 뿐입니다.
본 연재는 반드시 “열린 마음”으로 탐독해야 인류의 기원 역사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인은 물론 세계에서 처음으로 밝혀진 역사적 진실이기 때문에 편협한 사람은 납득하지 못하고 부정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깊이 탐독한다면 오히려 새로운 종교적 역사지식을 얻게 될 것이며, 그릇된 종교관을 불식시키고 올바른 종교관을 갖고 신앙심이 더욱 돈독하리라 감히 말 할 수 있습니다.
중국의 원구단은 1385년 명(중국)에 빼앗겨 버렸다
중국의 천단(天壇)은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난징[南京]에 대사전(大祀殿)을 짓고 천지(天地)를 함께 제사한 데서 비롯하며, 영락제(永樂帝)의 베이징(北京) 천도 후 베이징 남교로 옮기고 1420년 원구단이 완성되었다. 라고 변조된 기록이 있습니다.
즉 천단(天壇:원구단)은 삼국시대는 물론 고려시대와 조선 태조 3년(1394)에도 제사를 올린 기록이 있습니다. 고려 우왕 11년(1385)에 명나라의 사신이 고려에 들어와 말하기를 천단(원구단)은 본래 천자만이 제사를 지낼 수 있으므로 지금 이후부터“명나라(중국) 천자가 직접 제사를 올릴 것이니 고려왕은 하느님을 직접 모실 수 없소, 다만 하느님보다 신분이 낮은 산천에나 기도해야 한다”라고 강요하였다. 따라서 중국의 원구단은 곧 한국의 유물로 명확히 밝혀졌습니다. 한,중,일 3국의 정부당국자는 검증해 주시기 바랍니다.
원구단은 “여호와 하느님”에게 제사하는 제단이다
우리나라는 여호와 하느님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천의례(祭天儀禮)가 있다. 단군 재위 51년 무오(BC 2383년) 雲師(운사) 倍達臣(배달신)에게 명하여 강화도 정족산에 三郞城(삼랑성)을 쌓고 마리산에 삼신(하느님)에게 제사 드리는 제단을 쌓았다. 이것을 참성단이라 한다. 54년 신유(BC 2280년) 3월 단군임금은 친히 마리산 참성단에 올라 삼신에게 제사를 드리며 자손만대의 안녕과 나라의 번영을 빌었다.
원구단(圓丘壇)은 천자가 여호와 하느님에게 제사를 드리는 제천단(祭天壇)입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고구려·백제의 3국은 다같이 제천단(祭天壇)을 설치하고 삼신(하느님)과 천지에 제사를 지낸다" 고려사 성종 2년(983) 정월조에는 "왕이 원구단(圓丘壇)에서 황천상제(皇天上帝:하느님)에게 제사를 드린다. 우리나라는 본래 천자의 나라로서, 고려 말까지 원구단에서 여호와 옥황상제에게 제사를 올렸다.
[동방의 청제(靑帝)]가 누구란 말인가?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태조 3년(1394)에 [동방의 청제(靑帝)]에게 제사를 올리기 위한 원구단을 설치했다. 조선 세조 2년(1456년) 《상정고금례(詳定古今禮)》에 실려 있는 고려의 원구단(圓丘壇)을 참작하여 1457년 원구단을 신설하고, 동방의 청제에게 제사를 올렸다. 의 기록을 참조하여 대한제국의 고종황제 즉위를 앞두고 1897년 10월에 원구단이 한반도 속에 580여평의 철도호텔(현재의 조선호텔) 대지에 지었다. 일제가 만든 망국적 국사교육 넋을 잃은 7천만 천손들이여.! 도대체 [동방의 청제(靑帝)]가 누구란 말인가? 바로 태호복희 황제가 아니던가?
일제에 의해 제천의례가 끊어졌다
일제의 중국 대륙과 조선 침략에 의해 광활하던 조선의 영토를 잃어버렸다. 한편 본래 삼한시대부터 단군 황제가 친히 제천단에서 동방 천제 태호복희와 여호와 옥황상제에게 제사를 올리던 중국원구단은 1385년 고려 우왕 11년에 명(중국)에 빼앗겨 버렸다.
한반도 속으로 쫓겨 온 고종은 광무(光武) 원년 1897년 10월 국내외에 독립적 황제국으로 선포하기 위해 대한제국 즉위를 앞두고 남별궁(南別宮) 터에 원구단을 쌓고, 1897년 10월 11일 고종이 친히 원구단에서 천신에 고제(告祭)한 후 황제에 즉위했다.
1897년 10월에 건립된 원구단(圓丘壇) 혹은 환구단(環丘壇)이라 한다. 단이 조성된 2년 후인 1899년 환구단 북쪽에 3층 팔각정인 황궁우(皇穹宇)를 건립하고, 신위판(神位版)을 모시었다. 여호와 황천상제위(皇天上帝位)는 단의 제1층 북쪽 동편에서 남쪽을 향하고, 황지지위(皇地祗位)는 단의 제1층 북쪽 서편에서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대명천(大明天)과 야명성위(夜明星位)는 각각 제2층의 동서쪽에 있으며, 제3층 동쪽에는 북두칠성, 오성(五星), 28수(宿),오악(五岳),사해(四海),명산(名山),성황(城隍)에 배치하고, 서쪽에는 운사(雲師)·우사(雨師)·풍백(風伯)·뇌사(雷師)·오진(五鎭)·사독(四瀆)·대천(大川)·사토(司土)의 제위(祭位)를 모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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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속의 원구단은 1911년 2월 조선 총독부가 관리하고부터 1913년 원구단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580여평의 철도호텔(현재의 조선호텔)을 지었다. 지금은 원구단의 북쪽 모퉁이에 위치했던 팔각정 형태의 황궁우만 남아 있다. 1914년 이후 원구단에서 제왕이 친히 “여호와 황천상제님”에게 지내는 제사는 끊어지고 말았다. 현세의 모든 사람들은 인류의 어머니이신 “여호와 황천상제”님을 남신(男神:하느님 아버지) 혹은 서양신으로 인식하고 신양하고 있으니 천년을 기원한들 어찌 하느님의 가호(加護)를 받을 수 있겠는가?
중국의 원구단은 한국의 유물이다
우리 대한민족은 태고적부터 제천단을 만들어 여호와 삼신 옥황상제님에게 제사를 지냈다. 중국 북경 중심부의 동서남북에는 4방신에게 제사를 올리던 제단이 있고, 그 제단은 지금 천단공원, 지단공원, 일단공원, 월단공원으로 남아 있습니다. 제사장의 조선이 중국 대륙에서 건국되었으니 중국의 원구단은 당연히 한국의 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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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북경의 천단(天壇) 남쪽에 원구단(圓丘壇), 황궁우(黃穹宇), 기년전(祈年展)이 있다. "원구단은 인류의 부모이며, 4대문명의 시조이며, 종교의 조종(祖宗)이며, 세계의 만 인류가 숭배해야 할 “여호와 황천상제(皇天上帝)”에게 제사를 드리는 제천단(祭天壇)이다.
원구단(환구단)은 매년 음력 동지 날 여명 전에 황제가 친히 제천의식을 주최한다. 의식이 진행될 때 원구단 앞에는 큰 초롱이 걸려있고, 초롱 안에 길이 석자이상의 촛불이 켜져 있다. 환구단의 높이는 5m의 3층이고 상층의 직경이 50m 중층은 60m, 하층이 70m이다.
하늘은 양이므로 천수(天數) 1, 3, 5, 7, 9 및 그 배수로 정해졌다. 제단 위의 중심은 하나의 원석이며, 첫째 줄은 9개의 돌로 쌓고, 두 번째는 18개, 세 번째 줄은 27개, 아홉 번째 줄까지는 천부경(天符經) 글자 수와 같이 81개로 만들었다. 황궁우는 단층에 <여호와 황천상제(皇天上帝)>의 위패를 모셔두는 곳이다. 기년전(祈年展)은 기곡전이라고도 하며, 황제가 여호와 옥황상제에게 풍년을 기원하는 "경천의례(敬天儀禮)"이다.
현재 불교사찰 뒷 쪽에 자리한 칠성각(치성광여래), 삼성각은 수천 년의 역사를 간직하며 전래된 우리 민족 고유의 종교(신교)적 유물입니다. 신라시대 후기에 불교가 흥성하고부터 불교사찰 뒤편으로 물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 대한민족은 아득한 옛 부터 북두칠성, 삼신(여호와 옥황상제(하느님)”을 황천상제(皇天上帝)로 받들어 숭배했습니다. 그러나 후세의 조선시대 사람들은 황천상제가 누구인지 깨닫지도 못하고 제사를 올렸으니 어찌 여호와 하느님이 진노하여 대한민족이 35년의 옥고(獄苦)를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진실을 밝히는 플러스 코리아 [http://pluskorea.net/]
본 고증(考證)은 세상에 처음으로 밝혀지는 전대미문의 세계적 톱 뉴-스 이며, 세계사적, 종교적, 일대 변혁이 일어날 것이며, 세계의 모든 종교가 하나로 통일을 이루어 종교로 인한 전쟁을 종식시키는 평화탄이 될 것입니다. [여호와 황천상제(皇天上帝)]에 대한 역사적 진실은 차후 [3황5제의 역사적 진실]의 제목으로 상세히 연재될 것입니다.
탈해왕은 산동성 태산의 東岳神(동악신)이 되었다.
[삼국유사] 신라 제2대 南解王(남해왕)은 제위 6년(서기 8년) 탈해가 賢人(현인)이라는 소문을 듣고 그의 맏 공주(阿尼夫人(아니부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7년(서기 9년) 탈해를 登庸(등용)하여 大輔(대보)로 삼고 국정(國政)을 위임하였다.
신라 제 4대 탈해왕의 아버지는 多婆那國(다파나국)의 含達婆(함달파) 왕이고 어머니는 積女國(적녀국)왕의 딸이다. 탈해는 62세에 왕위에 올랐다. 재위 23년 기묘(29년)에 돌아가시자 疏川丘(소천구)에 장례했으나 죽은 후에 神(신)이 되어 말하기를 내 뼈를 東岳(동악) 泰山(태산)에 안치해 두어라 라고 명령을 내렸다. 또한 기록은 탈해가 죽은 후 신라 27세 문무왕 때 서기 680년 3월 15일 밤 太宗(태종:?)의 꿈에 몹시 사나운 모습을 한 노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내가 탈해이니라, 내 뼈를 疏川丘(소천구)에서 파내어 塑像(소상)을 만들어 吐含山(토함산)에 안치하도록 하라. 왕은 그의 말에 따라 시행하였다. 이러한 사유로 신라국은 지금도 제사만은 끊어지지 않았다. 즉 탈해는 산동성 태산의 東岳神(동악신)이 되었던 것이다. 중국 산동성 泰山(태산)에 탈해왕의 영정이 모셔져 있습니다.
신라에 五臺山(5대산)이 있었다
신라의 5대산은 山西省(산서성)에 있다. 신라의 영토는 한 덩어리의 지역이 아니라 땅이 떨어져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5小京(소경)제도를 실시했다. 즉 감숙성의 금성을 비릇하여 산서성, 산동성, 호북성 일부와, 하남성, 호남성, 사천성 동북부지역, 귀주성, 강서성, 안휘성,절강성, 강소성지역이며 중국 대륙의 동남부일대이다.
'아랍의 문헌 ' 에서
신라의 위치는 중국 대륙의 동쪽에 있었다.
가, 신라의 위치에 관한 아랍문헌의 기술
신라의 위치와 관련해 첫 기록을 남긴 술라이만의 『중국과 인도 소식』(851년)지에 의하면 "중국 동쪽에 신라의 도서가 다음과 같이 있다"고 하고, 중세 아랍 역사학의 태두인 마스오디는 신라의 위치를 "중국 육지의 동단"으로 설정했다.
중세 지리학자인 이드리시(al-Idrisi,1099~1166년)는 『천애 횡단 갈망자의 산책』(1154년)에서 신라를 중국 동남에 위치하고 해안에 여러 개의 섬을 명기했다. 이것은 한국 이름이 등장한 것으로 알려진 스페인의 벨호(B. Velho) 세계지도(1562년)보다 무려 408년 전에 제작된 것으로, 한국 이름이 기입된 현존 세계지도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신라의 지리적 위치와 관련된 기록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신라는 중국의 동편, 지구의 동단에 자리하고 있다 고 기술하였다. '사막 지대에 생활하던 아랍-무슬림인 들에게 산세가 수려하고 무구무병(無垢無病)한 자연환경과 풍부한 지하자원을 가지고 있는 신라는 그야말로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신라는 쾌적한 자연환경 속에서 빈부의 격차도 없이 넉넉한 재물로 부의 혜택을 누리며 황금문화를 꽃피운 이상향적인 나라가 바로 신라국 이었다. [경주 박물관에서 발췌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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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신라의 황금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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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제천(祭天)을 교황청이 계승하고 있다
진한의 제천의례(祭天儀禮)를 계승한 신라는 천단에서 여호와 옥황상제(하느님)에게 제사를 주제한 제사장의 나라이므로 국왕(國王)이라 칭하지 아니하였다. 또한 제회(祭會)에서 만장일치로 의결되지 않으면 하나의 국정도 행사할 수 없었다. 또한 국방(國防) 역시 비록 국경을 두고 방비는 하였으나 탈해왕이 재위하고부터 국왕을 세워, 대권을 행사하자는 여론이 대두하여, 이러쿵저러쿵 제회(祭會)에서 뜨거운 공방이 벌어졌다.
즉 신라의 부도(符都)는 지금의 이탈리아 바티칸 시국 교황청(敎皇廳)의 교황(敎皇) 임무와 같이 오직 여호와 하느님에게 제천의례(祭天儀禮)만 행사한 제사장의 황제국이며, 마랑(馬郞:司徒)으로 하여금 도리(道理)로 교화(敎化)하여 인류의 평화를 지향한 군자국이었다.
그리고 황금빛 찬란한 신라의 금관은 제천의식 때 쓰는 금관이라 사료된다.
[부도지(符都誌)] 지금 세계 각처의 제족들이 사도(邪道)에 미쳐 날뛰어, 눈 멀은 봉사가 된 지 이미 오래 되었다. 우리 신라가 지금 자멸하면 누가 眞道(진도)를 현창하며, 후세에 누가 알아 볼 수 있겠는가? 차라리 진도(眞道)를 지키며 의롭게 목숨을 바쳐, 순교(殉敎)하여 후세에 이름을 남기는 것만 못 할 것이다. 오직 선택은 국왕을 세워 왕이 대권(大權)을 집행하며, 군마를 호령하여, 파죽지세로 전진하고 부도(符都) 전역을 회복하는 것뿐이다.
마침내 중론(衆論)이 결정되어 왕국 수립을 주장하던 석탈해(昔脫解)가 신라 왕위를 계승하고 비로소 왕이라 칭하게 됩니다. 또한 서라국(徐羅國)이라 칭하고, 비로소 방패와 창을 사용하여 옛 신라 국경 내를 모두 다 평정하였다. 즉 5천축국 중의 1국이었던 多婆那國(다파나국:아유타,인도)의 석탈해는 중천축국(中天竺國=중국=신라)에 들어와 가야국의 김수로왕을 만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