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도 최근 학생 참여 수업과 과정 중심 평가가 활발해지는 추세지만, 고교가 중심을 잡고 가기는 쉽지 않은 환경이다. 부산과 경상 지역권 대학 입시에서 여전히 수능의 영향력이 크기 때문이다. 부산대사범대학부설고등학교는 이 같은 환경에서도 수업 개선뿐 아니라 학생들의 과목 선택권을 보장하는 교육과정을 도입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특히 학생들이 스스로 정한 주제를 1년 동안 탐구하는 과제연구 수업을 교육과정 안으로 끌고 온 점이 눈에 띈다. 흔히 ‘소논문’ ‘R&E’라는 이름의 대회 형태로 소수 학생이 참여하게끔 하는 학교는 많지만, 부산사대부고는 교사들이 수업을 통해 연구의 기초부터 방법론까지 가르친 뒤 전체 학생들이 결과물을 내볼 수 있도록 지도한다. 현재 교육과정에서는 <과제연구> 과목을 수업으로 편성하면 지필평가를 치르는 부담을 안아야 한다. 학생들에게 일일이 피드백을 해주는 것도 만만찮은 일이었지만, 어떤 활동보다 큰 배움을 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1년 뒤, 학생들은 이 믿음을 증명해줬다.
취재 정애선 기자 asjung@naeil.com 사진 박정우
부산사대부고를 찾은 지난 8일 2학년 학생들의 사회과 과제 연구 보고서 발표가 한창이다. 이유진, 전지연 학생이 잡은 주제는 ‘소방관의 처우와 인식 개선’.
“2016년 기준 소방관의 1인당 위험수당은 6만 원, 현장에서 겪는 정신적 트라우마를 치료하기 위해 주어진 예산은 단돈 7천 원입니다. 이들을 위한 전문 병원도 없고, 1인당 1천300명을 담당해야 하는 인력 문제도 심각합니다. 과연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부산사대부고 학생 200명과 교사 50명을 대상으로 3~6월까지 설문 조사를 실시했습니다. 교사보다 학생들의 인식이 다소 낮았지만, 소방관에 대한 처우가 개선되어야 한다는 응답률은 교사와 학생 모두 90% 이상으로 나타났습니다.”
소방관의 처우 개선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조사해본 결과도 인상적이다. 설문 집단의 눈높이에 맞는 현실적 대안을 끌어냈기 때문.
“선생님들은 소방관 처우 개선을 약속하고 지킬 수 있는 정당과 정치인에 투표하기, 서명 청원 운동에 적극 참여하기가 많았고요. 학생들은 장난 전화나 허위 신고 하지 않기, SNS에 소방관의 처우 개선 적극 알리기 등의 답변이 많았습니다. 모두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제시했네요. 소방관의 근무 환경이 개선되려면 가장 먼저 지방직을 국가직으로 바꿔 충분한 예산을 확보해야 합니다. 시민 인식 개선도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골든타임에 도착해야만 사람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지만, 우리들의 도움 없이는 해낼 수 없는 일입니다. 오늘의 부산사대부고 ‘꿈꾸는 라디오’는 소방관들의 처우 문제와 함께해봤습니다.”
쑥스러운 표정으로 발표를 마치자마자 쏟아진 친구들의 박수는 조사하고, 밤새워 보고서를 작성해 발표하기까지 과정이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있는 ‘동료애’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무모한’ 도전, 살아 있는 사회탐구를 경험하다
부산사대부고 인문사회 과정 학생들은 2학년 1~2학기에 걸쳐 2단위씩 총 4단위로 편성된 <과제연구> 수업을 듣는다. 학생들이 팀을 이뤄 스스로 주제를 정하고 탐구해보는 활동의 교육적 가치는 분명하지만, 많은 학교가 교육과정 안에 녹여내기보다 별도의 대회로 운영하는 이유는 적지 않은 어려움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사회과 백수정 교사는 처음 이 과목을 개설할 당시 염려와 기대가 동시에 있었다고 했다.
“교과서도 없는 과목을 오직 학생들의 활동에 의존해 진행해야 하는 부담 속에 과연 모든 학생이 일정 정도의 수준과 형식을 갖춘 연구 보고서를 작성할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이 수업이야말로 학생들의 사회탐구 능력을 키우기에 더 없이 적합하다고 확신했죠. 사회라고 하면 대부분 ‘암기 과목’을 먼저 떠올리지만, 본질적으로는 교과서에 나오는 개념을 바탕으로 사회 현상을 탐구할 수 있어야 하거든요. 문제의식을 가지고 그 의문의 해답을 찾기 위해 책이나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고, 설문 조사를 하고, 인터뷰를 하는 작업을 학생들이라고 접근할 수 없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일반고의 환경적 특성 안에서 가능한 방법을 최대한 고민했다. 충분한 수업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일주일에 2시간 블록타임으로 운영하기로 하고, 학급을 나눠 맡은 사회과 교사들이 지속적으로 협의하며 평가 기준을 맞춰나갔다. 지필평가를 60% 반영해야 하는 문제는 과제연구에 들어가기 전 배우는 사회 조사 방법론 내용으로 설계했다.
과제연구 워크북을 만들어 학생들이 매 시간 토의하고 피드백 받는 내용을 모두 기록하게 해 과정 평가로 반영했다. 이 모든 과정이 공개되니 학생들의 이의 제기나 결과에 불복하는 사례는 한 건도 나오지 않았다.
“다른 학교에서 과제연구를 이벤트성 대회로 소화하는 건 저희가 첫해에 겪은 한계들을 극복하기 힘들기 때문일 거예요. 교사 1인당 맡아야 하는 팀이 50개가 넘었는데, 일주일 동안 과제를 주고 수업 시간에 피드백을 해주는 게 현실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었죠. 이 부분을 교사들의 팀워크로 극복할 수 있어야 해요. 학생들이 수업 시간 외에 토의하고 조사하고 보고서 쓰는 데 투자하는 시간을 얼마나 긍정적으로 봐주는지도 중요한 문제죠. 국·영·수 공부할 시간을 왜 허비하느냐는 분위기가 되면 지지를 받기 어렵거든요.”
교사들의 믿음은 학생들을 통해 확인됐다. 모든 학생이 참가할 수 있었고, 탐구 활동이 끝난 뒤 학생들의 만족도와 성취감도 높았으며, 무엇보다 학생들의 삶과 결부된 연구가 이뤄졌다. 수업 초반부터 연구 주제를 자신의 진로나 관심 영역 안에서 찾도록 하고, 조 편성도 이를 기반으로 했다. 백 교사는 “학생들의 보고서를 책으로 엮어보니 어느 누구의 어느 한 페이지가 허투루 쓰인 것이 없었다”고 표현했다.
일상 수업에서도 학생 참여 끌어낼 요소 접목
과제연구뿐 아니라 일상적인 수업에서도 학생들의 참여를 유도할 수 있는 요소를 접목하려 노력한다. 실생활과 접목할 여지가 많은 지리 수업에서는 단순히 교과서 내용을 암기하기보다 정보를 처리하고, 디자인하는 법까지 배울 수 있도록 세계 여행 상품 브로슈어를 만들어 매력 있게 홍보해 판매해보는 활동으로 수업을 설계한다. 위성 영상 지도 서비스인 구글어스를 활용해 동일한 화산 지역이지만 제주도와 백두산이 어떻게 다른지 탐구해보기도 했다.
지리과 담당 강유정 교사는 “제가 공부하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풍경인데, 시대가 변했으니 수업 방식도 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보 자체보다 이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고민에서 출발했지만, 학생들에게도 훨씬 심도 있는 교육이 되더라”고 전했다.
부산사대부고에는 고교에는 거의 없는 원어민 교사가 있다. 학생들이 회화 수업을 경험할 수 있도록 교육부에 지원을 요청, 일주일에 한 시간씩 원어민 교사와 함께 코티칭(co-teaching) 수업을 한다. 주제를 정해 영어로 대본을 쓰고, 프레젠테이션하는 과정은 수행평가로 연결했다. 수업에서 훈련을 받고 나니 영문 보고서 대회에 도전하는 학생이 학년 전체 인원의 절반을 넘더라고.
‘수포자’ 없는 교실을 위해 수학 수업 시간 50분 중 20분은 강의를 하고, 나머지 시간은 모둠에서 다양한 수준의 수학 문제를 해결해 발표할 수 있도록 한다. 수학과 김무진 교사는 “발표자는 뽑기로 정하기 때문에 누구나 발표할 수 있다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온다. 중학생 때까지 수학에 전혀 흥미가 없던 학생이 자신에게도 수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줘서 수업이 재미있다고 했다는 얘기를 학부모에게 전해 들었는데, 학생들도 이 과정을 계속 반복하니 적응해가는 것 같다”고 했다.
내년 교육과정, 선택 과목의 획기적 확대 시도
학생 참여형 수업과 과정 중심 평가에 대한 노하우가 쌓이면서 2015 개정 교육과정에 따라 설계해야 하는 내년 교육과정 편성에서도 좀 더 적극적인 시도를 해볼 수 있었다. 교육과정을 짜기 전 교과부장들이 모여 학생들이 희망 진로에 따라 어떤 과목을 배우는 게 좋을지 사전 조사를 했다. 아직은 진로를 탐색하는 시기인 만큼, 배우고 싶은 과목은 자유롭게 열어줄 수 있는 유연성도 확보해야 했다. 그 결과 150~170개에 이르는 과목이 편성됐다(표 참조). 교육과정 담당 최영태 교사의 설명이다.
“2학년에서 선택을 줄 수 있는 자율 단위가 학기당 6단위, 학년당 12단위 정도가 됩니다. 한 학기에 한 과목을 집중 이수하는 게 효율적인 과목은 4단위로, 1년 동안 이수해야 할 과목은 학기당 2단위씩 나눠 편성했습니다. 학생들은 4단위로 편성된 과목과 2단위로 편성된 과목 중 자유롭게 한 과목씩 선택할 수 있죠. 3학년은 자율 편성을 대폭 늘려 1학기에는 26단위, 2학기에는 20단위를 자율적으로 선택 이수할 수 있게 했습니다. 편성하면서 가장 고민했던 것은 학생들이 진로에 따른 관련 과목을 최소 30단위는 들을 수 있게 하는 문제였어요. 예를 들어 제2외국어는 2학년에 편성된 과목을 1학년으로 내려 Ⅰ과목을 배우고, 2학년 때 Ⅱ과목, 3학년 때는 필요할 경우 심화 과목을 이수할 수 있게 했지요. 일반고에서 우수한 역량을 나타내는 학생의 경우에는 수학과 과학에서 무학년제를 운영해보려고 합니다. 심화수학 Ⅰ·Ⅱ와 고급수학 Ⅰ·Ⅱ는 3학년에 편성됐는데, 내년 신입생이 3학년이 되면 이 과목들을 2학년에도 개방하는 방식입니다.”
2015 개정 교육과정의 취지를 반영하기 위한 고민이 자체적인 협의 과정을 거쳐 여기까지 완성된 데 대해 한국진로진학정보원 진동섭 이사는 ‘굉장히 가치 있는 일’이라고 봤다. 교사들의 팀워크와 자유로운 소통이 미래형 교육과정을 만들어가는 데 필수적인 전제 조건임을 다시 확인한다.
전문가의 눈으로 본 부산사대부고
학생 주도형 수업이 ‘진짜 역량’ 키운다
지난 5월 포르투갈에서 열린 ‘OECD 미래교육 2030’에서는 미래 교육의 열쇠로 ‘학생 주도성’에 주목했다. 과거에는 백과사전에 정답이 있었지만, 지금은 온라인에 수만 개의 답이 있고 이 중 어떤 답을 선택할지는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시대이므로 ‘학생 주도성’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학생 주도성은 ‘다른 사람이 결정해주는 것이 아닌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며, ‘지시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닌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것’이고 ‘자신의 미래를 형성하는 것’을 뜻한다고 했다. 특히 학생 주도성에서는 무엇을 배울지조차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부산사대부고는 학생 주도성을 중심으로 교육이 이루어지는 기틀을 만들고 있다. 우선 학생이 참여하는 수업으로 학생의 역량이 높아지고 있다. 인터뷰한 학생은 자신의 수학 성적으로 보면 교내 수준은 늘 비슷한데, 왠지 실력이 늘고 있다는 느낌이 들고, 대외 시험을 보면 전국 성적은 높아진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이 학교 학생 모두가 학생이 활동하는 수업으로 역량이 동반상승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부산사대부고는 여기에 더해 교과 간 선택이 가능한 선택 교육과정을 계획하고 있다. 필수로 정한 과목 이외에는 수학, 영어, 예술, 체육 등 많은 과목 중에서 자신이 공부할 과목을 정할 수 있는 교육과정이다. 2018학년이 되면 부산사대부고는 ‘학생 주도성’을 중심으로 교육을 실천하는 미래형 학교로 거듭날 것이다.
_한국진로진학정보원 진동섭 이사
미즈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