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릴 지브란의 권고
2013년이 저물어 간다. 돌이켜보니 올 한해를 달궜던 키워드 중 하나가 ‘증오’ 아니었을까 한다. 그 원인과 양상이야 어떻건, 우리는 우리 사회가 풀어야할 숙원의 과제가 분열과 적개심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누구도 감히 ‘용서’를 권하지 못한다. 왜일까? ‘정의’라는 명분이 워낙 우뚝하게 위용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오늘의 상황에서 ‘용서’를 말하는 것은 금기일까?
시인이자 구도자인 칼릴 지브란은 기개 있게 말한다.
그대들은 누구에겐가 잘못을 저지른다.
또한 그대 자신에게도.
의로운 자가 사악한 자의 행위 앞에서
전혀 결백할 수 없으며
정직한 자가 그릇된 자의 행위 앞에서
완전히 결백할 수는 없는 것.
그대들은 결코 부정한 자와 정의로운 자를
사악한 자와 선한 자를 가를 수 없다.
이들은 다 태양의 얼굴 앞에 함께 서 있기 때문이다.
그대들 중 누군가가
부정한 아내를 재판하고자 한다면
그녀 남편의 마음도 저울에 달고, 영혼도
재어보게 하라.
또 죄인을 채찍질하려는 자는 죄지은 자의
영혼을 헤아린 연후에 그리 할 것인가를 고민하라.
정의란, 그대들이 기꺼이 따라가려는
법의 정의란 무엇인가?
바로 뉘우침이 아니겠는가.
죄인의 가슴에서 뉘우침을 빼앗지 마라.
뉘우침이란 청하지 않아도
한밤중에 찾아와
사람들을 깨우며 스스로를 응시하도록
만들고 있으니.
곰곰 음미해볼 가치가 있는 영감어린 글이다. 남을 판단하지도 말고 단죄하지도 말라는 예수님의 가르침과도 한 맥락이다. 게다가 궁극의 반전인 ‘뉘우침’을 겨냥하고 있으니 손색없이 성서적인 예지라 하겠다. 대림절 판공성사 성찰문으로 삼아보면 어떨까.
■ 베드로의 셈법과 예수님의 셈법
<사도신경>에서 ‘죄의 용서를 믿으며’는 여러 차원의 은총을 함의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 이외에도, ‘죄의 용서’는 남의 죄를 용서하는 특은을 내포한다. 어떻게 그런지 보기로 하자.
그리스도인은 세례성사와 고해성사를 통해서 이미 죄를 용서받은 사람들이다. 용서를 받은 사람으로서 우리는 두 가지를 살아내야 하는 부르심 앞에 서게 된다.
그 하나는 ‘용서 받은 사람의 삶’이다. 용서 받은 사람의 당당함이 필요하다. 천국의 자녀답게. 앞의 글에서 창조주 하느님이 “고개를 들어라. 나는 네 뒤통수를 보려고 너를 만든 게 아니다. 네 두 눈을 보고 싶어서 너를 만들었다. 그러니 나를 똑바로 쳐다보아라” 하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주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살아갈 필요가 있다.
다른 하나는, 내가 용서 받았으면, 이제 용서를 자꾸 확산시키는 것이다. 용서의 은혜를 나누는 것이다. 하느님이 나한테 거저 용서를 주셨는데, 내가 이 세상 사람들하고 원수를 맺으면 되겠느냐 이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하고 화해하며 살 필요가 있다.
용서해야 우리가 이미 거저 받은 용서를 유지할 수 있다. ‘매정한 종의 비유’(마태 18,21-35 참조)에서처럼 우리가 형제의 작은 잘못을 용서해 주지 않는다는 것은 ‘만 탈렌트’나 되는 빚을 탕감 받고도 ‘백 데나리온’밖에 안 되는 빚을 진 동료의 멱살을 잡고 빚 갚을 것을 호통치는 꼴이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도 이미 탕감 받은 것을 취소당하는 낭패를 면치 못할 것이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5).
이 말씀은 우리를 살리기 위한 명령이다. 하느님은 우리의 ‘산더미’ 같은 빚을 다 탕감해 주셨는데 거기에 비하면 다른 사람이 우리한테 한 잘못은 ‘개미 집’ 정도밖에 안 된다. 하느님께 받은 그 큰 용서를 생각할 때 어떻게 서로 용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예수님이 하도 “용서, 용서” 하시니까 하루는 베드로가 예수님께 물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 18,21)
당시 라삐들은 인간이 베풀 수 있는 용서의 횟수를 최대 ‘세 번’으로 가르쳤다고 한다. 베드로는 이를 파격적으로 마음을 써서 ‘일곱 번’으로 올려 물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예수님의 대답이 베드로를 크게 한 방 때렸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이 대답을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려 한 것은 용서란 주판알을 튕기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횟수를 세는 것 자체가 이미 용서를 주저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도 바오로는 용서를 하느님께 맡기는 것이 상책이라고 권고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로마 12,19).
결국 용서란 믿음의 행위다. 남을 용서하는 것은 결국 하느님을 믿는 것이다. 하느님이 나보다 정의를 실현하는 데 뛰어난 분이심을 믿는 것이다. 용서함으로써 복수의 권리를 거두고 정의의 판결을 모두 하느님께 넘겨드리는 것이다.
■ 그냥 줘버리는 것
‘용서’라는 말뜻이 재미있다.
한자로 용서(容恕)는 받아들이고 소화하고 수용하는 것을 의미하는 용(容)과 헤아려서 이해하는 것, 그 마음을 알아주는 것(如心)을 의미하는 서(恕)의 합성어다. 그러니까 동양적인 의미에서 용서는 소화하고, 헤아려주고, 마침내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줄 수 있을 때 가능하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반면, 영어로 용서는 ‘forgive’다. 이는 ‘위한다’는 ‘for’와 ‘주다’는 뜻의 ‘give’의 합성어다. 또 ‘pardon’이라는 단어로도 쓰이는데 여기서 ‘don’은 라틴어 ‘donum’ 즉 선물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무조건, 거저 베푸는 것이 용서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동양적 사고방식과 서양적 사고방식의 차이를 엿볼 수 있다. 동양에서는 보다 근원적인 방법을 제시하였다고 보인다. 소화하고, 헤아려주고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주면 사실 모든 것이 끝난 셈이다. 다 청산된다.
그런데 서양에서는 실용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소화하고 헤아리다가 오히려 미움의 수렁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본래 취지는 말하자면 이렇다. 용서치 못할 합당한 이유가 있다고 하자. 좋다. 옳다. 인정한다. 그러나, 그래도 선물처럼 거저 베풀어라. 그까짓 거 그냥 줘 버려! 이거다. 내 생각에 여기에는 아무래도 그리스도교의 복음 사상이 깔려 있는 것 같다.
물론, 진짜배기 용서는 ‘容恕’와 ‘forgive’의 합작품일터다.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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