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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용조 목사 시편 연구 5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시편은 크게 두 가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첫째는 그의 위대한 창조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에는 생명이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임재가 그 안에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창조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
를 하는 축복도 받게 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창조의 위대한 능력, 솜씨들을 우리가 찬양을 합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찬양하는 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자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천지는 무엇으로 창조되었습니까? 말씀
으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한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을 모든 성도들은 찬양하지만, 동시에 창조보다 더 중요한 것
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 율법이 얼마나 좋은지
요. 그 율법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래서 이 율법을 찬양하고, 율법을 노래하고, 율법 아래
서 까무러치는 얘기들이 시편에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주는 여섯가지 복 :
[영혼 소성]
[미련한 것 벗겨 주심]
[기쁜 마음]
[순결한 눈]
[영원에 연결해 주심]
[의로움]
창조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 말씀
오늘은 시편 19편과 119편을 통해 어떻게 시편기자들이 이 말씀에 부딪혀서 녹아지고, 말
씀에 부딪혀서 영혼이 소생함을 받고, 말씀에 부딪혀서 마음에 기쁨을 얻고, 말씀 안에 거
함으로 말미암아 새로워졌는가? 위로받고 축복받았는가 하는 이야기들을 오늘 함께 나누려
고 하는 것입니다.
먼저 시편 19편을 보겠습니다.
1절부터 6절까지는 무엇을 노래합니까? 천지창조를, 하나님의 그 창조의 위대하심을 찬양
하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해는 그 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 온기에서 피하여 숨은 자 없도다”
이렇게 천지창조에 대한 감탄과 찬양을 돌린 다윗은
7절부터 말씀을 찬양하는, 율법을 찬양
하는, 말씀을 찬양하는 방향으로 돌립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
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또 주의 종
이 이로 경계를 받고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천지창조를 묵상하면 그 천지창조에 대한 묵상은 하나님에게까지 갑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
나님을 묵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묵상하다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게 됩니
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
고’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빛이 있으라’하시니까 빛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천지와 우주 만물과 창조의 꽃인 인간을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
씀’이 육신이 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를 보면, 말씀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 것을 볼 수 있
습니다. 말씀이 그리스도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분이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말씀을 예언자나 종들을 통하여 성경으로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얼마나 순결하고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지! 이 시편 기자
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까무라칠 정도로 기뻐하고 있습니다.
7~9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합니다. 이 ‘완전하다’라고 하는 용어는 제사용어로써 ‘온전하다’는 뜻
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서 쓰이는 짐승은 흠이 없고 점도 없는 짐승이었습니다. 조
금이라도 잘못이 있으면 안됩니다. 완전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처럼, 여호와의 율법은
빈틈이 없습니다. 완전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우리의 영혼을 소성케 합니다. 생명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애가 1장을 보겠습니다. 거기에는 음식을 먹지 못해서 생명이 꺼져가는 그런 묘사가
몇 가지 있습니다.
“그 모든 백성이 생명을 소성시키려고 보물로 식물들을 바꾸었더니 지금도 탄식하며 양식을
구하나이다 나는 비천하오니 여호와여 나를 권고하옵소서”
이 11절은 음식이 없어서 고통받는 심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이를 인하여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 같이 흐름이여 나를 위로하여 내 영을 소성시킬
자가 멀리 떠났음이로다 원수들이 이기매 내 자녀들이 외롭도다”
나를 위로하여 내 영을 소성시킬 자가 멀리 떠났으니 이제는 살 길이 없습니다. 이런 심정
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19절을 보시겠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를 불렀으나 저희가 나를 속였으며 나의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소성시킬
식물을 구하다가 성중에서 기절하였도다”
이런 모습이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북한에 있습니다. 제가 이야기를 들으니까 기본적인 영
양이 공급되지 않기 때문에 그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다른 것보다도 설탕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먹을 것이 없어서 기진한 사람들에게 영양을 공급하면 몸이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영혼이 탈진한 사람, 영혼이 죽게 되어있는 사람에게 말씀이 들어가면 그 영혼이 살아납니
다. 시편 기자는 이것을 경험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갈한 것이 아니고 말씀이 없어서
갈하다고 아모스는 말합니다.
사람들의 영혼이 이리저리 방황합니다. 요즘 우리나라에는 먹을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우
리 백성들의 영혼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영혼이 말라가고 있는 사람들이 사는 길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
다. 말씀은 완전하여 우리의 영혼을 소성시키십니다.
여호와의 증거, 우둔한 자 지혜롭게 해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한다고 했습니다. ‘미련한 자’에 대한 이야
기는 잠언에 많이 나옵니다. 이 ‘미련한 자’는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잠언 21장 19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미련한 자는 절구에다 빻아도 깨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미련을 깨우치기가 무척 어렵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이 미련이 어떻게 벗겨집니까? 하나님의 말씀, 율법이 들어가면 미련이 벗겨집니
다.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하여금 지혜를 줍니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을 소성케 합니다. 탈진하고 더 이상 기력이 없는 내 영혼을 살게 만
듭니다.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만듭니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내 영혼이 기쁜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이 이런 기쁨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환경과 상관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비록 감옥에 있었지만 '기뻐하라. 내가 다
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내 영혼의 기쁨은 말씀만이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 때는 기쁨이 샘솟듯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맑은 눈을 줍니다. 여러분에게 이 맑은 눈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오면 영혼의 눈이 열립니다. 새로운 세계가 보이는 것입니다.
깨끗하고 맑은, 그런 눈을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9절을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영원까지 이른다고 했습
니다. 말씀은 나를 '영원'에 연결시켜 줍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없
습니다. 사탄을 통해 죄가 인간에게 들어왔을 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죽었던 것입니다.
전도서 3장 1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합니다.
인간은 '순간' 속에서 삽니다. '영원'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인간이 제일 갖기 어려운 개념
중의 하나가 '영생'입니다. 영생을 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 개념이 인간에게 없습니다. '거
듭났다'는 개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우리에게 거듭남의 복을 주십니다. 성령
님이 우리에게 오시면 '하나님의 생명'과 '영원'이란 개념이 접붙여져서 그것을 느끼기 시작
합니다.
이것은 마치 죽어있는 세포가 살아나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은 '죄'라는 문둥병을 갖고 있습
니다. 문둥병자는 꼬집어도 느낄 수 없습니다. 감각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도 하나님
에 대한 감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셔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들어오시면, 감각들이 살아납니다. 하나님에 대한 감각,
영혼에 대한 감각, 생명에 대한 감각, 복에 대한 감각들이 살아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
리를 영원에 연결시켜 줍니다.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롭습니다. 모두에게 의로움을 줍니다. 이것이 율법 즉 하나
님의 말씀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얼마나 좋은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일곱번 단련한 은같은 하나님 말씀
하지만 우리는 '율법적'이라는 말과 '율법'이라는 말을 구분해야 합니다. '율법적'인 것은 좋
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 하나님의 말씀은 순결하여 도가니에 일곱번 단련한 은
같다고 했습니다.
시편 12편 6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이 시편 기자는 완전한 하나님의 율법, 확실한 율법의 증거, 교훈, 계명, 규례를 이렇게 느
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시편 119편 기자는 입을 헐떡거렸다고 했습니다.
131절입니다.
"내가 주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시편 기자는 무척이나 말씀이 좋아서 '헐떡인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우리도 좋은 사람을 만
나면 헐떡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매우 좋아서 걸어가지 못하고 뛰어갑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토록 좋아하고 이토록 사랑했습니다.
말씀의 완전함, 말씀의 확실함, 말씀의 놀라운 영적 교훈들, 이런 것들을 시편 기자는 경험
했습니다.
여러분, 7~9절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여섯 가지 복을 살펴보았습니다. 첫 번째로,
내 영혼을 소성케 합니다.
두 번째, 말씀은 나의 미련한 것을 벗기고 지혜를 줍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미련한 자는 어
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성경을 보면 지혜에 대한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
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순결
한 눈을 줍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우리를 영원에 연결해 줍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우리를
의롭게 하십니다. 할렐루야 !
여러분,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 천지창조를 묵상하다보니 말씀, 율법을 묵상하게 되었
습니다. 말씀은 무엇입니까? 말씀은 하나님 자신을 의미합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율법을 묵상하게 된 것입니다.
자, 그러면 10절에서는 이 율법의 가치가 얼마라고 평가합니까? 금이 아닌, 정금이라고 평
가합니다. 그 당시에는 금이 가장 가치 있는 보물이었습니다. 이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
씀은 금중에서도 정금과 같다고 말합니다.
시편 기자가 시를 썼을 당시, 가장 단 것은 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기자는 꿀보다
더 좋은 송이꿀과 같다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경계를 받고, 율법을 지킨 자에게
복을 주신다고 합니다.
참으로 시편 19편은 신비롭습니다. 천지창조를 묵상하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게 되었
습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율법을 깊이 묵상하다 보니까 그 다음 것을 묵상하게 됩니다. 12
절입니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천지창조와 율법을 깊이 묵상하다보니까 서서히 자기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에는 자
기가 보이지 않습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묵상하다보면 정말로 오만하고 보잘 것 없는, 벌
레 같은 자신의 존재를 보게 됩니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그 다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시편 기자는 대우주를 묵상하다가 소우주로 내려 왔습니다. 자기의 모습
을 봤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구제불능인, 인간 본연의 자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시편 32편 1절입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누가 복이 있습니까?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는 사람입니다. 내게 죄가 있
는데 그 죄가 노출되었습니다. 어찌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누가 와서 그 죄를 덮어 주
었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요? 인간의 본질은 더럽고 추악하고 음란하고 거짓투성이고
욕심이 많습니다.
이렇게 시편 기자가 자기 고백을 했습니다. '어찌 내가 내 허물을 알 수 있겠습니까? 정말
이렇게까지 내가 사악합니까? 인간이 이토록 더러울 수 있습니까?'
많은 실존주의자들이 그것을 다 증거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요, 본연의 모습입니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않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토설치 않을 때에는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다고 했습니다. 뼈 마디마디가 아픈 것
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하나님이 짚고 계신 것입니다. 주야로 누르고 계시니
도망을 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진액이 여름 가뭄같이 바짝 마릅니다. 뼈가 아프고 내 몸에
는 진액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죄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존입니다. 이 적나라한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자기의 죄에 대한 인식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이 사람만이 고백할 수 있는 말이 이것
입니다. '허물이 가리움을 받고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죄에 대한 시편 기자의 깊은 묵상
다시 시편 19편으로 돌아옵니다. 13절입니다.
"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이 사람이 죄에 대한 묵상의 깊이는 무척 깊습니다. 저는 이 시편 기자가 정말 정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의 적나라한 모습을 하나님께 다 고백합니다. 시편 기자가 이렇게 말합니
다. '주님, 내가 알면서 짓는 죄가 있습니다. 나를 도와주십시오. 내 힘으로는 안됩니다. 나
를 붙잡아 주시고 나를 도와주십시오.'
우리는 죄와 싸워 이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죄를 이기셨습니다. 내 의지와 내 노력으로
는 죄가 처리되지 않습니다. 주님이 나를 도와주셔야, 성령이 임해야 내가 이 죄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어둠을 몰아내는 유일한 방법은 빛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 안의 어둠을 몰아내는 방법
은 빛이신 예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죽음을 몰아내려면 생명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생명이신 예수님이 나를 주장하게 하셔야 합
니다.
지금 이 시편 기자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습니까? 말씀을 묵상하다가 자기를 묵상하고 있습
니다. 자기를 보니까 깡통이나 다름없습니다. 자기를 보니까 죄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죄
도 다 알고 짓는 죄 뿐이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그 죄가 자신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그는 점점 고개가 숙여지고 머리가 땅에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서원, 헌신을 합니다.
14절입니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
기를 원하나이다"
얼마나 아릅답습니까? 이 짧은 시에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까? 처음에 하나
님의 천지창조를 노래하던 시인이 율법을 묵상하게 되고, 율법을 묵상하다가 자기를 보게
되고, 추악한 자기 모습을 발견하고 그는 자신의 구원자를 부르고 있습니다.
'내가 고범죄를 짓지 않게 하시고,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옵소서. 누군가가 나를 도
와주셔야 합니다.'
그 누군가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기자는 자신의 연약함을 보며 자신을 구원해 줄 구
원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기자가 죄에서 벗어나 살 수 있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
기를 원합니다.'
시편 15편을 보겠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
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 변리로 대금치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 아니하는 자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
리이다"
여러분,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습니까? 내 의지와 노
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을 받아야 하고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야만 이렇게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은 물 위를 걷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물 위를 걸
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물 위를 걷겠습니까? 그러나 놀라지 마십시오. 그렇게 할 수 있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을 모십시오. 영접하십시오. 그러면 그
분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나는 그렇게 살만한 사람이 아니지만, 그분이 내 안에서 그렇게
사십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 하나님께서 복 주셔
시편 24편을 보겠습니다.3절부터 6절까지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셀라)"
저는 여러분들 중에 교활한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정직한 사람을 기뻐하십니
다. 해로울지라도, 손해 볼지라도 단순하게 사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복잡하면 안됩니다.
여러분 마음이 단순하기를 바랍니다. 순결하기를 바랍니다. 어린 아이와 같게 되기를 바랍
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 말씀‘ 으로 쓰인 일곱 단어 :
[법] [증거] [법도] [율례] [계명] [판단] [말씀]
마음 속에 주의 말씀 떠나는 일 없어야
이제 시편 119편으로 넘어 가겠습니다. 이 시편 119편을 보면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
모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편안한 가운데 이 시를 쓰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공부해 보면
아시겠지만, 이 시는 여러분이 겪었던 고통보다 훨씬 심각한 고통과 역경, 아픔 속에서 썼
습니다.
1절부터 8절까지 먼저 읽겠습니다.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고 전심으
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실로 저희는 불의를 행치 아니하고 주의 도를 행하는
도다 주께서 주의 법도로 명하사 우리로 근실히 지키게 하셨나이다 내 길을 굳이 정하사 주
의 율례를 지키게 하소서 내가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할 때에는 부끄럽지 아니하리이다 내
가 주의 의로운 판단을 배울 때에는 정직한 마음으로 주께 감사하리이다 내가 주의 율례를
지키오리니 나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
거의 매 절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시편 119편은 재미있습니다.
히브리어에는 알파벳 22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는 8행시로 22자 순서대로 썼습니다.
시편 119편은 1백76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중요한 단어를
반복해서 쓰고 있습니다. 일곱 가지가 있는데 1절에서 9절 안에 모두 나옵니다. 율법에 대
한 별명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1절에서 나오는 '법'은 방향을 제시하거나 가리킬 때 쓰는 말입니다.
2절에 나오는 '증거'는
공식적으로 확증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4절의 '법도'는 교훈이나 훈계, 금지 등을 말할 때
씁니다.
5절은 '율례'입니다. 이것은 신명기 6장과 같이 기록되고 새겨진 것을 말할 때 사용
한 단어입니다.
6절을 '계명'은 권위 있게 부여하는 명령을 말합니다.
또 7절의 '판단'은 재
판에서 무언가를 결정할 때 쓰는 말인데 그중에서도 의로운 판단을 말합니다.
9절에는 '말
씀'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할 때, 자신의 말씀을 보여
줄 때 이런 표현을 씁니다.
이런 다양한 표현들을 시편 119편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시편 119편은 아까 19편에서 본 것과 같은 말씀의 속성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37절을 보시겠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고 주의 판단은 정직하시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굽은 것이 없습니다. 정직합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42절을 보시겠습니까?
"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
이처럼 시편 19편에서 우리가 보았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160절을 보십시오.
"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오니 주의 의로운 모든 규례가 영원하리이다"
영원한 말씀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주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일
점일획도 틀림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다 이루어집니다.
86절을 한 절 더 보겠습니다.
"주의 모든 계명은 신실하니이다 저희가 무고히 나를 핍박하오니 나를 도우소서"
나의 반석이신 하나님. 그 하나님은 쉬지 않으시고,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96절을 볼까요?
"내가 보니 모든 완전한 것이 다 끝이 있어도 주의 계명은 심히 넓으니이다"
140절입니다.
"주의 말씀이 심히 정미(靜美)하므로 주의 종이 이를 사랑하나이다"
이런 표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처럼 놀랍기 때문에 164절에는 '하루에 일곱
번씩 찬양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도 하루에 일곱 번씩 주의 말씀을 묵상하고 찬양
하시기 바랍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 17절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
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
라"
그래서 이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찬양했고, 그 앞에 헐떡였고, 그 앞에 녹아졌습니
다. 이런 복을 그가 받았습니다.
그러면 시편 기자는 어떤 상황에서 이 시를 썼을까요?
22, 23절을 보시겠습니다.
"내가 주의 증거를 지켰사오니 훼방과 멸시를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 방백들도 앉아 나를 훼
방하였사오나 주의 종은 주의 율례를 묵상하였나이다"
이 시편 기자는 훼방과 멸시를 받는 가운데 이 시를 썼습니다. 25절입니다.
"주의 증거는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모사니이다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
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이 시를 쓸 때 시편기자는 자기 영혼이 진토에 붙은 것과 같은 고통 중에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무덤에 들어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편 기자는 실패, 좌절, 패배, 질병, 외면
등과 같은 기가 막힌 상황 속에서도 말씀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 말씀이 나를 소성케 했고, 그 말씀이 나를 위로했고, 내가 이런 훼방과 멸시를 받았지
만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놓지 않겠습니다. 나는 말씀을 잃지 않겠습니다. 율법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편 기자의 고백입니다.
39절을 보십시오.
"나의 두려워하는 훼방을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 주의 규례는 선하심이니이다"
42절을 보십시오.
"그리하시면 내가 나를 훼방하는 자에게 대답할 말이 있사오리니 내가 주의 말씀을 의뢰함
이니이다"
107절을 보십시오.
"나의 고난이 막심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신앙은 고난 안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있듯이, 고난 안에서 몸부림치며 하
나님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여러분들은 세상에서 더욱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편안한 길이 있지만
그 길로 가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말씀 때문에 그렇게 하기로 결심
한 것입니다.
그렇게 스스로 고난을 자초했지만 고난에 패배하는 자가 아니요 날마다 고난을 이기며 승리
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깊이 믿게 되면 세상 것을 먹지 않게 됩니다. 기도의 응답으로 살게 하십니다. 어
떻게 보면 이전에 세상 것을 먹을 때보다 모든 것에 제한을 받는 것 같지만 마음에 자유가
있습니다. 마음에 기쁨이 있습니다. 삶에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주리지 않게
하시고 피곤치 않게 하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법입니
다.
121절을 보시겠습니다.
“내가 공과 의를 행하였사오니 나를 압박자에게 붙이지 마옵소서”
이 사람에게는 압박자가 있었습니다.
161절입니다.
“방백들이 무고히 나를 핍박하오나 나의 마음은 주의 말씀만 경외하나이다”
‘방백’은 권력자입니다. 권력자가 이 사람을 괴롭게 했습니다.
119편을 읽어보면 시편 기자
는 이런 기막힌 핍박, 오해, 영혼이 땅에 붙어버린 것 같은 심정, 낙심, 절망 등 우리가 겪
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다 겪으면서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문제없는 사람들이 가 있는 곳은 공동묘지입니다. ‘문제를 이기게 하
옵소서’라고 기도하십시오. ‘이기되 나쁜 방법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방법으로, 말
씀으로 모든 환란과 역경을 이기며 승리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십시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인도는 하루가 아니라 한 끼라고 했습니다. 매끼마다 인도하시는 하
나님. 오늘 여러분들이 이런 율법의 찬양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 속
에서 위로를 받고, 영혼이 소성케 되고, 지혜를 얻고, 말씀 속에서 마음에 기쁨을 얻고, 말
씀 속에서 영원을 만나고 의로워지는 그런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사실 19편과 119편은 시편 1편과 연결됩니다.
시편 1편의 중요한 구절은 2절,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
는 자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
하는 복이 있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입술에서 말씀이 떠나지 않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
에서 주의 말씀이 떠나는 일이 없기를 축원합니다.
* 출처 : 온누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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