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섭의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가.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언어
김승섭의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는 그 독특한 제목 때문에 펼쳐든 책이다. 그런 책장을 한 장씩 넘기면서 점차 묘한 기분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우리 사회에 생각지도 못한 아픔이 깊이 베어있다는 사실은 내게 분명 충격이었다.
생각해 보니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는 온갖 차별과 그로 인해 피해들은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던 것이다. 보이지 않으면 우리는 쉽게 없다고 단정해 버린다. 보지 않았으므로 믿을 수 없는 것이 언뜻 당연한 일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순간 우리는 정치적 상황 속으로 빨려들고 만다. 그리고는 너무도 쉽게 편을 가른다. 우리에겐 언제부터인가 이쪽 아니면 저쪽 밖에 없는 이분법적 세계에 살고 있다. 성소수자의 아픔을 이해하기보다는 그저 별난 사람들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본다.
저자는 글머리에 자신이 왜 공부를 하는지에 대한 나름의 분명한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런 만큼 저자의 이 책은 저술 목적이 분명하다. 저자는 대학원 지망생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대답하고 있다.
“제게 공부는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언어였습니다. 타인의 고통은 타인의 것입니다. 우리는 손톱 밑에 찔린 가시로 아파하는 옆 사람의 고통을 알지 못하지요. 특히 부조리한 사회로 인해 상처받은 이들은 종종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숨죽이며 아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자는 손톱 밑의 가시를 드러내 보이고 그것을 빼버릴 때만이 고통이 멈출 것이라는 점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 했다. 그런데 누구도 그것은 자기들과 상관없는 일이라 외면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그의 말은 내게 절규처럼 들렸다.
“보이지 않는 상처가 당사자의 몸에 갇히지 않고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그 고통에 응답해야 합니다.” (7쪽)
이것이 그가 공부를 시작한 이유이다. 공부가 당장 사회 변화를 만들어 내거나 사람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줄 수는 없지만, 인류가 유사한 문제에 처해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는 동안 쌓아온 지식을 면밀히 검토하면서 얻게 되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나. 인류의 역사는 차별의 역사
인류의 역사는 차별의 역사이다. 인종간의 차별, 권력 유무에 따른 차별, 남녀의 차별,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 장애인에 대한 등 수없는 차별이 여전히 남아있다. 특히 아프리카에서 잡혀온 흑인은 인간이 아니라 단순히 노동이 가능한 상품으로 거래가 가능했다.
여성의 경우 한 세기 전만 해도 그저 재생산을 위한 자궁을 가진 생명체로 인식하는 가부장제 사회에 갇혀 있었다. 따라서 여성의 대학 교육이나 정치 참여는 논란의 여지조차 없었다. 그런 여성들은 ‘몸과 정신이 퇴화한 역겨운 반사회적 존재’로 취급되었다.
동성애자 역시 이성애 중심의 이분법적 질서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공동체의 온전한 구성원이 될 수 없었다. 기독교적 세계관이 지배하던 중세 유럽에서 규약성서 레위기는 정치적으로 불안한 시기마다 동성애자를 희생양으로 호출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러한 낙인은 종교가 과거처럼 정치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는 근대에도 여전히 남아있다. 동성애를 성도착증 환자로 분류하는가 하면 질병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음에도 성전환을 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수많은 동성애자를 사지로 몰아갔다.
한 사회가 표준이라고 여기던 몸은 항상 기득권의 것이었다. 스스로의 존재를 의심할 필요가 없던 기득권은 소수자의 몸을 두고 매번 인간의 자격을 따져 물었다. 백인은 흑인이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는지를 물었고, 남성은 여성이 고등교육을 받아도 되는지 물었다
이성애자는 동성애자의 존재가 질병인지 물었다. 그러나 가장 필요한 질문은 타인이 아닌 스스로를 향해 던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저자는 묻는다. “나는 정상인가?” 그러나 이런 물음은 정상의 의미가 무엇인지 되묻게 할 뿐이다.
다.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차별들
컨베어벨트 앞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화장실을 가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도록 강요받는다. 그것은 곧 생산성 향상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기저귀를 차기도 하고 물을 마시지 않기도 한다. 병원 중환자실에서 근무하는 간호사도 같은 환경에 처했다.
면세점, 백화점, 대형 마트 등에서 일하는 판매직 노동자들도 화장실을 못 가기는 마찬가지다. 매장 인력이 부족하거나, 화장실이 너무 멀기 때문이다. 이런 매장들은 보통 고객용 화장실 사용은 금지되어 있고, 직원용 화장실은 수가 적고 거리도 멀다. 가지 말라는 말이다.
그러고 생각해보니 집 앞의 대형 마트에서도 직원화장실을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 마트의 직원들은 화장실 사용을 어떻게 하고 있을까? “쌀 것이냐 말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to pee or not to pee, that is the question).”
다행히도 화장실은 남녀 차별적 상황 속에서 점차 개선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고속도로 휴게소의 여자 화장실 앞의 줄이 남자에 비해 훨씬 길다. 그러나 보다 큰 문제는 트랜스젠더들의 화장실 사용이라고 저자는 주의를 환기시킨다.
그들에게 화장실은 생리현상을 해결하는 장소가 아니라 성별을 검열하는 사회적 장치로 작동한다. 트랜스젠더는 화장실 출입을 제지당하기도 하는 차별을 겪고 있다. 문득 미국 여행을 할 때 보았던 공원의 화장실이 생각났다.
그곳에서는 화장실을 남녀가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화장실마다 그 앞에 남녀가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그 줄에는 트랜스젠더도 있을 것이다. 남자가 사용하고 나면 여자가 들어가는 식이다. 장애인들도 혼자서 충분히 사용할 수 있도록 안은 제법 넓었다.
그때는 그것이 참으로 이상했는데 지금 이 책을 읽으면서 그것이 여성, 트랜스젠더들을 위한 배려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에게 그런 화장실이 설치된다면 아마도 여성들이 가기를 꺼려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이런 나의 생각도 차별에 근거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라. 포괄적 차별 금지법
“남성과 여성이 화장실 앞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같아지는 세상, 신분증 확인이 두려워 투표를 포기하는 트랜스젠더가 없는 세상... 일하다 다쳐도 공장 병원에서 치료받지 못하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없는 세상... 누구도 홀로 남겨지지 않는 세상.” (221쪽)
이처럼 저자는 꿈꾸는 세상은 단순하다. 더는 차별이 없는 세상이 그가 그리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을 위해 포괄적 접근법 제정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저자는 찾는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고 있다.
그들이 법 제정을 간절히 원하는 이유는 참으로 간단하다. 차별 받는 세상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다. 그렇다면 이 사회가 가지고 있는 그런 의식을 바꾸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역사 속에 켜켜이 쌓인 불평등 구조를 깨뜨리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차별 금지법은 그저 ‘나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 법’이다. 차별이 무너질 때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차별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상은 차별을 받는 대상들은 모두 숨 죽이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모른다.
저자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대한 오해를 안타까워하고 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 표현만을 금지하는 법이 아니다. 성소수자는 차별금지법이 보호하는 수많은 집단 중 하나일 뿐이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혐오 표현만을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네 가지 주요 영역(고용, 교육, 행정서비스, 재화•용역의 공급과 이용)에서 혐오의 근간이 되는 차별 행위를 막기 위한 법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저자와 활동가들은 정치권을 강하게 질타한다. 차별금지법에 대해서도 그저 순간의 위기를 모련하기 위해 ‘나중에’와 ‘사회적 합의’를 들먹인다. 정치권이 성소수자나 차별의 대상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혐오하듯 활동가들 또한 정치권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한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한 인간이 가진 성별, 나이, 장애, 성적 지향 등 다양한 조건을 고려해 차별을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법인 동시에, 여러 소수자 운동이 가진 힘을 이어주는 연결고리 역할을 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러나 이 법은 여전히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이 법은 성적 지향, 성별정체성, 전과, 고용, 학력 등 전반적인 차이를 금지하는 법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비판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성범죄자도 모든 직업을 가질 수 있게 된다는 사실에 동의할 국민은 아직은 별로 없다.
마. 세상을 바꾸는 일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 내린 다양한 차별들은 쉽사리 자리를 내줄 생각이 없다. 여자 검사가 미투를 외치고, 군부대에서 성추행이 일어나고, 성소수자들의 그들의 권리를 위해 목소리를 높여도 그저 그 때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차별의 저편에 선 사람들은 늘 피해자이므로 피해자답게 우울한 얼굴로 숨어지내야 한다고 믿는 듯하다. 어쩌면 이 책의 저자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영화감독과의 인터뷰 내용이 의아스럽다.
영화 ‘공동정범’의 김일란 감독과의 인터뷰가 관심을 끈다. 저자는 감독에게 자기가 기대했던 영화가 아니라고 말하는 듯했다. ‘공동정범’은 용산참사 피해자들에 대한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지만 피해자들의 처절한 고통, 연대활동의 숭고함 등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공동정범’은 학자의 언어로는 가닿을 수 없는 지점을 비추고 있다고 말했다. 언뜻 생각하면 피해자는 선하고 가해자는 악해야 한다는 이분법에 사로잡힌 것이 아닌가 싶었다. 오히려 감독이 선악이 한가운데를 줄타기하듯 지나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피해자가 원래 선한 사람이라는 것은 과거 군부독재시절 흔히 보았던 이야기다. 김 감독은 이를 외줄타기에 비유했다. 우리 사회는 사고가 발생하면 ‘피해자는 피해자다움’이라는 울타리에 가두어진다.
그런가 하면 시대적 분위기 탓에 차별을 차별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헬렌 켈러가 그 중 하나다. 그런 그녀도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기를 양육하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당시에는 우생학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었다.
자신이 장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에 대한 안락사 견해에 동조한 것이다. 당대의 시간을 누구보다 뜨겁게 살았던 헬렌 켈러조차 이럴 지경이니 모든 인간이 각자의 존엄성을 지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저자의 ‘공부’에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