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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이상기류가 시민들을 괴롭히고 있다. 미국인들은 풍족해지면 행복해질 것이라 믿었으나 그런 희망은 신기루였다. 토크빌의 말처럼 “이 세상의 부실한 낙은 결코 (인간의) 마음을 채워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우울한 이상기류는 여러 모양으로 나타나지만 매번 그것은 '절망'으로 끝난다. 찾으려던 것을 결코 얻지 못한다.
절망은 슬픔과 다르다. 슬픔은 위로받을 수 있는 고통이다. 슬픔은 여러 좋은 것 중 하나를 잃었을 때 찾아온다. 예컨대 직장에서 낭패를 겪었다면 가정에서 위안을 얻어 헤쳐 나갈 수 있다. 반면에 절망은 위로받을 길이 없다. 궁극적인 것을 잃었을 때 찾아오기 때문이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길을 잃어버린 사람은 달리 의지할 만한 대안이 없다. 그야말로 기운이 꺾인다.
정신없이 바쁜 호황기에도 만연해 있다가 경제적 내리막길을 걸을 때 지독한 절망으로 변하는 이 '우울한 이상기류'의 원인은 무엇인가? 토크빌은 삶 전체를 "이 세상의 부실한 낙” 위에 세워 올린 결과라고 이유를 분석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다.
*'우상숭배'란 단어를 들으면 현대인은 목상 앞에 절하는 원시인의 모습을 떠올린다. 사도행전에는 고대 그리스·로마 세계의 문화가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당시 도시마다 좋아하는 신이 있어서 신전을 짓고 신상을 숭배했다. 바울이 아덴(아테네)에 가 보니 말 그대로 신상 천지였다(행 17:16 참조). 아테나 여신의 파르테논 신전이 전체를 압도했고,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전쟁의 신 아레스, 다산과 부의 여신 아르테미스,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 등 온갖 신이 광장마다 즐비했다.
우리 현대 사회도 고대 사회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문화마다 그 문화를 지배하는 우상이 있다. '제사장'과 토템과 의식(儀式)도 있다. 사무실이나 헬스장이나 스튜디오나 경기장 같은 신전이 있어, 행복한 삶이라는 복을 얻고 액운을 물리치려면 거기서 제사를 드려야 한다. 미모와 권력과 돈과 성취의 신이란 바로 우리 개개인의 삶과 사회 전반에서 신적 위치를 점한 이것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가 아프로디테 동상 앞에 무릎 꿇지는 않을지 몰라도, 오늘날 많은 젊은 여성이 외모와 몸매에 과도히 집착한 나머지 우울증과 각종 섭식장애에 시달린다. 실제로 아르테미스에게 향을 피우지 않아도 돈과 성공을 세상 최고의 가치로 떠받들면 우리도 자녀를 일종의 인신제물로 바치는 것이다. 직장에서 높은 자리로 올라가고 더 많은 재물과 위신을 얻고자 가정과 공동체마저 팽개친다.
*돈은 영적 중독이 될 수 있다. 모든 중독처럼 피해자에게 자신의 진짜 덩치를 숨긴다. 아무리 갈망해도 만족은 자꾸만 줄어든다. 그래서 우리는 더 채우려고 더 크고 많은 모험도 불사하다가 결국 파탄에 이른다. 회복에 나설 때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어떻게 그렇게 눈이 멀 수가 있었지?'라는 의문이 든다. 깨어날 때 우리는 숙취 때문에 전날 밤 일이 통 기억나지 않는 사람 같다.
왜 그랬을까? 그토록 이성에 어긋나게 행동한 이유가 무엇일까? 왜 우리는 옳은 길을 시야에서 완전히 놓친 것일까? 성경은 인간 마음이 '우상 공장'이라서 그렇다고 답한다.
대체로 사람들은 '우상'(idols) 하면 눈에 보이는 신상을 떠올린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심사 위원 사이먼 코웰의 극찬을 받은 신인 팝스타를 떠올릴 수도 있다. 물론 아직도 세상 곳곳에서 전통 우상숭배가 이루어지고 있긴 하지만,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내적 우상숭배는 모든 사람에게 두루 널리 퍼져 있다.
에스겔 14장 3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장로들을 가리켜 "이 사람들이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처럼 장로들도 그런 지적에 틀림없이 이렇게 반응했을 것이다. “우상이라니요? 무슨 우상? 저한테는 아무런 우상도 보이지 않는데.” 여기서 하신 하나님 말씀은, 인간의 마음이 성공, 사랑, 재물의 소유, 가정 등 '좋은 것'을 궁극적인 것으로 탈바꿈시킨다는 뜻이다. 우리 마음은 그런 것을 신격화해 삶의 중심에 둔다. 그것만 얻으면 존재감과 든든함과 안전과 충족감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지의 제왕>에서 핵심 소재는 악의 군주 사우론이 소유한 힘의 반지다. 아무리 선한 의도에서라도 이 반지를 끼려는 사람은 누구나 탐욕에 물들게 된다. 톨킨에 해박한 학자인 톰 쉬피 교수는 이 반지를 “심리적 증폭기"라 불렀다. 마음의 가장 절실한 갈망을 우상으로 확대시킨다는 뜻이다.?
그 책의 선한 등장인물 몇은 노예를 해방시키거나 백성의 영토를 지키거나 악인을 정의로 심판하려 한다. 다 좋은 목표다. 다만 그 반지를 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목표를 이루려 한다. 반지가 좋은 것을 절대화해서 다른 모든 도의나 가치관을 전복시킨다.
이 반지를 끼는 사람은 점점 더 거기에 예속되고 중독된다. 그것 없으면 못 사는 게 바로 우상이기 때문이다. 꼭 손에 넣어야만 하기에 그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한때 존중하던 규정도 어기고 남들과 자신마저 해친다. 우상은 끔찍한 악을 낳는 영적 중독이다. 톨킨의 소설에서만이 아니라 현실 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훈련된 부대나 재정 안정이나 뛰어난 운동 실력을 바라는 게 잘못인가? 그렇지 않다. 그러나 이 사례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흔하게 착각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우상을 나쁜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 자체가 나쁜 경우는 거의 없다. 더 좋은 것일수록 그것이 우리의 가장 깊은 욕구와 희망을 채우리라는 기대도 커진다. 무엇이든 가짜 신이 될 수 있으며, 특히 삶의 가장 좋은 것일수록 더 그렇다.
…
우상이란 무엇인가? 무엇이든 당신에게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무엇이든 하나님보다 더 크게 당신 마음과 생각을 차지하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다른 데서 얻으려 한다면 그게 바로 우상이다."
무엇이든 워낙 당신 삶의 중심이자 필수여서 그것 없이는 살아갈 가치를 별로 느끼지 못한다면 그게 바로 가짜 신이다. 우상은 마음을 지배하므로 당신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열정과 에너지, 돈과 정서적 자원을 다분히 거기에 쏟을 수 있다. 가정과 자녀, 직업과 돈벌이, 성취와 평론가의 호평, 체면과 사회적 지위가 다 우상이 될 수 있다. 로맨틱한 이성 관계, 업계의 인정, 안전하고 평안한 환경, 외모나 두뇌, 정치나 대의명분, 도덕과 가치관, 심지어 기독교 사역에서 성공하는 것도 다 우상이 될 수 있다. 타인의 삶을 고치는 데 인생의 의미를 거는 것을 흔히 "상호의존”이라 부르지만 사실은 그것도 우상숭배다.
무엇이든 당신이 그것을 보며 마음 깊은 곳에서 이렇게 말한다면 그게 곧 우상이다. '저것만 있으면 내 삶이 의미 있어질 거야. 나도 가치 있는 사람이 될 거야. 내가 중요해지고, 안정감이 들 거야.' 이런 관계를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지만 가장 적합한 말은 '숭배'(worship)일 것이다.
*무엇이든 당신이 그것을 보며 마음 깊은 곳에서 이렇게 말한다면 그게 곧 우상이다. '저것만 있으면 내 삶이 의미 있어질 거야. 나도 가치 있는 사람이 될 거야. 내가 중요해지고, 안정감이 들 거야.' 이런 관계를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지만 가장 적합한 말은 '숭배'(worship)일 것이다.
옛 이교도들이 사실상 모든 것을 신으로 본 게 지나친 상상력을 발휘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섹스의 신, 일의 신, 전쟁의 신, 돈의 신, 국가의 신이 있었다. 무엇이든 신이 되어 개인의 마음이나 대중의 삶을 신처럼 지배할 수 있다는 엄연한 사실 때문이었다. 예컨대 아름다운 몸은 좋은 것이지만 이를 '신격화'해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삼는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단지 아름다움이 아니라 아프로디테다. 사람들과 문화 전체가 끊임없이 외모 때문에 고민하고, 거기에 시간과 돈을 지나치게 쏟아붓고, 어리석게 성품까지 외모에 기초해 평가하게 된다. 당신의 행복, 삶의 의미, 정체성에 하나님보다 더 영향을 끼친다면 무엇이든 우상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우상숭배는 지극히 복잡한 개념이라서 지적, 심리적, 사회적, 문화적, 영적 범주를 모두 아우른다. 우선 개인의 우상으로는 로맨틱한 사랑과 가정, 돈, 권력, 성취, 속한 분야의 인맥, 타인이 정서적으로 의존하기를 기대하는 것, 건강, 몸매, 매력적인 외모 등이 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희망과 의미와 충족을 이런 데서 얻으려 한다.
문화적 우상은 군사력, 기술 발전, 경제 번영이다. 전통 사회의 우상에는 가정, 고된 노력, 의무, 도덕적 가치가 포함되는 반면, 서구 문화의 우상은 개인의 자유, 자아 발견, 개인적 풍요, 성취 등이다. 이 모든 좋은 것이 한 사회 내에서 규모와 세력을 과도히 불릴 수 있고, 실제로 그렇다. 그리하여 삶의 기초를 거기에 두기만 하면 우리에게 안전과 평화와 행복을 줄 것처럼 약속한다.
지적 우상도 있는데, 흔히 이를 '이데올로기'라 한다. 예컨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유럽 지식층은 루소의 성선설을 철석같이 믿었다. 인간은 선하게 태어났는데,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는 교육과 사회화가 부실한 탓이라는 것이다.
*왜 마음의 가장 깊은 소원을 이루는 게 오히려 재앙이 될까? 로마서에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누군가에게 행하실 수 있는 최악의 일 중 하나가 '그들을 마음의 정욕(갈망)대로 내버려 두시는 것'이라 썼다(롬 1:24 참조). 가장 절실한 꿈을 이루도록 허용하시는 게 왜 상상 가능한 최고의 형벌일까? 우리 마음이 그 갈망을 우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같은 장에서 바울은 인류 역사를 이렇게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그들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25절). 모든 인간은 무엇인가를 위해 살아야 한다. 그 무엇인가가 우리 생각을, 우리 마음의 가장 근본적인 충성심과 희망을 사로잡아야 한다. 그런데 성경에 따르면, 그 대상은 성령의 개입 없이는 결코 하나님이 될 수 없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의미와 희망과 행복을 피조물에게 바란다면 결국 피조물은 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우리 마음을 비탄에 빠뜨린다. 자녀의 삶을 망치던 애나는 '자녀를 너무 많이' 사랑한 게 아니라 자녀와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너무 적게' 사랑했다. 그 결과 그녀의 신인 두 자녀는 엄마의 과중한 기대에 짓눌리고 말았다.
“성경의 핵심 원리는 우상숭배를 배격하는 것이다.” 성경을 속속들이 아는 두 유대인 학자가 내린 결론이다. 그래서 성경에는 우상숭배의 무수한 형태와 참담한 결과를 보여 주는 이야기가 수두룩하다. 우리 마음이 선택하는 가짜 신에는 사랑, 돈, 성취(성공), 권력이 있다. 그리고 성경에는 그에 상응하는 생생한 내러티브가 나온다. 그것을 보면 특정한 우상을 숭배하는 일이 우리 삶 속에서 어떻게 전개되는지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은 성경의 중심인물이다. 고대의 웬만한 남자처럼 그도 가문을 이을 아들을 간절히 원했다. 다만 아브라함에게는 그것이 마음의 가장 깊은 소원이 되었다. 그런데 마침내 그에게도 아들이 태어났다. 평생의 소원을 이룬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다 내놓을 것을 요구하신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
이는 아주 결정적인 시험이었다. 이제 이삭은 아브라함의 전부였다. 하나님도 그 점을 분명히 하셨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그냥 "이삭"이 아니라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라 부르셨다. 아브라함의 애정은 숭배로 변했다. 그전까지는 삶의 의미가 하나님 말씀에 달려 있었지만, 이제 이삭을 사랑하고 이삭을 잘되게 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삶의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아들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 게 아니라 사랑의 대상을 가짜 신으로 둔갑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누구든지 자녀를 참 하나님의 자리에 두면 거기서 우상숭배 같은 사랑이 싹튼다. 그 사랑은 자녀를 숨막히게 하고 관계의 목을 조른다.
*이 사건의 요지는 무엇일까? 두 가지다. 하나는 아브라함도 아주 잘 알았을 테지만 다른 하나는 그가 잘 몰랐을 수도 있다.
아브라함은 이것이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는지에 대한 시험임을 알았다. 마지막에 주님은 그에게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고 말씀하셨다. 성경에서 '경외'란 하나님을 '무서워한다'라는 뜻이라기 보다 그분께 전심으로 헌신한다는 뜻이다. 시편 130편 4절에 보면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경험할수록 우리는 더 "주를 경외하게" 된다.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사랑과 기쁨으로 외경과 경이에 젖는다는 뜻이다. 주님은 "내가 이제야 네가 세상 무엇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는 줄을 아노라"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그분이 알아보려 하셨다는 뜻은 아니다. 전지하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 상태를 이미 아신다. 그보다 하나님은 그를 용광로에 넣으셨다.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사랑이 결국 '순금같이 되어 나오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분이 왜 이삭을 수단으로 삼으셨는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셨다면 아브라함은 틀림없이 세상 무엇보다도 아들을 더 사랑했을 것이다. 이미 그렇게 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는 우상숭배이며, 모든 우상숭배는 해를 자초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거칠게 다루신 것은 오히려 자비였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놀라운 선물이었지만 하나님을 첫자리에 모실 의향이 없다면 이삭과 함께하는 것은 안전하지 않았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과 '아들' 중에서 하나를 택해야만 하는 일이 없는 한 그는 자신의 사랑이 우상숭배로 변하고 있음을 알 길이 없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직장에서 진실을 말하거나 정직하게 행동함으로써 승진에 치명타를 입을 상황에 부딪치지 않는 한 직장이 자신에게 얼마나 우상으로 변했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 뜻을 행하기 위해 손해를 감수할 의향이 있다면 직장이 우리의 가짜 신이 될 것이다.
*먼 훗날 똑같은 산에서 또 다른 장자가 나무 위에 달려 두 팔을 벌리고 죽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그 아들이 갈보리 산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을 때는 하늘에서 구조를 알리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오히려 성부 하나님은 침묵 속에 그 값을 치르셨다. 왜 그러셨을까?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참된 대속물은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님이었다.
그분이 대신 죽어 우리의 형벌을 당하셨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 3:18). 바울도 이삭 이야기의 참 의미를 깨닫고 일부러 그 어법을 예수님께 적용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여기에 우리가 우상숭배에서 돌이킬 수 있는 실제적 해답이 있다. 보유하는 게 영적으로 안전하지 못한 우리 삶의 '이삭'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 거기에 악착같이 매달려 노예가 되지 않을 방도를 찾아야 한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추상적으로 되뇌고만 있어서는 결코 그리될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고 아끼시고 기뻐하심을 알고 확신해야 한다. 그 사랑 덕분에 우리 마음은 그분 안에서 안식과 의미와 안전을 얻고, 삶에 무슨 일이 닥치든 감당해 낼 수 있다.
그 사랑을 어떻게 확신할 있는가?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제물을 보시고 "네가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을 아노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십자가 위 그분의 제물을 보며 "사랑하시는 독자까지도 제게 아끼지 아니하셨으니 저를 사랑하시는 줄을 아나이다"라고 아뢸 수 있겠는가. 그분이 하신 일의 엄청난 규모를 조금씩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 마음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그분 안에서만 안식을 얻는다.
이 이야기의 의미는 예수님으로만 완성된다. 하나님이 '의로우신'(우리 죄의 빚을 갚도록 요구하시는) 분이면서 또한 '의롭다 하시는'(구원과 은혜를 베푸시는) 분임은 먼 훗날 다른 아버지께서 다른 '산' 갈보리로 그분의 장자와 함께 올라가 우리 모두를 위한 제물로 그 아들을 내주셨기 때문에만 가능하다.
당신의 노력으로는 결코 아브라함처럼 위대하고 용감할 수 없으며 하나님 안에 안전해질 수 없다. 이 사건의 실체이신 구주 예수님을 믿어야만 그리될 수 있다. 오직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사시고 죽으셨기 때문에 당신의 하나님도 무한한 사랑이시면서 동시에 거룩하신 분일 수 있다. 그래서 당신을 향한 그분의 사랑을 절대 확신할 수 있다.
*만일 아브라함이 산을 오르면서 '이삭을 정말 내놓지는 않고 제단에 올려 놓기만 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했다면 그는 시험에서 낙방했을 것이다! 뭔가가 우리 삶 속에 남아 있어도 안전하려면 그것이 더는 우상이 아니어야만 한다. 그러려면 정말 그것 없이 살 마음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이 계시기에 나는 너 없이도 살 수 있다'라고 진심으로 고백해야 한다.
하나님이 사실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중인데 오히려 죽이시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도 하나님은 그를 위대한 사람으로 빚으시는 중이었지만 겉으로는 매정해 보이셨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따른다는 게 어떤 이들에게는 맹신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감사에 찬 강건한 믿음이다.
성경에 요셉과 모세와 다윗 같은 인물의 이야기가 수두룩하다. 하나님이 그 들을 버리신 것 같지만 나중에 알고 보면 하나님은 삶 속의 해로운 우상을 다루고 계셨다. 이는 역경을 거쳐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다.
아브라함처럼 예수님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처절하게 씨름하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분은 아버지께 다른 길이 있느냐고 물으셨으나 결국은 순종해서 갈보리 산에 올라가 십자가를 지셨다. 아버지가 나쁜 일을 허용하시는 이유를 우리는 다 모르지만, 예수님처럼 우리도 힘들 때 하나님을 신뢰할수 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이 이미 해 주신 일을 즐거워하면, 가장 어둡고 힘들어 보일 때도 꼭 필요한 기쁨과 희망을 얻어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를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만든 가짜 신으로부터 해방된다.
*<죽음의 부정》 (The Denial of Death, 인간사랑 역간)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어네스트 베커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잃고 나서 이에 대처해 온 다양한 방식을 설명했다. … 신앙 없는 현대인에 대해 그는 이렇게 썼다.
“인간은 여전히 자긍심이 필요했고 자기 삶이 본래 중요함을 알아야 했다. 뭔가 더 고상한 의미에 흡수되어 신뢰와 감사로 거기에 몰두해야 했다. 그런데 하나님이 더는 없으니 어떻게 그리할 것인가? 맨 먼저 떠오른 방법 중 하나는 오토 랑크의 말대로 '로맨틱한 해법'이었다. 내면 깊은 곳에 본질적으로 필요한 자존감을 인간은 이제 사랑의 대상에게서 찾으려 했다. 사랑의 대상은 우리 삶을 채워 줄 신적 이상(理想)이 된다. 모든 영적, 도덕적 욕구가 이제 그 한 사람에게 집중된다. 한마디로 사랑하는 상대가 곧 하나님이 된다.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위대한 신앙 공동체의 세계관이 소멸되자 인간은 '그대'(thou)를 찾아 나섰다. 사랑의 대상을 하나님의 지위로 격상시켜서 결국 우리가 얻으려는 것은 무엇인가? 다름 아닌 구원이다.”
야곱이 한 일이 바로 그것이며, 베커가 지적했듯이 우리 시대의 허다한 이들도 똑같이 찾아 헤매고 있다. 우리 사회의 대중음악과 예술은 계속 그렇게 하라고 우리를 부추긴다. 의미와 초월성을 찾으려는 가장 깊은 마음의 욕구를 몽땅 로맨스와 사랑에 걸라는 것이다. "누군가가 너를 사랑하기 전에는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대중가요 가사를 우리 문화 전체가 그대로 흡수했다.
우리는 천생연분을 만나기만 하면 내 모든 문제가 치유될 거라는 환상을 품고 있다. 하지만 기대와 희망이 그 정도까지 커지면 베커의 말마따나 "사랑하는 상대가 곧 하나님이 된다.” 그 역할을 감당할 연인은 없고 거기에 부응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쓰라린 환멸을 경험한다.
*이 대목에서 현대의 많은 독자는 이런 의문이 들 것이다. '이 이야기 속의 영적 위인은 다 어디로 갔는가? 내가 본받아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이야기의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가 이런 혼란에 빠지는 이유는 대개 성경을 일련의 단절된 이야기로 읽기 때문이다. 마치 각 이야기마다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보여주는 '교훈'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성경은 인류가 어떻게 현 상태에 이르렀고 하나님이 이를 바로잡으시고자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오셨고 또 오실 것인지를 보여 주는 단일한 이야기다.
다시 말해 성경은 도덕적 사다리의 맨 꼭대기에 신을 올려놓고 우리에게 '너희도 열심히 기를 쓰고 제대로 살면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보다 성경이 우리에게 거듭 보여 주는 것은 연약한 인간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도 없고 구하지도 않을뿐더러 은혜를 받아도 감사할 줄 모른다. 이것이 성경 전체를 아우르는 큰 내러티브이고, 나머지 개별 이야기는 다 그 밑에 속한다. 그렇다면 이번 이야기에서 배울 것은 무엇인가?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인 환멸이 인생 전반에 깔려 있음을 배운다. 이 사실을 깨닫기 전에는 누구도 현명한 삶을 영위할 수 없다. 야곱은 "라헬만 얻을 수 있다면 다 잘될 것이다"라고 말했고, 상대가 라헬인 줄로 알고 동침했다.
그런데 히브리어를 직역하면 "아침에, 보니, 레아였다”(창 29:25 참조). 한 주석가는 이 구절에 대해 "이는 에덴동산 이후로 인류가 경험해 온 환멸의 축소판이다”라고 주해했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우리 희망을 어디에 걸든지 아침에 보면 라헬이 아니라 늘 레아라는 뜻이다. 물론 레아라는 인물을 십분 존중하긴 하지만 말이다(그녀에게 배울 것도 많다). 이것을 C. 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 (Mere christianity, 홍성사 역간)보다 더 잘 표현한 글은 없다.
“자기 마음속을 정말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거의 누구나 알겠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뭔가를 간절히 원한다. 세상의 온갖 것이 당신에게 그것을 주겠다고 약속하지만 결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 처음 사랑에 빠지거나 처음으로 외국을 떠올리거나 흥미로운 과목을 처음 접할 때 우리 안에 일어나는 동경이 있다. 그런데 그 동경은 결혼이나 여행이나 학업으로도 정말 채워질 수 없다. 지금 나는 결혼이나 휴가나 학문적 직업이 잘 안 풀린 경우를 말하는 게 아니라 달성할 수 있는 최고의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동경의 첫 순간에만 잡힐 듯하다가 현실 속에서 바로 사라져 버리는 뭔가가 있다. 무슨 뜻인지 다들 알 것이다. 아내는 좋은 사람일 수 있고, 호텔과 경치는 훌륭했을 수 있고, 화학은 아주 흥미로운 분야일 수 있다. 그런데도 뭔가가 우리를 피해 달아났다.
*당신도 야곱처럼 결혼해서 가장 깊은 희망과 동경의 무게를 전부 상대에게 건다면 배우자는 당신 기대에 짓눌려 쓰러질 것이다. 당신의 삶과 배우자의 삶은 다방면으로 뒤틀어질 것이다. 당신 영혼에 필요한 것을 다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아무리 최고의 배우자라도 별 수 없다. 당신은 라헬과 동침한 줄로 알겠지만 일어나 보면 늘 레아일 것이다. 이런 인류의 보편적인 실망과 환멸은 삶 전반에 퍼져 있으며, 특히 자신이 가장 희망을 둔 대상에게서 실감
된다.
마침내 그 사실을 깨달았다면 당신은 네 가지로 반응할 수 있다. 첫째로 당신을 실망시킨 그 대상을 탓하며 더 나은 대상으로 옮겨 갈 수 있다. 이는 우상숭배를 지속하는 영적 중독의 길이다. 둘째로 자신을 탓하며 이렇게 자책할 수 있다. '어차피 나는 실패자야. 남은 다 행복해 보이는데 왜 나만 불행한지 모르겠어. 나한테 뭔가 문제가 있나 봐.' 이는 자기혐오와 수치의 길이다. 셋째로 세상을 탓하며 이성(異性)을 모두 싸잡아 저주할 수 있다. 그러면 당신은 완고해지고 냉소적이고 공허해진다.
끝으로 C. S. 루이스가 소망에 대한 훌륭한 장의 끝부분에 말했듯이, 당신도 삶의 초점 전체를 하나님 쪽으로 조정할 수 있다. 그는 “이 세상의 어떤 경험으로도 채울 수 없는 갈망이 내 안에 있다면, 가장 개연성 있는 설명은 내가 다른 세상(초월적이고 영원한 무엇)을 위해 지어졌다는 것이다”라고 결론지었다.
*하나님이 레아 안에 행하신 일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해 주신 일도 봐야 한다. 레아는 이 아이에게 뭔가 특별한 데가 있음을 느꼈을 수 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뭔가를 해 주셨음을 직감했을 수 있다. 그분이 해 주신 일을 창세기의 저자는 분명히 알았다. 이 아이는 유다였는데 창세기 49장에 보면 훗날 진정한 왕이신 메시아가 바로 그를 통해 오신다고 했다. 하나님은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여자를 찾아오셔서 그녀를 예수님이 나실 계보의 조상으로 삼아 주셨다. 세상에 구원이 임한 통로는 아리따운 라헬이 아니라 아무도 원하지 않아 사랑받지 못한 레아였다.
하나님이 그냥 약자를 즐겨 응원하시는 분이라서 그런가? 아니다. 레아에게 주신 이 놀라운 선물은 그보다 훨씬 의미가 깊다. 본문에 보면 주님은 레아가 사랑받지 못함을 보시고 친히 그녀를 사랑해 주셨다. '내가 참 신랑이다. 나는 남편 없는 자의 남편이요 고아의 아버지다.' 그분은 은혜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이다.
도덕 종교의 신은 기대 이상의 실적으로 성공한 자를 선호한다. 도덕적 사다리를 타고 천국에 올라가는 사람.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이 세상에 내려 오셔서 구원을 이루시고 우리 힘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은혜를 베푸신다.
그분은 아무도 원하지 않는 사람, 연약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이들을 사랑하신다. 그분과 우리는 왕과 신민의 관계만이 아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만도 아니다. 그분은 남편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신부다. 그분은 우리를 기뻐하여 어쩔 줄 모르신다. 아무도 봐 주지 않는 사람까지도 말이다.
여기에 우상숭배를 이기는 놀라운 힘이 있다. 로맨틱한 상대를 만나지 못한 사람이 세상에 많이 있거니와 그들은 주님의 이런 음성을 들어야 한다.
'내가 참 신랑이다. 네 마음의 모든 갈망을 이루어 줄 품은 하나뿐이다. 내게로 오기만 하면 마지막 날에 그 품이 너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내가 너를 사랑함을 알라.'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눅 16:13-15).”
예수님은 우상숭배에 대한 성경의 기본 은유를 모두 가져다 탐심과 돈에 적용하신다. 성경에 따르면 숭배자가 우상을 상대로 하는 일은 세 가지다. 우상을 사랑하고, 우상을 신뢰하고, 우상에 순종한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새로 돈을 벌 방법과 새로 사들일 소유물에 대한 공상과 몽상을 일삼고, 자기보다 많이 가진 자들을 질시의 눈으로 바라본다. '돈을 신뢰하는 사람'은 재물 덕분에 자신이 안전과 안정을 얻었고 삶을 스스로 통제한다고 느낀다.
나아가 우상을 숭배하면 '돈의 종'이 된다. 세상의 왕이나 상전을 섬기듯 우상에게 '자기 영혼을 파는' 것이다. 거기서 의미(우상을 사랑함으로)와 안전(우상을 신뢰함으로)을 얻어야 하니 우상이 있어야만 하고, 따라서 우상을 섬길 수밖에 없다. 사실상 순종한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재물에 대해 쓰신 '섬기다'라는 단어는 엄숙히 서약하고 왕을 섬긴다는 의미다.
돈을 위해 살면 당신은 종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삶의 중심이 되시면 돈은 왕위에서 밀려나 강등된다. 당신의 정체성과 안전이 하나님께 있으면 돈이 염려와 욕심을 통해 당신을 지배할 수 없다. 이것 아니면 저것, 둘 중 하나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맘몬의 노예가 되기 쉽다.
*삭개오는 세리 중에서도 우두머리였으니 정말 최악이었다. 그런데 그분은 아주 도덕적인 무리의 면전에서 이 사람을 대화 상대로만 아니라 식사 상대로까지 택하셨다. 그 문화에서 음식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친구가 된다는 뜻이었다. 모두들 못마땅해했으나 예수님은 개의치 않으셨다. 예수님이 "삭개오야, 나는 이들의 집이 아니라 네 집으로 가고 싶다"라고 말씀하시니 삭개오는 기뻐서 그분을 집으로 맞아들였다.
단순한 교감이었지만 우리에게 이보다 더 교훈적일 수는 없다. 삭개오는 예수님께 다가갈 때 교만하지 않고 겸손했다. 체통과 부를 내세운 게 아니라 삶의 지위를 내려놓고 조롱까지 감수하며 그분을 뵙고자 했다. 결국은 삭개오가 예수님을 자신의 삶 속에 청한 게 아니라 예수님이 삭개오를 그분의 삶 속에 청하셨다.
호탕하게 웃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삭개오야! 그래, 너다! 오늘 내가 네 집에 가야겠다!" 예수님도 아셨듯이 그분의 이런 행동은 무리에게 터무니없어 보였고, 그들이 알던 종교에 완전히 어긋났으며, 나무 위의 키 작은 삭개오에게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예수님은 무리 중에서 가장 부도덕한 삭개오를 택해 인격적 관계를 맺고자 하셨고, 이를 본 삭개오의 영적 관점은 그때부터 변했다. 처음부터 의식 속에 명확히 알지는 못했겠지만 하나님의 구원이 도덕적 성취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은혜로 말미암음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이 깨달음이 번갯불처럼 삭개오를 관통하자 그는 즐거워하며 예수님을 영접했다.
*이런 약속을 들으신 예수님은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9절)라고 답하셨다. 보다시피 그분은 '네가 그렇게 살면 구원이 이 집에 이를 것이니'라고 하지 않으셨다. 구원은 이미 이르렀다. 하나님의 구원은 변화된 삶의 결과로 오는 게 아니다. 변화된 삶이 구원의 결과이며, 구원은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다.
삭개오의 마음과 삶이 새롭게 변화된 것도 이 때문이다. 구원이 만일 도덕규범을 준수해 얻어 내는 것이었다면 그의 질문은 '얼마나 드려야만 될까?'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약속이 후하고 아낌없는 은혜에 대한 반응이었기에 그의 질문은 '얼마나 드릴 수 있을까?'였다. 그는 자신이 재정적으로 부유했지만 영적으로는 파산 상태임을 깨달았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영적부요를 값없이 쏟아부어 주셨다.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던 그가 정의의 옹호자로 변했다. 주변 사람을 희생시켜 부를 축적하던 삭개오가 자기 부를 희생해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었다. 왜 그랬을까?
삭개오의 구주였던 돈이 예수님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돈은 단지 그것, 즉 돈의 자리로 돌아갔다. 선을 행하고 사람을 섬기는 도구가 된 것이다. 그리스도가 정체성과 안전의 근원이 되시니 이제 그에게 많은 돈은 필요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은혜는 재물에 대한 삭개오의 태도를 변화시켰다.
*가짜 신은 덩어리져 있어서 그만큼 우상숭배의 심리적 구조가 복잡해진다. 삭개오의 마음이 변화된 이치를 알려면 그 점을 감안해야 한다. 우리가 섬기는 '표면적 우상'은 더 구체적이고 눈에 잘 띄지만, 숨겨진 마음속에는 '근원적 우상'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 마음의 죄성은 동기적 욕구에 영향을 미쳐서 그것을 우상숭배로 변질시킨다. 바로 이것이 '근원적 우상'이다. 어떤 이에게는 영향력과 권력에 대한 갈망이 강한 반면, 어떤 이는 인정과 좋은 평가에 더 감격한다. 정서적, 신체적 안락을 무엇보다 더 원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환경에 대한 통제와 안전을 원하는 이도 있다. 권력이 근원적 우상인 사람은 영향력만 얻을 수 있다면 인기를 잃는 것쯤이야 개의치 않는다. 반대로 인정이 최고의 동기적 욕구인 사람은 만인의 호감을 살 수만 있다면 권력과 통제권쯤 기꺼이 내놓는다. 각각의 근원적 우상, 권력, 인정, 안락, 통제에서 서로 다른 일련의 두려움과 희망이 싹튼다.
'표면적 우상'은 근원적 우상이 자신을 충족시키려는 통로로서 돈, 배우자, 자녀 등에 해당한다. 우리는 우상의 구조를 피상적으로만 분석할 때가 많다. 예컨대 돈은 더 깊은 충동을 채우기 위한 표면적 우상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삶과 세상을 통제하는 수단으로써 많은 돈을 원한다. 이들은 대개 돈을 많이 쓰지 않고 아주 검소하게 살아간다. 안전하게 다 저축하고 투자해 둔다. 그래야 세상이 철저히 안전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인맥을 쌓거나 미모와 매력을 가꾸려고 돈을 원한다. 이들은 아낌없이 자신에게 돈을 쓴다. 그런가 하면 돈에 딸려 오는 엄청난 권력으로 남을 지배할 수 있기 때문에 돈을 원하는 사람도 있다. 모두 돈이 우상인 경우지만, 근원적 우상이 다르니 거기서 비롯되는 행동 양식도 아주 다르다.
돈을 이용해 통제라는 근원적 우상을 섬기는 사람은 돈으로 권력이나 인정을 얻으려는 이들에게 우월감을 느낄 때가 많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돈을 우상으로 숭배하면 삶이 예속되고 뒤틀어진다.
우리 교회의 한 목사가 어느 부부를 상담한 적이 있는데 그들은 돈 관리 문제로 심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아내는 남편을 구두쇠로 여겼다. 하루는 남편이 그 목사와 일대일로 대화하던 중에 자기 아내의 낭비벽이 심하다고 불평했다. “정말 이기적입니다. 옷과 외모 단장에 돈을 엄청나게 쓰거든요!” 남에게 예뻐 보이려는 욕구가 아내의 돈 씀씀이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게 남편의 눈에 똑똑히 보였다.
목사는 그에게 표면적 우상과 근원적 우상의 개념을 알려 줬다. “당신이 전혀 쓰거나 베풀지 않고 일 원 한 푼까지 다 쌓아 두는 것도 똑같이 이기적인 일임을 아십니까? 당신은 지금 안전과 보호와 통제라는 자기 욕구를 채우는데 무조건 전액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 남편이 분노하지 않고 오히려 충격을 받은 것은 상담자로서 다행이었다. 그는 "그런 생각은 미처 해 보지 못했네요"라고 말했고, 이것은 결혼 생활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래서 우상은 돈이나 섹스 같은 표면적 우상만 없애서는 해결될 수 없다.
표면적 우상을 보며 '내 삶에서 이것을 중시하지 말아야 한다. 여기에 끌려다녀서는 안 된다. 그만두어야 한다'라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직접적 공략은 효과가 없다. 마음속의 근원적 우상이 처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은 하나다. 바로 복음을 믿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신인(神人)이신 예수님께는 무한한 부가 있었으나 그분이 그 부를 버리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영적으로 가난하게 죽었을 것이다. 둘 중 하나였다. 그분이 부요하게 남아 계시면 우리는 가난하게 죽을 것이다. 그분이 가난하게 죽으시면 우리는 부요해질 것이며 죄를 용서받아 하나님의 가족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바울은 이 교회에 단지 윤리적인 강령을 준 게 아니다. 돈을 그만 사랑하고 더 후해지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복음의 핵심을 제시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보배로 삼으시려고 하늘의 모든 보화를 버리셨다. 우리가 그분께 보배로운 백성이기 때문이다(벧전 2:9-10 참조). 우리를 보배로 삼고자 죽으신 그분을 보면 우리도 그분을 보배로 삼을 수밖에 없다. 돈에서 의미와 안전을 찾던 것을 그만두고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남을 돕고 싶어질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깨닫는 정도만큼 돈은 우리에 대한 지배력을 잃는다. 그분의 값비싼 은혜를 생각하면 결국 우리도 후한 백성으로 변화될 수밖에 없다.
인색함을 해결하려면 복음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후하심 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당신에게 그분의 부를 쏟아 주셨다. 이제 당신은 돈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당신을 돌보시며 안전하게 지켜 주심이 십자가로 입증되었다. 이제 남의 부유함을 시기할 필요도 없다. 예수님의 사랑과 구원은 당신에게 돈으로 얻을 수 없는 놀라운 신분을 부여한다. 돈으로는 비극에서 헤어나거나 혼란스러운 세상을 통제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해 주실 수 있는 일이다.
그리스도를 본받으려는 노력을 배가하는 것만으로는 돈의 지배력을 끊을 수 없다. 그보다 그리스도의 구원 곧 그분 안에서 내게 주어진 것을 더 깊이 이해하고, 그 이해에서 비롯되는 마음의 변화를 삶으로 옮겨야 한다. 마음은 당신 사고와 의지와 정서가 머무는 자리다. 복음을 믿으면 우리 동기와 자아상과 정체성과 세계관이 개혁된다. 마음의 철저한 변화 없이 행동으로만 규율에 따르는 것은 잠시 동안의 피상적 변화일 뿐이다.
*개인적 성공과 성취는 여느 우상보다 더 우리에게 자신이 신이라는 느낌을 준다. 내 안전과 가치는 나 자신의 지혜와 힘과 행위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일을 가장 잘해내면, 이는 당신 같은 이가 아무도 없다는 뜻이다. 성공해 정상에 오르면 당신이 최고다.
성공을 우상으로 삼았다는 한 가지 징후는 성공이 가져다주는 거짓된 안전감이다. 가난한 이들과 소외층은 고생을 그러려니 하며 인생살이가 '고달프고 냉혹하고 덧없다'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성공한 사람은 역경에 훨씬 더 충격을 받고 아연실색한다. 내가 목사로서 자주 듣는 말인데 상류층 사람은 비극이 닥치면 "삶이 이래서는 안 된다"라고 말한다. 목회를 오래 했어도 노동자 계급과 빈민층에서는 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거짓된 안전감은 자기 성취를 신격화해 그것이 삶의 역경으로부터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 주기를 바라는 데서 비롯된다. 하지만 우리를 그렇게 지켜 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뿐이다.
*그래서 나아만도 곧장 왕에게 갔던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왕은 편지를 읽고 자기 옷을 찢었다. 아람 왕이야 알 리가 없었겠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다르시며 왕 자신은 나아만의 치료를 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인간에게 놀아나지 않으신다. 돈으로 매수하거나 비위를 맞출 수 있는 대상도 아니다. 종교의 신들은 우리가 하기 나름이어서 이쪽에서 정성과 헌신을 보이면 신들도 갚을 의무가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하나님께는 그렇게 접근할 수 없다. 무엇이든 그분이 주시는 것은 은혜의 선물이다.
이스라엘 왕은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7절)라는 탄식으로 나아만 문제의 정곡을 찔렀다. 나아만은 성공을 우상으로 삼았다. 자신의 성취를 근거로 동급의 성공한 이들을 찾아가 필요한 것을 받아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성취와 돈과 권력은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 없다.
해를 거듭하며 이 본문을 공부할수록 나는 나아만이 더 대단해 보인다. 그는 정말 훌륭하고 뛰어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는 세상 최고의 사람도 하나님을 찾는 법에는 무지함을 보여 줄 뿐이다. 그렇다고 나아만에게 너무 가혹해질 필요는 없다. 그는 뒷배를 이용하고, 유명인의 이름을 팔고, 돈을 듬뿍 뿌리고, 최고 실세를 찾아간다. 그게 모든 중요한 인간을 대하는 방식일진대 하나님이라고 똑같이 대하지 못할 것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성경의 하나님은 다르시다. 나아만은 길들여진 신을 원했지만 그분은 야성의 하나님이시다. 나아만은 우리에게 갚아야 신을 원했지만 그분은 우리 쪽에서 보답해야 할 은혜의 하나님이시다. 나아만은 모두의 신이 아닌 자기만의 사적인 신을 원했지만 그분은 우리가 인정하든 말든 만인의 하나님이시다.
*나아만은 엘리사가 돈을 받고 무슨 신기한 의식이라도 행할 줄 알았다. 돈을 받지 않을 거라면 적어도 자신에게 치료의 값으로 뭔가 '큰일'을 시킬 줄로 알았다. 그런데 요단 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담그라는 말이 고작이었다.
그래서 그는 노하며 돌아섰다.
왜 그랬을까? 다시 나아만의 세계관이 송두리째 흔들렸기 때문이다. 조금전에 그는 이 하나님이 문화의 산물이 아니라 문화를 변혁하시는 분이고 인간에게 통제당하는 게 아니라 주권적 군주이심을 배웠다. 그런데 이번에는 인간을 순전히 은혜로 대하시는 하나님과 맞닥뜨렸다. 이 둘은 나란히 짝을 이룬다. 아무도 참 하나님을 통제할 수 없음은 아무도 자신의 공로로 복과 구원을 얻어 내거나 성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아만이 화가 났던 것은 자신에게 거창한 일을 시킬 거라는 예상이 빗나갔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반지의 제왕>에서처럼 힘의 반지를 되돌려 놓으라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요청이라면 그의 자아상과 세계관에 부합했을 것이다. 그런데 엘리사의 메시지는 모욕적이었다.
나아만은 '요단강에 내려가 물장구를 치는 것은 바보나 아이, 그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능력이나 성취가 전혀 불필요한 일이다'라고 생각했다.
바로 그거다. 그래서 구원이란 선하든 약하든 관계없이, 강하든지 약하든지 누구나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며 그분의 구원을 얻어 내는 게 아니라 거저 받을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을 알기 전에는 나아만은 계속 우상의 노예로 살아갈 것이다. 우상이 줄 수도 없는 안전과 의미를 계속 우상을 통해 얻어 내려 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야만 그는 자신의 성공도 결국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게 된다. 물론 본인도 성공을 이루려 많은 공을 들였지만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재능과 능력과 기회를 주셨기 때문에만 가능했다. 평생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해 있었는데 자신이 그것을 몰랐을 뿐이다.
요컨대 "그냥 몸을 씻으라"라는 명령은 너무 쉬워서 어려웠다. 나아만이 그대로 하려면 자신의 연약함과 무력함을 인정하고 구원을 값없는 선물로 받아들여야 했다. 하나님의 은혜를 원하는 사람은 결핍만 있으면 된다. 즉 아무것도 없으면 된다. 그런데 이런 영적 겸손을 불러일으키기가 어렵다. 우리는 하나님께 가면서 '제가 이만큼 했습니다'라든지 '제가 고생한 것 좀 보십시오'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만 바라보기를 원하신다. 그냥 씻기만을 원하신다.
나아만은 자신의 '해로운 행위를 내려놓는 법을 배워야 했다. 옛 찬송가에나오는 말이다.
네 해로운 '행위'를
주 발아래 내려놓고
온전히 영광 가운데
오직 주 안에 서라.
* 하나님도 희생 없이는 용서하실 수 없다. 큰 피해를 당한 사람치고 가해자를 '그냥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당신이 돈이나 기회나 행복을 강탈당했다면 범인에게 보상을 받아내든지 용서하든지 둘 중 하나다.
그런데 용서하려면 손해와 빚을 당신이 부담해야 한다. 스스로 감수해야 한다. 이렇듯 모든 용서에는 희생이 따른다. 이 성경의 내러티브마다 이 기본 원리가 얼마나 자주 언급되는지 놀라울 정도
다. 위의 이야기에서도 나아만이 복을 받기 위해서는 누군가 인내와 사랑으로 고난을 감수해야 했다. 이 인물은 이야기 속에 등장했다가 너무 빨리 사라져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그 사람이 누구일까? 나아만의 아내가 부리던 여종이다.
그녀는 아람의 습격대에 잡혀 왔다. 일가족이 다 포로로 끌려와 팔렸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최악의 경우 가족이 그녀의 눈앞에서 살해되었을 수도 있다. 이야기 속의 그녀는 아람의 사회구조에서 가장 밑바닥 인생이다. 인종적으로 외부인이고 종이고 여자인 데다 아직 어렸다. 아마 12-14세쯤 되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완전히 결딴난 인생이었다. 그게 누구 때문이던가? 군 최고사령관이자 육군 수장인 나아만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원수가 나병에 걸렸음을 알고 어떻게 반응했던가?
정상을 동경하던 사람이 사다리의 맨 아래 칸에 떨어지면 대개 냉소와 원한에 사무치게 된다. 어떻게든 주변에서 누군가를 찾아내 자신의 실패를 그의 탓으로 돌린다. 복수하는 공상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어린 여종은 그런 덫에 빠지지 않았다. 그녀가 이렇게 말했던가? "나병이라니, 거참 고소하다! 오늘 손가락이 하나 더 떨어져 나갔군! 내 그의 무덤에서 춤을 추리라!" 천만의 말이다.
그녀가 한 말을 보라. "우리 주인이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왕하 5:3). 말 속에 연민과 관심이 묻어난다. 정말 아픔을 덜어 주고 그를 살려내고 싶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는 그에게 선지자를 소개할 이유가 없다.
생각해 보라. 이제 나아만은 이 여종의 손에 달려 있다. 그녀는 그를 살릴 방도를 알고 있으며, 가만히만 있으면 그를 비참한 고통에 빠뜨릴 수 있다. 죗값을 치르게 그냥 둘 수도 있었다. 그의 손에 당한 만큼 그에게도 대가를 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가 먼저 모욕했으니 이제 그녀 쪽에서 모욕으로 갚아줄 차례였다.
그러나 여종은 그러지 않았다. 성경의 숨은 영웅인 그녀는 자신의 고통을 덜겠다고 그를 응징하지 않았다. 그녀가 취한 행동은 바로 성경 전체에 걸쳐 우리에게 명해진 일이다. 그녀는 복수를 꾀하지 않고 만인의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맡겼다. 상대를 용서하고 기꺼이 치유와 구원의 통로가 되어 주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자신의 고통을 인내로 감당했다. 영국의 설교자 딕 루카스는 이 여종에 대해 "그녀는 대가를 치르고 쓰임받았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하나님이 자신의 희생을 얼마나 쓰실지 모르는 채로 고난을 감수하며 용서를 베풀었다.“
*성공을 숭배하는 자신을 질책만 해서는 이 우상숭배에서 헤어날 수 없다. 닷컴 붕괴와 2001년 9.11 사태가 일어나기 직전인 1990년대 말, 헬렌 루빈은 잡지 <패스트 컴퍼니> (Fast Company)의 기사에서 성공과 물질만능주의를 지나치게 떠받드는 풍조를 다음과 같이 폭로했다.
“우리가 집착하는 대상은 많지만 그중 성공에 대해 가장 거짓말을 많이 한다. 성공과 그 사촌인 돈이 우리를 안전하게 해 주고, 성공과 그 사촌인 권력이 우리를 중요하게 만들어 주며, 성공과 그 사촌인 명성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준다는 것이다. 이제 진실을 말해야 할 때다. 이 세대의 가장 똑똑하고 유능하고 성공한 사람들이 기록적인 숫자로 재앙을 자초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 돈과 권력과 명예를 얻은 뒤 자멸한다. 애초에 그런 걸 바라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막상 얻고 보니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이 기사가 발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2000-2001년에 가벼운 불황이 닥쳤고, 그러자 우리 문화가 성공에 중독되었다는 비슷한 개탄이 많이 나왔다. 성공과 그 여러 '사촌'을 우리 사회의 신으로 삼았음을 우리는 언제쯤 깨달을 것인가? 그러다 9.11 공격이 발생하자 언론은 '부조리의 종말'을 고했다. 이제야말로 우리가 더 전통적 가치인 성실한 노력, 적정 수준의 기대치, 만족지연 등으로 돌아갈 거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2008-2009년에 세계경제가 붕괴될 때 명백히 드러났듯이 우리 문화는 오히려 중독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성공의 우상은 쫓아낼 수 없고 대체해야만 한다. 인간의 마음에는 뭔가 소중한 대상에 대한 갈망이 있다. 특정 대상에 대한 갈망이야 떨칠 수 있지만 그런 욕구 자체를 억압할 수는 없다. 우리는 열등감을 해소하고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자꾸만 뭔가 '큰일'을 하려고 든다. 어떻게 하면 마음의 그런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에게 아무런 '큰일'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 이유를 마침내 깨달으려면 고난당하는 크신 종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해 주신 일을 봐야만 한다. 큰일은 그분이 이미 하셨으니 우리는 할 필요가 없고 '씻기만 하면' 된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이 다 해 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존재의 정당성을 얻는다. 그분이 다 이루어 주신 일을 머리로 믿고 마음에 감격하면 그때부터 중독이 사멸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공하려던 욕구가 스러진다.
*성경의 구원 이야기는 우리가 숭배하는 성공을 철저히 무너뜨린다. 나아만은 병을 고치려면 차례대로 여종의 말과 엘리사의 종의 말과 자기 종의 말을 받아들여야 했다. 당시에 지체 높고 힘 있는 사람들은 종을 노리갯감이나 노역하는 짐승 정도로밖에 취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종들을 통해 구원의 메시지를 보내셨다. 답은 왕궁에서 나온 게 아니라 종의 숙소에서 나왔다!
이 주제의 궁극적 모본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분은 로마나 알렉산드리아나 중국으로 오신 게 아니라 어느 후미진 식민지로 오셨다. 왕궁에서 나신 게 아니라 마구간의 구유에서 태어나셨다.
“궁전이나 저택에서 찾지 말고
왕의 휘장도 들추지 말라.
마구간에 가면 밀짚에 누우신
너의 하나님을 보리라.
-윌리엄 빌링스
예수님이 사역하시는 내내 제자들은 묻고 또 물었다. '언제 권력을 잡으실겁니까? 서민 행보를 언제 그만두실 겁니까? 언제 인력 확충과 자금 마련에 나서실 겁니까? 공직에는 언제쯤 출마하실 겁니까? 예비 선거일은 언제입니까? 텔레비전 특집 방송의 1차 출연은 언제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겸손히 섬기다가 고문당해 죽으셨다. 부활하신 후에도 그분은 당시 아무런 지위도 없던 부류인 여자들에게 맨 먼저 나타나셨다.
예수님의 구원은 힘으로 받는 게 아니라 연약함과 결핍을 인정해야 받는다. 그 구원은 힘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복종과 섬김과 희생과 죽음을 통해 이루어졌다. 여기 성경의 위대한 메시지가 있다. 하나님은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미련하고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며, 없는 것들을 택하여 있는 것들을 폐하신다(고전 1:26-31 참조). 그게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다.
*그런데 성경의 다니엘서 2장에 보면 지상 최고의 권력자인 그는 불면증에 시달렸다.
“느부갓네살이 다스린 지 이 년이 되는 해에 느부갓네살이 꿈을 꾸고 그로 말미암아 마음이 번민하여 잠을 이루지 못한지라 왕이 그의 꿈을 자기에게 알려 주도록 박수와 술객과 점쟁이와 갈대아 술사를 부르라 말하매 그들이 들어가서 왕의 앞에 선지라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꿈을 꾸고 그 꿈을 알고자 하여 마음이 번민하도다 하니(단 2:1-3).
왕은 꿈속에 등장한 거대한 신상 때문에 몹시 괴로웠다. 어쩌면 그는 온 세상이 자신에 대해 그런 환상을 품기를 원했을 것이다. 자신이 '세상에 우뚝 솟은 난공불락의 거인'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신상에 "진흙의 발" (34절)이 있어 결국 쓰러졌다는 것이다.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났다. 자신의 제국이 무너진다는 뜻인가? 누군가가 와서 은밀한 약점을 노릴 것인가?
권력욕이 강한 사람은 극심한 두려움과 불안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니버는 많은 이가 두려움과 불안 때문에 정치 권력을 추구한다고 봤다. 설령 권력을 얻으려는 이유는 두려움이 아니더라도 일단 권력을 얻고 나면 거의 언제나 두려움이 따라온다. 권력을 쥔 사람은 자신이 경쟁자의 과녁이자 질시의 대상임을 안다. 높이 올라갈수록 아찔한 추락의 가망성도 더 커진다. 이제 잃을 게 아주 많기 때문이다.
버나드 메이도프는 폰지 사기로 650억 달러를 날려 150년 징역형을 선고 받았을 때 공공연히 자신의 교만을 탓했다. 과거의 어느 해에 그는 거액의 손실을 보고했어야 했으나 '재정관리사로서 자신의 실패를 인정할 없었다. 자인했을 때 뒤따를 권력과 평판의 상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일단 폰지 사기로 약점을 숨기기 시작하자 그는 언제든 '빠져나갈 수 있다는 생각에 '사기 규모가 커져도 자신의 오판을 인정할 수 없었다.'
이렇듯 권력은 종종 두려움에서 태동해 다시 더 큰 두려움을 낳는다. 꿈 때문에 표면으로 떠오른 느부갓네살의 불안한 정서는 지독히 불편했다. 잘 인정하지 않지만 권력자도 실제로는 자신을 아주 약하게 느낀다.
*인간에게는 무력함에 대한 깊은 두려움이 있고 이 두려움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데서 비롯되었다. 니버의 말이 맞다면 우리가 이 두려움을 떨치려는 방식도 정치와 정부만이 아니라 틀림없이 더 많을 것이다. 권력의 우상은 "근원적 우상”이며 다른 수많은 "표면적 우상"을 통해 표출될 수 있다.
내가 대학 시절에 알았던 제임스는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여색을 밝히기로 유명했다. 매번 그는 여자를 유혹해 일단 잠자리를 갖고 나면 이내 흥미를 잃고 헤어졌다. 기독교를 받아들인 그는 성적 일탈을 금방 끊고 기독교 사역에 열중했지만 근원적 우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수업이나 토론 때마다 그는 논쟁을 일삼으며 이기려 들었고, 자신이 회장이 아닌 모임에서도 늘 회장 행세를 하려 했다. 자신의 새로운 신앙을 주제로 대화할 때도 회의론자들을 거칠게 대해 마찰을 일으켰다.
결국 그의 의미와 가치는 그리스도께 옮겨진 게 아니라 여전히 타인에게 권력을 행하사는 것에 기초해 있음이 분명해졌다. 그런 권력을 통해 그는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꼈다. 제임스가 여러 여자들과 잠자리를 한 것은 그들에게 매력을 느껴서가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동침할 수 있다는 권력을 얻기 위해서였다. 권력만 얻고 나면 여자는 더 이상 흥밋거리가 못 되었다. 그가 기독교 사역에 들어서려 한 것 또한 하나님과 사람들을 섬기고 싶어서가 아니라 자기가 옳고 자기에게 진리가 있다는 그 권력을 얻기 위해서였다. 권력의 우상이 성적인 형태에서 종교적인 형태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이 우상은 꼭꼭 숨어 있었다.
렇듯 권력의 우상은 눈에 보이는 세상 권력을 쥔 자만의 것이 아니다. 누구나 작고 사소한 방식으로 권력을 추구할 수 있다. 동네의 불량배가 될 수도 있고, 하위급 관료주의자가 되어 자기 휘하의 몇 사람을 쥐락펴락할 수도 있다. 권력의 우상은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다.
*느부갓네살의 현자들은 그의 꿈을 해몽하지 못했다. 결국 유다에서 끌려온 포로 출신의 다니엘이라는 궁정 관리가 대령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는 왕이 말하기도 전에 꿈의 내용을 먼저 아뢰고는 내처 해몽까지 내놓았다.
…
신상은 지상의 나라들을 상징했다. 그 거대한 우상의 생김새는 우상화되는 인간의 권력과 성취를 대변했다. 무역과 문화, 법과 권력 등 인간의 자화자찬에 동원되는 모든 문명이었다. 신상을 부서뜨린 것은 돌인데, 이 돌은 신상의 나머지 재료와는 대조적으로 "손대지 아니한"(34절)것이었다.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었다. 신상의 어떤 금속보다도 귀하지 않은 돌이지만 결국은 가장 강력한 요소였다. 다니엘이 말했듯이 이 돌은 어느 날 지상에 세워질 하나님의 나라였다(44절 참조).
이 꿈은 겸손을 명하는 경종의 메시지였다. 비록 상황이 전제군주에게 유리해 보일 때가 많아도 하나님은 결국 그들을 서서히 또는 일거에 낮추신다. 권력자가 알아야 할 것은 스스로 권력을 얻어 낸 게 아니라 하나님께 받았을 뿐이며 인간의 모든 권력은 결국 무너진다는 사실이다.
꿈의 지시대로라면 느부갓네살은 신에 대한 개념을 바꿔야 했다. 이교도인 그는 세상에 신과 초자연적 세력이 많다는 다원주의를 믿었을 것이다. 딱 하나의 우월하고 전능한 입법자가 존재해서 자신을 비롯한 모든 사람이 그 신 앞에 삶을 결산해야 한다고 믿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새로운 메시지가 들려왔다. 유일하신 하나님이 계시므로 자신의 권력 행사를 주권자이자 재판장이신 그분 앞에서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느부갓네살은 이 메시지를 받아들였다.
…
납작 엎드린 것은 평소의 교만하던 느부갓네살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겸손한 행위였다.
*다니엘 4장에 보면 느부갓네살은 왕궁의 자기 집에 무사태평하게 있던 중에 또 꿈을 꾸었다. 이번 꿈은 번민뿐만 아니라 두려움까지 안겨 주었다. 꿈속에 아주 큰 나무가 보이는데, 그 높이는 하늘에 닿았으니 그 모양이 땅 끝에서도 보이겠고 육체를 가진 모든 것이 거기에서 먹을 것을 얻었다. 그런데 그 나무를 베라는 소리가 들렸다(11-12, 14절 참조). 그 소리는 나무를 의인화하며 이렇게 말을 이었다. "그 뿌리의 그루터기를 땅에 남겨 두고 또 그 마음은 변하여 사람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내리라”(15-16절).
왕은 두려워 떨며 다니엘을 불러들였다. 꿈의 내용을 들은 다니엘은 낯빛이 하얗게 변해서 잠시 말없이 서 있다가 해몽을 내놓았다.
왕이여 그 해석은 이러하니이다 곧 지극히 높으신 이가 명령하신 것이 내 주 왕에게 미칠 것이라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 그때에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아시리이다 또 그들이 그 나무뿌리의 그루터기를 남겨 두라 하였은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 그런즉 왕이여 내가 아뢰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단 4:24-27).
첫 번째 꿈은 어떤 의미에서 이론 공부였다. 하나님의 속성과 인간 권력의 속성을 알리는 일반적 내용이었다. 이번에는 하나님이 실습으로 들어가신다. 이론 공부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 왕은 여전히 폭군이었고 특정 인종과 계층과 빈민을 압제했다(27절 참조). 그래서 하나님은 그가 터득해야 할 교훈을 삶으로 가르치신다. 하지만 희망이 있었다. 나무가 베어지되 그루터기는 땅에 남겨져 나중에 다시 자랄 것이다. 하나님의 목표는 응징이나 복수나 파멸이 아니라 징계였다. 고통을 주시되 그 취지는 교정과 구속이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느부갓네살의 심중에 새겨 주시려던 교훈은 무엇인가? 바로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를 그 위에 세우신다'는 사실이다(17절 참조). 누구든지 성공한 사람은 하나님의 과분한 은총을 받은 수혜자라는 뜻이다.
*느부갓네살에게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그의 간증을 들어 보자.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하고 경배하였나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 그때에 내 총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내 나라의 영광에 대하여도 내 위엄과 광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나의 모사들과 관원들이 내게 찾아오니 내가 내 나라에서 다시 세움을 받고 또 지극한 위세가 내게 (전보다) 더하였느니라(단 4:34. 36).”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을 봤을 때 그 결과는 정신을 회복하는 것 그 이상이었다. “지극한 위세가 내게 전보다 더하였다"(36절, NIV). 여기 은혜의 깊은 원리가 있다. 그 궁극의 예를 예수님에게서 볼 수 있다. 우리는 속으로 '나는 하나님처럼 높아져 내 이름을 떨치리라'라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나는 그들을 위해 저 바닥까지 내려가리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인간이 되어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빌 2:4-10 참조). 우리를 구원하려고 모든 권력을 잃고 섬기셨다. 그렇게 죽으셨으나 그 죽음이 구속과 부활로 이어졌다. 그러므로 당신도 한없이 연약해질 때 유스터스와 느부갓네살과 예수님처럼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라고 고백한다면 그때 성장하고, 변화하고, 부활할 수 있다.
예수님의 모본과 은혜는 우리 권력의지를 치유한다. 무력감이 들면 우리는 흔히 그것을 부인한다. 그렇게 부인하며 살아가려고 애꿎은 사람들을 지배하고 통제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른 길을 보여 주신다. 그분은 권력을 버리고 섬기심으로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순한 모델이 아니라 구주이시다. 그분의 사랑 안에 견고해지려면 우리 죄와 결핍과 무력함을 인정하고 그분의 자비에 의지해야만 한다. 그러면 새로 능력을 입되 이제는 남을 압제하지 않게 된다. 정서 불안은 사라지고 권력욕도 뿌리가 잘려 나간다. 어느 설교자의 말마따나 "내려가는 게 곧 올라가는 길이고 올라가는 게 곧 내려가는 길이다.“
*우상이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얻고자 우리가 의지하는 대상이다. 교리적 진리가 거짓 신의 지위로 격상되면 종교 공동체 안에도 우상숭배가 널리 퍼진다. 하나님 앞에서의 신분을 그분과 은혜에 의존하기보다 교리의 정확성에 의존하면 그렇게 된다. 이는 미묘하지만 치명적인 과오다. 이런 형태의 자기정당화에 빠진 사람의 징후는 잠언이 말하는 "거만한 자”가 된다는 것이다. 거만한 자는 상대를 관대히 대하기보다 늘 경멸하고 멸시한다. 자신을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으로 보지 않는다는 증거다. 오히려 그는 자기 견해가 옳다고 믿어 우월감에 빠진다.
종교 공동체 내의 어떤 우상숭배는 사역 성과와 은사를 가짜 신으로 둔갑시킨다. 은사(재능, 능력, 행위, 성장)를 성경이 말하는 영적 "열매" (사랑, 기쁨, 인내, 겸손, 용기, 온유)와 혼동할 때가 많다. 심지어 머리로는 '나는 은혜로만 구원받았다'라고 믿는 사역자도 가슴으로는 하나님 앞에서의 신분이 '내가 얼마나 많은 이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느낄 수 있다.
또 다른 종류의 종교적 우상숭배는 도덕적 생활 자체와 관계된다. 다른 책에 자세히 논했듯이 인간 심령의 기본값은 자신의 도덕적 행위로 하나님과 사람들을 통제하려는 것이다. 내가 덕스럽게 살아왔으니 하나님과 주변 사람도 마땅히 나를 존중하고 지지해야 한다는 심리다. 입술로는 예수님의 모본과 감화를 말할지 몰라도 우리는 여전히 구원을 자신과 자신의 도덕적 노력에 의지하고 있다.
델방코가 설명했듯이 계몽주의라는 문화 대격변은 종교적 정통을 버리고 국가 제도나 개인의 자아실현 같은 것을 하나님 자리에 두었다. 그 결과는 좋지 않았다. 국가를 하나님 자리에 두면 문화 제국주의에 빠지고, 자아를 하나님 자리에 두면 이 책 전반에 논한 많은 역기능적 역동이 뒤따른다.
*“요나가 물고기 배 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 거짓되고 헛된 것(우상)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욘 2:1-2,4,8-10).”
그는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 (8절)를 말했는데, 하나님이 요나에게 가라고 명하신 곳인 니느웨 백성이야말로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요나가 그들에 대해 놀라운 말을 한다. 이 우상숭배자들이 '자기에게 베푸신 헤세드'를 버렸다는 것이다. '헤세드'란 하나님의 언약의 사랑, 구속(贖)하시는 무조건적 은혜를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로 그분과 그분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관계를 기술할 때 늘 쓰이는 용어다. 그런데 요나는 우상숭배자들이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 (8절)를 버렸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요나 자신에게만 아니라 그들에게도 은혜를 베푸심을 청천벽력처럼 깨달은 것이다.
그분은 왜 그러실까? 은혜는 은혜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참된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으며 따라서 모두가 대등하다. 그 사실을 깨닫고 그는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9절)라고 덧붙였다. 구원은 어느 민족이나 계층에 속한게 아니며, 종교적인 사람이라고 종교가 없는 사람보다 더 구원받을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다. 구원은 전혀 우리 쪽의 자격이나 공로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다. 구원은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
이 기도에 신기하게 암시되어 있듯이 요나는 자신의 실상을 깨달았다. 우리 삶 속에 은혜가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것은 무엇인가? 우상에 집착하면 그렇게 된다. 요나는 왜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그리도 몰랐을까?
답은 그의 우상숭배다. 요나는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했고, 자기 종교를 자랑했고, 자기 조국을 열렬히 사랑했다. 그것이 하나로 합해져 치명적인 우상 덩어리가 되었기에 그는 영적으로 눈이 멀어 하나님의 은혜를 보지 못했다. 그 결과 그는 은혜가 필요한 한 도시에 그 은혜를 베풀 마음이 없었고 그들이 다 죽기를 바랐다.
* 요나는 앗수르 민족을 어찌나 증오했던지 하나님이 그들에게 베푸시는 용서를 사상 최악의 일로 보았다. 그는 니느웨 사람들의 죄를 지적하고 비난할 마음만 있었지 그들을 사랑할 수는 없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비와 구원을 받는 것도 싫었다.
어찌된 일인가? 모든 인간은 똑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으며, 따라서 똑같이 하나님의 은혜의 대상임을 요나는 물고기 배 속에서 깨달았다. 그러나 그의 우상숭배가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그가 요나서 2장에서 깨달았던 하나님의 은혜는 다분히 지식적인 것이어서 마음속에까지 파고들지 못했다.
요나가 경종을 울려 주듯이 인간의 마음은 심지어 하나님께 직접 지도를 받아도 결코 빨리 변하거나 쉽게 변하지 않는다. 복음을 민족적 우월감에 적용하지 못한 베드로의 잘못을 바울이 지적해야 했듯이 요나를 빚으시는 하나님의 작업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하실에 쥐가 있는지 알려면 계단을 천천히 걸어 내려가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다. 그러면 시끄러운 소리를 내도 주위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정말 무엇이 있는지 알려면 상대가 깜짝 놀라도록 계단을 빨리 달려 내려가다 펄쩍 뛰어야 한다. 그러면 우르르 황급히 달아나는 작은 꼬리들이 보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의 진면목도 현실 생활에서 스트레스를 겪을 때 드러나는 법이다.
예컨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구주는 성공이나 재물이 아니라 그리스도라고 믿고 고백한다. 입으로는 사람들의 인정(認定)보다 그분이 나를 어떻게 보시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원칙적으로는 예수님이 구주이셔도 여전히 우리 마음에 대한 사실상의 소유권은 다른 것들이 쥐고 있다. 요나에게서 보듯이 복음을 머리로 믿는 것과 마음 깊이 소화해 모든 사고와 감정과 행동이 변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요나는 아직도 우상에 지배당하고 있었다.
*우상숭배는 요나의 사고를 뒤틀어 놓았다. 그가 늘어놓는 궤변은 누가 봐도 제정신이 아니다. 하나님이 긍휼과 사랑과 인내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그가 어떻게 격노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이유는 상사병에 걸린 야곱이 그리 쉽게 속을 수 있었던 이유나 탐욕에 찌든 삭개오가 조국과 동포를 배신할 수 있었던 이유와 똑같다. 이들은 다 우상 때문에 눈이 멀어 있었다.
우상이 우리 마음을 장악하면 결국은 성공과 실패와 행복과 슬픔의 정의가 몽땅 변질된다. 우상의 기준대로 현실이 재정의된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인내와 긍휼은 누가 보기에도 선한 것이다. 그런데 우상 때문에 민족의 세력과 위상이 궁극적 선(善)이 되면 거기에 방해되는 것은 당연히 다 악으로 변한다. 그분이 이스라엘의 적을 멸하지 않으신 것은 사랑이 많으셔서인데, 우상 때문에 요나에게는 그 사랑까지도 악한 것으로 보였다. 결국 악을 선이라 하고 선을 악이라 하는 게 우상 때문에 가능해진다. 우상은 우리의 사고만 아니라 감정까지도 뒤틀어 놓는다.
*진정한 죄책감은 회개와 배상을 통해 사라지지만 어떤 죄책감은 해결이 요원하다. '하나님이 용서하신다는 거야 알겠지만 나 자신이 용서가 안 된다'라는 말은 자신이 우상을 실망시켰다는 뜻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인정보다 우상의 인정이 더 중요하다. 우상은 우리 삶 속에서 신처럼 행세한다. 따라서 성공이나 부모의 인정을 신으로 삼았다가 실패하면 그 우상이 평생 마음속에서 우리를 저주한다. 패배감을 떨칠 수 없다.
우상숭배를 미래에 대입해서 우상이 위협받으면 우리는 두려움과 불안으로 무력해진다. 우상숭배를 과거에 대입해 우상을 실망시키면 우리는 불치의 죄책감에 빠진다. 우상숭배를 현재의 삶에 대입해서 우상이 환경에 막히거나 없어지면 우리는 분노와 절망으로 몸부림치게 된다.
이 모든 일이 요나의 마음속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요나는 왜 삶의 의욕을 잃었는가? 삶의 의미를 잃지 않고는 삶의 의욕도 잃을 수 없다. 요나에게 삶의 의미란 바로 조국의 자유였다. 그것을 바라는 것 자체는 좋지만 그게 최고의 것이 되었다. 그래서 앗수르는 그를 깊은 증오와 분노로 들끓게 했다. 그들이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하나님과 그분의 자비가 요나를 분노와 절망으로 들끓게 했다. 주님이야말로 요나가 원하던 이스라엘의 미래를 막을 전능하신 장애물이었으니 말이다.
*하나님은 다르셨다. 요나에게 주시는 교훈의 끝부분에 그분은 일부러 요나와 자신을 비교하신다. 그분이 요나에게 명하신 일은 자신의 안전지대와 안락을 떠나, 자신을 해칠지도 모르는 백성에게 가서 사랑으로 섬기라는 것이었다. 요나는 처음에는 아예 가지 않았고 나중에도 가긴 했지만 긍휼은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너는 이 성읍을 긍휼히 여기지 않았지만 나는 긍휼히 여기겠노라”라고 말씀하셨다. 요나는 거부했지만 그분은 이 악하고 강포한 도시를 사랑하시겠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무슨 뜻인가? 요나가 마다한 일을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몇 세기 후에 어떤 사람이 와서 자신이 참된 요나라는 말씀으로 청중을 깜짝 놀라게 했다(마 12:39-41 참조).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실 때 최고의 안전지대를 버리셨다. 자신을 해칠지도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반드시 해칠 사람들에게 가서 그들을 섬기기 위해서였다. 그들을 구원하려고 그분은 말씀만 전하신 게 아니었다. 거기서 훨씬 더 나아가 그들을 위해 죽기까지 하셔야 했다. 첫 요나는 죽었다고 여겨졌을 뿐이지만 예수님은 실제로 죽었다가 부활하셨다. 이 사건을 그분은 요나의 표적이라 칭하셨다(마 12:39 참조).
참된 요나이신 예수님을 이렇게도 생각해 수 있다. 그분의 생애 중 마가복음 4장에 기록된 한 기사는 의도적으로 구약의 이야기를 환기시킨다. 무서운 풍랑이 일었는데 예수님도 요나처럼 그 한복판에 잠들어 계셨다. 선원들처럼 그분의 제자들도 겁에 질려 그분을 깨우며 모두 죽게 생겼다고 말했다.
두 경우 모두 하나님의 능력으로 풍랑은 기적처럼 잔잔해지고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여기 큰 차이가 있다. 요나는 바람과 물의 풍랑 속에 내던져졌지만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최악의 풍랑 속에 내던져지셨다. 우리 죄악 때문에 마땅히 우리가 당해야 할 하나님의 모든 공의와 형벌을 그분이 당하신 것이다. 나는 우상으로 힘들 때면 예수님을 생각한다. 나를 위해 자진해 그 최악의 풍랑을 정면으로 받아 내며 순복하신 그분을 떠올린다. 예수님이 그 끔찍한 풍랑 속에 가라앉으셨기에 나는 인생의 다른 어떤 풍랑도 두려워할 것 없다. 예수님이 그렇게까지 해 주셨기에 내 삶의 가치와 확신과 사명이 그분께 있음을 나는 안다. 이 땅의 온갖 풍랑이 많은 것과 내 목숨까지 앗아갈 수 있어도 내 생명이신 예수님을 앗아갈 수는 없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암시하셨듯이 그분은 요나와 달리 이 땅의 잃어버린 큰 성읍들을 사랑하실 것이었다. 이 약속은 참 요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성취되었다.
요나서는 질문으로 끝난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렇게 물으신다. '네 사랑도 내 사랑과 같아야 하지 않겠느냐? 너밖에 모르는 그 우상숭배에서 벗어나 이제부터 나를 위해, 다른 사람을 위해 살겠느냐?' 독자는 대답을 기다리지만 책은 말없이 거기서 끝나 버린다.
*17세기 영국의 목사 데이비드 클락슨은 가짜 신에 대한 더없이 예리하고 포괄적인 설교를 기록으로 남겼다. 우상숭배에 대해 그는 "인정할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이보다 더 흔한 것은 없다"라고 말했다. 우리 영혼이 집이라고 가정한다면 "방마다 구석마다 우상이 세워져 있다"라고도 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보다 자기 지혜를,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갈망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기 평판을 더 중시한다.
또 클락슨은 우리가 하나님보다 인간관계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그의 말마따나 사실 '많은 이가 자기 원수까지도 신으로 삼는다.' 하나님 마음을 아프지 않게 해 드리려 애쓰기보다 "사람들 때문에 자신의 자유와 재산과 생명이 위태로워질까 봐 더 큰 근심과 불안과 당황과 염려에 빠질 때 그렇게 된다.”
과연 인간의 마음은 우상을 대량생산하는 공장이다. 희망이 있을까? 그렇다. 우상을 그냥 없앨 수는 없고 대체해야만 함을 이제부터 깨달으면 된다. 그냥 뿌리 뽑으려 하면 우상이 되살아나지만 다른 것을 대신 들여 놓으면 해결된다. 다른 것이란 무엇일까? 물론 하나님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이란 그분의 존재를 믿는 막연한 신념이 아니다. 그것은 웬만한 사람에게다 있지만 그들의 영혼에는 우상이 득실거린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 생생하게 만나는 것이다.
앞서 우리가 다뤘던 야곱도 분명히 하나님을 믿었으나 그를 속박하고 있던 가짜 신을 물리치려면 그 이상이 필요했다. 창세기 32장에 그가 그것을 얻은 이야기가 나온다. 성경에서 가장 감동적이고 극적인 내러티브 중 하나다. 그만큼 신비롭기도 하지만 야곱 인생에 결정적 전환점이 된 것만은 분명하다.
*야곱의 생애를 읽는 독자들은 이 대목에서 당황할 수 있다. 평생을 통틀어 그가 영웅으로 등장하는 일화는 단 하나도 없다. 그는 도덕적으로 행동한 적도 없다. 오히려 늘 미련하거나 교활하거나 심지어 사악하게 행동했을 뿐이다. 그는 하나님의 복을 받을 자격이 조금도 없어 보인다. 그런데 거룩하신 정의의 하나님이 왜 야곱에게 이처럼 은혜를 베푸셨을까? 그분이 연약하신 척하며 그를 죽이지 않으시고, 자신의 정체를 슬쩍 알려 주시고, 그가 필사적으로 붙들었다는 이유만으로 그에게 복을 주신 까닭이 무엇인가?
이 질문의 답은 주님이 다시 인간으로 등장하시는 성경 후반부에 나온다. 어둠 속에서 하나님은 야곱의 목숨을 살리려고 연약한 척하셨다. 그러나 갈보리의 어둠 속에서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려고 인간이 되어 정말 연약해지셨다. 야곱이 목숨을 걸고 순종하며 매달린 것은 자기가 복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를 피하실 수 있었음에도 기꺼이 감수하고 죽기까지 순종하며 매달리신 것은 자신이 아니라 우리를 복되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 3:13-14).”
야곱은 왜 하나님을 그렇게 가까이 대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예수님이 연약한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 죄의 형벌을 치르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14절) 하셨다. “성령의 약속"이란 무엇일까?
갈라디아서의 다음 장에 바울은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라고 썼다. “아빠" (abba)는 아람어로 '아버지'의 애칭이다. 부모의 사랑에 대한 어린아이의 당당한 믿음을 가리키는 단어다. 바울의 말은 우리가 복음을 믿으면 성령이 하나님의 사랑과 복을 우리 마음속에 실재하게 하신다는 뜻이다.
당신은 존재의 심연에서 하나님의 복을 들었는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막 1:11)라는 말씀이 기쁨과 힘의 끝없는 원천인가? 당신에게 그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느꼈는가?
야곱이 받은 것이 바로 그 복이다. 성령으로 말미암는 그 복이 이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것이 되었다. 이것만이 우상숭배를 퇴치하는 묘약이다. 이 복이 있어야만 우상이 필요 없어진다. 야곱처럼 우리도 대개 '온갖 엉뚱한 데서 복을 구하며' 살다가 그 후에야 이 복을 발견한다. 마침내 이를 발견하려면 대개 다리를 저는 연약함을 경험해야 한다. 하나님의 복을 가장 많이 받은 수많은 이가 저는 다리로 기뻐 춤추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영향력을 미치는 가짜 신을 식별하지 않고는 당신의 마음이나 문화를 이해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 21-25절에 말했듯이 우상숭배는 단지 많은 죄 중의 하나가 아니라 인간 심령의 근본 문제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롬 1:21, 25).”
이어 바울은 세상에 불행과 악을 초래하는 죄의 목록을 길게 나열하는데, 그 뿌리는 다 악착같이 '신을 만들려는 인간의 충동이라는 토양에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저지르는 모든 잘못의 원인은 언제나 우상숭배다. 이것을 마르틴 루터보다 더 잘 간파한 사람은 없다. 그가 <마르틴 루터 대교리문답》 (Large Catechism, 복 있는 사람 역간)과 Treatise on Good Works(선행에 대한 논고)에 썼듯이 십계명은 우상숭배를 금하는 계명으로 시작된다. 왜 그게 먼저 나올까? 루터에 따르면 율법을 어기는 배후의 근본 동기가 우상숭배라서 그렇다.2 제1계명을 어기지 않고는 다른 계명도 어길 수 없다.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고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이타적으로 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총괄적인 답은 '우리가 연약한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각의 상황에서 구체적인 답은, 뭔가가 있어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보다 그 뭔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사람의 인정, 평판, 남보다 높은 권력, 재정적 이익'을 '하나님의 은혜와 호의'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 있게 여기지 않는 한 우리는 거짓말하지 않을 것이다. 변화의 비결은 각자의 심중에 있는 가짜 신을 파악해서 해체하는 것이다.
우상을 식별하지 않고는 문화도 이해할 수 없다. 두 유대인 철학자 핼버털(Halbertal)과 마걸릿(Margalit)이 분명히 밝혔듯이 우상숭배란 단지 예배 의식의 한 형태가 아니라 유한한 가치에 기초한 정서와 생활 방식 전체이며, 피조물을 신처럼 절대화하는 일이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우상으로부터 돌이킬 때는 늘 그 우상이 만들어 낸 문화도 함께 배격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타국의 신들을 배격할 뿐 아니라 '그들의 행위를 본받지 말라고 명하셨다(출 23:24 참조). 문화를 비판하지 않고는 우상을 대적할 수 없고 우상을 식별해 대적하지 않고는 문화를 비판할 수 없다.
* 우리의 우상을 어떻게 식별할 것인가?
첫째로 생각의 내용을 점검해야 한다. 대주교 윌리엄 템플은 "혼자 있을 때 하는 일이 곧 당신의 신앙이다"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서 마음속의 실제 신은 따로 신경 쓸 일이 없을 때 저절로 흘러가는 생각이다. 당신이 즐기는 공상은 무엇인가? 무심코 당신 머릿속을 차지하는 상상은 무엇인가? 승진하는 시나리오를 쓰는가? 이상적인 주택 같은 재물인가?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인가? 한두 가지 공상이 곧 우상숭배의 징후는 아니다. 그보다 이렇게 자문해 보라. 당신이 습관적으로 생각하면서 혼자서 속으로 기쁨과 안락을 얻는 대상은 무엇인가?
둘째로 돈을 어떻게 쓰는지 보면 자신이 속으로 진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식별할 수 있다. 예수님은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라고 하셨다. 돈은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대상 쪽으로 저절로 흘러가게 되어 있다. 사실 어떤 대상에 지출하는 돈이 너무 많아 항상 절제에 힘써야 한다면 이거야말로 우상의 징후다.
사도 바울이 썼듯이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사역과 자선과 빈민 구제에 아낌없이 헌금하게 되어 있다(고후 8:7-9 참조). 그런데 우리 대부분은 옷이나 자녀에게, 또는 집과 자동차 같은 지위의 상징물에 과소비를 한다. 평소 씀씀이를 보면 우상이 드러난다.
셋째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이들에게 특히 유용한 우상 식별법이 있다. 당신은 꾸준히 교회에 나가고 있고, 독실한 교리적 신념도 다 갖췄고,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려 최선을 다할 수 있다. 하지만 일상 속에서 당신의 진짜 구원은 무엇인가? 당신은 정말 무엇을 위해 살고 있으며, 믿는다고 고백하는 신 말고 당신의 실제 신은 무엇인가?
그 답을 아는 좋은 방법이 있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고 희망이 꺾일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면 된다. 기도한 대로 되지 않으면 누구나 서운하고 아쉬울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으면 떨치고 나아간다. 아직 삶이 끝난 게 아니며 그런 것들은 당신의 주인이 아니다. 그러나 기도한 대로 되지 않았다고 분노가 폭발하거나 깊은 절망에 잠긴다면 그것이 당신의 실제 신일 수 있다. 요나처럼 당신도 죽고 싶을 만큼 성내고 있다면 말이다.
마지막 시험은 모두에게 해당된다. 가장 통제하기 힘든 자기 감정을 보라.' 고기 잡는 어부가 물이 소용돌이치는 쪽으로 가듯이, 당신의 우상도 가장 고통스러운 감정의 밑바닥에서 찾으라. 특히 좀처럼 걷히지 않는 감정이나 뻔히 잘못인 줄 아는 행동으로 당신을 몰아가는 감정에 주목해야 한다.
화가 날 때면 이렇게 자문해 보라. '나에게 정말로 중요한 뭔가가 있는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손에 넣어야만 할 것이 있는가?' 심한 두려움과 절망과 죄책감에 대해서도 똑같이 하라. '내가 이토록 두려운 이유는 꼭 필요한 게 아닌데도 필요하다고 여기던 내 삶의 뭔가가 위협받고 있기 때문인가? 내가 이토록 침울한 이유는 꼭 필요한 게 아닌데도 필요하다고 여기던 뭔가를 잃었거나 거기에 실패했기 때문인가?' 당신이 과로로 쓰러질 지경으로 미친 듯이 일하고 있다면 이렇게 물어보라. '나는 이것이 있어야만 만족과 의미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런 질문을 던져서 '자신의 감정을 뿌리째 뽑아보면 대개 거기에서 우상이 쭉 딸려 나온다.
*우상을 뿌리 뽑기만 하고 그 자리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심지' 않으면 그 우상은 다시 자라난다.
기쁨과 회개가 함께 있어야 한다. 기쁨 없는 회개는 절망에 이르고, 회개없는 기쁨은 얄팍해서 잠깐의 감동 외에 깊은 변화를 주지 못한다. 사실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희생적 사랑을 더없이 기뻐할 때 우리는 역설적으로 자신의 죄를 가장 진정으로 깨달을 수 있다. 결과가 두려워 회개한다면 정말 죄를 슬퍼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딱하게 여기는 것이다. 두려움에 기초한 회개(“하나님께 혼나기 전에 고치는 게 낫다")는 사실 자기 연민이다. 두려움에 기초해서 회개하면 죄 자체를 미워할 줄 모르기 때문에 죄의 매혹적인 위력은 그대로 남는다. 자신의 신상을 위해 죄를 삼갈 뿐이다. 그러나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희생적 고난과 사랑을 기뻐하면 즉,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려고 그분이 치르신 대가를 보면 죄 자체를 미워하게 된다. 그분이 담당하셔야 했던 죗값이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을 가장 확증해 주는 것도 예수님의 희생적 죽음이고, 죄의 해악을 가장 깊이 깨우쳐 주는 것도 역시 그분의 죽음이다. 두려움에 기초한 회개는 우리 자신을 미워하게 만들지만 기쁨에 기초한 회개는 죄를 미워하게 한다.
그리스도 안의 기쁨이 중요한 이유가 또 있다. 우상 자체는 거의 언제나 선하기 때문이다. 직장과 가정을 우상으로 삼았던 사람은 이제부터 직장과 가정을 그만 사랑해야 하는 게 아니다. 반대로 그리스도를 훨씬 더 사랑하면 그런 것에 집착해 노예가 되지 않는다. 성경이 말하는 '기쁨'은 그냥 일이 잘돼서 행복한 것보다 훨씬 깊다.
바울은 우리에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빌 4:4)라고 명했는데 이는 항상 행복을 느끼라는 뜻일 수 없다. 누구도 남에게 항상 특정한 감정을 품도록 명령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기뻐하는 사람은 대상을 귀히 여기며 그 가치를 음미한다. 그 아름다움과 중요성을 되새겨 결국 마음이 달콤한 안식을 누린다. 기쁨은 마음이 순해져서 안식할 때까지 하나님을 찬송하는 방식이다. 그러면 여태 필요한 줄 알고 꼭 쥐고 있었던 다른 것들을 결국 다 놓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