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그린 위의 룰, 도로 위의 룰
신지애·프로골퍼
2003년 질병도 재난도 아닌 교통사고로 어머니를 잃었다… 그린에서처럼 도로에서도 심판이 없다고 남이 안 본다고 양심을 속여선 안 된다.
골프 경기는 심판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룰이 엄격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분들을 보았다. 룰을 어기더라도 좀처럼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골프의 특성 때문에도 그렇게 느끼는 것 같다.
프로골퍼로서 지금 이 자리에 서기까지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 바로 룰을 지키는 것이었다. 경기 중 순간적인 판단 잘못으로, 또는 승부에 집착한 나머지 룰을 어기는 선수들이 없지 않다. 골프는 심판이 선수를 따라다니지 않을 정도로 개개인의 자율성이 크게 부여되기에 룰을 지키는 것은 곧 '양심'을 지키는 문제가 된다. 내가 본 세계적 골프선수들은 룰에 충실했다. 양심을 속이는 것을 그 무엇보다도 큰 불명예로 여겼다.
내가 좀 지나치리만치 룰에 집착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겪은 불행과도 관계가 있다. 2003년 교통사고로 어머니를 잃었다. 질병에 의해서도 아니고 전쟁이나 자연재해도 아닌데 사랑하는 엄마를 잃은 허망함과 절망감은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누구나 알다시피 교통사고는 충분히 예방할 수 있는 것이다. 교통사고가 일어나는 것은 아무도 안 본다고, 심판이 없다고 양심을 속이는 사람들 때문이다. 도로 위에서 룰을 어기는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큰 불행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를 절감했다. 그 후 나는 룰에 관한 한 나 스스로에게 단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런 계기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린과 도로는 유사한 점이 많은 것 같다. 도로상에서는 교통법규라는 룰이 존재하고 그린에는 골프 룰이 있다. 도로에는 경찰이 있고, 그린에도 심판이 있지만 양쪽 다 잘 눈에 띄지 않는다. 도로에는 다른 차의 운전자라는 동반자가 있고 그린엔 같이 라운딩하는 동반자가 있다. 운전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경찰이 모두 감독하지 못하는 현실상 도로 역시 그린처럼 운전자의 자율성이 크게 부여되는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운전자 개개인의 양심과 교통법규 준수의식이 분명히 서 있지 않으면 룰이 무너진 골프장처럼 도로도 엉망진창이 되고 말 것이다.
해외투어를 다니다 보면 우리나라의 교통문화에 대해서 참으로 많은 것을 느끼게 된다. 황색 신호가 들어오면 브레이크를 밟아야 하는데 반대로 급가속을 한다. 다른 차량의 길을 막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교차로에서 꼬리물기를 한다. 사람이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는데도 자동차의 머리를 들이민다. 후진적 교통문화의 상징인 음주운전 사고 소식은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온다. 가끔 외국 선수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그들은 세계적인 도시가 된 서울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인다. 그런데 이야기는 전통과 현대적 감각이 접목된 서울의 아름다움에서 시작하여 열이면 아홉이 우리나라 운전자들의 운전태도에 대한 불쾌함으로 끝난다.
나는 그때마다 무슨 일이든 빨리 하는 우리 국민들의 열성 때문에 그런 부작용도 있는 것이라고 이해시켜 보았다. 사실 속으로는 나 역시 양보나 배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우리의 교통문화에 큰 아쉬움을 느껴왔다.
한번 일어난 사고는 좀처럼 씻어내기 어려운 큰 상처를 남긴다. 지금도 교통사고로 인해 장애를 가진 수많은 이들이 매일 교통사고의 악몽을 떠올리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나도 어머니를 잃기 전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들었다. 그러나 교통사고는 결코 다른 사람의 얘기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교통사고는 결코 되돌릴 수 없으며 후회는 소용이 없다.
무심코 행한 나의 법규 위반이 나 자신뿐만 아니라 나의 가족, 나아가 선량한 다른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치명적인 행위라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이 한 번만 더 생각해 줬으면 한다. 교통법규를 지키기만 해도 대부분의 교통사고를 예방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교통사고가 끊이지 않는 이유는 우리에게 '함께하는 문화'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골프장에 처음 나갈 때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것은 스윙 폼이 아니라 경기 규칙과 동반자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에티켓이다. 프로골퍼 세계에선 룰을 지키지 않으면 실격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선수 자격까지 박탈될 수 있다. 선수로서 생명을 잃는 것이다. 룰을 어겼을 때의 결과는 운전과 다를 것이 없다. 아마추어 골퍼들 중에도 규칙을 지키지 않고 동반자가 서로 배려하지 않았던 골프 라운딩이 악몽처럼 남아 있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문제를 일으킨 사람과는 아무도 같이 골프를 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올해 G20 정상회의가 열린다고 한다. 세계의 이목이 쏠린다고 한다. 이런 행사 한 번으로 갑자기 교통문화가 바뀌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왜 심판이 없어도 규칙은 지켜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는 계기는 되기를 바란다. 언젠가 외국 선수들에게 자신있게 우리의 안전한 교통문화를 자랑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으로 믿는다.
출처 : 조선일보 2010.0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