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창의 역사 최 건 차
죽장竹槍은 대나무를 엇비슷하게 깎아 끝을 예리하게 만든 창이다. 조선 시대에는 병사들의 훈련을 겸한 기초무기였고, 1923년 일본 관동대진 때는 일인들이 조선사람들이라면 보이는 데로 살상하는 도구로 쓰였다. 그런 죽창을 광복 이후 호남지역의 일부 극열좌파분자들이 살상용 무기로 사용했다. 지리산 주변의 산간지대를 무대로 한 그들은 소총 구하기가 어려워 주변에 흔한 대나무로 창을 만들었고 산속에 은거해 있다가 야간에 활동했다. 주로 지서와 공공시설물에 불을 지르며 군경공무원과 그 가족들이나 우익계의 부유층 인사들을 납치하거나 살해했다.
1946년 이른 봄 어느 날 밤 나는 끔찍한 사건을 목격하게 되었다. 죽창을 든 무리가 탐진강 상류의 금성리 마을에 나타났다. 왜정 때부터 경찰관 아들을 두고 세도를 부리며 마을 구장으로 군림하고 있던 박 영감을 마당으로 끌어내어 죽창으로 마구 찔러 죽였다. 뒷방에 자고 있던 경찰관 아들은 급하게 도망쳤으나 그들에게 추격당하여 용소龍沼 냇가에서 역시 죽창에 찔려 처참하게 살해됐다.
죽창으로 살해당한 사건이 이곳저곳에서 발생하고 있어 산사람들을 몹시 두려워했다. 그 이듬해 봄 지서의 경찰관 한 명이 집에 들렀다가 그들에게 잡혀 또 죽창에 찔려 죽었다. 면장과 지서장 등 경찰관 여럿이 3/4톤 트럭을 타고 장례를 치르러 상가가 있는 영암군 금정면을 향해 ‘덤재’를 넘다가 한낮에 습격을 당했다. 그들은 며칠 전 경찰로부터 탈취한 소총으로 사격을 가한 후에 죽창으로 찌르고 스페어 통의 휘발유를 뿌려 차량과 시신을 모두 불태우고 산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광주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제20연대의 2개 중대가 급히 달려왔다. 그들은 각개전투를 훈련해가면서 주간에만 소탕전을 펼치고 있었다. 크게 효과를 보지 못하고 전사자가 발생하여 학교 앞 강변에서 시신을 화장하고 있어 멀리서 지켜봤었다. 군인들은 미군 철모를 쓰고 최신형 8연발 M1소총에 미제대검과 수류탄을 가슴에 달고 있었다. 밤손님인 빨치산의 두목격인 자는 장검을 지팡이처럼 짚고 다녔고 저격수 격인 자만이 일제 99식 단발 소총이었고 나머지는 죽창이었다.
그들은 험준한 산악지형과 야음을 잘 이용하므로 군인들에게는 버거운 상대였다. 이런 와중에 여수-순천에서 반란을 일으킨 국군 제14연대의 일부가 찾아들면서 모두를 반란군이라 했다. 해가 바뀐 1950년 가을에는 낙동강 전투에서 패주하던 인민군들까지 끼어들어 세력이 더 강해졌다. 그들은 이미 죽창을 버리고 일부지만 M1소총과 기관총에다 박격포를 갖게 되었다. 숫자가 늘고 무기가 막강해진 때부터 빨치산이라 불렸고, 의기충천하여 인근 지서를 마구 습격하며 자기들의 해방지구를 확장하려 들었다. 나는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베트콩들이 설치한 죽창 장애물을 대하면서 허망하게 죽어간 빨치산들에 대한 언짢은 추억이 떠올려졌다.
빨치산해방구에서 살았던 청소년들은 죽창을 들고 그들의 전위부대 역할을 했다. 나는 1950년 초등학교 3학년으로 빨치산소년단원이 되어 작은 죽창을 들고 사상교육과 유격훈련을 받으며 그들의 노래를 배웠다. 한 날은 인민군의 대단한 주력부대라고 자부하는 제6사단, 일명 방호산부대가 우리 동네에 온다는 것이다. 그때가 1950년 늦가을 추수가 끝난 어느 날 저녁해가 질 무렵이었다. 무적의 인민군 OO부대라며 1개 대대 가량의 인민군이 말을 탄 장군을 호위하며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동네 사람들이 지어낸 저녁을 먹고 미리 준비케 한 짚신을 챙겨갔다.
방호산부대가 다녀간 십 여일 후였다. 나는 매포(러시아어로 전문)를 어느 곳에 전달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 경찰토벌대가 소탕전을 펼치고 있는 적지에서 은밀하게 활동하고 있는 세포에게 매포를 전달하라는 것이다. 비밀문건을 허리춤에 감추고 출발하기 전 시키는 데로 ‘매포를 전달하고 쓰러진 동무…’라는 쏘련군의 비장한 군가를 부르고 동행하게 된 또래와 길을 나섰다. 이십 여리나 떨어진 곳이었지만 아는 지역이라 임무를 잘 수행했다. 돌아오는 길에 포위망을 급히 빠져나오려다가 적발되어 토벌대가 추격하며 쏘아대는 기총사격에 아차 당할 뻔했다.
그 이듬해 봄에는 지서를 튼튼하게 보강하는 공사가 시작되었다. 돌담을 높이 쌓은 토치카 앞에 해자를 만들어 대나무를 짧게 깎아 밑바닥에 박고 물이 흐르게 했다. 밖에는 대나무로 2중 울타리를 삥 둘러쳤다. 철벽 요새 같은 그 밖에 경계초소들을 만들어 민간인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죽창을 들고 야간 경계를 서게 했다. 지서를 습격하려 드는 빨치산들을 상대로 한 일차적인 방패 막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빨치산들은 지서를 습격하려고 주요 도로와 전선 줄을 다 끊고 요소요소에 매복했다. 그들에게 동원된 민간인들이 어둠 속에서 죽창과 횃불을 들고 꽹과리를 치며 징을 울려대면서 지서를 향해 조여들었다. 외곽초소가 무너지고 대나무 울타리가 불태워지면서 빨치산들과 죽창을 든 무리에게 지서가 점령되고 말았다.
남부군이 괴멸되고 반세기가 훨씬 지났는데 역사가 되풀이 되고 있는 것 같다. 2000년대에 들어 우리사회에는 또다시 빨치산 특공대원들 못지않은 자들이 활동하고 있다. 그들은 명목상으로는 노동개혁을 부르짓으며 머리에 붉은 띠를 동여매고 백주에 파출소를 향해 화염병을 던지며 경찰 차량에 불을 지르고 있다. 또 다른 곳에서는 방어만 하느라 쩔쩔매는 경찰관들을 죽창으로 찌르려는 게 TV로 생생하게 보도되었다. 정권을 잡은 자들이 북한 편을 들며 보안법 폐지와 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입장이라 그저 말리는 척만 하는 모양새다. 폭거에 미온적인 정부의 처사가 무엇 때문인지를 알고 있는 애국민들에게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2023.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