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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진도(洪振道)
[본관] 남양(南陽, 지금의 경기도 화성)
[주요관직] 판의금부사. 한성부판윤. 판중추부사
[생졸년] 1584년(선조 17)~1649년(인조 27) / 향년 65세
조선 후기에, 판의금부사, 한성부판윤, 판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자유(子由), 호는 청회(聽檜). 아버지는 동지돈녕부사 홍희(洪喜)이며, 어머니는 능안부원로 구사맹(具思孟)의 딸이다. 아버지 희가 인조의 외조부인 구사맹(具思孟)의 사위여서 인조와 이종사촌 형제이다.
1613년(광해군 5) 처음 별제(別提)를 거쳐 목천현감이 되고 의금부로 전임되었다. 광해군의 정치가 문란해짐을 보고 나라를 바로잡기 위하여 구굉(具宏)·신경진(申景禛) 등과 모의하니 아우 홍진문(洪振文)도 이에 참여하였다.
광해군이 능창군(綾昌君)을 살해하자 능창군의 형인 능양군(綾陽君: 뒤의 인조)이 화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집을 반환하자, 그의 집을 능양군에게 헌납하였다. 이들을 의심한 광해군이 능양군의 아버지 원종(元宗)이 죽었을 때 조객(弔客)들을 주시하였으나, 그는 두려움없이 끝까지 장례를 치렀다.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그 공으로 공조좌랑에 특진되고, 이듬해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에 책록되어 남양군(南陽君)에 봉하여졌다. 1625년 부평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을 거쳐, 1631년 공주목사가 되고, 선정을 베풀어 가의대부에 승진하고, 한성부우윤을 역임한 뒤 남양부사가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남한산성으로 호종하였고, 이듬해 자헌대부에 올랐다.
1644년 모친상을 마친 뒤 도총관, 지돈녕부사 겸 지의금부사를 거쳐, 이듬해 사은 겸 주청부사(謝恩兼奏請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35년 병자호란 때 신경진 등과 화의(和議)를 주장하였으며, 그 뒤 판의금부사·한성부판윤·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남양부원군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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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朝人物考續七 / 擧義
■ 판중추부사 홍공 신도비명 병서
(判中樞府事洪公神道碑銘 幷序)
옛날 목릉(穆陵: 선조) 말기에 어리석은 군주가 왕위를 이어 모후(母后)를 유폐시키고 왕자를 도륙하니, 윤리강상이 땅에 떨어져 나라의 명맥(命脈)이 장차 끊어질 위기에 놓였다. 이때에 우리 인조대왕(仁祖大王)이 사방의 충성되고 의로운 선비들을 이끌고 일어나서 이를 크게 바로잡으니, 잠깐 사이에 천지가 밝아지고 조화로운 기운이 유행하게 되었다.
이는 비록 성인(聖人)이 일어남으로 말미암아 이룩된 것이기는 하지만 만약 어질고 준걸한 자들이 시운(時運)에 순응하여 일제히 역능을 발휘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처럼 빠르게 대업(大業)이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겠는가.
이에 그 공적을 기상(旂常)에 기록하여 3등으로 관작을 나열하였는데, 그중 한 사람이 바로 분충찬모정사 공신(奮忠贊謨靖社功臣) 숭록대부(崇祿大夫) 판중추부사 겸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남양군(南陽君)으로서,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 남양부원군(南陽府院君)에 추증된 홍공이다. 공은 휘(諱)가 진도(振道)이고 자가 자유(子由)이며, 세계(世系)는 경기(京畿) 남양부(南陽府)에서 나왔다.
휘 선행(先幸)이 처음으로 고려(高麗)에서 벼슬을 하여 금오위위(金吾衛尉)가 되었고, 9대를 전해 내려와 자경(子儆)이 참판의 관직을 지냈다. 이후에 부제학 형(泂), 경력 언광(彦光), 이조 판서 정효공(貞孝公) 담(曇), 증 판서 종복(宗福), 동지돈녕부사 희(熹)에 걸쳐 세대를 연이어 인물이 있었다.
이중에 동지돈녕부사는 바로 문의공(文懿公) 구사맹(具思孟)의 사위이니, 공은 인조와 이종형제가 된다. 공은 어려서부터 기백과 도량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우연히 공을 길에서 만나보고는 놀라며 말하기를, “꿈에 어떤 아이가 용을 타고 올라가 해를 받드는 것을 보았는데, 이 아이가 바로 그 아이구나.”라고 하였다. 공이 크게 귀하게 될 징조가 여기에서 나타난 것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외조고 문의공을 따라 용만(龍灣)에 가서 머물렀는데, 당시 공의 나이가 아홉 살밖에 안 되었으나 행동거지는 마치 어른과 같았다. 계축년(癸丑年, 1613, 광해군 5)에 처음으로 벼슬하여 별제가 되었다가 의금부로 옮겼는데, 이때 백사(白沙) 이공[李公 이항복(李恒福)]의 칭찬과 인정을 받았으며, 이후에 네다섯 차례 관직을 옮겼다. 목천 현감(木川縣監)으로 나갔을 때에는 정사를 할 적에 토호(土豪)들에게 휘둘리는 일이 없었다.
이때에 흉악한 무리들이 횡포를 부리는 터에 어떤 자가 과거 급제의 이로움으로 공을 유혹하였는데, 공은 즉시 이를 물리쳤다. 그러자 인조가 농담으로 말하기를, “어찌하여 조금도 굽히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공이 대답하기를, “이 과거에 급제해서 어디에 쓰겠습니까.”라고 하니, 인조가 웃었다.
공은 성상과는 친척인 데다 정의가 친밀하여 처음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지우(知遇)를 입은 것이 특별하고 깊었다. 그러다가 광해군(光海君)이 더욱 횡포를 부리자 공이 왕실을 염려하여 위태로운 나라를 바로잡고 회복시키려는 뜻을 개연하게 품었다.
이에 외종형제 구굉(具宏), 신경진(申景禛) 등 여러 공과 은밀히 모의하고 아우인 진문(振文)도 모의에 함께 참여하여 성상을 철저하게 호위하고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세워 노고를 가장 드러내었다. 광해군이 능창군(綾昌君) 이전(李佺)을 의심하여 죽이자, 인조는 능창군과 동기(同氣)였던 까닭에 아침저녁으로 자신에게 화가 미칠까 염려하였다.
광해군이 또 인조의 저택에 왕이 나올 기운이 서려있다고 의심하자, 인조가 즉시 저택을 바쳐 갈 곳이 없는 형편이 되었다. 이에 공이 마침내 자신의 집을 비워 인조에게 바쳤다. 이때 원종(元宗)이 사저(私邸)에서 별세하자, 광해군이 또 조문객들을 감시하였는데, 공이 밤낮으로 그곳을 지키면서 반드시 염습(殮襲)을 직접 하였다.
그러자 인조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어버이가 살아계신데, 어찌하여 조금도 위험을 피하지 않는가.”라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화복(禍福)은 정해져 있으니, 어찌 피할 필요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계해년(癸亥年, 1623, 인조 1) 3월 13일에 여러 공과 함께 서교(西郊)에서 모이니, 큰 공업이 이미 이루어졌다.
인조가 몸소 서궁(西宮)에 나아가 뜰에 서서 자전의 전지(傳旨)를 기다렸는데, 문이 닫히고 밤이 깊어지자 공이 말하기를, “이렇게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때에 어찌 따라서 들어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공이 따라 들어가자 승지와 사관(史官) 역시 뒤를 따랐다.
이때 인조가 공이 온 것을 보고는 안색이 비로소 편안해졌다. 마침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받들어 복위시키고 대비의 명으로써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인조를 책봉하여 보위(寶位)에 오르게 하니, 맨 먼저 공에게 공조 좌랑을 제수하였다. 공신의 등급을 결정할 때에 성상이 공의 이름이 3등에 나열된 것을 보고는 의아해하여 하교하기를, “홍 아무개의 등급이 어째서 낮은가.”라고 하고 첨지중추부사로 올려준 뒤에 면천 군수(沔川郡守)로 나가게 하였다.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성상이 공주(公州)로 피난하고 한 신하에게 광해군을 압송하여 제주(濟州)로 이배(移配)시키도록 하였는데, 이를 맡은 사람이 병을 핑계대고 가지 않으려고 하였다. 이에 공이 대신 명을 받들고 떠나 태안(泰安)에까지 이르렀는데, 역적이 평정되자 그대로 공에게 명령하여 다시 옛 배소(配所)에 안치시키도록 하였다.
이러한 사이에 복잡한 일들이 많이 생겨나 일을 처리하기가 매우 곤란하였는데, 공은 웃고 이야기하면서 이를 대처하여 마치 아무 일이 없는 듯이 태연해하니, 사람들이 공의 기지(機智)에 탄복하였다. 이윽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남양군에 봉해졌는데 하찮은 죄에 연좌되어 파직당하니, 백성들이 공을 그리워하여 송덕비를 세웠다.
이듬해에 부평 부사(富平府使)가 되었는데, 임기가 다하자 또 백성들의 차구(借寇)의 소원에 따라 유임하였다가 조정에 들어와 부총관이 되었다. 공주 목사(公州牧使)에 제수되고, 역적을 토벌한 공로로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랐다.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으로 있다가 남양 부사(南陽府使)에 제수되어 잘 다스린다는 칭송을 크게 받았는데, 1년 만에 체직되었다.
병자년(丙子年, 1636, 인조 14)에 오랑캐가 변경을 쳐들어왔다는 소식이 당도하여 한창 도성을 버리고 떠나자는 논의가 일던 터에 또 장차 광해군을 교동(喬桐)으로 이배시키려고 하였다. 조정에서는 공을 보내어 이 일을 담당하게 하자는 의견이 있었는데, 성상은 공이 홀로 수고를 감당한다는 이유로 난색을 표하였고 여러 대신들도 모두 말하기를, “이러한 때에 이 사람을 밖으로 내보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이에 결국 명을 다시 바꾸게 되었다.
공은 대가(大駕)를 따라 호위하여 항상 성상의 좌우에 있으면서 자문에 응하여 결단을 도운 것이 많았다. 성상이 오랑캐의 진영에 가서 함께 맹약을 정하였는데, 도성에 돌아온 뒤에 공이 성상에게 아뢰기를, “이후에 반드시 크게 난처한 일이 있을 것입니다. 명나라가 재조(再造)하도록 도와준 은혜는 저들 역시 아는 바이니, 미리 질정해두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만약 들어주지 않는다면, ‘이후에 강한 이웃나라가 의롭지 못한 일을 가지고 협박해 온다면 따라주어야 하겠는가.’라는 말로 다시 설득하면 되니, 이와 같이 비유하고 깨우친다면 저들의 뜻을 움직일 수 있고 우리의 의리 역시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성상이 말하기를, “좋은 생각이다. 묘당(廟堂)에 말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 묘당에서는 한창 청나라와 화친하는 일을 주장하여 명나라의 일을 거론하는 것을 원치 않았으므로 마침내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이에 공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훗날 이 일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나중에 과연 청나라에서 징병하는 일이 있게 되자, 화친을 주장했던 자들이 마침내 공에게 사과하며 말하기를, “공의 말을 따르지 않은 것은 우리들의 잘못이다.”라고 하였다. 아, 고하(高下)가 전도된 때를 만나 황조(皇朝)의 옛 은혜에 대해 조정에서 분명하게 말한 자는 오직 공 한 사람뿐이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침묵을 지켰으니, 저들에 대해 무슨 말을 하겠는가.
공은 훈척(勳戚)으로서, 평소 신경진, 구굉 등의 여러 공들과 가깝게 지내고 또 사론(士論)과 뜻을 달리 하였으므로 사람들 중에는 혹 행적을 트집 잡아 공을 의심하는 자가 있었다. 그러나 묘당에서 아뢴 한마디 말이 늠름하게 의리를 다하였으니, 굳이 수고롭게 변론하지 않고도 공의 마음이 절로 명백해졌다. 이를 통하여 전후 본말에 유감할 만한 점이 없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정축년(丁丑年, 1637, 인조 15)에 말고삐를 잡고 대가를 호위한 공로로 공신록에 기록되어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다. 연달아 내외상을 당하였는데, 전후로 상례를 지키면서 슬픔으로 몸을 훼상함이 예를 지나쳐 기절하였다가 다시 깨어나곤 하였다.
상기를 마친 뒤에 도총관, 전주 부윤(全州府尹), 지돈녕부사에 제수되고 지의금부사를 겸하였다. 주청 부사(奏請副使)로서 사명(使命)을 받들고 국경을 나갈 때에 성상이 서교에서 선온주(宣醞酒)를 내리면서 공의 의복이 해진 것을 불쌍히 여겨 특별히 금단(錦段)을 하사하였으니, 이는 특별한 예우였다.
돌아와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고 국문(鞫問)과 회맹에 참여하여 또 다시 두 품계가 올랐으며,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제수되고 판의금부사를 겸하였는데, 성상의 뜻을 거슬러가며 법을 엄격히 지키니, 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말하였다. 이윽고 판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기축년(己丑年, 1649, 인조 27) 5월에 인조가 승하하였는데, 유명(遺命)을 남겨 공에게 상사(喪事)를 전담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피로가 겹치고 몸이 상하여 병이 날로 심해지다가 섣달그믐에 이르러 집에서 별세하니, 향년 66세였다.
부고가 알려지자 성상이 몹시 애통해하여 내관을 보내어 호상(護喪)하게 하고 특별히 관(棺)을 만들 재목을 하사하니, 남양 청명산(淸明山)의 선영이 있는 곳에 장례하였다. 금상 갑자년(甲子年, 1684, 숙종 10)에 이르러 국전(國典)을 상고하여 ‘몸을 위태롭게 하여 군주를 받듦〔危身奉上〕’과 ‘덕을 펴고 의를 지킴〔布德執義〕’의 두 시법(諡法)을 적용해서 ‘충목(忠穆)’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배위(配位) 증 정경부인(貞敬夫人)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참판 중삼(重三)의 딸이다. 아들은 평시서 영 부(溥)이고, 서자는 현(泫)이다. 부(溥)의 아들은 첨지중추부사 성원(聖元), 달원(達元), 학원(學元)이고, 딸은 윤이희(尹以煕)에게 출가하였으며, 서자 찬원(贊元)은 문과에 급제하여 현령이 되었다.
성원의 아들 숙(璛)은 문과에 급제하여 참판이 되고 남계군(南溪君)에 봉해졌다. 달원의 아들은 탁(琢), 완(琬), 연(璉) 및 무과에 급제한 윤(玧)이다. 학원의 아들은 영(璟), 우(瑀), 식()이다. 숙(璛)의 아들은 진사 인조(麟祚),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을 지낸 봉조(鳳祚), 진사 귀조(龜祚), 문과에 급제하여 관찰사를 지낸 용조(龍祚)이다.
탁(琢)의 아들은 덕조(德祚)이고, 완(琬)의 아들은 영조(永祚), 명조(命祚), 정조(鼎祚)이며, 연(璉)의 아들은 겸조(謙祚), 계조(啓祚)이다. 우(瑀)의 아들은 익조(益祚), 이조(履祚)이다. 인조의 아들은 군수 저(樗)이고, 봉조의 아들은 박(樸), 익(榏)이며, 귀조의 아들은 재(梓)이고, 용조의 아들은 력(櫟), 억(檍)이다.
공은 큰 기국과 도량이 있어서 한번 승낙한 일은 어기지 않았으며, 집에 있을 때에는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였고 조정에서 벼슬할 때에는 충성스럽고 순수한 마음을 지켰다. 또 일을 생각함에 있어서는 지략이 풍부하였으며, 집안을 단속하고 사람들을 다스릴 때에는 안팎으로 엄격하게 하였다.
성상이 공을 의지하고 돌봐주는 것이 특별히 융숭하였으나 꼿꼿하고 강직하여 사람들을 용납하는 일이 적었으므로 벼슬길이 침체되는 일이 많았으니, 애석하다. 오직 공은 청렴을 좋아하여 스스로 사욕을 극복해서 지위가 더욱 높아질수록 더더욱 견고하게 조행을 갈고 닦았으니, 아, 이러한 내용으로 명(銘)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홍씨는 우리나라에 / 洪於我東
두 종파가 있는데 / 厥有二宗
그 중 한 종파는 당성에서 나와 / 一出唐城
여러 차례 공훈을 드러내었네 / 屢著勳庸
공의 선조로 말하면 / 維公之先
실로 금오공이 시조가 되네 / 寔祖金吾
학사공은 꼿꼿하고 강직하여 / 學士亢亢
명예와 절개가 빼어났네 / 名節卓殊
정효공은 태어나서 / 貞孝之生
우리 소경대왕(昭敬大王 선조)의 때를 만났는데 / 際我昭敬
순수한 행실과 깨끗한 지조가 / 純行潔操
후손의 경사를 넉넉히 하였네 / 克裕後慶
윤리가 무너지는 세상에서 / 倫圮之世
어찌 차마 거취를 정할 수 있으랴 / 忍作去就
하늘과 땅을 정돈함에 / 整頓乾坤
품은 혈성이 한 말이나 되었네 / 有血一斗
나쁜 기운을 소탕하여 / 雰翳旣廓
해와 달이 밝아졌으니 / 日月光明
이러한 공로와 이러한 뜻을 / 此功此志
누가 감히 나란히 견주겠는가 / 孰敢比幷
이보다 더욱더 위대한 점이 있으니 / 尤有大焉
임진년의 은혜를 잊지 않은 것이네 / 不忘壬辰
내가 이 일들을 빗돌에 새겨 / 我用篆之
천추에 밝게 보이노라 / 昭示千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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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주01] 어리석은 …… 도륙하니 :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여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유폐시키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인 일을 가리킨다. 영창대군은 선조(宣祖)
와 인목대비의 아들이다. 1613년(광해군 5)에 서양갑(徐羊甲), 박응서(朴應犀) 등 7명의 서출이 역모를 꾸민 죄목으로 체포되어
옥사가 일어났는데, 이들이 영창대군과 영창대군의 외조부 김제남(金悌男)도 역모에 관계되었다고 거짓 진술을 하여 국문 끝에 김
제남은 사사(賜死)되고 영창대군은 강화(江華)에 위리안치되었다.
이때 정항(鄭沆)이 강화 부사가 되었는데, 영창대군을 방에 가두고서 음식물은 넣어주지 않고 계속 불을 때어 기력이 소진한 채로 죽
게 만들었다. 이 옥사를 계기로 조정에서 인목대비를 폐출하라는 논의가 계속 이어져, 결국 1618년에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에 유
폐시키고 후궁의 신분으로 강등시켰다.《光海君日記 5年 6月 1日, 6年 2月 10日, 10年 1月 30日》
[주02] 구사맹(具思孟) :
1531~1604. 자는 경시(景時), 호는 팔곡(八谷), 본관은 능성(綾城)으로, 인조(仁祖)의 어머니인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아버지이
다. 1549년(명종4)에 진사가 되고 1558년에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황해도ㆍ전라도 관찰사, 동부승지, 첨지중추부사, 전라
도 관찰사, 좌승지, 공조ㆍ이조 판서, 좌찬성,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죽은 뒤에 호성(扈聖), 선무(宣武), 정난(靖難) 등의 원종공신에 책록되었으며, 1632년(인조 10)에 사위 정원군(定遠君)이 원종
(元宗)으로, 다섯째 딸이 인헌왕후로 추숭(追崇)됨에 따라 능안부원군(綾安府院君)에 추봉(追封)되었다. 저서로는 《팔곡집(八谷
集)》이 있으며,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주03] 구굉(具宏) :
1577~1642. 자는 인보(仁甫), 호는 군산(群山), 본관은 능성(綾城)이다. 구사맹(具思孟)의 아들로,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오라
비이다. 1608년(선조 41)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장연 현감(長淵縣監) 등을 지냈다.
광해군(光海君)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유폐시키자, 1623년(인조 1)에 이서(李曙), 신경진(申景
禛), 김류(金瑬), 이귀(李貴) 등과 반정(反正)을 성공시켜 정사 공신(靖社功臣) 1등에 책록되고 능성군(綾城君)에 봉해졌다.
이듬해에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仁祖)를 공주(公州)로 호종하였으며,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에는 강화(江華)로,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에는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호종하였다. 형조ㆍ공조ㆍ병조 판서, 오위도총부 도총관, 판의금부사를
비롯하여 어영청, 포도청, 총융청의 직임을 두루 역임하였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주04] 신경진(申景禛) :
1575~1643. 자는 군수(君受),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처음에 음보(蔭補)로 선전관에 등용되었으며,
1623년(인조 1)에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가담하여 정사 공신(靖社功臣) 1등에 책록되고 평성군(平城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에 훈련대장으로 어가를 호위하였고,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수하의 군사를 인솔하여 적의 선봉부
대를 차단하였다. 형조ㆍ병조 판서 등을 지내고 1637년에 우의정에 올랐으며, 1642년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인조반정을 처음부터 계획, 주도하여 인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으며, 청나라와 외교적 교섭에 능하여 청나라의 과도한 징색(徵
索)과 잦은 내정간섭을 철회하게 하였다. 송시열(宋時烈) 등의 사림을 천거하였고, 무인이면서도 김류, 이귀, 최명길(崔鳴吉) 등의
문인들과도 널리 교유하였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주05] 진문(振文) :
홍진문(洪振文, 1599~1653)으로, 자는 질보(質甫),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인조(仁祖)와 이종사촌 형제로서 형 홍진도(洪振
道), 외삼촌 구굉(具宏), 신경진(申景禛) 등과 모의하여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에 적극 가담하였다.
이 공으로 정사 공신(靖社功臣) 3등에 책록되고 남창군(南昌君)에 봉해졌다. 종부시 주부,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부총관, 광주
부윤(廣州府尹)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주06] 광해군이 …… 죽이자 :
능창군(綾昌君) 이전(李佺)은 인조(仁祖)의 동생으로, 어려서부터 재지(才智)가 뛰어나고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여 기상이 비범
하다는 말을 들었다. 1615년(광해군 7)에 왕이 되려한다는 소명국(蘇鳴國)의 무고로 인하여 교동(喬桐)에 위리안치 되었는데, 감
시하던 자가 밥에 모래를 섞고 찬 돌방에서 자게 하는 등 갖은 핍박을 가하자 이에 못 이겨 목을 매어 자진하였다.《光海君日記 7年
11月 7日》
[주07] 원종(元宗) :
1580~1619. 인조(仁祖)의 부친이자, 선조(宣祖)의 다섯째 아들로, 이름은 이부(李琈)이다. 구사맹(具思孟)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
여 인조와 능원대군(綾原大君), 능창대군(綾昌大君)을 낳았다.
1587년(선조 20) 정원군(定遠君)에 봉해지고, 임진왜란(壬辰倭亂) 중에 왕을 호종한 공로로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었
다. 인조반정을 계기로 대원군에 추존되었다가, 다시 많은 논란 끝에 1627년(인조5) 원종으로 추존되었다. 능은 김포(金浦)의 장릉
(章陵)이다.
[주08] 서궁(西宮) :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여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유폐시키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인 일을 가리킨다. 영창대군은 선조(宣祖)
와 인목대비의 아들이다. 1613년(광해군 5)에 서양갑(徐羊甲), 박응서(朴應犀) 등 7명의 서출이 역모를 꾸민 죄목으로 체포되어
옥사가 일어났는데, 이들이 영창대군과 영창대군의 외조부 김제남(金悌男)도 역모에 관계되었다고 거짓 진술을 하여 국문 끝에 김
제남은 사사(賜死)되고 영창대군은 강화(江華)에 위리안치되었다.
이때 정항(鄭沆)이 강화 부사가 되었는데, 영창대군을 방에 가두고서 음식물은 넣어주지 않고 계속 불을 때어 기력이 소진한 채로 죽
게 만들었다. 이 옥사를 계기로 조정에서 인목대비를 폐출하라는 논의가 계속 이어져, 결국 1618년에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에 유
폐시키고 후궁의 신분으로 강등시켰다.《光海君日記 5年 6月 1日, 6年 2月 10日, 10年 1月 30日》
[주09]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
이괄은 인조반정(仁祖反正) 때의 공신으로, 1624년(인조 2)에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서 기익헌(奇益獻), 한명련(韓明璉)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정부의 토벌군과 여러 곳에서 일대 격전을 벌이고 도성을 점령하였다. 이 일로 인조는 공주(公州)로 피난하였고, 이괄
은 흥안군(興安君) 이제(李瑅)를 추대하였다. 그러나 장만(張晩)의 반격으로 반란군은 격파당하고 이괄은 부하의 손에 죽었다.
[주10] 차구(借寇)의 소원 :
백성들이 선정을 베푼 지방관을 떠나지 못하게 만류하여 유임하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것이다.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 때에
구순(寇恂)이 영천 태수(潁川太守)를 지낸 적이 있었는데, 도적을 토벌하기 위해 광무제를 따라 출정하여 영천에 당도하자,
그곳 백성들이 광무제의 앞을 가로막고 말하기를 “폐하께서 다시 구군을 1년간 빌려주시기를 원합니다.〔願從陛下復借寇君一
年.〕”라고 하소연하여 광무제가 구순을 그곳에 머물도록 한 일이 있다.《後漢書 卷16 寇恂列傳》
[주11] 역적을 …… 올랐다 :
1628년(인조 6) 9월에 인조(仁祖)가 유효립(柳孝立)의 옥사를 다스렸던 영사 공신(寧社功臣)과 이인거(李仁居)의 난을 토벌하였
던 소무 공신(昭武功臣) 및 옛 공신들의 적장자들을 모이게 하여 북악(北嶽) 아래에서 회맹제(會盟祭)를 올렸는데, 며칠 뒤에 정사
(政事)를 행하면서 회맹제에 참석한 공신들의 품계를 올려주었다. 홍진도(洪振道) 역시 회맹제에 참석하여 가의대부(嘉義大夫)에
가자되었다.《仁祖實錄 6年 9月 13日, 26日》
[주12] 명나라가 …… 은혜 :
재조(再造)란 거의 멸망하게 된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명나라 신종(神宗)이 원군(援軍)을 보
내어 도와준 일을 말한다.
[주13] 주청 부사(奏請副使)로서 …… 때 :
1645년(인조 23)에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상(喪)에 조문 온 것을 사례하고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새로 세자로 책봉한 것을 주청
하기 위하여 청나라에 주청사(奏請使)를 보냈는데, 이때에 김자점(金自點)이 상사(上使)가 되고 홍진도(洪振道)가 부사(副使)가
되었다.《仁祖實錄 23年 8月 20日》
ⓒ 성신여자대학교 고전연구소ㆍ해동경사연구소 | 이정은 사경화 류재성 김창효 (공역)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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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判中樞府事, 洪振道, 神道碑銘。
在昔穆陵之季, 昏君嗣位, 幽廢母后, 屠戮王子, 彝倫墜地, 國脈將絶。 維時我仁祖大王倡率四方忠義之士, 起而大正之, 指顧之間, 天地昭明, 協氣流行。 斯雖由於聖人之作興, 而苟無賢俊應運, 齊效力能, 曷以見大業之亟就若是哉? 於是紀之旂常, 列爵維三, 其一曰奮忠贊謨靖社功臣、崇祿大夫、判中樞府事、兼判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南陽君、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南陽府院君洪公諱振道, 字子由, 系出京畿之南陽府。
有諱先幸, 始仕麗, 爲金吾衛尉。 九傳而子儆官參判。 曰副提學泂、經歷彦光、吏曹判書貞孝公曇、贈判書宗福、同知敦寧憙, 連世有人。 敦寧寔爲具文懿公思孟女壻, 公於仁廟爲從母兄弟。
公幼已有氣度, 人遇諸塗驚曰: “夢見兒乘龍捧日, 此眞是也。” 大貴其徵此乎。 壬辰之亂, 隨文懿往留龍灣, 時年九歲, 動止如成人。 癸丑, 筮仕別提, 轉金吾, 被白沙李公賞識, 遷四、五官, 出宰木川縣, 爲政不撓豪右。 時凶徒鴟張, 有啖以科利者, 立却之。 仁廟戲曰: “何不少屈?” 對曰: “得此科, 何用” 仁廟笑之。
公於上屬親而情密, 初潛受知忒深。 及光海益悖, 公係念王室, 慨然有匡復之志, 與中表具宏、申景禛諸公密謀, 弟振文亦預其議, 衛護周防, 算無遺策, 勞勩最著。 光海以疑殺綾昌君佺, 仁廟以同氣朝夕方虞其及。 又疑第宅有王氣, 仁廟卽納其宅, 無可往, 公乃空其家以獻。 會元宗薨于私邸, 光海又伺察弔客, 公晝夜相守, 斂襲必親。 仁廟泣謂: “親在, 盍少避” 公曰: “禍福有定, 安用避?”
癸亥三月十三日, 與諸公會西郊, 大勳旣集, 仁廟躬詣西宮, 庭立候慈旨, 門扃夜深。 公曰: “當此危疑之時, 何可不隨入” 公旣入, 承旨史官亦隨。 時仁廟見公至, 色乃安, 遂奉仁穆大妃復位, 以命廢光海, 策仁祖登寶位, 首拜公工曹佐郞。 及第功也, 上見公名列三等, 訝之敎曰: “洪某等何卑也” 陞僉樞, 出沔川郡守。
适造叛, 上幸公山, 命一臣押光海移配濟州, 其人托疾, 公替受命, 行至泰安, 賊平, 仍令公還置舊配。 間多棼錯, 事有至難, 而談笑處之, 夷然若無事, 人服其機智。 已陞嘉善, 封南陽君, 微文坐罷, 民追思立碑。 次年, 爲富平府使。 秩滿, 又循借寇願, 入爲副摠管。 拜公州牧使, 用鋤莠勞, 陞嘉義。 由右尹, 拜南陽府使, 大有治譽, 周年而遞。
丙子, 邊遽至, 方議去邠, 又將移光海喬桐。 朝議欲送公, 上以獨賢難之。 諸大臣皆言“此時此人不可出外”, 遂改命。 公則隨駕, 常在上左右, 多所咨決。 上幸虜營, 與定要約, 旣還都, 公白上曰: “此後必有大難處之事。 皇明再造之恩, 彼亦知之, 不可不預有質定。 若或不聽, 更諭以‘後有强隣, 脅以不義, 其將從之耶’, 如是譬曉, 其意可動, 而我義亦伸矣。” 上曰: “善。 其言之廟堂。” 時廟堂方主和事, 不欲擧皇明, 遂不應。 公歎曰: “後其悔是哉!” 及有徵兵事, 主和者乃謝公曰: “不用公言, 吾輩過也。” 噫! 當冠屨倒置之日, 以皇朝舊恩明言於朝廷者, 惟公一人而已, 餘皆噤默。 彼哉何足道也。
公勳戚也, 素與申、具諸公親好, 又與士論異趣, 故人或有執跡疑公者。 而廟堂一言甄義凜然, 不勞辨理, 公心自白。 斯可見本末之無可憾矣。
丁丑, 以執靮錄勩, 陞資憲。 連丁內外憂, 前後持制, 哀毁踰禮, 絶而復蘇。 制訖, 拜都摠管、全州府尹、知敦寧、兼知義禁。 以奏請副使奉命出疆, 上宣醞西郊, 軫其衣敝, 特賜錦段, 異數也。 還陞正憲, 參鞠會盟, 又進二階, 拜判尹、兼判義禁, 守三尺忤上意,
人以爲難, 已拜判中樞。
己丑五月, 仁廟升遐, 遺命專任喪事, 備經勞傷, 病日甚, 至臘月晦, 卒于家, 享年六十六。 訃聞, 震悼, 遣中人護喪, 別賜棺木, 葬南陽淸明山先塋。 至今上甲子, 稽國典, 用“危身奉上”、“布德執義”二法, 諡曰忠穆。
配贈貞敬夫人坡平尹氏, 參判重三女。 男溥, 平市令。 庶男泫。 溥男聖元, 僉知; 達元; 學元。 女適尹以熙。 庶男贊元, 文科, 縣令。 聖元男璛, 文科, 參判、南溪君。 達元男瑑; 琬; 璉; 玧, 武科。 學元男璟、瑀、
。 璛男麟祚, 進士; 鳳祚, 文科, 大司諫; 龜祚, 進士; 龍祚, 文科, 觀察使。 瑑男德祚。 琬男永祚、命祚、鼎祚。 璉男謙祚、
啓祚。 瑀男益祚、履祚。 麟祚男樗, 郡守。 鳳祚男樸、榏。 龜祚男梓。 龍祚男櫟、檍。
公宏偉有局度, 不侵爲然諾, 居家敦孝悌, 立朝秉忠純, 慮事饒籌略, 刑家御衆, 內外斬斬。 上倚毗特盛, 由骯髒少可, 進塗多躓, 惜也。 惟其好廉自克, 位益高而礪操冞堅。 嗚呼! 是可銘也已。 銘曰:
洪於我東, 厥有二宗。 一出唐城, 婁著勳庸。 維公之先, 寔祖金吾。 學士亢亢, 名節卓殊。 貞孝之生, 際我昭敬。 純行潔操, 克裕後慶。 倫圮之世, 忍作去就。 整頓乾坤, 有血一斗。 雰翳旣廓, 日月光明。 此功此志, 孰敢比幷 尤有大焉, 不忘壬辰。 我用篆之, 昭示千春。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