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재난고발(益齋亂稿跋) - 이인엽(李寅燁)
옛날 만력(萬曆) 경자년(庚子年: 1600년)에 왕고(王考: 祖父) 벽오공(碧梧公: 李時發)께서 계림(雞林: 慶州)을 다스릴 때에 원조(遠祖)이신 익재선생(益齋先生)의 문고(文稿) 약간과《패설(稗說)》.《효행록(孝行錄)》등의 책을 간행하였는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미 백년이 되었다.
간본(刊本)은 이지러지고 남아 있는 것이 없고, 다른 사람의 집 상자에 소장되어 있는 것 또한 극히 드물고 거의 숨겨지고 소멸되었다. 불초한 내가 일찍이 이것에 대해서 개연(慨然)하여 그것이 오랫동안 전해질 수 있도록 생각하였다.
정축년 겨울에 황해도 관찰사로 근무하면서 녹봉(祿俸)에서 일부를 덜어서 각수(刻手)들에게 주었는데, 한달 남짓 지나서 그 일이 완성되었음을 알렸다. 지난날의 숨겨지고 소멸되었던 것이 이로부터 장차 다시 드러나게 될 것이다.
아! 선생의 도덕과 문장은 진동하여 빛나고 성대하게 빛난다. 지금까지 우리 동방에서 종앙(宗仰)하는 것은 선생의 불후(不朽)한 것이지 어찌 이 문집의 세상(世上)에 알려지는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과 관계되어 있겠는가?
비록 그렇다고 하나 몇 백년 뒤에 소리와 빛이 더욱 묘연해지고, 후인들이 여운을 거슬러 올라가서 깊이 사모하는 것을 깃들이고자 한다면 유독 그 책만 있는데, 또 어찌 전함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불초한 내가 벽오공의 뜻을 이어서 갑자기 중간을 도모하는 까닭이다.
권말에 선조(先祖)이신 재사당(再思堂)《행록(行錄)》、《금강록(金剛錄)》 및 시부 약간 수를 붙인다. 참화를 당한 나머지 산일된 것이 거의 다하여 유통되는 것은 오직 이 몇 편 뿐이다. 남전(藍田)의 옥 한 조각과 계림(桂林)의 한 가지도 모두 세상에 드문 보배이니, 즉 그 보배가 또 하필 많을 필요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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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益齋亂稿跋 - 李寅燁
昔在萬曆庚子, 王考碧梧公尹雞林也, 刊行遠祖益齋先生文稿若稗說孝行錄等書, 而迄今已百年矣。 板本刓弊無存者, 人家之藏乎篋笥者, 亦絶無而廑有, 幾乎沈晦而湮沒。 不肖嘗慨然於此, 思欲以壽其傳者久矣。 丁丑冬, 按節于海甸, 捐俸入之羨, 付之剞劂氏, 月餘日而功告訖。 向之沈晦者, 自此將復顯矣。 噫! 先生之道德文章, 震耀赫舃。 至今爲我東所宗仰則先生之不朽, 豈係於斯集之顯晦也? 雖然, 累百載之後, 聲光益渺然, 後人之遡餘韻而寓深慕者, 獨其書在爾, 又曷可無傳也哉? 此不肖所以繼碧梧公之志, 而亟謀重梓者也。 卷末付先祖再思堂《行錄》,《金剛錄》若詩賦若干首。 慘禍之餘, 散逸殆盡, 所流傳者唯此數篇而已。 藍田片玉, 桂林一枝, 俱可爲希世之珍。 則其所寶玩者, 又何必在多也! 崇禎紀元後戊寅秋七月旣望, 後孫黃海道觀察使寅燁謹識。 <끝>
益齋亂稿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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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인소개]
위의 <익재난고발(益齋亂稿跋)>은 회와(晦窩) 이인엽[李寅燁, 1656년(효종 7)~1710년(숙종 36) / 향년 54세]선생이 지은 것이다. 저자의 자는 계장(季章), 호는 회와(晦窩)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저자는 고려 후기의 문신·성리학자인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1287년-1367년)의 13세손이다.
공은 진사(進仕) 이대건(李大建)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벽오 이시발(李時發)이다. 아버지는 좌의정 화곡 이경억(李慶億)이며, 어머니는 윤원지(尹元之)의 딸이다. 1684년(숙종 10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2년 뒤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벼슬이 행이조판서·홍문관대제학에 이르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