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집이 가난해서 말이 없으므로 혹 빌려서 타는데, 여위고 둔하여 걸음이 느린 말이면 비록 급한 일이 있어도 채찍질을 가하지 못하고 조심조심하여 곧 넘어질 것같이 여기다가, 개울이나 구렁을 만나면 내려서 걸어가므로 후회하였으나, 발이 높고 귀가 날카로운 준마로서 잘 달리는 말에 올라타면 의기양양하게 마음대로 채찍질하여 고삐를 놓으면 언덕과 골짜기가 평지처럼 보이니 심히 장쾌하였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위태로워서 떨어지는 근심을 면치 못하였다.
아! 사람의 마음이 옮겨지고 바뀌는 것이 이와 같을까? 남의 물건을 빌려서 하루 아침 소용에 대비하는 것도 이와 같거든, 하물며 참으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랴.
그러나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어느 것이나 빌리지 아니한 것이 없다. 임금은 백성으로부터 힘을 빌려서 높고 부귀한 자리를 가졌고, 신하는 임금으로부터 권세를 빌려 은총과 귀함을 누리며, 아들은 아비로부터, 지어미는 지아비로부터, 비복(婢僕)은 상전으로부터 힘과 권세를 빌려서 가지고 있다.
그 빌린 바가 또한 깊고 많아서 대개는 자기 소유로 하고 끝내 반성할 줄 모르고 있으니, 어찌 미혹(迷惑)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다가도 혹 잠깐 사이에 그 빌린 것이 도로 돌아가게 되면, 만방(萬邦)의 임금도 외톨이가 되고, 백승(百乘)을 가졌던 집도 외로운 신하가 되니, 하물며 그보다 더 미약한 자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맹자가 일컫기를 "남의 것을 오랫동안 빌려 쓰고 있으면서 돌려 주지 아니하면, 어찌 그것이 자기의 소유가 아닌 줄 알겠는가?" 하였다.
행랑채가 퇴락하여 지탱할 수 없게끔 된 것이 세 칸이었다. 나는 마지 못하여 이를 수리하였다. 그런데 그 중의 두 칸은 앞서 장마에 비가 샌지 오래 되었으나, 나는 그것을 알면서도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다가 손을 대지 못했던 것이고, 나머지 한 칸은 비를 한 번 맞고 샜던 것이라 서둘러 기와를 갈았던 것이다. 이번에 수리하려고 본즉 비가 샌 지 오래 된 것은 그 서까래, 추녀, 기둥, 들보가 모두 썩어서 못 쓰게 되었던 까닭으로 수리비가 엄청나게 들었고, 한 번밖에 비를 맞지 않았던 한 칸의 재목들은 완전하여 다 쓸 수 있었던 까닭으로 그 비용이 많지 않았다.
나는 이에 느낀 것이 있었다. 사람의 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잘못을 알고서도 바로 고치지 않으면 곧 그 자신이 나쁘게 되는 것이 마치 나무가 썩어서 못 쓰게 되는 것과 같으며, 잘못을 알고 고치기를 꺼리지 않으면 해(害)를 받지 않고 다시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으니, 저 집의 재목처럼 말끔하게 다시 쓸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라의 정치도 이와 같다. 백성을 좀먹는 무리들을 내버려 두었다가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고 나라가 위태롭게 된다. 그런 연후에 급히 바로잡으려 하면 이미 썩어버린 재목처럼 때는 늦은 것이다. 어찌 삼가지 않겠는가.
< 해 설 >
작은 잘못이라도 그것을 알고 미리 고치지 않으면 더 큰 문제를 만들게 되고, 그것으로 인하여 크게 낭패를 볼 수 있다는 교훈이 드러나 있다. -잘못을 미리 알고 고쳐 나가야 함
어떤 거사가 거울 하나를 갖고 있었는데 먼지가 끼어서 흐릿한 것이 마치 구름에 가리운 달빛 같았다. 그러나 그 거사는 아침 저녁으로 거울을 들여다보며 얼굴을 가다듬곤 하였다. 한 나그네가 거사를 보고 이렇게 물어다.
"거울이란 얼굴을 비추어 보는 물건이든지, 아니면 군자가 거울을 보고 그 맑은 것을 취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금 거사의 거울은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리고 때가 묻어 있습니다. 그럼 에도 당신은 항상 그 거울에 얼굴을 비춰 보고 있으니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거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얼굴이 잘 생기고 예쁜 사람은 맑고 아른아른하는 거울을 좋아하지만, 얼굴이 못생겨서 추한 사람은 오히려 맑은 거울을 싫어할 것입니다. 그러나 잘 생긴 사람은 적고 못생긴 사람은 많 기 때문에 만일 맑은 거울 속에 비친 추한 얼굴을 보기 싫어할 것인즉 흐려진 그대로 두는 것 이 나을 것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깨쳐 버릴 바에야 먼지에 흐려진 그대로 두는 것이 나을 것 입니다. 먼지로 흐리게 된 것은 겉뿐이지 거울의 맑은 바탕은 속에 그냥 남아 있는 것입니다. 만약 잘 생기고 예쁜 사람을 만난 뒤에 닦고 갈아도 늦지 않습니다. 아! 옛날에 거울을 보는 사람들은 그 맑은 것을 취하기 위함이었지만, 내가 거울을 보는 것은 오히려 흐린 것을 취하 는 것인데, 그대는 이를 어찌 이상스럽게 생각합니까?"하니 나그네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 해 설 >
이 작품은 일차적으로 處世訓적 의식을 드러내고 있으며 이에 부수하여 현실에 대한 풍자적 의미까지도 내포하고 있다. 처세훈적 의미로 파악해 보면 거울의 본성은 깨끗하고 맑은 것이나 먼지가 끼면 흐려진다는 현상적 원리를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거울의 본성이 그러하듯이 인간에 있어서도 본성 자체가 흐린 사람이 있겠는가 하는 통찰을 전제로 하고 있다. 따라서 거사가 흐린 거울을 택한다는 것은 세상에는 오히려 흠과 티끌이 있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이 상례인데 지나치게 결벽하고 청명한 태도만으로 일관하기 어려움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즉 박절하지 않은 인간 관계와 허물까지도 수용하는 처세의 필요함을 드러내고 있다고 하겠다. 이는 또 이규보가 살던 시대가 내우외환으로 어렵던 시대임에 비추어 볼 때 흠과 티끌을 탓하여 서로가 서로를 용납하지 못해서는 살아가는 지혜에 이를 수 없음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이규보가 자기 자신의 글 쓰는 행위에 대한 태도를 드러낸 것으로, 흐린 세태에 결벽의 정신으로 대결하면 파국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현실주의적 태도를 풍자적 시각으로 드러낸 것이라는 해석을 할 수도 있다.
1. 조선 세종.성종 연간의 문신 강희맹(姜希孟)이 아들을 훈계하기 위해 다섯 가지의 이야기를 들 어 지은 설(說)
2. 내용 개요 : ①도자(盜子 ; 도둑의 아들), ②담사(膽巳 ; 뱀을 잡아먹음), ③등산(登山 ; 높은 산 에 오름), ④삼치(三稚 ; 꿩을 잡는 이야기), ⑤요통(曜通 ; 오줌통)의 이야기를 통해 우의적(寓意 的)으로 훈계하고 있다.
3. 그 중 '삼치설(三稚說)'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인(虞人 ; 산림 관리인)이 꿩을 잡는데, 한 번 덮쳐서 잡히는 것과 두 번 덮쳐서 잡히는 것이 있다. 대저 사람이 높이 친구와 어울리어 정(情)에 경솔하여 색(色)에 빠지고 남의 말을 듣지 않 게 되면 엄한 아버지도 가르칠 수 없고, 착한 친구도 충고할 수 없다. 스스로 화(禍)의 그물에 걸리고서도 죽을 때까지 깨닫지 못하는 것은, 그야말로 '한 번 덮쳐서 잡히지 않으면 두 번 덮쳐 서 잡히는 따위가 아니고 무엇이냐?'고 하였다.
물과 육지에 나는 꽃 가운데 사랑할 만한 것이 매우 많다. 진(晋)나라의 도연명(陶淵明)은 유독 국화를 사랑했고, 이(李)씨의 당(唐)나라 이래로 세상 사람들이 매우 모란을 좋아했다. 나는 유독, 진흙에서 나왔으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맑고 출렁이는 물에 씻겼으나 요염하지 않고, 속은 비었고 밖은 곧으며, 덩굴은 뻗지 않고 가지를 치지 아니하며,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고, 꼿꼿하고 깨끗이 서 있어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으나 함부로 가지고 놀 수 없는 연꽃을 사랑한다.
내가 말하건대, 국화는 꽃 중에 속세를 피해 사는 자요, 모란은 꽃 중에 부귀한 자요, 연꽃은 꽃 중에 군자다운 자라고 할 수 있다. 아! 국화를 사랑하는 이는 도연명 이후로 들어본 일이 드물고, 연꽃을 사랑하는 이는 나와 함께 할 자가 몇 사람인가? 모란을 사랑하는 이는 마땅히 많을 것이다.
중국 당나라 때, 남악 형산 연화봉에 서역으로부터 불교를 전하러 온 육관대사가 법당을 짓고 불법을 베풀었는데, 동정호의 용왕도 참석한다. 육관대사는 제자 성진(性眞)을 보내 용왕에게 사례하도록 했는데, 용왕의 술 대접을 받고 돌아오던 성진은 팔 선녀 위부인의 팔 선녀와 석교에서 만나 서로 희롱한다. 선방(禪房)에 돌아온 성진은 형산 선녀의 미모에 도취되어 불문(佛門)의 적막함에 회의를 느끼고 속세의 부귀 영화를 원하다가, 팔 선녀와 함께 인간 세상으로 추방된다.
회남 수주현 양 처사의 아들로 태어난 성진〔양소유(楊小遊)은 15세에 과거를 보러 가던 중 어사의 딸 '진채봉'을 만나 혼약하고, 난을 피해 있다가 과거를 보러 올라가던 중 낙양의 기생'계섬월'과 인연을 맺고, 경사에 이르러 거문고를 타는 여자로 가장하여 정 사도의 딸'정경패'를 만난다. 과거에 급제한 양소유는 정경패의 시비인 '가춘운'과도 인연을 맺는다.
하북의 왕이 역모하려 하니 양소유는 절도사로 나가 이를 다스리고 돌아오는 길에 계섬월인 줄 알고 만난 여자가 하북의 명기'적경홍'이었다. 상경하여 예부 상서가 된 양소유는 황제의 누이인 '난양 공주'의 퉁소 소리에 화답한 인연으로 부마로 간택이 되는데, 양소유는 정경패와의 혼약을 이유로 이를 물리치다가 옥에 갇힌다.
토번왕이 쳐들어오자 대원수가 되어 출진한 양소유는, 토번왕이 보낸 여자 자객'심요연'과 인연을 맺고, 백룡담에서는 용왕의 딸인 '백능파'를 도와 주어 인연을 맺는다. 그 동안에 난양 공주는 양소유와의 혼약을 이루지 못하여 실심한 정경패를 만나 보고, 그 인물에 감복하여 그녀를 제 1공주인 '영양 공주'로 삼는다.
토번왕을 물리치고 돌아온 양소유는 위국공의 벼슬에 오르고, 영양 공주, 난양 공주 2처와 진채봉, 계섬월, 가춘운, 적경홍, 심요연, 백능파의 6첩을 거느리게 된다. 작품의 제목에 나오는 '아홉'이라는 숫자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을 상징한다.
양승상등고망원(楊丞相登高望遠) 진상인반본환원(眞上人返本還元)
승상이 성은을 감격하여 고두사은하고 거가하여 취미궁으로 옮아가니, 이 집이 종남산 가운데 있으되, 누대의 장려함과 경개의 기절함이 완연히 봉래 선경이니, 왕 학사의 시에 가로되, "신선의 집이 별로 이에서 낫지 못할 것이니, 무슨 일 통소를 불고 푸른 하늘로 향하리요?" 하니, 이 한 글귀로 가히 경개를 알리러라.
승상이 정전을 비위 조서와 어제 시문을 봉안하고 그 남은 누각대사에는 제 낭자가 나눠 들고, 날마다 승상을 모셔 물을 임하며 매화를 찾고 시를 지어 구름끼인 바위에 쓰며 거문고를 타 솔바람을 화답하니, 청한한 복이 더욱 사람을 부뤄할 배러라.
승상이 한가한 곳에 나아간 지 또한 여러 해 지났더니, 팔월 염간은 승상 생일이라. 모든 자녀 다 모다 십 일을 연하여 설연하니 번화성만함이 예도 듣지 못할러라. 잔치를 파하고 제자가 각각 흩어진 후 문득 구추가절이 다다르니, 국화 봉오리 누르고 수유 열매가 붉었느니 정히 등고할 때라. 취미궁 서녘에 높은 대 있으니, 그 위에 오르면 팔백 리 진천(秦川)을 손바닥 금 보듯이 하여 가린 것이 없으니, 승상이 가장 사랑하는 땅이러라.
이 날, 양 부인과 육 낭자를 데리고 대에 올라 머리에 국화를 꽂고 추경을 희롱할 새 입에 팔진이 염오하고 귀에 관현이 슬민지라. 다만 춘운으로 하여금 과합을 붙들고 섬월로 옥호를 이끌며 국화주를 가득 부어 처첩이 차례로 헌수하더니, 이윽고 비낀 날이 곤명지에 돌아지고 구름 그림자 진천에 떨어지니, 눈을 들어 한 번 보니 가을빛이 창망하더라. 승상이 스스로 옥소를 잡아 두어 소리를 부니 오오열열하여 원하는 듯하고, 우는 듯하고, 고할 듯하고, 형경이 역수를 건널 적 점리를 이별하는 듯, 패왕(覇王)이 장중에 우희를 돌아보는 듯하니, 모든 미인이 처연하여 슬픈 빛이 많더라. 양 부인이 옷깃을 여미고 물어 가로되,
"승상이 공을 이미 이루고 부귀 극하여 만인이 부뤄하고 천고에 듣지 못한 배라. 가신을 당하여 풍경을 희롱하며 꽃다운 술은 잔에 가득하여,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으니 이 또한 인생의 즐거운 일이어늘, 퉁소 소리 이러하니 오늘 퉁소는 옛날 퉁소가 아니로소이다."
승상이 옥소를 던지고 부인 낭자를 불러 난단을 의지하고 손을 들어 두루 가리키며 가로되,
"북으로 바로보니 평한 들과 무너진 언덕에 석양이 쇠한 풀에 비치었는 곳은 진 시황의 아방궁이요, 서로 바라보니 슬픈 바람이 찬 수풀에 불고 저문 구름이 빈 뫼에 덮은 데는 한 무제의 무릉이요, 동으로 바라보니 분칠한 성이 청산을 둘렀고 붉은 박공이 반공에 숨었는데, 명월은 오락가락하되 옥난간을 의지할 사람이 없으니, 이는 현종 황제가 태진비로 더불어 노시던 화청궁이라. 이 세 임금은 천고 영웅이라. 해로 집을 사고 억조로 신첩을 삼아 호화 부귀 백년을 짧게 여기더니 이제 다 어디있나뇨?
소유는 본디 하남 땅 베옷 입은 선비라. 성천자 은혜를 입어 벼슬이 장상에 이르고, 제 낭자 서로 좇아 은정이 백 년이 하루 같으니, 만일 전생 숙연으로 모두 인연이 진하면 각각 돌아감은 천지에 떳떳한 일이라. 우리 백 년 후 높은 대 무너지고, 굽은 못이 이미 메이고, 가무하던 땅이 이미 변하여 거친 뫼와 쇠한 풀이 되었는데, 초부와 목동이 오르내리며 탄식하여 가로되, '이것이 양 승상의 제 낭자로 더불어 놀던 곳이라. 승상의 부귀 풍류와 제 낭자의 옥용 화태 이제 어디 갔나뇨.' 하리니 어이 인생이 덧없지 아니리요?
내 생각하니 천하에 유도와 선도와 불도가 유에 높으니 이 이론 삼교라. 유도는 생전 사업과 신후 유명할 뿐이요, 신선은 예부터 구하여 얻은 자가 드무니 진 시황, 한무제, 현종제를 볼 것이라. 내 치사한 후로부터 밤에 잠 곧 들면 매양 포단 위에서 참선하여 뵈니 이 필연 불가로 더불어 인연이 있는지라. 내 장차 장자방의 적송자 좇음을 효칙하여 집을 버리고 스승을 구하여 남해를 건너 관음을 찾고, 오대에 올라 문수께 예를 하여 불생 불명할 도를 얻어 진세 고락을 뛰어나려 하되, 제낭자로 더불어 반생을 좇았다가 일조에 이별하려 하니 슬픈 마음이 자연 곡조에 나타남이로소이다."
제 낭자는 다 전생에 근본이 있는 사람이라. 또한 세속 인연이 지낼 때니 이 말을 듣고 자연 감동하여 이르되,
"부귀 번화 중 이렇듯 청정한 마음을 내시니 장자방을 어이 족히 이르리요? 첩 등자매 팔 인이 당당히 심규중에서 분향 예불하여 상공 돌아오시기를 기다릴 것이니, 상공이 이번 행하시매 벅벅이 밝은 스승과 어진 벗을 만나 큰 도를 얻으리니 득도한 후에 부디 첩 등을 먼저 제도하소서."
승상이 대희 왈,
"우리 구인이 뜻이 같으니 쾌사라. 내 명일로 당당히 행할 것이니 금일 제 낭자로 더불어 진취하리라."
하더라. 제 낭자 왈,
"첩 등이 각각이 일배를 받들어 상공을 전송하리이다."
잔을 씻어 다시 부으려 하더니 홀연 석양에 막대 던지는 소리가 나거늘, 고이히 여겨 생각하되 어떤 사람이 올라오는고 하더니, 한 호승이 눈썹이 길고 눈이 맑고 얼굴이 고이하더라. 엄연히 좌상에 이르러 승상을 보고 예하여 왈,
"산야 사람이 대승상께 뵈나이다."
승상이 이인인 줄 알고 황망히 답례 왈,
"사부는 어디로서 오신고?"
호승이 소왈,
"평생 고인을 몰라 보시니 귀인이 잊음 헐탄 말이 옳도소이다."
승상이 다시 보니 과연 낯이 익은 듯하거늘, 홀연 깨쳐 능파 낭자를 돌아보며 왈,
"소유, 전일 토번을 정벌할 제 꿈에 동정 용궁에 가 잔치하고 돌아올 길에 남악에가 노니, 한 화상이 법좌에 앉아서 경을 강론하더니 노부가 노화상이냐?"
"옳다, 옳다. 비록 옳으나 몽중에 잠깐 만나 본 일은 생각하고 십 년을 동처하던 일을 알지 못하니 뉘 양 장원을 총명타 하더뇨?"
승상이 망연하여 가로되,
"소유, 십오륙 세 전은 부모 좌하를 떠나지 아녔고, 십육에 급제하여 연하여 직명이 있으니, 동으로 연국에 봉사하고 서로 토번을 정벌한 밖은 일찍 경사를 떠나지 아녔으니, 언제 사부로 더불어 십 년을 상종하였으리요?"
호승이 소왈,
"상공이 오히려 춘몽을 깨지 못하였도소이다."
승상 왈,
"사부, 어찌면 소유로 하여금 춘몽을 깨게 하리요?"
호승 왈,
"이는 어렵지 아니하니이다."
하고, 손 가운데 석장을 들어 석난간을 두어 번 두드리니, 홀연 네 녘 뫼골에서 구름이 일어나 대상에 끼이어 지척을 분변치 못하니, 승상이 정신이 아득하여 마치 취몽중에 있는 듯하더니 오래게야 소리질러 가로되,
"사부가 어이 정도로 소유를 인도치 아니하고 환술로 서로 희롱하나뇨?"
말을 맟지 못하면서 구름이 걷히니 호승이 간 곳이 없고,좌우를 돌아보니 팔 낭자가 또한 간 곳이 없는 지라 정히 경황하여 하더니, 그런 높은 대와 많은 집이 일시에 없어지고 제 몸이 한 작은 암자 중의 한 포단 위에 앉았으되, 향로에 불이 이미 사라지고, 지는 달이 창에 이미 비치었더라.
스스로 제 몸을 보니 일백여덟 낱 염주가 손목에 걸렸고, 머리를 만지니 갓 깎은 머리털이 가칠가칠하였으니 완연히 소화상의 몸이요, 다시 대승상의 위의 아니니, 정신이 황홀하여 오랜 후에 비로소 제 몸이 연화 도량 성진 행자인 줄 알고 생각하니, 처음에 스승에게 수책하여 풍도로 가고, 인세에 환도하여 양가의 아들 되어 장원 급제 한림학사하고, 출장 입상하여 공명 신퇴하고, 양 공주와 육 낭자로 더불어 즐기던 것이 다 하룻밤 꿈이라. 마음에 이 필연 사부가 나의 염려를 그릇함을 알고, 나로 하여금 이 꿈을 꾸어 인간 부귀와 남녀 정욕이 다 허사인 줄 알게 함이로다.
급히 세수하고 의관을 정제하며 방장에 나아가니 다른 제자들이 이미 다 모였더라. 대사, 소리하여 묻되,
"성징아, 인간 부귀를 지내니 과연 어떠하더뇨?"
성진이 고두하여 눈물을 흘려 가로되,
"성진이 이미 깨달았나이다. 제자 불초하여 염려를 그릇 먹어 죄를 지으니 마땅히 인세에 윤회할 것이어늘, 사부 자비하사 하룻밤 꿈으로 제자의 마음 깨닫게 하시니, 사부의 은혜를 천만 겁이라도 갚기 어렵소이다."
"네, 승흥하여 갔다가 흥진하여 돌아왔으니 내 무슨 간예함이 있으리요? 네 또 이르되 인세에 윤회할 것을 꿈을 꾸다 하니, 이는 인세와 꿈을 다르다 함이니, 네 오히려 꿈을 채 깨지 못하였도다. '장주가 꿈에 나비 되었다가 나비가 장주 되니' 어니 거짓 것이요 어니 진짓 것인 줄 분변치 못하나니, 어제 성진과 소유가 어니는 진짓 꿈이요 어니는 꿈이 아니뇨?"
성진이 가로되,
"제자, 아득하여 꿈과 진짓 것을 알지 못하니, 서부는 설법하사 제자를 위하여 자비하사 깨닫게 하소서."
대사 가로되,
"이제 금강경 큰 법을 이럴 너의 마음을 깨닫게 하려니와, 당당히 새로 오는 제자있을 것이니 잠깐 기다릴 것이라."
하더니 문 지킨 도인이 들어와,
"어제 왔던 위부인 좌하 선녀 팔 인이 또 와 사부께 뵈아지이다. 하나이다."
대사, 들어오라 하니, 팔 선녀, 대사의 앞에 나아와 합장 고두하고 가로되,
"제자 등이 비록 위부인을 모셨으나 실로 배운 일이 없어 세속 정욕을 잊지 못하더니, 대사, 자비하심을 입어 하룻밤 꿈에 크게 깨달았으니, 제자 등이 이미 위부인께 하직하고 불문에 돌아왔으니 사부는 나종내 가르침을 바라나이다."
대사 왈,
"여선의 뜻이 비록 아름다우나 불법이 깊고 머니, 큰 역량과 큰 발원이 아니면 능히 이르지 못하나니, 선녀는 모로미 스스로 헤아려 하라."
팔 선녀 물러가 낯 위에 연지분을 씻어 버리고 각각 소매로서 금전도를 내어 흑운 같은 머리를 깎고 들어와 사뢰되,
"제자 등이 이미 얼굴을 변하였으니 맹서하여 사부 교령을 태만치 아니하리다."
대사 가로되,
"선재, 선재라. 너희 팔 인이 능히 이렇듯 하니 진실로 좋은 일이로다."
드디어 법좌에 올라 경문을 강론하니, 백호 빛이 세계에 쏘이고 하늘 꽃이 비같이 내리더라.
설법함을 장차 마치매 네 귀 진언을 송하여 가로되,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이리 이르니, 성진과 여덟 이고가 일시에 깨달아 불생 불멸할 정과를 얻으니, 대사 성진의 계행이 높고 순숙함을 보고 이에 대중을 모으고 가로되,
"내 본디 전도함을 위하여 중국에 들어왔더니, 이제 정법을 전할 곳이 있으니 나는 돌아가노라."
하고 염주와 바리와 정병과 석장과 금강경 일 권을 성진을 주고 서천으로 가니라.
이후에 성진이 연화 도량 대중을 거느려 크게 교화를 베푸니, 신선과 용신과 사람과 귀신이 한 가지로 존숭함을 육관대사와 같이하고 여덟 이고가 인하여 성진을 스승으로 섬겨 깊이 보살 대도를 얻어 아홉 사람이 한 가지로 극락 세계로 가니라.
하늘이 날짐승과 길짐승에게는 발톱과 뿔을 주고 단단한 발굽과 예리한 이빨을 주었으며 여러 가지 독(毒)을 주어서, 각기 하고 싶어하는 것을 얻게 하고 외부로부터의 습격을 막아 낼 수 있게 하였는데, 사람에게는 벌거숭이로 유약(柔弱)하여 제 생명을 보호하지 못할 듯이 하였으니, 어찌하여 하늘은 천하게 하여야 할 금수(禽獸)에게는 후하게 하고, 귀하게 하여야 할 인간에게는 박하게 하였는가. 이는 인간에게는 지혜로운 생각과 교묘한 연구력이 있으므로 기예(技藝)를 익혀서 제 힘으로 살아가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지혜로운 생각으로 미루어 아는 것도 한계가 있고, 교묘한 연구력으로 깊이 탐구하는 것도 순서가 있다. 그러므로 비록 성인(聖人)이라 하더라도 하루 아침에 모두 아름답게 하지는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예는 사람이 많이 모이면 더욱 정묘(精妙)하게 마련이고, 세대가 흘러갈수록 더욱 발전하는바, 이는 형세가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골에 사는 사람들은 읍내에 있는 공장이 솜씨만 못하고, 읍내 사람들은 유명한 성터나 큰 도시에 있는 공장이 솜씨만 못하며, 유명한 성터나 큰 도시의 사람들은 서울에 있는 최신식의 묘한 기계 제작 솜씨만은 못하다.
저 궁벽(窮僻)한 시골 마을에 사는 자가 오래 전에 서울에 왔다가, 처음으로 만들어서 아직 완전하지 못한 방법을 우연히 얻어듣고는, 기쁘게 돌아가서 시험해 본 다음, 속으로 자신만만하여 말하기를
"천하에 이 방법보다 더 우수한 것이 없다."
하면서 아들과 손자들을 모아 놓고 경계하기를
"서울에서 말하는 소위 기예라는 것을 내가 모두 배워 가지고 왔으니, 지금부터는 서울에서도 다시 더 배울 것이 없다."
한다. 이런 사람이 하는 짓이란 거칠고 나쁘지 않은 것이 없다.
우리 나라에 있는 백공(百工)들의 기예는 모두 옛날 중국에서 배워 온 방식인데, 수백 년 이래 칼로 벤 것처럼 딱 잘라 다시는 중국에 가서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중국에는 새로운 방식과 교묘한 제도가 나날이 증가하고 다달이 불어나서 수백 년 이전의 옛날 중국이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막연하게 서로 묻지도 않고 오직 옛날의 방식만을 편케 여기고 있으니 어찌 그리 게으르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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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짓는 기술이 정교해지면 차지한 농토가 적으면서도 곡식은 소출(所出)이 많으며, 노력이 덜 들면서도 잘 여물 것이다. 밭을 일구어서 갈고 씨뿌리고 김매고 낫질하고 벗기는 것으로부터 키질하고 방아 찧고 반죽하고 밥짓기에 이르기까지 모두 편리하게 되어 노동력이 절감될 것이다.
베 짜는 기술이 정교해지면 투입되는 물가가 적으면서도 실이 많이 나오고, 작업을 빨리 하면서도 포백(布帛)은 올이 배고 결이 고울 것이다. 물에 담가서 씻고 실을 뽑으며 베를 짜고 포백하는 일로부터 채색으로 물들이고 바느질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모두 편리하게 되어 노동력이 절감될 것이다.
병정(兵丁)의 기술이 정교해지면 공격하고 방어하며 식량을 운반하고 성벽 따위를 수축(修築)하는 모든 일이 속도가 빨라져 위태함을 보호하게 될 것이다.
의원(醫員)의 기술이 정교해지면 맥을 짚어서 증세를 살피고 약의 성질을 분별하여 사시(四時)의 기운을 살피는 모든 것이 옛날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고 잘못된 점을 논박(論駁)할 수 있을 것이다.
온갖 공장이의 기술이 정교해지면 궁실(宮室)과 기용(器用)을 만드는 것에서부터 성곽과 선박, 수레, 가마 따위의 제작에 이르기까지 모두 편리하고 견고(堅固)하게 될 것이다.
진실로 그 방법을 다 알아서 힘껏 시행한다면 국가를 부유하게 만들 수 있고, 군대를 강하게 만들 수 있으며, 백성을 잘살고 수(壽)하게 할 수 있을 터인데, 당장 익숙히 보면서도 도모하지 않는다.
수레를 사용하는 데 대하여 말하는 자가 있으면 "우리 나라는 산천이 험하여 사용 할 수 없다."하며, 양(羊)을 목축하는 것에 대하여 말하는 자가 있으면 "조선에는 양이 없다." 하며, 말은 죽을 쑤어 주는 것이 나쁘다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풍토(風土)가 각기 다르다." 하니, 이런 자들을 난들 또한 어찌하겠는가.
글씨를 배우는 데 미불(米 )과 동기창(董其昌)의 체를 쓰는 자가 있으면 "왕희지(王羲之)의 순수함만 같지 못하다." 하며, 벽생백( 生白)과 장원소(張元素)의 방법을 쓰는 자가 있으면 "단계(丹溪)나 하간(河間)의 옛 법만 같지 못하다." 하면서, 은연중 빗대어서 성세(聲勢)를 만들어 한 세상을 호령하려고 한다.
저 희지(羲之)와 단계(丹溪), 하간(河間)등의 무리는 과연 계림국(鷄林國)의 안동부(安東府) 사람들인가.
항간에서 말하는 왕희지의 글씨란, 곧 우리 나라에서 목판에 새긴 필진도(筆陣圖)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도리어 미불이나 동기창의 진짜 필적만 못하다.
3
옛날, 소식(蘇軾)은 경적(經籍)을 고려에 하사하지 말고 아울러 구입해 가는 것도 금지하도록 주청(奏請)하면서 "이적(夷狄)이 글을 읽으면 그 지식이 진보될 것이다." 했으니, 어찌 그리도 마음이 좁고 인정이 적었던가.
그러나 이런 논의가 때로는 중국에 통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경적도 서로 보여주려고 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기능을 배우게 하여 그 나라가 부강해지는 일을 하겠는가.
옛날에는 외국 오랑캐로서 중국에 자제를 보내어 입학시킨 자가 매우 많았다. 근세에도 유구(琉球) 사람들은 중국의 태학(太學)에 들어가서 10년 동안 전문적으로 새로운 문물과 기예를 배웠으며, 일본은 강소성(江蘇省)과 절강성(浙江省)을 왕래하면서 온갖 공장이들의 섬세하고 교묘한 기술을 배워 가기를 힘썼다.
이 때문에 유구와 일본은 바다의 한복판인 먼 지역에 위치했으면서도 그 기능이 중국과 대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백성은 부유하고 군대는 강하여 이웃 나라가 감히 침범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나타나는 효과가 이처럼 뚜렷하다.
마침 지금은 중국의 규칙이 탁 트여서 좁지 않은데, 이런 기회를 놓쳐 버리고 도모하지 않았다가 만일 하루 아침에 소식과 같은 자가 나와서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의 한계를 엄격히 하여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도록' 건의한다면, 비록 예물을 가지고 폐백을 받들어 그 기술을 찌꺼기나마 배우려 하더라도 어찌 뜻을 이룰 수 있겠는가.
효도와 우애는 타고난 천성에 원래 있는 것이며, 성현들의 책에 자세히 밝혀져 있으니, 진실로 넓혀서 확충(擴充)하고 잘 실천하여 밝힌다면 예의의 아름다운 풍속을 이루게 될 터이니, 이는 참으로 외부의 것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또한 후세 사람들에게 의뢰할 것도 없다. 그러나 백성들의 생활에 필요한 물건이나 온갖 공장이들의 기능으로 말하면 중국에 가서 나중에 새로 나온 제도를 배우지 않으면 어리석고 고루한 것을 깨뜨리지 못하여 이익을 펼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국사를 맡은 자가 마땅히 강구하여야 할 문제이다.
< 기예론(技藝論)의 의의 >
다산 정약용은 17·18세기 실학자들의 사상을 종합·집대성한 학자였다. 그는 정치·경제·사회에 대한 여러 가지 뛰어난 개혁론을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자연과학을 발전시켜나가야 한다는 선진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기예론'은 그의 이러한 생각이 잘 반영된 논설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중국에는 이미 서양 기술이 들어와 널리 유행하고 있었다. 다산이 받아들이고자 한 중국 기술 중에는 이러한 서양 기술이 포함되어 있었다. 중국 중심 세계관을 가지고 있던 동양 사회에 있어서 서양 기술의 유입은 전에 없이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다산은 세계사적 상황을 누구보다도 잘 인식하고 서양 기술을 하루 빨리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선진 기술의 도입을 이론적으로만 전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이를 실천에 옮기기도 했다. 그가 기중기(起重機)와 활자를 만들고 종두법을 실험한 것 등은 그 좋은 예라고 하겠다.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의 전지(田地)는 10경(頃)이고 그 아들은 10명이라고 하자. 그들 중 한 아들은 전지 3경을 얻고, 두 아들은 2경을 얻고, 나머지 네 아들은 전지를 얻지 못하여 울면서 길거리에서 뒹굴다가 굶어죽게 된다면 그 사람을 부모 노릇 잘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늘이 백성을 내릴 적에 먼저 전지를 마련하여 그들로 하여금 먹고 살게 하였고, 또한 백성을 위하여 군주(君主)와 목민관(牧民官)을 세워 그들의 부모가 되게 하였으며, 백성의 재산을 균등하게 하여 다함께 잘 살도록 하였다.
그런데도 군주와 목민관이 팔장만 끼고 앉아 아무 일도 안 한다면, 그 아들이 서로 싸워서 재산을 빼앗고 자기에게 합치는 일을 못하게 막을 자는 누구란 말인가? 힘센 자는 더 많이 얻게 되고 약한 자는 떠밀리어 땅에 넘어져 죽게 된다면, 그 군주와 목민관 된 자는 남의 군주와 목민관 노릇을 잘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백성들의 재산을 균등하게 하여 다함께 살 수 있도록 한 사람은 군주와 목민관 노릇을 잘한 사람이요, 백성들의 재산을 균등하게 하지 못하여 다같이 살 수 있게 하지 못하는 사람은 군주와 목민관의 직무를 저버린 사람이다.
농사를 짓는 사람은 전지를 갖게 하고,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은 전지를 갖지 못하게 하며, 농사를 짓는 사람은 곡식을 분배받게 되고,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은 곡식을 분배받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다. 공장(工匠)은 그들이 만든 기구로써 곡식을 바꾸게 되고 상인은 화물(貨物)로써 양곡을 사게 되면 아무 지장이 없게 된다.
선비는 열 손가락이 유약하여 힘든 작업을 감당하지 못하니 밭을 갈겠는가, 김을 매겠는가, 거름을 주겠는가? 그들의 이름이 노동 기록 장부에 기록되지 못하면 가을에 곡식 분배를 받지 못할 것이다. 아아, 내가 여전법(閭田法)을 시행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대체 선비란 무엇하는 사람인가? 어찌하여 선비는 손발도 놀리지 아니하고 땅에 생산된 것을 빼앗아 먹으며 남이 노동한 것을 삼켜 먹는가?
대저 선비가 놀고 먹기 때문에 땅에서 나는 이(利)가 다 개척되고 있다. 놀고서는 곡식을 분배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면 또한 장차 직업을 옮겨 농사를 지을 것이다. 선비가 직업을 바꾸어 농사꾼이 되면 땅에서 나는 이(利)도 개척되고 선비가 직업을 바꾸어 농사꾼이 되면 난민(難民)도 없어질 것이다.
선비 중에는 반드시 직업을 바꾸어서 농사꾼으로 되지 못하는 자도 있을 것이니, 이런 경우에는 장차 어찌할 것인가? 공장(工匠)과 상인으로 변하는 자도 있을 것이며, 아침에는 들에 나가 농사를 짓고 저녁에는 집에 돌아와 옛 사람의 서적을 읽는 자도 있을 것이며, 부유한 사람의 자제를 가르치는 것으로 살 길을 구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또한 실리(實利)를 강구(講究)하여 토지에 적합한 농작물을 분별하고 수리(水利)를 일으키며 기구를 제작하여 인력을 덜어주기도 하고 농사 기술과 목축업을 가르쳐서 농민들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자는 그 공을 어찌 육체 노동하는 사람과 견줄 수 있겠는가? 하루의 일을 열흘로 기록하고 열흘 동안 한 일을 백일로 기록하여 그에 따라 곡식을 분배받아야 옳을 것이다. 선비에게 어찌 분배가 없겠는가?
백성을 위해서 목(牧)이 존재하는가, 백성이 목을 위해 태어났는가? 백성들은 곡식과 피륙을 내어 목을 섬기고, 수레와 말을 내어 따르면서 목을 영송(迎送)하며, 고혈(膏血)을 다하여 목을 살찌게 하니 백성들이 목을 위해서 태어난 것인가?
태고 시절에는 백성들만이 있었을 뿐이니 어찌 목이 존재했겠는가? 백성들은 한가로이 마을을 이루어 모여 살았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을 때 이를 판결할 수 없었다. 이 때 한 노인이 있어 공평한 말을 잘 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그 노인에게 가서 판정을 받았고, 모든 이웃사람들도 판정에 복종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노인을 추대하여 이정(里政)이라 불렀다. 또한 여러 마을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 판결하지 못하고 있을 때 어느 노인이 있어 현명하고 지식이 많았기 때문에 모두 그에게 가서 판정을 받고 복종하였다. 그리하여 함께 그를 추대하여 당정(黨政)이라고 불렀다. 역시 몇 개의 당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 해결하지 못하고 있을 때 한 노인이 어질고 덕이 있었기 때문에 모두 그에게 가서 판정을 받고 복종하였다. 그리하여 그를 추대하여 주장(州長)이라고 불렀다. 이와 마찬가지로 몇 개의 주장들이 한 사람을 추대하여 우두머리로 삼아 국군(國君)이라 하고, 여러 국군들이 한 사람을 추대하여 우두머리로 삼아 방백(方伯)이라 하며, 사방의 방백들이 한 사람을 추대하여 가장 높은 우두머리로 삼아 황왕(皇王)이라 불렀다. 그러므로 황왕의 근본은 이정에서 나온 것이다. 한편, 이정은 백성들의 희망을 좇아 법을 제정하여 당정에게 올리고 , 당정은 백성들의 여망을 좇아 법을 제정하여 주장에게 올렸다. 역시 주장은 이를 국권에게 올렸으며, 국권은 다시 황왕에게 올렸다. 그러므로 그 법은 모두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후세에는 어느 한 사람이 스스로 황제가 되어 자기의 자제와 종복들을 제후로 삼고, 제후는 자기 심복을 뽑아 주장을 삼으며, 주장 역시 자기 심복을 가려 당정·이정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황제는 자기 욕망을 좇아 법을 제정하여 제후에게 내리고, 제후는 다시 자기의 욕망대로 법을 제정하여 주장에게 내린다. 이와 같이 주장은 당정에게, 당정은 다시 이정에게 내리니, 그 법은 통치자를 존숭(尊崇)하고 백성을 비하하며, 아랫사람에게는 각박하고 윗사람에게는 너그럽게 되었다. 이렇듯 백성은 한결같이 목을 위하여 태어난 것처럼 되어 버렸다.
오늘날 수령들은 옛날의 제후와 같아져 궁실과 수레, 의복과 음식, 그리고 좌우의 시종들을 거느린 것이 마치 국군의 그것에 비길 만하다. 또, 그들의 권능은 넉넉히 사람들을 경복(慶福)할 만하고, 그들의 형률(刑律)과 위엄은 충분히 사람들을 두렵게 할 만하다. 결국, 수령들은 오만스럽게 자신을 뽐내고, 태평스럽게 스스로 안일에 빠져서 자신이 목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만다. 사람들이 분쟁을 일으켜 찾아가 판결을 구하면 번거로워하면서 "왜 이렇게 시끄러우냐?" 하고, 굶어 죽는 사람이 있으면 "제 스스로 죽은 것일 뿐이다."라고 한다. 곡식과 피륙을 바쳐서 섬기지 않으면 곤장을 치고 몽둥이질을 하여 피가 흘러서야 그친다. 날마다 거둬들인 돈꾸러미를 헤아려 낱낱이 기록하고, 돈과 피륙을 부과하여 전답과 주택을 장만하며, 권세 있는 재상가에 뇌물을 보내 뒷날의 이익을 기다린다. 이러고서야 백성이 목을 위하여 태어난 것이어니와, 어찌 이것이 타당한 이치이겠는가?
독서는 실로 기억하여 외어 읽는 것을 귀중하게 여기는 것은 아니지만, 초학자(初學者)로서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더욱 의거할 데가 없어진다. 그러므로 매일 배운 것을 먼저 정확하게 외고 음독(音讀)에 착오가 없이 한 뒤에 비로소 서산(書算)을 세우고, 먼저 한 번 읽고 나서 다음에는 한 번 외고, 그 다음에는 한 번 보며, 한 번 보고 나서는 다시 읽어 모두 3, 40 번 되풀이한 뒤에 그친다. 매양 한 권이나 흑은 반 권을 다 배웠을 때에는 전에 배운 것도 아울러 또한 먼저 읽고, 그 다음에 외고, 그 다음에는 보되, 각각 서너너덧 번 반복한 뒤에 그친다.
글을 읽을 때에는 소리로 읽어서는 안 된다. 소리가 높으면 기운이 떨어진다. 눈을 돌려서는 안 된다. 눈을 돌리면 마음이 달아난다. 몸을 흔들어서도 안 된다. 몸이 흔들리면 정신이 흩어진다.
글을 욀 때에는 틀려서는 안 되고, 중복되어도 안 되고, 너무 빨라도 안 된다. 너무 빠르면 조급하고 사나워서 음미함이 짧으며, 그렇다고 너무 느려도 안 된다. 너무 느리면 정신이 해이하고 방탕해져서 생각이 부풀어진다.
책을 볼 때에는 마음 속으로 그 문장을 외면서 그 뜻을 곰곰이 생각하여 찾되, 주석(註釋)을 참고하고 마음을 가라앉혀 궁구해야 한다. 만일, 한갓 눈만 책에 붙이고 마음을 두지 않으면 또한 이득이 없다.
이상의 세 조목은 나누어 말하면 비록 다르나, 요컨대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체득해야 하는 점에서 동일하다. 모름지기 몸을 거두어 단정히 앉고, 눈은 똑바로 보고, 귀는 거두어들이며, 수족은 함부로 놀리지 말며, 정신을 모아 책에 집중해야 한다. 계속 이처럼 해 나가면 의미가 날로 새로워 자연히 무궁한 묘미가 쌓여 있음을 알게 된다.
처음 공부할 때에 회의(懷疑)를 품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의 공통된 병통이다. 그러나 그 병의 근원을 따져 보면, 뜬 생각에 따라 쫓다가 뜻을 책에 전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뜬 생각을 제거하지 않고 억지로 배제하려고 하면 이로 인해 도리어 한 가지 생각을 더 첨가시켜 마침내 정신적인 교란만을 더하게 된다. 어깨와 등을 꼿꼿이 세우고, 뜻을 높여 한 글자 한 구절에 마음과 입이 상응하게 되면, 뜬 생각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없어지게 된다.
뜬 생각이란, 하루 아침에 깨끗이 없어질 수는 없다. 오직 수시로 정신을 맑게 하는 방법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흑 심기가 불편하여 꽉 얽매여 없어지지 않으면, 묵묵히 앉아서 눈을 감고 마음을 배꼽 근처에 집중시킬 때 신명이 제자리로 돌아오고, 뜬 생각은 사라지게 된다. 과연 이러한 방법을 잘 실행한다면, 얼마 안 가서 공부하는 것이 점점 익숙해지고 효험이 점차 늘어나 오직 학식만이 날로 진척될 뿐 아니라, 마음이 편안하고 기운이 화평하여 일을 함에 있어서 오로지 하나에만 힘쓰고 정밀하게 된 다. 위로 이치에 통달하는 학문도 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의리(意理)는 무궁한 것이니, 함부로 스스로 만족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문자를 거칠게 통한 사람은 반드시 의문이 없게 마련인데, 이는 의문이 없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궁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의문이 없는 데서 의문이 생기고, 맛이 없는 데서 맛이 생긴 뒤에라야 능히 글을 읽는다고 말할 수 있다.
독서는 결코 의문을 품으려고만 해서는 안 된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뜻을 오로지 하나에만 집중하여 읽고, 읽어 가되 의문이 없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의문이 생기면 반복해서 참고하고 연구해야 한다. 반드시 문자에만 집착하지 말고, 혹 일을 당했을 때는 시험도 해 보고, 흑 노는 가운데서도 구하기도 하며, 무릇 걸어갈 때나 앉고 누울 때에도 수시로 궁구하고 탐색하여야 한다. 이와 같이 하기를 끊이지 않고 계속하면 통하지 못할 것이 거의 없고, 설사 통하지 못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먼저 이처럼 궁구하고 탐색한 다음에 남에게 물으면 마침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깨달을 수가 있다.
독서할 때에도 쓸데없이 소리를 크게 지르거나, 음독이 뒤섞이게 하거나, 억지로 자구를 맞춘다든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어려운 것을 들추어 낸다든가, 남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지나쳐 버리고 돌아 보지 않는다든가, 한 번 묻고 한 번 대답 하고는 다시 더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는 이익을 구하는 데 아무 뜻이 없는 사람이 니 더불어 학문을 할 수가 없다.
성현의 언어를 볼 때는 고인을 참고하고, 이미 이루어졌던 자취를 더듬어 그것을 내 자신에게 돌이켜 적당한 변통책을 강구해야 한다. 그리고 흠앙하고 부러워하며, 고마움 속에 간절함이 마치 바늘로 몸을 찌르는 것 같아야 한다. 고인의 독서는 대개 이러한 본령이 있었으니, 이와 같이 아니 하면 모두가 거짓 학문이 되고 만다.
나는 일찍이 맹자(孟子)의 '내 뜻으로써 남의 뜻을 거슬러 구한다.'는 이의역지(以意逆志) 네 글자를 가지고 독서의 비결로 삼았다. 고인이 지은 글에는 의리와 사공(事功)뿐만 아니라 시문을 짓는 방법이나 기승전결 등 문장의 말기(末技)라도 모두가 각각 그 뜻이 담겨져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이제 나의 뜻으로써 고인의 뜻을 받아들여 빈틈없이 합하고 흔연히 풀리면, 이는 고인의 정신과 식견이 내 마음 속에 침투해 들어온 셈이 된다. 비유컨대, 굿을 하는 무당이 신이 내려 혼령이 몸에 붙으면 훤히 깨달아져 그것이 어디로부터 어디에 왔는지 아는 것과 같다. 능히 이와 같이 되면, 장구(章句)에 의지하거나 묵은 자취를 답습하지 않아도 모든 변화에 적응하되, 이리 가나 저리 가나 근원을 찾게 될 것이니, 나도 또한 고인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독서한 연후라야 가히 자연의 기교를 체득할 수가 있다.
고인의 글을 짓는 것은 문장에 힘써 공명을 취하려는 것도 아니요, 널리 보아 기억한 것을 밑천으로 삼아 명예를 구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문장에 힘쓰고 널리 보아 기억한 것을 밑천으로 삼으려는 사람도 또한 조급하게 섭렵해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종일 외고 읽어 눈이 글줄에서 떠나지 않으면서 스스로 이것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입으로만 읽고 마음을 쏟지 않으니, 작자의 본지(本志)에다 견주어 볼 때, 열 겹 스무 겹의 철관(鐵關)이 가로막혀 있을 뿐이다. 이 어찌 도에서 더욱 더 멀어지지 않겠는가? 이는 천하의 쓸모 없는 재주이다.
초학자의 독서에 있어서 누구인들 그 어려움을 괴롭게 여기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 괴롭고 어려운 것을 그대로 두고 편의함만 찾아 구차스럽게 편안히 지내려고 한다면, 이는 쓸모 없는 재주로 끝날 따름이다. 만약, 조금만 스스로가 굳게 참고 반성하며 점검하기를 잊지 않는다면, 십여 일 내에 반드시 소식이 있어 고난은 점차 사라지고, 취미는 날로 새로워져서 점차 손이 저절로 춤추고, 발이 저절로 뛰는 지경에 이르리니, 무한한 즐거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인생 백 년간에 근심과 괴로움이 쉴새없이 찾아들어 편히 앉아 독서할 시간이란 거의 얼마 안 되는 것이다. 진실로 일찍 스스로 깨달아 노력하지 않고, 구차스럽게 살아가다가는 쓸모 없는 재주로 끝나고 말 것이니, 만년에 가서 궁박한 처지에 놓였을 때 누구를 원망할 것인가?
내가 요동 땅에 처음 들어왔을 때 바야흐로 한여름이라 뙤약볕 속을 걸었다. 홀연히 대하가 앞을 가로막았다. 그 강에는 시뻘건 물결이 산같이 일어나서 마주 보이는 언덕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이렇게 된 것은 천 리 밖 상류 지방에 폭우가 쏟아졌기 때문이다. 물을 건널 때 사람들이 모두 머리를 젖혀 하늘을 우러러보기에, 나는 그들이 모두 하늘을 향하여 묵도를 올리나 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것은 물을 건너는 사람들이 물을 외면하고 보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소용돌이치며 용솟음치는 물과 탕탕히 내닫는 물을 보았을 때, 몸이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고 시선이 물의 흐름을 따라 내려가는 것 같아 문득 현기증이 나서 물에 빠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 어느 순간에 그 잠깐 동안의 위급한 목숨을 위해 기도할 수 있었으랴!
그 위험하기가 이와 같았는데도 강물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모두 말하였다. "요동의 들이 평평하고 넓기 때문에 물이 성내어 울어대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강물을 알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요하가 울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밤중에 건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낮에는 물을 볼 수 있으므로 오직 눈이 위태로움을 보는 데만 쏠려, 벌벌 떨며 도리어 눈을 가진 것을 걱정해야 할 판에 도대체 무엇이 들리겠는가, 지금은 밤중에 강을 건너므로 눈이 위태로움을 보지 못한다. 따라서 위태로움이 오로지 청각으로 쏠려 귀가 이제는 벌벌 떨며 그 근심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이제야 도를 알았다. 마음을 그윽하게 갖는 자는 이목이 자기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이목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자세하면 할수록 더욱 병이 되는 것이다.
내 마부가 말에 발을 밟혔기 때문에 뒷수레에 태우고, 드디어 말재갈을 풀고 강물에 들어갔다. 나는 무릎을 오그리고 발을 모아 안장 위에 앉았다. 말에서 한 번 떨어지기만 하면 강물 속이다. 그럴 경우 강물로 땅을 삼고, 강물로 옷을 삼고, 강물로 몸을 삼고, 강물로 성정을 삼으리라고 생각했다. 한번 떨어질 것을 마음 속에 각오하자, 내 귀에는 마침내 강물 소리가 들려 오지 무릇 않았다. 아홉 번이나 강을 건너는데 조금도 걱정이 없이 마치 탁자 위에 좌와기거하는 것 같았다.
옛날 우가 강을 건너는데 황룡이 등으로 배를 졌다고 하니, 이는 지극히 위태로운 것이다. 그러나 사생의 판단이 먼저 마음에 분명해지면, 용이라고 해서 크게 보일 것도 도마뱀이라고 해서 작게 보일 것도 없다.
소리와 빛은 외계의 사물이다. 외계의 사물이 항상 이목에 누가 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보고 듣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이와 같다. 그런데 하물며 사람이 세상을 살아감은 그 험하고 위태로움이 강물보다 심한 데가 있는데다,
보고 듣는 것이 곧잘 병이 되는 데에 있어서랴. 나는 또 나의 산중에 돌아가 다시 앞 냇물 소리를 들어 이것을 시험해 보고, 그리고 몸가짐에 교묘하고 스스로 그 총명함을 자신하는 자들에게 경고하리라.
임금은 비판하는 신하가 없음을 근심할 것이 아니라, 그 말을 받아들이지 못함을 근심해야 한다. 비판하는 것은 말로써 하는 것이고, 받아들이는 것은 행동으로 하는 것이니, 행동으로 옮기기는 어렵고 말로 하기는 쉽다. 임금이 그 어려운 것을 해낸다면 아래에 있는 신하는 비록 상을 주지 않더라도 그 쉬운 것을 행하게 될 것인데, 하물며 인도하여 말하도록 함에 있어서랴?
그러나 간하는 것은 헐뜯는데 가까우며 헐뜯으면 성내지 않는 사람이 없는 것이니, 비록 노하더라도 서슴 없이 간해야 할 것이다. 하물며 남의 과실을 책망하는 데 있어서, 어찌 조언을 청한다는 임금의 말까지 기다리겠는가? 비판하여 받아들이면 신하에게 세 가지 소득이 있다. 곧 그것은 충신의 명예가 있고, 비판하는 데 대한 포상이 있으며, 벼슬을 보전하는 이익이 있어서 온 천하 사람들이 칭송하고 그 음덕이 자손에게까지 미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하가 감히 비판하지 못하는 것은, 임금이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성낼까봐 그런 것이다. 임금이 비판하는 신하가 없음을 근심하는 것은 밭이 있으나 곡식을 심지 않은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비판하는 것도 어질고 어리석음에 따라 선악의 구분이 있으니, 이 점 또한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이미 널리 받아들이는 길을 열어놓으면, 원근을 막론하고 모두 팔뚝을 휘두르며 들어와 흉금을 털어놓고 말을 올릴 것이니, 어찌 어진 인재가 없음을 근심하는 것은 곡식이 있어도 거두어 들이지 않은 것과 같은 것이다. 공자의 말에 '임금에게 비판하는 신하 일곱 사람이 있으면 비록 임금이 무도하더라도 그 천하를 잃지 않는다'고 했는데, 비판하는 신하가 있어 임금이 그 말을 받아들인다면 그가 어찌 무도하다고 이르겠는가? 이는 제나라 위령공의 경우와 같이 '기뻐하면서도 실행하지 않고 따르면서도 고치지 않는다'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참으로 기뻐하며 실행한다면 침묵을 바꾸어 비판하는 사람이 어찌 일곱 사람에 그칠 것이며, 만약 노하여 죄를 준다면 일곱 사람인들 어찌 얻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무도하더라도 오히려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하물며 인도하여 말하게 하고 상을 주어 여러 사람들에게 시범한다면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성군의 흥하고 왕성함도 이와 같은데 지나지 않는다.
북곽 선생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며 코가 땅에 닿도록 세 번이나 절을 하고 우러러 빌었다.
"호랑님의 덕은 퍽 큰 바 있어, 덕망이 있는 사람은 호랑님의 몸가짐을 본받고, 임금은 그 걸음을 배우고, 애들은 그 효도를 본뜨며, 장수는 그 위엄을 취하고자 하오니, 참으로 호랑님은 바람과 구름의 조화를 부리는 신이니 용과 같사오며, 소생은 바람에 불리우는 천한 몸이올씨다."
이 말을 들은 호랑이는 꾸짖으며,
"이놈, 가까이 오지도 말라. 선비놈은 간사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과연 평소에 있어서 모든 욕은 나에게 쏟아 놓더니, 그런 것은 잊은 듯 지금 와서는 처지가 급하게 되어 내 눈앞에서 아첨을 하는 꼴이라니, 누가 너를 믿을 수 있단 말이냐. 천하의 이치는 하나인 것이다. 호랑이가 참으로 나쁘다면 사람의 성품도 나쁜 것이요, 사람의 성품이 착하면 호랑이의 성품도 착한 법이다. 네가 입버릇처럼 오륜 삼강을 떠들어봤자, 길거리에서 뻔뻔스럽게 쏘다니는 사람들은 모두가 글깨나 안다는 양반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가진 수단으로 나쁜 일을 하는데, 도무지 고치질 못한다. 호랑이는 이런 일이 없으니, 사람보다 어질지 않느냐. 우리들 호랑이는 풀, 나무, 버러지 등을 먹지 않고, 술과 같은 난잡한 것을 즐기지 않으며, 모든 일에 대범하고, 노루, 사슴, 말, 소 등을 잡아먹되 음식에 대한 불평을 하는 일이 없으니, 우리 호랑이의 하는 처지가 어찌 바르지 않을 바가 있으랴. (중략)
하루에 한번 잡아먹는데 까마귀, 소리개, 청마구리 또는 말개미에게 먹을 것을 노나 주니 그 인은 말할 것 없고, 참소하여 남을 해치는 놈, 병들은 놈, 심제 등은 잡아먹지 않으니 그 의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 너희들 인간이 잡아먹는 것은 어찌 그렇게도 어질지 못하냐. 함정을 파서 잡는 것도 부족해서 여러 가지 그물로 새나 물고기를 잡아먹으니, 처음 그물을 만들어낸 놈은 천하에서 가장 큰 화를 남겨 놓은 것이다. 그리고 여러 가지 창들이며 벼락 같은 소리와 번개 같은 빛을 내며 터져 나가는 총이라든가, 칼과 활 등 여러 가지 무기가 일시에 발동하면 많은 귀신이 밤중에 울부짖게 되니, 그 서로 잡아먹는 한심한 꼴이란 너희들보다 더 심한 것이 어디 있으랴."
북곽 선생은 땅에 엎드려 꾸벅꾸벅 하며 머리를 수그리고,
"비록 나쁜 일을 저질은 사람일지라도 참회하고 몸을 깨끗이 하면 상제를 섬길 수 있다 하오니, 이 천하고 못난 사람을 살펴 주옵소서." 하며 숨을 죽이고 대답 있기를 가만히 기다렸으나, 오래도록 아무 답이 없더라. 북곽 선생은 송구스럽게 생각하고 있다가 문득 우러러보니, 동쪽 하늘이 이미 밝아지고, 호랑이는 사라져 없고, 그 옆에 섰던 밭에 나온 농부들이,
"아, 선생님은 이른 아침에 어디다 대고 이렇게 절을 하고 계십니까?" 하고 물었다. 북곽 선생은
"하늘이 높으니 우러러 보지 않을 수 없고, 땅이 넓으니 구부려 보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 있네, 나는 이것을 실천해 본 것뿐일세." 하며 쓴 웃음으로 어색한 표정을 하는 것이었다.
백성은 홍수나 화재 또는 호랑이나 표범보다도 더 두려워해야 한다. 그런데도 윗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백성들을 업신여기면서 가혹하게 부려먹는데 어째서 그러한가?
이미 이루어진 것을 함께 즐거워하고 늘 보아 오던 것에 익숙하여, 그냥 순순하게 법을 받들면서 윗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는 사람은 항민(恒民)이다. 이러한 항민은 두려워할 것이 없다.
모질게 착취당하여 살가죽이 벗겨지고 뼈가 부서지면서도 집안의 수입과 땅에서 산출되는 것을 다 바쳐서 요구에 이바지하느라, 혀를 차고 탄식하면서 윗사람을 미워하는 사람들은 원민(怨民)이다. 이러한 원민도 굳이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자신의 자취를 푸줏간 속에 숨기고 몰래 딴 마음을 품고서, 세상을 흘겨보다가 혹시 그 때에 어떤 큰 일이라도 일어나면, 자기의 소원을 실행해 보려는 사람들은 호민(豪民)이다. 이 호민은 몹시 두려워해야 할 존재이다.
호민이 나라의 허술한 틈을 엿보고 일의 형편이 이용할 만한 때를 노리다가 팔을 떨치며 밭두렁 위에서 한 번 소리를 지르게 되면, 원민들은 소리만 듣고도 모여들어 모의하지 않고서도 함께 소리를 지르고, 항민들도 또한 제 갈 길을 찾느라 호미, 고무레, 창, 창자루를 가지고 쫓아가서 무도한 놈들을 죽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진(秦)나라가 망한 것은 진승(陳勝)과 오광(吳廣) 때문이었고, 한(漢)나라가 어지러워진 것은 황건적 때문이었다. 당(唐)나라가 쇠퇴하자 왕선지(王仙芝)와 황소가 그 틈을 타고 일어났는데, 마침내 백성과 나라를 망하게 한 뒤에야 그쳤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백성들에게 모질게 굴면서 저만 잘살려고 한 죄의 대가이며, 호민들이 그러한 틈을 잘 이용한 것이다.
하늘이 임금을 세운 것은 백성을 돌보게 하기 위해서였지, 한 사람이 위에서 방자하게 눈을 부릅뜨고서 계곡같이 큰 욕심을 부리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진나라, 한나라 이후의 화란은 당연한 결과였지, 불행했던 것은 아니었다.
지금 우리 나라는 중국과는 다르다. 땅이 비좁고 험하여 사람도 적고, 백성 또한 나약하고 게으르며 잘아서, 뛰어난 절개나 넓고 큰 기상이 없다. 그런 까닭에 평상시에 위대한 인물이나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이 나와서 세상에 쓰여지는 일도 없었지만, 난리를 당해도 또한 호민이나 사나운 병졸들이 반란을 일으켜 앞장서서 나라의 걱정거리가 되었던 적도 없었으니 그 또한 다행이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고려 때와는 같지 않다. 고려 때에는 백성들에게 조세를 부과함에 한계가 있었고, 산림(山林)과 천택(川澤)에서 나오는 이익도 백성들과 함께 했었다. 장사할 사람에게 그 길을 열어 주고, 물건을 만드는 기술자에게도 혜택이 돌아가게 하였다. 또 수입을 잘 헤아려 지출을 하였기 때문에 나라에 여분의 저축이 있어 갑작스럽게 커다란 병화나 상사(喪事)가 있어도 조세를 추가로 징수한지는 않았다. 그 말기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삼공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윗사람들이 태평스레 두려워할 줄 모르고, 우리 나라에는 호민이 없다고 생각한다. 불행하게도 견훤이나 궁예 같은 자가 나와서 몽둥이를 휘두른다면 근심하고 원망하던 백성들이 가서 따르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보증하겠는가? 기주, 양주에서와 같은 천지를 뒤엎는 변란은 발을 구부리고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이 두려워해야 할 만한 형세를 명확하게 알아서 시위와 바퀴를 고친다면, 오히려 제대로 된 정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조정은 그렇지 아니하여 구구한 백성이면서도 신을 섬기고 윗사람을 받드는 범절을 중국과 대등하게 하고 있는데, 백성들이 내는 조세가 다섯 푼이라면 조정으로 돌아오는 이익은 겨우 한 푼이고 그 나머지는 간사한 자들에게 어지럽게 흩어져 버린다. 또 관청에서는 여분의 저축이 없어 일만 있으면 한 해에도 두 번씩이나 조세를 부과하는데, 지방의 수령들은 그것을 빙자하여 키질하듯 가혹하게 거두어들이는 것 또한 끝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백성들의 원망과 시름은 고려 말보다 더 심한 상태이다.
육경(六經)의 글은 모두 요.순 이래 성현의 말씀을 기록한 것으로서 조리가 매우 정밀하고 자세하며, 뜻이 깊고도 멀다. 정밀한 것으로 말하자면 털끌만큼도 어지럽힐 수 없고,자세한 것으로 말하자면 미세한 것도 빠뜨린 적인 없다.
깊이를 헤아리고자 하나 그 밑바닥을 찾을 수 없고,멀리 추구하고자 해도 끝간데를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진.한 시대로부터 수.당 시대에 이르기까지 갈래를 나누어 쪼개며 잘라내고 찢어발겨 마침내 대체(大體)를 훼절한 것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이단에 빠진 자는 근사한 것을 끌어다가 간사한 말을 꾸며대고,옛 전적(典籍)만을 굳게 지키는 자는 고집스럽고 편벽되어 평탄한 길을 알지 못한다.이것이 어찌 부지런하고 간절하게 육경을 지어 말씀을 남긴 성현들이 천하 후세에 기대한 뜻이겠는가.
{중용}에 이르기를 "먼 곳을 가려거든 반드시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하였으니, 이른바 깊은 곳은 얕은 데서부터 들어가고, 자세한 부분 역시 간략한 데서부터 미루어가며, 정밀한 경지 또한 거친 데서부터 차츰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것이다.그런데 오늘날 육경을 탐구하는 자들은 대부분 얕고 가까운 것을 뛰어 넘어서 깊고 먼데로만 치달리며, 거칠고 간략한 것은 소홀히 하고서 정밀하고 자세한 것만을 엿보고 있으니,어둡거나 어지럽고 빠져 헤어나지 못하거나 넘어지고 말아 끝내 아무 소득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저들은 비단 깊고 멀고 정밀하고 자세한 것을 잃을 뿐만 아니라, 얕고 가까우며 거칠고 간략한 것마저 모두 잃게 될 것이니, 슬프다, 얼마나 미혹된 일인가.
무릇 가까운 것은 미치기 쉽고 얕은 것은 헤아리기 쉬우며 간략한 것은 알기 쉽고 거친 것은 터득하기 쉽다. 그 도달한 바를 딛고 한 발 멀리 가고 또 한 발 멀리 간다면 먼 끝까지 갈 수 있을 것이며, 그 헤아린 바를 연유하여 차츰 깊게 들어가다 보면 마침내 깊은 끝까지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대저 귀먹은 이는 천둥과 벼락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눈먼 이는 해와 달의 빛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 자신의 신체적 장애로 인한 것일 뿐, 천둥과 벼락, 또는 해와 달은 의연히 그대로인 것이다. 천둥과 벼락은 천지에 굴러다녀 소리가 진동하고 해와 달은 고금에 비추어 빛이 찬연하니, 일찍이 귀먹은 이가 듣지 못하고 눈먼 이가 보지 못했다 하여 그 소리나 빛이 혹여 작아지거나 흐려진 적이 없다. 그러므로 송나라 때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나와서 마침내 해와 달같은 거울을 닦아내고 천둥과 벼락같은 북을 울리어 소리가 멀리 미치고 빛이 넓게 퍼지게 되자 육경의 뜻이 다시 세상에 환히 밝혀졌으니, 이제 지난 날의 편벽된 것들이 사람의 사려를 막을 수 없으며 근사한 것들이 명분을 빌 수 없게 되어 간사한 선동과 유혹이 마침내 끊어지고 평탄한 표준이 뚜렷해졌다.
그러나 경전에 실린 말은 그 근본은 비록 하나지만 그 가닥은 천 갈래 만 갈래이니, 이것이 이른바 "한 가지 이치인데도 백 가지 생각이 나오고, 귀결은 같을지라도 이르는 길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처럼 아무리 뛰어난 지식과 깊은 조예를 가졌다 해도 그 뜻을 완전히 알아서 세밀한 것까지 잃지 않기는 불가능하므로, 반드시 여러 사람의 장점을 널리 모으고 보잘것없는 성과도 버리지 않은 다음에야 거칠고 간략한 것이 유실되지 않고 얕고 가까운 것이 누락되지 아니하여 깊고 멀고 정밀하고 자세한 체제가 비로소 완전하게 갖추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