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21세기라서 가능한 패기인가 싶은데, 1920년대에 이런 당당함을 보인 음치 성악가가 미국에 실존했단다. ‘들어줄 수 없는 목소리’로 불리던 사교계 명사 플로렌스 젠킨스는 자신의 목소리를 사랑하고 자랑하기를 즐겼다. 라디오에서 우연히 젠킨스의 노래를 듣고 매혹된 감독 자비에 지아놀리는 그를 모델로 새로운 인물을 창조하기로 했다. 황당하게 사랑스러운 프랑스영화 〈마가렛트 여사의 숨길 수 없는 비밀〉은 그렇게 탄생했다. 자비에는 모두가 속고 속이는 현대사회에 대해 꽤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진 〈비기닝〉(2009)과 〈슈퍼스타〉(2012)를 연출한 바 있다.
자비에의 마가렛트 뒤몽(까뜨린느 프로)이 플로렌스 젠킨스나 〈너목보〉의 출연자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자신이 음치임을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다. 마가렛트는 아무도 자신의 음악세계를 이해해주지 않는다며 선생도 없이 홀로 음악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돈을 대는 음악클럽의 비공개 자선공연에서만 노래했는데, 어느 날 한 공연에 젊은 기자 둘이 잠입해서 쓴 칭송 기사에 고무되어 세상에 직접 나서기로 한다. 이 음치여인의 결심은 그녀를 아는 모두에게 비상사태였다.
그들이 본 것과 보지 못한 것
마가렛트가 음치인 것이야 그녀를 제외한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인데, 그녀에게 무슨 비밀이 더 있을 수 있을까? 진짜 비밀은 ‘눈’에 있다. 〈마가렛트 여사의 숨길 수 없는 비밀〉에는 큰 눈들이 자주 등장한다. 마가렛트 여사의 집 정원에 있는 커다란 안구 조형물을 보여주면서 시작한 영화는 그녀의 충성스러운 집사 마델보스(데니스 음푼가)의 눈으로 끝이 난다. 흑인인 마델보스의 눈은 검은 얼굴 덕에 더 크고 섬뜩해 보인다. 마가렛트의 순수함을 이용하려 접근했던 시인 키릴은 눈이 큰 얼굴을 그리는데, 키릴 자신은 외알 안경을 착용하고 있다.
그들이 그 큰 눈으로 보았던 것은 무엇일까? 적어도 마가렛트가 보는 것과 같지는 않았다. 마가렛트 여사는 벽의 그림 속에 뚫린 구멍으로 공연을 지켜보다가 남편이 도착하면 등장해서 노래를 한다. 대극장에서 열린 마지막 공연에서도 그랬다. 카메라는 이때 처음으로 마가렛트의 눈을 클로즈업한다. 기자 루시앙이 외로움이 가득한 눈이라고 평했던 그 눈 말이다.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남편인 조르쥬 뒤몽 남작(앙드레 마르콩)만을 보고 있었다.
마가렛트의 노래가 오롯이 자아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은 내심 아쉽다. 무정부주의자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소극장 공연에서 보였던 그녀의 패기와 처음부터 끝까지 남편에게 고정된 그녀의 순정은 어떻게 화해할 수 있을까. 그녀는 반전영상이 투영되는 흰 영사막을 몸에 두르고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를 엉망진창으로 불렀는데, 음악클럽 회원들이 국가를 모독했다고 비난하자 이렇게 말한다.
“우리 국가는 자유를 찬양하는 노래예요. 자유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를 자유가 내게는 없단 말인가요?”
숨길 수 없는 비밀은 차라리 사랑스럽다
마가렛트 여사의 ‘자유’와 ‘여성의 자아’라는 주제를 애정결핍의 문제로 돌려 희석시키면서 영화는 그녀의 우스꽝스러움과 허영에 면죄부를 부여한다. 돈 많은 귀족부인을 약자로 만든 것이다. 웃음에 관한 가장 오래된 통찰로서, 플라톤은 우스꽝스러움이 무지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자신의 재산이나 아름다움, 현명함이나 유능함과 관련하여 무지할 때 우스꽝스럽다. 단, 그는 모든 무지가 다 우스꽝스러운 것은 아니라고 덧붙인다. 무지한 사람이나 몰지각한 사람도 단지 힘이 없을 때만 우스꽝스럽다. “왜냐하면, 힘이 있는 사람들의 무지는 가증스럽고 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가렛트 여사의 숨길 수 없는 비밀〉은 겉보기와 달리 자신이 음치인줄도 모르고 ‘오페라 공주 놀이’를 하는 귀부인을 풍자하고 조롱하기 위한 영화는 아니다. 그러기엔 그녀가 너무 사랑스럽다. 무엇보다 그녀는 감출 것이 없고 또 감출 수도 없어서(프로이트 식으로 말하자면, 어떤 억압으로부터도 자유로워서) 천진난만하다. 따라서 풍자되고 폭로되는 것은 오히려 마가렛트의 허영을 눈감아주고 적절한 수준으로 통제하면서 그녀를 이용하거나 뭐라도 뜯어내보려고 붙어있는 심복들과 사기꾼들, 그리고 남편이다.
사람들은 그녀에게서 제각기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보았다. 돈과 예술과 혁명 같은 것들. 그리고 대개는 마가렛트의 순수함에 감동해서 결국 그녀의 조력자가 되어 나서게 된다. 하지만 조르쥬는 적어도 아내에 관한 한 그 누구보다 ‘무지’해서, 답답해하며 자꾸 묻는다. “도대체 왜?! 왜 꼭 노래를 하려는 거야?” 수년 째 아내의 절친과 외도중인 그는 마가렛트 만큼 힘이 없지 않아, 우스꽝스럽지도 못하다. 이런 조르쥬에게 영화는 그 흔한 ‘눈’ 하나 달아주지 않았다. 대신 그 모든 큰 눈들을 압도하는 하나의 보이지 않는 눈(시선)이 그를 집요하게 따라다닌다. 그 시선은 조르쥬가 아내를 피해 잠시 휴식을 취하거나 아내를 속이기 위해 차를 일부러 고장 내고 멈춰선 나무 밑 십자가를 매번 응시한다. 위선과 비겁함과 무관심을 폭로하는, 따라서 결코 무지하지 않은 누군가의 시선으로, 조르쥬에게는 일종의 형벌이다.
여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 있게 충실하고 ‘회심’하지도 않은 듯한 하나의 시선이 더 있다. 내러티브를 마감하는 마델보스의 눈. 마가렛트의 허황된 삶과 환상이 그에게는 하나의 ‘작품’이었으니, 마델보스는 어쩌면 예술의 외양을 하고 있어 가장 부드럽지만 가장 고집스럽고 탐욕스러우면서 때로 폭력적이기까지 한 영화의 시선과 그 양면성에 대한 감독 자신의 성찰이 아닐까. 이 영화, 묘하게 윤리적이다.
최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