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서의 헤셋 (חסד, ‘인자’, ‘인애’) 이해.hwp
Ⅰ. 서론
A. 연구동기와 목적
<헤셋>(חסד, ‘인자’, ‘인애’)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중심 개념 가운데 하나이다. <헤셋>은 크게 하나님이 사람을 향해 변함없는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헤셋>과 사람이 하나님과 사람을 향해 마땅히 행해야 될 도리를 다하는 사람의 <헤셋>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히브리어 성경의 <헤셋>이 국내외의 여러 번역 성서에서는 문맥에 따라 여러 가지로 번역되어 있다. 이는 <헤셋>이 아주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용어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실례이다.
이처럼 다양한 의미를 지닌 <헤셋>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를 규명하는 일은 하나님의 <헤셋>을 경험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사람의 <헤셋>을 실천해야 할 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지극히 중요한 학문적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본 논문은 이전에 미가 6장 1-8절을 주석하면서 미가 6장 8절의 주요 용어 중 하나인 <헤셋>(חסד, ‘인자’, ‘인애’)에 대해 관심을 두게 된 이후, <헤셋>에 대해 보다 더 깊이 연구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필자는 미가서에 나타나는 사람의 <헤셋>(미 6:8)과 하나님의 <헤셋>(미 7:18, 20)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하나님․<헤셋>․사람 사이에 어떠한 관계가 성립되는지, 이러한 <헤셋>의 의미가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B. 연구범위와 방법
구약성경에서 <헤셋>이라는 명사는 시편 127 번, 사무엘상, 하 16 번, 역대기상, 하 15 번, 창세기 11 번, 잠언 10 번, 이사야 8 번, 예레미야 6 번, 호세아 6 번, 열왕기상 5 번, 느헤미야 5 번, 출애굽기 4 번, 민수기 3 번, 신명기 3 번, 여호수아 3 번, 룻기 3 번, 에스라 3 번, 욥기 3 번, 사사기 2 번, 에스더 2 번, 예레미야 애가 2 번, 다니엘 2 번, 요엘 1 번, 요나 2 번, 미가 3 번, 그리고 스가랴 1 번 나타난다. 특히 구약성경에서 전체 245 번에 걸쳐 나오는 <헤셋>이 예언서에는 31 번 나온다. 그중 12 소예언서에는 13 번 나오는데 미가에는 3 번 나온다.
본 논문은 8세기 문서 예언서 중 하나인 미가서에 국한하여 <헤셋>이 나타나는 본문을 연구하려 한다. 미가서 전체에 <헤셋>은 세 번에 걸쳐, 한 번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사람의 <헤셋>으로(미 6:8), 두 번은 사람을 향해 변함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헤셋>으로 나타난다(미 7:18, 20). 먼저 사람의 <헤셋>이 나오는 구절이 미가 6장 8절이기에 미가 6장 1-8절을 한 본문 범위로 정하였으며, 하나님의 <헤셋>이 나오는 구절이 미가 7장 18, 20절이기에 미가 7장 14-20절을 한 본문 범위로 정하였다. 특별히 미가 6-7장은 사람의 <헤셋>과 하나님의 <헤셋>이 함께 나옴으로 사람의 <헤셋>과 하나님의 <헤셋>을 통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본문이기도 하다.
본 논문이 취하는 연구 방법은 수사 비평 방법이다. 수사 비평은 최종 본문 형태를 통해 말하려는 최종 본문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한 유익한 방법 중 하나이다. 필자는 수사 비평 방법 중 본문의 구조와 짜임새(구성의 예술)를 규명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Ⅱ장에서는 본 논문이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는 미가서 연구사와 <헤셋> 연구사를 살펴보고, Ⅲ장에서는 <헤셋>의 사전적 의미, 여러 번역서들의 다양한 번역, 하나님의 <헤셋>과 사람의 <헤셋>의 두 용례를 살펴보고자 한다.
Ⅳ장과 Ⅴ장은 본 논문의 본론이라 할 수 있는데, 먼저 Ⅳ장에서는 Ⅰ. B.에서 언급한 연구 대상 본문들을 맨 먼저 사역하고, 그 다음에 본문비평에 관련된 내용과 사역 풀이를 하였으며, 이어서 본문 범위 설정과 구조 및 단락별 풀이를 하고자 한다.
그리고 Ⅴ장에서는 Ⅳ장의 연구 결과를 근거로 하여, <헤셋>이 나타나는 본문의 분포상황과 신학적 의미를 정리한 후, 미가서에 나타난 하나님․<헤셋>․사람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Ⅵ장에서는 본 논문의 연구 결과를 정리하고, <헤셋>의 의미가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본 연구가 지니는 한계와 과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Ⅱ. 연구사
A. 미가서 연구사
미가서의 비평적 문제들은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주목받지 못했다. 에발트(H. Ewald)의 연구로부터 미가서의 비평적 견해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는 미가가 “그 자체로 완벽하고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다”고 하였으나, 표제만큼은 후기의 편집자에 의해서 추가되었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나중에 에발트는 미가 6-7장이 다른 예언자에게 속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것들은 므낫세 시대에 존재한 것으로 미가 1-5장과 완전히 다른 언어와 표현 기술을 지닌다고 하였다. 힐러스는 이 두 가지 지적사항에 대한 세부적인 증거를 에발트가 제시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1878년 벨하우젠(J. Wellhausen)은 미가 7장 7-20절과 미가 7장 1-6절의 역사적 상황이 각각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는 미가 7장 7-20절이 이사야 40-66장과 많은 공통점이 있는 것으로 보아 미가 7장 1-6절보다 적어도 한 세기 후의 말씀일 것이라고 한다.
미가서의 비평 연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은 슈타데(B. Stade)이다. 그는 현존하는 미가서가 바벨론 포로 후기에 완성되었을 것으로 가정하면서, 에발트의 견해들을 받아들이고는 그를 넘어서서 연구하였다. 슈타데는 현존하는 미가서의 말씀들 가운데 어느 것이 본래 미가의 말씀이고 어느 것이 미가의 본래의 말씀과 거리가 있는지를 연구하였다. 그는 미가 2장 12-13절은 미가 1-3장의 분명한 윤곽을 가로막고 다른 장들처럼 이사야서와 잘 들어맞지 않는다고 하여 미가 2장 12-13절을 뺀 나머지 미가 1-3장이 미가에게 속한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미가 4-5장의 구원예언들은 재난예언을 말하는 미가 1-3장의 말씀들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그는 예레미야 26장에 나타난 미가 예언자는 심판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였지 구원 예언을 선포한 예언자가 아니었음을 밝힌다(미 3:12). 그렇지만 미가 4-5장이 정경 형성과정에서 미가서의 자리를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 첨가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리하여 미가서에 대한 문헌 비평은 슈타데와 에발트에 의해 연구된 범위 내에서 움직이려는 경향이 있었다.
1924년에 헤르만 궁켈은 1903년 슈타데에 의해 선행되었던 한 관점 즉, 미가 7장 7-20절이 예언적 예전(prophetic liturgy)임을 증명함으로 미가 비평에 크게 기여하였다.
1960년대, 1970년대 들어서 미가서의 편집 비평이 활발히 진행되어 현존하는 미가서가 나오게 된 편집과정을 밝히는데 수고하였으나 의견의 일치는 보이지 는 못했다.
미가서를 편집비평 방법으로 연구한 대표적인 학자인 볼프(H.W.Wolff)는 미가서를 핵심(core)이 되는 미가의 예언에 수세기에 걸쳐 여러 가지 말이 덧붙여 생긴 책으로 간주한다. 볼프는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쳤을 것으로 본다. 미가의 핵심이 되는 미가의 예언(1:6, 7후-13전; 14-16; 2:1-4, 6-11; 3:1-12)에 제일 먼저 신명기 주석이 첨가 되었을 것이다(1:5, 7a, 13b, 1:3-4). 또한 미가 4-5장의 희망에 차 있는 예언은 주전 6세기 포로후기 시대의 예언자들로부터 나온다. 편집과정의 마지막 단계에서 1장 2절의 “들으라 모든 너희 백성들아”가 앞에 덧붙여졌을 것이고, 미가서의 이러한 모습은 온 예루살렘에서 탄식 의례들이 있었던 포로후기 운동을 반영한다고 이해한다. 이후 사회 비판 예언들이 첨가되고(6:2-7:7), 마침내 예전적 결말은 예배에서 사용하기에 적합하도록 첨가되었다(7:8-20).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미가서는 대부분 문헌비평, 양식비평, 편집비평 의 방법으로 이루어져 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최종본문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우택주는 미가서의 최근 연구 경향을 다섯 가지로 나눈다. 첫째, 재난예언과 구원예언의 병렬을 편집의 증거로 보려는 전통적 방식이다. 둘째, 역사 비평에 사회학적 관점을 접목시켜 접근하려는 방식이다. 셋째, 재난예언과 구원예언의 병렬을 각각의 상황 변화에 따라 미가가 예언한 것으로 보는 방식이다. 넷째, 역사 비평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본문의 통일성을 근거로 문학적인 접근을 통해 메시지를 얻으려는 연구이다. 마지막으로, 최종 본문의 형태 속에 나타나는 일관된 신학사상인 야웨의 정의와 긍휼을 예증하려는 시도이다.
B. <헤셋> 연구사
<헤셋>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 개념이기에 이러한 관계 속에서는 <헤셋>을 베푸는 자와 받는 자가 나타나게 되는데, <헤셋>을 베푸는 자는 어떠한 이유와 근거에서 <헤셋>을 베푸는 것일까? 이 점에 대해 학자들은 두 가지의 상반된 견해를 주장한다. 하나는 언약 관계에서 나타나는 헌신으로 이미 존재하는 언약에 근거하여 <헤셋>을 행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헤셋>이 하나님의 가장 탁월한 속성이기에 그 본질을 사랑과 자비로 이해한다는 것인데, 이는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의무를 넘어서서 <헤셋>이 행해진다는 것이다.
본 <헤셋>의 연구사는 이 두 견해를 중심으로 학자들 사이에서 진행된 연구의 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헤셋>에 관한 연구는 글뤽(N. Gluck)에게서 시작되었다. 그는 <헤셋>을 언약에 근거한 헌신으로 이해한 대표적인 학자이다. 그는 성서에 나타난 <헤셋>의 용례와 의미에 관해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설명하였는데, 첫째는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람의 행위로서의 <헤셋>, 둘째는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행위로서의 <헤셋>, 셋째는 신학적 의미라고도 불리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행위의 <헤셋>이다. 글뤽은 개인들 사이의 <헤셋>을 “상호 관계 속에서 권리와 의무의 조화를 이루는 행위”라 하고,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인간의 <헤셋> 또한 호혜적이며 의무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한다. 그는 하나님의 <헤셋>은 기본적으로 자비가 아니라, “계약 의무에 대한 충성”이며, 이스라엘 또한 나타내 보여야만 하는 충성이라 한다. 달리 말하면 <헤셋>은 언약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것을 의미하고, <헤셋>의 기초는 언약이기에 언약 없는 <헤셋>은 있을 수 없다고 한다.
보웬(B. M. Bowen)은 인간의 속성으로서 <헤셋>을 고찰하기 전, 먼저 하나님의 속성으로서 <헤셋>에 관하여 고찰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그것만이 글뤽의 연구에서 발견된 결함을 메울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글뤽이 <헤셋>이 포함된 147구절에 제한하여 연구를 행했던 것을 235구절로 확대하여 상세한 주의를 기울여 연구하였다.
보웬에게 있어 ‘상호적(reciprocal)’이란 말은 <헤셋>의 의미를 이해함에 있어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는 육경, 예언문학, 시편에 나타나는 <헤셋>의 용례를 통해 <헤셋>의 가장 적절한 번역은 ‘충성스러운 친절(loyal kindness)’, ‘인자(loving kindness)’라 한다. 그는 예언문학을 통해 하나님의 속성인 <헤셋>과 인간의 속성인 <헤셋>을 구분하여 설명한다.
하나님의 속성인 <헤셋>은 첫째, 이스라엘이 사회관계에서 의무의 일부를 행하는 것과 함께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공동의무이다. 둘째, 야웨께서 용서 하 시고 괴로워하는 참회자를 구속하시는 행위의 원인이다(agent). 셋째, 야웨께서 사 랑하시기 때문에 나타난다. 넷째, 온 세상 안에 나타난다. 인간의 속성인 <헤셋> 은 첫째, 모든 종교적인 사람에게 책임이 주어져 있는 의무이다. 둘째, 언약과 가족 관계에 의해 한정되지 않는다.
하지만 글뤽이 강조한 ‘권리와 의무’는 준법적인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많은 의문을 갖게 되었고 대부분 수용되지 않았다. 글뤽의 <헤셋>에 대한 견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이는 쉬퇴베(H. J. Stobe)였다. 그는 <헤셋>이 이미 존재하는 공동체에 상응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가능케 하는 것이라 하였고, 세속적인 관계속에서 <헤셋>을 행하는 동기는 언약 의무 실천이 아니라 다른 인간을 너그럽게 대하려는 마음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헤셋>을 자발적이며 무조건적인 친절성으로 이해하고 있다. 쉬퇴베의 <헤셋>에 대한 이해는 언약을 위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헤셋>을 이해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출 34장). 글뤽은 <헤셋>을 의무에 따라 주고 권리에 따라 받는다고 주장한다. 그의 견해대로 언약을 파기한 이스라엘을 볼 것 같으면 이스라엘은 하나님께로부터 <헤셋>을 받을 권리가 없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헤셋>을 행할 의무가 없어진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무조건적인 친절과 관용으로 그들에게 당신의 <헤셋>을 베푸신다.
사켄펠트(K. D. Sakenfeld)는 글뤽과 쉬테베의 견해를 종합하는 주장을 한다. 그는 이들이 주장하는 두 요소가 <헤셋>의 개념 속에 다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 그래서 <헤셋>은 상호간의 의무 책임과 무조건적인 관용과 은총의 성격이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사켄펠트는 포로 전 시대로부터 본문들 속에 나타난 모든 세속적 용례들 속에서 <헤셋>의 주요한 특성들을 아래와 같이 나열한다.
첫째, <헤셋>은 결코 특별한 친절이 아닌 항상 본질적인 필요에 대한 공급이다. 둘 째, <헤셋>은 환경적으로 보다 나은 편에 있는 자에 의해 환경적으로 보다 열악한 편에 있는 이를 위해 수행한 행동이다. 셋째, 더 능력 있는 형편에 있기 때문에 보다 위에 있는 자는 <헤셋>의 행위를 수행하지 않는 것에 항상 자유롭다. 넷째, 잠재 적인 행위자는 보다 연약한 상대자와 관계하기 때문에 <헤셋>안에서 행해야만 하는 의무를 인식하고 있다. 다섯째, 보다 우수한 상대자는 보통 궁핍 가운데 있는 상대자 에게 도움을 줌으로 이용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원천이다.
클락은 사켄펠트가 <헤셋> 연구에 공헌한 바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서술한다.
첫째, <헤셋>이 적절한 관계 유형은 표면적인 언약 관계에 제한되지 않는다. 둘째, <헤셋>은 법적이 아니라 윤리적 의무를 지닌 환경적으로 우수한 편에 의해 환경적 으로 열악한 관계자를 위한 행동이다. 행동을 수행하지 않는 것에 자유로울지라도 그렇게 행한다. 셋째, <헤셋>의 모든 용례들에서 대단히 융통성이 있는 이 용어의 내용을 전달할 하나의 표현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김정우는 <헤셋>에는 언약에 대한 의무와 무조건적인 친절성이라는 양면성이 있기에 “언약관계 속에서 주어지는 신의, 충성이란 의의와, 약한 자에게 연민을 느끼며 의무의 범위를 넘어서 자발적으로 도우는 자비, 사랑, 후대라는 의의를” 함께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Ⅲ. <헤셋>의 다양한 의미
이 장에서는 구약에 나타난 <헤셋>의 다양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여러 히브리어 사전에서 <헤셋>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으며, 칠십인역을 비롯하여 KJV, RSV, 우리말 번역 성서에서 <헤셋>을 어떻게 번역하고 있는지 살펴본 후, <헤셋>을 행하는 주체자에 따라 하나님의 <헤셋>과 사람의 <헤셋>으로 나누어 서술하고자 한다.
A. 사전적 정의
<헤셋>이라는 명사는 중기 히브리어, 유대 아람어, 고전 시리아어, 만다어에서 발견되는 히브리어 낱말이지만 그것의 어원은 알 수 없다. 히브리어 <힛파엘> 미완료로 단지 두 번 나타나는 חסד의 어근은 명사〔형용사〕에서 유래한 것이 분명하다. 아라비아어 어근 <하차다> (“상호 부조를 위해 함께 단결하다”)에서 그 뿌리를 찾는 주장은 <차데>(צ)가 <사멕>(ס)으로 바뀔 수 있다는 가정 때문에 불확실하다. 게제니우스는 <헤셋>을 기본적으로 두 가지로 나누어 정의한다. 하나는 사랑, 은총, 총애, 호의라 하고 다른 하나는 사랑스러움, 아름다움이라 했다(사 40:6). 앞의 경우에 해당되는 부분을 게제니우스는 다시 세 부분으로 나눈다. 첫째는 사람들의 서로간의 사랑(호 4:1; 6:4, 6), 자비, 관용, 호의, 친절, 인애, 긍휼을 말한다(삼상 20:15; 삼하 16:17, 시 141:5, 욥 6:14). 둘째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베푸시는 사랑과 은총을 말한다(미 7:18; 시 5:8; 36:6; 48:10). 셋째는 하나님께 향한 사람의 사랑을 말한다(렘 2:2).
BDB에서는 <헤셋>을 기본적으로 선함(goodness), 친절(kindness)로 정의한 후, 더 세부적으로 사람의 <헤셋>과 하나님의 <헤셋>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사람의 <헤셋>은 네 가지로 구분하여 정의하는데 첫째, 친절한 행위들과 은혜를 행함으로서 사람을 향한 친절(kindness)을 말한다. 둘째, 특별히 신분이 낮고,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친절(kindness)을 말한다. 셋째, 하나님께 향한 사랑으로 이스라엘의 애정(affection), 경건(piety)을 의미한다. 넷째, 사랑스러운 모습(lovely appearance)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헤셋>은 자신의 피조물의 필요를 위해 친히 공급해 주심으로서의 친절(kindness), 인자(loving kindness)를 말한다. 하나님의 <헤셋>에 대한 설명을 다시 네 가지로 하는데 첫째, 인자(lovingkindness)는 특별히 대적들과 근심들로부터 구속, 죽음으로부터 생명 보존, 영적인 생명을 소생, 죄로부터 구속, 언약 지키심과 관계한다. 둘째, <헤셋>이 다른 하나님의 속성과 함께 나타난다(창 24:27; 시 25:10; 40:11, 12; 미 7:20; 시 26:3; 117:2). 셋째, 하나님의 <헤셋>이 ‘많은’(abundant), ‘범위에 있어 큰’(great in extent), ‘끊없는’(everlasting), ‘선한’(good) 특징이 있음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헤셋>의 복수형은 이스라엘을 향한 역사적인 인자하심의 표현들로서 자비들, 친절한 행위들을 들고 있다.
HALOT의 <헤셋> 항목에서는 맨 먼저 1. <헤셋>이 친척 사이, 친구 사이, 주인과 손님, 소유주와 종 사이의 공동의무(joint obligation)로서 친밀함(closeness), 연대성(solidarity), 충성(loyalty)이라는 기본 의미를 지닌다고 밝히면서 총괄적으로 서술하고, 그 다음으로는 2. 하나님의 백성이나 개인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관계를 표현하는 경우로 신실함(faithfulness), 선함(goodness), 은혜(graciousness)를 의미하는 <헤셋>을 다루고, 마지막으로 3. <헤셋>이 복수형으로 쓰이는 경우를 다루는데, 연대성으로 말미암은 개인적인 행동들로 사람의 선한 행동(느 13:14; 대하 32:32; 35:26), 하나님의 자비의 증거들(창 32:11; 사 63:7; 시 89:2; 애 3:22), 다윗에게 보여준 자비들(사 55:3; 대하 6:42)이 나온다. 또한 첫 경우는 다시 셋으로 나누어 a) <헤셋>이 다른 히브리 낱말과 함께 쓰이는 경우(<헤셋>과 <브릿>, <헤셋>과 <에멧>, <에무나>와 <헤셋>, <아사 헤셋>)를, b) <헤셋>이 여러 관계에 쓰임을, c) 이런 여러 관계 가운데서 나온 특수한 표현(<이쉬 헤셋>, <안셰 헤셋>, <말르케 헤셋>, <이쉬 하스도>)을, d) 공동체성으로부터 여러 다른 의미가 나오는 경우를 다룬다.
게제니우스 사전 <헤셋> 항목에서 셋째 뜻으로 소개한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사랑’을 뜻하는 <헤셋>의 보기로 맨 먼저 예레미야 2장 2절을 들고 있는데, 이 구절을 HALOT에서는 1.b)에서 보기로 든 여러 관계 가운데서 부부관계에 적용될 <헤셋>의 참고 구절로 제시한다. 게제니우스는 부부의 비유로 야웨와 이스라엘의 관계를 보고 있는 예레미야 2장 2절에서 비유의 실체 곧 야웨와 이스라엘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그렇게 분류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본문의 일차적 표현보다 해석의 결과를 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헤셋>에 대한 앞의 세 사전의 정의는 <헤셋>의 의미가 얼마나 다양한지를 짐작케 해 준다. 세 사전의 두드러진 차이 중 세 가지를 언급해 본다면 게제니우스가 <헤셋>을 사람들 사이의 사랑,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사랑, 하나님께 향한 사람의 사랑으로 구분한 반면, BDB는 사람의 <헤셋>과 하나님의 <헤셋>으로 나누었으며, 게제니우스의 세 번째 항목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사랑을 사람의 <헤셋>을 삽입시켰으며, HALOT은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헤셋>이라는 항목으로 따로 두지는 않았지만 게제니우스와 다른 <헤셋> 항목 해설 방식을 통해 하나님의 향한 사람의 <헤셋>을 보여주고 있다. 둘째, BDB가 <헤셋>의 의미를 선함(goodness), 친절(kindness)로 번역한 반면, HALOT은 <헤셋>을 공동의무(joint obligation)로서 친밀(closeness), 연대성(solidarity), 충성(loyalty)을 의미하고,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의 <헤셋>을 신실함(faithfulness), 선함(goodness), 은혜(graciousness)로 번역한다. 셋째, BDB는 하나님의 <헤셋>을 인자(loving kindness)로 번역할 때의 구체적인 정황들과 하나님의 <헤셋>의 속성에 대해 언급해 주고 있다.
B. <헤셋>의 다양한 번역
구약에 나타난 <헤셋>을 칠십인역, KJV, RSV, 우리말 번역 성서는 각각 어떻게 번역하고 있는지 살펴보겠다.
칠십인역은 <헤셋>을 일반적으로 <엘레오스>(213번), <엘레에모쉬네>(6번), 혹은 <엘레에모스>(2번), 더욱 <디카이오쉬네>(8번), <카리스>(2번), 그리고 <디카이오스>(사 57:1), <독사>(사 40:6), <엘피스>(역대하 35:26), <타키스>(잠 31:26 〔LXX v.25〕), <타 호시아>(사 55:3), <오이크티르모스>(렘 31:3 〔LXX38:3〕), <안티렘프토르>(시 109:12 〔LXX108:12〕), 그리고 <디카이오쉬네>와 <엘레오스>(출 34:7)로 번역한다.
KJV(1611)은 <헤셋>을 대체로 칠십인역의 <엘레오스>라는 규칙적인 번역의 제안에 따라 ‘자비’로 번역했지만 종종 ‘친절’(kindness) 혹은 ‘인자’(Loving Kindness)로 번역했다.
RSV는 <헤셋>을 번역함에 있어 특별히 네 가지 범주를 결정했다. 첫째, 사람 사이의 특별한 행위와 관련하여 ‘친절’(Kindness)을 사용한다. 둘째,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향한 지속적인 행위와 관련하여서는 ‘충성’(loyally)를 사용한다. 셋째, 개인들과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행동과 관련하여 ‘변함없는 사랑’(steadfast love) 혹은 사랑(love)을 사용한다. 넷째, 상황에 따라 이스라엘과 관련하여 혹은 개인들이 하나님과 관계하여 사랑(love), 헌신(devotion), 신실함(faithfulness), 충성(loyalty)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우리말 개역한글에서는 <헤셋>를 문맥에 따라 다양하게 번역하고 있는데 ‘인자’(창 19:19 등), ‘인자하심’(대상 16:34 등), ‘인자함’(시 21:7[8] 등), ‘인자한 말씀’(시 143:8), ‘인애’(창 47:29 등), ‘자비’(대상 17:13 등), ‘자비하심’(대상 16:41 등), ‘자비함’(사 57:1), ‘긍휼’(느 1:5 등), ‘긍휼 베푸심’(욥 37:13), ‘은혜’(창 20:13 등), ‘은총’(창 32:10[11] 등), ‘선대’(수 2:12 등), ‘후대’(창 21:23 등), ‘선한 일’(대하 32:32 등), ‘불쌍’(욥 10:16), ‘우의’(렘 2:2), ‘아름다움’(사 40:6), ‘욕’(잠 14:34)으로 번역했다.
최근에 나온 가톨릭 공용번역본에서는 <헤셋>을 ‘은혜’(창 19:19 등), ‘자애’(대상 16:34 등), ‘신의’(창 47:29 등), ‘호의’(수 2:12 등), ‘충직한 행실’(대하 32:32 등), ‘순정’(렘 2:2), ‘영화’(사 40:6), ‘치욕’(잠 14:34)으로 번역했다.
<헤셋>은 위에서 살펴본 번역서들을 통해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헤셋>의 축어적 표현을 찾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더욱 이 <헤셋>의 번역은 누가 누구에게 행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이제 <헤셋>를 행하는 주체에 따라 하나님의 <헤셋>과 사람의 <헤셋>으로 구분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C. <헤셋>의 두 가지 용례
1. 하나님의 <헤셋>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헤셋>은 조건적이면서 동시에 무조건적인 양면성을 띤다. 시내산 언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헤셋>은 이스라엘에게 베풀어지는 것이 조건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십계명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 <헤셋>을 천대까지 베푸시겠지만 자신을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삼, 사대까지 심판을 내리시겠다 말씀하신다(출 20:5후-6 = 신 5:9후-10).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헤셋>을 받는 여부가 자신들의 하나님께 대한 태도 여부에 달려 있음을 말해준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헤셋>을 지속적으로 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준수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준수하는 일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로 말미암아 그들은 하나님의 <헤셋>의 철회됨을 경험해야만 했다(렘 16:5).
이렇듯 조건적이었던 하나님의 <헤셋>은 이스라엘의 배교 이후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용서와 관련하여 나타난다. 하나님의 <헤셋>이 용서와 관련하여 나타난 곳은 십계명의 조건적 설명 이후 이스라엘의 금송아지 배교의 맥락에서이다(출 32-34).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헤셋>)와 진실이 많으며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는” 분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출 34:6후-7). 이는 하나님께서 배교한 백성에 대해 관계를 끝내는 분이 아니라 용서의 하나님이심을 계시해 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헤셋>이 용서와 관계됨으로 성서 기자들은 자주 하나님의 <헤셋>을 용서와 관련하여 사용한다(느 9:17후; 시 86:15; 103:8; 욘 4:2). 사람의 <헤셋> 용례에서는 결코 용서와 관련되어 <헤셋>이 사용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의 <헤셋>이 사람의 <헤셋>의 범위를 넘어서고 있음을 말해준다.
하나님의 <헤셋>은 시편에 자주 언급된다. <헤셋>은 자주 적들에 대한 구원에 대한 탄원(시 17:7; 143:12; 32:10-11)과 구원에 대한 감사와 관련되어 나타난다(시 138:2). 구원에 대한 관련이 있는 청원들은 곤란을 피할 수 있도록 전반적인 하나님의 보호를 위한 청원들이다(시 40:11), 감옥에 있는 요셉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라는 이야기 속에서 증명된다(창 39:21). 마침내, 바로 언약전승들 대로 공동체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를 하나님의 <헤셋>과 관련시킨다. 또한 개인 탄원자들의 용서도 역시 <헤셋>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시킨다(시 6:1, 4-5; 25:6-7; 51:1). 공동체 만큼 개인들에게 공동적으로 하나님 인간관계를 지속하는 <헤셋>의 한 행위로서의 하나님의 용서는 삶 바로 자체에 기초이고 다른 모든 <헤셋>의 징후들을 뒷받침한다.
하나님의 <헤셋>은 여러 특성을 지닌다. 첫째, 하나님의 <헤셋>은 풍부하다(출 34:6; 민 14:18; 느 9:17; 욜 2:13; 욘 4:2; 시 86:5, 15; 103:8). 둘째, 하나님의 <헤셋>은 광대하다(출 20:6; 34:7; 민 14:19; 신 5:10; 7:9; 시 33:5; 57:10〔11〕; 103:11; 119:64; 145:8; 렘 32:18). 셋째, 하나님의 <헤셋>은 영원하다(대상 16:34, 41; 대하 5:13, 7:3, 6, 20:21; 스 3:11; 사54:8; 렘 33:11; 시 52:3; 100:5; 103:17; 106:1; 107:1; 118:1, 2, 3, 4, 29; 136:1-26, 138:3). 넷째, 하나님의 <헤셋>은 선하시다(시 63:4; 69:17; 109:21). 이러한 하나님의 <헤셋>의 특성들이 인간의 구원과 관계될 때 에는 더욱 그 가치가 드러난다.
2. 사람의 <헤셋>
사람의 <헤셋>은 연고가 있는 사람이 다른 대상을 위해 행하고 요구 받는 것이라는 일반적인 특징을 지닌다. 사람의 <헤셋>은 크게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헤셋>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웃에 대한 <헤셋>은 가족 가운데서 행하는 <헤셋>과 사회적으로 부차적인 관계들 가운데 행해지는 <헤셋>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사람의 하나님께 대한 <헤셋>은 예레미야 2장 2절에 나타난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네 소년의 때의 우의(<헤셋>)와 네 결혼 때의 사랑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광야에서 어떻게 나를 쫓았음을 내가 너를 위하여 기억하노라.” 이스라엘은 소년의 때 즉, 이스라엘의 역사 초기에 야웨 하나님을 잘 좇아간 소년 때의 우의(<헤셋>)을 야웨께서 기억하신다고 말씀하신다.
가족 사이에 행하는 <헤셋>에 해당되는 것은 사라와 그의 남편 아브라함(창 20:13), 아브라함과 그의 친척 브두엘과 라반(창 24:49), 야곱과 그의 아들 요셉(창 47:29), 그리고 룻과 그의 시어머니 나오미, 나오미의 가족들(룻 3:10)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이야기로부터 나타나는 <헤셋>의 공통적인 특성은 첫째, 다른 사람에 대한 도움은 필수적이다. 이는 궁핍한 사람은 결코 <헤셋>을 수행할 수 없음을 말해준다. 둘째, 도움 자체가 필수적이다. 이는 가난한 사람의 상황은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그 곤경에서 구원받을 수 없음을 말해 준다. 셋째, 안정된 생활환경은 한 사람이 도움을 제공할 수 있도록 한다. 넷째, 궁핍 가운데 있는 사람은 도울 위치에 있는 사람의 결정에 대해 통제하지 못하며 도움을 제공하는 것의 거부에 대해 법적인 강제력을 행사할 수 없다.
사회적으로 부차적인 관계들 가운데 행해진 <헤셋>들로는 아브라함과 그랄의 아비멜렉(창 21:23), 요셉과 술 따르는 사람(창 40:14), 라합과 여호수아가 보낸 정탐군(수 2:12-14), 아브넬과 이스바알(삼하 3:8), 다윗과 암몬왕 하눈(삼하 10:1-2a = 역대상 19:1-2), 다윗과 후새(삼하 16:17), 아합과 시리아 통치자 벤하닷(왕상 20:31)을 들 수 있다. 이 이야기들 중 요셉, 라합의 이야기는 자신이 베푼 <헤셋>에 대해 <헤셋>으로 응답해 줄 것을 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를 묘사해 주는데 <헤셋> 용어의 용례가 집중되어 나타난다(삼상 20:8, 14-15; 삼하 9:1, 3, 7). 이 두 사람의 관계는 가족 관계임과 동시에 사회적으로 부차적인 관계에 속한다. 요나단은 다윗에게 사울의 악한 음모를 그에게 알려줌으로서 <헤셋>를 행했다. 이러한 요나단의 <헤셋>에 대해 다윗은 요나단의 사후 망명 생활로부터 돌아와서는 요나단의 아들 므립바알을 왕궁으로 데려와서 살게 함으로서 <헤셋>으로 응답했다.
모든 <헤셋>의 용례들은 특별한 상황 가운데 환경적으로 보다 능력 있는 사람에 의해 행해지고 환경적으로 열악한 사람에 의해 요청되고 받게 된다는 것을 발견한다. <헤셋>을 주는 자와 받는 자는 항상 고정적이지 않고 항상 당면한 환경들에 의해 결정된다.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 사울과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의 관계(삼하 2:5), 아브라함과 사회적으로 종속된 아내 사라와의 관계, 다윗 왕과 정치적으로 종속된 고문 후새와의 관계가 이를 잘 반영해 준다.
Ⅳ. <헤셋>이 나타나는 미가서 본문 이해
A. 미가 6장 1-8절 이해
1. 본문 사역
1 너희는 잘(A)들으라,(1)야웨께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을(1) 1전 “너는 일어나 그 산들 앞에서 변론하라!(B) 1후상 그 언덕들이 네 소리를 듣게 하라!(C)” 1후하 2 들으라, 산들아, 야웨의 변론을! 2전상
또(2)귀를 기울여라,(2)땅의 기초들아! 2전하 왜냐하면 야웨께 자기 백성과 함께 벌이는 변론이 있으며(D) 2후상 이스라엘을 향해(E)그분이 논쟁하려 하시기 때문이다. 2후하 3 내 백성아, 무슨 잘못을(F)내가 네게 저질렀느냐?(3) 3전상 무엇으로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3전하 너는 내게 증언하라!(G) 3후 4 참으로(H)내가 너를 애굽 땅으로부터 인도하였고 4전상 종들의 집으로부터 값을 치루고 해방하였으며(I) 4전하 네 앞에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보냈느니라. 4후 5 내 백성아(4)너는 잘(J) 기억하라,(K) 5전상 무슨 계략을(L)(5)모압 왕(5)발락이 꾸몄는지, 5전중 무엇이라 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답했는지, 5전하 그 싯딤에서 그 길갈까지! 5후상 (6)야웨의 의로운 행위들을(6)알도록 5후하 6 무엇을 가지고 제가 야웨께 나아가며 6전상 높이 계신 하나님께 예배 할까요? 6전하 제가 번제물로 일년 된 수송아지들을(M)가지고 야웨 앞에(N)나아갈까요? 6후 7 야웨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7전상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기름 강을. 7전하 제가 드릴까요, 제 허물을 위해 제 맏아들을, 7후상 제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제 몸의 열매를? 7후하 8 야웨께서(O)네게 일러주셨다. 사람아, 무엇이 선한지, 8전 또 무엇을 야웨께서 네게 요구하시는지, 8후상 정의를 행하기와 인자(<인자>)(P)사랑하기와 8후중 지혜롭게(Q)네 하나님과 함께 걷기 말고.(R) 8후하
2. 본문 비평
(1) 칠십인역은 <로곤 퀴리우 퀴리오스 에이펜>(‘주님의 말씀을 주님이 말씀하셨다’)으로 되어 있다. 마소라 본문의 <아도나이>(‘야웨’)를 칠십인역은 <퀴리오스>(‘주’)로 번역한 것으로 볼 수 있고, 또한 칠십인역은 마소라 본문의 독립관계 대명사 목적격의 <에트 아쉐르>(‘~것을’)의 자리에 <로곤 퀴리온>(‘주님의 말씀을’)을 설명해 줌으로 백성이 들어야 될 것이 주님의 말씀인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그렇지만 굳이 그리해야 할 까닭이 없으므로, 마소라 본문을 그대로 따랐다.
(2) 마소라 본문의 <워하에타님>(‘그리고 늘 흐르는 물로 가득 채워진 것들’, ‘그리고 영원한 것들’)을 BHS 12 작은 예언서들을 엮어낸 엘리거(K. Elliger)의 제안을 따라 <워하아지누>(“그리고 너희는 귀를 기울여라!”)로 읽는다.
(3) 칠십인역은 <헤 티 엘류페싸 세>(‘혹은 무엇으로 너에게 슬프게 하였느냐?)가 첨가되어 있다. 칠십인역은 본 절이 마소라 본문에서 무엇을 말씀하려는지 분명히 알려준다. 하지만 마소라 본문이 더욱 ?은 읽기에 해당함으로 마소라 본문 그대로 따른다.
(4) 엘리거는 <암미>(‘내 백성’)를 4절 끝에 붙여서 (임모)(‘그와 함께’)로 읽기를 제안한다. 하지만 <암미>가 5절 맨 앞에 위치함으로 명령을 받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게 해 주고, 야웨의 심정을 읽게 해 줌으로 마소라 본문을 따랐다.
(5) 엘리거는 ‘모압 왕’이 첨가가 아닌가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발락>이 누구인지를 설명해 주는 확실한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으므로 마소라 본문을 따라 그대로 두었다.
(6) 엘리거는 ‘야웨의 의로운 행위들’을 <치드코타이>(‘나의 의로운 행위들’)로 고쳐 읽자고 제안한다. 논리적으로는 ‘나의 의로운 행위들’로 하는 것이 자연스럽겠지만, 예언자가 하는 말로 이해할 것 같으면 별 문제가 없으므로 마소라 본문을 따랐다.
3. 사역 풀이
(A) <나>(‘잘’)는 명령형 <쉬므우>(‘너희는 들어라’)에 덧붙어 강조 혹은 간청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B) 변론하라!(<립>)는 변호한다는 의미로서가 아니라 사리를 밝혀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을 의미한다. <립>을 ‘소송 내용을 밝혀라’(NIV, NRSV, TNK, 표준새번역, 가톨릭 공용번역본), ‘변명해 보아라’(공동번역개정)로도 번역한다. 필자는 개역개정의 번역을 따랐다.
(C) <워티숴마으나>(‘그것들이 듣게 하라’)는 칼 지시법(Jussive) 3인칭 여성 복수이다. 지시법은 미완료 형태를 취하면서 2인칭이나 3인칭에 대해 자신의 소망을 표현하는 방식이기에 본 구절의 <학그바옷>(‘그 언덕들’)가 3인칭 여성 복수 그 언덕들이 네 소리를 듣게 하라!로 사역하였다. <티숴마으나>에 붙은 접속사 <워>(‘그리고’)는 흐름상 어색한 느낌을 줄 수가 있어 생략하였다.
(D) <립 라도나이 임암모>(‘야웨께 자기 백성을 향해 벌이는 변론이 있으며’)는 명사 문장으로 하였다. <임>은 보통 ‘~ 함께’를 의미한다. 하지만 ‘~ 함께’로 사역할 경우 변론의 대상이 되어야 할 자기 백성이 오히려 동반자로 오해할 소지가 있어 ‘~ 향해’로 사역하였다(NIV, TNK, 표준새번역).
(E) <임 이스라엘>(‘이스라엘을 향해’)도 앞에 것과 같은 의도에서 <임>을 ‘~ 향해’로 사역하였다.
(F) <메아쉬티레카>는 문자적으로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느냐’이다(개역개정, 표준새번역개정, 공동번역개정, NIV, NRSV). 하지만 글의 흐름상 ‘무엇을’이란 말 속에 ‘무슨 잘못을’이란 의미가 담겨져 있기에 사역에 포함시켰다(TNK).
(G) <아네>는 법적 소송과 관련되었기에 ‘대답해 보아라’(표준새번역개정, 공동번역개정, NIV, NRSV)보다 더 적합한 번역으로 ‘너는 증언하라’를 택했다(개역개정, TNK).
(H) <키>(‘참으로’)를 접속사로 보기 보다는 강조를 나타내는 부사(‘참으로’)로 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I) <페디티카>(‘내가 너를 값을 치루고 해방하였으며’)는 붙은 인칭대명사(‘내가 너를’)는 글의 흐름으로 볼 때 <헤엘리티카>와 같은 주어와 목적어이기에 생략하였다. 일반적으로 <파다>는 ‘속량하다’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는 신학적인 용어이기에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용어로 ‘값을 치루고 해방하였으며’로 사역하였다.
(J) <즈코르나>(‘기억하라’)에 붙어 있는 <나>(‘잘’)는 1절 전반절의 <쉬므우나>의 <나>와 같이 ‘기억하라’를 강조하기 위해 쓰인 표현이다.
(K) <야아츠>(‘계획하다’)가본문에서는 발락이 발람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부탁한 사건을 가리키므로 부정적인 의미인 ‘계략을 꾸미다’로 옮겼다. 칠십인역과 TNK은 ‘너를 대적하여’(against you)을 덧붙였다.
(L) <바아갈림>(‘수송아지를 가지고’)은 <에겔>의 남성 복수 절대형이다. 그러므로 수송아지로 번역함이 마땅하다. 하지만 흔히 성의 구별을 하지 않고, 단지 ‘송아지’(개역개정, 표준새번역, 공동번역 개정) 혹은 ‘송아지들’(NIV, NRSV, TNK)로 번역해 주고 있다.
(M) 히브리어 본문에는 그저 ‘그에 앞에’로 되어 있지만, 여기서 ‘그’는 이 단락에서 ‘야웨’로 이해할 수 있으므로 ‘야웨 앞에’로 사역하였다.
(N) 히브리어 본문에는 그냥 ‘그가 말씀하셨다’이지만 주어인 ‘그’가 야웨인 것을 글의 흐름에서 알 수 있기에 주어 야웨를 덧붙였다.
(O) <헤셋>(‘인자’)에 대해서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은 ‘인자’, 공동번역개정은 ‘은덕, 한결같은 사랑’, NIV는 ‘자비’(mercy), NRSV는 ‘친절’(kindness), TNK은 ‘선함’(goodness)으로 다양하게 번역한다. 본 주석에서 개역개정의 번역을 따라 미가 6장의 <헤셋>과 미가 7장의 <헤셋>을 각각 ‘인자’와 ‘인애’로 사역하였다(미 7:18, 20). 같은 <헤셋>의 번역을 다르게 한 이유는 미가 6장의 <헤셋>은 사람이 행하는 <헤셋>이며, 미가 7장의 <헤셋>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헤셋>이기 때문에 편의상 각각 다르게 번역하였다.
(P) 히브리어 본문에서 <마~키임>이 나올 때 <키임>은 ‘~말고’로 사역하였다. 이곳에서 ‘~말고’는 정의를 행하기와 인자를 사랑하기와 지혜롭게 네 하나님과 함께 걷기를 강조하기 위한 부사로 이해할 수 있다.
(Q) <차나으>의 히필 부정사 절대형인 <하트네아으>(‘지혜롭게’)를 퀸타(Quinta)는 ‘고려하다, 사색하다, 주의하다’의 뜻으로 번역하고 심마쿠스(Symmachus)는 ‘주의하여’로 번역한다. 전통적으로 루터 이후 ‘겸손히’로 번역해 왔다(개역개정, 표준새번역, NIV, NRSV). 하지만 최근에 와서는 ‘깨끗하게’, ‘주의해서’, ‘지혜롭게’, ‘조심스럽게’로 번역을 제안한다. 필자는 지혜롭게를 택한다.
4. 본문 범위 설정 문제
마소라 학자들의 본문구분은 BHS에 <프투하>(פתוחא, ‘열린 단락’)와 <스투마>(סתומא, ‘닫힌 단락’)의 첫 글자로 표시되어 있다. 5장 15[14]절과 6장 1절 사이에 <스투마>가 있고, 6장 8절과 9절 사이에 <프투하>가 있으므로, 이 구분법에 따르면 6장 1-8절을 한 본문으로 볼 수 있다.
또 다른 형식적인 본문 구분 요소로 미가 5장 10〔9〕-15〔14〕절은 <느움 아도나이>(‘야웨의 발언’)을 앞세움으로서 이후의 말씀이 야웨의 말씀임을 보여준다. 내용으로 보면 야웨께서는 10절의 <히크라티>(‘내가 멸절하겠다’), <워하아밧티>(‘내가 부수겠다’), 11절의 <히크라티>(‘내가 멸하겠다’), <하라스티>(‘내가 무너트리겠다’), 12절의 <히크라티>(‘내가 끊겠다’), <로 이흐우 라크>(‘네게 그것들이 없게 될 것이다’), 13절의 <히크라티>(‘내가 멸절하겠다’), <로티쉬타하베 ?>(‘네가 다시는 섬기지 아니하리라’), 14절의 <나타쉬티>(‘내가 빼버리겠다’), <히쉬맛티>(‘내가 멸하겠다’), 15절의 <아시티>(‘내가 행하겠다’)라는 말씀을 통해 무기와 우상을 멸하시겠다고 하신다. 이 말씀은 미가 6장 1-8절의 자기 백성과 변론하시는 야웨의 모습과 다르게 묘사됨으로 앞 본문과 구별되고, 5장 10절에서 15절까지 야웨께서 일인칭으로 계속해서 나오지만 6장 1절에 이인칭 복수가 주어로 나옴으로 앞 뒤 본문이 구별된다. 뒤 본문 미가 6장 9-16절은 예루살렘 주민들의 죄악과 그에 대한 심판의 말씀이 나옴으로 미가 6장 1-8절과 구별된다.
5. 본문 구조
Ⅰ. 예언자가 ‘너희’에게 전하는 야웨의 명령(1)
A. 경청 요구(1전)
B. 들어야 할 말씀-예언자에게 하신 야웨의 명령(1후)
: 일어나 변론하라!
Ⅱ. 예언자가 전하는 야웨의 변론(2-5)
A. 도입(2)
a. 경청 요구(2전)
b. 그렇게 요구하는 까닭(2후)
B. 들어야 할 야웨의 변론(3-5)
a. 야웨의 한탄, 요구(1), 지난 일 상기(3-4)
한탄(3전)
증언하라!(3후)
지난날 ‘내’가 ‘너’에게 한 일(4)
b. 야웨의 요구(2): 기억하라!(5)
Ⅲ. ‘나’의 관심(6-7)
A. 무엇을 가지고 야웨께 나가야 하나?(6)
B. 무엇을 드리면 야웨께서 기뻐하실까?(7)
Ⅳ. 예언자가 알려주는 야웨의 뜻(8)
본문은 1절과 2절 첫머리에 거듭 나오는 ‘너희는 들으라’(<쉬므우>)로 시작한다. 두 명령형은 1절과 2절을 끊어 보게 한다. 왜냐하면 ‘들으라’는 명령을 받는 대상이 1절은 그냥 남성 복수 ‘너희’이지만, 2절은 ‘산들’과 ‘땅의 기초들’이기 때문이다.
야웨께서 자기 백성 곧 이스라엘과 변론하시기에 앞서 예언자를 부르시고는 그로 하여금 피조세계의 산과 언덕들을 향해 야웨의 변론을 하도록 명하신다. 2절에서 예언자는 야웨의 명령대로 산들과 땅의 기초들을 향해 말한다. 1절 후상반절의 ‘그 산들’과 2절 전상반절의 ‘산들’이, 1절 후하반절과 ‘그 언덕들’과 2절 전하반절의 ‘땅의 지대들’이 서로 댓구를 이루고 있다.
“너는 일어나 그 산들 앞에서 변론하라! 1후상
그 언덕들이 네 소리를 듣게 하라!” 1후하 들으라, 산들아, 야웨의 변론을! 2전상
또 귀를 기울여라, 땅의 기초들아! 2전하
2-5절은 우선 도입부인 2절과 야웨의 말씀인 4-5절의 두 부분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2절은 경청을 요구하는 전반절과 그렇게 요구하는 까닭을 밝히는 후반절로 이루어져 있고, 3-5절은 ‘내 백성아’(<내 백성아>)라는 호격을 기준으로 3-4절과 5절로 이루어져 있다. 3-4절은 다시 두 수사의문문(3전), 명령문(3후), 지난 역사를 상기시키는 문장(4절)의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러므로 1절은 예언자가 ‘너희’에게 야웨께서 자기에게 내리신 명령을 들으라고 요청하는 반면 2-5절은 ‘산들’과 ‘땅의 기초들’에게 야웨의 변론을 들으라고 요청한 뒤에 야웨의 말씀을 알려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6-7절은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궁금한 문제를 두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혼잣말이거나 예언자에게 질문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이 6-7절은 겹으로 된 네 의문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앞 두 의문문으로 이루어진 6절에서는 야웨 하나님께 무엇을 가지고 나아갈까 하는 문제를 다루고, 뒤 두 의문문은 무엇을 드리면 야웨께서 기뻐하실까 하는 문제를 다룬다. 6-7절의 ‘나’의 혼잣말로 본다면, 8절은 ‘나’의 속내를 알아차린 예언자가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는 말이라 할 수 있겠다.
위의 본문의 구조에서 드러난 본문의 의미를 아래와 같이 요약해서 살펴볼 수 있다.
Ⅰ. 예언자가 ‘너희’에게 전하는 야웨의 명령(1)
예언자는 ‘너희’에게 야웨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경청하도록 요구한다. 바로 이어 나온 1후반절은 야웨께서 자기 백성 곧 이스라엘과 함께 변론 하시기에 앞서 예언자를 부르시어 산과 언덕들을 향해 변론하도록 명하시는 내용이다.
Ⅱ. 예언자가 전하는 야웨의 변론(2-5)
야웨의 명령에 순종하여 예언자는 피조물들을 향해 야웨의 변론을 경청하도록 요구하면서 그렇게 요구하는 까닭을 밝힌다. 이어 예언자는 자기 백성 곧, 이스라엘 향해 야웨의 변론을 벌인다. 야웨의 변론은 자신에 대한 이스라엘의 오해로 인한 야웨의 한탄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이스라엘로 하여금 증언하도록 요구하신다. 이어 지난 이스라엘의 출애굽 역사 가운데 보여주신 자신의 구원 역사들을 상기시키시고,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지난 광야 여정 속에서 야웨 자신이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도록 요구하신다.
Ⅲ. ‘나’의 관심(6-7)
이스라엘 백성 중 어떤 사람은 야웨의 변론을 통해 자신들의 야웨께 대한 오해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자신이 궁금하게 생각한 문제들을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혼잣말로 볼 수 있다. 무엇을 가지고 제가 야웨께 나가야 할까요?와 무엇을 드리면 야웨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 가운데 속에서 어떤 사람이 생각해 낸 것은 제물의 확대와 질을 높임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보인다는 사실이다.
Ⅳ. 예언자가 알려주는 야웨의 뜻(8)
예언자가 어떤 사람의 속내를 알아차리고 그 사람을 향해 야웨의 뜻을 알려주는 말로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속으로 궁금하게 생각한 무엇을 가지고 제가 야웨께 나가야 할까요?와 무엇을 드리면 야웨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야웨께서 이미 말씀하셨다고 전하면서 세 가지 야웨의 뜻을 밝힌다.
6. 단락별 풀이
Ⅰ. 예언자가 ‘너희’에게 전하는 야웨의 명령(1)
1절은 예언자를 통해 야웨의 변론이 실제적으로 이스라엘과 진행되기 전 어떠한 과정을 거쳤는지에 대한 간략한 보고로 볼 수 있다. 예언자는 야웨의 변론을 들어야 할 이들을 향해 <샤마으>(‘듣다’)의 명령형에 강조 혹은 간청의 불변화사 <나>(‘자세히’, ‘똑똑히’, ‘부디’, ‘잘’)를 덧붙힌 <쉬므나>(‘너희는 잘 들어라!’)로 시작한다. 이는 예언자가 전하는 야웨의 말씀에 경청해야 됨을 의미한다. 1절 전반절의 명령을 받는 대상은 너희이다. 여기서 너희는 자기 백성 즉, 이스라엘임을 짐작케 해 준다(3-5절). 이러한 명령은 예언자 자신이 야웨께 받은 변론이 이전에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1절 후상반절은 너는 일어나 그 산들 앞에서 변론하라! 그 언덕들이 네 소리를 듣게 하라!로 시작되는데 이는 1절 전반절의 명령을 하던 예언자가 명령을 받는 대상자로 등장하게 됨을 보여 준다. 예언자는 하나님께로부터 산들과, 그 언덕들을 향해 변론하도록 지시받는데 이들은 오랜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야웨와 이스라엘 사이에 있어져 왔던 모든 일들을 지켜보아 왔던 존재들로 이해할 수 있다.
Ⅱ. 예언자가 전하는 야웨의 변론(2-5)
예언자는 야웨께로부터 받은 너는 일어나 그 산들 앞에서 변론하라! 그 언덕들이 네 소리를 듣게 하라!”는 명령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야웨의 명령을 올바로 수행하지 못하는 인상을 준다. 들으라, 산들은, 야웨의 변론을! 또 귀를 기울여라, 땅의 기초들아! 하지만 1절 후상반절의 그 산들과 2절 전상반절의 그 산들이, 1절 후하반절의 그 언덕들과 2절 전하반절의 땅의 지대들이 서로 댓구를 이루고 있고, 예언자의 직무를 고려해 볼 때 야웨의 명령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변경했으리라는 가정은 불가능하기에 그 언덕들을 땅의 지대들로의 용어의 변화는 같은 대상에 대한 또 다른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산들과 언덕들이 야웨의 변론을 들어야만 하는 까닭으로 예언자는 야웨께 자기 백성과 함께 벌이는 변론이 있으며 이스라엘을 향해 그분이 논쟁하려 하시기 때문이라 한다. 여기서 야웨의 변론의 대상은 다름이 아니라 자기 백성 즉, 이스라엘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야웨의 변론에서 산들과 언덕들의 역할은 무엇인가? 바이저(A. Weiser)․엘리거(K. Elliger)는 심판관의 임무가 이 산들과 언덕들에게 주어졌다고 하고(미 1:2; 사 1:2), 스미스(R. L. Smith)는 기나긴 세월동안 산들과 언덕들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행동을 증언해 왔기 때문에 그 사건의 배심원들로 보고, 김이곤과 앤더슨(B. W. Anderson)은 산들을 증인으로 보고 있다. 오직 심판하실 이는 하나님이시기에 심판자가 아니라 증인으로서의 자격을 부여 받는 것으로 볼 수 있다(히 12:23). 이스라엘이 야웨의 백성이라는 것은 야웨께서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모세에게 주셨던 언약에 근거한다(창 17:7-8; 출 6:7).
야웨께서는 이스라엘을 내 백성아!(<암미>)라 부르시면서 변론을 시작하신다. 내 백성아!라 부르시는 야웨의 부름 속에서 자기 백성을 향한 야웨의 애절한 심정을 엿 볼 수 있다. 야웨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질문하신다. “내가 무슨 잘못을 네게 행했으며 무엇으로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이는 수사 의문문이면서 동시에 자기변호의 질문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질문을 하시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어디에 있을까? 아마도 주전 8세기 말엽 이스라엘에게 불어 닥친 정치적 위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앗수르 세력이 강력해져 수리아 팔레스틴에 대한 위협이 극에 달했을 때, 이스라엘은 대적들에 대한 야웨의 침묵에 대해 처절한 좌절감을 겪게 되었을 것이며, 그들은 야웨께서 자신들을 괴롭히는 것으로까지 오해하였을 것이다. 야웨께서는 백성에게 자기변호의 질문에 대한 응답을 요구하신다. ‘너는 내게 증언하라’는 요구는 야웨의 자기변호의 질문에 대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언해 보라는 야웨의 명령이다.
야웨께서는 출애굽의 역사 속에서 자기 백성에게 베푸신 구원 행위들을 말씀해 주심으로 자신의 변론을 진행하신다. 야웨의 첫째 말씀은 내가 너를 애굽 땅으로부터 인도하였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출애굽은 하나님의 전적인 구원의 역사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출 3:7-10). 이 출애굽 사건의 요약 보고를 통해 강조하는 바는 십계명 서문에도 나오는 바와 같이(출 20:1; 신 5:6) 출애굽의 주체가 바로 야웨 자신이라는 사실이다.이 출애굽 사건은 아무 희생이 따르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희생이 수반된 것이었다. 종들의 집으로부터 값을 치루고 해방하였으며는 이를 단적으로 표현해 주는 말씀이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슨 댓가를 지불하셨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둘째 말씀은 네 앞에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보냈느니라이다. 야웨께서는 출애굽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진행하시면서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이라는 지도자를 그들 앞에 보내시어 그들을 지도 하셨다. 모세에게는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도록 하셨으며, 아론에게는 대제사장으로서 제사에 관련하여 백성들을 지도하게 하셨으며, 미리암에게는 예언의 영을 받아 이스라엘의 여성들을 지도하게 하셨다(출 15:20). 즉 야웨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르게 인도하도록 지도자들을 보내주셨던 것이다.
셋째 말씀을 하시기에 앞서 야웨께서는 내 백성아 너는 잘 기억하라!(<암미 즈코르나>)는 말씀을 하신다. 이는 너는 내게 증언하라!는 요구에 이어 이스라엘이 야웨께 받은 둘째 명령이다. 둘째 명령을 하시는 이유는 그들이 듣게 될 야웨의 구원 역사를 통해 그들이 야웨의 의로운 행위들을 알도록 위함이다. 야웨의 의로운 행위들은 야웨의 구원행위를 종합하는 말이며 주로 야웨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원수들을 물리치셨던 행동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삿 5:11; 삼상 12:7; 시 103:6; 단 9:16). 야웨의 셋째 말씀은 무슨 계략을 모압 왕 발락이 꾸몄는지, 무엇이라 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답했는지 기억하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광야의 위협 속에서 야웨께서 어떻게 그 백성을 돌보셨는지를 보여주는데, 모압 왕 발락이 꾸민 계략 즉,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는 계획을 오히려 야웨께서 발람의 입을 통해 축복하게 하셨다는 것이다(민 22-24장). 야웨의 넷째 말씀은 싯딤으로부터 길갈까지 일어난 일들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출애굽의 노정에서 싯딤은 가나안 입성 바로 직전에 거주하였던 지역이었고 길갈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처음으로 입성한 지역이었다(민 22:1). 싯딤으로부터 길갈까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이저와 엘리거는 싯딤과 길갈을 언급한 것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길의 마지막 단계임과 동시에 출애굽 모형의 종합이며, 모세시대의 전체 전승을 포괄한 것으로 본다. 필자는 바이저와 엘리거가 너무 확대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출애굽의 모형은 3-5절까지로 봄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으로 보이고, ‘싯딤에서 길갈까지’를 기억할 이유에 대해서 본문은 분명히 ‘야웨의 의로운 행위들’를 기억하기 위해서 임을 밝히고 있기 때문에 야웨의 출애굽 역사에 나타난 구원행위 중 마지막에 보여주신 구원행위로 봄이 좋을 것이다. 또한 싯딤으로부터 길갈까지 일어난 일들을 기억해야 할 이유 중 하나는 야웨의 역사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마른 홍해를 건넌 것같이 요단강을 마른 땅으로 건너게 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수 4:22-23).
Ⅲ. ‘나’의 관심(6-7)
야웨의 변론을 들은 이스라엘은 야웨께서 그들에게 무슨 잘못을 행하셨으며, 괴롭혔는지에 대해 증언해야만 했다(3절). 하지만 이스라엘은 응답 하지 않은 채 어떤 한 사람의 질문이 이를 대신한다. 이러한 질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야웨께 대한 이스라엘의 오해는 출애굽의 역사 가운데 보여주셨던 야웨의 구원 행위들을 들음으로서 풀리게 되었다는 사실이다(4-5절). 질문자는 무엇을 가지고 제가 야웨께 나아가며(<밤마 에카뎀 아도나이>)라는 질문을 한다. 이 질문으로는 누가 누구에 말하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예언자를 통해 들려주시는 야웨의 변론을 듣던 이스라엘 사람 중 어떤 한 사람이 자신이 궁금하게 생각되는 문제를 스스로 질문하는 혼자말이거나, 예언자에게 질문하는 말일 수 있다. 이 질문자는 하나님 앞에 무엇을 가지고 나아가야 될 지 스스로 질문을 제기한 뒤에, 자신의 생각한 바를 질문형식으로 말한다. 질문자가 위와 질문을 했다는 것은 야웨께 나아갈 때 “빈 손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는 것과(출 23:15; 34:20)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길은 제물을 가지고 나아가는 길 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질문자는 첫 째 자신의 질문에 대해 ‘일년 된 수송아지들’의 번제물을 야웨께 가지고 가면 되겠는지 질문한다. 질문자는 이어서 둘째 질문으로 야웨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라는 질문을 한다. 이 질문에 대한 질문자의 생각은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이었다. ‘천천의 숫양’으로 제사 드렸던 인물로는 이스라엘 역사상 다윗과 솔로몬을 들 수 있는데, 다윗은 ‘수송아지 일천 마리와 숫양 일천 마리, 그리고 어린 양 일천 마리’를 제물로 드렸고(대상 29:21), 솔로몬은 일천 번제를 드린 일이 있었다(왕상 3:4). 제사에 기름을 사용하는 것은 출애굽기 29장 40절에 언급되어 있는데, “만만의 기름 강”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현실세계에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영역으로까지 나아감을 보여준다. 마지막 질문은 평행관계에 있으며 강조를 위해서 반복하는 질문으로 볼 수 있다. “제가 저의 허물을 위해 저의 맏아들을, 저의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제 몸의 열매를 드릴까요?” 이는 인신제사로 아브라함과 이삭에 관한 옛 이야기(창 22장)에서 주께서 인신제물을 원치 않으신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신 바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 주변 나라들은 인신제사를 행해 왔으며(왕하 3:27), 어떤 극한적 상황에서는 유다에서도 행해졌다(왕하 16:3; 21:6).인신제사는 이스라엘 종교에서 결코 허용될 수 없는 것이었으며, 예언자들은 이러한 인신제사를 공격하였다(렘 19:5; 겔16:20; 신12:31; 18:10 참조). 이러한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은 희생제사까지 거론하면서 제물의 확대와 질의 높임으로써 한편에서는 어떠한 희생의 댓가를 치르고서라도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이스라엘의 열망으로 볼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의 제사에 대한 오해를 엿 볼 수 있다.
Ⅳ. 예언자가 알려주는 야웨의 뜻(8)
6-7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무엇을 가지고 제가 야웨께 나아가며 높이 계신 하나님께 예배 할까요?라는 질문에 대해 예언자는 야웨께서 네게 일러주셨다고 한다. 일러주셨다(<힉깃>)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예언자를 통해 야웨께서 무엇이 선하고, 무엇을 요구하시는지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셨던 내용이라는 사실이다. 림버그(J. Limburg)는 이스라엘 안에서 오래도록 알려진 것, 곧 계명들에 관한 전승 전체와 지혜의 가르침들이 이에 해당한다고 본다. 예언자는 이스라엘를 향해 <아담>(‘사람아!’)이라 부른다. <아담>이라는 칭호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칭함과 동시에 이스라엘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말씀해 주는 표현이기도 하다. 야웨께서는 예언자를 통해 무엇이 선하고,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세 가지를 제시하신다. 첫째는 정의를 행하기, 둘째는 인자(<헤셋>)를 사랑하기, 셋째는 지혜롭게 네 하나님과 함께 걷기이다.
첫째로 요구된 것은 정의를 행하기(<아솟 미쉬팟>)이다. 정의(<미쉬팟>)라는 용어는 공동체와 특별한 관계에서 나타난 책임들의 성취에 관련되는데, 정의를 행하기는 역동적인 개념으로 사용된다. 미가가 예언하던 시대에 이스라엘의 우두머리들, 제사장, 예언자들은 정의롭지 못했다. 야웨께서는 예언자를 통해 정의롭지 못한 그들을 향해 일찍이 심판을 선언한 바 있다(미 3:9-12). 정의를 행하지 않았던 것은 단지 지도층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거민들에게도 만연되어 있었다(미 6:9-15). 사회전반적인 정의의 부재는 어떠한 희생 제물로도 그들의 죄를 없이 할 수 없었다. 야웨께서는 속죄를 위한 희생제사에 앞서 자신의 백성으로부터 정의를 행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둘째로 요구된 것은 인자를 사랑하기(<아하밧 헤셋>)이다. 인자(<헤셋>)라는 용어는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사용된다. 하나님 편에서의 인자는 하나님이 사람을 향한 변함없는 사랑을 의미하고,사람 편에서의 인자는 하나님과 사람을 향해 마땅히 행해야 될 도리를 다하는 것을 의미한다. 히브리 사고에 있어서 사랑하기(<아하밧>)는 단순히 감정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구현되는 동적인 개념이다. 야웨께서 요구한 인자(<헤셋>)는 누구를 향한 인자인가? 본문 내용으로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두 가지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께 행해야 될 이스라엘의 인자이고, 둘째는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이스라엘이 행해야 할 인자이다. 하지만 주전 8세기 중엽 이후 공동체에 대한 의무가 거의 전무한 상태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선포의 말씀이기 때문에 본문의 인자를 사랑하기는 공동체에 대한 의무로서의 <헤셋>을 요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를 향한 이스라엘의 <헤셋>은 결국 하나님을 향한 <헤셋>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에 결코 분리할 수 없다.
셋째로 요구된 것은 지혜롭게 네 하나님과 함께 걷기(<하츠네아 레케트 임 엘로헤카>)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살 수 없는 존재이다(시 139:2, 5, 7). 더욱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역사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스라엘에게 두말할 필요가 없다. 지혜롭게는 하나님과 함께 걷어야 되는 이스라엘 백성이 어떠한 삶의 자세를 취해야 되는지를 말해 준다. 걷기(<레케트>)는 삶의 전체 방향성을 표현하는데 사용된다(미 4:2, 5; 6:16). ‘걷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할라카>는 유대교에서는 ‘윤리’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말이다. 따라서 어떻게 걷느냐는 것, 누구와 함께 걷느냐 하는 것은 인간의 윤리적 과제 중에서 최대의 것이기도 하다. 네 하나님과 함께 걷기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하나님은 결코 초월적인 분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걷을 수 있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내재적인 하나님 이해에 따른 인간에게 명령된 율법을 실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셋째 요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신학적인 차원을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위에서 요구된 정의를 행하기와 인자를 사랑하기를 실천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도 볼 수 있다.
B. 미가 7장 14-20절 이해
1. 본문 사역
14 당신의(A)백성 곧 당신 소유의 양떼를 당신의 지팡이로 먹이소서.(B) 14전상 과수원(C)가운데 삼림에(D) 홀로 거주하는(1) 14전하 그들이 바산과 길르앗에서 옛 날같이 먹게 하옵소서.(B) 14후 15 네가(E)애굽 땅으로부터(2)나오던 날들과 같이 15전 내가 그에게 놀라운 일들을 보이리라.(3) 15후 16 민족들이 보고 부끄러워 하리라. 16전상 자신들의 모든 세력으로 인하여(F) 16전하 그들은 손으로 입을 가리리라.(G) 16후상 그들의 귀가 먹으리라. 16후하17 그들은 뱀처럼 티끌을 핥으리라. 17전상 땅을 기어 다니는 생물들처럼, 17전중 그들이 자신들의 감옥로부터(H)두려워하며 떨면서 나오리라.(I) 17전하 (4)야웨 우리 하나님께(4)(J)그들이 전율하며 다가설 것이며 17후상 당신으로 인하여 두려워하리이다. 17후하18 당신과 같은 하나님이 어디 계시겠습니까?(K) 18전상ㄱ 죄악을 사하시며(L)허물을 용서하시는(L) 18전상ㄴ 자기 소유의 남은 자를 위하여 18전하 하나님은(M)자신의 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십니다. 18후상 왜냐하면 하나님은(N)인애(<헤셋>)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18후하19 다시(O)하나님이(P)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리라 19전상 하나님이(P)우리의 죄악들을 짓밟으시리라. 19전하 당신이(5)그들의 모든 죄를(5)바다 깊은 곳에 던지시리이다(6) 19후20 당신은 야곱에게 성실을, 인애를 아브라함에게 베푸시리이다 20전 당신이 우리 조상들에게 옛날에 맹세하신 바와 같이 20후
2. 본문 비평
(1). 엘리거(K. Elliger)는 번역본들을 따라 남성 복수 연계형 <쇼크네>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칠십인역도 <카타스케눈타스> 현재분사 능동 남성 복수로 번역했다. 게제니우스는 <쇼크니>가 신명기 33:16절의 영향을 받은 단수 절대형 분사로 본다. <쇼크니>가 집합명사인 <암므카>(‘백성’)과 <촌>(‘양떼’)인 관계되는 것으로 볼 때 마소라 본문에 나타나는 단수 분사 형태 그대로를 취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2). 히브리 필사본과 희랍어 원본 텍스트는 모두 <미미츠라임>(‘애굽으로부터’)으로 이해했다. 아마도 <미츠라임>(‘애굽’)이라는 말 속에 ‘애굽 땅’이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기에 <에레츠>를 생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애굽 땅’이라는 표현은 미가서 6장 4절에도 동일하게 사용되었으며, 다른 성서에서도 나타나는 표현이기에 마소라 본문 그대로를 따른다(창 13:10; 출 20:2; 사 19:18).
(3) 엘리거는 <아르엔누>(‘내가 그에게 보이리라’)를 <하르에누>(‘우리에게 보여주소서’)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앞의 자음 <알렙>을 <헤>로 잘못 필사 했다는 가정에서 나온 결론으로 볼 수 있다. <아르엔누>로 이해할 경우 15절은 14절의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르에누>로 이해할 경우 15절은 14절에 뒤따른 간구로 보도록 한다. 하지만 고대 사본이나 역본에 <하르에누>로 읽은 근거가 없으며 간구에 대한 응답으로 이해함이 글의 흐름상 적절하기에 마소라 본문 그대로를 따른다.
(4). ‘야웨 우리 하나님께’를 엘리거는 첨가된 것으로 보고, 그와 연결된 <입하두>도 운율을 근거로 없애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16절부터 17절까지 하나님께서 응답하신(15절) 것에 대한 사람의 확신의 표현으로 볼 것 같으면 해결된다. 그러므로 마소라 본문 그대로 따른다.
(5). 엘리거의 <핫토탐>(‘그들의 죄들’)을 소수의 히브리어 필사본, 칠십인역, 시리아, 탈굼은 <하토테누>로 고쳐 읽어야 된다고 한다. 이는 자연스러운 번역을 위한 시도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마소라 본문이 의도적으로 우리의 죄와 다른 ‘그들의 죄’로 기록했다면 그의 합당한 근거가 있는 것으로 간주하여 마소라 본문 그대로를 따른다.
(6) 엘리거는 대부분의 번역들을 따라 <워히쉴릭으>로 하여 ‘그가 던지시리이다’로 고쳐 읽자고 한다. 앞의 <야?>, <예라하메누>, <익보쉬>의 주어가 3인칭 단수이기에 그에 이어지는 19절 하반절도 3인칭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19절 후반절과 20절 상반절을 2인칭 단수를 주어로 하는 기도로 이해한다면 마소라 본문을 바꿀 필요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3. 사역 풀이
(A). 히브리어 본문에 하나님이 이인칭으로 표기될 때, 한글로 번역된 성서에서는 이를 주(개역개정, 표준새번역) 혹은 하느님(공동번역개정)으로 번역한다. 하나님을 ‘당신’으로 부를 수 있느냐는 문제는 끊이지 않겠지만, 상대방을 아주 높여 부를 때 쓸 수 있는 우리말의 ‘당신’을 본문 사역에서는 취한다.
(B). <라아>(‘먹이다’, ‘지키다’, ‘인도하다’)의 목적어는 <암므카>(‘당신의 백성’)과 <촌 나할라테카>(‘당신 소유의 양떼’)이다. <라아>라는 동사 하나만을 취한 것은 아마도 ‘백성’과 ‘양떼’를 동격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14절의 전상반절의 ‘먹이소서’와 후반절의 ‘먹게 하옵소서’는 각각 히브리어로는 같은 동사 <라아>의 남성 단수 명령형과 남성 복수 지시법(jussive)이기에 우리말 표현상으로는 앞의 ‘먹이소서’가 약간 부자연스럽지만 사역에서 이를 드러내었다.
(C). 대부분의 번역서들은 <카르멜>에 대한 번역을, 하나는 음역 그대로를 취한 ‘갈멜’(개역개정, 칠십인역)로, 다른 하나는 ‘기름진 초장 및 동산’(표준 새번역, NIV, NRSV, TNK)으로 하였다. <카르멜>이 ‘갈멜’이나 ‘기름진 초장 및 동산’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무엇이 옳고 그르다 단정하기는 힘들지라도, 글의 흐름으로 볼 때, <카르멜>로 음역할 경우, 지명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기에 ‘카르멜’로 음역하는 것을 피했다. 또한 ‘당신의 백성’과 ‘양떼’가 홀로 거주하는 ‘수풀’과 대비되는 장소로서 풍요로운 이미지를 지닌 ‘과수원’을 택했다.
(D). <야아르>(‘삼림’)는 들짐승들이 사는 곳인 ‘수풀’과 산지의 삼림인 ‘삼림’으로 번역할 수 있다. 필자가 ‘삼림’으로 번역한 이유는 기도자가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의 상황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삼림이 수풀보다 더 위험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E). <체트카>(‘네가 나오던’)의 ‘너’가 누구냐의 결정은 15후반절의 <아르엔누>(‘내가 그에게 보이리라’)를 어떻게 읽느냐에 달려있다. <아르엔누>로 이해한다면 <체트카>의 주어는 출애굽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하는 ‘너’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개역개정, 표준새번역), <하르엔누>(‘당신이 우리에게 보여 주소서’)로 읽는다면, 14절에 이어진 기도로 2인칭 남성 단수는 ‘하나님’로 이해할 수 있다(공동번역, TNK). 필자는 마소라 본문 그대로를 번역하여 15후반절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로 번역하였다.
(F). <민>에 대한 다양한 번역으로 NIV는 ‘박탈되어’, TNK는 ‘불구하고'로 번역했다. <보쉬>와 <민>이 함께 할 때는 ‘~ 인하여 부끄러워 하다’로 번역할 수 있다(사 1:29, 렘 2:36).
(G). <쉼>이 <야드 알 페>(‘손으로 입을 가리리라’)는 직역하면 ‘손을 입 위에 두다’이다. 이 표현은 사사기 18장 19절과 욥기 21장 5절에 나타난다. 개역개정은 ‘손을 입에 대다(삿 18:19)’, ‘손으로 입을 가리리라(욥 21:5)’로 번역하였다.본 구절을 욥기와 같이 번역한 것은 야웨께서 그들 앞에 행하실 놀라운 일들이 그들의 입을 가리울 정도로 큰 사건일 것이기 때문이다.
(H). <미스게렛>에 대해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은 ‘좁은 구멍’, NIV는 ‘굴’, NRSV, TNK는 ‘요새’로 번역했다. 하지만 ‘그들이 두려움 가운데 떨면서 나올 것이다’라는 상황을 감안해 볼 때 ‘감옥’으로 번역함이 좋을 듯싶다.
(I). <라가즈>와 <민>이 연결되어 나올 때 ‘두려움을 갖고 떨면서 나오다’는 의미를 지닌다.
(J). <엘 아도나이 엘로하이누>(‘야웨 우리 하나님께로’)를 히브리 본문 어순에 따라 번역하였으며, 특히 술어 동사보다 앞세움으로 강조해 주고 있다.
(K). <미 엘 카모카>(‘당신과 같은 하나님이 어디 계시겠습니까?’)에서 <미>(‘누구’)는 의문 인칭대명사로 강한 부정을 표현하는 수사 의문문으로 사용하여 그 어디에도 하나님과 비교될 수 있는 존재는 결코 없음을 밝히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 필자는 <미>를 ‘어디’로 사역하였다.
(L). <나사>와 <아온>이 연결되어 나올 때의 해석으로는 다른 사람의 허물를 ‘제거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아바르>와 <알>이 연결되어 나올 때도 허물에 대한 용서를 의미한다. 그래서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사하시며’와 ‘용서하시는’으로 번역하였다.
(M). <헤헤직>는 <하작>(‘붙들다’)의 히필 3인칭 남성 단수인데 본 구절에서 3인칭 남성단수형의 주어인 18절 전상ㄱ의 <엘>(‘하나님’)로 이해할 수 있기에 ‘하나님’으로 번역하였다.
(N). <하페츠>(‘기뻐하다’)의 주어도 ‘하나님’으로 이해할 수 있기에 ‘하나님’으로 번역하였다.
(O). <야?>(‘다시’), <예라하메누>(‘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리라’), <익보쉬>(‘짓밟으시리라’)는 접속사 없이 연결되어 첫 동사와 동일한 법 형태임을 지녔음을 말해준다. 특히 <야?>은 ‘다시’를 뜻하는 완곡 표현이다(개역개정, 표준새번역, NIV, NRSV).
(P). 예라하메누>와 <익보쉬>의 주어도 ‘하나님’으로 이해할 수 있기에 ‘하나님’으로 번역하였다. 특히 19절 후반절에서 야웨를 ‘당신’으로 부르기에 자칫하면 전반절과 혼동을 줄 수 있기에 ‘하나님’을 넣었다.
4. 본문 범위 설정 문제
13절과 14절 사이에 <스투마>(ס)를 둔 마소라 전통을 따르면, 14절에서 새 본문이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내용적으로 11절 <이르학 혹>(‘지경이 넓혀지리라’) 12절 <워아데카 야보>(‘네게로 돌아오리라’) 13절 <워하여타 하아레츠 리숴마마>(‘그 땅은 황폐하리로다’)은 예루살렘에 대한 회복의 약속(11-13절)이고, 14-20절은 기도에 대한 응답및 확신으로 내용이 달라진다. 예루살렘에 대한 회복의 약속은 미완료 형태로 계속되다가 14절에서는 하나님께 간구를 명령형 <르에 임메카>(‘당신의 백성을 보살펴 주소서’)으로 바뀐다. 이는 앞 본문과 14절 이후의 본문을 구분 짓도록 해 준다.
5. 본문의 구조
Ⅰ. 야웨의 백성을 위한 기도(14)
A. 고통 중에 있는 백성(14전)
B. 과거와 같은 회복 간구(14후)
Ⅱ. 야웨의 응답(15)
A. 애굽 땅으로부터 나오던 날들과 같이(15전)
B. 내가 그에게 놀라운 일들을 보이리라(15후)
Ⅲ. 응답에 따른 사람의 확신 표현(16-17): 이방 민족들에게 미칠 효과
a. 자신들의 세력을 부끄러워 함(16전)
b. 손으로 입을 가림(16후상)
c. 귀먹음(16후하)
d. 뱀처럼 티끌을 핥음(17전상)
e. 기는 생물처럼 떨면서 나옴(17전중, 하)
f. 야웨 우리 하나님께 전율하며 다가섬(17후상)
g. 당신으로 인하여 두려워 함(17후하)
Ⅳ. 야웨을 찬양하는 사람의 말(18전)
Ⅴ. 야웨에 대한 신뢰(18후-20)
A. 확신 표현(18후-19전)
B. 신뢰 고백(19후-20)
본문은 야웨의 백성을 위한 기도로 시작한다. 이 기도에서 독특한 것은 하나의 히브리어 동사 <라아>를 가지고 14절 전상반절에서는 남성 단수 명령형 <르에>(‘먹이소서’)로 14절 후반절에서는 남성 복수 지시법 <이르우>(‘먹게 하옵소서’)를 사용함으로 야웨께 간구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간구에 응답으로 15절은 야웨께서 내가 그에게 놀라운 일들을 보이리라(<아르엔누 니플라오트>)는 응답의 말씀을 주신다. 그렇다면 16절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야웨의 응답이 계속되는 것으로 말씀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예언자의 말로 봐야 할 지 분별해야 된다. 개역한글판에서는 15절과 16절 첫머리에 각각 ‘가라사대’와 ‘가로되’를 작은 글씨로 써 넣었을 뿐만 아니라 17절과 18절 사이에 단락 구분을 알리는 동그라미를 넣어 둠으로써, 또 개역개정판에서는 15절과 16절 첫머리에 각각 ‘이르시되’와 ‘이르되’를 작은 글씨로 써 넣었을 뿐만 아니라 18절을 새 문단의 시작으로 보고 줄을 바꾸어 인쇄해 놓음으로써, 15절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지만 16-17절은 예언자의 말로, 그것도 18-20절과 구분되는 예언자의 말로 읽을 것을 암시한다. 표준새번역에서는 16절을 20절까지에 이르는 새 단락의 시작으로 보고 줄을 바꾸어 씀으로써 15절과 구별해 놓았다.
그렇다면 16절부터 17절까지 야웨의 응답에 대한 사람의 확신으로 이해함에 별 무리가 없어 보인다. <이르우>‘그들이 보리라’, <워예보슈>‘그들이 부끄러워 하리라’, <야쉬무>‘그들이 가리리라’, <오즈네헴 테헤라쉬나>‘그들의 귀가 먹으리라’, <열라하쿠>‘그들 핥으리라’, <이르그주>‘그들이 두려워 떨면서 나오리라’, <입하두>(‘그들이 전율하면서 다가서리라’), <이르우>(‘그들이 두러워 할 것입니다’). 16절부터 17절까지 나오는 주어 ‘그들’은 16절의 <고임>‘민족들’이므로 15절의 ‘놀라운 일들’을 보는 대상이 3인칭 남성 단수 ‘그’에서 ‘그들’ 바뀌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8절 전반절은 죄 용서와 관련하여 야웨를 찬양하는 사람의 말이다. 18절 후반절부터 19절 전반절까지는 주어가 3인칭 남성 단수 하나님으로, 19절 후반절부터 20절까지는 주어가 2인칭 남성 단수 당신으로 바뀌어 나온다. 18절 후반절부터 19절 전반절까지 야웨를 3인칭으로 부르면서 야웨에 대한 확신을 표현하고 있다면, 19절 후반절부터는 직접 야웨께 고백하는 말로 형식으로 바뀌면서 야웨께 대한 신뢰로 나아가고 있다. 더욱 이러한 확신과 신뢰는 야웨의 <헤셋>에 근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헤셋>(‘인애’) 확신의 근거(18후)
죄악들의 용서: 우리 확신 (19전) 현재
죄 용서의 확신: 그들 신뢰 (19후, 20전) 미래
맹세하신 성실과 <헤셋>(‘인애’) 신뢰의 근거(20후) 과거
위의 본문의 구조에서 드러난 본문의 의미를 아래와 같이 요약해서 살펴볼 수 있다.
Ⅰ. 야웨의 백성을 위한 기도(14)
야웨의 백성이요, 양떼인 이스라엘 백성이 당시 고통 중에서 살고 있음을 하나님께 아뢰면서 그 옛날 바산과 길르앗에서 먹이를 먹던 시절과 같이 회복하여 주시기를 간구한다.
Ⅱ. 야웨의 응답(15)
본문은 야웨의 백성을 위한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야웨께서 친히 과거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땅으로부터 출애굽 시켰던 것과 같이 다시 그들을 위해 놀라운 일들을 다시금 보이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다.
Ⅲ. 응답에 따른 사람의 확신 표현(16-17)
야웨의 응답을 받은 사람은 야웨의 놀라운 일들로 인해 이방 민족들까지 영향이 미칠 것을 확신한다. 그는 여섯 가지의 확신을 갖는다. 첫째, 자신들의 모든 세력으로 인해서 부끄러워하리라. 둘째, 놀라운 일들로 인하여 입을 가리리라. 셋째, 그들의 귀가 먹으리라. 넷째는 그들은 뱀처럼 티끌을 핥으리라. 다섯째, 감옥으로부터 떨면서 나오리라. 여섯째는 야웨 우리 하나님께로 그들이 전율하면서 다가서리라는 것이다.
Ⅳ. 야웨을 찬양하는 사람의 말(18전)
야웨의 응답을 받고 이방 민족들에게 놀라운 일들이 벌어질 것을 확신하던 사람은 그러한 놀라운 일들을 이루실 야웨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으로 찬양한다. 세상 어느 존재와 비교할 수 없는 부분은 바로 야웨는 자기 소유의 남은 자를 위해 죄악과 허물을 용서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Ⅴ. 야웨에 대한 신뢰(18후-20)
야웨을 찬양하는 말에 이어 사람은 하나님께서 인애(<헤셋>)을 기뻐하시기 때문에 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리라는 것과, 자신들의 죄악들을 짓밟으시리라 것을 확신한다. 또한 사람은 옛날 조상들에게 ‘성실’과 ‘인애’를 맹세하신 야웨의 약속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 그들의 모든 죄까지도 사함 받으리라 확신한다.
6. 단락별 풀이
Ⅰ. 야웨의 백성을 위한 기도(14)
14절은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는 내용으로 볼 수 있다. 사람이 이스라엘 민족을 당신의 백성과 당신 소유의 양떼라고 한다. 이는 야웨와 이스라엘 민족이 어떤 사이인지를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이스라엘 민족은 야웨의 백성임과(출 3:7; 19:6) 동시에 목자 되신 야웨의 양떼였다(미 2:12; 시 23:1-6; 80:1; 95:7). 이러한 하나님의 백성이 과수원 가운데 삼림에 홀로 거주하고 있었다. 과수원은 풍요로움을, 삼림(<야아르>)은 들짐승의 거처로 아주 위험한 장소를 상징한다(왕하 2:24, 사56:9, 렘 5:6; 12:8, 겔 34:25, 암 3:4, 미 5:7, 시 50:10, 80:14; 104:20). 이스라엘 민족이 당시 처해 있는 위험한 상황을 묘사해 주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위기 가운데 있던 이스라엘 민족을 기도자는 당신의 지팡이로 먹이시기를 간구한다. 기도자는 그들이 바산과 길르앗에서 옛 날같이 먹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이어서 하는데 바산과 길르앗은 요단 동편에 위치한 목초지로 유명한 곳이며(민 32:1; 대상 5:9; 시 22:12; 암 4:1),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가 모세에게 기업으로 요구했던 곳이기도 하다(민 32; 신 3:12-17). 이 기도는 바산과 길르앗과 같은 풍요로운 목초지에서 양떼들이 한껏 풀을 뜯어 먹는 것과 같이 옛 이스라엘의 번영했던 시절과 같은 새로운 번영을 다시 허락해 주시기를 간구하는 기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렘 50:19 참고).
Ⅱ. 야웨의 응답(15)
15절 말씀은 야웨의 백성을 위한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다. 네가 애굽 땅으로부터 나오던 날들과 같이 내가 그에게 놀라운 일들을 보이리라에서 네가는 앞서 야웨께 기도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를 향해 하나님은 과거 출애굽을 경험한 자로 말씀하신다. 이는 하나님께서 기도한 사람을 과거 출애굽을 경험했던 이스라엘 백성과 분리할 수 없는 존재로 여기고 계심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에게는 누구를 두고 하신 말씀인가? 이는 앞으로 야웨의 놀라운 일들을 볼 대상으로 앞서 언급되었던 야웨의 백성 곧 야웨의 양떼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이 보게 될 놀라운 일들은 과거 이스라엘이 애굽 땅으로부터 나오던 날에 이스라엘이 보았던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이다(출 3:20; 34:10).
Ⅲ. 응답에 따른 사람의 확신 표현(16-17)
16-17절은 야웨의 그에게 놀라운 일들을 보이리라는 응답의 말씀을 듣고 그렇게 놀라운 일들이 이제는 이방 사람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 틀림없다는 믿음을 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애굽에서 나오던 날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본 무리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한 부류는 애굽 땅에서 종살이 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방해했던 적대자들이다(출 7-12장).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행위로 드러나지만, 적대자들에게는 심판의 행위로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보게 되는 두 부류의 반응은 각각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사람은 야웨의 백성이 놀라운 일을 보리라는 말씀을 듣자마자 이스라엘 민족의 적대자들 즉, 이방 사람들이 야웨의 놀라운 일들을 보고 다음과 같은 일들이 벌어질 것을 확신한다. 그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보게 되는 날이면 먼저 민족들이 보고 부끄러워 하리라. 자신들의 모든 세력으로 인하여 본문은 민족들이 자신들의 세력으로 인하여 부끄러워한다고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그들의 세력(<게부라>)은 에스겔 32장 30절과 마찬가지로 여러 나라들이 뽐내었던 ‘세력/힘’을 뜻한다. 그들이 자랑했던 세력은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보게 될 때 부끄러움의 원인이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사람은 그들이 자신들의 세력을 부끄러워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손으로 입을 가리리라 귀는 먹으리라 확신한다. 손으로 입을 가리는 행위는 침묵 상태를 묘사하는 말로서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본 그들은 놀라서 할 말을 잃게 됨을 말해 주고(삿 18:19; 욥 21:5; 40:4; 시 107:42; 사 52:15 참조), 그들의 귀가 먹으리라는 것은 그들의 놀람의 정도가 어떠할 지에 대한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다(욥 21:14). 17절의 그들은 뱀처럼 티끌을 핥으리라. 티클을 핥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위엄 앞에 그들 자신이 굴복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창 3:14; 시 72:9; 사 49:23). 굴복한 그들이 어떠한 모습으로 나올 것인가? 땅을 기어 다니는 생물들처럼 그들이 자신들의 감옥로부터 두려워하고 떨면서 나오리라. 이방 민족들이 ‘감옥’에서 공포에 사로잡힌 채 나오게 될 것을 의미한다.
결국 사람은 민족들이 야웨 우리 하나님께 전율하면서 다가서게 될 것이고 야웨 하나님으로 인하여 두려워하게 되리라 확신한다. 그들이 당신으로 인하여 두려워하리이다라는 표현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보기 전까지 그들은 하나님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음을 짐작케 하고, 특별히 야웨 우리 하나님께의 야웨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앞세운 것은 출애굽 때에 계시된 하나님의 이름이 야웨였기 때문일 것이다(15절; 출 3:14). 사람은 이방 민족들을 향해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소망의 확신을 갖게 된 근본적인 이유로는 아마도 이스라엘이 어려운 시기를 지날 때 ‘네 하나님 야웨가 어디 있느냐’고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조롱하던 자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미 7:10).
Ⅳ. 야웨을 찬양하는 사람의 말(18전)
야웨의 응답에 따른 사람의 확신의 표현이 있은 직후 사람은 하나님이 비교할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을 찬양한다(18절). <미-엘 카모카>(‘당신과 같은 하나님이 어디 계시겠습니까?)는 미가(<미카>) 예언자의 이름과 관련되어 있다. 또한 이 표현은 수사 의문문으로 하나님이 다른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라는 것을 의미 한다.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 소유의 남은 자를 위하여 죄악을 사하시며 허물을 용서하시는 분이라 찬양한다. 죄악(<아온>)의 어근은 구부러진 것, 꼬인 것을 말하는데 다시 말하면 불법과 부정과 바르지 못한 삶의 방법을 의미한다. 허물(<페솨>)은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죄 또는 반역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의 죄악과 허물이 아니라 자기 소유의 남은 자를 위해서이다. 자기 소유의 남은 자는 누구를 말함인가? 이는 14절에 언급된 곤경가운데 처해 있는 야웨의 백성으로 볼 수 있다. 사람은 어떻게 하나님께서 자기 소유의 남은 자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시는 분으로 이해했을까? 그것은 15절의 야웨의 응답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의 죄악과 허물을 사하시고 용서해 주시는 분으로 확신하였을 것이다(사 40:2).
Ⅴ. 야웨에 대한 신뢰(18후-20)
야웨를 찬양하는 말이 있은 직후 사람은 야웨에 대한 신뢰를 표현하는 말을 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야웨의 백성을 위한 기도를 드릴 때(14절) 그들이 아주 위험한 지경에 놓여 있음을 밝혔다. 이러한 상황은 사람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죄악과 허물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의 시간으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이었다(신 28:15-68; 미 7:18전). 그러나 그 진노는 영원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15절을 통해 야웨께서 야웨의 백성에게 놀라운 일들을 보여주시겠다 응답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는 이유를 <헤셋>(‘인애’)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곳에서의 하나님의 <헤셋>은 자기 백성의 죄악과 허물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와 관련하여 나타난다(출 34:6후-7). 사람은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과 용서의 확신을 갖는다(19전). 다시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리라. 사람은 자기가 소속된 공동체 즉, 우리에게 이전에 베푸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허락해 주실 것을 확신한다. 불쌍히는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사 49:15, 시 103:13).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여 불쌍히 여겨 주시는 것과 같이 자신들이 지은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 주실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악들을 짓밟으시리라. 이제 사람은 하나님이 죄악들을 짓밟으시리라는 것을 확신한다. ‘짓밟는다’는 표현은 전쟁에서 원수를 짓밟는 행동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데(슥 9:15),이처럼 공동체의 원수인 죄악들을 아주 무기력하게 만들어 주실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19절 후반절과 20절에서 사람은 야웨 즉, 당신에게 아뢰는 형식으로 나오면서 야웨께 대한 전적인 신뢰를 나타낸다. 사람이 신뢰의 근거로 드러내는 것은 그 옛날 그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바 있는 <에멧>(‘성실’)과 <헤셋>(‘인애’)이다(창 12:2-3:15; 18-21; 28:13-14). 19절 전반절에게 우리에 대한 확신을 나타내었던 사람이 이제는 그들의 죄에 대해 관심을 돌린다. 당신이 그들의 모든 죄를 바다 깊은 곳에 던지시리이다. 이 구절의 그들은 14절에 언급된 당신의 백성 곧 당신 소유의 양떼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의 모든 죄는 자기 소유의 남은 자를 위하여 흔적도 없이 수장되고 말 것이다(15절, 18절). 당신은 야곱에게 성실을 인애를 아브라함에게 베푸시리이다. 여기에 언급된 이스라엘 조상들의 이름은 그들의 후손들로 볼 수 있다.이 후손들에게 사람은 하나님의 <에멧>(‘성실’)과 <헤셋>(‘인애’)을 베푸시리라는 확신을 갖는다(출 34:6).
Ⅴ. <헤셋>를 통해 본 미가서
A. <헤셋> 본문의 분포상황과 신학적 의미
미가서는 재난예언(1:2-3:12; 6:1-7:7)과 구원예언(4-5장; 7:8-20)이 반복된 순환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런데 <헤셋>은 미가 6장 1절-7장 7절의 재난 예언에서 한번, 미가 7장 8절-20절의 구원예언에 두 번 나타난다. 이제는 각 본문에 나타나는 <헤셋>의 강조점은 무엇이고 신학적 의미는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첫댓글 샬롬!
저는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에서 구약학을 전공하였습니다.
구약을 전공하게 된 계기는 학부와 신학대학원(대전신학대학교)을 다니면서 구약성경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으며 신약성경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배경이 되는 구약성경을 바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본 논문은 제가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제출한 논문입니다.
감사합니다.
주님의몸된교회 담임목사 유정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