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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5 - 다이카개신과 백제멸망후 부흥군에 왜군함대 1천척 백마강에서 불길속으로!
일본은 기원전 660년 신무왕이 건국했으며 그 혈통이 만세일계로 내려온다고 말하지만
초대 신무와 10대 스진은 같은 인물이고 2~9대는 연대를 늘리기 위한 가공인물로
보며..... 15대 오진왕이 410년경 규슈에서 오사카로 진출해 실제로 야마토 왜국을
건설한 왕이니 저 오진왕(응신) 의 건국인 5세기 초가 실제 통일된 일본의 건국인가 합니다?
일본은 2번 왕조가 바뀌었으니 신무가 가공인물이라면 10대 스진은 김해가야인이고 15대 오진은
백제인으로 생각되니 한번 왕조가 바뀌었고, 538년에 부레츠왕이 죽고 후사가 없으니 멀리
오진의 5대손이라는 게이타이(계체)를 26대 천황(일왕)으로 모시니 백제인으로 그로 부터 현재
일왕까지 근 1,500년간은 만세일계가 분명하니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긴 세월 통치인가 합니다?
(1) 일본 속에 백제(百濟) 라는 지명들!
세이조대 사학과 사에키 아리키요 교수는 비타쓰왕의 친손자인 “조메이 천황은 생전에
‘구다라 천황(百濟天皇)’ 이라고 불렸을 것이다” 라고 발표한 바 있으니 서기
572년에 등극한 비타쓰왕이 ‘백제대정궁’ 을 세운 오이(大井)는 나라현 ‘고료초
구다라(廣陵町 百濟)’ 라는게 통설이니 ‘구다라 우편국(百濟郵便局)’ 도 영업 중입니다.
‘백제’ 라는 행정 지명을 유지하는 다른 곳으로는 교토시 동쪽 ‘히가시 오우미시 햐쿠사이지초
(東近江市百濟寺町)’ 니 비와코 호수 너머 스즈카산(鈴鹿山) 등성이에 사찰 ‘샤카산
햐쿠사이지(百濟寺)’에서 유래했다는데 일본에서는 ‘百濟寺(백제사)’ 를 ‘ 구다라 데라’ 라고
하는데 유독 이 사찰만은 ‘百濟寺’ 의 한자어를 소리 나는대로 읽어 ‘햐쿠사이지’ 로 부릅니다.
1910년 일제의 조선 침략 이전까지만 해도 일본 각지에 ‘구다라고우리(百濟郡)’ ‘구다라손(百濟村)’
‘구다라강(百濟川)’ ‘구다라대교(百濟大橋)’ ‘구다라평야(百濟平野)’ 같은 행정지명이 널리
쓰였으며 일본 고대 지도 ‘팔랑화도(八浪華圖)’ 는 오사카 난바( 難波·나니와) 일대가 ‘구다라스
(百濟洲 백제주)’로 불렸음을 보여주는데, 이 지도는 서기 1098년(承德 二年) 에 처음 그려졌습니다.
지금으로부터 920여년전 지도에 표기된 ‘구다라스’ ‘난바지(難波寺)’ ‘구다라리(久太郞里·백제리)’
등은 현재까지 오사카 시내의 지명으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으며 특히 ‘구다라고우리(百濟郡)’
는 오사카 중심인 히가시나리구(東成區) 이며 1937년에 편찬된 ‘일본고어대사전’ 은 ‘구다라
고우리(くだら こうり)’ 의‘ 고우리’ 가 “한국어의 고을에서 파생된 말이다” 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오사카 중심지 일대는 한때 행정구역상 ‘기타구다라손(北百濟村)’ ‘미나미구다라손
(南百濟村)’ 으로 분류되기도 했지만 메이지유신후 일본은 조선을 강제
점령한후, 백제와 관계된 대부분의 일본 지명이 다른 이름으로 바뀌었으니
현재 ‘백제’ 가 지명으로 남아 있는 곳이 단 두 군데에 불과한 것도 이 때문 입니다.
(2) 다이카(대화) 개신 :
쇼토쿠 태자와 백제계 후손으로 대호족 소가노우마코가 죽자 소가노 에미시가 섭정이 되었
는데, 스이코여제를 다시 고교쿠여왕(천황) 으로 세웠으며 에미시의 아들 소가노 이루카
는 쇼토쿠 태자의 아들을 죽이고 고모의 아들을 일왕(천황) 으로 즉위시키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신 가마타리는 황태자 나카노오에와 모의하여 645년에 소가노 이루카를 죽이고 새로운
헌법을 발표하여 호족을 누르고 천황제를 새로이 확립하였으며 그리고 동쪽 지방인 에도
(도쿄) 조몬인(왜국 원주민) 에조를 토벌하는 데, 책임자를 쇼군(정이대장군) 으로 불렀습니다.
(3) 백제 멸망후 인질 풍을 보내 백제왕에 올린후 왜군을 파병하다!
660년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게 망하고 사비성과 웅진성이 함락되어 의자왕등 왕족과 귀족등 1만 2천
여명이 당나라로 끌려간 이후 복신과 도침 등이 주류성을 중심으로 백제 부흥운동을 일으킵니다
의자왕의 4촌인 왕족 복신은 자신이 왕이 될수도 있었지만 세력이 약하니 왜국의 힘을 빌려야 하는지라
왜국에 왕을 보내달라고 원조를 요청하자, 사이메이 여왕과 나카노오에 태자는 왜국에 인질로 와 있던
의자왕의 아들(동생?) 풍(夫餘豊) 왕자를 5천명 왜군과 함께 한반도로 내보내 "백제 왕위" 를 잇게합니다.
이때 태자의 어머니인 왜국의 여왕(천황) 사이메이(濟明女帝) 는 의자왕의 4촌 누이동생이란 설이
있는데... “조국 백제부흥” 을 위해 사람들을 산으로 보내 벌목해서 배를 만들고 식량을 모으며
무기를 대량 생산하는 한편, 나라 아스카에서 멀리 규슈 후쿠오카로 천도해 임시 수도를 만든후
1천척의 배에 2만 7천명의 왜군을 태워 한반도로 보내니..... 일본은 전 국력을 다 기울인 것입니다.
일본은 인구가 적었고 동북지방에는 원주민인 에조인들과 마찰중이며 일왕은 천황이 아닌 오오키미
(大君 대군) 로 불리던 시절이라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귀족과 지방 세력이 강한데다가
교통이 원활하지 않아 통제가 원만하지 않은 상황에서 저런 대규모 파병은 자칫 지방세력의 반란이
일어날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릅쓴 것이니..... 백제 왕실과 혈연관계가 없다면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풍왕자의 5천 왜군이 당도하니 기세가 오른 백제부흥군은 661년 신라 태종무열왕을 무주에서 죽게
하는(전사?) 등 선전하였으나 도침과 복신, 복신과 풍의 내분으로 사기가 크게 꺽이는데... 3년후
왜국은 국력을 총동원해 파견한 2만 7천명의 대군이 백강(금강) 하구에서 적벽대전처럼 당나라군
의 화공으로 대패함으로써 663년 백제의 유민들은 패주하는 왜군을 따라 대거 일본으로 달아납니다.
이두나 향찰로 씌어진 서동요나 처용가등 향가(鄕歌) 가 한국에는 1281년 삼국유사에 14수 그리고
균여전에 11수등 25수가 있는데 비해..... 일본은 759년에 편찬된 만요슈(万葉集 만엽집) 에만도
시가가 4,500수나 실려 있는데, 한국은 일본 보다 시기도 500년 가까이 늦은데다가 양도 속일본기
500여수를 합쳐 5,000수에 달하는 일본에 비해 200분지 1에 불과한 25수 뿐이라 그게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저 4,500 수에 달하는 만요슈(万葉集 만엽집) 시가 중에는 "핏빛 비가 내린다" 라거나
"돌아오지 못하리" , “이제 조상의 묘소는 영원히 잃어버렸다” 고 통탄하는 시가 있으니
이때 이주한 백제 백성들을 오우미구니(近江國) 의 간자키군(神前郡) 과 동국 일대에
아주시켰으며 또한 좌평 귀실집사와 여자신을 포함한 달솔 60여명에게 벼슬을 하사 합니다.
(4) 백제 멸망후 백제인들은 대거 일본으로 이주하다!
“백제의 주류성이 마침내 당에 항복했다. 이에 국인(國人)들이 말했다. ‘사태가 돌이킬수 없게 됐다.
백제의 이름은 오늘로 끊어졌다. 이제 조상의 묘 가 있는 곳을 어찌 다시 갈 수 있겠는가. 호례성
(弖禮城· 전남 보성) 에서 일본 장수들과 만나 어떻게 할지 의논하자.’ 그리고 침복기성 (枕服岐城·
전남 강진) 에 있던 처자들에게 나라를 떠나가려 한다는 마음을 알렸다.” (『일본서기』 663년 9월 7일)
일본의 수군 과 함께 좌평 여자신, 달솔 목소귀자, 곡나진수, 억례복류 와 국민들이
호례성 (弖禮城· 전남 보성) 에 이르렀다.” (『일본서기』 663년 9월 24일)
“이튿날 비로소 배가 출항해 일본으로 향했다.” (『일본서기』 663년 9월 25일)
(우리나라에 1145년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 처럼 일본서기는 720년에 편찬되었음)
"일본서기" 가 전하는 백제 마지막 모습인데 백제의 부흥 운동은 이듬해 지수신이 사수한 임존성이
무너질때 까지 지속되지만, 3만 2천의 대병을 보냈던 왜국은 이때는 지원을 포기하는데 지원군
철수후 한동안 보이지 않던 백제 관련 기사는 664년 3월에야 보입니다. “백제왕 선광왕
(善光王) 등을 난파(難波· 나니하, 오오사카)에 살게 했다. 별이 수도 북쪽에 떨어졌다.” (『일본서기』),
663년 백제 왕위에 올랐던 부여 풍은 고구려로 망명하고 동생 부여용(선광 善光) 은 패주하는
왜군을 따라 다시 왜국으로 건너갔으니... 백제 유민 2000명에겐 땅도 주는등 선진기술을
이용하려 매우 호의적인 대접 을 합니다. 그러자 일본의 수도에서는 “귤은 저마다 다른가지
에서 자라지만 구슬 처럼 꿸때는 실 하나에 모두 꿰어지네..“ 라는 노래가 불리웠다고 합니다.
일본은 백제 왕자 부여용(扶餘勇 선광) 에게 ‘백제왕’ 이라는 성씨 를 주니 그를 백제계
도래인의 지도자 로 인정한 것인데... 당나라가 옛 백제 땅에 설치한 웅진도독부
의 도독으로 임명한 백제의 마지막 태자 부여융 에 맞세우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대목으로 바로 그 무렵 융이 백제 부흥군의 잔존세력을 최종 진압한 까닭인가 합니다.
“3월에 백제 잔당이 사비산성에 웅거해 반란 을 일으키자, 웅진도독 이 군사를 일으켜
쳐부수었다.” (『삼국사기』 문무왕 4년 664), 망국의 왕자 풍과 용은 고구려와
왜에서 연락을 주고받으니 그해 10월 대방주 자사 유인궤 가 두 형제의 소통을
우려하는 상표문을 당 고종에게 바칠 정도였으니 융의 마음은 좌불안석 이었을 것입니다?
이듬해 8월 융이 당의 칙사 앞에서 신라의 각간 김인문과 맺은 맹약문 을 보면 더합니다.
“지난날 백제 임금이 역리와 순리를 분간하지 못해 고구려와 결탁하고 왜국과 교통해
함께 잔인함과 포악을 일삼아 신라를 침략해 마을과 성을 도륙하니 평안한 해가 없었다."
"부여융을 웅진도독 으로 삼아 조상의 제사 를 지내게 하고 그 옛터를 보전
하게 하니 신라에 의지해 묵은 감정을 버리고 우호를 맺어 화친 하며
황제의 조칙을 받들어 길이 번방(蕃邦) 이 될 일이다.” (『삼국사기』 문무왕 5년)
이 글은 웅진도독부 7주중 한 주인 대방주(전남 나주)의 자사 유인궤가 쓴 것이니 상관
인 웅진도독 부여융에게 내밀 맹약문이 아니지만 망국의 왕자가 어찌 불만을 토로
할수 있었을까. 유인궤 는 이후 고구려와의 전쟁에 전념 했고 융 역시 맹약을
맺은뒤 당의 칙사가 돌아가자 신라가 두려워 당으로 달아난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흔히 신라가 외세인 당나라를 끌어 들여 같은 민족인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 시켰다는
것은 현재의 시각 이니.... “민족” 이란 개념은" 19세기에 유럽" 에서 만들어져서
아시아로 수입된 개념으로, 당시 신라에서 볼때는 백제나 고구려 왜국에 당나라
모두 다 같은 외국이자 적국으로 같은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고 여겨집니다!
백제로서도 신라 보다는 "일본이 더 가까운 혈맹" 이었으며 신라와는 1세기가 넘도록
적대 관계 를 유지해온데다 가야 멸망후 수많은 한반도 도래인, 특히 백제
출신들이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는 왜국 땅이 더욱 친근했을 수 있으며.......
백제 귀족들이 신분을 유지하는데도 신라 땅 보다는 일본 열도가 더욱 유리 했습니다!
(5) 신라와 당군 보복에 대비해 산성을 쌓고 수도를 내륙으로 옮기다!
한편으로는 당나라와 신라의 보복 침입에 대비하여 백제달솔 답본춘초 등을 야마구치의 나가토
구니(長門國)에, 달솔 억례복류와 사비복부를 북규슈의 쓰쿠시에 보내 오오노성 및
오요기산성 을 쌓게 하였으며 또한 북규슈 후쿠오카 인근에 다지이후(太宰府)를 설치
하여 방어에 만전을 기하였는데, 이곳은 후일 신라와 당나라와의 외교의 전진기지가 됩니다.
“이 달에 백제국 관직의 품계를 검토했다. 좌평 복신의 공적에 의해 귀실집사에게 소금하
(小錦下)를 주었다. (이전 관위 달솔) 또 백제 남녀 4백여인을 근강국 (近江國 비와
호수 오미국)의 신전군 (神前郡· 카무사키노코호리) 에 살게 했다.” (『일본서기』 665년 2월)
복신 은 백제 부흥운동을 주도했으나 풍 왕자와 갈등을 빚어 살해당한 인물인데 그는
백제 멸망후 왜국에 사신을 보내는등 실질적으로 백제를 대표 했으니 귀실집사는
그의 아들 이라 보는데... 달솔은 백제 16관등중 2위 자리고, 소금하는 왜의 26개
관위 중 12위였으니 높은 자리는 아니지만 그 아들을 대접하는 데는 낮지 않아 보입니다.
“춘추지(春秋智· 김춘추) 가 대장군 소정방의 도움을 얻어 백제를 협공해 멸망
시켰다. 혹은 백제는 자멸 했다. 왕비가 요사스럽고 무도해 국정을
좌우하고 어진 신하를 주살했기 때문에 화를 자초했다.” (『일본서기』 660년 7월)
“이 달에 신전군 (近江國 神前郡) 의 백제인에게 밭을 지급했다.” (『일본서기』 665년 3월)
근강(近江)은 비와호수 시가현인데 왜국 조정은 이듬해 근강으로 천도할 계획 을 갖고
있었으니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는데 백제인들의 선진 기술 을 이용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이 해 겨울에 도읍(飛鳥 비조, 아스카) 의 쥐들이 근강으로 옮겨갔다. 백제
남녀 2,000여명을 동국에 살게 했다. 승속을 불문하고 계해(癸亥) 의 해
부터 3세에 이르기 까지 관에서 식품을 공급했다.” (『일본서기』 666년 겨울)
“쥐들이 옮겨갔다”는 것은 『일본서기』 에서 지배층의 지지를 얻지 못한 천도
를 얘기할때 자주 쓰이는 표현으로 앞서 654년 12월 8일자에 이런 내용
이 있습니다. “이 날에 황태자는 황모모존을 모시고 왜의 하변행궁으로
옮겨 거주했다. 노인이 ‘쥐가 옮겨간 것은 도읍을 옮기는 전조였다’ 고 말했다.”
황태자는 선왕인 효덕(孝德) 왕을 나니와(오사카) 에 남겨두고 관료들을 이끌고 그전의
도읍인 비조(나라현 아스카)로 천도한 천지 (天智, 백제에 3만 2찬 대병을
파병한 나카노에 왕자) 일왕을 말하니 홀로 남은 효덕은 이듬해 쓸쓸히 사망하는데 그
천지가 신라와 당나라의 보복 침공을 염려해 다시 근강(近江)으로 천도 를 했던 것입니다.
(6) 백제 도래인이 거주한 나가노와 백제왕자 이름을 딴 선광사
근강(近江 오마) 인근의 나가노현(시나노) 은 일찍이 백제 도래인들이 자리잡고 살던
곳으로 이곳에 일본 3대 사찰인 선광사(善光寺) 라는 절이 있는데, 다름아닌
부여용 왕자의 이름인 선광(善光) 이니 실제로 이 절은 과거 백제사 로 불렸으며
여기에는 본당 지하에 꽁꽁 숨겨졌다가 7년 마다 한번씩 공개되는 보물 이 있습니다.
백제 성왕 이 흠명(欽明)왕(천황) 에게 보낸 아미타 삼존불 로 이 불상이 공개
되는 개장 축제 때에는 수백만명이 선광사를 찾아 절 안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가 되니...... 경내에 본존불과 줄로 이어진 기둥 이 세워지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 기둥을 만져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돌아간다고 합니다.
부여용 선광(善光) 의 증손자인 경복(慶福) 은 동북지방 무쓰노쿠니(아모모리)
에서 "금" 을 채취해 조정에 진상 하니... 743년 11월 5일 쇼무왕(천황)
이 나라 동대사 절에 엄청난 크기의 청동 대불 을 지을때 황금 900냥을
대불 도색용 으로 바친 자는 바로 백제계 선광왕자의 후손인 경복(慶福) 입니다.
그는 의자왕의 아들 (일본서기에는 동생) 이자 백제 부흥군에 의해 왕에 추대되었던....
풍왕의 동생인 선광(善光)의 증손자 로 오사카 북동쪽에 히라가타 枚方(매방)시를
건설한 백제인 인데, 당시 일본에서는 금이 생산되지 않았는데 백제인 채굴 기술자
들은 멀리 동북 무쓰 陸奧(육오) 지방 아오모리 에서 드디어 사금 을 채취 했던 것입니다.
1145년에 편찬된 한국 김부식의 삼국사기 보다 425년이 빠른 720년에 간행된 일본서기
에는 663년 백제부흥운동실패 후에 망명해온 백제인 400여명을 오미국 간자키군에
거주하도록 했으며 또 백제인 2000여명에게 3년간 관식(官食) 을 급여했다고 나옵니다.
선광(禪廣) 은 지토왕(천황)으로 부터 “구다라노 고니키시 百濟王” 라는 성씨(姓氏)를
하사받고 망명한 백제인들을 이끌고 히라가타 枚方(매방) 시를 건설 했으며
선광의 손자인 양우(良虞)의 셋째 아들 경복 이 육오수(陸奧守) 라는 관직을 맡고
있을 때에 "아오모리에서 채취한 금" 을 일본 왕실에 헌납해 두각을나타냈던 것입니다.
백제 무령왕 10세손 야마토노 오토츠구(和乙継)의 딸 인 다카노노니이가사 (高野新笠)는
고닌왕(光仁天皇 광인천황)의 황후 로 "간무왕(桓武天皇 환무천황)의 어머니"
인데, 그녀 는 며느리를 고를때 백제계 도래인인 저 의자왕의 아들인 선광의 후손
“구다라노 고니키시 百濟王” 씨 가문에서 맞아들이니 아키히토 일왕이 언급한바 있습니다.
젠코지 (善光寺 선광사) 는 일본 불교도들의 성지순례지 로 나카센도(중산도)로 부터
갈라져 나온 도로 이름이 젠코지 가도 로 불렸는데 큰 절은 그 자체로 권력 이라
1천석 영지 를 갖고 있었으며 본당은 불당의 전면에 장대한 예당을 배치한 당목조로
불리는 구조를 가진 동(東)일본 최대 규모 로 에도 중기 불교건축의 걸작 이라고 합니다.
(7) 고구려 망명인들로 사이타마현에 고려군을 세우다.
663년에 백제인들에 이어 668년에는 고구려인들도 일본으로 망명해 오니 왜국 조정은 난민
들에게 고려군을 세울수 있도록 지원하는데 도쿄 이케부쿠로역에서 세이부 이케부쿠로선
기차를 타고 한노역 (飯能驛)에 내려서 보통(완행) 기차로 환승하여 2정거장 고마에키
(高麗驛 고려역) 에 내리면 도쿄 서북쪽 사이타마현(崎玉縣) 히다카(日高)시 로
일본속의 고려(고구려) 마을 고마노사토(高麗鄕)로 고마(高麗 고려)군 이라고 불렸습니다.
고려역 광장에는 ‘천하대장군’ 과 ‘지하여장군’ 이 서 있으며 시에서 세운 한글 ‘고향보도’ 게시판
도 있는데 원래는 고려시 였는데, 일제 말기에 "일본고려" 라는 뜻으로 일고(日高)시 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하는데 "고려는 고구려" 를 뜻하며 택시로 10분 거리 산속에‘고마진자
(高麗神社 고려신사)’가 있으며 고려역 반대쪽으로는 고마가와에키(高麗川, 고려천)역이 있습니다.
고려신사 입구에는 70년전 이곳을 방문한 고종황제 아드님이신 영친왕 ‘이은’ 공과 ‘방자(나시
모토미야 마사코) 여사’그리고 일본 중의원 의원이며 주일대사와 민단장등이 기념 식수한
나무들이 있으며 참배자로는 권기옥과 함께 조선 최초 여자 비행사인 박경원이 있으니.....
" 녀자가 비행긔 공부를 한다고 장할것이야 무엇이겟 슴닛가마는 아즉 이에 뜻을 두는
녀자가 드물뿐이라 조선녀자로서는 나 한사람 뿐으로 남달은 곤난을 격근 일이 만앗슴니다"
高麗(고려) 를 젊은 일본 사람들에게 읽어 보라고 하면 대개는 百濟(백제) 를 소리
나는 대로 "햐쿠사이" 라고 읽듯이 "고레이" 라고 읽는데, 나이든 일본인들은
百濟(백제) 를 "큰 나라" 라는 뜻으로 "구다라" 라고 읽듯이... 高麗(고려)도
"곰의 나라 고구려" 라는 뜻의 "구마" 의 음이 변한 "고마" 로 읽는 것을 봅니다.
고구려 난민들에게 왜국은 변방인 간토 관동지역으로 보내어 정착 시키니 713년 사이타마
지역에 2,000여명의 고구려인을 중심으로 고마노사토(高麗郡 고려군) 가 설치 되었는데
속일본기에 사신으로 왔다 눌러 앉은 고구려 왕손인 약광왕자 는 고마오(高麗王) 라는
성씨를 하사 받아 고려군의 군사(郡司)로 임명 되었다고 하며 若光(약광) 이 죽자
그 영혼을 모신 고마진자 高麗神社 에는..... 지금 "48 대손이 신관" 으로 거주하고 있습니다.
고려신사 뒷켠에는 신관인 고마 후미야스(高麗文康) 궁사(宮司)가 산다는 엄청 높고 웅장한 초가
지붕의 오래된 일본전통 농촌 주택인‘고려가 주택’이 나오는데 신사 근처에는 고마지 (高麗寺
고려사) 와 고마가와(高麗川 고려천) 그리고 역사 유물을 전시한‘회관(會館)'이 있는‘고려
본향’ (高麗本鄕) 이 있으니 마을에는 눈물의 노래인 이두마우타(東歌 동가) 가 전해진다고 합니다.
(8) 아키히토왕 고구려왕족을 모신 고마신사에 참배하다.
2019년에 퇴위를 앞둔 84세의 일왕(천황) 아키히토 부부는 고마진자 신사에 참배했으니 “지금으로
부터 1300년전 고구려에서 온 도래인(渡來人)이 이곳에 살면서 지어진 신사이니 우리나라(일본)
와 동아시아의 긴 교류의 역사를 생각했다.”라고 말했으니 고구려 왕족을 모시는 고마(高麗)
신사를 참배한 것은 간접적으로 한일 양국 간 화해에 대한 의지 를 밝힌 것이란 분석이 나옵니다.
아키히토 일왕은 2001년 생일 기자회견 때 “개인으로서는 간무(桓武) 천황의 생모
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 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紀) 에 쓰여 있는데 대해
한국과의 연(緣) 을 느끼고 있다” 라고 말하는등 한국에 대한 애정을 드러
냈으니 한국을 방문하고 싶다는 의사를 여러차례 피력했으나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고마신사 방문으로 아쉬움을 달랬다는 해석이 주변에서 나왔지만 본인이 감상을
밝힌 것은 처음이라는데 생일을 맞은 일왕은 관례에 따라 3차례 축하객들에게 인사를
했으니 왕궁에는 5만 2300명이 모였는데 이는 1989년 즉위후 가장 많은 인파라고 합니다.
2001년 아키히토(明仁) 일왕은 50대 천황인 간무왕과 백제의 인연에 대해 말한바 있으니 “ 간무
천황의 생모는 백제 무령왕의 왕자 순타태자의 직계 후손인 화신립(和新笠) 황태후 입니다.
이 사실은 일본 왕실 역사책 ‘속일본기’에 실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도 한국과 인연을 느낍니다.”
68회 생일 기자회견때 한 말이니 일왕의 이 같은 발언에 황거(왕궁)를 관장하는 궁내청 고관들이 매우
당황했으며 그 때문인지 일본 언론은 이날 기자회견 내용을 보도하면서 일왕이 언급한 한국
과 혈연관계 대목은 쏙 빼놓았으며 유일하게 ‘아사히 신문’ 한 매체만 일왕의 발언을 기사화 했습니다.
히로히토 전 일왕은 1984년 전두환 전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양국간에 있었던 불행한 과거
에 대해 매우 후회한다” 고 했으며 아키히토 일왕 은 1990년 노태우 대통령 일본 방문시 “일제
강점기라는 불행한 시기에 일본에 의해 겪은 한국인들의 고통에 대해 깊이 후회한다” 고 말했습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공통 개최때 방한이 무산된후 김영삼 대통령의 방일시 “통석의 념을 금할수
없다” 고 말했고 김대중 대통령에게는 “한반도에 큰 고난을 안겨준 시기가 있어 슬프다”
라고 말했는데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이 “일왕이 한국 방문을 원할 경우에는 일제강점기 역사
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 고 말하니 한국에 우호적이던 일본의 보통 사람들 마저 식상해 한국
에 등을 돌리고 한류는 죽어 버렸으며.... 방문이 불가능해지자 대신 고마진자를 참배한 것입니다.
(9) 왜국조정의 백제 왕자- 인질(?)
고구려 장수왕의 침략을 받기전 461년에 개로왕이 동생 곤지왕자를 왜국조정에 보냈는데, 397년에
아신왕의 아들 전지왕자가 인질로 갔다가 부왕(父王) 사후에 귀국해 왕위에 올랐으며 그후 일본
에서 태어나 자란후 귀국해 왕이 된 사람은 479년 왜군 500명의 호위를 받고 나온 동성왕과 501년
무령왕이 있으며 혜왕은 왜국에서 2년 동안, 풍왕자는 30년동안 인질로 있다가 백제왕위에 오릅니다.
일본에서는 이들을 인질로 보고 있으나 한국에서는 백제와 왜국은 친척관계이므로 조언
과 외교 교섭을 위해 파견되어 장기 체류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 또한
신라에서도박제상 이야기에 나오는 내물왕에 의해 고구려에서 인질생활 하다가 귀국
해서 신라왕이 된 실성왕이 왜국에 보낸 내물왕의 왕자 미사흔은 예는 분명 "인질" 입니다.
백제의 경우에는 왜국으로 부터 군사적 원조를 받기위해 보냈던 인질에 가까웠던 신분
이었으나, 본인들이 백제의 왕위에 오르기 위해 귀국할 때는 동성왕의 예에서
보듯, 일왕(유랴쿠 천황) 이 14살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고 눈물을 흘리며 전송한
것을 보면 친척의 예로 대한 것을 알수 있습니다. 아니면 일본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 곤지가 암살되어 "고아로 자란 소년을 백제왕" 으로 내보낸 것 때문이었을지도...
479년에 백제왕이된 동성은 동성대왕으로 불리는데 501년에 가림성주 백가가 보낸 자객에게 암살
되니 역시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무령왕이 왕위를 이으니, 1145년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무령이
동성의 아들이라고 기록했으나 720년 일본서기는 이복형으로 기록했는데... 1971년 공주에서
무령왕릉이 발견되고 지석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으니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 (寧東大將軍
百濟 斯麻王)” 이라!!! 또 생몰 연월일이 적혀있었으니 일본서기의 기록이 맞는 것으로 밝혀집니다.
(10) 왜국에 정착한 백제 왕자등
1) 473년경 개로왕의 동생 곤지가 일본으로 이주하는 등 고대에도 유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2) 520년 무녕왕의 아들 사아군(斯我君)이 이주하여 야마토노 기미(倭君)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3) 611년에는 백제 성왕의 셋째 아들 임성태자 일행이 건너왔으며 훗날 야마구치등
서부일본 4국과 북규슈 2국등 6국을 차지해 교토의 쇼군을 좌지우지 했던
오우치(大內) 씨는 그 후손을 자처하며 고려와 조선에 사신을 보내 핏줄을
밝혀줄 것과 왜구를 소탕해 주는 댓가로 팔만대장경 불경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4) 백제 의자왕의 아들 선광왕(善光王)이 망명해 나니와(難波, 오오사카)에 거주지를 얻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