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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이 글에서는 촴스키 교수의 내재주의(또는 내재적 자연주의) 언어관을 개관하고, 논란이 되고 있는 외재적 자연주의 언어 철학과의 경정을 살핀다. 필자는 이들이 같은 대상을 논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양립 가능한 다른 대상들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 논의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내재적 자연주의와 외재적 자연주의가 서로 대립되는 것처럼 보임을 지적할 것이다. 이어 촴스키 교수의 최소주의 연구 계획은 보편성과 특수성의 문제를 증발시키거나 해소시킨 것이 아니라, 어휘부로 전쟁 장소를 옮겨 놓았을 뿐임을 지적하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화용론에 관련된 중요한 사실들이 어휘부로부터 얻을 수 있는 정보로는 해결할 수 없음도 드러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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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촴스키 교수(Noam Chomsky 1928~ )는 일찍서부터 ‘언어 철학’에 대한 주제들을 꾸준히 다루어 왔다.1) 90년대에 들어서서는, 특히 그의 원숙한 60대 생각들을 논문이나 강연으로 여러 군데에 발표해 왔고, 언어 연구의 내용에 있어서도 더 이상 간단한 이론을 만들어 낼 수 없을 만큼 높은 경지(최소주의 연구 계획)에 이르렀다고 평가된다.2) 지난 여름 언어 철학을 다룬 그의 책이 <New Horizons in the Study of Language and Mind>로 출판되어 나왔는데, 이 글에서는 이 책에 실린 7편의 글을 중심으로 하여 그의 언어 철학을 개관하고자 한다.
언어 철학을 다루는 글들에서 촴스키 교수는 두 가지 목표를 이루려고 한다. 하나는 콰인(Quine)․펕넘(Putnam)․데이비슨(Davidson)․더밑(Dummett) 등으로 대표되는 영․미 철학계의 주도적 흐름―전체주의․행동주의․외재적 의미론․지시적 의미론―들을 비판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언어 철학을 ‘내재주의’(internalism)로 표현하고 있는 바, ‘내재주의’에서 언어 및 언어 사용의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하여 변호하는 것이다.3) <언어와 정신 연구에서의 새로운 지평들>(이하 ‘새 지평’으로 줄임)에 있는 7장 가운데, 제 1 장과 제 7 장이 뒷쪽의 일을 맡고 있고, 나머지 장들은 앞쪽의 일을 맡고 있다.
이 글에서는 먼저 내재주의 언어 연구 계획에 대하여 개관을 하고 나서, 언어 및 언어 사용 문제를 적절히 설명하지 못한다고 촴스키 교수가 비판하고 있는 철학적 관점들에 대해 살피기로 한다. 단, 이 때 철학자들의 관점은 촴스키 교수가 묘사하고 있는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필자가 성급히 읽어 놓은 것들을 덧붙인 것이므로, 철학 전공자들에 의해 재점검되는 것이 온당하다. 마지막으로 언어 사용을 ‘신비의 문제’로 치부해 버리는 내재주의 관점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하여, 촴스키 교수의 연구 계획에서 더해져야 할 것으로 필자가 생각하는 점들을 덧붙이기로 한다.
Ⅱ.
촴스키 교수는 50년대 중반부터 오늘까지 거의 50년 동안 언어 연구의 모습을 계속 수정해 왔다. 그의 고유한 상표처럼 돼 버린 ‘심층구조-표면구조’이나 ‘지배’와 같은 용어들까지도 폐기 처분한 지 오래다.4) 필자는 그의 이론 전환을 몇 가지 매듭으로 나눌 수 있다고 본다. 첫 시기는 50년 중반부터 70년 후반까지이다(Aspects로 대표되는 시기). 이 시기에 구절 구조 규칙과 변형 규칙들을 줄여 가는 일을 하였다. 곧, 자의적인 규칙 설정의 가능성을 줄여 나갔던 것이다. 두 번째 시기는 70년 후반부터 90년 초반까지이다(LGB로 대표되는 시기). 이 시기에는 통사론이 동일한 원리(principles)와 상이한 매개인자(parameters)에5) 의해 도출될 수 있으며, 통사론의 정보들이 다른 부서, 특히 어휘부에 의해 공급될 수 있음을 가정한다. 마지막 시기는 90년 초반 이후 지금까지인데(Minimality/Optimality를6) 추구하는 시기), 언어 능력은 다른 인지 능력에 대하여 판독 가능한 경계면(interface) 정보들만을 관장하는 것으로 가정한다.
평면적으로만 보면, 각 시기마다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부서들이 사라져 버린다. 통사론이 제 2기에 어휘론으로 스며들어 갈 가능성을 열었고, 다시 어휘론이 제 3 시기에 다른 인지 체계 속으로 들어갈 여지를 열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변화들은 그의 비 합리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입체적이고 종합적이며 변증법적으로 확장 발전되어 나가는 역동성의 참모습을 드러내 주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옳다.7)
<새 지평> 제 1 장은 ‘언어 연구의 새로운 지평들’이라는 제목으로 언어 연구 계획이 어떤 내용으로 되어야 할지를 언급한다. “새로운 지평들”이라는 비유에는, “지평선에 머물러 있다(p.9), 여전히 먼 지평선이다(p.16)”라는 언급으로 보아, 우리가 아직 가 보지 못하였으므로 그 내용을 잘 알 수 없다는 뜻이 담겨 있는 듯하다. 따라서, 촴스키 교수는 자신의 생각을 다만 언어를 연구하는 데에 최선이라고 판단되는 하나의 “연구 계획”이라고 겸손하게 표현한다. 이 연구 계획이 언제나 사실만을 드러낸다고 보장할 수 없다는 점을, 여러 차례 과학사의 패러다임 변화와 관련지으면서 암시하고 있다.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그가 제시하는 연구 계획은 “통합화 접근”(integrated approach)을 위한 중요한 한 축이 되는 것이다.
촴스키 교수는 임의의 과학이 발달하여 제 궤도에 오르면, 더 이상 민간 과학 차원에서 쓰이던 낱말들을 사용할 수 없게 되는 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8) 임의의 연구가 토속적이고 상식적인 민간의 지혜에 바탕을 두고 출발하더라도, 일단 정상 궤도에 오르면 이전에 쓰던 낱말들로서는 믿을 만한 논의가 진행되기 어려우므로, 전문적인 용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9) 촴스키 교수는 언어 연구의 대상을 임의의 언어 표현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해석해 내는 언어 능력으로 규정하고, 이를 ‘머릿속 언어’(I-language)로 부른다. ‘머릿속 언어’는 내재적이며 선천적인 특성을 지니고, 어휘부에서 매우 제한된 변이들만을 갖는다.
이 대상을 연구하는 방법은 현재 여러 가지를 상정할 수 있다. 물질적인 단위로서 단백질(호르몬) 분자 덩어리들을 연구할 수도 있고, 뇌 세포(시냅스) 단위나 세포 연결 단위들을 연구할 수도 있으며, 신경망 회로로서도 연구할 수 있다. 그러나 촴스키는 연산-표상 체계로서10) ‘머릿속 언어’를 연구하려고 한다. 이 상이한 연구 시각들은 서로 배타적이 아니라, 오히려 상보적인 관계에 있고, 궁극적으로는 한데 통합되기를 희망한다. 다시 말하여, 연산-표상 체계의 연구들이 물질적 단위로 환원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처취랜드 부부와 같이 극단적인 일원론적 신-물질주의로의 환원을 부인함), 심신 수반(ephiphenomena of mind-body) 이론처럼 물질적 단위와 표상적 단위가 서로 모순 없이 하나로 긴밀히 통합될 것으로 전망한다. 이런 통합 연구을 위한 신생 분야가 ‘생리 언어학’(Biolinguistics)이다.11)
연산-표상 체계로서, 머릿속 언어는 두 개의 경계면 층위를 갖고 있다. 하나는 소리를 만들어 내고, 소리를 지각하는 ‘감각 운동 근육 체계’에 명령(지시 내용)을 전달하는 층위이다. 이를 머릿속 소리(I-sound: p.170) 또는 음성 형식(Phonetic Form:PF)라고 부른다. 다른 하나는 ‘개념-의도 체계’에12) 명령(지시 내용)을 전달하는 층위이다. 이를 머리속 의미(I-meaning) 또는 논리 형식(Logical Form:LF)라고 부른다. 머릿속 언어는 두 층위가 외부의 다른 일반 인지 체계에 대하여 적절하게 명령(지시 내용)을 전달해 주는 역할을 맡고 있는데, 외부 체계들과 연락이 잘 되도록 하는 제대로운 출력을 내보내어야 한다. 이를 경계면에서의 판독 가능 조건(legibility condition at the interface)이라고 부르는데, 이 조건의 우열을 가리는 척도가 최적성 및 최소성이다. 이 그림은, 민간 과학에서 언어가 소리와 뜻으로 이루어졌다는 직관적인 생각을, 필요에 의해 학술적으로 정교하게 다듬어 표현한 것이다.
두 층위에서는 또한 고유하게 적용되는 보편 원리들이 있다. 논리 층위 경계면에서는 투영 원리․사슬 형성 조건 들이 간여하는데, 크게 보면 이들은 임의 단위의 국지성(locality)을 보장해 주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음운 층위 또한 소리 자질 결합․음절 형성․어조 윤곽 등과 같은 조건에 간여하는 원리들이 상정되고, 이들은 인접성(adjacency)을 보장해 주는 힘으로 작용한다. 아직까지 이 경계면들이13) 다른 체계에서 작용하는 구체적인 방식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거의 없다. 앞으로의 연구 과제이다.
그런데, 이렇게 더 광범위한 두뇌 구조의 일부로서 끼워넣어져 있다고 상정되는 ‘머릿속 언어’는 과연 아주 완벽한(highly perfect) 것일까? 아니면, 거꾸로 아주 불완전한 것일까? 이 물음은 필자가 생각하기에, 어느 누군가가 우물 안에 있으면서 우물 안의 세상이 완벽한 것인지를 묻는 것과 비슷하다고 본다. 달리 말하여, 더 광범위한 두뇌 구조의 상세한 내용들을 우리가 알고 있다면, 머릿속 언어가 완벽한지 불완전하지 여부를 판정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질문은 현실적으로 제대로 답변될 수 없으므로, 또는 답변되더라도 그 정당성 여부를 판단할 수 없으므로, 잠정적으로 보류되어야 하거나 대답하는 일 자체가 무의미하다.
그렇지만, 촴스키 교수는 몇몇 특성들을 근거로, 아주 완벽하다고 믿고 있다. 불완전성의 증거로 제시되는 대표적인 두 가지 사례가 해석 불가능(uninterpretable) 자질들과 ‘자리 옮기기’(displacement)14) 속성이다(p.12). 이들은 해석 불가능하기 때문에 (적정한 해석을 받기 위해) 자리 옮기는 속성이 구현된다는 점에서 서로 관련된다. 임의 요소가 자리를 옮기는 것은, ‘판독 가능성’ 조건에 의해서 강요되며, 사고라는 외부 체계에 의해 해석 요구조건으로서 동기화된다고 본다(p.13).15) 따라서, 불완전하다고 제시되는 단서들이 모두 해소된다는 점에서, 거꾸로 머리속 언어가 완벽한 체계라고 결론짓는다(그렇지만, 그가 해소시켰다는 특질들만이 불완전성의 전부일까? 필자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머릿속 언어가 우리 두뇌 속에 실재하고 있고, 그 연산-표상 방식이 음운 층위와 논리 형식 층위에 반영되어 있음이 사실이라면, 도대체 연산-표상의 내용은 어디로부터 나오는 것일까? 그 열쇠는 어휘이다. 그러나 아직 어휘부의 정체에 대한 물음은 촴스키 교수가 본격적으로 다루어 본 적이 없다. 그렇더라도, 판독 가능성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는 원리들을 준수할 수 있는 요소뿐만 아니라, 개별적인 어휘들 사이 구별 요소들도 들어 있을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통사론에서 보편성과 개별성에 대한 논쟁이 어휘론으로 장소만을 옮겨졌을 개연성이 있음). 제 3 장 ‘언어와 해석’에서 예시하고 있는 어휘 항목 요소들은 다음과 같다(p.62) 위치의 속성을 나타내는 어휘라면, 행위 목표․행위 시원․이동 대상들뿐만 아니라, 행위자․도구․행위를 받는자․사건․의도․사역 들도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16) 더군다나 제 7 장 ‘내재주의자의 탐구들’에서는 어휘들 사이의 계층 관계도 상정하는데, 예를 들면 “chase = follow + intend”(추적하다=좇다+의도하다)와 같이 나타낼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p.179). 한마디로 말해, 60년대에 자신이 부정하였던 해석론자들의 어휘 해체 개념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17)
이런 식의 어휘 개념 구조를 충실히 구현하고 있는 논의로는 줴킨돞(Jackendoff 1990)과 프슽욥스키(Pustejovsky 1995)가 있다.18) 그런데 문제는 어휘부에 고유한 ‘머릿속 언어’ 요소들만이 들어 있는지, 아니면 개념-의도 요소들까지도 들어 있는지, 아직 명확히 결정되어 있지 않은 상태이다. 양전자 방출 단층 사진 촬영의 결과들은, 어휘부(낱말 창고)가 두뇌의 어느 특정 부서에만 치우져 있지 않음을 보여 준다(잠정적으로, 통사 처리는 브로카 영역에서, 음운 처리는 베르니케 영역에서 이루어진다고 믿어짐). 동사 활용들을 조사한 연구에서는 규칙적 단어(브로카 영역과 인접 부위)와 비 규칙적인 단어(후두엽의 시상 영역과 인접한 부위)가 서로 다른 창고에 보관되어 있을 개연성을 시사한다.19) 또한 명사를 인출할 적에 동원되는 뇌 세포의 범위와 동사를 인출할 적에 동원되는 뇌 세포의 범위가 현격히 다름을 보여 주는 자기 공명 사진의 결과도 나와 있다.
필자가 이해하기로는, 어휘부에 대한 연구의 촉발은 80년대 말에 자연 언어 처리(또는 언어 공학) 연구에서 전자 사전을 구축하려는 노력들에서부터 나왔는데, 현재 현격히 다른 두 흐름이 맞서고 있다. 하나는 일반 지능에 기초하여 어휘부의 내용을 다루려는 쪽이고(인지언어학으로 대표되는 흐름), 다른 하나는 언어 능력에 기초하여 어휘부를 다루려는 쪽이다(어휘 의미 표상 이론). 이들은 서로 독립적이고 자족적으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일반 인지 능력과 언어 능력의 차별화 문제는, 고유한 언어 능력의 존재를 주장하는 촴스키와 그의 추종자들을 늘 따라 다니는 그림자이다. 이 문제는 다음 장에서 철학자들의 논의들을 다룰 적에 다시 살피기로 한다.
이상에서 내재주의 언어 연구 계획이 어떤 밑그림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하여 소략하게 살펴보았다. 내재주의란 말은 외재주의에 대립되는 개념으로서, 언어 능력이 우리 두뇌 속의 일정 부서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점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에 반해, 외재주의는 언어 능력이란 존재하지 않고, 다만 우리가 외부에서 경험할 수 있는 대상 세계에 의해서 모든 언어 및 언어 사용이 결정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내재주의는 ‘머릿속 언어’(I-언어)라는 용어를 써서 다른 인지 기관과의 경계면 층위를 <PF, LF> 두 개 설정하였고, 각 층위에서 들어 있는 표상 내용은 어휘부에서 공급되는 것으로 가정하였다.
그렇지만, 결코 이 그림으로써 언어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통사론에서 다루어지던 문제들이 다만 어휘부라는 장막 속으로 숨어들어갔을 뿐이다. 정작, 어휘부가 보편성과 개별성을 어떻게 구현해 주는지에 대한 대안 그림을 여전히 제시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점을 인정하므로, 촴스키 교수는 올해 출간된 자신의 책 제목을 겸손하게 아직 닿을 수 없는 멀고 먼 “새로운 지평선들”로 비유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Ⅲ.
제 2 장 ‘언어 사용 설명하기’에서 촴스키 교수는 언어를 연구하는 입장을 다음과 같이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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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재적 자연주의: |
촴스키 노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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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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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재적 자연주의: |
세계 대상과의 인과 관계 중시 |
(1) 언어 연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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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자연주의 |
(외재 |
주의): 공공 언어 |
(public language)를 상정 |
옛부터 내려오는 소박한 언어관은 외재적 자연주의에 해당한다. 외부 세계에 대상이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하여 언어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 자연주의는, 외부 대상 세계에 존재하지도 않는 가공의 언어를 상정하고, 이를 공공(公共 public) 언어라고 이름을 붙인다(1993c <언어와 사고>에서 Frege 비판 참고). 이런 가공의 언어가 실제 세계에서 존재하지 않지만, 이를 상정한다면, 촴스키 교수는 마찬가지로 공공의 의미도 상정해야 하고, 공공의 소리도 상정해야 한다고 비판을 한다. 예를 들면, 어떤 것이 공공의 소리인가? KBS 9시 뉴스의 아나운서 목소리가 공공의 소리인가, 아니면 조용필의 목소리가 공공의 소리인가? 의미와 음성에 공공의 표준을 찾을 수 없다면(찾을 필요도 없지만), 의미와 소리가 언어의 핵심이기 때문에, 공공의 언어를 설정하는 일은 백일몽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철학자들을 비판하는 부류는 주로 외재적 자연주의 노선 속에 놓을 수 있다. 특히, 분석철학의 뒤를 이은 현대 철학자들의 주류에서는, 언어 ‘의미’의 문제를 가지고 진지하게 고민들을 많이 하였다. 그들의 결론은, 한 문장을 만들어 내고 그 문장을 해석할 수 있게 하는 선천적인 언어 능력을 상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 결론은 내재주의(또는 내재적 자연주의)를 주장하는 촴스키 교수의 결론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제 3 장 ‘언어와 해석: 철학적 사변과 경험적 탐구’, 제 4 장 ‘언어와 정신 연구에서의 자연주의 및 이원론’, 제 5 장 ‘자연물 대상으로서의 언어’, 제 6 장 ‘내재주의 관점으로부터의 언어’들에서 촴스키 교수는 이른바 행동주의 또는 경험주의 철학자들에 대하여 반박을 하고 있다.
필자가 정확한 배경 지식이 없이, 독서 과정에서 정리하여 얻은 철학자들의 의미 관점들을 다음 표로 요약한다.
(2) 의미의 대한 철학자들의 논의
주장자 |
논의 대상 |
내 용 |
한 계 |
Aristotle, Locke |
대상 물체 entity |
지칭, 감각자료, 외연치 |
추상물 |
Leibniz |
진술의 동의성 |
동일한 진리치, 검증원리 |
동일 외연에 다른 내포치 |
Frege, Kripke |
진술 내용 |
내포 의미, 가능 세계 |
무한 및 경험 세계의 불일치 |
Wittgenstein,Austin |
발화 |
사용(게임), 행위(비언표) |
이중 의도를 설명 못함 |
Quine |
진술 형식(규약) |
서로 구별 안 되면 동일 |
상대성, 자의성 |
촴스키 교수의 글에서 언어 철학 비판의 주요한 표적은, 특히 콰인으로부터 이어지는 철학계의 주류들에 향해 있다. 그들은 펕넘․데이비슨․더밑․롸티 들이며, 한결 같이 촴스키의 선천적 언어 능력을 문제 삼기 때문이다.
문제를 해체시키고 증발시켜 버리는 분석 철학의 전통을 받아들여, 콰인은 분석 명제와 종합 명제에 대한 구분이 이루어질 수 없고, 의미를 다만 실용적(사회적) 기준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갑자기 수풀에서 튀어 나온 토끼를 보고, 원주민이 현지 조사 언어학자에게 개버가이(gavagai)라고 외쳤는데, 그 외마디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지 확정할 방법이 객관적으로 찾아질 수 없다는 사례로 대표되는 그의 ‘불확정성’(정확한 번역 불가능성, 또는 지시의 불확정성) 명제는, 다음의 세 가지 내용을 가진다. 첫째, 믿음 고정(또는 ‘명제적 태도’라고도 부름)은 총체론적 성격을 지닌다. 둘째, 의미 동일성에 대한 객관적 기준은 없고, 다만 약하게 서로 두 대상이 구별될 수 없으면 동일하다고 봐야 한다. 셋째, 의미가 ‘이론적 존재자’로서 인정 받는 과학적인 대상은 될 수 없다.
이를 배경으로 하여 펕넘(1988)은 <표상과 실재>에서 다음과 같은 명제들을 세웠다. 첫째, 의미는 총체적으로, 믿음의 전체 그물 조직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둘째, 의미는 지시로 환원되어야 하는데, 지시는 부분적으로 규범적이며 실천적이다. 셋째, 의미의 뿌리인 개념은 우연히 물리적․사회적 환경으로부터 진화해 나왔다. 따라서, 해석 작업에서 구성원들은 서로 믿음에서 약간의 차이를 삭감해야 하며, 관용 또는 의심을 삭제하는 선의(benifit of the doubt)에 의해 이루어질 뿐이다. 한 낱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사회적 현상이다(사회적으로 고정된다). 이는 특히 전문가들에 의한 언어 노동 분업(division of linguistic labor)이 이루어짐을 뜻한다.
언어 의미가 ‘해석 작업’이라는 명제를 강하게 추구하고 있는 데이비슨 또한 콰인의 생각을 발전시켜 다음처럼 언급한다(p.30f, p.67f). 자연 언어의 기본적인 기능을 의사소통을 매개하는 것이다. 언어 능력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으며, 따라서 배워지거나 숙달되거나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청자와 화자가 공유하는 것은 일반 인지능력에 바탕을 둔 선험 이론(첫 언어)인데, 이 이론을 지닌 해석자는 발화의 부분과 구조의 속성에 바탕을 두고서 발화를 해석하게 된다. 다시 말하여, 화자가 머리 속에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해석자는 모든 종류의 짐작과 가정을 만들어 가야 한다. 해석자는 선험 이론을 발화 사례에 맞추어 적합하게 만들고 ‘통과 이론’(passing theory)를 구성하게 된다(‘관용의 원리’ principle of charity). 청자 화자가 공유한 통과 이론은 그들이 속한 공동체가 공유하지 않을 경우도 있다. 결국 의사소통을 위해 청자와 화자가 할 일은, 각 발화를 적합한 통과 이론으로 수렴해 나가는 노력이며, 이는 일반 인지능력만 있으면 가능하다.
먼저, 지시와 관련된 문제를 살피기로 한다. 실제 세계에서 임의의 물체 또는 대상이 있고, 이 대상이 낱말이 따라붙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소박한 민간 과학적 믿음이다. 그러나 언어 그 자체를 들여다 보면, 소박한 믿음대로만 되어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가령, 도서관 서가에 ‘춘향전’이 복본으로 두 권 꽂혀 있었다. 철수와 영이가 각각 한 권씩을 뽑아 빌려 갔다. 철수와 영이는 같은 책을 빌려 갔을까, 아니면 다른 책을 빌려 갔을까? 만일 ‘춘향전’이 물질적 대상을 가리킨다면, 그들은 다른 책(춘향전1, 춘향전2)을 빌려 갔다. 그러나 추상적인 대상(=정보)을 가리킨다면, 그들은 같은 책(춘향전)을 빌려 갔다.
(3가) 동수가 그 ‘집’을 보았고, 순이가 그 ‘집’을 청소하였다.
나) 그 ‘은행’이 지진으로 무너진 뒤, 그 ‘은행’이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다) 우리 반에 있는 윤수는 ‘서태지’다.
라) 컴퓨터는 컴퓨터일 뿐이야!
마) 컴퓨터는 과연 컴퓨터로구나!
(3가)에서 ‘집’이라는 동일한 낱말을 쓰고 있지만, 앞의 낱말은 외부 실체를 가리키고, 뒤의 낱말은 내부 실체를 가리킨다. (3나)에서 ‘은행’은 물질적 대상인 건물을 가리키지만, 후행절에 있는 것은 추상적인 대상으로서 ‘기관’을 가리킨다. (3다)에서도 동일한 내용을 관찰할 수 있다. ‘서태지’는 물질적 대상물로서의 존재를 가리키는 게 아니다. 서태지가 갖고 있는 어떤 특정한 속성이 언급되고 있다(예를 들면, 뛰어난 ‘노래꾼’). (3라)와 (3마)는 ‘X=X’라는 점에서 동어 반복 문장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들은 뜻이 전혀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앞에 나온 낱말은 외적 물질적 대상을 가리키고 있고, 뒤에 나온 낱말은 그 대상의 특정한 속성을 가리키고 있다. (3라)는 컴퓨터의 부정적 속성을 가리키고, (3마)는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속성을 가리킨다.20)
임의의 단어는 언제나 중의적이다. 왜 중의적일까? 외적 대상이 두 가지 이상의 지시 내용을 갖고 있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대상은 우리에게 아무런 손짓도 하지 않는다. 임의 대상에 대해 중의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인지 기관이 갖는 속성에서 말미암는 것이다. 이를 고려하면, 실세계의 어떤 대상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언어의 의미를 확정하려는 시도(이를 ‘지시적 인과 관계’ referential causality라고 부름)는 잘못되었거나, 또는 부분적인 진실만을 언급할 뿐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이제, 언어가 사회적 경험이나 관습, 또는 외부 전문가의 판단으로 결정된다는 주장에서의 문제점을 살피기로 한다. 물론, ‘순금’이나 ‘너도밤나무’를 구별짓는 데에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하다는 점은 누구나 다 인정한다. 그렇지만, 그처럼 과학적 검토를 필요로 하는 대상 이외에, 일반적인 언어 사용은 사회 관습이나 전문가의 판단을 기다린 뒤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촴스키 교수가 들고 있는 예를 보기로 한다.
(4가) Mary expects [ __ to feed herself ]
나) I wonder who [ Mary expects [ __ to feed herself ]]
모든 동사는 논항을 갖는다. (4가)에서 expect(기대하다)는 기대하는 주체와 기대하는 내용을 논항으로 갖는다. 기대하는 내용은 동사 feed(먹이다)로 이루어진 명제이다. 이 동사는 주체와 대상을 요구한다. 여기서 주체는 공범주 대명사 PRO이며, 표면 문장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대상은 그녀 자신으로서 앞에 나온 Mary를 가리킨다. 의미 해석에 관계되는 논항을 모두 써 보면 다음과 같다. [Mary expect [Mary feed [Mary herself]]]. Mary가 자신이 스스로 자신을 먹이는 일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4가)의 형태가 모두 그대로 아무런 외적인 변화가 없이 내포문으로 들어가 있는 (4나)를 보자. 여기에서는 상황이 달라진다. 만일 이 문장 해석이 외적인 사회 환경으로부터 유도되는 것이라면, 동일한 표면 구조를 갖는 (4가)와 (4나)로부터 상이한 해석이 나올 수 없어야 한다. 그렇지만, 표면 구조가 같다고 하여 의미가 동일한 것이라고 믿는 것은 착각이다.21) (4나)에는 동사(核語)가 3개 나와 있다. 첫 번째 동사는 믿음(추측) 동사 부류로서 믿는(추측) 주체와 믿는(추측) 내용을 명제로 갖는다. 특히 wonder(잘 모르겠다)는 영어 어휘의 특질상 믿는 주체가 믿는 내용을 전혀 모를 경우에 쓰이며, 발화 장면에서는 상대방에게 그 내용을 알려 주도록 요구하는 속뜻을 지닌다. 그런데, 믿는 내용 속에는 Mary가 기대하는 내용이 다시 내포문으로 들어 있다. 이 때, 맨 안에 들어가 있는 내포문 동사 feed는 먹는 주체로서 who를 갖고 있고, 먹이는 대상으로서 who herself 자신을 갖고 있다. 영어의 특성상 who라는 의문사가 앞으로 옮겨 나간 것이다. 이제 의미 해석에 관계되는 논항들을 모두 쓰면 다음과 같다. [I wonder [Mary expect [who feed [who herself]]]]. (4가)와 (4나) 사이의 차이를 아는 일은, 누가 가르쳐 주어서 되는 일도 아니고,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어린이들이 전문가의 도움이 없이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다. 영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우리도 또한, (4가)와 (4나)가 ‘누가 누구를 먹이는지’에 대해 서로 다른 내용을 지님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언어가 사회적 규범이나 주위 환경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라면, (4가)와 (4나)는 의미 차이가 나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어긋난 예측이다.
(5가) Sam saw Bill with Ann (샘이 앤과 함께 빌을 목격하였다)
나) Sam saw Bill and Ann (샘이 빌과 앤을 목격하였다)
(6가) Who did Sam see Bill with ____
나) *Who did Sam see Bill and ____
(5)와 (6)에서는 동사 see(보다, 목격하다)가 실현되었는데, 이는 보는 주체와 보는 대상을 요구한다. 그런데 (5가)에서는 수의적인 부가어로서 논항이 하나 더 붙어 있다(with Ann 앤과 함께). 만일 이 부가 논항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 수 없으면, (6가)에서와 같이 who로 표현하여, who을 앞으로 이끌어 냄으로써 의문문을 만들 수 있다.22) 그렇지만, 보는 대상이 두 사람 이상이고, 그 중 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모를 때에는, who가 실현되더라도 결코 (5가)와 같은 방식으로 의문문을 만들 수 없다. 만일, 외부 경험이나 사회적 규범에 의해 의문문 형성을 배웠더라면, 당연히 (6나)와 같은 의문문도 수용 가능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는 어긋나 있다. who 의문문 형성이라는 매우 간단한 사례에서조차 그 운용 방식을 경험으로부터 유추할 수 없는 것이다. (6나)에는 등위 접속구는 하나의 섬처럼 한 덩어리로 움직인다는 내재적인 제약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최상위 원리는 국지성 원리이다). 어떤 것을 하나의 구절로 묶을 것인가 하는 개념은 모든 언어에 들어 있는 선천적인 요소일 개연성이 크다.23)
어느 유치원에서 빨강 구슬과 파랑 구슬을 가지고 ‘가깝다’라는 단어의 선천적인 개념에 대한 실험을 하였다. 유치원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빨강 구슬을 네모난 상자 안에 집어 넣고, 파랑 구슬을 그 상자 밖에 놓았다. 어린이들에게 어느 구슬이 그 상자에 가까운지를 물었다. 그 대답은 모두 파랑 구슬이었다. 왜 그럴까? 어느 누구도 어린이들에게 ‘가깝다’라는 개념이 외재적 대상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준 일이 없다. 그렇지만, 어떻게 어린이들은 상자 밖에 있는 구슬이, 상자 안에 있는 구슬보다 상자에 더 가깝다고 대답할 수 있었을까? 촴스키 교수는 선천적이고 내재적 개념 때문이라고 본다.
더 극단적인 사례로서, 태어나면서부터 맹인이라 하더라도 see와 look[=see + intention] 사이의 구분(우리말에서는 ‘보다 : 바라보다’의 구분)을 알고 있음을 지적한다. 설령 입력이 불충분하더라도, 완벽하게 언어 능력을 정상적으로 발달시키는 것이다.24) 이를 ‘자극 빈곤’의 문제(또는 플라톤의 문제)라고 부른다. 비록 자극이 불완전하고 불충분하더라도, 그게 우리의 언어 능력이 촉발되도록 시발점 역할을 하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동일한 해석을 하며, 무리 없이 의사소통을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일반적인 언어 사용 및 그 해석이, 항상 경험 요소를 전제로 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우리의 믿음을 사회 규범에 맞추어 한쪽으로 고정시킬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상에서 언어 철학계를 주도하고 있는 주장을 놓고 지시적 인과 관계에 어떤 한계가 있으며, 사회적 규범으로서 의미를 규정하려는 시도에 어떤 결정적 반례들을 만나는지에 대해 소략하게 살폈다. 이런 논의를 요약하면서, 필자는 촴스키나 콰인 계열의 철학자들 가운데 오직 어느 한 쪽만이 완벽한 승리를 거둔다고 보지 않는다. 촴스키를 공격하고 있는 철학자들은 주로 과학적 대상을 언급하는 방식을 염두에 두고서, 그런 대상들이 지시되는 방식은 아무나 임의대로 결정하는 것이 아님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들이 딛고 서 있는 발판은 일반 ‘인지 능력’이다. 그러나 촴스키는 언어 행위와 관련해서는 고유한 ‘언어 능력’을 상정해야 함을 주장하고 있고, 언어 능력을 쉽게 드러내는 결정적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렇지만, 촴스키의 논제에도 여전히 문제가 남아 있다. 우리 인간은 자발적으로 고정되는 선천적인 언어 능력만을 가지면 되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몇 천년을 내려오면서 계속 사회를 이루고, 그 사회를 유지시키기 위해 여러 제도들을 고안해 왔다. 이런 사실은 우리에게 언어 능력만이 유일한 것이 아니라, 이것 이외에도 다른 어떤 능력을 필요로 함을 드러내 준다. 촴스키 교수도 이 점을 인식하고 인정하고 있다. 그는 이런 능력을 ‘과학 형성 능력’(science forming faculty)이라는 말로 부른다. 물론 이 용어가 1차적으로 과학적 발견을 위한 어떤 능력을 가리키고 있음에 틀림없지만, 언어 능력과는 다른 인지 능력이 우리 인간 사회를 만들고 다른 일들을 수행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과학 형성 능력이라는 특정 능력을 상정하는 일은, 자칫 무한 퇴행(infinite regression)의 덫에 걸려, 수많은 능력들을 만들어 내야 할지도 모른다.25) 이 점을 고려한다면, 필자로서는 ‘과학 형성 능력’이라는 낯선 용어를 쓰기보다는, 차라리 일반 ‘인지 능력’이라는 표현을 쓰는 편이 더 낫다고 본다.
필자는 촴스키의 언어 능력도 우리 두뇌 속에 필요한 부서이고, 뿐만 아니라 언어 영역 이외의 여러 인간 행위들을 설명할 수 있는 일반 인지 능력도 상정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언어 능력을 관장하는 두뇌 부서(브로카 및 베르니케 영역들)를 결정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면, 다른 두뇌 부서의 역할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필자는 촴스키와 콰인 계승자들의 주장이 서로 양립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 점은, 각 논의가 자신들의 논변을 옹호하려고 예로서 들고 있는 내용을 검토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콰인 계승자들의 예들은 다수 언어 능력을 함의하지 않고 일반 인지 능력만을 전제할 수 있는 예들을 들기 일쑤이다. 그러나 촴스키의 예들은 언어 능력을 함의하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다. 지시에서의 인과 관계 고정에 대한 물음만 해도 그러하다. 과학사에서 줄곧 지시대상이 변해 온 특정한 사례들은 외부의 대상으로부터 우리의 인식을 고쳐 나가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과학적 지식이나 배경이 없이도 일상적으로 쓰고 있는 개념이나 대상들은 반드시 과학자나 전문가의 개입을 필요로 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 일반적인 대상들의 경우에, 우리는 내적으로 임의의 대상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이고, 그러고 나서 다시 그 대상의 속성을 특수하게 고정시켜 나가는 일을 수행한다. 어린이 언어 습득에 대한 연구들이 이런 점을 극명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26)
Ⅳ.
4-1. 촴스키 교수의 언어 철학 논의에서 우리가 어떤 점을 배울 수 있고, 어떤 점이 한계로 지적되어야 하는가? 촴스키 교수가 스스로의 생각에 노예가 되지 않고, 계속 자신을 발전시켜 나왔듯이, 우리도 또한 촴스키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곳에서는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으로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각각 둘 정도만 언급하기로 한다.
4-2. 우선, 그가 언어를 과학적으로 연구하면서, 매우 간단하면서도 적용력과 설명력이 높은 이론을 구성하려는 지침은, 과학적인 사고를 수행하려는 어느 누구에게나 궁극적인 목표가 될 것이다. 촴스키 교수가 초기에 전통적인 범주 개념(명사, 동사 따위)을 따르면서, 마지막으로 도달한 종착지는 범주를 벗어버린(bare) 구조 개념이다.27) 간단히 말해, 붙일 것은 붙이고(붙을 수 있는 것은 붙게 하고), 뗄 것은 떼라는 얘기이다. 그런데, 붙이고 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해답은 어휘의 의미 자질 속에 들어 있다.
4-3. 그렇다면, 어휘 의미 자질은 보편적인가? 촴스키 교수가 생각하고 있는 내용은 보다 보편적인 큰 그림 쪽에 무게를 두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하나의 보편적 통사 운용 원리 아래, 어휘 상의 변이가 각각의 개별 언어의 특징을 결정짓는다는 주장을 놓고 보면, 또한 특수한 측면도 고려하고 있는 듯하다. 즉, 동시에 보편 자질과 매개인자로 간주될 수 있는 개별 자질들이 모두 어휘의 내항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필자의 편향된 좁은 독서 범위에서만 볼 적에(줴킨돞 및 프슽욥스키를 빼고), 동사를 중심으로 하여 이런 두 가지 측면을 가장 잘 구현해 주는 연구가 탤미(Leonard Talmy)와 러빈 외(Beth Levin)들에 의해 수행되어 왔다.28) 탤미는 일반 인지 능력에 기대어 어휘의 보편적 자질과 매개인자 요소들을 상정한다. 러빈은 어휘 변동에 대한 직접적인 분석을 통해 일반화된 어휘 의미 자질을 찾아나가고 있다. 이런 선행 연구 사례를 바탕으로 여러 언어에서 유사한 연구가 상당히 진행될 적에, 우리는 무엇이 보편적이고(또한 일반 인지 능력으로 어떤 내용을 이양할지를 결정 가능함) 무엇이 매개인자로 상정되어야 하는지를 더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매개인자들도 자의적이지 않고, 뭔가 통제된 원리에 의해 상정되어야 한다면, 그 작업은 더욱 ‘언어 능력’의 실체를 드러내 주는 증거가 될 것이다.
4-4. 다음, 촴스키 교수의 논의에서 동의하기 어려운 대목은 언어 사용 또는 창조성에 관한 태도이다. 그는 이것을 ‘신비의 문제’로 치부하고 있다. 이는 창조성이 모순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가 창조성의 내용을 다음처럼 정의해 보자. “창조성은 X이다.” 만일, 누군가가 X를 벗어나는 것을 만들어 내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비 창조성일까? 그것도 또한 창조물일 수밖에 없다. 이전에 없는 어떤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 때문에 창조성(그리고 그 언어적 구현인 언어 사용)은 정의될 수 없는 그 무엇―즉, 신비라고 본다. 과연 그럴까? 이 논의 속에는 덫이 들어 있다.
모순의 문제는 우리 생활 도처에서 찾아지는데, 이를 처음으로 형식화한 사람은 러셀이다.
(7가) *[A ∈ A]
나) [A ⊆ A]
(7가)는 임의의 집합 A가 자기 자신을 원소로 가져서는 안 됨을 표시한다. 이는 모순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대신에 임의의 집합 A는 자기 자신을 부분 집합으로 가질 수 있다. 여기서는 모순이 초래되지 않는다.
만일 (7가)에서, 임의의 집합 A가 자기 자신을 원소로 가질 수 있는지 여부를 검사하려면, 또 다른 임의의 상위 공리계(a super-axiom)가 심판을 하기 위해 도입되어야 한다. 이 공리계는 또 다른 상위 공리계를 부른다는 점에서, 무한하게 나가더라도 미 결정적(undecidable: 괴델의 명제)일 수밖에 없다. 창조성을 창조(정의)한다는 것은 (7가)의 형식을 빌리고 있으므로, 모순이 될 수밖에 없다. 촴스키는 이 점을 고려하기 때문에, 우리의 소박한 직관과는 전혀 다르게 언어 사용 문제를 신비의 문제로 못박아 버린다.
그렇다면, 언어 사용(창조성)의 문제를,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신비의 우주로부터 이 지구 상에 있는 우리들 앞으로 끌어내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 해답은 (7나)의 형식을 이용하는 것이다. 창조성의 문제를 총체적이나 전반적으로 다루지 않고, 오직 부분적으로(또는 최대치를 추구해가면서) 다루는 방식이다. 이는 결코 모순이나 신비를 초래하지 않는다. 쉽게 얘기하면, 약한 의미의 창조성이나, 또는 이미 있는 것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부분적 창조성은, 모순이나 신비의 문제로 빠져들지 않는다. 필자는 이 태도가 온당한 것으로 믿고 있다. 언어 사용의 문제는 전반적이고 총체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다. 다만, 부분적이고 지엽적으로 다루어 나가면서, 어떤 전형을 넓혀 나가는 연구를 진행시켜 나가야 하는 것이다.29)
4-5. 보편원리와 매개인자의 내용들에 대한 논의에 대해서는, 필자가 우연하고 다행스럽게도 영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기 때문에, 그 후보들을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 직관에서 검토할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임의의 내용이 보편원리라면, 영어에도 적용되어야 하지만, 필자가 매일 쓰고 있는 한국어에도 적절히 들어맞아야 한다. 이런 점에 대해서는 촴스키 교수의 글을 읽는 외국인이라면, 누구나 쉽게 자신의 모국어 직관과 대조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제안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어휘화 유형(lexicalization pattern)에 대해서도 또한 그러하다고 본다.30) 따라서, 이 부분은 크게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가기로 한다.
4-6. 마지막으로, 필자가 제기하고 싶은 물음은 다음과 같다. 언어 연구 계획을 매우 단순화시키는 데에는 성공하였지만, 이전에 원리들이 여전히 다른 쪽으로 숨어들었을 개연성이 있다. 필자는 이미 어휘 내항에 그런 사실들이 깃들어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런데 정작, 화용론 및 조어론에 대한 부분은 최소주의 연구 계획 속에서 어디를 찾아보아야 하는 것일까? 필자는 개인적으로 조어의 핵심적 특징이 비 통사적이라고 믿고 있고, 이들을 매개하는 것은 논항을 허용하는 개념 구조라고 본다. 이는 넓은 의미에서 연산으로 간주할 만하다. 따라서 논리 형식 표상의 도출 과정 속에서 일정 단계에 이르면 이 내용을 넣을 수 있을 것이다.
4-7. 그런데, 화용론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화용에 관련된 전제와 함의들을 모두 어휘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촴스키 교수의 예문을 이용하여 그 한계를 지적하기로 한다.
(8가) He painted the house brown(그는 그 집을 갈색으로 칠했다)
나) He painted the brown house(그는 그 갈색 집을 칠했다)
영어에서는 동일한 낱말들이 배열을 바꾸면 다른 뜻을 만들어 낸다(구조 의존적).31) (8가)는 이른바 작은 절(small clause)을 갖고 있지만, (8나)는 수식구를 갖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의미가 다를 뿐만 아니라, 전제와 함의가 모두 다르다. (8가)는 갈색으로 칠해지는 집이 최소한 그 이전의 색깔이 갈색 이외의 것이어야 한다. 즉, 갈색이 아닌 집채를 갈색으로 칠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8나)는 미리 갈색으로 칠해진 집채가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그 갈색 집채가 다시 갈색으로 칠해지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색깔로 칠해지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8나)로부터 정보를 얻을 수 없다. 다만, 세계 정보에 기대어 추측할 수 있다. 갈색 집을 칠했다면, 그 색깔이 바랬기 때문에, 다시 갈색 칠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다시 말끔하게 갈색 칠을 덧입혔을 수 있다. 이런 해석이 보장되려면 (8나)는 (8다)처럼 되어 있다가, 경제성의 원리나 최적성 원리에 의해 뒤에 있는 소절의 핵어가 생략되어 (8라)의 형상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8다) He painted [ [the brown house] brown]
라) He painted [ [the brown house] ______]
이렇게 간단한 문장에서조차 함의와 전제가 깃들어 있다면, 언어 및 언어 사용을 다루려는 연구는, 이 점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취급해서는 안 된다. 이런 화용적 차이점들은 어휘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모두 동일한 어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촴스키 교수의 주장을 충실히 그대로 좇는다면, 이 차이들을 일반 인지 능력으로 돌려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어디엔가 이런 차이들을 구별해 내는 층위를 설정해 내는 것이 마땅하다. 논리 형식 <LF> 층위가 지시와 관련된 내용들을 다루는 층위라면, 우리는 다른 어떤 층위에서 화용상의 전제와 함의들이 연산과정을 통해 수행될 것으로 상정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층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 일반 인지 능력과의 변별성을 어떻게 드러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잘 알 수 없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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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 편(1996) <인지 심리학의 제 문제 1: 인지과학적 연관> 성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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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현(1994) <필연성의 문맥적 이해> 이화여대 출판부
한국분석철학회 편(1991) <비트겐슈타인과 분석철학의 전개> 철학과 현실사
_________________(1993) <실재론과 관념론> 철학과 현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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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인(허라금 옮김 1993) <논리적 관점에서> 서광사
크립키(정대현 김영주 옮김 1986) <이름과 필연> 서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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펕넘(김영정 옮김 1992) <표상과 실재> 이화여대 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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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66 <Cartesian Linguistics 데까르트 언어학>, 1972 <Language and Mind 언어와 정신>, 1975 <Reflections on Language 언어 수상록>, 1980 <Rules and Representations 규칙과 표상>, 1986 <Knowledge of Language 언어 지식> 등이 있다. 이 가운데 <Cartesian Linguistics>가 이환묵(1971)<변형문법의 이론적 배경> (전남대 출판부)으로 번역되었고, <Knowledge of Language>가 이선우(1990)<언어에 대한 지식> (민음사)으로 번역되었다. <Reflections on Language>은 촴스키 교수 자신이 자주 인용하고 있는 책이지만, 아직 번역되어 나온 바 없다. 90년대 이후에 언어와 언어 철학을 다루고 있는 글들에 대해서는 참고 문헌을 보기 바란다.
2) 촴스키 교수의 전체 저작 목록은 Neil Smith(1999:243~249)에 올라 있는데, 총 149편 중 저서가 무려 57권이다.
3) 1993c <언어와 사고>에서 촴스키는 프레게의 ‘이성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우리 인간 인식을 떠나 제 3의 존재로서 독립되어 있는 플라톤 식의 이성(이데아 세계)을 부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내세우는 ‘내재주의’는 ‘이성주의’와 엄격히 구분되어야 옳다.
4) 그러나 지배를 결정하는 밑바닥 성격으로서 성분 통어(c-command)의 개념은 ‘국지성’ 원리를 보장해 주는 개념이므로, 여전히 새 이론 속에서도 유지되고 있다(그의 책 11면과 40면 참고).
5) 원리 및 매개인자라는 개념은 보편성 및 특수성(개별성)에 대한 물음과 일치한다. 촴스키 교수는 특수성이나 개별성이 반드시 보편성 위에서 구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절대성 및 상대성에 대한 물음도 비슷하게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상대성이 구현되는 터전이 반드시 절대성이라는 마당 위에 뿌리를 내려야만, 자기 모순 없이 논의가 가능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집합 개념으로 표현하면, 전체 집합 U는 절대성에 관계되고, U에서 나올 수 있는 무수한 임의의 부분 집합 S는 상대성에 관계되는 것이다. parameter는 필자가 종전에 ‘매개변항’이라고 써 왔다. 어떤 사람은 variables이 또한 ‘변항’으로 번역되고 있으므로, 이를 피하여 ‘매개변인’이라는 용어를 쓰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변인’이라는 말도 일상 언어의 함의를 가지기 때문에, 우리가 의도하는 바를 꼭 달성한다고 말할 수 없다. 여기서는 일상 언어에서 쓰이지 않지만 자연과학이나 공학에서 자주 쓰고 있는 번역 용어 ‘인자’를 받아들여, parameter를 ‘매개인자’로 번역해 두기로 한다.
6) 최소성(Minimal)은 형식적 도구(formal devices)에 적용되는 잣대이다. 그렇지만, 경제성(economy)이나 최적성(optimal)이란 개념은 인지(cognition)에 관련된 잣대이므로, 이를 같이 도입하는 것은 자칫 서로 모순될 경우를 전혀 배제할 수 없다. 촴스키 교수는 1999년의 논문에서 기능범주의 핵어로 투영된 임의 구절을 ‘phase’라고 부르고, 동사들이 동일한 형식적 틀을 지닌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C [TP] : v [VP]” 사이의 일반성을 포착하기 위해, TP와 VP를 실질범주(substantive)로 상정하고 있다. 이 표상은 형식적인 틀로서만 보면 서로 대비될 수 있고, 계열체를 이룰지 모른다. 그렇지만 문제는, 시제를 표현하는 핵어가 항상 동사가 투영하는 구절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이를 “[TP[VP]]”로 표시할 수 있겠는데, 이 점을 위 계열체는 표시해 줄 수 없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임의의 실질범주가 이동이 자유로운 ‘국지성’을 보장받기 위해 기능범주에 의해 닫혀져야 한다”고 진술하는 선에서 그치는 것이 옳을 듯하다.
7) 카아납(Carnap) 같은 대가 또한 자신이 어느 시기에 그렇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이렇게 생각한다는 표현을 자주 썼다고 한다. 이는 학문에 대한 그의 진지성과 성실성을 드러내 주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지, 결코 그의 불성실성로 매도되어서는 안 된다. 괴델(Gödel)의 미 결정성(undecidability) 논제는, 우리가 결코 완벽한 것은 얻을 수도 없으며, 설사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완벽함을 증명할 수 없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8) 이 점을 164면과 165면에서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탐구는 일상적인 개념을 가지고 시작하겠지만, 그러나 표면적인 차원을 넘어서면 믿을 만한 안내자가 되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Inquiry may begin with ordinary notions, but without expecting them to be a reliable guide beyond a superficial level) “상식적 의미의 개념들이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It comes as no surprise that common-sense notions are not of much use and that pickings remain thin) 130면에서는 언어를 다루기 위해 철학에서 쓰이는 용어들이 일상 언어로 번역될 수 없음도 지적한다(but there can be no intuitions about these technical notions―denote, refer, true of, etc―...that has no counterpart in ordinary language: this is why Frege had to provide a new technical meaning for 'Bedeutung,' for example).
9) 이 점은, 소쉬르가 오랜 동안 고민해 온 대립 체계를 표현하기 위해, 랑그․빠롤, 기의․기표 따위의 용어를 선택하면서, 개념에 대한 이해가 중요한 것이지, 용어 선택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본 태도와는 대립된다.
10) 연산(computation)이란 말은 입력과 출력으로 이루어진 계산 방식이다. 계산(calculation)은 좌변 항목과 우변 항목이 필요 충분조건으로 주어져 서로 동치여야 한다. 그러나 연산은 충분 조건만이 주어져 있으므로 그런 제약이 없다. 생각의 과정이 연산 과정이라는 생각은 튜어링(A.Turing 1950)에서 처음 제기되었다(http://nongae.gsnu.ac.kr/~jhongkim에 번역이 올라 있음). 80년 대 이후에 일반화된 표상(representation)이란 말은 연구자에 따라 달리 쓰여지는 용어이다. 심리학에서는 접두사의 re를 우리 머리 속에 세계를 재 구성한다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철학에서는 개념이란 말과 동일한 것으로도 쓴다. 촴스키 교수는 두뇌 연산에서 판독 가능한 기호들의 연속체(결합체) 정도로 쓰고 있다. 즉, 추상화시킨 머릿속 언어 자질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11) Lyle Jenkins(2000)<Biolinguistics: Exploring the Biology of Language>(Cambridige UP)에는 모두 6장이 있는데, 통합화의 문제, 지식 및 언어 사용, 언어 성장, 언어 기제, 언어 진화 들을 다루고 있다. 언어 연구를 신경 세포망(neural network) 이론과 관련짓는 연구도 90년대 들어 크게 부각되었는데, 이를 ‘연결주의’(connectionism)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12) 개념-의도(conceptual-intentional) 체계라는 용어에서, ‘의도’라는 말은 철학에서 언급되는 지향성(intentionality)으로부터 따온 듯하다. 다른 글에서는 ‘의도’라는 말 대신에 ‘사고와 행동’(thought and action)이라는 말을 쓴 적도 있다. 이런 용어들은 머릿속 언어의 영역 밖에 있는 대상들을 가리키므로, 촴스키 교수의 글에서 이들에 대한 상세한 정의를 찾을 수 없다.
13) interface를 접합 부위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다른 일반 인지 능력과 서로 정보를 주고 받기 위해 맞물려 있는 층위인 것이다. 여기서는 언어 능력과 일반 인지 능력 사이의 경계를 이루는 층위라는 뜻을 살려, 경계면 층위라고 번역해 두기로 한다.
14) p.12에서 자리 옮기기(displacement) 속성이 오직 인간 언어에만 있고(전형적인 사례가 Move-α이며, 화제 설명 구조, 특정성 구조, 행위주 역동성 구조 등에서도 찾아진다), 형식 언어와 같이 다른 체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요소라고 언급한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가까운 예로, 프로그램을 만드는 C 언어에서 pointer라는 함수가 있다. 이는 임의 입력 요소를 임의의 곳으로 옮겨 주는 역할을 한다. 그 방법은 입력 요소에 대한 기억 창고 속의 주소와 입력 요소의 내용을 따로 처리하는 것이다. ‘자리 옮기기’(displacement)라는 말은 흔히 언어학 개론에서 언어의 특성을 언급할 적에 ‘전위’(轉位)라는 낯선 말로 번역되기도 한다. 또한 비유적으로 확장되어, 벌이 통신을 할 적에 8자 춤으로써 꿀이 있는 곳을 알려 주는 행위를 가리키는 데에도 쓰인다. 즉, 직접적인 자극과는 무관하게, 어떤 상징 행위를 하는 일도 가리키기도 하는 것이다. 이 용어는 희랍 시대 때부터 쓰여져 왔으며(Heim 1987: ‘영역 초월’의 의미), 따라서 용어 사용에 주의가 필요하다.
15) p.15에서 다시 다음처럼 언급하고 있다. “해석 불가능한 형식 자질들은 국지적인 부합 자질과 관련하여 지워져야 하며, 경계면에서 의미 해석에 요구되는 자리 옮기기 속성을 만들어 낸다.”(uninterpretable formal features must be erased in a local relation with a matching feature, yielding the displacement property required for semantic interpretation at the interface)
16) 낱말을 해석하는 요인으로 다음과 같은 범주 자질들을 예시하기도 한다. 질료적 구성(material constitution)․설계(design)․의도된 특성화 용도(intended and characteristic use)․관습적 역할(institutional role) 등(p.15).
17) 우리의 언어 직관과는 아주 다른 모습으로 해체될 요소로서, 제 7 장 ‘내재주의자의 탐구들’에서 의문사나 부정 대명사를 들고 있는데, 다음과 같은 표상을 갖는다(p.175).
John saw nobody ⇒ [QUx, x a person] [John saw x]
18) 최근에 어휘의 의미표상을 어떻게 연구하고 있는지를 보려면, 졸고(1999) “어휘의 의미표상에 대한 연구”<배달말 25>를 참고하기 바란다.
19) 기억 창고는, 3겹 두뇌 가정(맥밀런 가정)에서 영구 기억일수록 제 1 두뇌 영역에 들어 있을 것이고, 짧은 기억일수록 제 3 두뇌 영역(피질부)에 들어 있을 개연성이 있다. 예를 들면, ‘자기 정체성’에 대한 영구 기억은 ‘해마’ 부근의 기억 창고 속에 들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단기 기억들은 대뇌 피질부의 어느 부서를 차지하고 있겠지만, 장기 기억들도 그럴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필자의 주변에서 아직 심도 있게 논의된 바를 찾을 수 없었다. 어휘 기억 창고들의 분포가 다양할 것인지, 아니면 통합되어 하나의 창고로 되어 있을 것인지에 대한 논의 또한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프린스턴 대학의 심리학자 밀러(G. Miller)는 말하고 듣고 쓰고 읽는 어휘들의 기억 창고가 따로 존재할 가능성을 상정하고 있다. 이 생각이 사실이라면, 이 창고들은 최소한 서로 공유된 의미망을 가져야 할 것이다.
20) 배경과 초점도 동시에 중의적으로 교차될 수 있다.
(가) I can paint the door to the kitchen brown (초점 figure)
(나) I can walk through the door to the kitchen (배경 ground)
(가)에서 door는 행위의 대상이며 목표인 초점이다. 그러나 (나)에서는 행위가 일어나게 도와 주는 배경이 된다. 임의의 단어가 초점도 되고, 배경도 되는 것은 어떤 동사의 논항이 되느냐에 달려 있다.
21) 더 간단한 구절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순이 사진”에서 ‘순이’는 최소한 두 가지 뜻을 지닌다. 하나는 사진에 대한 소유주이다. 다른 하나는 사진에 찍힌 피사체이다. 만일 순이가 관형절 구조에서 유도된 것이라고 하면, 의미 폭발을 막을 수 없다. 이런 측면을 구조적 중의성이라고 불러, 앞의 (3)에서 보았던 어휘적 중의성과 구별한다.
22) 우리말에서는 접사들이 풍부히 있으므로, 이동을 하기보다는 의문을 표시하는 접사를 부착시키게 된다. 이 점은 매개인자 설정으로 언어 사이의 차이를 설명하게 된다. 영어는 이동되어 있음을 더 나타내기 위해 뜻없는 동사 도입과 어순 바꾸기를 더 추가해야 된다. 입말일 적에는 꼭 이런 절차가 없이 어조만을 올려 표현할 수도 있다.
23) 이동이 자유롭다고 얘기되는 우리말에서도, 이동이 불가능한 결정적 반례들이 있다.
(가) 돌이가 장난감을 고철로 만들다 ≠ 돌이가 고철로 장난감을 만들다
(나) 최영 장군이 황금을 돌로 보다 ≠ 최영 장군이 돌로(돌안경으로) 황금을 보다
(다) 철이가 경이를 미녀라고 보다 ≠ 철이가 미녀라고 경이를 보다
이런 차이는 동사의 특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앞에 제시된 <NP가, NP을, NP로>를 갖는 동사는 3개의 논항을 요구하는 동사이다. 이 계열의 동사는 ‘생각하다’는 의미가 덧대어지면 (다)에서처럼 <NP가, NP을, CP라고>라는 형상으로 실현되기도 한다. 그러나 뒤에 제시된 <NP가, NP로, NP을>을 갖는 동사는, 애초에 2개의 논항을 요구하는 동사인데(<NP가, NP를>), 여기에 VP 위에 ‘NP로’라는 부가어가 자리를 잡고 있는 구조이다. 최대 투영(XP)의 부가어는 그 태생의 한계 때문에, 내부 논항과 핵어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수 없는 것이므로, 결국 구조적으로 자유로운 이동을 봉쇄하고 있는 셈이다.
24) 제 5 장 ‘자연적 대상물로서의 언어’(p.127)에서 다음처럼 말하고 있다. “가장 기본적인 개념은 인간 의지 행위와 같은 복잡한 사안에 결정적으로 의존하는 듯하며, 이런 요소는 관련 경험이 없이도 이해되고, 언어 능력의 복잡한 속성과 다른 것에 의해 결정되는 듯하다.”(Even the status of thing, perhaps the most elemetary concept we have, depends crucially on such intricate matters as acts of human will, again something understood without relevant experience, determined by intrinsic properties of the language faculty and others)
25) 가까운 예로, 예술 능력, 추리 능력, 상상 능력 따위를 들 수 있다.
26) 이를 전체성 가정과 배타성 가정이라고 부르고 있다. 전체성 가정을 콰인 교수의 예를 빌려 표현하자면, 원주민이 ‘개버가이!’라고 외쳤을 때, 현지 조사 언어학자는 그것을 토끼 전체를 가리킨다고 기술할 것이다. 이는 선천적 언어 능력을 부여받은 모든 인간에게서 공통된 것이다. 그런데, ‘개버가이’라는 말이 토끼라는 대상을 전체적으로 가리킨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지만, 똑 같은 상황에서, ‘구부구이!’라고 외쳤을 때, 이번에는 토끼의 특정한 속성을 가리킨다고 기술할 것이다. 이때 무엇이 토끼의 주된 속성인지는 상황이나 문화권에 따라 차이가 있을 것이므로, 원주민이 토끼를 기술하는 다른 용법을 주목해야 한다. 예를 들면, 우리 설화처럼 용궁에 갔다가 간을 말려 두었다고 거짓말을 둘러대어 위기를 벗어나는 사례를 접했다면, 슬기롭다는 속성을 부여할 것이고, 만일 겁을 먹고서 크게 눈을 뜨고 있는 사례를 접했다면, 겁보라는 속성을 부여할 것이며, 잡히지 않으려고 줄행랑을 쳤다면 빠르다는 속성을 부여할 것이다.
27) bare라는 말을 ‘필수’라고도 번역한 경우도 있고, ‘소체’(素體)라고도 번역한 경우도 있다. 필자는 이 말의 함의와 배경을 고려하여, 다소 길지만 “범주라는 껍질을 벗어던진” 또는 “범주를 벗어버린”이라고 써 주는 것이 읽는 이들에게 도움을 줄 것으로 믿고 있다. 너무 길어서 흠이라면, 최소주의 정신을 구현하기 위한 개념이므로, bare라는 말을 minimal ‘최소’라는 말로 바꾸어 써도 무방할 것이다.
28) 개인적으로 탤미의 글 가운데에서도 특히 ‘힘의 역학’을 읽고 느낀 바가 많다. 필자는 사역의 두 형태를 그저 기술적인 모습으로 이해하고 있었는데, 그의 글을 읽고 비로소 왜 두 가지 사역 형태를 가져야만 하는지 논리적인 설명을 얻을 수 있었다. 핵심은 하나의 힘만 남았느냐, 맞설 힘들이 여전히 버티고 있느냐는 개념이다. 러빈의 글에서는 동사 변동을 다루고 있는데, 하나의 동사가 왜 여러 가지 뜻을 갖게 되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큰 지도를 갖게 되었다. 동작 또는 행위, 그리고 그 결과나 상태라는 개념이 핵심이다. 거시적으로 보면, 이는 송나라 때에 한자의 다의성을 동․정(動․靜) 자음(字音)으로 포착하려고 했던 직관과 동일한 내용이다.
29) 이 말은 ‘부분 집합’으로서의 창조성이 모순을 초래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촴스키 교수도 강 생성 및 약 생성을 구분한다는 점에서, (7가)와 (7나)의 가능성을 익히 알고 있다. 그렇지만, 언어 사용의 문제에만은 그가 유독 ‘강 생성’(strong generation), 즉 (7가)의 모순 구조만을 부여하는지 필자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한편, 그롸이스(Paul Grice 1989) <낱말들에 대한 연구>(하바드대 출판부) 제 18 장 ‘의미를 다시 찾아서’에 보면, 상식에 바탕을 두고 무한 퇴행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7가)의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여 낱말들의 사용 방법을 다룰 수 있다고 상정하고 있다. 그롸이스는 이를 상식에 바탕을 둔 접근이라고 부르고 있다.
30) 제 7 장 ‘내재주의자의 탐구들’ p.176에 보면
(가) John X-ed Mary to take her medicine.
의 구조에서 X 자리에 들어갈 수 있는 {persuade, force, remind}를 언급하고 있다. 영어에서 persuaded가 쓰이면, Mary가 알약을 먹었음을 함의한다. 그렇지만 그와 유사한 우리말에서는 그런 함의가 주어지지 않는다.
(나) 철수가 영이에게 알약을 먹도록 설득했다. (→영이가 알약을 먹었는지 알 수 없음)
왜 그러는 것일까? 그 차이는 간단하다. 어휘화 유형이 다르기 때문이다. 영어 persuade는 [행위 동작 + 결과 상태]를 모두 지시한다. 그렇지만 우리말 ‘설득하다’는 다만 [행위 동작]만을 가리킬 뿐이다. 어휘화 유형의 차이를 지적하더라도 남는 문제가 있다. 언어 사용이 보편적이라면 우리말에서는 도대체 어떻게 [결과 상태]를 나타낸단 말일까? 우리말은 소위 보조동사를 이용한다. ‘설득해 내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다. 보조동사는 일련의 함의들을 담고 있다. 졸고(1993) ‘부사형 어미 구문과 논항구조에 대한 연구’를 참고하기 바란다(이 글은 압축 파일 형식으로 http://nongae.gsnu.ac.kr/~jhongkim에서 내려받을 수 있음).
31) 우리말은 형태소가 덧붙음으로써 다른 화용 의미를 만들어 내며, 아주 생산적이다. 필자는 통사 층위 위에 다시 화용 층위를 덧붙인 모습이 우리말의 발화 모습이라고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