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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득황 지음|남강기획출판부 |
2005.1.5|ISBN 899560980X|364쪽|A5 |
제15장 청(淸) 치하(治下)의 만주(滿洲)
1.후금(後金)의 발흥
명(明) 초기에 만주에 살고 있던 여진(女眞 혹은 女진)은 원(元)과 명 두 나라에 걸쳐 약
3세기 동안 가수(假睡) 상태에 놓여 있었으나 건주여진(建州女眞)에서 누루가치가
일어나면서 만주사(滿洲史)뿐만 아니라 중국사(中國史)에 큰 이변을 가져왔다.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에 걸쳐 만주에 살고 있던 여진은 해서(海西)여진, 야인(野人)여진,
그리고 건주(建州)여진의 3대 여진으로 나뉘어 진다.
해서여진은 대체로 송화강 북쪽 일대에 살고 있었고 다른 부족들보다는 다소나마
문화가 앞서 있어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야안 여진은 흑륭강 하류와 연해주 일대에 살고 있었다.
조선과 문제를 가장 많이 일으켰던 건주여진은 원래 만주 중부지방의 오더리성(城),
활아성[火兒阿城(화아아성)], 터원성[托溫城(탁온성)] 등에 살고 있었다.
건주여진 중에서도 오더리족은 상만호(上萬戶)였던 멍거테물[孟哥帖木兒)]의 일족(一族)으로
고려 말 동개원[東開原:동녕(東寧)]을 통해 남족으로 내려와 훈춘[훈春] 방면에 자리 잡기
시작했고 조선의 눈치를 보면서 두만강 좌우(左右) 연안에 정착하였다.
한편 같은 건주여진으로서 활아성의 두목으로 지금의 삼성(三姓)에 거주하며 명과 가까운
관계를 맺어 오던 아하추[阿合出(아합출)]는 일족(一族)을 이끌고 멍거테물과 동서로
갈라져 명의 변방인 휘발하(輝發河) 유역의 산성(山城) 방면에 정착하였다.
오더리의 일족이 두만강 연안에 정착하자 명은 회유 공작을 폈으나 이보다 먼저 조선이
적극적으로 여진족에 대한 회유를 시도했기 때문에 두만강 연안뿐만 아니라 압록강
북쪽의 여진족까지도 조선에 공물을 바치며 첩지를 받아 갔다.
이와 같은 상태에 있던 여진이 건주여진에서 누루가치가 나오면서 모든 여진이
통합되고 급기야는 청(淸)을 세우기에 이른 것이다.
청(淸)은 건국 초기에는 나라 이름을 후금(後金)이라고 하였는데 후금은 금(金)을
재현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두만강 하류에 자리 잡았던 건주여진은 다시 서쪽으로 이동하여 허투아라[赫圖阿拉(혁도아랍)]
를 중심으로 자리를 잡고 일어났다.
이들은 허투아라에서 다시 갈라져 건주위(建州衛), 건주좌위(建州左衛), 건주우위(建州右衛)의
3파(派)를 형성하였다.
청의 태조가 된 누루가치[努兒哈赤(노아합적):Nurgach]의 아버지는 탁스[塔克世(탑극세)
혹은 塔世(탑세)]이며 조부는 죠안창[覺安昌(각안창)]이다.
그런데 당시 건주우위의 도지휘로 있던 왕간[王고(왕고)]이 명나라 장수에게 피살되면서
왕간의 부하였던 죠안창과 탁스 두 부자도 명나라 군사에게 피살되었으므로
누루가치의 마음속에는 명에 대한 원한이 가득 차 있었다.
그렇지만 누루가치는 마음속의 원한을 감추고 명에 접근하여 도독첨사(都督僉事)
용호장군(龍虎將軍) 등의 벼슬을 얻은 후 이 지위를 이용하여 자기의 세력을
쌓아올리는 데 힘썼다.
누루가치는 약 30년 간 명의 세력을 이용하여 위협, 토벌, 회유, 통혼 등 갖가지 수단으로
여진족 사이에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그동안 건주여진은 해서여진의 예허(葉赫(엽혁)], 하다[哈達)], 우라[烏拉(오랍)],
휘파(輝發(휘발)]의 4부 및 동몽골과의 관계가 좋지 않아서 이들의 연합군이 허투아리로
쳐들어오자 일시 위험에 처한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건주여진은 1593년 해서여진의 4부와 동몽골군을 모두 격파함으로써 여진족
중에서 최강자로 부상하였다.
그 뒤 누루가치는 20년 간 해서여진의 각 부를 모두 격파하고 중부 만주 일대를 거의 다
장악하였다.
그렇지만 표면상 명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무역을 통해 재정을 튼튼히
하고 팔기병을 키워 군비를 정비함으로써 후일 대국을 건설하기 위한
기반을 다졌다.
국가 건설을 위한 제반 준비가 끝나자 누루가치는 만력(萬歷) 44년 (1616년) 1월
허투아리에서 스스로 한(汗)의 자리에 올라 나라 이름을 금(金)이라 칭하고
천명(天命)이라 건원하였다.
2. 싸르후산[薩兒滸山(살아호산)] 싸움의 승전
누루가치가 금(金)나라를 세우자 크게 놀란 명은 금(金)을 붕괴시키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으나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자신감이 생긴 누루가치 한(汗)은 종래의 가면적인 태도를 벗어버리고 천명
3년(1618년) 4월 보 .기병 2만을 이끌고 요동으로 침입하였다.
이때 명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 명이 이유 없이 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죽였다.
▲약속을 어기고 우리 경내에 들어와 군사를 배치하였다.
▲ 적대 관계에 있는 예허[葉赫(엽혁)]를 도왔다.
▲ 우리 경내에 들어와 물건을 훔치고 우리 사신을 살해하였다.
▲ 나에게 시집오기로 되어 있던 에허의 여자를 몽고로 시집보냈다.
▲ 우리들의 경작과 수확을 방해하였다.
▲ 예허를 편들었다.
이것은 누루가치가 명에 대해 선전을 포고한 7대한이라는 것인데 내용을 살펴보면 예허
문제가 3개나 차지한다.
명은 누루가치한을 멸하기 위해 누루가치와 적대 관계에 있는 예허를 부추기다가
이러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누루가치의 입장에 볼 때는 아들[후일의 태종(太宗)]의 어머니가 예허의 여자로 예허와는
인적 관계에 있었지만, 명의 압력으로 인해 예허와는 완전히 결별해야 했다.
명은 양호(楊鎬)에게 10만 대군을 주어 누루가치한을 섬멸하려 했지만 1619년의
유명한 싸르후산[薩兒滸山(살아호산):요녕성(遼寧省) 무송현(撫松縣)] 대전(大戰)에서
패배하여 한족과 만주족 간의 정권교체에 중요한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3. 강홍립(姜弘立) 출병
명나라가 후금을 칠 때 조선은 명의 요청에 의해 약 1만 3,000명의 원병을 보낸 일이 있다.
이때 조선의 강홍립(姜弘立)은 5도도원수(五道都元帥)로서 군사를 거느리고 전선에
나아가 싸우다가 금군에게 항복하여 전군(全軍)이 포로가 되었다.
강홍립은 항복한 후 건주(建州)에 머물러 있다가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 당시
후금의 선봉에 서는 등 조선의 장군답지 않은 행동을 하였다.
정묘호란이 끝난 뒤 강홍립은 역신으로 규정되어 단식을 하다가 죽었다.
명이 싸르후산 대전(大戰)에서 패배하자 만주에 대한 명의 정책 기조가 흔들리고 요동 지방의
민심이 흉흉해져서 관(官) . 민(民) 중에서 도망자가 속출하였다.
누르가치는 더욱 박차를 가하여 요양(遼陽)을 함락 시키고, 이곳을 잠시 도읍으로
정하였다가1620년에 천도하여 약 20년 간 심양(審陽)을 금국(金國)의 수도로 삼았다.
누르가치는 즉의 11년 10만 대병을 이끌고 요서(遼西)로 진격하여 여러 성(城)을 함락시키고
영원성(寧源城)을 포위한 뒤 명이 장수들에게 항복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명의 장수들은 누르가치의 항복 권유에 응하지 않고 오히려 포루투갈[葡萄牙)]에서
수입해 온 화포(火砲)로 응전했기 대문에 누루가치는 명을 물리치지 못하고 회군하였다.
4. 청태조의 위인
이 누르가치가 청의 태종가 되었는데 그는 비록 야인(野人)출신이기는 하지만 전략과 정치에
뛰어났으며 적당한 인재를 적절한 장소에 임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군졸과 백성을 사랑하고 검소한 생활을 즐겼으며 사치와 술을 경계하고 상과 벌을
분명히 구분할 줄 아는 명군으로서 청조(淸朝) 300년의 기틀을 다질 만한 걸출한
인물이었다.
이렇게 보건대 누르가치는 성격, 지략, 생활 면에 있어서 조선의 태조인 이성계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고 할 수있다.
5. 정묘호란(丁卯胡亂)
청의 태조가 싸르후산 대전(大戰)에서 명의 대군을 격멸시켰던 때는 조선의 광해군(光海君)
재위 11년이 되던 해였다.
당시 조선의 장군들은 싸르후산 대전에서 명을 지원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청에 패하여
투항하였으므로 청태조(淸太祖)는 광해군에게 태도를 분명히 하라고 협박하였다.
한편 명의 조정에서는 조선이 청과 타협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절을 파견해 광해군을
문책하였으므로 조선은 사신을 명에 보내서 변명하고자 하였다.
즉, 조선은 청과 명 사이에 난처한 처지에 놓인 것이다.
조선이 어떠한 처지에 있었던 간에 청나라의 눈으로 볼 때는 조선이 명나라를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자주 압록강을 넘어와 만주의 배후를 교란시켰으므로 청은 명을 치기에 앞서
먼저 조선을 정벌하여 후환을 없애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청은 평화 시기에 명으로부터 구입할 수 있었던 실, 옷감,
식료품 등을 적대 관계로 인하여 수입할 수 없게 되었고 또 인삼이나 담비와 같은
특산품을 명에 수출할 수 없게 되자 그 타개책을 조선에서 구할 수밖에 없었다.
청의 태조가 요서(遼西)의 영원성(寧遠城) 싸움에서 입은 상처로 죽자 황태극(皇太極)이
대를 이어 왕의 자리에 올랐는데 이 사람이 청태종(淸太宗)이다.
태종은 즉위하면서 제1의 목표를 태조의 염원이었던 명나라 타도에 두었지만 명은
산해관(山海關) 방면에 대병을 집결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관내로 밀고
들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태종은 조선 정벌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다.
이때 조선에서는 인조(仁祖) 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을 내쫓고 인조가 정권을 잡게 되었다.
이 사건은 청태종에게 조선을 정벌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조선에서는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공이 컸던 이괄(李适)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인조 2년에
반란을 일으켰는데 일시적으로 우세했던 반군은 얼마 안 가서 패하고 말았다.
반란에 가담하였던 한명련(韓明璉)의 아들 한윤(韓潤)은 몸을 피해 청에 투항하였던 강홍립
(姜弘立)에게 달아나 도움을 청하였다.
강홍립도 이 기회에 조선을 정벌 할 것을 청태종에게 권하였다.
청태종도 조선을 먼저 쳐야만 대세가 풀릴 것으로 판단하고, 1627년 패륵(貝勒) 아민(阿敏)
등에게 병력(兵力) 3만 명을 주어 강홍립과 한윤을 향도로 삼아 조선에 쳐들어가
철산(鐵山), 정주(定州), 안주(安州)를 함락시키고 남족으로 진군하였다.
이어 평양을 함락시킨 청은 한양으로 남진하였고, 그 소식을 들은 인조는 크게 놀라
피난하였으나 청군(淸軍)의 공세를 막아내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청의 화의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이것을 강도회맹(江都會盟)이라고 한다.
6.강도회맹(江都會盟)
이 회맹에서 양국은 두 나라 관계를 형제(兄弟) 관계로 하고, 청은 조선에 대해 형(兄)의
격식을 예우해 줄 것과 세공을 바칠 것, 그리고 국경를 봉수할 것 등을 조건으로 하여
일단 정묘호란의 강화가 성립되었다.
청태종은 조선과 강화조약을 체결한뒤 곧 개시(開市)의 교섭을 진행 시켜 1628년
압록강 중간 지점인 중강(中江)과 두만강 중간 지점인 회령(會寧)에 교역시장을
개설함으로서 청은 명으로부터 공급이 중단된 미곡과 직물 그리고 기타 필요한
물품 등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였다.
7. 조선(朝鮮)의 분노와 병자호란(丙子胡亂)
정묘호란에서 패전한 조선은 하는 수 없이 청과 형제의 맹약을 맺었지만 조야에서는 이를
불쾌하게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우리 한민족은 고려 이래 여진족을 미개한 민족으로 알아 왔고 그들 족장에게는
벼슬 첩지를 주어 내부케 하였으며 조선 초기에는 조선군이 여러 차례 압록강을 넘어가
무위를 떨쳐 두만강과 압록강 북쪽의 여진들을 조선의 세력 아래 두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여진족의 급습을 받아 하는 수없이 화약을 맺음으로써 선진국인 조선이
오랑캐를 형으로 섬겨야 했고 또 그들에게 세비를 바쳐야 했다.
더욱이 조선은 오랑캐 나라를 종실(宗室)로 삼게 된 것을 참을 수 없는 굴욕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조선에서는 청에 승복하지 않았고 청태종이 왕위에 오를 때도 축하의 뜻을
표하지 않았으며 두 나라의 무역도 부진한 상태에 놓였다.
더욱이 정묘호란의 강화조약에 의하여 청군이 압록강 북쪽으로 철수토록 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의주(義州)에서 철수하지 않고 약탈과 폭행을
자행하자 조선의 조야는 분노로 들끓었다.
이러한 가운데 청은 1633년 사신을 조선으로 보내서 형제지국(兄弟之國)을
군신지국(君臣之國)으로 바꾸자고 제의하였으며 세비로 1)황금 1만 냥, 2) 오색포 500만 필,
3)저포 50만 필 등 엄청난 공물을 요구하였다.
더욱이 명을 칠 테니 군사 3만 명과 마필 3,000두, 그리고 병선을 차출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더하여 몽고처럼 조선도 (臣)이라 칭할 것을 강요하였다.
조선은 청의 무례한 태도에 격분하여 청의 사신을 접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국서(國書)도
받지 않은 채 사신을 모욕하여 돌려보냈다.
그리고 청과는 절교한다는 유고(瑜告)를 팔도에 포고하였다.
이에 청태종은 조선의 결의를 알아차리고 10만 대군을 이글고 친히 조선 정벌에 나섰다.
이것이 이른바 병자호란(丙子胡亂)이다.
청태종은 인조 14년 12월 압록강을 건너 한양으로 밀고 들어왔다.
인조는 먼저 위패와 두 대군(大君)과 빈궁을 강화도로 피신시키고 자신도 왕세자(王世子)와
함께 강화도로 피난을 갔으나 길이 막혀서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도피하였다.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항전하다가 49일 만에 항복하여 송파(松坡)의 삼전도(三田渡)에
항복단을 쌓고 청태종이 발밑에 무릎을 끓어 신(臣)이라 칭하고 치욕적인 항복의 예를
행하였다.
이리하여 조선의 주전론자는 모두 포박되었고 왕세자와 빈궁, 봉림대군과 그 비(妃)가
인질로 잡혀 심양(瀋陽)으로 끌려갔다.
이때 조선의 대표 최명길(崔鳴吉)과 청나라 대표 사이에 주고받은 항복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 조선은 청에 대해 군신(君臣)의 예를 갖추고 새로이 종속관계를 맺을 것
▲명나라의 연호를 버리고 명과의 왕랭를 끊을 것이며 명으로 부터 받은
고명(誥命)과 책인(冊印)을 헌납할 것
▲조선왕은 장자(長子)와 차자(次子)를 인질로 보낼 것이며 대신(大臣)은
아들이나 아우를 인질로 보낼 것
▲명에 바치던 에에 따라 세폐를 공헌 할 것
▲청이 명을 치려고 할 때는 기일을 어기지 않고 출병(出兵)할 것
▲이번에 피도(皮島)를 공격하는 데 필요한 병력과 병선을 제공할 것
▲포로로서 본국으로 도망한 자는 청으로 잡아 보낼 것
▲두 나라 신민(臣民)의 결혼을 행할 것
▲ 신(新) . 구(舊)의 성단(城檀)을 함부로 축조하지 말 것
▲ 모든 왈카[瓦爾哈(와이합)]인을 돌려보낼 것
▲ 일본(日本)과의 교역은 허락하지 않을 것이며, 일본의 사신이 오면 청에
인도할 것.
▲ 기묘년(己卯年:1639년)부터 일정한 세폐(歲幣)를 보낼 것
8. 청(淸)의 중국 지배
청태종은 조선에서 정묘(丁卯), 병자(丙子)의 두 전쟁을 승리한 뒤 명나라를 치기로
결심하고, 1641년(숭덕(崇德) 6년] 요서 지방을 쳐들어가 금주(錦州), 송산(松山), 행산(杏山) 등
여러 성을 함락시켰다.
이어 부하 장수들로 하여금 직례(直隷), 산동(山東) 등지를 공략케 하여 포로 36만 명,
가축 55만 마리를 획득해 가지고 돌아왔다.
그 후 얼마 안 되아 1643년 태종이 죽자 제9자(子)인 푸린(福臨(복림):FULIN]이 대를 이었다.
태종은 북방 민족으로는 이채롭게도 문무(文武)에 뛰어났고,
정치적 수완도 있었으며, 부하 장령은 물론이고 투항한 장수들을 잘 다스렸다.
또한 만주족에 대해서는 전통의 보전을 장려하여 청나라의 발전에 주춧돌을
놓은 영걸이었다.
태종이 급서한 뒤 나이 어린 푸린이 뒤를 이어 세조[世祖: 다음해 순치(順治)라 개원(改元)]
가 되었다.
그는 6세에 등극했기 때문에 다음해에 숙부 되는 둬르군(多兒袞(다아곤)]이 섭정을 하면서
명나라 정벌에 올랐다.
그때 마침 명(明)에서는 이자성(李自成)이라는 유적(流賊)의 두목이 북경(北京)을
함락시키자 1644년[숭정(崇禎) 17년] 의종(의宗)이 궁전 뒷산에서 목매어
자살함으로서 명은 멸망 직전에 놓이게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산해관(山海關) 부근에서 청나라 군과대치하고 있던 명의 장수 오삼계
(吳三桂)는 북경(北京) 함락 소식을 듣고 북경을 회복시키기 위해 청과 연합하여 이자성
무리를 토멸하고자 하였다.
이에 청의 예친왕(睿親王) 둬르군(多兒袞(다아곤)]은 명나라를 위하여 역적을 친다는
명분 하에 당당하게 모든 병력을 이끌고 북경(北京)으로 들어가 명의 수도를
무혈점령해 버렸다.
이자성(李自成)은 서안(西安)으로 달아났고 북경(北京) 부근의 질서도 회복되었다.
섭정왕인 둬르군은 명나라 의종(毅宗)의 장례를 정중하게 치르고 장렬제(莊烈帝)의
시호를 보냈다.
또한 명의 황족들과 귀족 모두에게 본래의 직위와 재산을 보장하여 주고 명의 전토와
풍속을 존중해 줄 것을 포고하여 민심이 안정되었다.
이에 세조는 심양을 출발하여 북경으로 들어와 황제의 보위에 올라 북경을 국도로
정하고 영구히 중국에 군림할 것을 선포하였다.
순치(順治)가 북경으로 천도한 뒤 청의 중국 통일 사업은 착실하게 진행되어 갔으나
이를 주도하던 예친왕(睿親王)은 순치 7년 8월 열하(熱河)의 코라허툰[客喇和屯)]에서
39세라는 젊은 나이로 병사(病死)하였다.
순치는 그의 나이 13세에 친정(親政)을 시작하였으나 예친왕이 죽은 뒤 조정은 예친왕의
반대파였던 정친왕(鄭親王) 일파가 차지하고 있어서 내부적으로 왕실을 둘러사고
불협화음이 적지 않았다.
순치도 그의 재위 18년에 24세의 약관으로 병몰하였고, 순치에 이어 제3자(子)였던
쉔화[玄燁(현엽)]가 즉위하였는데 이 사람이 바로 세계적인 영군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성조(聖組) 강희(康熙) 황제이다.
9. 청(淸)의 황금 시대
성조(聖祖) 강희제는 61년간이나 제위에 앉아 있으면서 문무(文武)에서 두두러진 업적을
남겼고 그의 아들 세종[世宗: 옹정(雍正)]과 손자 고종[高宗: 건륭(乾隆)]도 성조로부터
이어지는 액 130여 년 동안 청9淸_으 ㅣ전성시대를 연출함으로써 중국은
세계무비(世界無比)의 강성대국을 현출(顯出(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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