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필법(握筆法)의 대가: 석전 황욱(石田 黃旭)선생
석전선생 ‘봉저난상’ -봉새와 난새가 날아 오르듯이 활기차게 살라.- 오랜만에 지리산 화엄사에 갔다가 ‘지리산 대화엄사(智異山大華嚴寺)’라는 편액을 보고 한참을 바라다 본 적이 있다. 곧고 힘찬 글씨를 보고 석전 황욱(石田 黃旭)선생께서 쓰신 글씨임을 알게 되었다. 노익장이라고, 글 전체에 기운이 가득차고, 획 하나하나가 도도한 계곡물처럼 힘차게 흘러가고 있었다. 오랜만에 글씨다운 글씨를 본 것 같아 참 멋졌다.
수십년 동안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은 온통 근대화(近代化)와 산업화(産業化)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우리다운 전통성(傳統性)과 정체성(正體性)을 모두 벗어버리고 탈바꿈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지만, 유독 호남과 영남의 깊은 곳에서는 우리다운 모습을 있는 그대로 지켜가며 살아가고 있다. 고장으로 치면 전주(全州)와 광주(光州), 그리고, 안동(安東)이 그런 곳 같다. 역사와 전통이 어우러져 아직도 많은 옛 이야기가 남아 있을 것 같다. 그렇기에 이따금은 들러서 옛 멋에 빠지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그런 것처럼 우리들이 잊고 살았던 많은 것들을 그대로 유지하며 온전하게 보여주고 가신 분 중에 대표적인 분이 또한 석전 황욱(石田 黃旭)(1898-1993)선생이다.
석전선생은 1898년 고창군 성내면에서 출생한 후, 1914년 중앙고보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부친의 만류로 자퇴하고, 1920년 금강산 돈도암에서 10여 년간 한학(漢學)과 서예(書藝)에 전념하였다. 1930년 고향으로 돌아와 신위(申緯 1769-1845)선생에게 사숙한 후, 율계회를 조직하여 정악을 연주하고, 가야금과 활쏘기를 즐겼다. 선비로서 갖추어야 할 학문과 서예뿐만이 아니라, 활쏘기와 가야금 등 육예(禮?樂?射?御?書?數)를 연마한 조선시대 선비상을 실천한 대표적인 분이기도 하다. 1973년 75살의 나이로 전주에서 처음으로 개인전을 개최한 후, 서울, 부산 등지에서 여러 전시회를 성황리에 열었으며, 1993년 95살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석전선생 ‘일물관만물’ (전북대박물관소장) - 한가지 사물을 통하여 만물의 이치를 통찰하라.- 석전선생의 글씨를 보면, 사람들은 살아 움직이는 산(山)과 같다고 한다. 또한 석전선생의 글에는, 석전선생 고향인 모악산의 산바람과 그 기암괴석 사이에 뿌리를 박은 노송(老松)의 솔바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고도 한다. 또한, 그러한 경지를?풍상의 인고를 견디어 더욱 푸르르고, 싱싱한 노송의 강기(强氣)?에 비유하기도 한다. 수 백년을 견뎌온 늙은 소나무의 강건함과 같이, 바위에 굳은 뿌리를 내린 듯한 옹골찬 글씨이다. 볼 때마다 늙은 소나무가 오히려 굳건하고, 기운차다고, 소나무의 골기가 가득서린 글씨가 참 힘차고, 멋지다. 석전선생은 금강산 수도시절 한학과 함께 송나라의 명필 조맹부의 송설체(松雪體)를 비롯 왕희지, 구양순 체 등을 두루 섭렵했다고 한다. 나중에 스스로?곱게 뵈려는 글씨보다는 법필(法筆)을 섭렵하고 정심(正心)으로 써야하고, 욕심없는 정자(正字)를 많이 써야 그 나름대로 자기의 창작서(創作書)가 된다.”는 지론하에 묵묵히 스스로의 길을 연마하게 된다. 그러다가 가까이 지내던 정인보(鄭寅普)선생과 김성수(金性洙)선생 등으로 부터 아낌없는 찬사를 받으며 널리 알려졌다. 그렇지만 가까운 이웃의 비문과 선대의 묘비를 썼을 뿐, 한 번도 서예가로서 국전(國展) 등에 참여하지 않고, 초연하게 은자(隱者)로서의 품격을 그대로 지켜 나갔다고 한다.
석전선생 ‘막현호은’ - 감추는 것보다 더 잘 드러내는 수 없고, 숨는 것보다 더 잘 드러나는 수 없다. (중용)-
그러다가 환갑(1960년)이후 붓을 잡는 오른 손에 수전증이 와서 글쓰기를 포기해야 하는 큰 시련이 닥쳐오게 된다. 통상 수전증이 오면 붓 잡는 일을 포기하게 되나, 석전선생은 오랜 고민끝에 자신에게 맞는 붓을 손바닥으로 거머쥐고 꼭지부분을 엄지로 꽉 눌러 붓을 고정시키는 악필법(握筆法)을 창안하게 된다. 그러던 중 85살부터는 오른손 악필도 곤란을 느끼면서 87살부터는 왼손 악필을 시도하게 된다. 석전선생을 통하여 단순히 기술만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기운으로, 그런 정신으로 써가는 것이 참다운 글씨임을 보여주고 있다. 석전선생은 특히 90세 이후에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훌륭한 작품들을 남기게 된다.
오늘날 대부분의 전업작가들이 서예(書藝)라는 기법(技法)에만 얽매여서 법첩(法帖)의 그늘에서 헤매이고, 자기모습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가는 경우가 많다. 그런 측면에서 석전선생의 작품들을 보게 되면, 서예는 분명 석전선생만의 독특함과 기운이 살아있다. 서예는 단지 기술만이 아니라, 작가의 정신과 기운,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만의 모습으로 드러내야 함을 알게 된다.
석전선생 '욕존선겸' - 남에게 존경을 받고자 하면 자신부터 먼저 겸손해야 한다. -
석전선생은 일반사람으로서는 은퇴할 나이인 1973년 75살의 나이에 전주에서 친지들의 강권에 못 이겨 결혼 60주년 기념 서예전을 개최하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 문예진흥원 미술회관에서 희수(喜壽)기념 전시회를 가져 중앙무대의 서예가들에게 깊은 인상과 감명을 남겼다. 이후 광주와 부산, 서울 현대화랑, 롯데미술관, 전북일보, 호암갤러리(중앙일보), 예술의 전당(동아일보) 등에서 초대전과 회고전 등을 연이어서 가지게 된다. 그리고, 구례 화엄사 일주문, 불국사 종각, 금산사 대적광전(大寂光殿) 등의 편액들을 썼다.
오늘날 석전선생은 검여 유희강선생과 함께 악필의 대명사로 많이 회자된다. 특히 80살부터 95살로 사망하기까지 15년간의 작품이 참 좋은 것 같다. 단순히 글씨로서 만이 아니라, 정신의 결정체인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정말 훌륭한 예술가는 말년의 작품들이 참 좋은 경우가 많다. 경봉스님이나 환경스님의 선서나 석재 서병오선생의 작품, 그리고, 박생광화백의 경우에도 말년의 석채화가 참 좋다. 정말 진정한 예술가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예술혼을 온전하게 드러내 놓고 가는 분들인 것 같다. 그러기에 예술의 세계에 있어 나이는 큰 의미가 없는 것 같다. 늙어간다는 것이 진정한 예술의 세계에선 큰 문제가 되지 않음을 알게 된다.
원로 서예가 김기승(金基昇)선생은 석전선생의 말년작에 대하여 ?석전의 글씨는 그 경직장엄함이 노송에 바람이 불어 생동하는 것 같고, 전아(典雅)하고 온윤(溫潤)한 것은 장강(長江)에 파도가 일어 흘러가는 것 같으며, 특히 리듬이 풍요한 여운(餘韻)과 여정(餘情)의 글씨로서 한 자(字) 한 획(劃)에서 백아(伯牙)의 탄금성(聲)을 듣는 듯하다”고 표현하였다.
석전선생은 조선말에 걸쳐 현대에 이르는 격변기만큼 도도한 세파를 견디며, 스스로의 불운을 딛고 새 세계를 이끌어간 선구자이다. 신체적 장애와 인간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생로병사의 큰 틀을 깨고, 자신만의 서예를 정신적으로 승화시킨 예술가이기도 하다. 죽을 때 뭐 하나라도 제대로 이루어놓고 가느냐는 관점에서 본다면, 석전선생은 20세기 혼돈의 세기에 한국의 전통이 될 만한 큰 틀을 만들어 놓았고, 오늘에까지 우리들에게 눈을 번쩍 뜨이고, 기운을 차릴만한 글씨들을 도처에 남기고 간 선현(先賢)이기도 하다.
특히 한참때에 쓰신 봉새와 난새가 날아오르듯이 살라는 '봉저난상'과 돌아가시던 해에 쓰신 남에게 존경을 받고자 하면 자신부터 먼저 겸손해야 한다는 욕존선겸(欲尊先謙)은 당신의 이야기처럼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석전(石田)선생의 글씨를 다실에 걸어놓고 그분의 강직한 기운과 정신을 듬뿍 느껴 보는 것도 참 좋을 것 같다. 그러면 늙은 소나무의 성성한 소리가 주위에 가득찰 것 같다.
석전선생 ‘만법귀일’ - 만 가지 법이 하나로 귀결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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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갈길이 멀다. 원문보기 글쓴이: 백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