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1월 말에 소대장 근무 중 소대장직을 그만두어야 하는 아쉬움과 함께
사랑하는 소대원 중 일부가 불구자가 되는 아픔을 겪었다.
당시 대대는 한겨울에 동계 혹한기 훈련의 일환으로 200㎞를 행군하게 되었다.
행군은 3일간 하는데 1일 차 오전 7시에 출발하여 3일 차 오후 5시에 도착하도록 계획되었다.
행군 간에는 혹한기의 극한상황에 대한 극복 능력을 배양한다는 목적 하에 취침 없이 주야로 지속해서 행군해야 했고,
한 끼는 굶고 한 끼는 주먹밥을 먹어야 했다.
그전에 그러한 훈련을 한 번도 안 해봤던 대대원은 훈련 전에 많은 걱정을 하면서도
앞선 대대들이 모두 무사히 마쳤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안심했다.
그러다 대대가 행군할 날이 돌아왔다.
첫날 주간에는 맑고 영상 기온의 포근한 날씨였다.
대대원은 군장을 메고 행군계획에 따라 부대를 출발해서 산으로 올라 갔다.
행군 간 넘어야 할 수개의 산 중 첫 번째 산으로 들어서니 산속에는 전에 내린 눈이 무릎까지 그대로 쌓여있었다.
소대는 맨 선두에서 눈 위에 길을 만들며 가느라 모두 흠뻑 젖었다.
밤이 되면서 기온은 영하 19도까지 떨어져 그 겨울의 최저 온도를 기록하고 있었다.
대대는 밤에도 계속해서 산과 야지를 반복하며 걷고 있었다.
그러다 서서히 체력의 한계에 도달하여 쓰러지는 병사들이 발생했다.
본인 소대에도 한 병사가 실신해서 응급처치로 정신을 차리게 한 후 그 병사의 군장을 다른 인원들에게 나누어 들게 하여
계속 행군했다. 그날 밤에는 피곤함과 졸음과 추위 속에 소대장 본인도 정신없이 보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어 식사 장소에 도착한 손이 이상함을 느꼈다. 식사하려고 장갑을 벗으려는데 벗겨지지 않는 것이었다.
소대원들에게 장갑을 잡아당기게 해서 벗었더니 양손이 모두 노랗고 딱딱해져 두 손을 부딪쳐보니 막대기처럼 소리가 났다.
그래서 중대장님께 보고하러 지휘소로 갔더니 그곳에 있던 상관들이 소년의 손을 보고는 놀라며
빨리 군의관에게 가보라는 것이었다.
군의관은 소년의 손을 보고는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있으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그리하면서 소년은 “행군하는 데는 지장 없겠죠?”라고 물으니 군의관은 “네 손가락 잘리길 바라거든 행군해라.”
하기에 그제야 자신의 손이 심하게 동상에 걸린 것을 알게 되었다.
소년은 소대원들과 같이 행군할 수 없어 안타까워하며 앰뷸런스에 실려 이동하던 중에 이상한 장면을 보게 되었다.
도로 곳곳에 환자들이 앉아있어 군의관에게 물어봤더니 엄청나게 많은 인원이 동상에 걸려 큰일 났다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밤새 행군해온 대대원은 주간에 눈길을 걸어 군화가 젖은 상태에서
야간에 기온이 영하 20도 가까이 내려간 추위에 발이 얼어버렸던 것이다.
소년은 행군 시 발 동상을 우려해서 소대원들에게 군화 속에 있는 발가락을 계속 움직여야 한다고 얘기했었다.
소년 자신도 발가락을 움직여서 발은 괜찮았으나 첫날 낮에 산을 오를 때 선두에 서서 손으로 눈을 헤치며 오던 중
자신의 손이 얼어버린 것을 몰랐다.
밤이 되어 손가락이 잘 안 움직여졌던 소년은 단지 추위에 손이 곱아서 그런 줄만 알았던 것이다.
손이 동상에 걸릴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행군은 최초 출발 인원의 1/3 정도만이 완주하여 부대로 복귀했다.
그렇지만 그들도 대부분 동상 후유증을 앓게 되었다. 그리고 많은 인원이 동상으로 인해 군 병원으로 후송 되었는데
그들 중 30여 명은 끝내 신경이 썩어 들어가 발가락이 잘리고 말았다.
소년도 손 때문에 사단 의무대로 후송되어 증상에 따라 손가락 절단 여부를 판단해야 할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소년의 손가락은 얼었던 부위가 녹으며 마치 권투 글러브처럼 물집이 잡혀 있었다.
한 달간 의무대 침실에서 손이 붕대로 감긴 채 세면도 못하고 식사 시와 용변 시 다른 이의 도움을 받으며
경과를 지켜보아야 했다. 더 악화되면 손가락이 잘릴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저 운명을 기다리는 입장이 된 것이다.
한 달이 지나자 손에 잡혔던 물집이 빠지며 손톱과 표피가 전부 벗겨져서 갓난아기의 피부와 같은 상태가 되었다.
아기가 자라서 표피가 생기듯이 소년의 손가락도 그렇게 손톱과 표피가 다시 자라게 된 것이다.
그런데 첫 번째 마디부터 손가락 끝까지의 신경이 일부 파손되어 감각이 무뎌지고 손톱이 새카맣게 되는 등
손가락이 다소 흉한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그러나 다행히도 손가락은 움직여져서 정상적인 삶이 가능해져 소년은 운명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동상이 악화되어 군 병원으로 가서 발가락이 잘린 인원은 대부분 병사였다.
그들은 남은 군 복무를 거의 병원에서 치료 받다가 전역했고 일부 고참병들은 전역일 이후까지 치료받아야 했다.
발가락이 잘린 30여 명 가운데 소년의 소대원도 2명이 있었다.
그중 한 명은 한쪽 엄지발가락만 절단되어 걸을 수는 있어서 곧 전역했는데, 다른 한 명은 양발에 있는 발가락을 모두 절단하고도
절단한 부위에 살을 덮어씌워야 했기에 자신의 엉덩이 살을 절단하여 두 차례나 이식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러고도 그는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온몸을 지탱해주는 발가락 뒷부분까지 절단했기 때문이다.
사고가 나고 두 달가량 지나 소년이 속한 사단은 한미 연합 야외 기동훈련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완치가 안 된 소년은 참가할 수가 없었다. 답답해하던 소년은 국군 통합병원에 아직 남은 한 명의 소대원을 만나러 갔다.
거기서 커다란 교훈을 얻게 되었다. 소년이 통합병원에 가서 처음 만난 사람은 중대 본부 행정병으로 근무했던
병사와 그의 어머니였다. 그 병사가 오셨느냐고 반가이 인사를 하며 자신의 어머니에게 소년을 자신의 부대 소대장이라고
소개하니까 그의 어머니는 분노에 찬 눈빛으로 소년을 쏘아봤다.
소년이 순간 당황하여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을 때 그 병사가 “어머니, 소대장님도 다쳤어요.” 하니까 그녀는 따뜻한 눈빛으로
바뀌어 인사를 했다.
그녀는 양발의 발가락이 모두 절단된 자신의 외아들을 보고 부대의 모든 간부를 자신의 아들을 그리되게 만든 가해자로 생각하여
소대장이라고 소개하는 순간 원수처럼 쏘아봤다가 소년도 다쳤다는 말에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대했던 것이다.
그때 소년은 자식에 대한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지대한지를 느꼈고, 군 간부로서 그렇게 소중한 자식들이 군 복무하는 동안
불구자가 되지 않도록 정말 잘 지도해야 한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그 병사 모자에게 인사 후 소년은 양 발가락이 절단된 소대원을 찾아갔다.
그는 당시 발가락 절단 부위에 엉덩이 살로 1차 이식수술을 마친 상태였다.
소년이 찾아가니 그는 반가이 인사하며 이식수술을 했는데 절단 부위가 너무 커서 한 번 더 해야 한다고 했다.
그의 모습을 보고 소년이 딱한 마음에 “어떻게 하냐.”라고 했더니 이제 괜찮다며 걱정하지 말라는 그에게
소년은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어 수중에 있던 5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주며 먹고 싶은 것 사 먹으라고만 말하고 돌아왔다.
오는 길에 마음속으로 소년은 또다시 그들처럼 훈련받다가 불구자가 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외쳤다.
소년은 평시 훈련 중에 전시와 같은 엄청난 부상자가 발생 했던 사고를 경험하며 지휘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되었다.
당시에는 대대 행군 시 대대장도 같이 걷도록 지시 되어 대대장 자신도 힘이 든 상황에서 정확한 판단을 하기가 어려웠다.
소년의 대대는 야간에 기온이 갑자기 급격하게 떨어지는 상황에서 계획대로 계속 행군하다가 동상 환자가 많이 발생했던 것이다.
(대대와 동일 시간대 행군했던 또 다른 대대는 그때 휴식을 해서 동상 환자가 발생하지 않았다.)
동상사고를 통해 소년은 대대가 행군할 때 기상이 급격히 변하는 상황에서는 우선 현장 지휘관이 즉각 대응조치를 해야 하고,
상급 부대에서는 기상 변화에 따른 현장 상황을 시간대 별로 파악하여 필요한 조치를 적시 적절하게 해주어야
참혹한 결과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했던 것이다.
첫댓글 과거의 경력을 글의 소재로 삼으니
생생하고 그 자체의 사건을 통해서 미래를 예측, 발전시킬 수 있네요
멋진 추억과 현재의 신선님의 모습에 경외감을 표합니다. 건승하세요.
영하 30도의 양평에서 완전군장하고 행군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나네요~^^
양평도 춥죠~
사고지역은 경기도 현리 일대였는데
당시 체감온도가 영하 30도 정도 되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