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절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이것은 비유라고 말합니다. 사실은 사라도 그 당시 진리를 알아 자유를 얻은
것은 아니나 비유입니다. 사라가 아들을 낳을 수 없는 상태에서 낳았는데 이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하신 약속을 이행하시는 하나님이 생산케 하셨습니다.
자신의 의무와 책임에 의한 열심이 아니므로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 여자들은 두 언약입니다. 시내산은 위엄이 있는 산입니다. 접근금지입니다.
어쩌면 굉장히 높은 강대상위에서 설교를 하는 것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높은 강대상이 시내산과 같다고 생각을 해 보세요(히12장) 사실은 강대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곳이고 그 앞에 놓인 헤브론 성찬상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떡으로 나누어져야 제대로 된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어느 교회에 가보면 강대상 앞에 성찬의 모형을 진열해
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모일 때마다 주의 몸을 먹고 교제하자는 겁니다.
25절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노릇하고”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습니다. 어쩜 지금의 예루살렘도 그런 기분이 듭니다.
살벌하고 섬뜩한 느낌이 듭니다. 오래 된 성당이나 사원에 들어가 보면 오싹한
느낌을 줍니다. 이와 같이 엄숙하고 무거운 느낌 그게 바로 율법적인 의미입니다.
교회 분위기도 성도들이 화기애애한 곳이 있고 위엄이 있고 엄숙한 곳이 있습니다.
사실 율법적인 신앙이 뭔가 있는 것 같은 실감이 납니다. 그렇게 꾸며 놓는
것이 바로 사람들이 종노릇할 수밖에 없는 본성을 자극하는 겁니다.
26절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입니다 곧 우리 어머니이십니다.
어머니는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 품습니다. 그게 참 교회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란 어머니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어머니로 알지 못하면 아버지를 모른다고 말합니다.
27절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느니”
이 어머니는 어느 때까지 잉태하지도 해산하지도 못했습니다. 홀로 사는
자의 자녀입니다. 외로운 광야의 삶입니다. 그래서 소리 질러 외치라고 하십니다.
자신을 낳고 자녀를 낳기 위한 해산의 고통입니다. 진리의 성령의 임재로 죄와
사망과 육체에서 자유를 얻고는 주의 이름을 간절히 호소하라 하십니다(요16장)
그런데 실상은 ‘남편 있는 자녀보다 많음이라’ 롬7장의 남편을 생각해 보세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이란 남편에 대해 죽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
곧 예수그리스도에게 가서 하나님을 위해 열매를 맺히게 하려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눅18장의 과부의 기도는 껍질을 깨고 나오는 기도입니다.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나는 버림을 받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고자
하는 나는 데려감을 얻는데(눅17:33-34) 이 둘 사이에 끼어서 원통함을 부르짖는
믿음을 주께서 찾으십니다(눅18:8)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은 생산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을 살려내지 못합니다. 전도를 해도 교회까지 오게 할 뿐 영생의 복음을
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성령의 사람은 어느 순간부터 계속 낳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영적인 그리스도인일수록 집단화가 안 되는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유자들이기에 바울처럼 단독작전을 하기 때문입니다. 집단을
이루려면 조직과 제도와 법으로 꽁꽁 묶어야 하는데 코로나 사태이후에 이와 같은
교회의 구심력이 약해지고 영의 자유를 찾는 이들이 참 교회를 찾아 배회 중입니다.
28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형제들아(아델피) 이삭과 같은 약속의 자녀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부름이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계속 하나님께 끌려가게 됩니다.
어떤 영적인 시그날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부름을 받은 자 사이의
신기한 메커니즘입니다. 그래서 나는 무엇인가 계속 찾게 됩니다. 처음에는 뭔지는
몰라도 영적이고 지적인 배고픔으로 찾고 찾습니다. 자신이 한 것 같지만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된 걸 나중에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적인 호출이며
리모콘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하나님의 섭리는 바둑의 고수와 대국을 한 번
붙어 본 것과 같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자신은 이기려고 덤볐는데 한 판을
다 두고 나니 질질 끌려 다녀 완전히 당한 한 판이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통보와 그 행하심의 예표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 이삭은 하나님의 택하심이며 야곱은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적용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예표의 사람들입니다.
29절 “그러나 그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육체를 따라 난 자와 성령을 따라 난 자 사이에서 언제나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합니다. 약속을 따라 난 자들이
바로 성령을 따라 난 자들입니다. 독생자 예수그리스도(호 로고스)로
말미암아 그를 영접하는 자들이 다생자들이 됩니다(후토스 요1:12)
지금도 하늘에 속한 자들은 땅에 속한 자들에게는 손님들입니다.
눅16장을 보세요. 부자는 땅의 주인이고 나사로는 그의 거지 손님입니다.
칼릴 지브란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은 은 금 비단을 자랑하는데 우리는
그 대화의 테이블에 우리의 영혼 밖에 올려놓을 것이 없다’고... 세상은
항상 주인이고 우리는 손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 곧 성령으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유전인자를 품은 자들입니다.
30절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하십니다.
육신으로 난 자들에게도 육신의 것은 주십니다. 그러나 장자권은 없습니다.
곧 약속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야곱과 에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주십니다. 이를 두고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고 하십니다(롬9장) 하나님의 섭리는 야곱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지만 에서에게는 한 번도 하나님이 말씀을 거신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섭리의 핵심입니다(롬10장) 에서는 한 번도 고생을 한 적이 없습니다.
육신으로는 장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에서는 하나님의 간섭에 대한 의식이 전혀 없습니다.
31절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곧 하늘 예루살렘에 속한 자들입니다. 계12장의 해 입은 여자에게
속한 자들입니다. 자유하는 자의 행위는 의무가 아니라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에 의해 행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율법의 행위를 원하지 않으시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속량하시고 그 아들의 영을 주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로 자유하게 된 자로 영을 좇아 살므로 율법의 의를 이루는 그 행위를
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을 만드시고 난 다음에 비로소 율법의 요구인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할렐루야!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첫댓글 할렐루야! 아멘!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함께 하심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