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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화 p.465
성육화(成肉化)는 성소(聖所)가 아니라 우리 일상 삶에서 일어난다.
이 고해(苦海)의 세상에서 몸과 마음을 잡아먹히며 사는 중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과거의 예수나 미래의 예수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는 예수이다. 저 멀리 높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나 까마득한 구름 위에 선 예수가 아니라, 쫓기는 중생들을 위해 길을 트려고, 우리 중생들 발밑에서 진 땅에 몸을 누이고 등을 내주며 밟히는 예수이다.
그래서 따뜻한, 검소한, 넓은, 열린 마음과 사랑이 넘치는 교황이 나올 때 가톨릭 신도들은 감동한다. 무한히 높은 신(神) 앞에서 낮은 자가 아니라, 지극히 낮은 사람 앞에서, 낮은 자가, 진정 낮은 곳으로 가는 자이다.
이 점에서 그런 교황은 교황이 아니라 예수이다. 크고 작은 훌륭한 성직자들과 신자들을 통해 예수는 끝없이 부활한다. 가톨릭 미사 때 받아먹는 빵과 포도주가 예수의 피와 살로 변하는 것이 성육화가 아니라, 예수의 말씀(피)과 행(살)을 자신의 삶에 구현하는 것이 성육화이다. 그때 그들의 몸은 예수의 살이고 그들의 마음은 예수의 피이다. 예수는 신실한 신도들의 몸과 마음으로 끝없이 부활한다. 성육화는 (꽃과 향으로 장식한) 성소(聖所)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볼썽사납고 냄새나는) 시장바닥에서 꽃과 향을 피운다. 그리고 일상의 우리 삶 속에 뿌리를 내리고 만개하고 충만 한다. 매일매일, 옛 예수가 아닌, 새 예수가 태어나는 것이 성육화이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다.
진흙탕에 뒹구는 어리석음, 미움, 욕심투성이의 하찮은 인간이 한순간이나마 자신의 몸과 마음을 드높은 예수의 말씀과 행에 일치시킬 수 있다니 어찌 기적이 아니랴. 위로는 어리석은 인습을 깨뜨리는 지혜가 대장간 불처럼 뿜어져 나오고, 아래로는 누구든 독생자처럼 품어주는 무조건적인 사랑이 가문 들판에 보의 물처럼 터져 나온다.
석가모니 부처의 몸이 영원히 죽지 않는다든가 마음이 비로자나 법신이 되어 영원하다는 생각은, 물질적인 빵과 포도주가 진짜 예수의 물질적인 피와 살로 변한다는 유물론적인 성육화와 다를 바가 없는 생각이다.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우리 신구의(身口意) 삼행(三行)에 구현할 때 우리 몸이 석가의 몸이고 우리 마음이 비로자나불이다, 즉 석가모니불과 비로자나불은 우리 몸과 마음에 색신(色身)과 법신(法身)으로 영원히 반복해서 부활한다.
이미 오래전에 무여열반에 든 석가모니 부처가 다시 색신을 나투어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기 삶으로 나타낼 때 그 순간 우리는 부처이다.
우리가 자기라는 개별 생명의 존속(存續)에 개의치 않고, 생명계 전체의 평안과 행복의 존속을 기원할 때 우리 생명은 생명계와 더불어 영원할 것이다. 그런 마음의 이어짐이 바로 우리의 불성(佛性)이기 때문이다.
심즉시공 心卽是空: 마음은 공이다 p.481
우리 마음은 본시 비어 있다. 흰 도화지처럼 아무 색깔도 없다. 색깔 없는 화폭(畫幅 canvas)에 가지가지 색깔로 사물이 탄생하는 것처럼, 비어 있는 우리 마음에는 선악(善惡), 고저(高低), 장단(長短), 미추(美醜), 부귀빈천(富貴貧賤), 남녀(男女), 노소(老少)의 상대 세계가 아무 제약 없이 생멸한다.
상대세계가 펼쳐지는 그 순간, 우리는 그 세계를 우리라고 믿고, 고통을 받고 눈물을 흘리며 아쉬워한다. 그 세계의 일어남과 쓰러짐(형체나 현상 따위가 희미해지면서 없어짐)을 우리 자신의 삶과 죽음으로 간주하고 받아들인다. 본시 비어 있는 마음을 보지 못한다. 짙은 유성 물감 밑에 숨어있는 무색의 화폭을 보지 못한다. (그렇다고 텅 비어 있는 무색의 화폭이 우리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화폭과 물감의 상호연기작용(相互緣起作用)일 뿐이다. 그리고 물감은 35억 년 진화의 과정을 통해 설치되고 끝없이 업데이트되는 소프트웨어들이다. 이 점을 놓치면 메마른 단멸론(斷滅論)나 완고한 유아론(有我論)으로 흐르게 된다)
한 번도 동굴 밖을 본 적도 나가본 적도 없는 사람은, 눈 부신 빛과 광활한 자유를 두려워한다. 감옥을 자기 집으로 여겨, 폭력, 증오, 탐욕과 더불어 환희하고 절망하며 생멸한다.
고성제(苦聖諦)(一切皆苦) 모든 것이 ‘苦’라는 진리) 란, '구도(求道)의 여정은 세상이 감옥임을 깨닫는 것으로 시작한다'라는 선언이다. 까뮈가 말한 대로 감옥을 탈출하려면, 먼저 자신이 감옥에 갇혀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음을 모른다.
가까스로 감옥 담을 넘더라도 일이 끝난 것은 아니다. '문화적인 충격'(cultural shock)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배우는 연기를 할 때 자기 마음을 비워야 한다. 그리고 그 빈 마음을 극중 인물의 마음으로 채워야 한다. 마음을 비워야만 극중 인물의 역할을 완벽하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완벽하게 몰두해서 연기를 한 배우는 극이 끝나면 허탈해진다. 극 중 마음이 떠나고 옛 마음이 돌아올 때까지의 일시적인 공백 때문이다. 예기치 않은 빈 마음의 출현은, 마음의 본성 즉 마음이 공성(空性)을 깨달은 자에게는 아무 일도 아니지만, 아직 공(空)을 깨닫지 못한 자에게는 허무이고 공포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문화적인 충격이다. 옛 마음이 감당하지 못하는 새 마음!
지신무성(至神無性): 지극한 신은 성이 없다. p.482
모든 창조물을 차별없이 사랑하는 예수가 존재한다면, 그런 예수는 남자가 아니다. (어떤 형태로건 간에, 주는 자가 남아있는 사랑은 한계가 있다. 많이 남아있을수록 한계도 많다. 주는 자가 사라진 사랑은 한계도 사라진다. 자기라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일체중생을 무여열반으로 인도할 수 없다.<금강경 대승종정분大乘正宗分>.)
실제로 이런 사상을 가진 가톨릭 교황이 있었다. 1978년에 즉위한 요한 바오로 1세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신은 성(性)이 없으므로 여자로 재현될 수 있다”라고 했다. 또 그는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은 어머니이며 아버지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버지이기보다는 어머니이다”라고 발언하였다.
그는 화려하고 장엄한 대관식(교황 취임식)을 소박한 미사로 대체하였으며, 자신을 ‘짐(朕)’이라 호칭하는 관례를 따르지 않고 ‘나’라고 호칭한 개혁적인 교황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즉위 한 달 만에 심근경색으로 서거했다. 진실로 소중하고 귀하고 좋은 것은 세상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그런 일은 절대로 흔하지 않다.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은 고해(苦海)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결코 무여열반에 들지 않았고 지금도 색신(色身-피와 살을 지닌 육신)을 나타내 중생을 교화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진실은, 부처님이 단 80년만 이 세상에 머무셨기에 세상이 고해인 것이다.
만물을 담는 우리의 마음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다. 우리의 마음 바탕은 일체가 비어 있는 빈 마음이다. 마음이 화공(畫工)이 되려면 그 바탕은 빈 화폭이다. 우리 마음속의 삼천대천세계는 빈 도화지 위의 그림이다.
바탕 의식에 어떤 그림이 그려지느냐 하는 것은 비치된 소프트웨어들에 달렸다. 그리고 이 소프트웨어들은 시공의 흐름을 타고 진화를 통해 발전한다. 도화지는 본래 비어있고 그림 도구는 진화를 통해 변한다. 그러므로 일체가 무아(無我)이다.
그대는 남자인가?
道 p.485
세상은 늘 불안하고 불확실할 것이다.
문제는 그런 상태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하다는 것이다. <짐 콜린스>
道를 닦는 과정에서 심신(心身)이 편안해진 것을 道로 알면 안 된다. 특히 신(身)이 위험하다. 무릇 한번 자리 잡은 것은 무뎌지기 마련이라, 심신의 편안함이 익숙해진 연후에는, 조금이라도 변하면 불편해진다. 운이 나쁘면, 암이나 불치의 병에 걸릴 수도 있다. 그러면 지난날 심신의 편안함은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세상은 수많은 능소(能所, 주체와 객체)에 의한 연기(緣起)의 세상인지라, 내 심신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내 의지(意志)나 행위만이 아니다. 가족, 친지, 직장, 사회, 국가, 자연, 기후, 국제정세 등도 있다. 세월호 침몰이나 대구 지하철 폭발, 삼풍백화점 붕괴 같은 인재(人災)도 있으며, 지진, 해일, 토네이도, 진사봉뢰(震死逢雷) 같은 천재지변도 있다. 핵폭탄 피폭도 있으며, 앞의 재앙들은 아무것도 아닌 전 지구적 대재앙인 대형 혜성 충돌도 있다. 이런 끔찍한 횡액(橫厄)을 당하는 것은, 무지랭이 백성 일개인(一個人)이 이런 일에 책임이 있을 리 만무하므로, 개인의 업(業)과는 무관하다. (어떤 사람이 배를 타고 가다가 배가 침몰하여 죽을 지경이 되었다. 너무 억울하다고 하느님에게 항의하자 하느님이 대답했다. “너 같은 몹시 나쁜 놈만 30명을 한날, 한시, 한곳에 모으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냐?” 이런 이야기는, 역설적으로 업(業)이 얼마나 이해하기 어려운 이론인지를 보여준다) 이런 재난과 흉사 앞에서는, 이전의 수행으로 자리잡은 심신의 편안함과 안정은 풍전등화처럼 취약하다. 그러므로 혹시라도 심신의 일시적인 건강을 도(道)의 증거로 받아들이지 말라.
건강은 도를 닦아도 나빠질 수 있으며, 병 역시 찾아올 수 있다. 부처님 당시의 아라한들도 병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한 사례들이 있다. 얼마 전에는 세계적인 불교지도자 틱낫한 스님이 심각한 뇌출혈로 쓰러져 혼수상태에 빠졌다. 생로병사는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다. 도(道)란, 이 모든 신체상의 변화를 당연(當然)하게 그리고 담담(淡淡)하게 받아들이고, 어느 한 상태에도 집착(執着)하지 않는 것이다. 특히 (육체적인) 건강, 젊음, 물질에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다가는 크고 작은 사기꾼들에게 당할 수 있다. 사이비종교의 특징은 ‘자기 종교를 믿으면 절대 병에 걸리지 않고, 절대 가난해지지 않는다’라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있는 병은 사라지고, 가난은 부로 변한다’라고 홀린다. 그런데 그렇게 되려면 꼭 돈을 내야 한다고 한다. 즉 (진짜) 돈을 내고 (가짜) 돈을 사라는 말이다.
지난해 늦가을 어느 날, 종로에서 서울역까지 택시를 탔다. 택시 운전사는 세월호 실소유자인 구원파 교주 유병언을 사이비 교주라고 맹비난했다. 종교를 물어보니 택시 기사는 기독교 신자였다. 직장에 다니는 딸 둘과 하나뿐인 마누라까지 모두, 일 원 한 푼도 에누리 없이 십일조까지 바치는 독실한 신자였다.
“너무 액수가 많지 않으냐?, 가계에 부담이 되지 않느냐?”라는 필자의 질문에, "오히려 이익"이란다. “큰 병에 걸리면 돈이 얼마나 드는지 아느냐?”라고 반문하며, “자기 가족은 병에 절대 안 걸린다”라는 것이었다. 그게 모두 충실히 십일조를 내는 덕이라는 것이었다.
“혹시, 어느 날 갑자기 가족 중 누가 병에 걸리면 그땐 어쩌시려느냐?”라고 묻자, 그런 일은 하나님을 옳게 믿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단호하게 범주적으로 부인한다. 하지만, 그러다 병에 걸리면 엄청나게 손해다! 건강보험은 병에 걸려야 이익이지만, 종교 보험은 병에 걸리면 손해다. 건강보험은 병에 걸린다는 데 걸지만, 종교 보험은 병에 안 걸린다는 데 걸기 때문이다. 종교 보험과 건강보험의 결정적인 차이이다! 차라리 신앙 없이 열심히 살다가, 병에 걸리면 그냥 치료비를 내는 것이 경제적으로 훨씬 이익일 것이다.
매년, 꼬박꼬박, 치료비로 수입의 1/10을 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심할 때는 죽을 때까지 그리한다. 가장 난해하고 비극적인 경우는 이 택시 기사 아저씨의 교회 목사가 병에 걸리는 경우다, 그것도 암 같은 중병에! 이런 경우에는 (열심히 믿어도 병에 걸릴 수 있음을 시사하는 불길하기 이를 데 없는) 목사를 맹렬히 비난하면서, 지금까지 병에 안 걸린 사람들이 모여 아직 병에 안 걸린 목사를 초빙하여 새끼 교회를 만드는 전통이 있다. (부언하자면, 이 택시 기사는 감기를 병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기 가족도 이 병에는 때때로 걸리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런 ‘믿음과 행복과 건강’이라는 축복을 날려버릴 무상풍(無常風)이 그 기사 집안에 불지 않기를 기원한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지나친 믿음은 믿지 않는 것만 못하다. 사이비종교로 인도할 위험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선량한 서민인 그 기사 아저씨 가족이 이미 ‘종교 기생충’에 집단으로 감염된 것은 아닐까? 걱정이다.
심신이, 특히 마음이 ‘허(虛)’하고 ‘약(弱)’해서 ‘꼭’ 종교를 믿어야 하는 분들에게 조언드린다. 다음의 황금률을 기억하시라. “돈을 주고 구원(육체적 구원인 건강과, 영적 구원인 마음의 평화)을 사야한다면 그 종교는 사이비 종교이다”. 돈을 많이 내야 할수록 ‘사이비 지수(cult index)’는 기하급수적으로 폭등한다.
세속적인 남녀 간의 사랑조차도 돈을 주고 사면 가짜 사랑인데, 어떻게 구원을, 돈을 주고 살 수 있겠는가? 도박의 도시 라스베이거스의 한 창녀는 자기 애인과 잠자리를 할 때도 매번 꼬박꼬박 돈을 받는다. 다른 사람과 잘 때도 돈을 받는데 자기 애인이라고 돈을 받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실화이다! 이 사랑은 진짜 사랑일까, 가짜 사랑일까? 만약 이 창녀가 “다른 여자들은 한 달에 한 번 몰아서 받지만, 자기는 잘 때마다 받을 뿐”이라고 항변하면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사이비 지수는 0과 1 사이의 수이다. 사이비 지수가 0이면 전혀 사이비가 아니며, 1이면 100% 사이비이다. 교주의 부가 비대칭적으로 지나치게 증가하여 교단 내 지니계수(소득격차를 계수화한 것)가 1에 가까우면, 이것은 교주가 사이비라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세월호 침몰을 초래한 구원파 교주 유병언과 통일교 교주 문선명이 전형적인 예이다. 이 둘은 생전에 재벌이었다. 물론 그 부는 ‘신도들 재물의 자발적인 강탈과 신도들 노동력 착취’를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부가 교단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고 안에 머문다는 점에서, 사이비 교단은 경제적인 사이비 군집생물체이다)
인간은 생로병사를 피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인식한다. 하지만, 바로 그 인식 기능으로부터 정신적인 고통이 생긴다. 이 인식 기능을 안으로 돌려(廻光返照- 회광반조), ‘인식 기능의 주체에는 실체가 없음’(무아 無我)을 깨닫는 것이 2차파생의 고통을 제거한다. 이 2차 파생의 고통을 번뇌라고 한다.
세상은 변하고 변한다. 고(苦)에서 낙(樂)으로 낙에서 고로, 그리고 고가 낙으로 다시 낙이 고로. 끝없이 변한다. 몸이 늙고 건강이 상하고, 마음이 무디어지고 고장이 나더라도, 즉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고장나더라도, 한 가지 '앱(app)'만 지키면 된다. 제행무상(諸行無常)ㆍ일체개고(一切皆苦)ㆍ제법무아(諸法無我)를 인식하는 앱만!
그러면 무슨 일이 닥쳐도 감당하고 소화할 수 있다. "흠! 반(反) 삼법인 세력들이 또 소란을 피우고 있군!" 하고 말이다. 불법(佛法)이란 어느 날 ‘뻥’하고 터득하고 이해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실생활에 응용ㆍ실천ㆍ증명하고 확인하는 과정이다: 깨달음을 얻기 전이나 후나 이 사실은 변함이 없다: 깨달음이란 ‘오진(悟眞) 한탕’이 아니다. 悟眞 한탕만을 노리고, 끝없이 미래 시점으로 미루는 것은, 수행이 아니다. 만행(萬行)에 충실(充實)한 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며, 동시에 깨달음이다.
불단에 앉아계신 부처님은 2,500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변함없이 그 자세를 유지하신다!
번뇌(煩惱)즉 보리(菩提-부처님의 바른 깨달음) p.490
평상심(平常心)이 道이다. <조주>
사람들이 믿어온 것은 부처의 신통력이지, 삼법인(三法印)이 아니다. 번뇌는 깨달음을 키우는 비옥한 토양이다. 번뇌를 먹고 자란 지혜는 번뇌 없이 생긴 지혜보다 더욱 위대하다. 사랑의 힘으로 극복된 증오심은 사랑으로 옮겨가는데 이런 사랑은, 증오심을 먼저 경험하지 않은 사랑보다 위대하다 <스피노자>
깨달음은 다른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p.490
어떤 사람들은 깜짝 놀라서 묻습니다. 어떻게 번뇌가 보리냐고? 오색으로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장엄한 아미타 극락세계를 방문하거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로운 체험을 하거나, 가지가지 신통력을 갖춘 초월적인 마음을 획득하거나, 수많은 윤회를 거쳐, 앞으로도 한참 뒤에나 가능한 것이 보리(菩提-부처님의 바른 깨달음)가 아니냐고 묻습니다. 하다못해 20년 참선이나 10년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해야 찾아오는 것이 깨달음 아니냐고 묻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감히 자신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어찌 감히 내가? 그래서, 깨달음의 세계는 나와는 동떨어진 초인(超人)들이나 성인(聖人)들의 것이며, 그분들은 나와는 완전히 다른 인품(人品)으로 이루어진 존재로 생각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깨달음이란 뭔가 비밀스러운 비전을 얻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의 지극히 사적인 비밀지식 전수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스승과 제자는 승려로 한정됩니다.
이런 생각들에 반기를 든 것이 대승불교(大乘佛敎)이고 선불교(禪佛敎)입니다. 이들은 도량(道場)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우리 마음이 도량이며(直心是道場),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마음이 부처이고 중생이 부처라고 선언합니다(心ㆍ佛及衆生是三無差別). 기독교는 그리고 고대 종교는 사제들의 전유물이었습니다. 유대교이건, 힌두교이건, 베다교이건, 조로아스터교이건, 중세 기독교이건 모두 사제들을 통한 집단적인 희생 제의와 종교의식을 통해서만이 신과 소통이 가능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니 개인적인 구원이란 꿈도 못 꿀 일이었습니다.
이에 반기를 들고 나온 것이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사제를 통하지 않고도 신과 직접 소통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특히 개신교가 철저합니다. 루터가 1522년과 1534년에 라틴어를 번역한 독일어 성경은 구텐베르크의 활자 인쇄술을 통해서, 라틴어를 모르는 민중에게 대량으로 퍼졌습니다. 이런 보편적인 대중적인 깨달음 운동이 이미 2,000년 전에 불교에 대승불교 형태로 일어난 것입니다.
출처 : 강병균 교수 역저. 어느 수학자가 본 기이한 세상
첫댓글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도 사랑이 넘치고
행복 가득한 날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