넉넉히 이기느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8:35-37).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31) 하고 시작한 도전적(挑戰的)인 질문 중 마지막 대목에 이르렀습니다. 마지막 질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35),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39) 한, “사랑의 줄”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다”(호 11:4) 하고 말씀하는데, 이 “사랑의 줄”을 끊을 자가 없다는 선언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 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보장하는 제일 견고한 줄은 “사랑의 줄”입니다.
①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하고 도전적으로 말씀합니다.
㉠ 먼저 분명해야 할 점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한 사랑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그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라는 점입니다.
㉡ 39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한 사랑도,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그 사랑은 얼마나 연약합니까? 얼마나 가냘픕니까? 얼마나 자주 끊어집니까?
② 그러나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끊어지지 아니합니다. 우리 죄를 위하여 대신 죽어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 요한복음 10:28-29절에서도 같은 뜻을 다르게 표현하고 있음을 봅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하십니다.
㉡ 우리들을 한쪽에서는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의 손이 붙잡고 계시고, 또 한쪽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붙잡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붙잡는 손, 우리가 주님을 붙잡는 손은 얼마나 연약합니까? 얼마나 자주 놓칩니까? 그러나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붙들고 계시는 그 능력의 손이 우리를 붙들고 계시다니, 누군가가 말한 대로 “하나님의 손에서 성도 한 사람을 빼앗는다는 것은 하늘에 올라가 별 하나를 따오는 것보다도 더 불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③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35).
㉠ 이점에서 문맥(文脈)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가 35절에서 열거하고 있는 “고난”의 목록들이 어디와 연결되는 문맥인지 아십니까?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苦難)은” 한 18절과 결부가 되는 문맥입니다.
㉡ 그리고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37) 하고 선언하고 있는데, 무엇에 대해서 “넉넉히 이긴다”는 것인가?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 등이 닥쳐와도 넉넉히 이긴다는 말씀입니다. 이점에서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은, 사도가 열거하고 있는 고난의 종목들을 유의하여 보면 일상적(日常的)인 삶 가운데서 일어나는 일들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 우리들이 말하는 “고난”과는 성질이 다른, 모두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 때문에 당하는 핍박들이요, 더 나아가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당하게 되는 박해들이라는 점입니다.
㉢ 그리고 이런 고난들은 바울 자신이 고린도후서 11:23절 이하에서 술회하고 있는, 자신이 몸소 겪었던 환난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자기중심적인 “욕심”이나 일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고난들 때문에 낙망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으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 그런데 넉넉히 이길 수 있는 비결은 “고난”을 당할 때에, “생각건대”(18상) 하고,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고난 자체만을 바라보지 말고, 그리스도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 성령님의 사랑을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하노라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게”(37) 된다는 말씀입니다.
④ 또 주목할 점은,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하고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우리를…” 하고 말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 31절에서도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합니다. “누가 송사하리요”(33), “누가 정죄하리요”(34) 그리고 본문인 35절에서도 “누가 끊으리요” 합니다. “누가, 누가, 누가” 하고, 우리를 대적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를 대적하고, 끊어놓으려 하는 사탄의 세력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4번이나 강력하게 도전적으로 말하는 것은, 절대로 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⑤ 열거된 마지막 종목이 무엇인가? “칼이랴” 입니다. 이것은 순교를 의미합니다.
㉠ 사도 바울은 이때 벌써 자신이 어떠한 순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을 예감한 듯합니다. 이점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36) 한 말씀에 나타납니다. 순교까지도,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합니다.
⑥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하는 “끊을 수 없다”는 말이, “황금의 연결 고리”와 결부되는 문맥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 지금 우리는 의롭다 하심까지 와 있습니다. 앞으로 남은 고리는 영화롭게 하심입니다. 우리의 낮은 몸이 주님의 영광의 몸과 같이 변화 될 소망만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우리를 가로막고 서서 이를 불가능하게 만들거나 끊어 놓을 자가 있단 말이냐? 환난으로 그렇게 하겠느냐? 곤고로, 핍박으로, 기근으로, 적신으로, 위험으로, 칼로 할 수 있단 말이냐? 도전적인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⑦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37) 하고 말씀합니다. "넉넉히"가 중문에서는 "여유 있게"로, 일본어에서는 "압도적으로" 되어 잇습니다.
㉠ 우선적으로 주목할 점은 이제까지 역설한 26-36절까지의 내용은,
㉮ “성령이 우리 연약함을 도우신다”(26),
㉯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31),
㉰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35) 하고, 모두가 우리가 행할 일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께서 행해주신 일이었다는 점입니다.
㉡ 그런데 본문 37절의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한 “이김”은 우리들의 몫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면 겨우 이기는 것도 아니라, 어떻게 “넉넉히 이길 수가” 있단 말인가? 다시 한번 본문을 유의해보면, 자기 힘이나 능력으로 이길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승리의 비결을 “사랑의 힘”이라고 말씀합니다.
⑧ 그러므로 중요한 요점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는바 됨이니”(5:5) 한 말씀인 것입니다.
㉠ 성도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이, 성령에 의하여 부은바가 되기만 한다면, “넉넉히 이길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승리의 비결이 오직 여기에 있다는 점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현대교회의 문제가 어디에 있는가? “사랑”의 결핍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⑨ 이점을 고린도후서 5:14절에서 확인할 수가 있는데 사도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强勸)하시는도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 바울은 우리와 꼭 같은 성정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런 바울이 어떻게 그 많은 고난을 감당을 하고, 넉넉히 이길 수가 있었는가? 본문에서 말씀함과 같이 “사랑의 강권함”, 즉 “사랑”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을 그토록 “강권(强勸)한 사랑”이란 어떤 사랑인가?
㉡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고후 5:14중), 즉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죽어주셨다는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그 사랑이 자신을 “강권”, 즉 잡아당겨주셨기 때문에 이길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생각한다면 본문에 열거한 모든 일이 닥쳐온다 하여도 넉넉히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승리의 비결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한 “사랑”의 힘입니다. 사도는 최후의 대단원을, “사랑”이라는 말로 끝맺고 있습니다.
⑩ 이점에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이점이 현대교회와 다른 점인데 사도는 이런 고난들이, “머지않아 물러가게 될 것이다, 곧 해결이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 이런 고난들은,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할 그 날에야 다시는 없게 될 것입니다.
㉡ 사도는 여기서 거론한 고난의 목록들뿐만 아니라,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39) 하고 도전적으로 선언합니다. 말씀을 마치기 전에 다시 한번 상기시켜 드립니다.
㉮ 형제가 송사를 당하거든,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하는, 성령의 검으로 물리치십시오.
㉯ 형제가 정죄감에 빠지거든,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하고 선언하시기 바랍니다.
㉰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 닥쳐오거든,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인,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 성령님의 사랑을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⑪ 사도는 자신만이 아니라,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하고 단언합니다.
㉠ 적의 공격을 겨우 방어만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넉넉히 이기느니라”는 말은, 정복하고도 남음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정복자요, 승리의 개선장군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점을 히브리서에서는,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히 11:38) 합니다.
㉡ 메투헨리는 이 대목을 이렇게 해설하고 있습니다. “고난 받은 성도가 잃은 건 무엇인가? 아 이 사람아 그들이 잃은 건 황금이 용광로에서 잃은 것 곧 찌꺼기뿐일세”.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여유 있게, 압도적으로 이기느니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