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로 국어·국사 수업, 한국어 말살정책 [대담] 프랑스 교포 언어학박사 정고스란 씨
5월 15일 오늘은 세종임금이 탄생한 날이다. 어제는 한국형리더십연구회와 세종국가경영연구소가 공동 주최하는 “우리 안의 세종대왕, 한국형리더십을 찾아라!” 콘퍼런스에 다녀왔다. 이 자리에 발표자는 물론 토론자들은 한결같이 세종임금이 우리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치켜세운다. 그것도 가장 큰 공적은 역시 훈민정음 창제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정부의 언어정책은 어떤가? 새 정부는 들어서기도 전에 영어몰입 교육을 한다고 해서 말썽이 일었었다. 그것도 국어와 국사까지 영어로 교육한다는 말에 시민단체와 국어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저항을 받고 있다. 과연 그것은 무엇을 뜻할까? 이때 한국에서 국어학을 전공, 석사학위를 받고 프랑스 파리 제7대학과 마른느 라 발레 대학에서 언어학 박사학위를 받은 프랑스 교포 정고스란 씨가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을 위해 한국어 교육 교재를 만든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녀에게 프랑스의 언어 교육 환경과 한국 정부의 교육 정책에 대한 소견을 들어봤다. - 한국어 교육 교재를 만드는 것이 절실한 문제인가? “우리 아이는 프랑스에서 살며 아버지가 프랑스인이고, 엄마가 한국인인 다문화 가정이다. 그래서 그냥 놔두면 프랑스 말만 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외가에 갔을 때 외가 식구들과 전혀 대화를 나눌 수가 없는 언어장애인 신세가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한국어 교육을 위해 한국말만 사용했다. 지금 아이는 만 네 살인데, 지난해 9월부터 일주일에 한번 한인학교에 데려가서 한국어를 배우게 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사용하는 한국어 교재는 국어학과 언어학을 전공한 내가 볼 때는 기대 이하였다. 그래서 국어학을 전공한 내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재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특히 아이들이 흥미를 느끼고 쉽게 공부할 수 있도록 온 정성을 쏟을 것이다.” - 지금 아이의 한국어 구사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일상 대화는 무리 없이 할 수가 있는 정도이다. 또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간단한 동영상 대화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정도로 만족하는 건 아니다. 반은 한국인이기에 한국어도 완벽하게 구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 그런데 아이가 다문화 가정에서 그것도 프랑스에 살면서 어떻게 한국어를 배울 수 있었나? “아이가 만 세 살일 때까지는 내가 하는 한국어를 모두 알아들었지만, 한국어 문장은 아직 구사하지 못했었다. 그때 일부러 아이를 한국에 데리고 와 석 달 동안 어린이집에 보냈다. 일주일 정도는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 것이 큰 스트레스로 다가오는지 어린이집에 가려 하지 않았다. 잘 달래서 보냈더니 3주 정도 이후부터는 다른 아이들과 의사소통을 잘했다. 심지어 내 고향 진주 사투리를 배우고 억양까지 따라했다. 그런데 프랑스에 돌아가니 다시 내게도 프랑스말을 쓰려고 했다. 그래서 아이가 프랑스말을 쓸 때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한국어를 배워야 할 당위성을 설득했다. 예를 들면 외가에 갔을 때 한국어를 할 수 있어야 좋아하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대화를 할 수 있고, 아이가 신이 나는 대형 할인점 시식코너도 이용할 수 있음을 얘기해줬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꾸준히 노력한 덕분에 이젠 상당한 수준에 이를 수 있었다.” 정씨는 이제 아이가 다른 아이들은 잘 못하는 이중언어 사용자라는 것을 자랑스러워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엄마가 아이에게 프랑스말과 한국어를 섞어 쓰면 안 된다고 말했다. 또 사투리 발음은 사춘기 이전에만 교정해주면 되어서 문제가 아니란다. - 이중언어를 가르친다는 것이 쉽지 않아 중간에 포기하는 가정이 많다고 들었다. “지금 프랑스 교민들도 고민하는 사람이 많고 포기하는 사람도 있다. 특히 하고 싶어도 아이가 따라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어려움을 겪는다. 하지만, 한국 정체성을 포기하고 한국과의 관계를 끊고 살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이중언어는 가르쳐야만 한다. 그리고 말을 못하더라도 부모가 계속 한국어를 들려주어 익숙하도록 해주면 언젠가는 갑자기 트일 수 있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 교재는 어떤 방식으로 개발할 것인가? “절대적인 것은 아이들이 흥미를 느껴야 한다. 공부가 스트레스가 되게 하지 말고 신나서 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프랑스 학교에서 알파벳을 가르칠 때 ‘친구들 이름에 가장 많이 쓰이는 알파벳은 무엇일까?’, ‘는 산허리에 막대를 걸친 모습이다.’ 따위처럼 한다. 그런데 한인학교는 <ㄱ>, <ㄴ>을 공책에 수없이 반복해서 쓰도록 하는데 아이들이 짜증을 낸다. 그런 방법 대신 <ㄴ>에 뚜껑을 씌우면 <ㄷ>, <ㄷ>에 <ㄴ>을 뒤집어 붙이면 <ㄹ> 이렇게 가르치면 어떨까? 이것은 한번 생각해 본 예이고, 많은 고민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프랑스의 초등학교 이전의 유아학교에서는 글자보다는 이야기를 읽는다든지, 대화를 한다든지, 노래를 부른다든지 하는 말교육 중심이지, 한인학교에서처럼 글자 중심 교육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뿐만 아니라 정식 알파벳 및 쓰기 교육은 초등학교 들어가서 시작한다. 우리도 이를 본받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다.”
- 프랑스에서도 우리처럼 영어 배우는데 열광하나? “물론 프랑스도 영어 붐이 있지만 모두 공교육에서 흡수한다. 사교육은 학교 수업을 못 따라가는 아이들이 보충하기 위한 정도에 불과하다. 방과 후는 주로 예체능 과외를 한다. 그런데 이 예체능 과외도 시민들이 협회를 만들어 시 당국의 지원 아래 이루어지기 때문에 대부분 비싸지 않다. 유아원에서 고등학교까지는 모두 국립이기 때문에 점심값이나 방과 후 맡아주는 것 외에는 돈이 전혀 들지 않는다. 프랑스 영어교육은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중학교 이전까지는 일주일에 한 시간씩 영어 수업이 이루어지는데, 주로 단어를 공부한다. 계절 이름이라든지, 일 년 열두 달 이름이라든지, 숫자 세기,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단어 정도만 가르친다. 쓰기나 말하기, 듣기와는 무관한 교육이다. 본격적인 영어 교육을 위한 준비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중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본격적인 영어 수업을 하는데 읽기 말하기 듣기를 중심으로 총체적으로 가르친다. 일주일에 3~4시간 정도 수업한다. 영어에 모든 걸 다 거는 한국과는 영 딴판이다.” - 한국 새 정부는 국어와 국사까지도 영어로 수업하라고 한다. 이에 대한 의견은? “정말 그런가? 언어, 특히 모국어는 의사소통의 수단이다. 그런데 국어와 국사를 영어로 수업한다는 발상은 언어를 수단으로 보지 않고 목적으로 본 데서 오는 엄청난 잘못이다. 한국인에게 한국어는 오른손잡이가 오른손을 쓰는 것과 같다. 그런데 갑자기 오른손을 쓰지 말고 왼손을 쓰라는 지시는 받는 꼴인데 이는 그 사람의 오른손을 잘라 없애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어를 없애버리지 않는 한 국어와 국사를 영어로 수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국어와 국사까지도"라면 다른 모든 과목도 영어로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국어와 영어의 위상을 바꾸라는 의미이다. 예전에 교과 과목임과 동시에 모든 과목을 가르치는 수단이었던 ‘국어’를 영어로 바꾸고, 예전에 교과 과목의 하나인 ‘영어’를 교과 과목임과 동시에 지식 전달 수단인 국어로 하라는 명령이다. 이것은 한국어 말살 정책이다. 일제강점기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것 같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와는 달리, 모국어인 한국어 말살 정책을 한국인 스스로 명령한다는 점에서 이런 일은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것이고 또 앞으로도 한국이 유일한 나라일 것이다. 치욕의 역사가 다시 열리고 있다. 국어학계뿐만 아니라 모든 한국인이 가만히 두고 보아서는 안 될 일이라고 생각한다.”
- 또 새 정부는 유아원부터 영어를 가르쳐야 한다고 야단이다. 이를 어떻게 생각하나? “영어 조기 교육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 조기교육이 언어습득에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외국어에 대한 조기 교육은 인간의 뇌 속에 있는 것으로 관찰된 언어습득 장치가 약 14살 이전까지만 존재하고 그 이후에는 사라진다는 연구 결과에 따라 강조된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어릴 때 외국어를 가르치는 것이 좋다는 이론이다. 그런데 조기 교육을 외치는 사람들, 특히 영어 전공자들이 두 가지 중요한 점을 간과하고 있다. 첫째는 논리적 사고와 표현 능력이다. 이러한 능력은 모국어를 통해서, 특히 대화와 독서를 통해서만이 얻을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능력은 어른일수록 더욱 쉽게 완성된다는 사실이다. 모국어를 통해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지 못하는 아이는 외국어로도 쉽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지 못한다. 모국어에 대한 논리적 표현 방식을 습득하지 못한 어린이에게 영어를 들이대는 것은, 그것도 말을 통해서가 아니라 주로 문자나 문법을 통해서 들이대는 것은, 사상누각, 모래 위의 집을 짓는 것과 같다. 둘째로 간과하기 쉬운 점은 언어 습득 능력도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재주’의 문제라는 점이다. 대개 인간은 어떤 특정한 방면에 좀 더 나은 또는 특별한 재주를 갖게 마련이다. 누구는 노래를 잘하고, 누구는 그림을 잘 그리고 또 누구는 운동을 잘한다. 언어도 마찬가지이다. 누구는 달변이고 누구는 어눌하다. 모국어도 그런데, 하물며 외국어인들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원어민 영어를 아무리 강조해도, 어른이 되어서 배운 영어의 발음이 정확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며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역시 재주의 문제다. 재주와 관심이 없는 아이에게 억지로 인위적인 언어 교육으로 스트레스를 주기보다는 그 아이가 무슨 재주가 있는지를 관찰하여 그 분야를 열심히 키워주는 것이 더욱더 자녀를 사랑하는 길일 것이다. 만약에 자신의 아이가 어느 분야에도 그다지 재주가 없는 것 같다면, 오히려 더 잘 된 일일 수도 있다. 그 아이에게는 끊임없는 ‘대화’의 통로를 열어주고 열심히 ‘책’을 읽게 하라. 물론 모국어로. 모국어를 통한 ‘대화’와 ‘독서’만큼 훗날을 위한 튼튼하고 훌륭한 투자는 없다. 그리고 다른 분야의 ‘재주’와는 달리, 말에 대한 ‘재주’는 훗날 어른이 되었을 때 자신의 ‘노력’으로 얼마든지 따라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럴 때에 모국어를 통해 연마한 논리적 표현 능력은 새로운 말을 습득하는 데에 훌륭한 뒷받침이 될 것이다.” - 그렇다면, 언어를 학문으로서 공부하고 언어 습득이론과 이중언어에 대한 보다 집중적인 연구를 하는 사람으로서 외국어를 시작하기 가장 좋은 시기를 언제로 보는가? “나는 그 시기를 약 열살 전후로 보고 있다. 초등학교 4~5학년쯤이면 될 것 같다. 언어습득 장치가 사라기지 전까지 약 4년이 남아 있고 또 논리적 표현 능력을 터득하는 데도 약 4년이라는 충분한 기간이 있기 때문이다. 외국어 습득은 조기에 시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교육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꼭 말하고 싶은 것은 모국어가 완전히 내면화되지 못한 4살 이전에 외국어를 가르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 끝으로 프랑스도 한국처럼 영어 간판이 많은가? “프랑스는 한국과 간판의 개념이 다르다. 가기 전에 미리 가게의 내용을 충분히 확인한 다음에 주소만 보고 찾아가기 때문에 간판은 중요한 게 아니다. 그래서 간판이 없는 곳도 있고 있어도 카페, 병원, 약국, 안경점처럼 업종을 크게 쓴 다음 고유명사인 상호는 아주 작은 글씨로 쓰는 정도이다. 따라서 영어 간판을 내 걸 이유가 없다. 결국, 프랑스는 허울보다는 내용을 중시한다는 이야기다. 반면에 한국은 내용보다는 허울을 중시하는 잘못된 풍조에 빠져 있다.” 정씨는 참, 할 말이 많은 듯했다. 대담 시간이 짧아 안타깝다는 말을 한다. 프랑스에 살고 프랑스인과 결혼했지만 그 정체성은 확고했고, 한국어에 대한 자긍심은 대단했다. 고국에 살아 한국어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는 우리에게 세종임금 탄신을 맞아 크게 경종을 울려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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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김영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