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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정 서울시립동부병원
정형외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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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때거죽이 내려앉은 손으로 종이봉지 하나를 쑥 내밀었다.
얼결에 받은 봉지는 뜨거웠다.
안에는 김이 모락모락, 방금 구워 낸 붕어빵이 몇 개 들어 있었다.
“뜨듯할 때 먹어야 맛있어유.
남기지 말고 꼭 다 드세유.”
나는 환자가 보는 앞에서
붕어 두 마리를 연거푸 먹어 치웠다.
같이 먹자고
환자에게도 간호사들에게도
하나씩 나눠주었다.
남자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띠고 나갔다.
여자는 오늘 컨디션이 좋은가 보다.
티 없이 환한 미소를 띠고 휠체어에 앉아 있다.
처음 병원에 왔을 때의 표정을 생각해보니 천양지차다.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어려서 심한 소아마비를 앓은 탓에
내내 어머니랑 단둘이 살고 있다.
어깨 통증으로 꼼짝 못하고 몇 달을 집에만 박혀 뒹굴면서
신경질만 계속 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참 많이 좋아졌다.
쩔쩔매던 오른팔을 거뜬히 들어올려 보인다.
그러고는 슬그머니 꾸러미 하나를 꺼내 놓았다.
번쩍이는 포장지에 꾸깃꾸깃, 손수 싼 게 분명한 둥그런 물체는 풀어보니
작은 핸드크림이었다.
“선생님 드리라구 엄마가 사왔어요.”
최 영감은
십여년 전 받은 척추 수술 후유증으로 한쪽 다리를 못 쓴다.
더구나 방광에도 마비가 와서
줄곧 호스를 끼고 살고 있다.
감각이 없는 관계로
왼쪽 엉치에 커다란 상처가 생겼는데도
한동안 모르고 지내다가
고름이 나면서야 알게 되어 한참을 소독받으러 다녔다.
그는 불편한 몸을 끌고도
부지런히 장사하러 다닌다.
방산시장에서 도매상을 하는 친구한테 물건을 떼다가
도봉산 등산로 입구에 가서 판다고 한다.
배낭에 갖고 다니는 물건은
등산용 장갑, 팔 토시, 불빛이 나오는 요술 볼펜, 야광 양말 이런 것들이다.
최 영감은
양말 세 켤레를 우리에게 선물했다.
노 간호사와 고 간호사와 나,
이렇게 세 사람은 각각 보라색, 녹색, 주황색 양말을
하나씩 받아 쥐었다.
얼마 전 한 남자가 응급실로 실려왔다.
알코올 치료소에서 퇴소한 지 이틀 만에
3층 옥상에서 뛰어내렸다고 한다.
자살을 시도한 것 같다.
병원에 와서도
계속 죽을 거라고 죽게 내버려두라고 중얼중얼한다.
다행히 생명에 지장은 없었고
다만 애꿎은 발목이 양쪽 다 부서졌다.
수술을 받고 한달이 지나
남자는 깁스를 풀고 퇴원해서
다른 정신치료 전문병원으로 옮겨가기로 되었다.
그날 아침 사회복지사의 손에 이끌려 걸어나가는 남자를
로비에서 만났다.
놀랍게도
맨발에 앞이 뻥 뚫린 깁스용 찍찍이 덧신을 신고 있었다.
그동안 깁스를 싸매고 있어서 미처 헤아리지도 챙기지도 못했던 나의 불찰이다.
허겁지겁 환자를 붙잡아 앉히고
양말과 신발을 구하러 갔다.
그때 일전에 최 영감이 주고 간 양말이 생각났다.
서랍을 뒤지니 그 속에 주황색 두툼한 양말이 나왔다.
남자에게 양말 한쪽을 신겼다.
마저 한쪽은 스스로 신어보시라고 했다.
“혼자 잘 신으시네요.”
깎지 않아 제멋대로 자란 입가의 허연 수염 사이로
남자가 웃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날은 서울이 올겨울 처음 영하로 떨어진 날이었다.
이들이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안다.
단돈 천원이 없어서
깁스는 해놓고도 깁스용 덧신 값은 외상 지고 가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부자의 어떤 선물보다도
더 귀중한 것을 주고 간다.
비싼 양주, 고급 만년필, 수입 화장품이 아니다.
때로는 우유 한 갑, 귤 몇 알, 꿍쳐놓았던 젤리 한 봉지를 놓고 간다.
“내가 아껴 먹는 건데 아주 맛나. 의사 선생 고마우이.”
손가락 한 마디만큼 작지만 화톳불처럼 따뜻한 그들의 촌지다.
바깥세상에서는
‘뇌물’이란 뜻으로 전락해버린 낱말 ‘촌지’,
본래의 훈훈한 취지가 고스란히 살아서 작동하는 곳,
여기는 바로 시립병원이다.
※ 촌지(寸志)는
마음이 담긴 작은 선물을 의미한다.
촌지는 일문한자에서 유래하였다.
본래 뜻은 어떤 이로부터 은혜를 입었을 때
고마움의 뜻으로 정성을 드러내기 위하여주는 선물이지만,
어
寸은 「手」(又․손)밑에 점(′)을 찍어
손목의 特定 部位를 가리키고 있다.
名醫 편작(扁鵲)은 診脈의 達人이었다.
그의 맥서(脈書)에 의하면
손목아래 2~3㎝ 되는 곳이 診脈의 適所다.
이곳을 ‘寸口’ 라고 하는데,
寸은 바로그 ‘寸口’를 가리킨다.
손가락 ‘한 마디’쯤 됐으므로 寸은 ‘마디’도 뜻하게 됐다.
그런데 자(尺)가 귀했던 옛날에는
身體 部位를 기준으로 길이를 헤아렸다.
‘한 뼘’, ‘한 길’, ‘한 발’ 등. 물론 손가락 ‘한 마디’도 자주 사용했다.
대체로 ‘짧은 길이’에 속했으므로
寸은 ‘짧다’는 뜻도 가지게 됐다.
촌각(寸刻)․촌극(寸劇)이니 촌음(寸陰)․촌철살인(寸鐵殺人)등은
그러한 예이다.
志는 士(선비 사)와 心(마음 심)의 結合인 것처럼 보여
‘선비의 마음’으로 해석하기 쉬우나
사실은
之(갈 지)와 心의 結合으로
‘마음이 가는 것’을뜻한다.
마음이 움직이는(動)것,
그것이 곧 뜻이나 의지(意志)가 아닐까?
그래서 志는 ‘뜻’이 된다.
지망(志望)․지원(志願)․동지(同志)․의지(意志)․초지일관( 初志一貫)등 많다.
따라서 촌지(寸志)라면
‘극히 작은 뜻’이다.
‘작은 정성(精誠)’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대체로
지나치지 않은 謝禮(사례)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寸志(촌지)는 다른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 같다.
주는 측에서 負擔(부담)을 느끼면서 준 것이라면
이미 寸志(촌지)의 範圍(범위)를 벗어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