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李周會, 1843∼1895
◆ 1894년 동학농민군 토벌대의 일본군 선봉장으로 활약. 1894년 군부협판
성대히 치러진 명성황후 시해주범 추도 법회
1928년 12월 19일, 동경에 있는 소시지(總持寺)라는 절에서 이주회 33주기 추도 법회가 성대히 열리고 있었다. 일본 최대의 우익단체인 흑룡회(黑龍會)의 주관 아래 도야마 미치루(頭山滿),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 등 우익들과 명성황후 시해사건 관련자인 미우라 마스지로(三浦松二郞:주범 三浦梧樓의 아들), 자작 아다치 겐조(安達謙藏), 오사키 세이키치(大崎正吉), 호리구미 구마이치(掘口九萬二) 등과 그 외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 미즈노 렌타로(水野練太郞), 스기야마 시게마루(衫山茂丸) 등 내노라하는 조선 침략 관계자들이 대거 참가하고 있었다.
이 추도식에서는 추도뿐만 아니라 묘비 건립과 유족에 대한 지원 문제를 결의하여 상당한 돈을 모금하기도 하였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에서 조선측 주모자로 지목되어 처형당한 대역죄인 이주회를 일본의 침략자들이 의인, 영웅 혹은 장군으로 표현하면서 성대히 추도식을 치러 주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이주회는 호가 남주(南洲), 자가 풍영(豊榮)으로 1843년 경기도 광주 산성리에서 태어났다. 무과를 거쳐서 오위장(五衛將)에 올랐고, 병인양요(1866) 때 프랑스 함대를 물리치는 데 공로를 세워 대원군의 눈에 들어 그의 심복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그는 그 공로로 얼마 지나지 않아 연일현감(延日縣監, 6품)으로 승진하였고, 그 후 외무위원까지 올랐는데, 이 때 김옥균, 우범선* 등과 친교를 맺었다고 한다.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이주회는 아무 관련이 없으면서도 김옥균과의 친교로 화를 입을까 두려워 일본으로 도망쳤다(1885). 이 때부터 3년간 그는 도쿄 간다(神田) 묘진시(明神祠) 부근에서 와타나베(渡邊)라는 사람의 딸과 동거생활을 하면서, 그가 그린 서화를 여자가 밖에 내다 팔아 근근히 먹고 살았다고 한다.
일제의 첨병이 되어 동학농민군 진압
당시 일본에는 중국이나 조선에서 온 많은 정치 망명가나 유학생이 체류하고 있었다. 일본의 대륙침략론자들은 이들 중 이용가치가 있을 만한 자들을 골라 생계를 도와주면서 교류하였다. 이것은 뒷날 친일매국의 인적 연줄로 이어지는데, 이주회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김옥균이나 박영효*처럼 거물은 아니지만 현감, 외무위원 등의 관직에까지 올랐고 김옥균과 친교가 있는 정치 망명가였기 때문에, 특히 현양사(玄洋社) 계통의 대륙팽창론자들이 접근하여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주회는 일본으로 도망간 지 3년 만에 사면되었다. 사면을 받고 귀국한 그는 자원하여 금오도(金鰲島--전라남도 순천 앞에 있는 섬으로 황금어장이었다고 한다) 도사(都事)로 내려갔지만 유배나 다름없는 생활이었다. 한편, 이주회는 금오도에 형 이제영(李濟榮)과 권속을 데리고 가서 개간사업을 벌였는데, 이 개간사업에 가렴주구를 피해 들어온 순천 지방의 농어민들을 동원하였다. 이렇게 개간된 섬은 한때 4부락 600여 호로 번창하였다 한다.
그가 섬에 있을 때인 1892년 가을, 다케다 한시(武田範之--이 다케다란 자는 일본 조동종의 승려이자 우익 낭인으로서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관계하였고, '합병' 당시에는 이용구*를 위에서 조종하여 '합방'운동을 획책하였고 이회광*을 매수하여 조선불교를 매국화하는 데 앞장 섰던 자이다)가 조선에 침략의 거점을 마련하고 사업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금오도로 이주회를 찾아왔다. 이 때 이주회는 다케다와 더불어 어선 8척과 일본인 어부 30인을 고용하여 대대적인 고기잡이 사업을 벌였지만 냉동시설이 없어 이듬해 봄에 파산하고 말았다.
1894년 가을, 동학농민군은 반일투쟁을 기치로 내걸고 다시 봉기하였다. 농민군의 봉기는 이주회에게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동학군을 토벌하기 위해 일본 군함 스쿠바(筑波)가 순천에 들어왔을 때 이주회는 군함에 들어가 해안의 지형을 설명하고 작전 계획을 세우는데 참여하였으며, 나아가 직접 사람들을 끌어모아 자칭 총대장이라 한 뒤 일본군의 선봉장이 되어 '혁혁한 공'을 세운다. 이 때의 공로로 함장 구로오카(黑岡帶刀)가 이노우에 주한공사에게 천거하고, 다시 이노우에가 박영효 내무대신에게 압력을 넣어, 이주회는 김홍집 친일내각의 군부협판에 파격적으로 발탁되었다.
1895년 삼국간섭으로 일본 세력이 쇠퇴하고 민비를 정점으로 한 민씨세력이 권력의 전면에 재등장하게 되자, 그는 권좌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이 때 새로 부임한 미우라 일본공사를 중심으로 한 일본 당국은 '민비 제거' 계획을 세우고, 드디어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를 시해하였다. 여기에 이주회는 조선측 주범으로 가담하였는데, 그의 역할은 대원군을 이 사건에 관련시키고 우범선*, 구연수 등을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매국노 제1호인 송병준*이 친민비 반대원군파임에 반하여 이주회는 친대원군 반민비파라는 점에서 친일매국의 구도는 매우 복합적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일본의 침략구도 또한 매우 교묘했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그는 이 사건으로 체포된 뒤 대역죄인으로 1985년 12월 19일 처형당하였다. 그의 시체는 처형 후 산 속에 버려졌고, 그의 처(김씨)와 아들 병구(秉九--당시 7세)는 도망쳐 숨어 살았다. 3년 후 병구는 호구지책으로 금강산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병합'이 되고 나서 송병준의 사위이며 과거 이주회의 부하였던 구연수(총독부 경무관)가 백방으로 그 유족을 수소문하여 모자를 서울로 불러 함께 살게 하였는데, 이들은 구연수의 도움과 총독부에서 도와 주는 비밀 자금으로 생활하였다. 뒤늦게 이러한 사실이 일본에까지 알려지자 미우라를 비롯한 민비시해 사건 가담자를 중심으로 이주회 묘지 건설 및 유족구호사업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고, 모금한 돈으로 경기도 광주군에 약 5정보의 땅을 마련하였으며, 용산의 서룡사(瑞龍寺) 내 국토대(國土臺)에 묘지를 만들었던 것이다(1929).
이미 이주회는 1892년 금오도에서 다케다를 만났을 때, "조선을 망친 것은 민비이기 때문에 조선을 구하고 조선과 일본의 협력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민비를 죽여야 한다"고 내뱉었다 한다. 그 정도로 그는 민비에 대해 적대적이었고, 따라서 시해 사건에 구체적으로 참여한 확신범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민비가 '조선의 개화'에 방해가 되는 요소였다고는 하지만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가면서까지 그런 일에 관련하였다는 것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였다. 만일 그가 사형당하지 않고 살아서 다른 관련자들처럼 일제의 보호하에서 권력을 휘둘렀다면 어떤 행위를 했을까? 주체를 갖지 못한 잘못된 의식 속에서 그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개화'니 '근대화'니 하는 논리로 처단했을까를 생각하면, 차라리 일찍 죽은 것이 역사와 민족을 위해서도 다행이라 느낄 뿐이다.
■강창일(배재대 교수·한국사)
참고문헌
武田範之, [記李豊榮事].
黑龍會 編, {東亞先覺志士記傳}(上), 原書房,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