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역사테마공원
성주역사테마공원은 성주의 옛 모습을 재현한 공원이다.
성주읍성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임정사 앞 동북쪽 성곽의 흔적만 일부 남게 되었는데 2020년 10월에서야 재건하였다.
산책로에 조성된 비석들은 조선 시대에 성주 곳곳에 세워져 있었지만 도로 개설 등의 이유로 이곳으로 이전되어 그 뜻을 이어가고 있다. 각 시설은 각종 문헌과 관련 전문가들의 고증을 거쳐 복원해 지역문화유산의 역사와 가치를 재조명했다.
실록각 건물
조선왕조실록 중 태백산본은 1592년 임진왜란으로 전주사고본(全州史庫本)을 제외한 실록이 소실되자 1606년(선조 39)에 설치한 외사고본(外史庫本) 848책으로 현재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부산기록정보센터에 보관되어있다.
참고로 시정기(時政記)란 조선시대 춘추관(春秋館)에서 관장하여 당대 정무 행정의 실상과 잘잘못을 기록한 1차적 역사 기록물로, 실록을 편찬할 때 가장 기본적인 자료가 되었다.
또한 사초(史草)란 넓게는 실록 편찬의 모든 자료를 의미하지만,
사관(史官)들이 기록한 1차 자료를 사초라 하며 크게 두 종류로 나누어
관장사초(館臧史草)와 가장사초(家藏史草)가 있었다.
사관은 보고 들은 바를 사실 그대로 기록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이를 직필(直筆)이라 하였으며, 사관의 직필은 국왕이나 고위 관원이라 할지라도 침범할 수 없도록 법령(法令)과 제도로 보장되었다.
편찬은 관장사초(館臧史草)와 가장사초(家藏史草)등 시정기(時政記)를 모아
초초(初草), 중초(中草), 정초(正草), 세 단계를 거쳐서 완성하였다.
필사본, 인본(印本). 정족산본과 태백산본 등이 일괄적으로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 훈민정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성산동 고분군 전시관
사적 제86호로 지정된 성주 성산동 고분군을 보전하고 성주 역사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2020년에 설립되었다.
성주 성산동 고분군 출토 유물과 관련 내용을 살펴볼 수 있는 상설전시실과 야외전시장, 문화재를 안전하게 보관할 수장시설은 물론 어린이 체험실 · 가족 쉼터 · 다목적 강당 · 카페 등 체험교육시설과 편의시설을 갖추었다.
성주 성산동 고분군 전시관 상설전시실은
크게 4개 파트로 기획하였습니다. 도입부에 해당하는
‘성산동 고분군 이전 성주’는 성산동 고분군이 만들어지기 이전 시대의 성주를 알아보는 전시로, 성주의 선사시대와 원삼국시대, 삼국시대 성산가야의 흔적을 찾고자 하였습니다.
‘성산동 고분군 발굴사’에서는 성산동 고분군 분포를 살펴보고, 성산동 고분군을 누가, 언제, 어떤 고분을 대상으로 하여, 어떻게 발굴되었고 그 결과는 어떠하였는지 발굴의 역사를 알아보는 공간입니다.
‘성산동 고분군 속으로’는 성산동 고분군을 본격적으로 소개하고 알리는 공간으로, 성산동 고분군 출토 유물을 종류별로 나누어 전시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별티유적 속으로’에서는 성산동 고분군 중 하나인 별티유적의 1호분을 이전 복원하여 무덤 구조와 그 안에 담긴 유물들을 현장감 넘치게 보실 수 있도록 연출하였습니다.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
조선조 세종대왕 왕자들의 태실로서 전열은 11기, 후열은 8기로 되어있다. 태실 앞에는 각각 왕자의 태실비가 세워져 있는데, 대부분 세종 20년(1438)에서부터 세종 24년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중에는 비석이 닳아 판독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으며, 판독할 수 있는 대표적인 것은 평원대군, 영응대군, 의창군 등의 태실비이다. 그러나 1977년 12월, 이곳을 보수, 정비하면서 금성대군, 화의군, 단종 등의 태실로 추정되는 자리에서 토기, 태호, 분청인화문 대접, 분청상감 연화문 뚜껑 1식과, 명기가 있는 지석2점 등이 출토되어 현재 국립대구박물관, 경주박물관, 경북대학교 박물관 등에 보관되어 있다. 한편 가까이엔 이곳 태실을 수호하는 사찰이었던 선석사가 있다. * 태실과 지석의 구조에 대하여 * 태실은 왕실에서 자손을 출산하면 그 태를 봉안하는 곳을 말한다. 예로부터 태는 태아의 생명력을 부여한 것이라고 인정하여 태아가 출산된 뒤에도 함부로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다루었다,
성주한개마을
2007년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한개마을은 조선 세종 때 진주목사를 역임한 이우(李友)가 1450년경에 입향한 이래 560여 년을 내려오면서 성산이씨(星山李氏)가 모여 살고 있는 전통 씨족마을이다.
응와세가
응와종택 사랑채
응와종택
응와종택은 응와 이원조가 건립한 성주이씨 종택인데요. 사도세자의 호위무사였던 증조부 돈재 이석문의 일화에서 북비고택이라고도 합니다.
북비고택으로도 불리는 응와종택(경북도 민속자료 제44호)은 한개마을 성산 이씨의 발상지다. 성산 이씨가 한개에 입향할 당시 종택 자리여서 대초당(大草堂)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1721년(경종 1년) 처사 이이신(1689~1744년)이 매입하고 수리해 응와종택의 터전을 잡았다. 그의 아들 돈재 이석문이 사도세자를 애도하며 북비(北扉), 즉 북쪽으로 문짝을 내면서 '북비고택'으로도 불린다.
돈재의 아들 사미당 이민겸(1736~1807년) 대에 이미 북비채 이 외의 별도 건물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지만,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응와종택이 현재 규모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돈재의 손자 농서 이규진이 1845년(순조 21년)에 안채를 신축하고부터. 이어서 응와가 1845년(헌종 11년)에 기존 건물을 증축해 사랑채인 사미당을 낙성하고 폐허가 된 북비채를 중건해 큰 규모를 이뤘다. 현재 사랑채( 사랑채는 ㄱ자로 연결된 건물로, 헌종의 모후인 조대비 친정집을 그대로 본떠 지은 것으로 알려졌다), 안사랑채, 안채, 사당, 북비채, 대문채 등 6채로 구성돼 있으며, 북비채는 별도 담장으로 구획돼 있다.
북비
사진:내포문화연구원 이재실,박성환
글 : 박성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