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쿠데타를 주동한 인물이 여당의 후보로 나선 가운데 ‘민정이양’이라는 기묘한 대통령선거가 1963년 10월 15일 실시되었다. 제5대 대통령선거인 셈이다.
1963년 5월 27일 민주공화당의 개편대회에서 대통령후보로 지명된 박정희는 지명수락에 앞서 재야세력으로부터 공직을 사퇴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었다. 그는 8월 13일 지포리에서 가진 전역식에서 “이 나라에서 다시는 나와 같이 불행한 군인이 없도록 하자”면서 군복을 벗고 본격적으로 대통령선거전에 나섰다.
‘불행한 군인’ 들은 17년 뒤 12.12 사태와 5.17 신군부 쿠데타로 다시 나타났다.
야권의 사정은 복잡하기만 했다. 재야정당 통합을 위해 추진되었던 국민의 당이 결렬되면서 몇 갈래로 흩어진 야권은 9월 15일에 마감된 대통령후보 등록에서 민정당의 윤보선, 국민의 당의 허정, 자유민주당의 송요찬(옥중출마), 추풍회의 오재영, 정민회의 변영태, 신흥당의 장이석 등 도합 6명이 나섰다. 이들 중 허정과 송요찬이 막바지에 후보직을 사퇴함으로써 선거전은 대체로 여권의 박정희와 야권의 윤보선으로 압축되었다.
대통령후보의 난립상태를 보인 가운데 10ㆍ15 대통령 선거일이 공고되자 6대 1의 비율로 선거전은 개막되었다. 사전조직을 갖춰 리ㆍ동ㆍ반에 이르기까지 조직책을 갖고 있던 민주공화당의 방대한 전국조직과 고무신ㆍ밀가루 살포 등 막대한 자금력에 비해 야권은 난립상태에서 군정종식을 바라는 국민여론에 호소하는 대결이 시도되었다.
나는 당시 윤보선씨의 민정당과는 별도로 장면씨 계통의 민주당을 재건하여 그 당의 대변인으로 있었는데, 박순천 당수와 함께 선거를 통해 박정권의 부패와 독재의 해악을 통렬히 공격하는 동시에 윤보선씨를 지지하면서 전국을 누볐다. 나는 또 차기 국회의원선거 때까지 계속 당의 대변인으로서 정부의 허점을 가차없이 공박했다. 군사정권 당국자는 내가 무엇을 발표하고 무엇을 공격할 것이냐에 대해 신경을 날카롭게 곤두세우고 있었는데, 과장해서 말하면 그야말로 전전긍긍했던 모양이다. (주석 22)
초반에 각당 후보자들은 지방유세를 갖고 각종 공약을 제시하면서 국민의 지지를 호소했다. 그런데 박정희 후보가 9월 23일 방송연설을 통해 “이번 선거는 민족적 이념을 망각한 가식된 자유민주주의와 강렬한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의 사상적 대결”이라고 말한 데서 이른바 ‘사상논쟁’의 불이 붙었다.
바로 다음날 지방유세 도중에 전주에서 기자회견을 가진 윤보선 후보는 “여순반란사건의 관련자가 정부 안에 있으며 이번 선거야말로 이질적 사상과 민주사상의 대결”이라고 응수함으로써 사상논쟁이 본격화되었다. 윤 후보는 이어 “박정희 후보가 공산주의자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민주주의 신봉 여부가 의심스럽다” 라는 뜻을 박아 국민을 놀라게 했다.
같은 날 윤 후보의 찬조연사로 나선 윤재술 의원은 여수 유세에서 “이곳은 여순반란사건이란 핏자국이 묻은 곳이다. 그 사건을 만들어 낸 장본인들이 죽었으냐, 살았느냐? 살았다면 대한민국에서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를 여러분은 아는가, 모르는가? 여러분이 모른다면 저 종고산(鐘鼓山)은 알 것이다”라고 박정희를 공격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최고회의는 윤 후보의 전주발언을 국가안보의 차원에서 대처키로 하고, 공화당에서는 선거법위반으로 고발하면서, “윤씨가 대통령에 재직하고 있을 때부터 5ㆍ16사태를 미리 알고 있었다”고 폭로하여 ‘이중인격자’라고 비난하고 나섰다. 그러자 대통령후보를 낸 재야 6당은 박 후보의 등록취소를 청구하는 행정소송을 제기하는가 하면, 공명선거투쟁위원회 주최의 선거집회에서는 “간첩 황태성의 책략에 의해 공화당의 2원제 사전조직이 추진되었으며 밀봉교육이 실시되었다”고 주장하는 삐라가 뿌려져 사상논쟁을 부채질했다.
이 무렵 국민의 당 대통령 후보인 허정은 기자회견에서 “박정희 의장이 한일회담에서 양보한 대가로 일본 민간회사로부터 거액의 수표를 받았다는 설이 있다”고 폭로했으며, 민정당 기획위원회는 “박의장의 사상은 이질적이며 위험한 존재”라는 성명을 발표해 쌍방의 논쟁은 더욱 확산되어 갔다.
또한 9월 25일 열린 시국강연에서 자민당 대표 김준연은 1961년 5월 26일자 <타임>지의 박정희 프로필을 인용, “박소장은 전에 공인된 공산주의자였다. 그는 군반란(여순사건)을 조직하는 데 협력했다. 그래서 그는 이승만씨의 장교들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전향하여 반란군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고 사형을 면제받았다. 그는 지금 분명히 강력한 반공주의자다”라고 포문을 열었다.
이에 대해 박 후보는 기자회견에서 “여순반란사건에 관련됐다는 야당측 주장을 해명할 수 없느냐”는 물음에 “허무맹랑한 일이어서 해명할 필요조차 없으며 법이 가려낼 것”이라고 가볍게 응수했다. 그리고 여순사건 당시 진압작전을 지휘한 원용덕을 내세워 “박의장은 여순사건에 관련이 없으며 토벌작전 참모로서 공을 세웠다”고 상반된 주장을 펴도록 했다.
종반 과정에서 윤 후보를 구속하자는 일부 최고위원의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검찰이 ‘인지사건’으로 수사한다는 선에서 일단락되고, 선거전은 끝까지 정책대결 아닌 사상논쟁으로 전개되었다. 선거전은 종반에 접어들면서 야당 단일후보의 실현을 위해 허정 후보가 사퇴한 데 이어 송요찬도 사퇴함으로써 박ㆍ윤의 양자 대결로 압축되었다. 투표일을 5일 남겨둔 10월 10일 민정당의 찬조연사 김사만이 안동연설에서 “대구ㆍ부산에는 빨갱이가 많다”는 등 망언을 하여 선거분위기를 더욱 과열시켰다.
그러나 이와 같은 회오리바람을 몰고 온 사상논쟁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평온한 가운데 투표가 진행되었다. 선거분위기의 과열 탓이었는지 투표율은 84.99%로 높게 나타났다.
선거결과의 개표집계는 16일 밤 늦게까지 윤 후보가 리드하다가 17일 새벽부터 박 후보가 우세하여 15만 6천여 표의 차이로 박정희 후보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중앙정보부는 한때 윤 후보의 우세로 집계되자 그를 살해할 계획까지 세웠던 것으로 후일 알려졌다.
김대중은 선거과정에서 나타난 비생산적인 그리고 선거 결과에 치명상을 가져온 ‘사상논쟁’에 대해 비판하였다.
윤 후보와 박 후보의 선거전은 호각지세의 상태로 전개되었다. 선거전 전반부에는 윤 후보가 우세했지만, 그는 여기서 결정적인 실수를 했다. 박 후보를 공산당이라고 비난하고 나선 것이다. ‘여순반란사건’에 연루된 사람이 대통령선거에 출마한다며 공격의 포문을 열었던 것이다.
윤 후보는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세상사람 누구라도 윤 후보가 지목하는 사람이 바로 박정희 후보라는 건 뻔한 사실이었다. 박정희 후보가 소령 시절에 그 혐의로 군법회의에 기소된 것은 분명한 일이지만 그것은 과거의 일이었다. 공산당과 인연을 끊고, ‘반공’을 내걸고 있는 박 후보에게 그 비난은 걸맞지 않았다.
게다가 윤 후보가 상대를 ‘공산당이다’라고 비난하는 방식이 국민들에게 어두운 과거를 떠올리게 했다. 해방 후 미 군정 시절과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는 반대 세력을 탄압할 때 모두 공산당이라고 날조한 뒤 숙청시켰다. 윤 후보의 발언에서 만약 정권을 잡으면 반대파를 공산당으로 몰아서 제거하는, 과거의 공포정치가 재현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대다수 국민들은 공포감을 가졌던 것이다. (주석 23)
박정희는 서울ㆍ경기ㆍ강원ㆍ충청 등 중부 이북에서는 모두 패하고 연고지인 경상도 그리고 호남에서 이겨 15만여 표 차이로 승리했다.
박 후보는 전라도에서는 윤 후보보다 125만 표나 앞섰다.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전라도민의 표 덕분이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박정희씨는 집권하자마자 전라도 배제의 지역차별 정책을 쓰기 시작했다. 배은망덕한 일이었다. 박정희씨의 그 지역차별 정책이 오늘날 한국사회의 최대 걸림돌인 지역대립과 분열의 원인이 되었다. (주석 24)
주석
22) <행동하는 양심으로>, 88쪽.
23) <김대중자서전(1)>,173~174쪽.
24) 앞의 책, 174쪽.